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나 2004년이나 ‘양키 스테이 히어!’
- 미국의 일방통보와 실속 없는 매달리기
- “한국이 비타협적 자세 취해도 감축일정 변하지 않을 것”
- 한미 특수관계가 아닌 미국의 세계화 전략에서 봐야
2004년 주한미군 재배치 및 감축 계획이 나왔을 때도 노무현 정부와 부시 행정부의 한미관계는 냉랭한 상태였다. ‘이혼’이나 ‘별거’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과거 군사정부 시절과 달리 최소한 한국은 미국과 ‘같은 방’을 쓰며 ‘잠자리’를 같이하진 않았다. 서로 대화 없이 ‘각 방’을 쓰던 참이었다. 워싱턴이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고 해서 둘 사이가 냉랭해졌든, 한국과의 ‘금슬’이 전 같지 않아 주한미군을 빼겠다고 했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에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한미군 변동은 군사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주권국에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단 정치적인 사안인 데다 2004년 한 해 내내 한국을 들쑤셔놓은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에 대한 논의 역시 다분히 정치색 짙은 것이었다.
한국전쟁 후 미 지상군이 한국에 반영구적으로 주둔한 이래 주한미군이 움직이려 한 것은 크게 세 번이다. 1971년 닉슨 행정부 때와 1977년 카터 행정부 때, 2004년의 부시 1기 행정부 때다. 주한미군의 규모나 편제, 심지어 주둔군의 성격 자체를 바꿔보려는 미국의 정치 군사적 동기는 매번 달랐지만, 한국 정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오직 ‘철군 반대’였다.
노무현 정부가 대미 외교에서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대북 접근법에서 부시 행정부와 이견을 보인 것일 뿐 전반적인 대미관계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주한미군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주한미군 변동에 관한 한 노무현 정부, 아니 한국 정부가 제 목소리를 낼 여지는 무척 좁다. 과거 군사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김대중 정권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미 2사단 재배치 등 주한미군 변화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긴 하지만 큰 틀과 기본적인 성격에서는 1970년대 초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1970년대처럼 2004년에도 한국은 ‘양키 고 홈(Yankee Go Home)’이 아니라 ‘양키 스테이 히어(Yankee Stay Here)’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주한미군 문제의 첫 번째 특징이다.
한미 특수관계의 허와 실
1970년 여름 닉슨 행정부가 주한미군 2만명 감축을 공식 발표했을 때 미 국무부의 BIR(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은 ‘정보 노트(Intelligen ce Note)’라는 내부 문서에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한국 정부 반응과 여론을 분석해놓은 바 있다. 국무부의 BIR은 미 행정부의 정보계통 부서 중에서도 방대한 정보 수집과 탁월한 분석 능력으로 이름이 나 있는 곳이다. 이 BIR의 정보 분석자료 제목이 ‘한국 : 양키 스테이 히어’이다. 다음은 1970년 8월14일자 ‘정보 노트’ 전체 내용을 옮긴 것이다.
[ 정보 노트
한국 : 양키 스테이 히어
한국 여론 반응 : 7월9일 주한미군 병력 2만명에 대한 공식 감축계획이 발표되자, 4만3000명의 병력이 잔류하게 된다는 사실은 무시된 채 한국은 예상했던 대로 격분하는 반응을 보였음.
한국 정부는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면서 한국이 북한의 어떠한 위협에 대해서도 경제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충분히 대처할 만한 힘을 갖추게 될 1975년이나 1980년까지는 미군이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섰음. 한미간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는 닉슨 독트린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음.
한국 언론은 미국의 지원 없이는 한국 안보가 취약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철군이 이루어지기 전에 대규모로 병력을 현대화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많은 지면을 할애해 상세하게 기사화했음. 북한의 전쟁 준비와 최근의 도발 행위에 대한 과장된 기사 역시 탁월하게 작성되었음.
한국 정부는 불안한 안보 상황으로 여론의 불안감이 증폭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는 주한미군 철수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해버렸으며, 한국 정부는 충분한 보장이 없는 한 철군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음.
한편 한국 정부는 총리 및 내각이 총사퇴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으며, 이는 호놀룰루에서 개최되는 한미 국방장관 회의에서 논의될 한국군 현대화 협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나 효과는 없을 것으로 보임. ]
미 지상군이 한국에 주둔한 이래 주한미군은 한국 안보와 동의어였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즉각 한국의 안보가 위태롭게 되고, 주한미군이 그대로 있는 한 한국의 안보는 튼튼한 것으로 각인됐다.
주한미군과 한국 안보를 동일시하는 논리는 1960∼80년대를 거쳐 어처구니없게도 지금도 여전히 괴력을 발휘한다.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 계획에 입 다물고 있는 행위 자체가 곧 친북으로 매도된다. ‘양키 스테이 히어’를 외치지 않는 한 용공이자 반미이며 친북이 된다. 2004년에 작성됐을 국무부 BIR의 정보 노트가 또 한번 ‘한국: 양키 스테이 히어’라는 제목을 택하지 않았으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하기 힘들다.
헛발질하는 한국 정부와 언론
이 정보 노트는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 문제를 다루는 방식의 두 번째 특징을 보여준다. 주한미군 문제를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려는 ‘한국화’이고, 이미 결정이 난 미국의 대한 군사정책에 뒤늦게 대처하려는 ‘뒷북치기’가 그것이다.
‘괌 독트린’이라고도 불리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것은 위의 BIR 분석이 나오기 1년 전인 1969년 7월이다.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의 손으로 직접 챙겨야 한다는 것이 닉슨 행정부의 새로운 대외정책이었다. 주한미군 일부의 철군계획 역시 닉슨 행정부가 박정희 정부에 이미 통보한 사안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다음 닉슨 행정부가 철군을 공식 발표하자 ‘한미간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는 닉슨 독트린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며 한국 내 여론을 무마하려 들었다. 언론도 앞장섰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는 1년 후인 1971년 2만명 철군을 단행했다. 이미 짜여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겉모양새는 박정희 정권과 닉슨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놓고 마치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비쳐졌으나, 사실상 미 지상군 철군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고 시행만 남겨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러 면에서 주한미군이 필요했던 박정희는 미국의 철군 발표가 나오자 한국 국내 여론을 동원하고 언론을 앞장세워 철군을 막으려 했다. 그렇게 미국을 압박하면 미 지상군이 철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아니면 최소한 미군 철수는 막지 못하더라도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미국의 지원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박정희는 미국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우선 정책이 투명하지 못했고 여론을 이용하는 시기를 잘못 선택했으며 더구나 여론을 제 입맛에만 맞춰 악용했기 때문이다. 민감한 안보 관련 사안이니 자세한 내막은 국민이 시시콜콜하게 알 필요 없고, 국가 안보를 책임진 정권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주한미군 문제나 한미관계를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1970년대나 2000년대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한미 두 정부간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은 일부 고위 정책 결정자들만 독점하고 있다가 흡족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그때서야 여론을 동원해 미국을 압박하려 든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 여론에 밀려 이미 내려진 정책 결정을 번복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는 주한미군 재배치 및 감축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 방식이나 여론 형성 과정 역시 1970년대와 견주어볼 때 판에 박은 듯이 닮아 있다. 부시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지휘하에 해외 주둔 미군의 편제 및 규모를 포함해 미국 군사력 전체를 면밀히 재검토했고, 국방부가 작성해 의회에 보고하는 이른바 QDR(Quadrennial Defense Review)이라 불리는 4년 단위 국방검토안에서 군사력 재편의 기본 틀을 이미 밝혔다.
21세기 미군 재편의 교과서 격인 이 QDR이 나온 것은 2001년 9월30일이고, 이때 이미 해외 주둔 미군을 지상군 중심의 붙박이 편제에서 신속 기동 및 원정군 형태로 재편할 필요성이 있다는 구상이 밝혀졌다. 주한미군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주한미군의 기본 성격을 비롯해 전체 규모와 형태에 변화가 있으리라는 것은 이미 3년 전에 결정돼 있었던 것이다.
“우리 결정엔 아무런 변화 없을 것”
그러나 한국에서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말 미 관리들의 입을 통해 구체적인 주한미군 재배치 계획안이 언급되기 시작하면서다. 게다가 노무현 정권에서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 문제가 처음 거론됐을 때 대부분의 한국 내 언론은 마치 해외 주둔 미군 가운데 주한미군에만 변화가 있는 것처럼 사안을 ‘한국화’시켜버렸다. ‘한미간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는 닉슨 독트린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답습한 것이다.
앞에서 본 국무부 BIR 자료가 나오기 9일 전인 8월5일자의 다른 국무부 문서에서도 철군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입장이 밝혀져 있다. 다음은 마셜 그린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작성해 윌리엄 로저스 당시 국무장관 앞으로 보낸 것이다.
1977년 5월 기독교도 3000여명이 서울 무교동에서 정동까지 미군 철수반대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1970년 8월5일수신 : 국무장관발신 : 동아태 담당 마셜 그린주제 : 8월5일 오후 4시(수요일) 김동조 주미 대사 면담시 언급할 내용 요약
오늘 오후 4시 윈드롭 브라운 대사 면담시 브라운 대사가 김동조 주미 대사를 동반할 것임. 김동조 대사에게 우리의 입장을 솔직하게 말하고 아래 사항을 분명히 해둘 것을 장관께 권함.
1. 1971 회계년도 말까지 주한미군 2만명을 감축한다는 우리의 결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임. 12월부터 시작될 이 철군은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이미 통보한(indicated) 철군 계획에 따라 진행되는 것임.
2. 한국군 현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의회의 승인을 받아 한국 정부에 실질적인 현대화 프로그램을 제공할 의사가 있음. 과거 20여년 동안 우리는 한국을 지원해왔으며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한국 정부도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우리의 약속에 신뢰감을 보여주어야 함.
3. 협조를 거부하며 공개적으로 충돌을 빚거나 비타협적 자세를 취하더라도 지상군 감축 일정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의회의 지원을 얻기가 어렵게 되며 미국 내에서의 한국 이미지에도 손상이 갈 수 있음.
4. 1954년의 한미 상호방위조약에도 이미 명시되어 있듯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적인 약속은 아무런 변화가 없음. 패커드 국방장관이 호놀룰루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더 이상의 어떤 확약이나 추가 약속을 할 수가 없음.
5. 한국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으며 방위 분야에서도 상당 부분 책임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껴야 할 것임. 우리의 (감군) 제안은 한국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반영하는 것임.
6. 한국 정부는 우리에게도 나름대로 경제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식해야 함. 닉슨 독트린은 우리가 겪고 있는 예산 압박을 줄이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국제사회에 공포한 바대로 우리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견지해 갈 것임.
주한 미 대사관에서 포터 대사의 8월3일자 박정희 대통령 면담(서울 4044 배포 금지) 내용을 보고해왔음. ]
박정희의 대책 없는 버티기 전략
이 문건에 암시되어 있듯이 주한미군 문제는 당사자인 한국과의 협상(negotiate) 대상이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감군 일정을 ‘통보(indicated)’했을 뿐, 그 흔한 외교 수사인 ‘협의’나 ‘상의(consult)’라는 표현조차 쓰지 않았다. 감축 시기, 일정, 규모 등 모든 것이 지상군 파견국인 미국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주한미군 문제의 세 번째 특징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미국의 주도권 행사와 한국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다.
위 문건에서 언급된 포터 주한 미 대사의 박정희 대통령 면담록에서도 미국의 이런 일방통행적 태도는 곳곳에서 드러난다(박정희와 포터의 대화록은 ‘신동아’ 2000년 3월호에 게재됐으며, 필자의 책 ‘미국 비밀문서로 본 한국 현대사 35장면’에도 전재되어 있음). 포터 대사는 1급 비밀로 분류된 이 극비 면담록에서 ‘박 대통령의 협조가 있든 없든 미국의 결정은 그대로 시행된다는 사실을 그에게 분명히 전달했다’고 적고 있다.
1970년 8월4일 청와대에서 이루어진 단독면담에서 포터는 박정희에게 “철군안에 대해 한국과 합동작업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한국측이 우리와 대화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 유감”이라면서 미국이 단독으로 마련한 구체적인 철군안을 밝혔다. 1970년 12월까지 5000명을 줄이고, 1971년 3월까지 8500명을 추가로 줄이며, 다시 1971년 6월30일까지 4900명의 병력을 감축한다는 안이었다.
박정희는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보장이 없는 한 철군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며, 쌍방이 받아들일 만한 결론이 없이는 한국 정부는 대화에 응할 수 없다고 버텼다. ‘만약 미국이 감축을 진행한다면 반대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협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박정희의 버티기 전략이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이렇게 토를 달았다.
“한국 정부가 비협조적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 결정이 나기에 앞서 한국 정부의 의견을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1년의 미 지상군 일부 감축이 닉슨 독트린이라는 미국의 신외교 정책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1977년 카터 행정부 때 거론된 주한미군 철수는 민주당 정권의 다분히 정치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웠고, 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구체적인 철군안을 입안했다. 카터 행정부가 추진한 시간대별 주한미군 철수 입안 과정은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 결정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훌륭한 사례를 제공한다.
미 군부는 주한미군 철군에 반대
우선 백악관에서 1977년 1월26일 대통령 검토 각서(PRM, Presidential Review Memorandum)가 작성된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만든 것으로 대한반도 정책 검토 지시 문서다. 이 대통령 검토 각서에는 철군 규모 및 시기 등 구체적인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정책검토위원회(PRC, Policy Review Committee)가 할 일을 명시해 놓고 있다.
[ ‘대통령은 국무부가 주재하는 정책검토위원회에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검토를 수행할 것을 지시했음. 검토 작업은 3월7일까지 완료되어야 하며, (a)한반도에서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 감축 (b)주한미군의 남한 내 재배치 (c)한국에 대한 향후 미국의 군사 지원 수준 등 8개 항목을 검토해야 함.’ ]
정책검토위원회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철군의 구체적인 병력 규모 및 시기 등 철군 조건을 검토한다. 이 위원회에서는 1979년 말까지 모든 지상군 전투병력 및 전투지원 부대를 철수하는 전면 조기 철수 방안에서부터, ‘이미 철수계획에 잡혀 있는 3200명을 포함, 조기에 7000명을 철수하되 추후 철수는 긴장 완화에 따라 조절’한다는 단계별 철수 방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개 안이 제시됐다.
국무부는 이 위원회 안을 바탕으로 3월10일 밴스 국무장관 앞으로 대통령 검토 각서에 대한 답변을 제출한다. 이 2급 비밀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국무부의 의견이 첨부되어 있다.
[ ‘예상했던 대로 철수에 따른 위험부담 문제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음. 합동참모부는 가장 보수적인 조건을 건의할 것임. 그러나 철수가 신중하게 이루어지고 북한이 오해할 만한 메시지가 전달되지만 않는다면 위험부담은 능히 수용할 만함.’ ]
미 군부는 카터의 철군계획에 반발했다. 예견됐던 일이었으나 펜타곤의 반발은 의외로 거셌다. 그러나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같은 해 5월16일 국방부 차관실은 카터 대통령 앞으로 비망록 한 건을 작성해 발송한다. 제목은 ‘미국의 대 한국 정책’이다. 위의 국무부 문서에서 언급된 합동참모부의 ‘가장 보수적인 조건’이 반영된 안이다.
‘미국 신용지원으로 한국이 재원 조달’
다음은 국방부에서 작성된 이 철군안 가운데 주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 국방부 차관실
대통령을 위한 비망록
이 비망록은 대통령의 5월5일자 요청에 따른 것으로, 한국의 미 제2사단 병력 중 2개 여단 철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임.
a. 지상군 철수
본 철군안은 시험적인 것이며 추후 평가 및 한국 정부와의 구체적인 상의를 거쳐 일부 변동이 생길 수 있음. 1978년과 1980년에 시행될 대통령의 철군 가이드에 따라 합동참모부는 잔류 지상군 병력의 전투력을 극대화하고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왔음. 그 결과 1980년까지 잔류하게 될 전투 여단은 효율적인 자체 방어 능력을 갖추게 될 것임.
- 2사단에서 최초로 감축되는 1개 여단(6000명)은 적절한 지원과 1977/1978 회계연도의 감축/전출 계획에 따라 1978년 12월31일까지 철수함.
- 다음해 초 1개 여단 본부, 2개 보병 대대, 1개 포병 대대, 1개 xx 대대 및 지원 부대(2900명)를 철수함.
- 2차 추가 철군은 1980년 6월30일까지 시행되며 잔여 여단과 추가 병력(9000명)임.
- 1979년 1월에서 1980년 7월 사이에는 추가된 여단 본부와 2개 보병 대대, 2개 포병 대대, 1개 항공 방위 대대, 비행 대대 및 지원 부대(6300명)를 철수함.
c. 한국군에 요구되는 것들
미 지상군 전투 병력 철수에 따라 한국군에 요구되는 사항들을 분석했음. 미 지상군 철수는 화력 및 지원력의 유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대북 억제력 감소도 의미하기 때문임. 이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한 재원 조달은-미국이 조달하든 한국이 조달하든-동아시아 관계부처 합동 그룹(East Asian Interagency Group)이 제시한 것임. 이 분석은 한국군 증강 계획(향후 5년 동안 50억∼60억달러 소요)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며 미국의 신용 지원으로 한국이 재원을 조달하게 됨. ]
8월5일 이라크로 차출되는 주한미군 육군 2사단 2여단 병력 일부가 경기 오산 공군기지에서 이라크행 군수송기에 오르고 있다.
[ ‘한국군 훈련 지원 : 한국군이 새 장비를 운용하는 능력을 갖추는 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훈련임. 한국군은 이미 다양한 형태의 미 육군 교육을 이수했고 관리 훈련을 받았음. 현재 우리가 가장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특수 장비와 특수 기술 교육을 향상시키는 것임.’ ]
국무부가 ‘가장 보수적인 철군안’이 될 것이라고 평했던 국방부의 대통령 보고서와 국무부 중심으로 구성된 정책검토위원회가 작성한 철군안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정책검토위원회는 지상군 철수를 기정사실화한 후 철수조건 및 시간표의 윤곽만 제시한 반면 국방부는 13장이나 되는 장문의 보고서에 철군 후 예상되는 문제점과 대처 방안을 시시콜콜하게 적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간접적이고 역설적인 방법으로 철수계획의 부당성을 치밀하게 강조한 셈이다.
지상군 철수 방안을 짜보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대해, 2사단이 보유한 단거리 샘 미사일 현황을 비롯해 심지어 헬리콥터와 탱크 숫자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미군이 몇 대를 가지고 나오면 한국군이 몇 대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사단장급 보고서를 작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카터 대통령이 과연 이 보고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모를 일이나, 끝까지 읽으려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은 2년 6개월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1개 전투대대 감축으로 흐지부지돼버렸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미 군부에 무릎을 꿇었듯이 최고 결정권자의 정치적 판단이 군부의 입김을 이겨내지 못한 또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를 남긴 셈이다.
주한미군이 지닌 정치적 위력은 나토군이나 주일미군 등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그 어느 미 지역군보다도 막대하다. 1949년 미군 철수 결정이 내려졌을 때 미 국무부 한국과를 책임지고 있었던 고참 외교관 알렉시스 존슨은 주한미군이 한반도에서의 분쟁 재발을 막기 위한 ‘판유리’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 바 있다.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상징성’
외교관으로서의 첫 임무로 1937년 한국을 담당했고 정치 담당 차관보를 역임하고 은퇴한 존슨은 한국의 유엔군 사령부(UNC) 해체문제가 불거진 1972년 8월 국무부 자문을 위해 초청받은 자리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무부의 후배 외교관들에게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이렇게 조언하고 있다. 30여 년 전의 분석이긴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 적용하더라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
[ ‘미 지상군이 한국에 남아 있는 한 정전협정은 지속된다. 주한미군은 또 한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상대할 때 주도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자신감을 제공한다. 주한미군을 조속한 시일 안에 빼내서는 안 된다. 주한미군의 숫자나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존재 자체가 가지는 상징성이다. 주한미군은 한반도에서 분쟁 재발을 막기 위한 판유리 같은 존재라고 본다.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를 볼 때 한반도 상황은 훨씬 나아졌다. 북한은 결과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군사력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은 남북한 사이의 화해를 촉진하고 북돋아줘야 한다. 언젠가는 유엔사 해체를 요구하는 유엔 결의안이 나오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이에 적절히 대처해야 할 것이다.’ ]
유엔사령부 해체문제를 다루고 있는 1970년대의 미 국무부 문서는 주한미군과 유엔사의 존재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유엔사는 1950년 7월7일 유엔 결의안에 따른 것이며, 따라서 유엔사는 유엔 안보리의 산물이자 그 해체도 안보리의 결정에 달렸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대북 억지력으로 존재하는 것이든 동북아 지역 안정군으로 존재하는 것이든 성격 규정에 상관없이 주한미군이 현안으로 존재하는 한 유엔사 존폐문제는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문제가 민감하기 짝이 없는 정치 현안으로만 취급되던 시기도 이제는 지났다. 같은 그릇 안에 들어 있는 유엔사 존폐와 정전협정, 주한미군 문제를 마치 전혀 별개 사안인 양 취급하는 형식논리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1973년 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와 유엔사 해체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미 국무부는 유엔사령부 해체에 따른 문제점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다음은 1973년 3월15일 마셜 그린이 작성한 유엔사 문제 분석문건 가운데 주요 부분이다.
[ 유엔사령부 - 의미와 역할
현재 유엔 회원국들의 소수 병력만이 유엔사에 소속되어 있으며, 유엔사령부 그 자체만으로는 군사적인 의미가 없고,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안보 보장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음.
1) 유엔사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를 제공하며, 따라서 필요할 경우 한국의 북한에 대한 공격 작전을 방지할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함.
2) 북한이 새로운 도발을 감행할 경우 한국 방어를 위해 제3국의 병력을 한국으로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구조 및 논리를 제공함(그러나 이런 역할의 실제적인 유용성에 대해서는 일부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음).
3) 유엔사는 한국 정전협정 이행의 형식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 현재 정전협정은 특별한 경우에만 열리는 유명무실한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만 적용되고 있는 상황임.
4) 유엔사는 미국과 제3국의 병력이 한국 방어시 형식적 절차 이외에 그 어떤 사전협의 없이도 일본 기지를 사용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음.
5) 유엔사의 존재는 북한의 남침이 있을 경우 이를 단순한 지역 분쟁이라기보다는 유엔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만들며, 따라서 북한에 대한 최소한의 심리적인 억제책으로 작용하고 있음.
위의 그 어떤 것도 유엔사 해체에 대한 극복 못할 장애물이 되지는 않음. 한국 안보에 대한 최우선적인 역할 역시 주한미군으로 지원되는 미국의 대한국 안보 조약으로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
그러나 유엔사 해체는 한국에게 극도의 심리적 타격을 입힐 것이며, 또한 한국 내에서는 미군 철수로 이어지는 첫 단계로 해석될 것임. ]
유엔사령부와 주한미군을 별개의 실체로 다루고 있는 이 문서는 유엔사가 해체되더라도 한국 안보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한국 안보는 유엔사가 없더라도 한미간 안보 조약만으로도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국제정치학계에서도 유효한 논리로 채택되고 있다. 결국 유엔사는 심리적, 법적 근거로서만 존재하는 셈이다.
‘옥토버 서프라이즈’의 허구
주한미군 재배치 및 감축은 부시 행정부 2기에 들어 더욱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아졌다. 주한미군 재배치는 펜타곤의 군 개혁안과 해외 지상군 재배치라는 큰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한미 양국간에만 논의되는 양자 협상 대상도 아니고, 냉전 이후 미국이 지속시켜온 기존의 해외 주둔군 기지 중심의 군사전략 틀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도 아니며, ‘양키 스테이 히어’의 논리만으로 대처할 사안은 더더구나 아니다.
한국에서 푸대접 받는 미군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던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홧김에 미군 철수를 지시했다는 식의 발언이 화젯거리가 되는 한 주한미군 문제에서 한국의 국익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런 발언은 초등학생이나, 그것도 우스갯소리로나 뱉을 법한 말이지 지도층 인사가 입에 담거나 전할 성질의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이른바 ‘10월 변란설’이라는 것이 나돈 적도 있다. 미 대선을 앞두고 10월에 북한이 핵 실험을 하거나 미사일을 발사할 계획이기 때문에 워싱턴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소위 ‘옥토버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라는 것이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견강부회의 말들이 횡행하는 한 주한미군 문제 같은 민감한 현안은 제대로 손조차 대볼 수 없게 된다(‘옥토버 서프라이즈’라는 말이 돌긴 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알 카에다의 테러 공격 등 미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대형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지칭하는 워싱턴 정가의 루머였을 뿐, 북한이 ‘옥토버 서프라이즈’의 혐의자는 아니었다. 결국 ‘옥토버 서프라이즈’는 오사마 빈 라덴의 녹화 테이프로 막을 내렸다).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1970년대부터 끊임없이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한국의 반발이 있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미국의 계획대로 추진되었다. 군사강국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 미국은 분명 버거운 상대다. 버거운 상대일수록 가볍게 움직여서는 득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주한미군 문제는 길거리의 구호나 한두 마디의 정치성 발언보다는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