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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vs 페라리

남성의 로망, 가장 탐나는 슈퍼카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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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vs 페라리
고성능 스포츠카의 범주를 한 단계 뛰어넘은 초고성능이면서 디자인과 품질이 최상급이고 희소가치까지 있는 고가의 차를 흔히 ‘슈퍼카(supercar)’라고 한다. 슈퍼카는 경주용 차 이상의 성능(평균 시속 300㎞ 이상)을 갖췄지만 일반 도로를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슈퍼카는 기본적으로 5P(Power, Performance, Proportion, Passion, Price)를 충족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을 갖췄다고 모두 슈퍼카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흥분(Excitation)이다. 슈퍼카로 불리려면 타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를 흥분시키고 감동으로 몰아가는 힘이 있어야 한다. 서킷을 질주하거나 우연히 골목길에서 마주쳐도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일반 자동차는 갖지 못한 슈퍼카만의 매력이다. 세상의 수많은 남성이 이 매력을 이기지 못하고 슈퍼카를 갖거나 일생에 단 한 번이라도 타보기를 꿈꾼다. 지구상에서 가장 섹시한 축구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데이비드 베컴처럼.

강력한 성능과 강렬한 원색,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모든 스포츠카를 압도하는 이탈리아의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는 슈퍼카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면서 영원한 라이벌이다. 슈퍼카에는 맥라렌F1이나 파가니존다 등도 있지만 두 브랜드에 필적해 명함을 내밀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자동차 역사 가운데 두 브랜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워온 길을 그대로 슈퍼카의 역사라고 보면 된다.

스피드에 목숨 건 엔초 페라리

두 브랜드의 대결은 설립자인 엔초 페라리(Enzo Ferrari·1898~1988)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cio Lamborghini·1916~1993)에서 시작된다. 1898년 2월 18일 이탈리아 모데나 지방의 철공소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엔초 페라리는 10세 때 아버지와 형 알프레도를 따라 간 볼로냐의 에밀리아 서킷에서 처음 자동차경주를 보게 된다. 펠리스 나자로가 우승한 그 대회를 통해 어린 엔초는 자동차경주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이후 13세에 운전을 처음 배운 엔초는 마침 아버지가 자동차 정비소를 차려 차와 자동차경주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던 엔초는 시와 철학, 역사를 탐독했고 스포츠에도 재능을 보여 16세에 스포츠신문에 축구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6년 아버지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데 이어 형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자신마저 군에 입대하면서 자동차와 멀어진다. 그러나 혹독한 군 생활 도중 스파뇨라는 독감에 걸려 두 번의 수술 끝에 제대하게 된다.

이후 엔초는 당시 세계 자동차경주를 지배하던 피아트(Fiat) 사에 지원했으나 떨어지고 트럭회사에 운전사로 취직한다. 1919년 선수들 모임에서 우연히 A급 선수였던 피아트 팀의 페리체 나자로를 만난 엔초는 그의 소개로 스포츠카 제작사인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에 테스트 드라이버로 취직한다. 같은 해 CMN의 경주팀장이던 시보치에게서 운전 기술을 인정받은 엔초는 파르마-베르체토(Parma-Berceto) 경주에 출전해 11위를 차지하면서 카레이서로 데뷔한다. 이어 가장 혹독한 경주이자 중앙 진출 무대인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 경주에 출전해 9위에 입상하면서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1920년 CMN이 적자로 파산하자 알파 로메오(Alfa Romeo) 팀으로 자리를 옮겨 타르가 플로리오 경주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 선수로서의 엔초 시대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A급 선수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1923년 어느 날 지방의 소규모 경주에서 우승한 그를 지켜본 바라카(Baracca) 백작 부부는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들 프란체스코가 생전에 아끼던 뛰어오르는 말의 모습을 담은 배지를 엔초에게 선물했다. 그 배지가 바로 지금까지 페라리를 상징하는 엠블럼이 됐다.

당시는 피아트가 경주를 장악하던 시대였는데 엔초는 피아트를 따라잡기 위해 피아트의 기술자와 선수들을 스카우트한다. 덕분에 팀의 전력은 막강해졌지만 소속사인 알파 로메오는 자금사정이 나빠져 1925년 은행으로 넘어간다. 1929년 엔초는 경주 팀에서 나와 알파 로메오의 판매점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스쿠데리아(Scuderia) 페라리’라는 경주 팀을 만든다. 이 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랑프리 경주 팀으로 지금까지 세계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페라리 엠블럼의 뛰어오르는 말의 양옆에 써 있는 ‘S’와 ‘F’글자는 이 팀을 상징한다.

자신의 팀과 함께 이탈리아의 모든 경주를 석권하면서 최고의 선수로 커가던 엔초는 1932년 아들 디노(Dino)가 태어나면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경주 팀 관리와 경주용 자동차 제작에만 몰두한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왼쪽)와 페라리 창업자 엔초 페라리.

이후에도 엔초의 경주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에서 지원한 차량으로 F1 경기에 출전해 승승장구하지만, 알파 로메오가 스쿠데리아를 흡수한 뒤 자신을 내쫓으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엔초는 1938년 알파 로메오와 결별을 선언한다.

직접 경주차 개발에 나선 엔초는 후원자에게 의존하는 경주차만으로는 회사를 경영하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하고, 1939년 일반도로용 스포츠카 생산을 위한 회사 오토 바비오 코스트루치오니(Auto Avio Costruzion)를 세워 이듬해 ‘티포 815’를 첫 작품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1940년 밀레 말리아 레이스에 출전한 1.5L 가솔린 엔진의 이 자동차는 결국 엔진 결함으로 완주에 실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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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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