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천의 얼굴을 가진 ‘위인’ 무함마드

  • 정수일

    입력2005-03-24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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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무함마드는 타고난 성실성으로 15세 연상의 돈 많은 과부와 결혼했다. 그리고 15년간 긴 명상을 통해 알라의 뜻을 전하는 성사(聖使)가 되었다. 이후 종교 지도자이자 정치가 군사지휘관 외교관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며 이슬람 세계를 통일했다. 보통사람으로서 신의 경지에 이른 한 종교 창시자의 일생을 들여다본다.
    천의 얼굴을 가진 ‘위인’ 무함마드
    10여 년 전 영국 작가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가 세상을 뒤흔드는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걸작품’은 출시되자마자 50만 파운드란 전대미문의 거액으로 판권이 팔려나갔다. 이에 대해 이란의 호메이니는 궐석재판에서 루시디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거금을 걸어 루시디를 현상 수배했다. 호메이니가 루시디에게 사형을 언도한 이유는 루시디가 이슬람의 교조(敎祖)인 무함마드를 모독했기 때문이다.

    루시디는 작품에서 마왕(魔王)의 뜻을 가진 스코틀랜드어 ‘마하운드’(mahound)라는 단어로 무함마드를 희화화(戱畵化)하였다. 그는 발음의 상사성으로 보아 이 말이 아랍어의 무함마드(mohammad)에서 와전된 것이라고 풀이하면서 은근히 무함마드를 주술사나 악마에 빗댔던 것이다. 무함마드를 교조로, 알라의 예언자로, 성사(聖使: Ras lu’l Ll h, 알라가 보낸 사람이라는 뜻)로 숭앙하는 13억 무슬림이 발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곡된 위인 무함마드

    물론 무함마드에 대한 모독이나 왜곡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400여 년 전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펴기 시작했을 때 무지한 사람들은 그를 ‘지랄병 환자’로 몰아붙였다. 그때의 매도가 대명천지인 지금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듯 우리의 권위 있는 세계백과대사전은 여러 가지 비사실적 기술과 더불어 무함마드를 “무력과 탄압으로 선교를 강요하여 수십 차례 전쟁까지 일으켰다”며 ‘폭군’으로 정평(定評)하고 있다. 그러나 근자에 와서 이러한 설(說)의 주 진원지인 유럽에서, 양식 있는 학자들은 무함마드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를 자성하고 사실적인 접근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세기 초 미국의 캐틀(M. Cattel)은 ‘세계인명사전’을 펴내면서 세계적 위인 1000인을 고르고 다시 ‘베스트 10’을 추렸는데, 그 이름은 나폴레옹·셰익스피어·무함마드·볼테르·베이컨,·아리스토텔레스·괴테·시저·루터·플라톤이다. 그런가 하면 근대 ‘영웅론’의 대표적 주창자인 영국의 칼라일(Carlyle)은 역대 종교개혁자로 루소와 함께 무함마드를 지목하였다. 웬일인지 부처나 예수는 종교개혁자의 반열에서 빠뜨린 것이다. 우리는 무함마드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



    인간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인간처럼 신기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기의식과 변화무쌍한 감성으로 살아가는 ‘자연의 기형아(畸形兒)’다. 이러한 기형아 중 기형아가 위인인데 위인을 재량(裁量)하려니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존재양식으로 본 인간의 유형에는 순수 본연적인 생물로서 명을 이어가는 ‘생물학적 존재’와, 유기적인 사회관계에서 살아가는 ‘사회학적 존재’, 그리고 우주의 진리를 추구하면서 삶을 영위하는 ‘윤리·도덕적 존재’ 세 가지가 있다.

    자기만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단순인간’이라고 한다. 남을 위해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나 윤리·도덕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간은 ‘사회적 인간’ 혹은 ‘역사적 인간’이라고 한다. 단순인간에게는 인간이란 개념이 ‘소문자’로 적혀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인간’에게는 ‘대문자’로 새겨져 있어 뚜렷이 보일 뿐만 아니라 오래도록 남아 있다. ‘큰 그릇’이라 부르는 사회적 인간 중에 위인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위인은 어떠한 인물인가? 영웅론자들의 말을 빌리면 위인(영웅)은 시대의 요청에 부응해 나타난 인물이다. 그러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평범한 ‘사건적 인물’(eventual man)이 아니라,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사건 창조적 인물’(event making man)이다. 위인에는 사상의 위인과 행동의 위인이 있다. 철학이나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자(賢者)나 성인(聖人)은 전자에 속하고, 명망 있는 정치가나 군사전략가는 후자를 일컫는다.

    위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은 유형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굳이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사건 창조적’ 자질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자질은 어느날 갑자기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범상치 않은 인물로 태어나, 보통인간으로 살아가며 연마되고 온축(蘊蓄)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이러한 자질을 갖춘 위인은 역사의 격변기에 ‘시대의 피조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역사와 시대의 변혁을 선두에서 지휘하고 불멸의 업적을 남겨놓는다.

    이러한 ‘위인론’이야말로 무함마드 같은 ‘역사적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결론을 당겨 말하면, 무함마드는 시대의 피조물로 나타난 ‘사회적 인간’이고 ‘사건 창조적’인 위인이었다. 그는 사상과 행동을 겸행(兼行)함으로써 엄청난 역사 변혁을 주도한 희세의 영걸이다. 이러한 실상은 그의 인간상(人間像)과 성인상(聖人像), 그리고 위정자상(爲政者像)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무함마드의 출현은 시대적 요구

    무함마드는 60여 평생의 3분의 2는 ‘사건적 인간’(보통인간)으로서 살았고, 3분의 1은 한 종교의 창시자(성인)이자 인간공동체의 위정자 그리고 ‘사건 창조적 인간’(위인)으로 살았다. 보통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그가 위인으로 비상하는 도약대가 되었다. 위인으로서 그의 행보에는 보통인간으로서 삶의 흔적이 역력히 찍혀있다.

    무함마드도 ‘시대의 피조물’이므로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7세기 아라비아반도는 전통적인 씨족제도와 유목사회구조가 무너지고, 대신 부족연맹이 출현했다. 교역에 기초한 경제는 급속히 발달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그 사회에 충격을 주고, 낡은 종교관념과 각종 사회적 폐습이 상존하는 등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 절박하게 요구되었다. ‘사건 창조적’인 위인이 나타나 역사적인 과제를 앞장서 수행해 나가기를 요구했다. 이러한 시대적 소명에 부응해 갈등의 한복판인 메카에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 바로 무함마드다.

    무함마드의 생애는 일찍이 씌어진 전기와 이슬람 사적이 남아 있어 비교적 소상히 그리고 정확히 알 수 있다. 경전이나 복음서에서 자료를 뽑아 엮은 다른 성인들의 전기에 비하면 신빙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유년 시절과 청장년 시절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가 많지 않다. 무함마드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서거 120년 후 이븐 이스하끄가 펴낸 ‘성사전(聖使傳)’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오는 것은 원본이 아니고 9세기 초 이븐 히샴이 편찬한 교정본이다. 이 교정본이 여러 언어로 역출됨은 물론, 그에 근거해 몇 종의 무함마드 전기가 새로 꾸며지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메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할거한 꾸라이쉬 부족의 하쉼가(家)에서 태어났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는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하녀 하갈 사이에 태어난 이스마일의 후손이다. 우리가 아랍민족과 유대민족 간, 이슬람교와 유대교 간에 역사적인 친연성(親緣性)이 있다고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무함마드의 출생 연월일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대체로 ‘코끼리의 해’인 570년 4월22일로 본다. ‘코끼리의 해’란 에티오피아군이 코끼리를 몰고 메카에 침입한 해다. 코끼리를 처음 본 메카인들은 너무 신기해서 이해를 ‘코끼리의 해’로 이름지었다. 바로 이해에 무함마드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증조부 하쉼은 시리아와의 대상무역을 하여 부를 축적하고 기반을 꾸려 명문 하쉼가의 조상이 되었다. 하쉼의 아들이자 무함마드의 할아버지인 뭇리브는 메카의 신전 카아바를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는데, 특히 그는 메카에 있는 ‘잠잠’이란 성천(聖泉)을 복구한 선사(善士)로 이름을 남겨놓았다. 전설에 따르면 잠잠 샘물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닦달에 못 이겨 하녀 하갈과 아들 이스마일을 메카로 내쫓았을 때 자비로운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이 성천을 솟게 하여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성지순례자들은 순례의 필수코스로 신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성천에서 물을 꼭 떠 마시곤 한다.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는 대상을 따라 여행하던 중에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두 달 전 객사하였다. 무함마드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무함마드’는 아랍어로 ‘찬양을 받는’이라는 뜻이다. 뜻도 뜻이려니와 워낙 교조의 상서로운 이름이라서 무슬림 가정에서나 이 이름을 남자에게 붙이곤 한다. 그의 수태(受胎)에 관해서는 한두 가지 오가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명한 것은 자연인인 아버지 압둘라와 어머니 아미나의 정상적인 교합(交合)에 의해 자연인으로 수태되었다는 사실이다.

    독자이자 유복자인 그는 조부의 부양을 받게 되었다. 당시 아이들은 베드윈(사막 유목민)의 기질을 키우기 위해 사막에 보내지는 관습이 있었다. 이에 따라 어린 무함마드는 사막에 사는 바누 싸이드 부족의 여인 할리마가 유모를 겸해서 그를 데려다 키웠다. 그러다 그의 나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찾아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을 보여주려고 친정이 있는 메디나로 갔는데, 뜻밖에도 도착하자마자 급서했다. 졸지에 무함마드는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된 것이다. 2년 후에는 양육자인 조부마저 사망해, 그는 하쉼가의 족장인 삼촌 아부리브의 슬하로 들어갔다.

    삼촌의 도움을 받아 무함마드는 대상을 따라 먼 시리아까지 자주 여행하면서 세파에 부대꼈다. 어린 무함마드는 비록 조부나 숙부의 보호를 받았으나 넘겨받은 유산이 없어 어릴 적부터 방목을 하고 대상교역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변변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고독하고 힘겨운 삶이 무함마드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전부다.

    15년 연상녀와 결혼, 15년간의 명상

    이슬람사(史)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삶이 훗날 그를 성인으로, 위인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며, 그의 처지를 한낱 알라의 보우(保佑)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착하고 예의 발라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런가 하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부족간의 전투에 자주 참가하여 담력과 투지를 키웠다.

    이처럼 남다른 풍모를 간직한 채 평범한 유년기를 보낸 무함마드는 청년기인 25세 때 40세의 돈 많은 과부 하디자의 대상무역에 대리인으로 참가했다. 천성대로 성실히 일한 무함마드는 하디자의 환심을 얻어 결국 15년 연상인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하디자는 무함마드의 충실한 내조자이자 추종자로서 이슬람의 첫 신봉자가 되었다. 부부는 많은 연령 차이를 극복하고 다복하게 산 것으로 전해진다. 무함마드는 하디자가 병으로 죽을 때까지 25년을 함께 살았다. 그들 사이에는 2남4녀가 태어났는데, 다 요절하고 딸 파튀마만 남았다. 후일 그녀는 무함마드의 사촌아우이자 제4대 정통 할리파가 된 알리와 결혼하였다.

    부유한 가정의 주인이 되자 무함마드의 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겼다. 속세간(俗世間)의 난맥상에 고민해 오던 그는 자주 메카 근교에 있는 히라 동굴을 찾아가 하염없이 명상에 빠져들곤 했다. 그는 부질없는 부족간의 상잔, 무지몽매한 우상숭배, 끔찍한 여아의 생매장 등 그가 체험한 각종 사회 부조리와 비리, 갈등을 반추하며 ‘절대적인 힘’에 기구하였다. 그는 이러한 명상과 기원을 15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 보통인간 무함마드였다.

    이 기나긴 세월은 인간 무함마드에게는 수행기간이었고, 성인(聖人) 무함마드에게는 예비기간이었다. 그가 명상을 계속하던 35세 때인 605년, 카아바 신전 재건을 놓고 이해가 충돌해 꾸라이쉬 부족 사이에서 극심한 분쟁이 일어났다. 다들 속수무책 방관하고 있을 때 무함마드가 설득과 중재에 나서 공평정대하게 해결하였다. 그가 발휘한 발군의 지혜와 충실성에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그를 ‘아민(충실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아민’은 인간 무함마드의 유일한 아호다.

    ‘말하라’로 시작된 꾸란

    15년간 명상과 수행을 거듭하던 그는 40세 때 드디어 대오각성하여 하나님(알라)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20여 년간 성사(聖使)로서 이슬람을 뿌리내리게 하고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위정자로서 첫 이슬람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예수의 ‘신인양성론’(神人兩性論)이 부동의 신념으로 굳은 기독교에서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함마드는 양성론 대신 자신은 ‘인간뿐’이라는 단성론(單性論)을 고집하였다. 이러한 증좌(證左)는 이슬람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전 ‘꾸란’에는 “말하라. 나는 너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나에게는 너희의 신이 유일신이라는 계시가 내렸을 뿐이니라”(18장 110절)고 하였다. 이를테면 경전으로 무함마드의 단성(인간성)을 단정한 셈이다. 그는 시종 인간으로, 그러나 평범한 인간이 아닌 ‘사건 창조적 인간’으로 종교나 정치·경제·문화·사회·군사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변혁을 지휘하였다. 그는 어느 한 분야의 문패가 붙은 ‘칸막이 방’에 국한하지 않고 이 방 저 방을 넘나드는 ‘통방’을 하며 살아왔다. 여느 위인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통방살이’가 가능했던 것은 그가 인간으로 자부했기 때문이다. 위인 무함마드가 이름의 뜻 그대로 만민으로부터 찬양받는 첫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무함마드의 면모는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그는 금욕주의자라고 할 정도로 절제하고 근면하고 소박했다.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먹고 입고 살면서 구차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사회의 평등과 정의를 강조했다. 예언자로 존대를 받으면서도 자기 옷을 손수 꿰매 입었다. 가구래야 고작 나무침대와 물동이 하나뿐인 오막살이 흙집에 사는 평범한 인간상을 보여 주었다. 그는 가복(家僕)을 비롯한 숱한 노예를 해방시켰다.

    ‘알라만이 아는 일이다’

    무함마드는 남다른 관용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메카에 무혈 입성한 후에는 이슬람 출현 초기부터 그토록 그를 비방하고 냉대하던 메카사람들마저 모두 용서하고 관대히 대해 주었다. 이에 감명을 받은 메카인들은 무리를 지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선교 초기 그는 메카사람들의 박해에 못 견딘 추종자들을 에티오피아로 피신시켰으나 정작 그 자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메카에 홀로 남아 이슬람의 싹을 지켰다. 이러한 비범한 인간성으로 인해, 그는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사람들은 그를 받들었다. 그들은 무함마드를 오로지 ‘완전한 인간’으로 숭앙했을 뿐, 결코 신격화하지는 않았다. 무슬림들은 말이나 글에서 무함마드를 거명할 때면 꼭 “알라께 기도하나니 그에게 평화를!”이라는 기도사를 덧붙이는데, 이는 인간 무함마드에 대한 숭앙을 표명한다.

    흔히 성인이나 예언자를 기적의 화신으로 부상시키는 경우가 많다. 어떤 성인의 전기는 신묘한 기적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기적다운 기적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그것도 주로 신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기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야행승천(夜行昇天, 이쓰라와 미아라즈) 기적이다. 어느 날 밤 그는 갑자기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날개 돋친 천마(부라끄)를 타고 메카의 금사(禁寺)에서 예루살렘의 원사(遠寺)까지 일순간에 날아가 그곳에서부터는 빛에 실려 승천한다. 그리고 가까스로 7단계를 거쳐 알라의 어좌(御座)를 참배하고 돌아온다.

    이때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가장 심한 박해를 받아 메디나의 성천(聖遷)에서 출로를 찾고 있던 때로 이슬람력(曆)으로 621년 7월27일 밤이었다. 그는 이러한 기적으로 알라가 보낸 사람이라는 자신의 입지를 확인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무슬림은 인간의 상식으로 알 수 없는 일은 오직 ‘알라만이 아는 일이다’(알라 아알람!)며 더 이상 사족을 달지 않는다. 신학자들은 이 ‘승천’을 영혼 고양(高揚)의 상징으로 해석하며, 훗날 이것이 이슬람 신비주의를 형성하거나 이탈리아의 시성(詩聖) 단테가 ‘신곡(神曲)’을 구상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무함마드에게 기적을 행한 행적이 적은 것은 메디나 유대인들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기적 없는 예언자가 어디 있느냐고 그를 조롱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적은 것은 신이나 기인이 아닌 인간 무함마드의 ‘인성’을 증언해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인간 무함마드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그의 종교적 성성(聖性)이다. 18세기의 저명한 계몽사상가 헤르더(J.G. Herder)는 천재적 인물에게는 ‘신의 오른손’에 의해 하늘로부터 비상한 힘이 주어진다고 하였다. 헤르더는 역사발전 과정에는 간혹 신이 특별히 간여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되면 신은 천재적 인물을 통해 간여를 실현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무함마드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유일신 알라는 7세기 초엽의 적절한 시기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림으로써, 인간사회에 대한 그의 간여를 성공적으로 실현하였다. 그 과정에 인간 무함마드는 예언자와 성사(聖使, Ras lu’l Ll h, 즉 알라가 보낸 사람)라는 종교적 성성을 부여받고, 20여 년간 이슬람의 창시자로서 본분을 다하였다.

    무함마드가 히라 동굴에서 명상정진한 지 15년째 되던 610년 어느 날 밤, 홀연히 하늘가에 환영(幻影, vision)이 나타나더니 그에게 무턱대고 “읽어라!”라고 하였다. 이에 무함마드가 “저는 무학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 환영은 ‘읽기’를 세 번 권고했다. 그가 “무엇을 읽으란 말입니까?”라고 되묻자, 환영은 “읽어라! 창조주이신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께서는 한 방울의 정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일깨워주었다. 이 환영이 바로 천사 가브리엘이고, 이 일깨움은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내린 첫 계시다.

    때는 이슬람의 성월(聖月)인 라마단(禁食月, 이슬람력 9월) 하순의 어느 기수일 밤(27일 밤으로 짐작)이었는데, 그 획기적인 의미를 살려 이 밤을 ‘결정의 밤(라이라툴 까드르)’이라고 한다. 환영을 접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허둥지둥 동굴에서 집으로 돌아온 무함마드는 부인 하디자에게 “날 좀 감싸주오” 말하고는 몸이 불덩이가 되어 방바닥에 쓰러진다. 그가 부인에게서 겉옷을 받아 입을 때 다시 허공에서, “겉옷을 걸치는 자여! 일어나 경고하라! 네 주님만을 찬양하라! 네 겉옷을 청결케 할 것이며 부정을 피하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말방울 소리처럼 요란했다. 이것이 알라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내린 두 번째 계시다.

    그러나 무지몽매한데다가 새로운 종교가 출현하는 데 겁 먹은 메카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최초의 계시를 받으면서 보여준 심리적 불안과 종교적 이상체험을 간질병 환자의 발작이나 히스테리 환자의 망상증 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를 ‘지랄쟁이’, ‘미친놈’, ‘마법사’ 등으로 백안시하고 매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만 해도 이러한 매도는 마치 사실(史實)인 양 유럽의 이슬람 연구가들에게 ‘전승’되었다. 아마 루시디는 이러한 역사의 퇴물을 원용(援用)하여 소설의 소재로 잡은 것 같다. 현대의학에 따르면 간질병 환자나 히스테리 환자는 발작 중에 일어나는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이러한 의학적 설명은 무함마드가 간질병 환자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무함마드는 사망할 때까지 20여 년간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의 계시를 간단없이 받았다. 실타래같이 얽히고 설킨 속세의 일로 고민할 때, 알라는 조목조목 그것을 풀 수 있는 가르침을 내렸다. 계시는 ‘읽어라’로부터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러한 계시를 묶은 경전을 ‘꾸란’이라고 한다. ‘꾸란’은 ‘읽다’는 뜻을 가진 ‘까라아’의 동명사니, ‘읽기’ 혹은 ‘읽음’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이 종교적 전의에 의해 ‘독경물’(讀經物), 즉 독송하는 이슬람 경전으로 승화되었다. 대체로 초기의 계시는 한 마디씩 또박또박 내려졌으나 후에는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스쳐오는 영감으로 바뀌었다.

    聖使 예수, 聖使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이러한 계시를 통해 자신이 종교적 예언자(豫言者, 일명 선지자, 나비)이며 동시에 알라가 인간세계에 파견한 성사(聖使)임을 거듭 확인했다. 이슬람적 해석으로는 예언자나 성사는 모두 절대신 알라의 영감과 계시를 받아 선택된 완전무결한 인간이다. 예언자는 문자 그대로 신의 뜻이나 종교적 비전을 앞질러 예언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성사는 예언과 더불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담보를 받은 사람이므로, 예언자보다 한 차원 높은 성인이다. 따라서 모든 성사는 예외 없이 예언자이나, 모든 예언자가 다 성사가 될 수는 없다.

    ‘꾸란’에 따르면 알라의 축복을 받은 개개의 민족에게는 대부분 축복을 알려주는 예언자가 배출되는데, 그 수는 무려 12만4000명에 달한다. 그렇지만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성사는 극히 제한적이어서 아브라함·다윗·모세·예수·무함마드 등 다섯 명만이 거명되고 있다. 예언자나 성사에 관한 이러한 견해는 무함마드의 성성을 살피고, 이슬람의 비(非)배타적인 포용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다. 이슬람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창시자인 모세와 예수를 무함마드와 동등한 성사로 인정한다. 그들에 대한 신앙을 교리적 신조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2년여의 고민과 망설임 끝에 알라의 성사임을 확신하고 613년부터 메카에서 공개적으로 포교활동에 나섰다. 그는 구래의 각종 종교적쪾사회적 폐습을 비난하면서 절대신 알라에 무조건 순종하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순종한다는 뜻의 ‘이슬람’과 순종자라는 뜻의 ‘무슬림’(이슬람 신봉자)이란 말이 나왔다. 순종자들은 순종을 뜻하는 의례적 동작으로 알라를 향해 몸을 굽혀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절하는 예배법을 창안해 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설교는 처음부터 꾸라이쉬 부족 상층인의 불만과 저항을 야기하였다. 그들은 무함마드의 등장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메카로 오는 순례자가 줄어들어 경제적인 손실이 적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선교가 활발해지고 추종자들이 늘어날수록 무함마드에 대한 이들의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이때 하리스는 무함마드를 보호하다 타살돼 이슬람사상 첫 순교자가 되었다. 양측 사이에 협상을 벌였으나 타협은 되지 않았다.

    네구스 왕의 관용

    이어지는 박해에 견디다 못한 무함마드는 615년경 1, 2차로 나눠 추종자 96가족을 기독교 국가인 하바셔(현 에티오피아)에 피신시켰다. 그러자 메카의 권력자들은 하바셔의 왕 네구스에게 뇌물을 주면서 피신자들을 돌려보내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피신자들이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꾸란’ 구절을 송독하자 네구스 왕은 그들의 신앙이 기독교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고 오히려 보호해주었다(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티격태격하는 현실을 보면 저승에 있는 네구스 왕은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메카의 권력자들은 무함마드에 현상금을 걸고 그의 출신 가문인 하쉼가에 협상을 제의했으나 거절 당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메카 권력자들은 하쉼 가문과는 일절 계약이나 결혼, 무역거래 등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특히 무함마드의 보호자인 삼촌을 갖가지 방법으로 회유하고 공갈하여 조카의 전향을 유도했다. 회유와 압력을 견디다 못한 하쉼 가문은 모든 권리를 빼앗긴 채 메카 동쪽 쉬읍 계곡으로 집단 피난하였다.

    설상가상으로 619년 삼촌과 평생을 동고동락해온 처 하디자가 세상을 떠나, 무함마드는 정신적인 안식처마저 잃었다. 아부리브의 후임으로 하쉼 가문의 수장이 된 또 다른 삼촌 아부 라합은 아부리브와 달리 유일신교를 극력 반대했다. 그는 가문의 성원을 설득하여 무함마드를 보호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로써 메카에서 포교가 어려워지자 무함마드는 타지에서 출구를 찾으려 했다. 메카 동남쪽 50마일쯤에 산재해 있는 톼이프족은 메카의 꾸라이쉬 부족과 앙숙관계였다. 무함마드는 이 점을 포교에 이용하고자 그곳으로 찾아가 한 달간 설득했으나 조롱과 멸시만 받았다. 그들은 설교하는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잠자리도 내주지 않았다.

    온갖 냉대와 박해를 받으면서도 무함마드는 결코 절망하지 않고 지혜를 짜내 포교를 이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순례의 달과 성스러운 달인 ‘금식월’에는 모든 폭력 행사가 금지된다. 무함마드는 이 기회를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멀리 북방 400km의 야스립(메디나의 고명)에서 온 순례자들을 찾아가 설교를 하였다. 뜻밖에도 그들은 흔쾌히 호응해왔다. 야스립에는 만성적인 분쟁을 겪고 있는 아우스 부족과 하즈라즈 부족의 대표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함마드 같은 성현만이 소모적인 분쟁을 조정·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621년 이 두 부족의 대표 12명이 메카 근교인 아까바에 와서 무함마드에게 제1차 ‘아까바 충성서약’(바이아툴 아까바)을 하였다.

    그들은 서약에서 “우리는 유일신만 섬기며, 도둑질을 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으며, 우리의 자식을 살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중상과 비방을 그만두고, 모든 진리의 예언자에게만 복종할 것이다”고 선언하면서 무함마드를 중재자로 메디나에 초청하되 그를 보호해주기로 약속했다. 이것은 무함마드의 포교활동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사변이었다. 위기에서 탈출구를 찾고 동시에 희망의 서광이 비쳐왔기 때문이다. 의외로 일이 잘 풀리면 무슬림들은 으레 “함둘릴 라!”(알라에게 찬미를!)고 말한다.

    이듬해 6월에는 그 전해에 충성서약을 한 12명을 포함한 75명의 대표가 야스립에서 아까바로 다시 와, 1차 서약과 비슷한 내용의 제2차 아까바 서약을 하고 무함마드를 공식 초청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메카의 박해자들은 무함마드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급습할 계략을 꾸며놓았다. 그러나 이 계략을 사전에 알아낸 사촌동생 알리의 기략으로 무함마드는 무사히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는 교우 아부 바크르와 함께 메카 남쪽에 있는 사우르산 동굴에 3일 동안 숨어 지내다가 70명의 추종자와 함께 비밀리에 메카를 탈출해 야스립의 남쪽 2마일 지점에 있는 꾸바 마을에 당도했다. 그때가 이슬람력으로는 9월24일이고, 서력으로는 622년 7월15일이다.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것을 이슬람사에서는 ‘히즈라’, 즉 ‘성천’(聖遷: 성스러운 이주)이라고 한다. 이 성천은 이슬람사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성천의 날은 이슬람력 원년 1월1일이다. 무함마드와 함께 성천한 70명을 ‘성문천사’(聖門遷士)란 뜻을 가진 ‘무하지룬’, 혹은 무함마드의 추종자인 ‘성문도반’(聖門徒伴)이란 뜻으로 ‘솨하바’라 부른다. 이들은 최초의 이슬람 신봉자이며 수호자로서 최상의 반열에 속하는 무슬림으로 존대받는다. 이들이 메디나에 도착한 후 이들의 안착을 지원하고 무함마드의 포교를 도와준 사람들을 ‘성문보사’(聖門輔士: 돕는 자)라는 뜻을 가진 ‘안솨르’라고 하는데, 이들 역시 성문도반에 버금가는 무슬림으로서 역시 존대받는다. 무함마드의 야스립 입성으로 이 도시의 이름도 ‘예언자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메디나툿 나비(약칭 메디나)로 바뀌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를 거점으로 이슬람 공동체를 건립하고 이슬람을 주변 여러 부족과 유목민에게 보급함으로써 아라비아반도의 이슬람화를 실천해 나갔다. 그는 몇 차례 전투를 거쳐 여러 정적(政敵)과 종적(宗敵)을 제압하고 630년 이슬람의 본향인 메카에 무혈 입성하였다. 그리고 두 번의 메카 순례를 단행해 이슬람교의 창시를 마무리하였다. 특히 632년의 순례에서 발표한 유명한 ‘고별연설’은 마지막 계시를 전달하는 행사답게 이슬람교의 완성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무함마드는 이 순례에서 돌아온 후 3개월간 심한 열병을 앓다가 6월8일 향년 62세(570~632)로 영면하였다.

    이슬람교의 창시와 관련해 한 가지 부언할 것은 이슬람적 사고방식으로는 무함마드가 이 교의 창시자나 교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슬람적 시각에 따르면 만민을 위한 보편 종교인 이슬람은 절대신 알라가 우주를 창조한 그 시각부터 이미 있어 왔다. 그러나 그 동안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마지막 예언자이며 성사인 무함마드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무결하게 인간에게 계시된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의 창시자는 원초적으로 알라일 뿐, 그 외에는 아무도 창시자가 될 수 없다. 무함마드를 이슬람의 ‘교조’니 ‘창시자’니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종교의 교조나 창시자에 대비한 관용어에 불과하다.

    무함마드의 60여 평생에는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삶과 종교 교조로서의 성직(聖職),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창건자·위정자로서의 위용이 공존한다. 메디나라는 생소한 타향에 천거한 후 그는 이슬람의 착근과 그에 바탕한 무슬림들의 생존을 위해 특정 부족 집단에만 의거하던 종래의 혈연 및 지연 관계를 초월했다. 이후 그는 여러 부족과 이교도를 망라하는 범지역적인 사회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대인이나 이교도들과의 약속이기도 한 ‘메디나헌장’을 반포하고 헌장 정신에 입각해 이슬람에 바탕을 둔 이른바 ‘움마’(Ummah: 이슬람공동체)를 건설하였다. 그 구성원으로는 메디나 일원의 모든 무슬림과 함께 그들과 제휴를 감수하는 유대인과 이교도들이 망라되었다.

    헌장은 구성원간의 상잔(相殘)을 금지하고 모든 분쟁은 알라와 그가 파견한 사자(使者)인 무함마드가 중재한다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이슬람공동체라는 새로운 권력체에 무함마드가 행사하는 행정·사법권이 인정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헌장은 무함마드의 지휘에 따라 단합해 대적(對敵)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함으로써 군사동맹체 성격을 명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책무나 속금(贖金)의 상환, 자유거래의 보장 등 공동체 내의 경제질서와 생활규범도 제정하였다. 그리하여 헌장은 정교 합일체적 이슬람국가의 맹아인 이슬람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법적 초석이 되었고, 무함마드는 이러한 공동체의 최고 권력자로 ‘왕관 없는 왕’의 권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는 유능한 위정자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위정자·군사 지휘관·협상가

    공동체가 직면한 급선무는 교세 확장과 더불어 생존수단의 확보였다. 이를 위해 무슬림들은 ‘지하드’(al-Jih d: 聖戰)란 이름으로 메카의 부유한 대상과 주변 부족이나 유목민을 상대로 약탈전을 단행했다. 이러한 약탈전과 원정은 보복전인 동시에 종교적으로나 정치군사적으로 아라비아반도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쟁탈전이었다. 당시만 해도 부족간의 약탈전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방편으로 공인돼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무슬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성천 이듬해에 메디나의 무슬림들은 메카의 대상을 공격해 물품을 약탈하고 메카 원정을 준비하였다.

    메카 무혈 입성이 있을 때까지 약 10년 동안 무함마드 휘하의 메디나군과 메카군은 약탈과 보복의 성격을 띤 큰 전쟁을 세 번이나 치렀다. 624년 3월 무함마드가 이끄는 300여 명의 메디나군은 메디나 서남쪽 32km 지점에 있는 바드르에 매복하고 있다가 귀향하는 메카의 대상을 기습하였다. 이때 급히 원군으로 파견된 950여 명의 메카군을 격파함으로써 전투는 메디나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이 이슬람사에서 유명한 바드르 전투다. 비록 작은 규모의 초전(初戰)이었지만 무함마드는 탁월한 전략가 기질을 발휘했고, 이 전투를 통해 절대신 알라의 예언자이며 성사라는 그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무함마드의 권위와 명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적지 않은 전리품과 포로들도 노획하였다.

    이듬해 설욕전을 결심한 메카는 아부 수프얀 장군에게 3000명의 대군을 딸려 메디나를 공격케 했다. 전투는 메디나 근교 우후드산에서 벌어졌는데, 300여 명의 전사들이 겁을 먹고 후퇴하는 바람에 메디나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참패했다. 무함마드도 심한 부상을 입었다. 우후드전투 이후 양측의 적대관계는 더욱 격화되고, 급기야 결정적인 격돌로 치닫고 말았다. 메카측은 2년의 준비 끝에 최후의 일전을 결심하고 주변 유목민들과 1만의 연합군을 조직해 627년 메디나로 출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무함마드는 한 페르시아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메디나 주위에 견고한 참호(한다끄)를 파고 응전하였다. 메카군은 40일간의 무모한 위공작전을 폈으나 전과가 없어 결국 자진 퇴각하고 말았다. ‘한다끄전투’ 승리를 계기로 무함마드는 소극적인 방어에서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무함마드는 능란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628년 봄 메카인들로 하여금 자진해서 10년간 정전하고 무슬림의 메카 순례를 허용한다는 내용의 호다비야협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협약에 따라 이듬해 그는 1000여 명의 무슬림을 이끌고 메카 순례를 근행했다. 한편으로 무함마드는 메디나 주변의 유대인들과 북방 멀리 시리아 변방지대에 있는 유대 부족들도 강온양면정책을 구사해 제압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전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세력의 준동으로 메카측은 돌연히 호다비야협약을 무시하고 순례를 막았다. 무함마드는 오히려 이를 호기로 여기고 신속히 대군을 지휘해 630년 금식월 10일 메카에 진입하였다. 불의에 일격을 당한 메카의 적장 아부 수프얀과 압바스 등은 기가 꺾여 항복하고, 이슬람에 귀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무함마드 휘하의 무슬림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메카에 입성했다. 무함마드는 메카인들에게 관용을 베풀며 카아바 신전 부근의 우상 360개를 폐기했다. 대세가 무함마드에게 기울자 이에 영합한 아랍부족들은 631년 줄줄이 대표단을 보내, 무함마드에게 충성 서약(바이아)을 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슬람사에서는 이 해를 ‘대표단의 해’라고 부르며 아라비아반도를 이슬람화한 결정적 징표로 평가한다.

    “이슬람을 네 종교로 결정하노라”

    이듬해인 632년, 무함마드는 다시 순례차 고향인 메카에 개선하였다. 그는 아라파트산에서 유명한 ‘고별연설’을 하였다. 파란만장했던 한평생의 마감을 예고하듯이, 그는 연설에서 이슬람의 교리와 이념을 간명하게 요약한 후 23년간이나 받아온 알라의 마지막 계시를 이렇게 전달했다. “오늘 나는 너를 위해 네 종교를 완성시키고, 너에 대한 내 호의를 완결시키며, 이슬람을 네 종교로 결정하노라.” 이로써 무함마드는 이슬람이 아랍인의 종교임을 확언하고 이슬람의 종국적 승리를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이슬람의 승리와 더불어 무함마드는 역사무대에서 물러났다. 이는 이슬람의 초지역적 확산과 그에 바탕한 이슬람공동체가 정통 할리파시대를 맞아 초기 아랍-이슬람국가로 전이하는 전기가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함마드는 분명 희대의 위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같은 반열의 위인들에 비해 ‘얼굴’이 여러 개라는 것이 특색이다. 이것은 그만큼 그의 진면목를 그려내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많은 공적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된다. “위인은 공적으로 가리라”는 말이 있듯이, 무함마드가 남긴 공적은 다음 몇 가지로 헤아려 볼 수 있다.

    그는 아랍민족사에 파천황적(破天荒的) 변혁을 가져왔다. 무함마드에 의한 이슬람 창시와 보급, 그리고 이슬람에 기초한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사회공동체 건설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수천년간 지속돼 오던 자힐리야시대(몽매시대)를 마감하고 문명시대를 불러왔다. 무함마드의 생전에 실현된 아라비아반도의 이슬람화는 각이한 혈통과 지연, 신앙과 풍습을 가진 여러 부족을 연결함으로써 혈연적 부족 단합을 가치 공유적인 민족 단합으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발전은 통일 아랍민족이 출현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무함마드의 공적

    둘째 공적은 인류문명사 전개에 불멸의 업적을 쌓았다는 점이다. 무함마드가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인 이슬람교를 창시했다는 것 자체가 인류문명사에 특기할 만한 기여다. 이슬람에 기초하여 창출된 이슬람문명은 중세기 가장 선진적인 문명으로 중세문명 발달에 견인차 구실을 하였다. 이슬람문명을 공통분모로 한 이슬람세계는 세계사 전개와 동서문명 교류에서 일익을 담당하였다. 1000여 년간 지구상의 수억(오늘은 13억) 무슬림이 국가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무함마드를 교조와 스승으로 숭앙하고 그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은 무함마드의 범세계성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끝으로 그 공적은 이른바 ‘무함마드식’ 위인의 전범(典範) 창출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위인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모두 ‘사건 창조적’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어떤 일을 어떻게 해내느냐에 따라 각인각색이다. 바로 여기서 개개인의 특색이 감식된다. 무함마드는 범세계적 종교를 창시한 인물이지만, 다른 종교의 창시자인 부처나 예수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거의 모든 예언자나 성인들은 생전에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내놓은 주장이나 설교는 그가 죽은 후 종교로 엮어지고, 그때서야 그의 삶은 재조명되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자신이 예언한 사명을 생전에 수행한 유일한 예언자다.

    거의 모든 예언자나 성인이 여러 형태로 신격화했지만 무함마드는 시종 보통 인간의 인성만으로 빛을 발하였다. 그는 다양한 ‘얼굴(경력)’의 소유자였다. 명실상부한 종교의 개조(開祖)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정치지도자이면서 유능한 군사지휘관, 명민한 지략가이기도 하였다. 이것이 ‘무함마드식’ 위인의 본보기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는 남다른 공적과 위훈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과 본보기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동서고금의 세계적 위인을 엄선하는 방문(榜文)에서 무함마드는 낙방(落榜)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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