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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마니아’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전철 타면 박정희 생각하고 자세를 반듯이 한다”

‘박정희 마니아’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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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자들을 공갈쟁이로 여긴 박정희
  • ● 5·16 직후 줄초상 난 부산일보
  • ● 박정희의 옛 애인 남동생, 군수공장에 취직
  • ● 박정희, 미 총기회사 사장에게 “조준경만 사겠다”
  • ● “각하, 김형욱 정보부장을 자르십시오”
  • ● 육영수 부탁으로 박정희에게 여자 문제 얘기했다가 날벼락
  • ● 청와대 사정비서관실 비리 보고했다가 보복당해
  • ● “김종필이 너무 설쳐대 최규하한테 넘기려 한다”
‘박정희 마니아’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차가 한강을 건널 무렵 도심은 어둠에 점령당한 상태였다. 50년 전 한강다리를 건너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사진을 안방에 걸어놓고 산다는 그의 집은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였다. 부인이 저녁상을 차려놓았다. 명함 건네는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우리는 곧바로 식탁에 둘러앉았다. 우리 나이로 올해 82세인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은 풍채가 당당했다. 허연 구레나룻에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오후 7시에 시작된 ‘식탁 인터뷰’는 단 1분의 휴식도 없이 진행돼 다음날 새벽 4시에 끝났다.

그의 저서 ‘영시(零時)의 횃불’이 최근 재출간된 것이 인터뷰 계기였다. 청와대 출입기자와 비서관을 지내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그는 ‘인간 박정희’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1966년 출간된 ‘영시의 횃불’은 국내외에서 꽤 팔려나갔다. ‘박정희 대통령 수행기자 7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5·16쿠데타 과정과 3공화국 초기의 정계 비화를 다뤘다. 1997년엔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사람들’이라는 책도 냈다. 조갑제씨의 박정희 전기 집필에도 그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뷰가 끝난 후 그의 저서 두 권을 읽어봤다. 그가 인터뷰에서 책에 없는 얘기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박정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기사를 ‘박정희 미화’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씨가 들려준 얘기는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는 별개라는 게 내 생각이다. 숱한 과오를 저지르고도 ‘역대 최고의 대통령’을 뽑는 여론조사에서 늘 1위를 차지하는 박정희의 인간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비망록이라 하겠다.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마니아’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기자들에 둘러싸인 박정희. 왼쪽 두 번째가 김종신 기자.

“박 대통령을 수행해 필리핀 마닐라로 갈 때 일이야. 베트남 참전국 정상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지. 기내에서 대통령이 갑자기 찾았어. 세상 돌아가는 얘기 좀 하려고 한 거지. 대통령 전용칸으로 갔는데, 대통령이 찬 시계와 내 시계가 비교가 된 거야. 나는 그때 ‘영시의 횃불’로 돈을 벌어 금시계를 차고 있었어든. 대통령 시계는 유리에 금이 간 군용시계였고. 번쩍번쩍하는 금시계를 보고 대통령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고. 그래서 내가 얼른 ‘각하, 저하고 시계 바꿉시다’ 했지. 그랬더니 성을 팍 내는 거야. ‘금시계 차면 제일인가, 시간만 맞으면 되지’ 하고. 얼굴이 화끈거리더라고.”



그가 박정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부산일보 기자 시절이었다. 기자가 되기 전엔 군인이었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부산상고를 나온 그는 6·25전쟁 때 헌병학교에 입교했다. 헌병 7기였다. 간부 교육을 받은 그는 소위로 임관돼 전장에 투입됐다. 보직은 수도사단 기갑연대 소대장.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가 헌병사령부 소속 포로수용소로 전속됐다. 1958년 제대할 때 그의 계급은 대위였다.

기자를 선택한 것은 전역할 무렵 군 후배가 건네준 ‘그대 이름은’이라는 일본 소설에 영향을 받아서였다. 일본군 대위가 신문기자가 돼 전후(戰後)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다는 내용이었다.

부산일보 사장인 김지태씨가 부산상고 선배였다. 그는 형식적인 구두시험을 치르고 입사했다. 사실상 특채였다. 황용주 주필이 그에게 기자 교육을 시켰다. 신문사 생활을 하며 동아대 법대를 야간으로 다녔다.

그는 군 취재를 맡았다. 육군사관학교 3기생인 형을 통해 고급 장교를 많이 알아둔 게 취재에 도움이 됐다. 전후 부산은 물자와 보급의 중심지였다. 군수품을 총괄하는 군수기지사령부가 부산에 있었는데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1960년 1월 자그마한 체구의 육군 소장이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6관구사령관을 지낸 박정희 소장이었다. 부임 기자회견장에서 김종신씨는 박정희를 처음 보았다.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빛이 검은 게 영락없는 촌놈이었다. 하지만 야무지고 언행에 기품이 있어 보였다.

공교롭게도 박정희는 황 주필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였다. 그 덕분에 김씨는 사령관실을 자주 드나들며 박정희와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역대 사령관에 비해 참 예의가 바르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사람이 된 거지. 항상 정자세이고 사람을 똑바로 쳐다봤다. 걸음걸이도 반듯했고. 사관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거지. 노무현은 걸음걸이부터 문제이지 않았나. 일국의 대통령이 어깨를 꺼뜩꺼뜩, 그게 뭔가. 박 대통령은 말수가 적어 상대방 얘기를 몇 시간이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부하한테 함부로 말을 안 놓았고 담뱃불을 붙여주기도 했어. 하여간 배울 게 많았다. 참 멋있는 사람이라 생각해 자주 찾아갔지. 만나면 주로 군대 썩은 얘기를 하고 나라 걱정을 많이 했다.”

그가 곁에서 지켜본 박정희는 다재다능한 군인이었다.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달리기를 잘했고 검도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음악적 재능도 있어 피아노를 치고 작곡까지 했다.

박정희가 부임한 후 군수 비리가 자취를 감췄다. 당시 박정희 사령관의 참모들은 뒷날 다 한 자리씩 차지한 쟁쟁한 장교들이었다. 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이 비서실장, 박태준(포철 회장)이 인사참모, 이낙선(상공부 장관)이 공보참모였다. 김씨에 따르면 그때만 해도 김종필씨는 존재감도 없었다고 한다. 그가 김종필 중령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박 사령관의 부관인 안모 중령을 통해서였다. 안 중령은 김종필과 같은 육사 8기생이었다. 4·19혁명 후 김씨는 김종필 중령을 주축으로 한 일부 영관장교들이 최영희 육군참모총장을 몰아내고 박정희 소장을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박 사령관을 찾아가 그 소문을 전하면서 ‘나쁜 짓 하는 놈들은 군에서 몰아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 의견을 말했어. 말없이 듣기만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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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기자│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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