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낙관주의자 김우중의 비극, 이상주의자 정동영의 고민

  • 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입력2005-04-13 13: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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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동안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받아온 ‘정신과 여의사 정혜신의 남성 탐구’는 이번 호부터 ‘정혜신의 인간 탐구’라는 제목으로 연재합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인간탐구는 분석 대상을 남성에만 한정하지 않고 여성과 역사인물까지 포괄, 보다 다양한 인간상을 정신과적 영역에서 깊이있게 재조명할 것입니다.<편집자>
    백지수표와 관련된 일화를 들을 때마다 생겨나는 의문이 하나 있다. 백지수표를 건네받은 사람은 도대체 얼마의 금액을 적어넣었을까 하는 궁금함이다. 1000만원을 적으면서 망설이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자신있게 10억원을 써넣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황이나 일의 종류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금액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수표를 건네받은 당사자의 ‘자기 인지상’일 것이다. 자기 인지상이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의 총합과 같은 것이다.

    돈이 생기면 삼겹살을 사먹곤 하던 가난한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벼락부자가 됐다. 그는 고급식당에서 꽃등심을 먹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생겼지만 예전의 단골집에 가서 삼겹살을 ‘마음껏’ 구워먹는다. 자기가 부자라는 새로운 자기 인식이 생기기 전까지, 그의 자기 인지상은 아직 가난하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자의식(self-awareness)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자의식이 명확하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자기정체성(identity)의 혼란을 겪는다.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것은 ‘정신적 에이즈(AIDS)’ 상태와 같다. 우리 육체는 외부의 공격이 있을 경우 거의 자동적으로 침입자를 퇴치하는 방어시스템인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에이즈는 우리 몸 안의 면역체계가 작동하지 않아 사소한 감염에도 결국 목숨을 잃게 하는 무서운 병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적 에이즈’는 일종의 정신적인 사형선고다. 정신적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확고한 자기정체성 확립이다. 상투적이고 상식적인 말이지만 자기정체성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우리에게 자기정체성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인물들이다.



    김우중의 분노

    먼저 김우중 전 회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올해 2월 ‘자본가의 잘못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김우중 체포결사대’가 프랑스로 떠났다. 보도를 통해 그 광경을 접한 사람들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우중이 누구인가. ‘세계경영의 전도사’ ‘재계 서열 2위의 재벌총수’ ‘한국 최고의 비즈니스맨’이라고 불리던 사람이다. 1967년 서울 충무로 뒷골목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자본금 500만원에 5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지 30년 만에 정말 ‘꿈’같은 신화를 창조한 사람이다. 대우는 IMF 직전까지만 해도 고용인원 32만(국내 10만, 해외 22만)명, 해외지사·현지법인·연구소·건설현장 등 글로벌 네트워크 590개(110개국), 총매출 71조원, 총수출 151억달러라는 경이로운 실적을 쌓아왔던 기업이다. 그 기업의 총수가 바로 김우중이었다.

    그는 한때 젊은이들과 샐러리맨들의 살아 있는 신화이자 우상이었으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화두로 세인의 찬사와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세계는 넓고 숨을 곳은 많다’는 식의 조롱을 받으며 도피자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는 96년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등급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김우중에게 수여한 나라가 아닌가.

    세상사가 허무하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의 행태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사자인 김우중은 오죽하겠는가. 그는 나라 전체의 경제위기를 김우중 일개인에게 전가하는 국민적 비난에 대해 강한 분노, 배신감, 허탈함을 느끼고 있다고 전해진다.

    “나를 도대체 어디까지 몰아붙일 생각들인가. 내가 그토록 파렴치한 도둑놈, 사기꾼이라면 나를 믿고 같이 일해온, 20만명이 넘는 과거 대우직원들은 도둑놈의 부하들인가. 국민에게는 더없이 송구하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내가 어떻게 속죄하며 무엇을 해명하겠는가.”

    그의 반발심에 이견을 표시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우중에 대한 무차별한 돌팔매질에 필자 역시 한몫 거들고 나서는 꼴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김우중의 오랜 친구이자 고문 변호사였던 석진강씨의 지적은 가슴에 와닿는다.

    “일반적으로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은 아주 쉬워요. 어떤 의견이 제시되었을 때 부정적으로 비판하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건 실패한 다음에 이유를 갖다 붙인 거지, 그것이 꼭 원인이 되었다고 보지 않는 것이 건전할 것 같습니다.”

    백 번 공감한다. 매독이라는 성병을 정신과 의사가 치료하던 시절이 있었다. 매독에 감염되면 ‘스피로헤타 팔리다’라는 나선균이 뇌신경을 건드려 정신질환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항생제 한 대면 치료될 환자를 앞에 놓고 어린 시절부터의 기억을 말하게 하며 정신분석 치료를 한 것이다. 드러난 결과만을 보고 그 원인을 유추할 때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 김우중’의 특질을 살펴보는 일에도 그 교훈은 여전히 요긴할 것이다.

    광적인 조증무드(manic mood) 일생

    다행히 이 글은 필자가 1995년 대우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 때 적어놓은 메모를 기초로 한 것이다. ‘세계경영’이 한창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시기였는데, 본의 아니게 지금의 김우중과 대우그룹의 처지를 예견한 내용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 대우그룹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은 그저 ‘김우중 회장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 정도로만 여겼다. 예측 능력을 자랑하자는 게 아니라 지금의 김우중을 보고 실패 원인을 갖다 붙이는 것도, 대항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손쉬운 돌팔매질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필자 나름의 변명이다.

    김우중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국내 자서전 시장의 한 지평을 연 책으로 평가받는다. 89, 90년 모두 150만 부 이상 팔리며 두 해 연속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기록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김우중식 사고방식을 성공적 삶의 한 전형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였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자서전 제목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한글 제목도 그렇지만 영문 번역판 제목은 더 그렇다. ‘Every street is paved with Gold(모든 길은 금으로 포장돼 있다)’는 이 제목은 ‘한국 최고의 세일즈맨’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가 걸어온 모든 길은 노다지판으로 연결됐다는 평가에 안성맞춤인 듯하다. 동시에 김우중의 인간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제목이기도 하다.

    정신의학적으로 볼 때 김우중의 일생은 ‘조증무드(manic mood)’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증(躁症)은 충동을 동반하는 흥분상태, 활동과다 등을 보인다. 우울증과 반대인 증상이다.

    어떤 한 가지에 심취해 있거나 열광적 성향을 가진 ‘―광(狂)’을 마니아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바로 조증의 영문 진단명 마니아(mania)를 근원으로 한다. 조증이라는 의학적인 표현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니아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광적인 집착, 열정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조증무드에 있는 사람은 늘 자신감이 넘치고 매사를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본다. 기분이 좋고 늘 들떠 있다. 할 말도 많고 아이디어도 넘친다. 자는 시간이 아까워서 잠도 안 자는데 기운은 솟는다. 자연히 일을 자꾸 벌이게 된다. 얼핏 ‘그런 것이 병이라면 나도 한번 걸려보고 싶다’고 할 만큼 매력적이지만 그건 독버섯 색깔이 유난히 유혹적인 것과 같다. 더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그들은 늘 확신에 차 있어서 일을 쉽게 시작한다. 한번 시작하면 확장에 확장을 거듭한다. 두려움도 없다. 그들의 지나친 낙천성은 나중에 발생할지도 모를 문제에 대한 대비를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지게 한다. 조증의 끝이 예외없이 남루하고 허망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주변에서도 조증무드 때 사업을 확장하고, 지나친 투자를 했던 사람이 조증무드가 가라앉은 다음에 후회하며 그것을 감당하느라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간혹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증의 가장 큰 문제는 발이 땅에서 붕 뜬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게 주의(attention)를 집중하지 않고 에너지가 외부로만 향한다는 사실이다. 자연히 자기정체성은 뿌리째 흔들리기 쉽다. 모든 것이 부풀려 있고 고양되어 있을 뿐이다. 실제로 김우중에게 나타난 조증무드의 특징들을 한번 살펴보자.

    첫째는 팽창된 자신감 또는 과대망상적 사고다. 그가 자서전에서 언급한 ‘도사론’은 조증무드의 이 같은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100m 높이의 산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도사가 있다. 그도 처음에는 우리처럼 1m밖에 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100m의 산을 뛰어넘을 목표를 세우고 날마다 조금씩 장대 높이를 높여가며 높이뛰기 연습을 했을 것이다. 사람의 능력은 무한하다. 요는 그 잠재된 능력을 끄집어내 사용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도사와 범인의 차이도 따지고 보면 거기서 생긴다. 겸연쩍은 얘기지만 내 별명이 ‘도사’다.”

    너무 황당해서 듣는 사람도 겸연쩍다. 무협지를 보면 초인적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남자들의 본능적인 ‘자아 팽창’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 무협지다. 그래서 첨단 테크놀러지가 그물망처럼 깔린 정보통신 시대에도 남자들은 원시적인 칼을 휘두르는 무협지에 열광하는 것이다. 김우중도 홍콩 무협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다.

    병적인 낙관론

    IMF로 인해 금리가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많은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을 무렵 김종필 국무총리가 폴란드 대우지사에 들렀다. 김우중은 여기서 “수출을 최대한 늘려 금년(98년)과 내년에 연속으로 500억 달러 이상 무역흑자를 내면 99년 말이면 IMF를 무난히 극복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태의 심각성을 “그까짓 것 수출로 갚으면 되지”라며 특유의 낙관론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그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낙관론은 대우가 무너지기 직전인 99년 8월 전경련 주최 제주도 세미나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우중은 대기업이 구조조정을 하면 실업자가 너무 늘어나 나라가 흔들린다면서 정리해고는 호황 때 하는 것이지 불황 때 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구조조정이 시대의 흐름이던 당시로는 상당히 도발적인 이설(異說)이 아닐 수 없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기임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전진하는 ‘인간 탱크’를 보는 듯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현실을 부정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조증무드에 빠진 사람은 현실을 직시(直視)하지 않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실에서 크나큰 좌절과 실망, 열등감에 휩싸일 때 무기력해지면서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현실을 직면하게 됐을 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할 만큼 심약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 현실이 주는 고통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때, 사람은 자신의 절망이나 무기력감을 완전히 부정(否定)하고 오히려 그 정반대의 감정 상태를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조증이다.

    절망스러운 현실에 좌절하며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에 비해 현실을 부정하며 조증에 빠지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더 약한 사람이라는 게 정신의학적 견해다.

    좌절의 삶을 ‘환희의 삶’으로 환치(換置)하는 것이 차라리 좋은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우울에 빠져 있느니보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쁨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좌절된 자존감을 보상하려는 병적인 시도의 파생물이라서 궁극적으로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조증은 현실을 부정하는 바탕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반이 실로 위태롭다. 그런 점에서 전경련 손병두 부회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김회장은 무엇이든 쉽게 생각했어요. 이런 천품으로 인해 성공했고 나중에는 실패했는지 모르지요.”

    조증으로 인한 섣부른 낙관론의 이면(裏面)일 수도 있다.

    ‘킴기즈칸’ 김우중의 속도감

    조증무드의 둘째 특징은 생각과 말, 행동 속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한 기자는 김우중과 대화한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김회장의 말은 말보다 생각이 앞선다. 그래서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문장이 시작되는 까닭에 말이 겹쳐 나오는 경우가 많다.”

    조증무드의 특징적 현상이다. 아이디어가 넘치다 보니 말이 그 아이디어를 담아내기에도 바쁘다. 이때는 말을 한다기보다 ‘말이 밀려나오는(pressure of speech)’ 형국이 된다.

    김우중은 잠을 4시간 이상 자지 않고, 식사를 해도 가장 빨리 나오고 빨리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항상 설렁탕과 비빔밥만 시켜 먹었다. 낮에도 30분마다 사람을 바꿔 만날 만큼 바쁘게 움직여서, 체력 좋고 기력이 왕성한 총각만을 수행비서로 쓰는데도 그들의 체력이 달려 1∼2년 단위로 비서가 바뀌었다고 한다.

    해외출장시 큰 여행용 가방은 짐 찾을 때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무더위와 추위가 교차하는 한 달간의 해외 출장에도 양복 2벌, 와이셔츠 2벌, 양말 2켤레만을 손가방에 들고 가며 걸을 때도 뛰듯이 다녔단다. 세계경영을 주창한 이후에는 사흘 중 이틀을 해외에서 보냈는데 한 해의 비행거리만도 56만km가 넘었다니 공간 이동을 연상케 하는 속도감이다.

    유럽인들은 김우중을 ‘킴기즈칸’이라고 불렀단다. 아시아인이 유럽을 공략한 것은 13세기 칭기즈칸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김우중을 칭기즈칸에 비유한 것이다. 칭기즈칸이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군단을 주력으로 삼아 영토를 확장했듯이 김우중은 칭기즈칸 전략의 핵심인 ‘기동성을 상품화했다’는 것이다.

    김우중의 속도감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대우그룹의 경이적인 성장사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김우중이 ‘대우실업 주식회사’를 창업한 지 10년 만인 1977년에 자본금 500만원은 560억원으로 1만2000배, 수출은 58만달러에서 3억2000만달러로 550배, 매출액은 2억원에서 2200억원으로 1100배, 순이익도 400만원에서 140억원으로 3500배, 종업원은 5명에서 3만5000명으로 7000배가 늘어나는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스피드를 앞세운 김우중식 영토확장의 시작이었다.

    김우중과 짝지어 연상되는 그의 ‘일 중독증’이라는 것도 실상은 조증무드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일 중독은 생각과 행동의 속도 증가가 빚어낸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일 중독자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에 끌려가는 사람이다. ‘이 정도 일하지 않고 이렇게 힘든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살아 남느냐’는 게 일중독자들의 항변이지만, 그들은 사실 필요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진다. 김우중은 자신의 이런 성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도대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일을 벌이는 편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우중의 해외출장에 한 달간 동행했던 소설가 최인호의 말은 더 구체적이다.

    “김회장의 스케줄 중간에 5분이라도 틈이 생기면 비서가 저에게 와서 시간을 메워 달라고 부탁을 해요. 김회장은 쉬고 있을 때 완전히 무기력한 사람처럼 보이고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나 일을 하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안정을 되찾는다. 마치 술이 떨어지면 금단증상으로 손을 떠는 알코올중독자가 술 한모금에 떨리던 손이 안정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실하게 일에만 몰두하는 경영자의 표상을 보여준 것이 김우중의 빛이라면, 일 중독증이라는 병리현상을 사회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 그의 그림자다.

    지난 연말 김우중은 대우직원 모두에게 작별 서한을 보냈다. 그의 마지막 작별인사는 회한과 허무로 얼룩진다.

    “여러분과 함께했던 꿈과 이상 또한 이제 가눌 수 없는 고독이 돼 제 여생의 반려로 남게 되었습니다. (중략) 제가 기억 속에 묻히는 이 순간을 계기로 대우와 임직원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결과적으로 김우중은 실패했다. 실패해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이제 한국 경제사에서 하나의 ‘전설’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김우중에게 한 대우맨이 보내는 메시지를 들으면서 이 글을 끝맺자.

    “나는 그를 실패한 경영자가 아니라 어떠한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소신과 집념을 꺾지 않은 ‘위대한 사상범’으로 기억하려 한다.”

    김우중은 작별서한에서 자신의 여생이 뜬구름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성취하고 전진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패한 삶은 아닐 것이다. 김우중은 그 동안 너무 많이 이룩했고 너무 빨리 나아갔다.

    자기의 뒤뚱거리는 모습을 대면하지 않고 낙관주의로 일관하는 사람은 정신적 복통으로 결국에는 좌초한다. 때로는 좌절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한때 많은 사람들의 꿈과 전설과 신화가 되기도 했던 ‘경제 거인’답게 마지막까지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이번에는 정동영 최고위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정동영은 ‘본능적 울림’이 많은 사람이다. 내향적이면서 감성적이며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하려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비정치적(?)인 정치인이다.

    사람들이 정동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거의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가장 호감이 가는 정치인, 가장 이미지가 좋은 정치인을 꼽으라면 거의 예외없이 상위권에 랭크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정동영이다.

    일부에선 그의 앵커 전력이 호감도를 높이는 것이라며 그의 이미지에는 거품이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앵커 출신 국회의원이 유난히 많은 16대 국회에서 집권당 최고위원에 선출될 정도로 정치적 입지를 굳힌 것은 사실상 정동영이 유일하다는 게 정치평론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96년 그가 정계에 입문할 때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직접 정동영을 기자실에 데리고 내려가서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크게 기여할 인물”이라고 소개했단다. 뉴스앵커 시절에 ‘정동영 앵커가 마이크를 잡으면 진실을 말하는 것 같다’고 표현한 한 신문기사도 비슷한 맥락이다. 16대 총선 때는 전국 각지의 민주당 후보들이 ‘정동영을 지원 연사로 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칠 정도로, 이른바 정치판에서 ‘오빠부대’를 거느리고 있는 몇 안 되는 현역의원이란다. 그의 긍정적 이미지는 그만큼 파괴적이고 무차별적이다.

    인지도가 곧 호감도는 아니라는 상식적인 판단기준으로 보면 그의 경우는 참 희귀한 케이스다. 이화여대 주철환 교수는 PD의 시각으로 볼 때 그가 ‘썩 괜찮은 상품’이라고 말한다. ‘한 인간의 내용물(의지)과 형식(태도)이 긴밀히 융합되어 하나의 통일성을 갖춘 예사롭지 않은 사례’라고까지 평가한다.

    소설가 양귀자 씨는 정동영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압축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그가 20년 가까이 방송인으로 살아오면서 우리에게 남긴 이미지는 섬세하고 진지하며 또한 신뢰가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난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그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자 한 시사주간지 기자는 조금 유난스럽다 할 만큼, 그러나 일면 수긍이 갈 수밖에 없는 현실상황을 기사에 담았다.

    “그야말로 황금 같은 기회를 잡았다. 그 학력(서울대 국사학과), 그 나이(47세), 그 언변(민주당 대변인 역임), 그 자질(문화방송 앵커출신)에 최고위원까지 달았으니, 그것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시대적 흐름을 탄 첫 최고위원이라는 점에서 ‘큰 꿈’을 꾸는 데 두고두고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모양이 예쁜’ 정치인

    그러나 이 글은 정동영의 ‘큰 꿈’이나 ‘정치적 성향’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직업상 별 수없이 정치적 소재가 등장할 수밖에 없지만, 도대체 정동영 이미지의 어떤 면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신뢰를 주는지 그걸 살펴보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떻게 해서 그런 경이적인 호감도(good image)가 형성될 수 있었는지 그 까닭을 알아보려는 것이다.

    한 기자는 정동영을 가리켜 ‘모양이 예쁜’ 정치인이라고 말한다. 깨끗한 용모와 세련미,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화법, 왠지 내면이 따뜻할 것 같은 느낌 등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인 듯하다.

    정동영으로서는 다소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자신이 가진 정치적 자산이나 능력보다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만 우세하면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손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혼신의 힘을 기울여 연기를 해도 연기파라는 말보다 ‘얼굴로 민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장동건의 ‘미남 콤플렉스’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라는 것이 실체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고 해도 전혀 연관이 없을 수는 없다. 99년 정동영은 한 대학의 초청강연에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하며 이미지와 실체의 연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비판합니다만, 그러나 이미지 정치의 위험성, 함정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라는 것이 알맹이와 전혀 동떨어진 상태에서 다른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것은 또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미지 뒤에 당연히 있어야 할 알맹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뢰와 정직성, 인간미가 구비되지 않으면 금방 허상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정동영 자신의 이미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8년의 방송생활, 6년의 정치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실체와 관계없이 그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 정동영의 실체는 무엇일까. 정동영은 지나치리 만큼 인간적 겸손함이 몸에 밴 사람이다. 지난 최고위원 경선에서 정동영은 패기 넘치지만 결코 건방져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소장파 후보들과는 달리 보수적 노장층 대의원의 거부감이 적었다고 한다.

    필자는 지난 여름 우연하게 공항에서 정동영을 본 적이 있다. 배웅을 나온 사람은 젊은 보좌관인 듯했는데, 배웅자가 인사를 하자 정동영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TV에서 본 것처럼 몸을 반쯤 돌린 상태에서 한쪽 손을 드는 정치인 특유의 행동을 예상했던 필자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어떤 기자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 밀알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동영의 말을 ‘고정 레퍼토리’라고까지 표현한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다. 전략적 차원에서 하는 겸양의 수사(修辭)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무의식적이고 초지일관하기 때문이다.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후 차차기 대권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거론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지만 아직 채워지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아마추어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좋은 정치인이 되는 길인지를 찾아 빈 부분을 채워 나갈 것이다.”

    그래도 정치인인데 어떻게 그토록 한가하고 인간적인 소리만 하느냐고 따져 물어도 대답은 한가지다.

    “이 자리 자체가 과분하다. 정치인에게는 기본적으로 권력의지가 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개인의 한계는 명확하다. 뜻을 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으나 욕심을 내면 불행해진다고 생각한다. 항상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생각한다.”

    한두 번 정도는 정치인다운 욕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할 법도 한데 아무리 눈을 씻고 지난 6년간의 인터뷰 내용을 샅샅이 살펴보아도 다 비슷한 내용들이다. 하기야 96년 그의 정계입문 첫 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될 때부터 그랬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기쁨보다 어깨가 무겁고 과연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선거였다. 항상 물러날 때를 생각하는 자세로 의정활동에 임하겠다.”

    첫 당선소감에서 물러날 때를 생각한다니, 정치인이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그는 최고위원 경선 당시 열린 개편대회에도 가장 먼저 와서 가장 늦게 가는 사람이었단다. 당선된 후에는 최고위원들 간에 자리배치 문제로 설왕설래가 있자 경선에서 5위를 차지했음에도 7위를 차지한 정대철 최고위원에게 얼른 자리를 양보했다.

    정확하게 일치하는 인간유형은 아니지만 얼핏 그가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는 ‘삼국지’의 유비가 연상된다. 유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겸손과 후덕(厚德)은 때와 장소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유비의 삼고초려에 결국 유비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한 공명은 큰 한숨을 내쉬며 탄식을 한다.

    “아아, 그대에게 천명(天命)이 없는 줄 알면서도 그대의 뿌리칠 수 없는 인품 때문에 나 공명은 그대를 따라나서는구려.”

    의도적이지 않은 이런 ‘타고난’ 혹은 ‘몸에 밴’ 겸손에는 당할 장사가 없다.

    ‘권노갑 파동’과 정동영의 성향

    지난 12월 초 소위 ‘권노갑 파동’ 이후 한동안 정동영은 정치적 화제의 중심인물이었다. 정동영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듯하지만, 그 과정과 파장을 찬찬히 관찰해 보면 정동영이란 인물의 또 다른 성향이 잘 드러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대통령과 집권당 최고위원들의 청와대 간담회 도중 정동영이 대통령 앞에서 ‘국민의 눈엔 우리 당 권최고위원이 YS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정동영에게 박수를 보냈고 권최고위원은 얼마 후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더 보태고 뺄 것도 없이 그게 전부다. 그 와중에 당내에서는 자신을 정계 입문시키고 뒷받침해준 ‘어른’을 내친 그에 대해 ‘배은망덕하다’거나 ‘손봐주겠다’는 말들이 나왔다고 알려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일반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지만 정동영은 그 사건 이후 당내에서 철저하게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 3월 말 권노갑 전최고위원의 갑작스러운 사과 요구가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난 4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정치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동교동 실세인 권최고위원의 퇴진을 대통령께 건의한 이후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공개적인 발언을 한다. 여당에 대한 정치공세의 적절한 소재로 사용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만큼 공개적인 왕따가 이루어졌다는 한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와 관련한 5월 초 한 중앙일간지의 만평도 예사롭지 않다. 정대철 최고위원이 경찰청장을 감싸안고 있는 대통령을 향해 “짜르세요” 하고 소리치자 등에 ‘왕따 정동영’이라고 쓰인 사람이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인 채 “‘정선배’도 내 짝 났다”고 혼잣말을 한다. 그 만평의 제목은 ‘직언 2탄’이다. 그 사건에 대한 정치적인 의미나 해석은 각자의 판단에 맡기자.

    그보다 궁금한 것은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한 것 같은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밖에서는 새로운 ‘정치 스타’가 탄생했다고 환호했지만 안에서는 철저하게 소외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동영은 그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했던 것일까, 아니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그 어느 쪽이었든 정동영은 결국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른 계산된 발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정치적 발언을 옹호하거나 폄하려는 게 아니고, 그는 이런 경우 뒷일 생각 않고 ‘내질러’ 버리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갸날픈 외모와 달리 정치적 파괴력이 만만치 않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런 성향에 기인한다.

    정신분석적으로 정동영 같은 유형의 사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상적’인 것에 대한 열정과 집착이 대단하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것을 ‘이상적’이라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다. 일상적인 일에는 지나칠 만큼 관대하고 개방적이지만 자신의 내면적 가치, 내적 신의가 위협을 당하면 곁에서 보는 사람이 섬뜩할 만큼 한치의 양보도 없다.

    정동영은 10월 유신이 선포된 1972년에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다. 72학번 동기생들의 징역형을 다 합하면 100년이 넘는다는 말이 나올 만큼 투옥과 수배가 반복되던 시절이었다. 정동영도 73년 유신반대 첫 학생시위로 기록되는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데모에 참가했다가 감옥생활을 했고, 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3개월간 복역한 후, 출감하자마자 ‘특수학적 변동자’가 되어 군에 강제징집되었다.

    군대에서도 그의 ‘폭발적인 내지름’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군복무 중 그는 예전의 사건에 연루되어 보안사로 연행된 뒤 열흘 동안 두들겨 맞은 후 ‘공포의 열흘’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자대로 복귀한다. 그런데 내무반 고참은 자기에게 말도 없이 무단휴가를 다녀온 줄 알고 정동영과 그 내무반 동료들에게 전체 기합을 주었다. 여기서부터는 정동영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보자.

    “엉덩이가 불이 나면서 전체 내무반에는 신음소리가 낭자했다. ‘나쁜 놈들. 잘못했으면 나만 팰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왜 괴롭혀!’ 이런 생각이 든 순간 내 눈에 불이 붙었다. 벌떡 일어나 침상의 곡괭이를 들었다. ‘다 집어 치워!’ 일순간 관물대에 일사불란하게 정리해둔 소총과 수통, 철모, 군복이 하늘로 튕겨지면서 내무반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내 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사건은 내무반 내부의 일로 무마되었지만, 이후 정동영은 고참들에게 찍혀 왕따를 당했단다.

    최고위원 경선과정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에피소드도 정동영의 이런 성향을 잘 보여준다. 처음에 그가 내세운 메시지는 특유의 겸손함을 앞세운 ‘노장청 통합론’이었다. 노장 일색이 아니라 청년도 한 자리쯤 끼워넣어 달라는 수세적 메시지였다. 그러나 지방 개편대회에서 지구당위원장들의 좌절감과 분노하는 바닥 민심을 절절이 전해들은 정동영은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이미 교정지까지 나와 있는 자신의 홍보전단을 전면적으로 뜯어 고친다. ‘확 바꿔놓겠습니다’라는 공격적 메시지에다 더 나아가 ‘혁명적으로’ ‘뒤집어놓겠다’는 초강경 어구를 동원했다. ‘나를 당선시키면 당을 확 뒤집어엎겠다’고 한 것이다. 많은 당직자들로부터 지나치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정동영은 대의원 35%의 지지를 얻어 5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된다.

    이런 ‘내지름’이 매번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심리학의 인간유형론에 따르면 정동영 같은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긍정적이고 선한 것’에 대한 투신력(投身力)을 지녔다고 하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필자가 말한 일종의 ‘본능적 울림’ 같은 것이다.

    폭발적인 연설능력

    많은 사람들이 정동영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것이 폭발적인 연설능력이다. 기승전결이 있고 고저장단이 뚜렷한 그의 연설은 특유의 정확한 발음과 힘있는 제스처, 청중의 감정상태에 부응하는 탁월한 조어력, 감성적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상 가장 ‘선동성이 뛰어난’ 대중연설가 중의 하나는 히틀러다. 한 역사학자는 “히틀러에겐 자신의 개인적 좌절감을 독일 국민 전체가 겪는 고통인 양 표현하는 재능이 있었다”고 말한다. 갑자기 히틀러 얘기를 하는 건 정동영이 자신에 대해 ‘선동성만 강한 정치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이따끔 갖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 의구심에 대한 해답의 일부는 최고위원 경선기간 중에 정동영 자신이 이미 밝힌 바 있다.

    “선거기간 중에 제 연설솜씨가 화제가 됐는데 말솜씨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메시지가 중요했다고 봅니다.”

    거기에다 정동영은 메시지에 그 특유의 ‘무의식적 공감력’을 덧붙인다. 당연히 울림이 클 수밖에 없다.

    아직도 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의 정동영 기자를 인상깊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새벽까지 참담한 표정으로 보도하던 모습에 공감이 갔다’는 격려전화를 많이 받았다는데, 그에 대한 정동영의 말을 들어보자.

    “내 얼굴은 구조대원처럼 열이 올라 있었으며 표정은 비통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표정관리에 신경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마이크를 잡은 나는 차라리 구조대원이고 싶었다.”

    바로 그렇다. 매끈한 말과 연설 테크닉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립싱크 테크닉은 잠시 사람의 마음을 홀릴 뿐이다. 정동영은 꼭 필요한 시점에 자신의 전 체중을 실을 줄 아는 사람이다. 일견 남들이 보기엔 공부하지 않는 학생의 책처럼 유별난 ‘흔적’이 없어 보이지만 꼭 필요한 부분에는 거의 빠짐없이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여중생이 정동영의 홈페이지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보내왔다. 정동영은 그 학생에게 이런 답장을 보낸다.

    “저는 3월에 대구에 들러 정신대로 끌려갔다 오신 조윤옥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살아 생전 고국 땅을 밟고 싶었지만 죽은 다음에야 돌아오신 분입니다.(중략) 장례식 내내 할머니께서 겪으셨을 설움과 한이 가슴속에 밀려왔습니다. 제가 할머니의 그 오랜 한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마음만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대구시민모임’이 시민사회 단체장으로 치른 이날 장례식에는 유족 서너 명과 시민모임에서 몇 분이 참석했을 뿐입니다. 정말 우리가 조할머니의 문제를 역사로 인식하고, 그 의미를 진심으로 깨우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행여라도 훗날의 홍보를 위해, 양로원같은 곳에서 사과상자를 옆에 놓고 기념사진을 찍는 정치적인 제스처를 연상하지 않았으면 싶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쓰인 편지도 아니고 또 정동영이란 인물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공감

    개인 하나하나가 ‘우주’와 같은데 개인이 죽으면 국가나 이념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는 말한다. 제대하는 날 주머니돈을 털어 대형 거울을 사서 ‘인간회복’이라는 글자를 새겨 선물하고 나온 것도 비슷한 이유다. 사람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에게서 왠지 모를 신뢰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런 ‘공감력(empathy)’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삼국지’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조조에게 쫓기게 된 유비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에서도 3000 병력으로 10만이 넘는 백성들을 돌보며 한가하게(?) 후퇴하고 있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후 조조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다.

    “나는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해 제도를 고치고 세금을 덜었다. 무언가를 베풀려고 애쓰고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백성들은 고마워할지언정 나를 좋아하고 따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럼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사려(買)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비는 다르다. 나는 한번도 그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백성들에게 베풀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이 있다면 기껏 원래보다 더 나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다. 오히려 부양을 받고 도움을 입는 것은 언제나 그쪽이었다. 그러면서도 백성들은 그를 좋아하고 따른다. 그는 민심을 사는 게 아니라 얻고 있다.”

    지난 10월 몇 명의 초등학생이 학교 숙제 때문에 정동영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귀엽고 천진하지만, 정치의 본질이라고 할 수도 있는 문제에 관해 정동영에게 숙제를 내준다.

    “특별히 물어볼 것은 없고, 그냥 숙제를 하다가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은 어떤 훌륭한 일을 했는지 써야 하는데… 잘 몰라서(죄송) 이곳에 들어온 겁니다. 그리고 제 이메일에 정동영 국회의원님께서 어떤 훌륭한 일을 하셨는지 편지를 써주셨으면 합니다.”

    정동영은 즉시 그 어린이들에게 답장을 띄운다. 그가 보낸 답장의 구체적 내용보다는 앞서 인용한 ‘백성과 민심’에 관한 조조의 한탄으로 대신하는 게 더 여운이 있을 듯싶다.

    아주 자주 정동영은 국회의원을 평생 직업으로 늙을 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자신은 낭만주의자라서 하시라도 마음을 비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연수원에 갔을 때는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고 너무 행복해서, 이렇게 눈 내리는 산을 보면서 살고 싶다고 기도했단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꿈에 대해 얘기한다.

    “내 꿈은 아침에 새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것이고, 아침에 눈떴을 때 제일 먼저 산허리를 보고 싶다. 차 한잔, 감미로운 음악, 그런데서 행복을 느끼지 최고위원이 돼서 좋은지는 실감도 나지 않는다.”

    물론 이 잡지는 여성지가 아니라 주로 남성들이 구독하는 시사주간지였다. 집권당 최고위원 자리에 있는 정치인이자 ‘큰 꿈’과 관련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이렇게 비정치적으로 말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행동보다 반성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할 만큼 ‘본능적 흔들림’이 많은 그는 자기가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를 자주 느끼는 것 같다. 자기정체성의 실체는 바로 그런 바탕에서 시작된다.

    정동영의 인터뷰 기사들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의 인터뷰어들이 ‘정동영이 몹시 피곤해 보인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여성 인터뷰어는 그가 너무 지쳐 보여서 마음속으로 쓸데없는 모성애까지 발휘되었다고 말한다.

    확률적으로 볼 때 그가 그 많은 인터뷰 때마다 유난히 피곤한 일이 있었을 리는 없고 또 그가 273명의 국회의원 중 제일 열심히 일을 해서 그렇다는 이유도 낯간지럽다. 그렇다고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한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의원들과 함께하는 조기축구회 센터포드이자 한일의원연맹 축구대회에서 주전으로 활약할 만큼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정신과 의사의 직업병을 발동하여 그 원인을 한번 진단해 보자. 살다 보면 아무 질병이나 환경적 요인이 없었는데도 ‘요즘 피곤하시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그 원인은 ‘심각한 스트레스’일 확률이 높다. 실제로 스트레스성 질환을 판별하는 진단항목 중에는 ‘요즘 특별한 이유 없이 쉽게 피곤하다’는 문항이 들어 있다.

    필자의 진단이 맞는다면 정동영은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끊임없이 받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정동영은 방송인 아버지에게 자부심을 느끼던 아이들이 국회의원인 아버지를 친구들 앞에서 그 전처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아득해진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단순히 국민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혐오감, 정치인에 대한 불신, 그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까. 자신도 그런 손가락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정치인 중의 한 명이 정동영 아닌가. 우리나라 국회의원 선거사상 최초로 2연속 최다득표 당선, 야당 대변인으로 시작해 여당대변인에 이르기까지 40개월 동안의 장수 대변인, 40대 최고위원 등 ‘기록 제조기’로서의 명성도 다 그러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게다가 그의 말처럼 정치자금이라는 측면에서도 정동영은 행운아다. 정치입문 후 지난 6년간 1000여 명의 소액 후원자들이 보태주는 후원금 덕분에 누구에게 손벌리지 않고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는 것이다.

    인간회복에 대한 집착

    그런데도 정동영은 자신의 내면적 이상인 정치현실에서의 ‘인간회복’에 대한 유별난 집착(?)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듯하다. 살다 보면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반드시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정동영도 그런 생각을 하는 때가 있을지 모르겠다.

    정동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치인(?)과는 거리가 먼, 가장 ‘비정치적인’ 정치인처럼 보인다. 그것이 작금의 정치생리와 정동영이라고 하는 인간의 관계가 찰떡궁합처럼 보이지 않는 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이광모감독이 전혀 새로운 영화문법으로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영화를 만들어서 국내외적으로 극찬을 받을 때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독특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한국영화는 ‘이광모’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얼마간의 과장이 용인된다면 필자는 이 표현을 정동영에게도 그대로 적용해 보고 싶다.

    “한국의 정치인은 ‘정동영 스타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의 우상이었다는 아버지 얘기로 이 글을 끝맺자.

    전북도의원을 지내기도 했다는 정동영의 부친은 그가 열일곱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정동영에게 아버지는 아직도 절대적인 존재인 모양이다. 틈만 나면 자신은 아버지를 그 누구보다 존경했다고 말한다. 그의 아내의 말을 들어보자.

    “남편에게 시아버지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살아 생전에는 정서적인 버팀목이었고 돌아가신 뒤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사람들은 “순창의 울타리가 무너 졌다”고 했고, 정동영은 “나의 울타리도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때 정동영의 아버지는 마흔여덟이었다. 1953년생이라니까 정동영도 이제 마흔여덟의 나이다. 불길한 연상을 하자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자신의 아들에게 철옹성 같은 울타리로 느껴졌다는 그의 아버지가 가지는 의미를 찬찬히 되새겨보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정동영에게 정치적인 질문을 인간적으로 던져보자.

    “만일 지금 한국의 정치판에서 정동영이라는 정치인이 사라진다면, 당신을 좋아하고 지지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울타리가 무너질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게 바로 정치인 정동영이 끝까지 지켜줘야 할 정치적 신념이다.

    ID카드(Identity card)는 신분증명서를 뜻한다. 중요시설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 혹은 같은 단체에 속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징표로 목에 걸거나 가슴에 패용하는 카드다. 현실세계에서 ID카드를 분실하면 그 즉시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만, ‘자기정체성(Identity)’이라는 ‘마음의 ID카드’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자칫하면 분실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기도 한다. 요리의 맛을 돋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맛술을 조금씩 마시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버리는 ‘키친 드렁커’처럼, 고단한 삶의 여진(餘震)이 우리의 정체성을 조금씩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 앞에서 “노”라고 말할 수 없는 풍토를 개탄하며 한 논설위원이 들려주는 에피소드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과거 어느 정권에서의 일이란다. 정상외교에서 돌아온 대통령이 자기가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 화를 내면서 내각과 여당은 뭘 했느냐고 질책하자 회의에 참석한 몇몇 고위인사가 너무 죄송하다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출입하는 사람들 누구나가 그랬던 것처럼 ‘가슴에 ID카드를 달고’ 있었을 그 고위인사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자기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디든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만능 ID카드, 그게 바로 ‘자기정체성’이다. 당신 마음속에 있는 ID카드는 어떤 종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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