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용 총리에서 실세 총리로
자민당은 9월에 전당대회를 열어 후임총재를 선출할 예정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원래 자진 사퇴한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총리의 잔여임기만을 채우도록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민당 집행부는 7월29일 참의원 선거가 끝난 뒤 갑자기 8월9일까지 총재선거에 나설 인사의 입후보를 받겠다고 밝혔다. 후보자가 없으면 이튿날인 10일 전당대회 대신 중·참(衆·參) 양원 소속 의원총회를 열어 고이즈미 총재를 재추대 하기로 결정했다. 이 시나리오는 누가 보더라도 고이즈미 총재를 재선출하기 위한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불과 4개월 전만 해도 총재선거에 나서 한 표를 호소했던 고이즈미 총리를 이처럼 ‘거물’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모리 전총리가 그대로 총리직을 맡고 있었다면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믿거나 전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때문에 자민당에서는 공천을 받지 않고 무소속 출마를 고려하거나 모리 총리와 사진을 찍지 않으려는 입후보 예정자가 나올 정도였다. 모리 총리의 인기가 지지율 9%까지 떨어지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모리 총리는 끝까지 자리에 연연했으나 결국은 타의반 자의반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를 차고앉은 것이 고이즈미 총리였다. 그가 총재선거에 나섰을 때만해도 총재는 당내 최대파벌인 하시모토(橋本)파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총리가 유력했다.
고이즈미 후보는 후생상과 우정상은 지냈으나 대장상이나 외상 등 주요 포스트를 맡아본 적이 없다. 간사장(사무총장)이나 정조회장(정책위장) 등 당직도 거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시모토 후보에게 압승을 거뒀다. 변화를 갈망하는 자민당원들이 그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고이즈미를 보고 투표했다”
‘고이즈미 돌풍’이 불면서 비관적이었던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참의원 선거용 총리가 참의원 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뒀으므로 계속해서 총리를 맡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였다. 그래서 자민당 집행부는 총재선거를 앞당긴 것이다. 9월 총재선거에서 권토중래를 노리던 비주류파도 대세를 어쩌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참의원 선거결과를 보면 그가 ‘자민당의 구세주’가 됐음을 실감할 수 있다. 자민당은 이 선거에서 교체대상 의석 121석 중 64석을 차지했다. 기존의석이 61석이었으므로 별로 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3년 전 같은 선거에서 자민당이 44석밖에 차지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승리였다. 하시모토 당시 총리는 선거패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했다.
더욱이 흥미 있는 것은 이번에 자민당 후보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의 30% 이상이 자민당의 정책이나 후보개인의 능력보다는 고이즈미 개혁노선을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는 점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승리의 견인차였다. 대부분의 후보가 고이즈미 후보의 인기에 무임승차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야당은 한결같이 ‘고이즈미 돌풍’에 고전했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고이즈미 총리 덕분에 참의원 선거에서도 승리할 것이라는 것은 6월에 치러진 도쿄도(東京都)의회선거에서 이미 예견됐었다. 도의회선거에서 55명의 자민당 후보 중에서는 53명이, 26명의 공명당 후보는 전원이 당선되는 등 자민당과 공명당 연립정권이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도의회선거에서 승리한 뒤 “자민당이 도심부에서 약하다는 설은 근거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내각의 인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요미우리(讀賣) 신문이 5월에 실시한 전화여론조사에 따르면 고이즈미 내각의 지지율은 87.1%로 지금까지 최고였던 1993년 8월 호소카와(細川)내각의 71.9%를 크게 웃돌았다. 또 도쿄신문과 교토통신 조사에서도 각각 86.3%를 기록했다. 한 방송사 조사에서는 90%을 넘기도 했다.
요미우리 신문 조사에 따르면 고이즈미 내각을 지지하는 이유로 “정치이념이 명확하다”를 꼽은 응답자가 47%로 가장 많았다. 그리고 “지도력이 있다”(21%), “신뢰할 수 있다”(19%)의 순이었다. 고이즈미 정권이 ‘얼마 동안 계속됐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가능하면 오래”가 47%, “2∼3년”이 37%로 장기집권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고이즈미 내각의 인기는 최근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역대 내각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편이다.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국민들의 ‘이상열기’는 예상치 못한 현상을 몰고 왔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적 논객인 간 나오토(菅直人) 간사장이 5월 중의원 예산위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상대로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와 집단적 자위권 문제 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 광경은 공영방송인 NHK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 됐다.
그러자 간 간사장의 의원회관 사무실에는 100통 이상의 전화가 걸려왔다. 90%가 항의전화였다. 반수 이상은 흥분한 상태에서 “왜 괴롭히느냐”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하지 말라”고 다그쳤다. 이 때문에 “야당은 원래 여당을 견제하는 것이 일인데 그것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한 발상이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가 되었다.
‘고이즈미 캐릭터’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도쿄 나카타초(永田町) 자민당사 1층 매점에는 고이즈미 캐릭터 상품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생길 정도다. 현재 팔고 있는 캐릭터 상품은 고이즈미 총리의 인형이 달린 휴대전화기 끈(700엔), 티셔츠(1200엔), 인쇄한 휘호(1000엔), 전화카드 등 네 종류.
판매시작 후 나흘 동안에 휴대전화기 끈이 1만7500개, 티셔츠 7800장, 전화카드 1350장이 팔려나갔다. 이 상품들은 국회의사당을 찾는 관광객들이 고이즈미 총리의 캐릭터 상품을 찾는데 착안해 만들어졌는데, 지금도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다.
그가 만든 ‘메일 매거진’은 며칠만에 가입자가 200만명을 넘어섰다. 메일 매거진은 그가 총리가 된 직후에 약속한 것이다. 매주 한 번씩 메일을 통해 그의 개인적 소감이나 정부의 방침 등을 가입자에게 전해주고 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은 “세계에서 가장 구독자수가 많은 잡지”라고 자랑하고 있다. 메일 매거진에 이처럼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얼굴 사진이 들어간 자민당 선전포스터와 티셔츠는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해 참의원 선거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참의원 선거에서 사이타마(埼玉)현에 출마했던 한 자민당 후보의 사무실에는 후보의 포스터는 한 장밖에 붙어있지 않고 온통 고이즈미 총리와 자민당 포스터 일색이었다. 물론 이 후보도 여유 있게 당선했다.
무엇이 ‘고이즈미 열기’를 몰고 온 것일까. 자민당 내부 사정과 국민들의 기대,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성격 등 세 가지 면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민당은 1955년 이후 몇 년을 빼고는 계속 정권을 유지해 왔다. 그러면서 철저히 파벌위주의 정치를 펼쳐 왔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의원을 거느리고 있는 파벌 총수가 어깨에 힘을 줄 수 있었다. 아무리 똑똑한 정치가라도 파벌에 속하지 않으면 정부의 주요 포스트를 맡을 수 없다. 대성하기 위해서는 파벌 총수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구조다. 여기에 돌을 던진 것이 ‘고이즈미 후보’였다.
고이즈미 후보는 스스로 파벌을 뛰쳐나왔다. 모리(森)파 회장까지 맡았던 인물이 입후보 직전에 파벌을 이탈했다고 해서 뭐 그리 대수로우냐는 비아냥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자세는 표를 쥔 자민당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는 철저히 자민당을 비판했다. 몸담고 있는 당을 비판하는 것은 자칫하면 자기 목을 조를 수 있는 극약처방이다. 그러나 그는 “자민당을 개혁하지 않으면 일본의 개혁은 없다”고 외쳤고, 이 호소는 먹혀 들어갔다.
결국 고이즈미 후보는 자민당원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준 것이다. 고이즈미 후보를 총재로 뽑은 자민당원들은 “어디 한번 자민당을 뜯어고쳐 보라”고 주문한 셈이다.
국민들의 기대는 경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거품경제 붕괴 후 10년간 일본 경제가 회복하지 못하고 침체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경제성장은 둔화되고 주가는 떨어지고 있다. 개인소비도 늘고 있지 않다. 일본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공공사업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부었지만 효과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국채만 늘고 있을 뿐이다. 이럴 때 고이즈미 총리가 등장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고이즈미 총리에게 쏟아졌고, 이러한 분위기가 ‘이상열기’를 낳았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고이즈미 총리에게 거는 기대의 1순위는 언제나 경기회복이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잇따라 터진 정치 스캔들도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업계 등으로부터 부당한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이 구속되면서 그의 ‘클린 이미지’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파벌의 보스일 때도 그는 돈으로 소속의원들을 거느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업계에 무리하게 손을 벌릴 필요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보스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헨진(變人)’ 고이즈미의 용기
무엇보다도 그의 인기비결은 그 자신이다. 그의 별명은 ‘헨진(變人·이상한 사람)’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 별명을 ‘정치가로서의 헨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치판에서는 이상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일반인들과 비교하면 평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자기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치가들이 잘못됐다는 주장이다. 참의원 선거 때 만든 광고방송의 컨셉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가로서는 하기 힘든 말도 마구 해댄다. “정부가 오히려 민간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는 국회에서 지론인 우정사업의 민영화를 주장하며 이 발언을 했다. 우정사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민간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자민당 내에서 이런 발언을 한 사람은 없었다. 이런 ‘용기’가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또한 그는 남의 의견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얘기한다. 지금까지 역대 총리들은 국회답변을 할 때 관료들이 써주는 것을 그대로 읽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야당 당수들과의 토론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개 야당당수들이 공격을 하면 총리는 수세에 몰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에게서는 오히려 역전되는 경우가 많다. 국회의 주요 회의는 공영방송인 NHK를 통해 생중계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은 안방으로 파고든다. 국회 생중계에 관심이 없던 국민들이 TV 앞에 모여든 것은 고이즈미 총리가 등장하고 난 뒤의 일이다.
그는 매스컴도 절묘하게 이용한다. 모리 전 총리는 기자들과 싸운 적이 많았다. 냉전을 벌인 뒤 며칠 동안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중요한 현안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똑 부러지게 얘기한다. 별로 길지도 않다. 핵심만을 짚어 이야기하기 때문에 국민들은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 들을 수 있다.
때문에 고이즈미 총리의 능력에 회의를 품고 있는 일부 기자들은, “그의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1시간 정도 계속해서 말을 시켜봐야 할 것 같다”는 농담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의 독특한 취향도 한몫하고 있다. 그는 클래식부터 가요, 팝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악을 좋아한다. 총리가 되기 전에는 음악회도 자주 관람했다. 이를 안 외국기자가 7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열렸린 선진 8개국 정상회담이 끝난 뒤 고이즈미 총리에게 “이번 회담을 음악에 비유한다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이런 인간적인 면이 인기를 끄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뚝심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외상의 ‘항명’을 진압한 일이다. 다나카 외상은 사실 고이즈미 총리보다 훨씬 인기가 높은 인물이다. 그녀는 수년간 모든 여론조사에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와 함께 총리감 1,2위를 다퉈 왔다.
그때 고이즈미 총리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그녀는 총재선거에서 고이즈미 후보를 지지했고, 그녀의 지원이 고이즈미의 총재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헨진’이라는 별명을 지은 것도 그녀였다.
때문에 고이즈미 정권을 ‘고이즈미-다나카 연립내각’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고이즈미 총리보다 더 높은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고, 고이즈미 총리보다 더 ‘헨진’인 그녀가 겁낼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했다.
그녀는 실제로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외무성 내에 ‘기밀비 유용사건’ 등 오직(汚職)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차관인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외무성의 최대현안으로 떠올랐다. 고이즈미 총리는 오직사건이 발생하자 사건 당시 차관 자리에 있던 전·현직 차관 네 명을 전부 경질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다나카 외상은 그중 한 명은 계속해서 쓰겠다고 버텼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언론이 그녀의 ‘항명’을 문제삼고 나선 것이다. 총리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은 각료로서 있을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버텼다. 하지만 결국 총리관저에 들어가 백기를 들고 항복해야 했다. 더 까불면 경질할 수도 있다는 사인을 받고서였다. 다나카 외상은 충격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총리의 뚝심을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동의 모든 책임은 다나카 외상이 져야 했고, 둘 사이는 급격히 멀어졌다.
고이즈미 총리는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국을 누비며 지원유세를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수천 명의 인파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대통령선거에 익숙한 한국 유권자들에게 수천 명은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 선거풍토에서 수천 명이 모이는 것은 대단한 성공이다.
청중 수 외에도 유세장에 모인 인파들은 예전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가장 큰 특징은 젊은이와 여성이 많다는 점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연설을 하기 전에 “여기에는 유권자도 아닌 사람들이 많이 와 있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을 두고 한 말이다.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고이즈미 총리의 연설을 들으러 나온 곳도 꽤 있었다. 이들은 고이즈미 총리를 ‘인기스타’로 여기고 나온 것이었다. 선거운동의 도사인 지방의 당 간부들도 “고이즈미 인기가 이처럼 높을 줄은 정말 몰랐다”며 함박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고이즈미 앞에 놓인 암초들
그렇다면 고이즈미 총리의 앞날은 과연 탄탄대로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그의 인기 원천은 곧 위기의 불씨이기도 하다.
당내 사정부터 살펴보자. 그는 당내에서는 소수파다. 국민적 인기를 업고 총재가 되긴 했으나 최대파벌이자 비주류인 하시모토파가 건재하고 있다. 참의원에서 하시모토파는 23명이나 당선돼 중·참 양원의 파벌세력은 2명 늘어나 103명이 됐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친정이라고 할 수 있는 모리파는 60석에서 55석으로 줄었다.
하시모토파의 숙원은 물론 정권을 재탈환하는 일이다. 지금은 납작 엎드려 있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실수를 해서 인기가 떨어지면, 총재와 총리 자리를 찾아오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시모토파는 빈틈을 만들기 위해 그를 흔드는 공작을 할 수도 있다.
고이즈미 총리와 당내 비주류가 부딪칠 만한 몇 가지 시한폭탄이 있다. 우선은 공공사업에 관한 시각차다. 공공사업은 ‘지방에서 강하다’는 자민당의원들이 표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공공사업비를 10%나 삭감하려 하고 있다. ‘경기부양보다 구조개혁이 우선이다’는 소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특정재원’이라고 해서 도로를 건설하는 데만 쓸 수 있는 특별회계가 있다. 이것은 자민당 의원들이 표를 얻는 젖줄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이 예산을 도시환경정비나 환경보호 등 다른 곳에 전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공언했다.
때문에 참의원 선거에서 ‘고이즈미 인기’를 이용하려는 후보들은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을 지지한다”고 말하면서도, “공공사업이나 도로특정재원은 손대지 못하도록 막겠다”고 호소하는 촌극을 빚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이를 강행하면 저항세력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157개의 특수법인이나 영리법인도 모두 민영화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공공부문 개혁이다. 그러자 벌써부터 저항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각 성청의 이해와 퇴직관료의 노후가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 행정개혁상에게 “샌드백이 되겠지만 힘을 내라”고 주문했다. 이시하라 행정개혁상은 9월경 “이 법인들의 처리방향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그때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지방 자치단체의 눈길도 곱지 않다. 고이즈미 총리가 지자체의 재정자립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주는 지방교부세나 보조금만 쳐다볼 것이 아니라 지자체가 먼저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래도 안되면 국가에 손을 벌리라는 주문이다. 이같은 태도에 대해 지방에서는 “지방을 버리고 도시만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냐”며 의혹과 불안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중의원 해산’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사용할 수 있다. 내 정책에 반대하면 중의원을 해산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보자고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최악의 경우 자민단 분당(分黨)으로 이어져 정계개편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제 국민들에게 ‘입’이 아니라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할 때가 됐다는 것도 그에게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고이즈미 총리는 ‘성역 없는 개혁’과 함께 ‘고통이 수반되는 개혁’이라는 말을 자주한다. 즉 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국민은 이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실업이나 기업 도산, 그리고 세금이나 개인부담의 증가를 뜻한다.
앞으로 그가 처리해야할 가장 큰 일은 부실채권 정리와 금융개혁, 규제완화 등이다. 이를 통해 경기를 회복시키겠다는 것이 그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한방적(漢方的) 접근’이다. 일부에서는 이 방법에 대해 불만이 많다. 당장 경기부양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꿈쩍도 않고 있다. ‘구조개혁 없이 경기회복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지금까지는 국민들이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과연 기다려 줄지, 그리고 개혁으로 인한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올 때에도 이를 용인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개인적인 매력도 양날의 칼이다. 그는 총리가 되자마자 헌법개정과 집단적 자위권 보장,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와 총리 직선제 등을 들고 나왔다. 지금까지는 소신을 갖고 있더라도 소신이 당장 이뤄지리라고 믿었던 총리는 없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실제로 의욕을 갖고 덤벼들었다. 한국으로서는 ‘매파’ 총리가 이웃이 된 것이다. 그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 지의 여부는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총리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안에 의욕을 보이는 고이즈미의 정신적·심리적 상태는 상당히 ‘우익’에 가까운 것 같다. 물론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그가 지향하는 국가상은 한국의 처지에서 볼 때 그리 달가운 것은 아니다.
이런 점은 외교에서 벌써 문제를 노정하고 있다. 그는 한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총리가 되고 나서도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 한일 양국은 격년으로 상대방 국가에서 정상회담을 열기로 약속해 놓고 있는데, 올해는 일본 총리가 한국을 방문할 차례다. 하지만 교과서·꽁치·야스쿠니 신사 문제로 그는 한국 방문을 입에 올리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1998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당시 총리와 맺은 ‘한일 공동 파트너십 선언’은 한일 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파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한일 관계는 악화됐다. 현재 한일간에 부상한 현안들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는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의 높은 인기와는 달리 외교문제에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적인 고이즈미의 인기
물론 그도 몇 번 “한국과 중국은 일본에 매우 중요한 이웃이고, 두 나라와의 우호관계는 일본의 국익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가 성의를 보인 적은 없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문제가 되고 일본 국내에서도 최대 정치쟁점으로 부상하자 그는, “일단 참배를 한 뒤에 한국 및 중국과 어떤 화해방안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일단 불에다 기름을 부은 뒤 소화방법을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한국은 그에게 방한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도 한국 방문에 적극적으로 응해야 한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의 인기는 상당히 ‘이중성’을 띠고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보통 개혁이라고 하면 미래 지향적이고, 세계 지향적이다. 그러나 그에게 인기를 안겨다 주는 것은 대부분 과거 지향적인 데다 국내용이 많다.
집단적 자위권 확보나 헌법개정 문제 등은 일본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돌려놓겠다는 발상이다. 일부 반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세력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웃국가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딴판이다. 그가 아시아의 지도자를 넘어 세계의 지도자가 되려면 사안을 좀더 국제적 시각에서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가 이성적으로 의사를 결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는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성격이다. 정치가로서는 좋은 덕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총리가 되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 있고,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생긴다. 그것이 국익에 합치하는 일이라면 개인의 소신은 잠시 유보해야 한다.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운신의 폭이 좁아진 민주당
그의 등장으로 야당의 활력이 사라진 것도 문제점으로 등장했다. 모리 전총리 시절만 하더라도 제1야당인 민주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공명·보수 등 보수 연립 3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여세를 몰아 중의원을 해산한 뒤 다른 야당과의 공조로 과반수를 확보한 후 정권을 장악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등장으로 이 구상은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고이즈미 총리가 있는 한 다음 중의원 선거에서도 야당은 고전할 것이다. ‘고이즈미 개혁’의 성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정권교체는 현재로서는 그림의 떡이다.
민주당은 더 이상 ‘개혁구호’가 상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었다. 민주당은 “자민당의 고인 정치를 바꿈으로써 일본을 바꿔 보자”고 호소해왔다. 그런데 이 구호를 고이즈미 총리가 몽땅 가져가 버린 것이다. 자민당과의 차별성이 사라지면서 당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는 형편이다.
가바시마 이쿠오(蒲島郁夫) 도쿄대 교수는 “일본 정치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자민당의 독주로 인해, 민주당이 자신을 잃고 나아가서는 분열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민당의 대체 정당으로서 존속해서, 유권자에게 정권교체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민주당의 역할이다.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무당파층의 상당수가 자민당에 흘러갔는데도 민주당이 26석(기존의석 22석)이나 차지한 데는 그런 의미가 포함돼 있다. 원래 당내 소수파였던 고이즈미씨의 도전을 유권자가 버리지 않았듯, 유권자들은 민주당의 도전도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진수는 경쟁이므로 민주당의 분발이 필요하다.”
야당을 격려해야 할 만큼 자민당은 강해졌고, 그 중심에는 고이즈미 총리가 있다. 일본 국민은 현재 고이즈미 총리에게 커다란 도박을 걸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