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486, 586…686세대는 왜 86이라 하는가

[오정환의 시대통찰] 이해찬 전 총리 영결식 통해 본 386

  • 오정환 정치 칼럼니스트·전 MBC 보도본부장

    입력2026-02-15 0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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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숨겨온 역사 진실 파헤치는 ‘광장서적’

    • 1980년대 청년들이 믿었던 허상들

    • 최인훈 ‘광장’ 문제의식, 아직도 유효할까

    • 20대 시절의 ‘관용’에 빠진 686의 ‘심리적 퇴행’

    • 386은 역사적 평가 받아…686은 다른 역할 모색해야

    김민석 국무총리가 1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고(故) 이해찬 제36대 국무총리 사회장 영결식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민석 국무총리가 1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고(故) 이해찬 제36대 국무총리 사회장 영결식에서 조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월 26일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타계했다. 그가 지켜온 정계의 위상만큼 부재의 파장도 깊고 길 것이다. 이해찬 전 총리는 1970년대 운동권 학생에서 시작해 만난을 극복하고 권력의 핵심에 이르렀다. 우리 사회에 그의 꿈대로 광장을 짓고 그의 신념으로 채웠다. 그러나 시간이 그를 퇴장시키듯 그의 광장도 언제나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 그와 함께 광장을 지향했던 이들이 이제는 그 안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광장’의 문제의식은 아직도 유효할까

    최인훈의 ‘광장’은 새로운 세상을 본 창이었다.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필자에게 북한을 체제 비교의 대상으로 상정한 자체가 충격이었다. 1980년대 많은 대학생이 걸었던 길이 거기서 출발했다. 

    소설 속 주인공 이명준은 철학과에 다니다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경찰에 체포됐다. 철학과이면서 마르크시즘을 공부하지 않느냐는 억지와 함께 고문까지 당했다. 이명준은 남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북한으로 가지만 그곳에는 혁명의 구호만 가득할 뿐 개인의 자유와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남과 북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한 채 6·25 전쟁에 인민군으로 참전하고 포로가 됐다.

    이명준은 포로 송환 때 중립국을 선택해 인도행 배에 올랐다. 그는 항해 내내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환영에 시달린다. 그리고 마침내 배를 따라오던 갈매기 두 마리가 자신의 죽은 연인과 딸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광장인 바다에 몸을 던진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만 그들의 사랑을. 돌아서서 마스트를 올려다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제 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최인훈이 월간지 ‘새벽’에 ‘광장’을 게재한 것은 1960년 10월이었다. 서문에서 “구정권 아래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 썼다. 4·19 이후 자유로운 문화 속에서 탄생한 이 작품은 분단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수십 년간 이 소설은 교과서에 실렸고, 여러 차례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돼 수험생들의 ‘필독서 1순위’로 꼽힌다. 자료를 찾아보니 학습 포인트가 당시의 이념 대립과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분석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고 했다.

    그런데 좀 어색하다. 이념 사이에서 고뇌하고 그것 때문에 목숨을 던진다는 이야기를 지금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이미 북한은 체제 경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인데, 어른들이 오래된 감동을 강요하는 듯하다. ‘광장’의 문학사적 가치에 그치지 않고 반세기 이전의 문제의식을 강요한다면 기성세대의 횡포라 할 것이다. 

    1월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빈소에서 김민석 국무총리(왼쪽 첫번째),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두번째),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오른쪽 두 번째), 유시민 작가(오른쪽 첫 번째)가 조문객을 맞이했다. 사진공동취재단

    1월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빈소에서 김민석 국무총리(왼쪽 첫번째),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왼쪽 두번째),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오른쪽 두 번째), 유시민 작가(오른쪽 첫 번째)가 조문객을 맞이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신림동 광장서적과 의식화 교재의 역할

    1980년대 중반 대학에 다닌 필자에게는 또 다른 광장이 있었다. 그곳에도 금지된 것을 어긴다는 은밀함과 소소한 긴장이 감돌았다. 하숙촌에서 신림천 너머 289번 버스 종점 옆의 ‘광장서적’이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 선배가 운영하는 서점이라고 했다. 

    이해찬 전 총리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돼 서울대에서 제적됐다. 출소 후 여러 직장을 다니다 1978년 서점을 열었다. 서점 이름을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따왔다. 거기서 여러 사회과학 서적 그리고 선배들이 알려준 금서들을 구입했다. 

    20대 초반 대학생에게 그 책들은 마치 군사정부가 숨겨온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 같았다. 운동권 서클마다 신입생들의 초기 의식화 교재로 사용했다. 아직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던 이들이 사회 비판 속의 이념을 찾아내 판별하기는 쉽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퍼져나간 주장은 일반 대중에게도 진보좌파 진영이 정의롭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러한 사회 배경 속에 성장한 정치권의 386세대가 어느덧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했다. 대학 운동권 출신의 유력 정치인 일부만 열거해도 다음과 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이광재 전 의원은 연세대 재학 중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역시 고려대 재학 중 반미청년회 사건으로 체포돼 10개월 동안 수감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 때 정권의 2인자라 불렸던 임종석 전 비서실장은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3기 의장을 맡아 임수경의 평양 축전 참가 등을 주도했다.

    성숙은 어디로…60대의 나이를 부끄러워하는 686세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유혈 진압된 데 대해 당시 대학생들은 광주(1980), 부산(1982), 서울(1985) 등의 미 문화원에 침입해 방화 및 점거하며 미국의 책임을 따지는 농성을 벌였다(위부터). 동아DB

    1980년 5·18민주화운동이 유혈 진압된 데 대해 당시 대학생들은 광주(1980), 부산(1982), 서울(1985) 등의 미 문화원에 침입해 방화 및 점거하며 미국의 책임을 따지는 농성을 벌였다(위부터). 동아DB

    정청래 현 민주당 대표는 건국대 재학 중 전대협 산하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에서 활동했으며, 1989년 주한미국대사 관저 점거 및 방화 시도 사건으로 투옥됐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1985년 서울대 삼민투쟁위원회 위원장 함운경(현 국민의힘 마포을 당협위원장), 연세대 삼민투 위원장 박선원(현 민주당 국회의원)과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해 징역 5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은 서울대 재학 중 운동권에 투신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결성했고, 1984년 유시민 등과 함께 민간인 감금 폭행 사건 주동자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이 정치권에 입문할 때 언론은 ‘386세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무슨 뜻인지 모호할 수도 있겠다. 이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됐지만, 1980년대 말 XT 컴퓨터는 사진 한 장 내려받는 데 하룻밤이 다 갔다. 뒤이어 삼보 트라이젬의 286AT 컴퓨터가 나왔을 때 기술의 진보에 경탄했다. 거기에 3D 게임까지 할 수 있는 32비트 386 컴퓨터는 미리 보는 미래나 다름없었다. ‘386’이라는 차명은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에게 참신하고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선사했다.

     그리고 세월이 또 흘렀다. 386세대의 허리인 84·85학번 즉 1965·1966년생들이 작년과 올해 모두 환갑을 맞는다. 당초 조어법대로라면 이제 686세대라 불러야 한다. 그런데 486, 586까지는 멀쩡히 자칭하던 그 세대가 수년 전부터 앞자리를 떼고 스스로를 86세대라고 한다. 한 세대가 얌체 짓을 하는 것이다. 

     왜 그들은 60대가 되는 게 숨기고 싶도록 부끄러울까. 아마도 자신이 없어서일 것이다. 686세대가 지난 40년 동안 얼마나 지적으로 성숙하고 발전해 왔는지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게 마땅치 않으니 여전히 20대의 열정과 시행착오에 대한 사회적 관용의 미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일종의 심리적 퇴행이다. 그것이 686세대와 진짜 청년들의 거리를 떼어놓는 이유다. 

    1980년대 청년들이 믿었던 수많은 허상

    1980년대 청년들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극복했어야 할까. 먼저 그들이 성장했던 지적 토양을 돌아보자. 젊은 날의 필자도 뛰는 가슴으로 읽고 밤늦도록 토론했던 책들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민족경제론’ ‘전환시대의 논리’ 등 모두 한때는 금서(禁書)였고, 또 한때는 개혁의 지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담대했던 저자들의 주장을 군데군데 초라하게 만들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한반도 분단과 냉전이 미국 군산복합체의 수요 창출을 위해 야기됐다고 설명했다. 미국 수정주의학파의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인데, 지금은 많은 학자가 부정확하고 과장된 수사로 간주한다. 냉전은 그보다는 미국과 소련의 상이한 이념, 세력권 확보 경쟁, 상호 불신 등 복합적 원인에서 비롯됐다. 군산복합체 음모론이 대중의 흥미를 끌지 모르겠지만, 학자의 주장이라면 좀 더 구조적이고 정교한 근거가 필요하다.

    더구나 냉전 종식 이후 비밀 해제된 자료를 보면,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에 암호 전문을 보내 ‘북한에 통일전선전술에 기초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하라’고 지시했다. 광복 한 달 만에 한반도 분단이 사실상 고착된 것이다. 미국 역시 1947년 4월 21일 미 국무부와 육군부의 한국문제합동위원회가 ‘한국이 미국에 경제적 중요성이 없으며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만드는 게 미국의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해 철수를 고려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또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을 ‘지주들에게 유리하게 실시해 지주층을 권력 기반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고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반면에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서는 ‘분여된 토지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매매를 금지한다’는 법조문을 들어 봉건적 수탈 관계가 부활할 소지를 제거했다고 설명했다. 토지소유권을 농민이 아닌 정부가 장악한 북한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1400만 농민들이 자작농이 되고 지주들은 대부분 몰락했다. 소작지 박탈의 생존 위협에서 벗어난 농민들은 근대 시민의 경제적 기반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내가 안 되면 내 자식이라도 출세시키겠다는 자발적 중노동 속에 전 국민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향해 줄달음치는 역동적 사회가 시작됐다. 

    박현채 교수가 지은 ‘민족경제론’에서 오랜만에 ‘매판자본’이라는 단어를 봤다. 그는 광복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이 전근대성과 매판성을 속성으로 하는 관료독점자본의 급속한 형성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일본과의 종속적 경제 관계 단절로 미약하나마 성장하기 시작했던 국내적 분업 관련을 갖는 토착적 민족 기업이 소멸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정부마저 대기업을 고용과 성장의 주체로 인정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대단히 어색한 논리다. 그러나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삼성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정치권과 언론계에서 이른바 ‘삼성 저격수’들이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 뿌리가 1980년대 본격 등장했던 매판자본론이었다. 

    박현채 교수가 생전에 지향한 세계는 우리가 가지 않았던 길이지만 그 결말은 알고 있다. 사회주의권이 아니더라도 남미 여러 나라가 수입대체 정책으로 자국 기업 보호에 나섰다 경쟁력 붕괴의 늪에 빠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2년 박 교수와 절연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1975년 발간된 ‘전환시대의 논리’는 마오쩌둥 시대 중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넘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까지 옹호했다. 1958년부터 5년간의 대약진운동은 토법고로(土法高爐·흙으로 만든 작은 용광로)와 제사해운동(除四害運動·모기·파리·들쥐·참새를 제거하려 한 대표적 실패 정책)으로 대표되는 터무니없는 정책과 폭력적인 진행으로 대재앙을 불렀다. 중국 전역에서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런데도 저자 이영희 교수는 이를 “별다른 현대적 기계설비 없이 순전히 스스로의 창안과 절약과 집단적 노동으로 방대한 건설을 이룩해야 했던 초기의 긴박한 현실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686세대, 어제와는 다른 길 가리켜야 할 때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도 현대 중국인들이 십년동란(十年動亂)이라 하며 언급조차 꺼린다. 이영희 교수는 이를 소련식 관료주의의 근본적 해결 시도로 보았다. “하급 노동자에 의한 전문가·관리인들에 대한 자유스러운 공개비판, 노동자의 고급 과학기술 습득을 통한 과학신비주의 타파, 전문가·관리인들의 육체노동을 통한 권위의식 제거, 노동자의 집단적 경영정책 결정으로 그것을 보장하려 하고 있다.”

    그나마 이영희 교수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 1990년대 이후 몇몇 자리에서 ‘중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식민지론과 매판자본을 주장했던 학자 대부분은 드러난 진실을 여전히 부인했다. 이영희 교수의 뒤늦은 사과도 당초 주장이 청년들에게 미쳤던 지대한 영향과 비교하면 대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때는 386세대였던 이들의 역사적 공헌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들의 사회변혁 의지가 대한민국 민주화의 주동력이었다. 그러나 686세대가 된 이제는 다른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들은 기성세대 중 사회적 영향력의 정점에 올라 있다. 시행착오가 허용될 수 없는 위치다.

    과거에 오류가 있었다면 철저히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30대, 2010년대 학번, 1990년대 출생의 새로운 청년세대가 덜 아파하며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다. 반세기 전 이 땅의 지식인들이 갈구하던 광장은 이제 열려 있다. 그 광장에 서서 또 다른 반세기에 도달하기 위해 어제와는 다른 길을 가리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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