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칼럼의 타이틀을 ‘여기 사는 즐거움’으로 정할 때 나는 내심 안동의 이성원 선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 터전을 스스로 찾아냈고 그 터전을 가히 왕국이라 할 만하게 일궈냈다. 그뿐 아니라 제가 발 디딘 땅의 드높은 뜻을 발굴해낼 줄 아는 사람이다.
제가 깃들어 사는 땅을 이성원 선생만큼 ‘궁구’하고 ‘탐색’하는 이를 나는 이전 어디서도 만나본 적이 없다. 궁구(窮究)의 사전적 의미는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함’이고, 탐색 (探索)은 ‘드러나지 않은 사물이나 현상을 찾아내거나 밝힘’이다. 이성원은 사전의 풀이 그대로 도산을 ‘속속들이 연구하고 밝혀내고 찾아내기’를 계속해왔다. 궁구와 탐색은 필연적으로 애정을 낳는다. 안동의 도산 땅을 이성원만큼 사랑하는 이가 또 있을까.
선비의 땅 도산
도산은 절묘한 땅이다. 낙동강이 산을 안고 휘도는 골짜기마다 대학자가 있고 그를 키운 종가가 있고 강학하던 서원이 있고 독서하고 노닐던 정자가 있다. 물론 압도적인 퇴계(退溪)가 있어 도산 하면 누구나 도산서원을 떠올리지만 도산에 오직 도산서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천에 광산 김씨 설월당과 후조당이 있고 부포에 역동서원이 있으며 월천에 월천서원이 있다. 또 분천에 영천 이씨 농암이 있고 그 다음 골짜기쯤에 이르러야 퇴계가 나온다. 산의 발치를 씩씩하게 훑어내는 낙동강이 만들어준 모래톱과 골짜기를 흐르는 계곡이 자양이 되어 사람들은 이곳에서 글 읽고 밭 갈고 고기 잡으며 자그만 이상향을 이루고 살았다.
이성원은 그런 골짜기 중의 하나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20대에 고향을 잃었다. 알다시피 한국사는 숱한 실향민을 양산해냈다. 나라를 찾겠다고 만주로 떠난 치열한 실향도 있고 분단으로 돌연 길이 끊겨버린 뼈아픈 실향도 있지만 마구잡이 댐 건설로 제 집, 제 땅을 눈 번히 뜨고 수장당한 어이없는 실향도 있었다. 그는 나중의 어이없는 수몰민에 속했다. 600년 넘게 연면히 이어오던 ‘파라다이스’, 아니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곳이 파라다이스임을 알았다.
그가 물속에 묻어버린 집은 그냥 집이 아니었다. 600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온 농암종가였다. 조선의 빼어난 강호시인 농암(聾巖·1467~1557)이 태어나 공부하고 시를 쓰고 몸을 묻은 역사와 문학의 본거지였다. 종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하여 묻혀버렸고, 긍구당, 애일당, 사당, 서원 같은 부속건물들은 행정의 편리대로 여기저기 흩어져버렸다.
그는 종손이었다. 그래서 개인이 아니라 공인이었다. 종손이 공인이 되는 세계를 안동 바깥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종가가 어엿하고 당당하게 지손들에게 영향력과 위엄을 행세하는 곳은 이제 안동말고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고, 산업화를 향해 급박하게 달리는 사회는 그런 가치를 케케묵은 것으로 배척했기 때문이다.
남이야 뭐라든 그는 ‘농암 17손 종손’이라는 타이틀을 거부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절로 내면화된 역할이었다. 농암종가가 있던 ‘부내’는 지금은 도산서원 진입로가 돼버린 산자락 아래의 강마을이었다. 한자로 ‘분천(汾川)’이라 쓰고 100여 호에 달하는 큰 마을로 70여만 평 문전옥답을 지닌 비옥한 터전이었다. 부내에 들렀던 김안국이 “마치 도원경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고 농암은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는 바꿀 수 없다”고 노래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