대기업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라면 잘 짜인 근무 인프라일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인사조직실 노사팀장 이정일 박사는 “근무 인프라란 첫째 근무 환경, 둘째 조직의 지원, 셋째 사내외 관계, 즉 인맥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근무 환경이란 실내 공기, 냉난방 시설, 사무용품, 식당이나 휴게소 등 말 그대로 직장 생활의 ‘배경’이 되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저렴한 주차장, 직원 전용 헬스클럽, 자녀 학자금과 경조사비 지원, 회사 보증 대출, 자료실을 꽉 채운 신문·잡지들, 깨끗한 사무실, 휴가철 콘도 이용권, 늘 준비되어 있는 생수….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것들이 막상 없어지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현대그룹에 있다 최근 동료가 창업한 회사의 영업 담당 이사로 영입된 조형수(41) 씨는 “퇴직한 사람끼리 만나면 대기업 연봉 3600만원이 벤처 6000만원이랑 맞먹는다는 얘기를 나누곤 한다”고 전한다. 대기업에서라면 일주일에 두 세 번은 회사 식당에서 뚝딱 해치워도 될 점심 식사를 벤처에선 끼니마다 부하 직원들 밥값까지 내가며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을 만나도 얻어먹을 일보다는 살 일이 더 많고, 과거 회사에서 지급되던 소소한 물품이며 편의 사항들도 아예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생활이 쪼그라든 것 같아요. 주머니에서 돈 나갈 때마다 자꾸 아까운 생각이 들고. 예전에는 월급이야 몽땅 아내 손에 들어갔지만 야근·특근비며 부정기 보너스 따위로 딴주머니 차는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불가능하죠. 연봉이 2000만원이나 늘었다고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버리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조씨는 비교적 상황이 좋은 경우다. 어쨌든 연봉이 오르질 않았는가. 대다수 벤처 기업의 연봉은 밖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많지가 않다. 자금 사정이 특별히 좋은 업체나 일부 최상급 전문가들을 제외하곤 대기업, 같은 연차 직원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혹은 그보다 좀 낮은 선에 머물러 있다. 스톡옵션이나 우리 사주로 보상을 받는다지만 증시가 요즘 같아선 그 역시 ‘꿈’에 그칠 개연성이 높다. 하물며 ‘100개 중 3개만 살아남는다’는 벤처생존공식이 점차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요즘에야….
조직의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한 점은 벤처 이직자들이 겪는 또 다른 고통이다. 삼성SDS 퇴직 후 벤처 인큐베이팅 업체 팀장으로 일하는 이승원(32) 씨는 “누군가 내 일을 덜어주리라는 기대는 애시당초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한다.
“벤처에는 기존 판매망도, 영업 노하우도, 각종 자료며 분야별 전문가도, 비서도 없습니다. 총무부나 관리부 같은 지원 부서 또는 담당자가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자신이 알아서 해야죠. 그런 상황을 달게 받아들일 수 없다면 벤처맨으로는 부적격이라 해야 할 겁니다.”
직장인이면 당연히 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의료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 하지만 회사에 따라 그런 것들이 있는지도, 혹은 알면서도 어떻게 가입하는 지 몰라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사장이 기업체에 근무한 경력이 없거나 기술 전문 인력이어서 ‘사무’ 쪽에는 아예 관심도, 지식도 없는 경우다. “연구할 시간도 부족한 데 보험 가입하겠다고 몇 날 며칠 뛰어다닐 정신이 어디 있느냐”는 변명도 한다. 어처구니없어 보이지만, 한 사람이 대기업 2,3명 몫의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벤처기업임을 생각하면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일만도 아니다.
LG그룹 출신인 워프미디어 이수봉(41) 사장은 “대기업 시절 다닌 해외 출장 횟수가 60번을 넘는다. 한번 나갈 때마다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인연도 맺을 수 있었다. 넓은 세상을 경험케 해주고 다양한 자기 학습 기회를 제공해준 전 직장에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회사 돈으로 받는 특별·장기 교육, 출장과 지사 근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학습자료며 전문가들…. 웬만한 벤처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신화’와 사기, 그 위태로운 경계
대기업은 또한 직원들에게 ‘나보다 나은’ 사내외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제공한다. 명함이 주는 힘일 뿐 아니라, 얽히고 설킨 조직의 방대함으로 인해 생겨나는 시너지 효과이기도 하다. 대기업에서는 선배·동료들이 닦아놓은 인맥이며 회사 차원의 공적·사적 관계들이 곧 내 것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한번 계단을 밟고 내려오면 그 ‘급’ 이상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아진다. 그때부터는 지금까지 쌓아온 인맥을 파먹고 살아가는 형국이 연출되기 십상이다.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한 인터넷업체 기획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양모(35)씨는 “벤처 생활 7개월만에 내 지나온 삶의 ‘바닥’이 다 드러난 느낌”이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분명 조직이 나를 지켜준 측면이 없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젠 내가 조직의 방패막이가 돼야 해요. 할 일은 많은데 지원사격은 없다 보니 일 하나하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다 쏟아부어야죠. 지식 체력 인맥, 비단 그런 것들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큰 조직에선 적당히 숨겨가며 살 수 있었던 제 인간적인 약점, 단점들까지 그 과정에 다 공개돼버리고 마는 거지요.”
때로는 ‘사기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괴롭기도 하다.
“벤처라는 게 잘 되면 일확천금, 잘못되면 사기잖아요. 그럴 듯한 아이디어로 투자자는 끌어 모았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생각대로 안되더라, 그러면 그게 뭡니까, 바로 사기지요. 물론 벤처 투자라는 것이 워낙 그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될지 안될지 모르는 일을 ‘된다’ ‘됩니다’하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러한 자괴감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가 똑 부러지게 내세울 만한 기술이나 비즈니스 모델이 없거나, 장부 상 매출 외에는 실질적인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일 때 더욱 커진다.
라스21 우광식 이사는 “대기업 출신들은 의외로 순진한 데가 있다”고 말한다.
“옛 동료 중에 벤처로 옮겼다 견디지 못하고 다른 직장을 찾거나 아예 창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이유를 물어보면 십중팔구 ‘뭘 몰라 회사를 잘못 골랐다’고 해요. 그쪽에서 제시한 자료만 보고 덜컥 결정해버린 거죠.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며 말이 아닌 거예요. 자기 혼자 아무리 똑똑하면 뭐합니까. 주변에서 받쳐주지 못하고, 사업계획서는 그야말로 ‘계획서’일 뿐인데….”
부도덕하고 자질 부족한 사장은 또 다른 갈등의 원인이다.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다, 기술 개발은 뒷전이고 머니 게임에만 골몰한다, 상습적인 매출 조작 등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 ‘더욱 인간적인 직장 문화’를 꿈꾸며 이직을 감행한 이들에게 일부 사장들의 이같은 행태는 실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벤처인가 중소기업인가
‘벤처 문화’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흔히 경직되고 권위적인 대기업 문화에 비해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능력에 따른 보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의 좋은 뜻으로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벤처의 조직 문화는 엄밀히 말해 ‘벤처형’이라기보다 ‘중소기업형’에 가깝다는 것이 실제 내부 사정을 경험한 사람들의 전언이다.
벤처기업 S사에는 이모(37)씨 외에 3명의 부장이 있다. 어느날 무심코 다른 부장의 연봉 액수를 들은 이씨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연봉이 다른 부장들 것보다 400만원이나 낮았던 것이다. 으레 같으려니 하고 연봉을 공개했던 사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씨만 연봉이 낮을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부장 4명 중 이씨의 경력이 가장 뛰어나며, 업무에 있어서도 사실상 회사를 이끌어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은 사내외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다음날 연봉 차별의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이씨에게 사장은 황당한 이야기를 했다. “자네 나이가 (다른 부장들보다) 한 살 어리지 않은가.” 경력도 당연히 1년 짧지 않으냐는 얘기였는데, 사실 초등학교를 7살에 입학한데다 병역 면제로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씨의 경력은 다른 부장들에 비해 2,3년 이상 많은 상태였다.
비슷한 사례는 다른 벤처기업에서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다. 명확한 기준이 없이 어림짐작, 사장과의 친분, 영입할 때의 상황, 회사의 필요에 따라 호봉과 연봉이 제멋대로 책정된다. 업무 분담이 제대로 되지 않아 특정한 사람에게 지나친 책임이 돌아가기도 한다.
더 걱정스러운 건 그러면서 오히려 은근히 권위적이라는 사실이다. 과거의 1인 지배형 중소기업처럼 사장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는 데다, 또 그 사장이 조직 생활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일 경우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면 나름의 ‘체계’를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직 생활에는 익숙하지만, 조직의 운영에 대해선 무지한 사장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입니다. 과거 (대기업) 방식에서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는 거지요. 서류가 많아지고, 절박한 이유 없이 직원 수가 늘어나며, 사장 자신도 급속도로 권위적이 됩니다. 경험 적은 사장의 무모한 추진력에 브레이크를 걸려다가 오히려 회사에서 밀려나는 임원들이 생기는 것도 비슷한 이유입니다. 직무는 벤처형인데 조직 관리나 갈등 처리법은 중소기업식이라고나 할까요.”
삼성경제연구소 이정일 박사의 설명이다.
최근 일부 벤처기업에서는 스톡옵션 등 보상 체계의 불합리성을 이유로 직원들이 집단 사표를 내거나, 급속도로 커진 조직 내에서 계파간 갈등이 일어나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몰아내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