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TBS 방송의 ‘일본 국민과의 대화’에 출연해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고 답했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 ‘대통령의 역사 인식이 그 정도라니…’하는 배신감이 들었다. 김구 선생이 이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취를 상세히 복원해 임정이 결코 실패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어야겠다는 책무도 함께 느꼈다.
2001년 2월 한국기업후원으로 정비된 충칭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중국의 여러 임정청사 중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된곳이지만 이곳을 찾는 한국 관광객은 많지 않다.
굳이 나눈다 해도 김구 선생을 실패한 정치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우리 민족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갔을 때 임시정부를 통해 그 정통성을 이었고, 그러한 노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카이로회담에서 일본 패망 후 한국 독립이 언급되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한민족이 그에게 진 빚은 가늠하기 어렵다.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와 남북을 오가며 화해를 시도하던 선생이 안두희가 쏜 총탄에 쓰러진 건 1949년 6월26일. 그로부터 1년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김구 선생이 실패했다면 이 나라의 운명도 실패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대한 땅인 중국대륙.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도 그 길을 지날 때면 가슴 뭉클한 길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었던 험난한 이주의 길들이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한 이후 상하이에서 이사를 시작해 자싱, 항저우, 난징, 우한,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양, 쭌이, 치장을 거쳐서 중국 내륙도시 충칭에 안착한다.
중국의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이들 중 몇 곳의 임시정부 유적지는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필자는 그 길을 돌아봤다.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한 갖가지 교통편이 있고, 일제의 추격도 없다. 그러나 임정의 유물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기란 괴로운 일이었다.
최초 임정 자리에 쇼핑몰 들어서
동양 최대 높이의 둥팡밍주 방송탑과 진마오 빌딩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상하이 푸둥(浦東)지구. 황푸강의 동쪽에 있어 푸둥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이 가장 먼저 얼굴을 드러내고자 하는 도시다. 서양색채 짙은 고건축이 즐비한 금융중심지 와이탄(外灘)을 포함한 푸시(浦西)도 독특한 멋을 풍긴다. 푸시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상하이를 중국 최대 상업도시로 만든 핵심이 되는 곳이다.
3·1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던 1919년 4월. 김구 선생을 비롯한 15명은 랴오둥 반도 안동현에서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4일 만에 푸둥항구에 도착한다. 단절될 수도 있었던 일제 치하 36년 역사를 이어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김구 선생이 처음 푸둥항구에 도착해 ‘치마도 입지 않은 여자들이 삼판선의 노를 저으면서 선객들을 나른다고 묘사했을 만큼 초라했던 이곳은 이제 거대한 크레인들이 화물을 옮기고, 수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자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려고 모여든다. 백범 일행의 상하이 생활은 공승서(公昇西)리(里) 15호에서 첫 밤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실 임시정부의 첫 역사는 이보다 며칠 앞서는데 1919년 3월17일 여운형(呂運亨), 현순(玄楯), 선우혁(鮮于赫) 등이 상하이에 임시사무소를 설립해 임시정부 설립을 담당하면서부터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이 장소가 바오창(寶昌)로(路)라고 기록되어 있다.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임시정부 사무소와 첫 탄생지는 바오창로가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 상하이에 바오창로는 없다. 이 길은 샤페이(霞飛)로로 바뀌었다가 후에 화이하이중(淮海中)로로 바뀌었다. 다행히 321번지나 329번지로 기록된 주소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땅 위는 완전히 바뀌어 임시정부 첫 사무소가 있던 자리에는 초대형 쇼핑몰인 홍콩쇼핑몰이 들어섰다. 어릴 적부터 그곳에 살았다는 백화점 직원이 1970년대 사진을 통해 임시정부 사무실의 위치가 홍콩쇼핑몰 자리라는 것을 확인해준다.
한일합방이 선언된 상태에서 한국 임시정부가 겪은 곤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은 임시정부가 폭탄 제조 등 폭력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 임시정부를 프랑스 조계지에서 퇴출시켜달라고 프랑스에 요구했다. 일본에 공조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는 1919년 10월17일 임시정부에 “48시간 이내에 모든 인원을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임시정부는 급히 하이얼(白爾 : 현재는 重慶中)로 18번지로 옮겼다. 기나긴, 불안한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3년 뒤인 1922년 3월28일 김익상(金益湘), 오성륜(吳成倫)의 다나카(田中) 암살사건이 발생하면서 임시정부는 다시 이사했다. 일본이 암살 요인을 보내, 임시정부 파괴공작을 하자 임정은 1922년 10월 영미 조계지로 갔다가 1923년 초 다시 화이하이로 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8월 6개월 집세인 500위안을 내지 못해 모든 물품을 팔고 재무부장이었던 이시영(李始榮)의 집으로 옮겼다. 일본의 임정 파괴공작과 재정난으로 임시정부는 그 힘을 잃어갔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이승만의 면직안이 의결되는 등 임정 내부 분란도 심화됐다. 가장 큰 갈등은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였다.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이동휘(李東輝)와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이승만(李承晩)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 이런 와중에 박은식, 이상룡, 안창호, 홍진이 잇따라 임시정부의 수반 격인 국무령에 선임됐다.
그러나 항상 위협에 쫓겨다니는 타국살이를 이끄는 일이 쉽지 않았다. 김구선생의 경우 1924년 1월1일 부인 최준례(崔遵禮) 여사가 김신을 낳은 후 폐렴에 걸려 영면했다. 2~3년 후에는 어머니 곽락원(郭樂園) 여사와 인과 신 두 아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1927년 3월 임시정부는 3차 개헌을 통해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면서 김구 선생을 국무위원에 선출했다. 임시정부 유적지로 보호되는 지금의 바오칭(寶慶)리(里) 4호 김구 선생 집이 임시정부의 청사 역할까지 겸하게 됐다.
바오칭리는 첫 임시정부 자리에서 작은 길인 마탕(馬當)로를 따라 300m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다. 들어서 200m쯤 걸으면 마탕로는 싱예(興業)로와 만나는데 그 길에서 다시 왼쪽으로 50m만 가면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중국공산당 1차회의 장소가 나온다.
원래는 왕즈(望志)로 106호(현재는 싱예로 76호)였던 이곳은 당시 상하이 공산당 대표인 리한쥔(李漢俊)의 형 리수청(李書城)의 집이었는데, 1921년 7월23일 이곳에 마오쩌둥을 비롯해 둥비우(董必武) 등 13명의 대표가 모여서 회의를 열었다. 순경의 탐문 소식이 있어서 급히 자싱(嘉興) 난후(南湖)의 배로 장소를 옮겼는데, 첫 회의 장소와 자싱 난후의 역사는 우리 임시정부 역사와 연결되어 각별한 느낌을 준다.
이 마탕로와 싱예로의 교차로에서 100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다. 1993년 4월13일에 수리되어 개방한 이 청사는 상하이를 들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역사 명소가 됐다.
바오칭리 청사 시절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든 때였다. 고국이나 해외에서 보내오던 지원금이 줄어들었고, 상대적으로 독립의 희망은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수되어 잘 갖추어져 있지만 상하이 임정 청사는 작은 숙소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씩만 올라갈 수 있는 좁은 계단, 3개의 침대만으로도 꽉 차는 숙소, 초라한 부엌 등은 당시 임정의 곤궁한 삶을 보여준다.
‘백범일지’에는 당시의 상황을 “본국 동포들의 비밀 연납(捐納)과 미주, 하와이 한인 동포들의 세금 명목 상납으로 충당됐는데, 왜의 강압과 운동의 퇴조로 원년(1919)보다 2년(1920년)의 숫자가 적고, 그 후 점점 더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의 직무도 정지되고 총장, 차장 중에서 투항하거나 귀국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러한 지경이니 그 아랫사람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며, 그 중요 원인은 경제적 곤란이었다”고 쓰고 있다.
1931년 7월2일 벌어진 만보산(萬寶山)사건으로 한중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임시정부는 더욱 곤경에 빠진다.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의 만보산 지역에서 수로를 둘러싸고 일본의 보호를 받는 한국인과 중국 농민들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중국인들의 몇 차례 요구를 거부하고, 일본 경찰은 오히려 중국인을 대상으로 발포했는데, ‘조선일보’ 등이 이 사건을 일본의 입장에서 감정적으로 보도해 인천, 경성, 원산, 평양 등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나 수백 명이 죽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훗날 이 사건의 배후에 중국 내 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일본의 음모가 있었음이 밝혀졌는데, 일본은 이 목적을 달성하는 한편 이후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정치적 사건으로도 이용했다. 사건 3일 후 고하 송진우 선생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만보산 사건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파악해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도록 충고했는데, 이런 노력 후에야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론 중국에서 한국인에 대한 감정도 약간은 누그러졌지만 적지 않은 앙금이 생긴 후였다.
상하이 와이탄
윤봉길 의사도 찾아왔다. 훙커우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던 윤의사는 안전을 위해 싱예로 169번지 싱룬(興倫)다원에서 임정 인사들을 만나 의거를 논의했다. 싱룬다원은 지금은 재개발을 마친 고급 소비상가 ‘신톈디(新天地)’를 마주보는 곳으로 최근 재개발 공사가 진행되어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신톈디’엔 서양식 레스토랑과 고급 상가가 즐비하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 1차회의가 열렸던 곳과도 마주보고 있다. 백 년도 지나지 않은 사이 ‘중국 공산당의 성지’에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최고급 소비거리가 형성됐다는 점은 보는 이에게 묘한 감회를 느끼게 한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벌어졌다. 1951년 중국 근대 사상가 루쉰(魯迅)을 기념하기 위해 루쉰공원으로 개명된 이곳은 “중국인과 개는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는 곳이다. 1922년에 만들어져 1928년부터 중국인들에게 개방됐다는 기록이 있어 중국인의 출입금지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윤봉길 의사는 지금 루쉰묘와 동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널따란 잔디밭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날 그곳에서 천황 생일기념 축하식을 갖고 있던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 상하이 일본인 민단장 가와바타(河端) 등 군과 민의 상하이 총책임자를 죽이고, 시게미쓰(重光) 대사, 우에다(植田) 중장, 노무라(野村) 중장 등 상하이에 있는 일본 주요인물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
이 의거를 정리하면서 김구 선생은 ‘만보산 사건’으로 촉발된 한중간의 감정싸움이 거의 불식되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한인들에게 임시정부의 존재와 가치를 제고시켜 이후에 후원이 느는 등 임시정부 활동 강화의 초석이 됐다고 평가했다.
윤의사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중국 정부도 윤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공원의 북쪽에 정원인 매원(梅園)과 기념정자인 매정(梅亭)을 만들었다.
윤의사의 의거로 당시 상하이에서의 임시정부 활동은 큰 제약을 받았다. 우선 조계지 등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지는 등 일본의 압박이 거세졌다. 일본은 의거 이후 임정 요인에 대해 처음에는 20만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가 얼마 후 일본 외무성, 조선총독부, 상하이주둔군 사령부 합작으로 60만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1위안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다행인 것은 중국 난징(南京) 정부가 윤의사 의거 이후 “김구가 온다면 비행기라도 보내마”(‘백범일지’ 중에서)라고 할 정도로 한국 임시정부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사건 이후 임정측은 20일 정도 미국인 피치의 집에서 은신하다가 기차를 타고 자싱으로 이주했다. 지금 상하이에서 자싱까지는 기차로 1시간 반 남짓 걸리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다.
자싱의 임정 유적 곧 헐릴 판
자싱은 도시 전체에 물이 풍부한 전형적인 강남의 도시로 항저우(杭州)와 ‘한국 타이어’가 공장을 건설한 곳이기도 하다. 자싱은 명인의 고장으로도 유명한데, 중국 현대의 문인 마오둔(茅盾), 쉬즈머(徐志摩)를 비롯해 선댜오루(沈釣儒), 왕궈웨이(王國維)를 포함해 무협작가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진융(金庸)을 배출했다. 도시 전체로 수로가 나 있고, 강남식 정원의 품격이 살아 있는 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도 많다. 이 도시에서 휴식을 취하다 보면 왜 많은 문인이 태어났는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그런 낭만을 느낄 새도 없이 경제공황으로 인해 폐쇄된 면사공장인 수륜사창(秀綸沙廠)에 은신했다. 1932년 이곳에서 시작된 김구 선생의 자싱 생활은 1936년까지 비교적 길게 이어졌다.
자싱 난후의 배
김구 선생은 메이완졔 한 집에서 보낼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일본의 수사망이 자싱으로 뻗쳐왔기 때문이다. 얼마 후 김구 선생은 하이옌(海鹽)의 재청별서(載靑別墅)로 피신한다. 하이옌의 양대 가문 중 하나인 저우(朱)씨의 별장인 재청별서는 빼어난 휴양지인 난베이후(南北湖)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하이옌은 중국 현대 출판계의 거장 장위안지(張元濟)의 고향으로 그의 도서관이 있는 곳인데, 난베이후는 산과 바다, 호수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고, 현대식 휴양시설이 갖추어진 곳이다.
자싱에서 하이옌으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의 농촌 풍경과 흡사하다. 최근 도로들이 급속히 정비되고 있는데, 작은 길 양옆에 늘어선 낙엽송의 자태가 아름다운 곳이다. 하이옌에서 난베이후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제법 높은 산이 있다. 김구 선생은 그 길을 걸으면서 훗날 그 길을 카메라에 담아서 전하고 싶다는 소회를 ‘백범일지’에 밝히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재청별서의 한쪽에 김구선생의 행적을 기념하는 김구기념관을 만들어놓았다. 우리 돈 1억원 가량을 들여 1996년 준공한 이 기념관은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찾는 이가 많지 않는 다고 한다.
재청별서는 도시와 떨어져 있어서 임시정부를 책임져야 할 김구 선생에게 오랜 휴식처는 되지 못했고 결국 다시 자싱으로 돌아왔다. 김구 선생은 여기서 우리보다 진보된 농기구를 보고, “실질적인 국리민복을 도외시하고 주희(朱喜) 학설 같은 강고한 이론을 주창하여 사색 당파가 생겨 수백 년 동안 다투기만 하다 원래의 민족적 원기는 다 소진하고 발달된 것은 오직 의뢰성뿐이니, 망하지 않고 어찌하리오”라며 통탄했다.
김구 선생, 중국여성과 선상동거
자싱에 있는 임시정부 유적지 메이완졔
자싱의 난후는 중국 공산당이 상하이에서 피신해 배 위에서 회의를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난후의 중간에는 작은 섬이 있는데, 이곳에 옌위러우(烟雨樓)가 있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가장 역사적인 장소인 만큼 섬의 한단에는 회의가 열렸던 모양의 배가 복원되어 있고, 섬으로 연결되는 나루 옆에는 혁명기념관이 있다.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이 옌위러우를 비롯해 삼탑(三塔) 등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다.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선생은 개인적으로 움직였고, 임시정부는 다양한 방편으로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1932년 5월10일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이었던 김철이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칭타이(淸泰) 제 2여사(현재 항저우 위산(吳山)로 췬잉(群營) 여관) 32호에 임시정부 사무실을 개설함으로써 항저우 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항저우는 진시황이 도시로 만든 이후 남송 시대에는 수도였던 고도다. 하지만 근대 이후에는 그다지 행복한 기억을 갖지 못했다. 19세기에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의 싸움으로 파괴되었고,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상하이가 개항되자 항구로서의 번영을 상하이에 빼앗겼다.
1932년 5월14일 김구, 이동녕, 조완구, 조소앙 등 임정 주요인사가 항저우에 모여 향후 활동계획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중국측이 임시정부에 제공한 지원금의 처리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다. 이 일로 김구 선생과 이동녕은 인사도 없이 자싱으로 돌아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1년 동안 항저우에 자리한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한 상태가 됐다. 1933년 양기택 등이 김구 선생의 복귀를 유도했지만 선생은 자싱에서 두문불출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 내의 통일을 유도했다.
췬잉으로 이름을 바꾼 칭타이 여관은 현재도 여관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100여 개의 객실을 갖춘 이 여관은 카운터를 지나면 하늘이 내다보이는 화단에 파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1층 방은 100번대, 2층 방은 200번대의 번호로 바뀌었는데, 당시 32호는 지금 150번대 위치라고 관리인이 말해주었지만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우한 황학루
항저우시가 이 건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을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복원 작업에 나선 것이다. 나날이 늘어나는 한국 관광객을 유치하고, 항저우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한국으로선 반가운 일임에 틀림없다.
항저우 시절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임시정부 의정원 대다수가 가입한 한국독립당의 사무소인 항저우 쉐스(學士)로 스신팡 41호와 1934년 11월 28일 임시정부가 옮긴 판차오(板橋路)로 우푸(五福)리 2가 2호다. 그해는 항저우 임시정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해였다. 하지만 1934년 6월29일 한국독립당 이사이자 임시국무위원 겸 비서장인 김철이 광자의원(廣慈醫院)에서 병사하고, 1935년부터 미국 교포와 광둥 등지에서 대(對)일본 전선의 통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체적인 의견도 이 방향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항저우 시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1935년 7월5일 창당된 조선민족혁명당 등 사회주의 세력과의 통합 작업이었다. 김구 선생은 난징에 특무대를 설치해 군관학교의 기능을 만들려 했으나 갖가지 이견이 나와 혼란을 겪었다. 같은 해 9월 조소앙의 노력으로 통합이 가속화되고 11월3일에는 자싱 난후의 유람선 위에서 마라톤회의를 벌여 이동녕, 조완구, 김구, 조성환, 이시영, 송병조, 차이석 등을 국무위원으로 한 임시정부 활동을 재개했다.
1935년 항저우와 자싱을 오가면서 통합노력이 이루어졌지만 갈등이 겹치면서 항저우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이해 11월 임시정부는 전장(鎭江)으로 거처를 옮겼다. 전장은 난징에서 출발한 상하이행 열차가 30분 만에 도착하는 곳으로 북으로 창강(長江)과 맞닿은 도시다.
전장에 도착한 임정은 수이루스샹(水陸寺巷)로 58호 공립유치원(機關幼兒園) 자리에 여정을 풀었다. 하지만 전장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임정은 1936년 2월 난징으로 옮겨, 1937년 11월까지 그곳에 머문다. 난징시는 비교적 재개발이 더디기는 하지만 임시정부 관련 지역인 란치졔(藍旗街) 8호 등은 이미 재건축이 이루어져 임정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창사에서 김구 피격사건 발생
임시정부 사무실이 있던 항저우의 후볜춘 우물
임시정부가 난징에 머물던 1937년 7월7일 베이징(北京) 남쪽 교외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베이징, 톈진(天津)을 점령한 후 전쟁지역을 상하이로까지 확대시켰다. 당연히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도 위협을 받았다. 폭격도 이어졌다. ‘백범일지’에는 당시에 김구 선생이 자던 방의 천장이 무너질 만큼 심한 폭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군이 점점 다가오자 중국 정부는 충칭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결정했다. 임시정부 역시 충칭으로의 먼 이사길에 나섰다. 임정은 물가가 싼 창사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그해 12월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해 시민 수십만 명을 살육했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孫文)의 묘가 있는 난징은 태평천국의 수도로 내부의 전화를 겪은 이후 최대의 비극을 맞은 것이다.
임시정부는 배편을 이용해 난징에서 후난성의 성도(省都) 창사로 이동했다. 창사로 가는 배편은 난창(南昌)을 거쳐서 가는 길과 우한을 거쳐서 가는 길 두 가지가 있는데, 지금도 기차로는 하루, 배로는 3일 정도 걸리는 길이다.
후난성의 성도 창사는 마오쩌둥, 류사오치(劉少奇), 펑더화이(彭德懷) 등 중국 혁명을 이끈 주역들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중국 철학의 고향인 위에루(岳麓)서원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호남이 풍년이면 중국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만큼 곡창지역이다. 쓰촨에 못지않게 매운 음식이 유명하다.
위에루서원은 주희를 비롯해 왕부지(王夫之), 왕양명(王陽明) 등 중국 철학사의 거장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태평천국의 난 진화자이자 학자인 증국번(曾國藩), 마오쩌둥의 첫 장인이자 베이징대학 교수였던 양창제(楊昌濟) 등 근현대 학자를 배출한 곳이다. 마오쩌둥도 젊은 시절 잠시 이곳에서 공부했다.
김구 선생의 총상을 치료했던 창사 상아의원
조금만 걸어도 샹강의 중심부에 위치한 섬의 북부가 내다보이는 이곳에는 거주 기간이 짧아서인지 김구 선생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9호가 집이었다고 하지만 그곳에 사는 누구도 확인을 해주지 못했다.
이곳에서 창사의 중심길인 우이(五一)로로 내려오기 위해 작은 골목을 지나고, 제법 큰 길로 들어선 후 오른쪽 골목을 타고 들어가면 난무팅(南木廳)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김구 선생은 바로 이 마을에서 피격당했다. 1938년 5월6일 난무팅 9호에 있는 조선혁명당 당부에서 연회가 벌어져 김구 선생도 초청을 받는다. 연회 도중에 청년 활동가였던 이운환(李雲煥)이 권총을 난사해, 현익철이 죽고 김구와 유동열이 중상을 입었으며, 이청천이 경상을 입었다.
김구 선생은 사건 직후 자동차에 실려 상아의원(湘雅醫院, 현 호남대학교의과대학 부속병원)에 도착했는데, 의사는 진단 후 가망이 없다며 진료를 포기했다가 세 시간이 지나도록 숨을 거두지 않자 치료를 시작했다. 진료를 포기했기 때문에 홍콩에 간 아들 인에게 전보를 쳤을 정도였다. 사건 후 김구 선생에게 어머니 곽락원 여사는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이운환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에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손에 죽은 것만 못하네”라는 말로 분열되는 민족 정신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피살사건이 벌어진 난무팅 9호에는 아직도 당시의 건물이 남아 있다. 아무런 표지도 없지만 2층 건물에 살고 있는 이들은 가끔씩 찾아오는 한국인들을 통해 그 역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창사에 대한 공습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는 장제스(葬介石)에게 부탁해 광저우로 이사를 추진한다.
장제스, 임정 이주 때 열차 내줘
국공합작 이후에도 중국 내부에선 좌우 투쟁이 벌어졌고 중국 내 이권을 노리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으로 인해 장제스의 중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발생했고, 이 사건 이후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인들은 4억의 중국인도 못해낸 일을 소수의 망명정부에서 해낸 것에 놀라 한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38년 7월 임정은 장주석이 기차 한 칸을 내주어 광저우로 이동, 둥산바이위안(東山柏園)을 임시정부 청사로 하고, 아세아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둥산바이위안은 현재 둥산구 건설국이 자리해 있고, 아시아여관이 있던 자리는 둥산후(東山湖) 공원으로 바뀌었다.
광저우도 일본군이 빠르게 내륙으로 들어오고 있어 안전하지 못했다.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을 상하이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홍콩을 방문했지만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광저우 시내의 공습이 심해지자 광저우시 남쪽에 위치한 푸산(佛山 : 불산)으로 잠시 옮긴 후 임시정부는 다시 최종 목적지 충칭으로 향했다.
임시정부 대가족은 류저우(柳州), 구이양(貴陽), 쭌이(遵儀)를 거쳐, 1939년 3월 치장에 도착했다. 김구 선생은 광저우에서 다시 창사로 돌아온 후 후이화(懷化), 구이양을 거쳐 치장에 다다른다. 또 일부는 충칭이 창강의 상류라는 점을 알고, 우한에서 배를 타고 둥팅후(洞庭湖), 이창(宜昌), 싼샤(三峽), 완저우(萬州) 등을 경유해 충칭에 닿았다.
충칭 바로 아래에 위치한 치장에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까지 1년 반 가량을 머문다. 치장 시절 좌익과 우익이 합작해 7당 통일회의를 여는 등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좌우가 합작한 의미 있는 일이 이루어졌다. 좌우 분열양상이 짙었던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시키기 위해 김구 선생은 백방으로 노력했다. 이 결과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등 민주주의 세력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공산주의 세력인 민족전선연맹이 7당 통일회의를 개최했다. 비록 며칠 후에 민족혁명당 김약산 등이 찾아와 당 내부의 문제를 들어 협의안 변경을 요구해 통일회의는 파열되고 말지만, 임시정부 안에서 좌와 우의 결합 가능성을 보여준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상하이 훙커우공원 거사 후 일본경찰에 붙잡혀 연행돼 가는 장면으로 널리 알려진 사진 속의 인물은 윤봉길 의사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등 임시정부 연구를 계속해온 강효백 박사는 “임시정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이데올로기적인 통합을 이루고, 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 충칭 시기”라고 평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는 치장에서 충칭으로 옮기는 한편 9월17일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성립식을 갖고, 시안(西安)에 총사령부를 뒀다. 광복군의 창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백범일지’에 보면 충칭 시기 초반 임시정부의 지원에 냉담한 중국에 대해 임정은 “중국의 대일 항전이 이와 같이 곤란한 때 도리어 원조를 구함이 심히 미안하오. 미국에 만여 명의 동포들이 나를 오라 하고, 또한 미국은 부국이며 장차 미일 개전을 준비중이니 대미 외교도 개시하고 싶소. 여비도 문제없으니 여행권 수속만 청구하오”라는 입장을 전했다.
중국이 우선 중국과 관계를 맺은 후 미국과 관계를 맺으라며 계획서를 부탁하자 “광복군 결성을 허락해주는 것이 3000만 한족(韓族)의 총 동원적 요소”라는 서신을 장제스에게 보낸다. 장제스도 임정의 이런 요구에 흔쾌히 응해 광복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광복군사령부는 헐리기 직전
창강 수운의 핵심이며 근현대에는 공업도시 기능을 해온 충칭은 산둥성 칭다오(靑島)와 더불어 중국에서는 드물게 자전거를 보기 힘든 지역이다. 도시 전체가 수많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어 자전거를 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충칭은 내륙 공업요지지만 궁벽한 도시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 충칭의 구두닦이와 대나무를 이용해 짐을 운반하는 짐꾼은 공해도시와 고용 불안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싼샤댐의 건설로 인해 정부의 지원이 늘어나고, 과거 3000t 규모였던 화물선의 도시 진입 규모가 1만t으로 확대되면서 중국 서부의 물류 중심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충칭시 양류(楊柳)가(街)에 자리를 잡았는데, 일본군의 폭격이 심해지자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 같은 스반(石板)가로 다시 옮겼다. 그런데 이곳에 얼마 후 폭격으로 인해 큰 화재가 일어나자 우스예항(吳師爺巷)으로 옮겼으며, 다시 장제스의 도움으로 옌화디(蓮花池) 38호로 이주했다.
이 시기엔 김구 선생의 주도하에 비교적 통일된 임시정부가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의 재정지원금도 늘어 임정은 독립을 위한 갖가지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양류 청사는 이제 거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다. 또 이 일대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만큼 보존이 쉽지 않은 상태다. 그런 점에서 충칭에 남아 있는 임시정부 유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은 옌화디의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와 광복군 사령부 자리인 저우룽(鄒容)로 37호 건물이다.
옌화디 임시정부 청사는 2001년 2월 한국 기업의 후원하에 새롭게 정비되어 찾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옌화디는 충칭의 중심지인 우중취의 중심가 졔팡베이에서 10분쯤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옌화디 청사는 산비탈을 깎아 계단식으로 만든 건물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있는 중심 건물에 김구 선생 흉상과 태극기가 모셔져 있다.
좌우 벽면에 임정 활동의 기본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좌우로 통하는 각각의 방에는 외교활동과 군사활동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에서 나와 제법 넓은 계단을 따라가면 내무부, 재무부, 주석실 등이 갖추어져 있어 당시 강화된 임시정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옌화디 청사와 달리 저우룽로 광복군 사령부 자리는 도시개발계획으로 인해 허물어지기 직전이다. 이곳 한국광복군 청사는 일본이 중국대륙 침략을 노골화한 1943년부터 일제 패망까지 2년여 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항일 군사 공격을 준비하던 총사령부 건물이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징용됐던 우리 청년들이 소속 군대에서 탈출해 임시정부를 찾아들면서 광복군은 제법 큰 진용을 갖추었다. 하지만 현재 광복군 건물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해 머잖아 헐릴 위기에 놓여 있다.
충칭시대 임시정부는 제대로 된 구조를 갖추고, 광복군을 창설하는 한편 시안에 총사령부를 두는 등 활발한 군사활동도 전개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며 태평양전쟁을 개전하자, 임시정부는 곧바로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특히 1942년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좌우가 합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광복군에 있어 가장 가슴 벅찬 때는 1945년 1월31일,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찾아온 장준하, 김준엽 등 학병 50명을 맞은 날이라고 김구 선생은 밝히고 있다. 이날 답사에서 장준하는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고사하고 우리 언어도 능숙치 못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유학중 징병으로 출전케 되어 가족과 이별차 귀가하였더니, 부모와 조부모들이 비밀히 교훈하기를 ‘우리의 독립정부가 중경(重慶, 충칭)에 있으니, 왜군 앞잡이로 끌려다니다가 개죽음을 하지 말고 우리 정부를 찾아가서 독립전쟁을 하다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말에 따라 일본 부대에서 탈주하다가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우리 정부를 찾아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45년 7월 임정은 시안과 안후이(安徽)성 푸양(阜陽)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해 미국과 연합작전을 준비했다. 특히 8월 시안에 가서 미군 다노베 장군을 만났다. 시안은 현재 산시(陝西)성의 성도로 당나라 수도였던 곳이다. 비교적 척박한 느낌의 황토지역이다.
하지만 중국 현대사에서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1936년 12월12일 이곳에서 공산당 토벌을 책임진 동북의 군벌 장쉐량(張學良)이 전쟁을 독려하려고 찾아온 장제스를 감금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 장쭤린(張作霖)이 일본에 의해 폭사한 것에 분을 품었던 그는 장제스가 항일전보다 공산당과의 내전에 힘을 집중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내전의 정지와 더불어 거국일치에 의한 항일전쟁을 주장하며 장제스를 억류했다. 이로써 대장정으로 인해 극도로 힘이 약화됐던 공산당은 재기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이 지역은 공산당 근거지인 옌안(延安)과 가깝고, 동북쪽을 향해 진격할 수 있는 근거지여서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 등이 전략적으로 군사력을 배양하던 곳인데, 우리 광복군도 자연스럽게 그 속에 끼이게 됐다.
김구 선생은 광복군을 시찰하기 위해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만난 미국 교관이 “내가 앞서 중국 학생 400명을 모아서 시험하였을 때도 발견하지 못한 해답을 귀국 청년 7명에게서 찾아냈소. 참으로 앞날이 촉망되는 국민이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김구 선생은 시안에서 일본의 패망소식을 들었다. 이때 임정은 시안과 푸양에서 훈련시킨 군인들을 산둥반도에서 배를 통해 고국에 침투시키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운 상태였다.
해방 후 미군은 김구 선생에게 임시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요구하는 등 정치적 갈등이 시작됐다. 한국에 들어온 후 미국과 소련 양국에 휘둘리는 복잡한 정세속에서 김구 선생은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1949년 6월26일 12시36분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에 맞아 운명했다.
김구 선생이 잠시 머물렀던 하이옌의 재청별서
임시정부의 역사적 가치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임시정부 연구에 몰두하다 정년퇴임한 성신여대 이현희 명예 교수는 “우리 정부가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으로 헌법에 규정한 이상 임시정부의 가치를 더욱 소중히 해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는 3권 분립은 물론이고 공화정 형태를 갖춘 정부였다. 의정원 회의록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당시 임정 활동의 발굴에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임시정부의 고난에 찬 걸음들은 일제 시대에도 민족 주권의 실체를 살려놓았다는 점에서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임정 이주사는 해방 후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서 때로는 폄하되기도 했지만 우리 역사에 가치 있는 한 장면으로 기록될 부분이다.
임시정부의 활동 가운데 재평가되어야할 것이 많다. 그 중 하나는 수없는 갈등 속에서 이루어낸 좌우 합작이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등에 공산당이 침입한 후 각 기관을 파괴한 것에 대해 통탄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통합작업을 통해 치장 시기에는 일시적이나마 사상적 통합을 이루어냈고, 충칭 시절 광복군을 만들 때는 김원봉 등 좌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사실상의 사상 통일도 이루어냈다.
중국이 시안사변 등 정치적 격변을 통해 사상통합을 이룬 반면에 광복군 창설은 임시정부가 수차례의 갈등과 마찰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룩한 역사였다.
임시정부는 광복을 한 해 앞두고는 군대 작전권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는 중국 공산당 대표인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동비우(董必武)의 환송을 받았다. 임시정부는 중국 내 주요 정치 세력으로부터 존중받는 대한민국 정부였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자취를 답사하는 데는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열흘 정도가 걸린다. 임정의 이주로는 한민족의 역사가 끊어지는 것을 막아준 성공의 여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