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든세 살의 전세룡 노인. 그는 역사에 묻힌 과거를 기억하고 있을 뿐인 화석(化石)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혁신정치를 꿈꾸는 역동적인 청년(靑年)이다.
‘그 연대기를 읽어서 지겨워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평범한 민초로 일관했다 해도,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여든 살을 넘게 살아왔다면 그가 누구든 ‘역사적인’ 인물이다. 식민시절, 광복 후의 혼란기,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극심한 가난, 동족 내부의 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격변…. 그 공통의 환경으로 주어진 역사의 굽이굽이를, 그저 세월이 가자는 대로 등 떼밀려 흘러왔기로 어찌 순탄하기만 한 삶이었겠는가.v
진보당 사건에 연루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원로 서예가의 서실(書室)답게 사위가 서예작품으로 빼곡히 둘러싸여 있는데, 책상에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액자 속의 인물이 있다. 그 흑백사진의 주인공은 1959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이다. 전옹은 조봉암이 이끌었던 진보당의 중앙당 조직부장으로서, ‘간첩’ 혐의로 사형 당한 조봉암과 마지막까지 정치적 행로를 함께 했던 사람이다.
사건의 진실이야 어떻든 대한민국에서, ‘간첩이었던’ 사람의 사진을 반평생 동안 공개된 공간에 걸어두고도 여든이 넘게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옹은 참 할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왕년에 혁신정당 운동을 했던 사람답게 아직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그는 (더러 발음이 엇갈려 알아 새기기 어려운 대목도 있었으나), 무려 다섯 시간이 넘게 얘기를 쏟아놓고도 작별 인사를 나눌 때에는 자리 파하기를 못내 아쉬워했다. 다만 진보당 사건 때의 고문 후유증으로 보행이 자유롭지 못해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것 빼고는 건강한 편이었다.
“여기다 이걸 매달아 놨어요. 화장실 갔다가 바지가 제때 안 열려서 실수하면 안 되니까.”
바지 앞섶 지퍼 손잡이에 매달아서 바깥으로 꺼내 늘어뜨려 놓은 헝겊 끄나풀을 이상스레 여길까 봐 지레 먼저 설명을 하고 나섰다. 부인 정일례 여사(72)는 작심한 듯 42년 전, 남편이 유치장에 갇혔을 때 입었던 옥의(獄衣)와 감방에서 음식을 받아먹던 낡은 양철 밥그릇까지 가지고 나왔다. 이만하면 전옹의 고난의 삶을 증거해 줄 소품까지 갖춰진 셈이다.
“선생이 질문을 할 거요, 아니면 내가 알아서 얘기를 할까?”
나는 ‘둘 다 하자’고 했다. 우선 눈길 가는 쪽에 걸려 있는 휘호 한 점을 가리켰다.
―‘一民和通(일민화통)’이라는 저 작품에 담긴 속뜻을 설명해 주시죠.
“우리는 한 민족 아니오. 같은 민족끼리 전쟁하지 말고 평화스럽게 오가면서 서로 도와서 잘살자는 뜻입니다. 내가 97년부터 이 휘호를 써서 취지를 설명한 서한과 함께 국무총리, 대법원장, 통일부장관에게 보내왔어요. 얼마 전 임동원 장관이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더구먼.”
다른 말로 풀이하자면 평화통일을 하자는 얘긴데, 공공연히 북진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관계자들을 잡아넣을 당시 적용한 혐의 중 하나가 바로 당 강령에 명시된 ‘평화통일론’이었다.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정하여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정상이 악수를 하고 헤어진 가족들이 왕래하는 이 시기에도, 그에게 ‘평화통일’은 절절한 화두다.
―‘일필휘지’가 느껴지는데, 저런 서체를 뭐라고 부릅니까?
“비백체(飛白體)라는 거요. 종이에 붓을 대고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착 댔다 하면 그야말로 날아가듯 일필휘지를 하는 거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먹이 종이에 제대로 묻을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글자에 흰 부분이 생겨나는 겁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칼을 휘두르듯 쓰는 필법이라 해서 비백체를 으뜸으로 치지요.”
―진보당 명예회복운동의 기초작업으로 진보당 동지회 결사사업을 추진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진보당이 해체된 지 40년이나 지났는데 왜 지금, 이제 와서, 그런 작업을 하십니까?
“후세를 위해서 역사를 옳게 세우자는 얘기요. 그때 대학생이던 사람들이 지금 환갑이 넘었어요. 더 머뭇거리다가는 진실을 얘기할 사람들이 사라져요. 왜 이제야 나섰냐고? 문민정부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요시찰 인물로 감시받고 있어서 운신을 할 수가 없었어요.”
―옛 당원 동지들이 얼마나 모였습니까?
“당시 각 도당(道黨) 당원이었던 사람들을 백방으로 탐지해보니 생존해 있는 사람이 70여 명 돼요. 연락이 닿아서 모인 사람들은 20명 남짓이고.”
―감회가 각별했겠습니다. 어떤 모습들을 하고 나타나던가요?
“슬픈 일이지. 내가 경비를 대줘야 서울 나들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형편들이 어려워요.”
―당시에 진보당이 지향했던 이념이나 노선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민주적 방법으로 사회정의와 사회복지를 실현한다는, 바꿔 말해서 영국 노동당의 사촌쯤 되는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정치학적으로 ‘민주사회주의’ 정당입니다. 민주사회주의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는데 우리 진보당은 그중에서도 우파였어요.”
―생존해 있는 인사 중에, 진보당 시절에 지향했던 이념이나 정치철학에 비춰볼 때, 지금은 ‘동지’라고 부르기에 망설여지는 사람들도 있을 법한데요?
“나중에 독재 권력에 영합해서 세속적인 영화를 누린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그 어려운 때에 혁신운동을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너그럽게 포용해야 해요.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그 얘기 속에는 ‘적어도 나만은 혁신정당에 가담했던 당시의 순정(?)을 지켜왔다’는 자부가 배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연유로 진보당에 발을 들여놓았고 조봉암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을까? 그리고 우리 현대사에 아직까지 ‘상처’로 남아 있는 진보당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함경북도 명천군 남면 내포리가 그의 고향이다. 그는 자신의 집안을 ‘반일(反日), 한학자(漢學者) 가문’이라 했다. 전세룡은 네 살 때부터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보통학교에 취학했던 9세 때까지, 4년간 서당에서 배운 한문과 서예실력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보통학교 시절 그의 별명이 ‘한문선생’이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의 보성고보에서 신학문을 배운 다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한학공부에 정진한다.
스물일곱 살 때 광복을 맞았다. 북녘에 소련군이 진주했다. 소련군을 배경으로 한 조선공산당과 민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내 이모가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이모부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형무소에서 옥사했어요. 당시 나는 자식이 없던 이모부의 양자였는데, 그 이모가 북한의 공산정권에 협조하라고 집요하게 설득했어요. 외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나 나는 반대했습니다. 내가 공부해서 알고 있는 공산주의는 ‘사람의 주의(主義)’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면민(面民) 군중대회에서 반동분자로 낙인찍혔지요.”
전세룡옹이 내게 건네준 자신의 프로필에는 흥미로운 글귀가 몇 군데 있었다. ‘반공(反共) 위해 광인가장(狂人假裝)’ ‘유랑걸식(流浪乞食)’ 따위가 그것이다. 미친 사람 노릇을 하고 거지 노릇을 했다는 얘기를 자신의 이력서에 기재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나 유랑걸식은 몰라도 ‘광인가장’ 이력을 프로필에 적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정은 이해하고도 남을 만하다. 광기에 가까운 매카시즘이 지배해온 이남 사회에서, 그가 월남 이전에 북녘에서 연출했던 ‘미친 짓’은 그를 탄압했던 세력의 사상공세를 피해나갈 수 있는 증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반동분자 색출의 그물을 피하기 위해서 무려 5년 동안이나 미친 사람 노릇을 했다. 5년 동안 머리털을 자르지도 씻지도 않은 채, 벙어리 시늉을 하면서 방황했다. 머리에 서캐가 우글거리고 온몸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반동분자를 처형하기 위해 그를 체포하러 왔던 기관원들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 때문에 손을 내저으며 도망쳤다.
전쟁이 터졌다. 밀고 밀리는 공방이 이어지다가 국군이 북녘까지 진격해왔다. 1·4후퇴 때 국방군을 따라 피란 행렬에 끼여들었다. 남쪽 방위군에 입대하기 전, 헌병대장이 그의 몸을 수색했는데, 호주머니에서 흉측한 모습의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북쪽에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하던 시절의 사진이었다.
“헌병대장이 그 사진을 보더니 ‘너 이놈 자식, 지리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이지’ 하면서 두들겨 패는 겁니다. 원 없이 맞았어요.”
그러나 나중에 진보당 사건으로 잡혀 들어가서 ‘빨갱이’로 몰렸을 때 그 광인 모습의 사진이 그를 구해주었다. 그는 수사기관에 문제의 사진을 내보이며 자신이 반공주의자임을 역설했고, 고향 출신 인사들이 당시 그의 광인행적을 증언해줌으로써 빨갱이 사냥의 그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도 했고 혹은 구원해 주기도 했던’ 문제의 사진을 아직도 자신의 사무실 벽에 걸어두고 있다.
이제 그의 이력서에 기재된 ‘유랑걸식’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국민방위군에 입대했다가 의병제대를 했단 말입니다. 갈 곳이 있어야지. 여기 저기 유랑하면서 걸식을 했지요. 전쟁통이라 너나 없이 어려운 시절 아닙니까. 아무리 두드려도 문을 안 열어줘요. 혼삿집이나 상가를 만나는 날은 영양보충 하는 날이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전라도 여천에서 정약용 선생의 후손 되는 이를 만났어요. 그 양반이 나한테 책을 한 권 주는 거야. 그거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하고 얘기도 나누고 용돈벌이라도 하라고…”
사주(四柱) 책이었다. 그 사주책이 그의 호구방편이 된 셈인데, 그는 걸식을 하고 사람들의 사주를 봐주던 6개월여를 ‘민중의 생활실태를 살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고 술회한다.
조봉암과의 만남
피란민 중에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립학교였던 전라도 여천의 ‘화양중학교’에서 그를 교사로 초빙하겠다는 제안을 해왔고, 그 학교의 교감으로 채용된 전세룡은 영어와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게 된다.
1952년 전세룡은, 일제 강점기에 조봉암과 조선공산당 창설작업을 함께 했던 고향 친지 김찬의 소개로 처음 죽산을 만났다. 초대 농림부장관에 이어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조봉암은 당시 직선제로는 처음 실시된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차점으로 낙선한 직후였다.
―죽산과 처음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내가 공산당을 반대해서 월남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얘기했지요. 그러나 내려와서 민심을 관찰해보니 이남 사회도 썩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획기적인 혁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조봉암 선생도 영국 노동당과 유사한 민주사회주의 정당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씀을 해서 의기투합한 겁니다.”
―죽산에게 ‘이남 사회도 썩었으니 혁신해야 한다’고 얘기하셨는데, 당시 남한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광복한 지 5∼6년이 지났는데 민중생활은 전혀 나아진 게 없고 국민에게 민주주의나 국가번영에 관한 비전을 전혀 제시해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내가 이남에 내려와서 처음 배운 말이 뭔지 아십니까? ‘사바사바’였습니다. 돈 쓰고 적당히 구워 삶으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식의 부조리 심리가 팽배해 있었어요.”
어쨌든 이후에, 전세룡은 조봉암의 참모가 되어 진보당 창당작업의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에 뛰어든다. 1954년 이승만의 3선을 허용하는 소위 ‘사사오입개헌’이 강행되자 임정 출신 원로였던 김성숙 최익환 등과 천도교 지도자 신숙 등이 조봉암과 합세하여 반(反)자유당 세력을 규합하는 신당운동을 전개했으나 이념상의 차이로 그중 보수 우파가 민주당을 발족시켰다. 그러자 조봉암은 혁신계열 인사들과 함께 독자 정당 결성에 나선 것이다.
1955년에 진보정당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창당준비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조봉암과 보수진영에서 떨어져 나온 서상일이었다.
“1956년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서상일파에서는 표결 없이 서상일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자고 주장했어요. 당시 서상일 쪽을 대변하던 사람이 바로 고정훈이었습니다. 나하고 고정훈 사이에 논쟁이 붙었지. 나는 정부통령 후보자 지명을 위한 전국추진대표회의에서 민주적 방식으로 표결을 해서 결정하자…”
그런 와중에 서상일파는 진보정당 창당 운동 대열에서 이탈하고, 진보당 추진위원회는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한다.
“당시 고정훈은 나한테 조봉암 선생이 후보를 사퇴해야 한다고 수차례 얘기했어요. 무슨 억지를 부리느냐고 그랬더니 그 친구 한다는 말이 ‘죽산이 출마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겁니다. 고정훈이 누굽니까? 미소공동위원회의 덕수궁 회의 때 소령군 사령관 스티코프의 통역관 겸 비서로 서울에 왔다가 스티코프의 가방을 들고 귀순한 사람 아닙니까.”
어찌됐든, 조봉암은 아직 정당 간판을 달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를 맞이한 것이다. 선거 국면에서 다시 보수야당인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 문제가 부상하는데, 그 대목을 전세룡옹은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죽산 선생께 이미 ‘정권교체 계획’이라는 문건을 만들어서 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정권을 잡도록 도와주고 우리는 빠르면 4년 후, 늦어도 8년 후에 정권을 가져오자, 이런 방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창당할 우리 진보당의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선거일 10일 전까지는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겁니다.”
정치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후보단일화의 조건으로 진보당측은 민주당에 ‘근로대중의 수탈 없는 경제정책’과 ‘평화통일 정책’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였고, 양측간에 타협이 성사되지 못한 상황에서 신익희 후보가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전옹의 얘기는 다르다.
“이미 ‘아서원’에서의 단일화 협상 이후에 그런 문제는 협의가 끝났어요. 더구나 우리측은 선거일 10일 전까지만 선거운동을 하기로 내부방침을 정했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죽산과 해공(海公:신익희의 호) 두 사람이 대중 앞에서 손잡고 단일화 선언을 해서, 국민들에게 ‘좋은 그림’을 내보일 예정이었습니다.”
5월6일, 조봉암은 순천 유세를 마친 후에 전주로 가기로 하고, 신익희는 서울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신익희가 야간 열차를 타고 가다가 급서(急逝)하고 만다.
전세룡옹은 당국이 밝힌 ‘심장마비’라는 사인(死因)을 믿을 수 없다고 얘기한다. 선거 전에 해공의 사주를 봐준 적이 있다는 그는, 사주로 보나 건강상태로 보나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공이 죽자 조봉암은 실질적인 야당의 단일후보가 된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 동안의 협상원칙을 깨뜨리고 조봉암 지지를 거부했고, 진보당의 선거운동은 관권의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투표는 물론 개표과정에서도 심각한 부정사례가 속출했다.
“우리가 이긴 겁니다. 선거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 졌어요. 우리 진보당 사람들은 투표 참관을 못 하니까 민주당에서 잘 해줘야 하는데 민주당 참관인들도 자유당과 한통속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신당을 표방한 죽산이 216만표 이상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성과지요. 해공은 운이 나빴지만 죽산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의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만일 그 선거에서 조봉암의 득표력이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났더라면 그는 죽음을 면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전옹의 ‘운이 좋았다’는 말은 조봉암 개인의 운명보다, 우리 정치사에서 혁신정당 운동가로서 그가 거둔 획기적인 성과를 더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내가 서른 중반이 넘도록 총각으로 지내는 것이 안 돼 보였는지 죽산 선생이 당신의 처제를 소개해줄 테니까 장가를 가라고 부추겨요. 그래서 내가 대답했어요. 우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결혼 안 하겠다고. 그렇게 지내는 중이었는데, 또 한 번은 고향 선배가 아주 좋은 여자를 소개해줄 테니까 일단 만나보기라도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갔다가 이 ‘천사’를 만나게 된 거요.”
전옹이 옆에 서 있던 정일례 여사를 가리키며 웃었다. 전세룡의 ‘천사’ 정일례는 이화여대 대학원 1회 졸업생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재원이었다는데.
“헤겔이나 칸트 등에 심취해 있던 시절이었는데, 이분을 만났더니 엉뚱하게 동양철학을 갈파하고 시전(詩傳)을 줄줄이 꿰더라고요. 그런 학문적인 호기심도 있었고, 생각하는 것도 깊고 스케일도 크고…그래서 아하, 이만한 인물을 만나기도 쉽지 않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러나 세상은, 늦은 나이에 이성간의 사랑에 눈뜬 이들 남녀에게,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한가롭게 형이상학이며 공자왈을 묻거니 답하거니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1958년 1월13일,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몰아쳤다.
“1월16일 죽산 선생의 조카며느리가 ‘다 잡혀가면 안 되니까 피해 있는 게 좋겠다’고 해서 일단 피신했다가 2월4일에 자진 출두했지요. 잠도 안 재우고 먹을 것도 안 주고…그때 당한 고문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내용을 가지고 취조를 하던가요?
“북한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의 전복을 획책한 죄를 인정해라, 조봉암은 빨갱이 간첩이다, 이렇게 실토를 하라는 겁니다.”
―당시 체포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죽산 선생하고 나말고도 윤길중, 박기출, 김달호, 신창균, 조규희, 이명하, 조규택, 이상두, 권대복… 그리고 진보당은 아니었지만 초기에 진보당 강령을 기초했던 이동화도 잡혀갔어요. 모두 18명이었습니다.”
―나중에 기소될 때 혐의가 무엇이었습니까?
“죽산 선생은 간첩죄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어요.”
검찰이 국가보안법 위반의 근거로 들이댄 것은 진보당의 강령이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은 남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방편이다. 강령에서 내세운 ‘수탈 없는 경제정책’은 북한 노동당의 정책과 상통한다. 따라서 진보당은 대한민국헌법을 위반한 불법단체다. 이런 논리였다. 그렇다면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둔 근거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것이 ‘양이섭 사건’이다. 양명산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양이섭(梁利涉)은 미군 첩보기관에 고용되어 남북교역상 노릇을 맡아서 두 차례 북한을 다녀온 인물이었는데, 그가 한국군 특무부대의 조종을 받아서 조봉암이 간첩이라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5개월간의 1심재판에서 검찰은 조봉암에게는 사형을 구형하고 나머지 간부들에게는 12년 이상의 실형을 구형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양이섭의 증언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음을 들어 조봉암의 간첩죄는 혐의가 없다고 판시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만 인정하여 그에게 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나머지 17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자 반공청년단을 자처하는 괴청년들이 1심재판부를 용공판사로 규정하고 항의시위를 벌이는 일대 소동을 빚었다. 그러자 1심 담당 판사들이 그들을 피해 몸을 숨기는 등 사법사상 초유의 재판파동이 벌어진 것이다.
2심 재판정에 선 양이섭은 “조봉암의 간첩혐의는 조봉암을 제거하기로 한 국가방침에 협조하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다는 특무대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했던 허위자백이었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해버렸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의 진술번복을 무시하고 조봉암과 양이섭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말았다. 나머지 간부들도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59년 2월에 있었던 대법원 상고심에서 나머지 간부들은 무죄가 인정됐으나, 조봉암은 끝내 간첩혐의를 벗지 못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59년 7월31일, 그때 나는 아직 감옥에 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내 사랑’(부인을 지칭)이 면회 와서 미리 알려 주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는데, 간수가 나한테 오더니 ‘죽산의 사형이 집행됐는데 당신 소감이 어떠냐’고 묻는 겁니다. 참 서글퍼지더라고.”
전세룡옹의 얘기다. 진보당과 조봉암의 시련은, 56년의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창당과정에 이미 예고됐는지도 모른다. 을지로나 명동에 중앙당 사무실을 두기로 하고 당사로 쓸 사무실 물색에 나섰는데 건물주인들이 한사코 임대를 거부했다. 엉겁결에 계약서를 작성했다가도 이내 취소통보를 해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종로2가의 장안빌딩만은 진보당 입주를 두말 없이 반기더라는 것이다. 전옹은 당국에서 진보당 중앙당을 장안빌딩으로 유인했다고 보고 있다. 8·15 직후 조선공산당이 그곳에 세들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진보당이 들어가게 함으로써 사상공세의 빌미로 삼으려는 음모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색깔공세를 할 때, 조 아무개라는 사람이 당사를 들먹이더라고. ‘봐라, 당사도 옛 공산당이 있던 장안빌딩에 있지 않으냐’. 이런 식으로….”
뿐만 아니라 내무부나 경찰국의 정보원 노릇을 하던 몇몇 사람들이 조봉암에게 일본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라는 경고성 정보를 제공한 적이 있었다. 물론 죽산은 도피자금을 넉넉하게 주겠다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 ‘일본으로 도망치는 조봉암을 붙잡았다’는 식의 체포 구실을 찾으려고 꾸민 그들의 함정”이라는 것이 전옹의 추론이다.
혁신정당 운동의 좌절
1999년 8월18일자 동아일보에는, 전세룡옹과 59년 당시 서울시경 조사요원으로서 전옹을 취조하고 고문했던 한승격옹(현재 나이 91세)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그 사람이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참회를 했어요. 진보당 사건 조작에 협조한 대가로 당시 돈 290만원을 받아서 그걸로 집 사고 결혼도 했다고 실토하더라고. 당시의 수사관계자들이 살아 있어서 여태 발설을 못하다가, 손자들 얼굴을 들여다보니 죽기 전에 양심선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한씨는 전세룡옹과 동아일보 기자 앞에서 “조봉암을 그냥 두면 이승만 대통령의 재당선이 불가능하니, 진보당을 없애고 죽산을 죽일 수 있도록 사건을 엮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조봉암의 죽음은 ‘이승만 정권에 의한 법살(法殺)’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으나, 당시의 수사관계자가 공개적으로 사건조작을 증언하기는 한씨가 처음이었다.
“나를 모질게 고문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도 어찌 보면 희생자 아닙니까. 이미 용서했습니다.”
전세룡옹의 얘기다.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전세룡은 다시 혁신정당 운동에 나선다. 옛 진보당 사람들과 민주혁신당계, 근로인민당계, 민족자주연맹계, 민주사회당계 등의 혁신운동 인사들이 사회대중당 결성에 나선 것이다. 1960년 11월24일 결당식을 가졌는데 전세룡은 그 새로운 혁신정당의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다음 해 5월, 군사 쿠데타 세력의 포고령에 의해서 당은 해산되고 만다.
“5월18일 한밤중이었는데,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왔다면서 군인들이 차로 나를 데리러 왔어. 무슨 자문을 구할 게 있다더라고. 아하, 쿠데타 일으킨 놈들이 예비검속을 하는구나 생각하고 따라갔지. 이리 저리 옮겨 다니다가 종로경찰서에 갇혔어요. 물론 나는 신분을 사회대중당 조직을 담당하는 전세룡이라고 밝혔지. 그런데 모두들 혁검(혁명검찰)으로 넘기는데 나는 기소하지 않고 따로 부르더라고. 갔더니 이 사람들이 나보고 혁신정당을 만들라는 거야. 돈도 대주고 국회의원도 만들어 주고 잘하면 당수도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야.”
전옹의 말이 사실이라면 쿠데타 세력은 애당초 ‘민정이양’은 전혀 계획하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들이 요구하는 혁신정당은 구색 갖추기용 관제정당이었다. “정당이라는 게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까, 나가서 다른 동지들하고 상의해보겠다”고 얘기하고 빠져나왔다.
그 후로도 그들은 뻔질나게 찾아와서 “왜 창당작업을 하지 않느냐”고 채근했다. 전세룡은 결단을 내려 이렇게 말했다. “도저히 못 하겠다. 공부를 좀더 한 다음에 대학강단에 서겠다.”
그러자 군인들이 말했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정치활동을 하면 재미없어!”
전세룡은 그 후 정보기관의 감시대상이 되었고 그들 말마따나 ‘재미없는’ 정치판하고는 발길을 끊었다.
그해 마흔을 훌쩍 넘긴 노총각 전세룡과 서른이 넘은 노처녀 정일례가 ‘역사적인’ 혼례를 치렀다. 당국으로부터 ‘꼼짝 마라’는 경고를 받은 터에 달리 할 일도 없었고 늦었지만 알도 까야 하겠고(전옹의 표현), 그래서 서둘러 결혼식을 치렀다는데.
“지금 4·19묘지터가 당시에 유원지였는데 거기서 결혼식을 했어요. 아마 우리가 야외결혼식 제1호가 아닌가 싶어요. 하객들은 집에서 밤새 만들어간 도시락으로 접대했어요. 요즘이야 야외 결혼식이 낭만스럽다고 얘기하지만, 당시만 해도 신기한 일이었지요. 당국의 감시도 있었고, 그 외 여러 조건이 좋지 않고 해서 할 수 없이…”
정일례 여사가 말한 ‘좋지 않은 조건’ 중에는 신부 부친의 완강한 반대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딸에게 대학원 교육까지 마쳐줬더니, 하필 걸핏하면 감방에나 드나드는 ‘위험한’ 사내와 짝을 맞추겠다 했으니.
미아리 공동묘지 근방에 터를 잡고 먹고 살 일을 걱정하던 전세룡에게 고향 후배 하나가 찾아왔다. 고향에 있을 때 한문도 가르쳐 주고 영어도 가르쳐 주던, 엄격히 말하면 그의 제자였다. 그 후배는 인천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의 장인이 화공약품 공장의 사장이었다.
“자기 장인 공장에서 화공약품을 대줄 테니, 나보고 미아리에다 공장을 차려놓고 화공약품 장사를 본격적으로 해보라는 거요. 장사니 공장이니 하는 건 전혀 내 취향이 아니라 몇 번 거절했는데도 자꾸 찾아와서 얘기하기에 정성을 뿌리칠 수 없어서 시작했지요. 먹고 살 일도 걱정이었지만 무슨 일엔가 몰두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상황이었어요. 예전에 어울려 다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친척들도 나를 슬슬 피했으니까.”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는다’는 군사정부 아래서, 사상문제로 감방경력이 있는데다, 정보기관의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는 그를 환영해줄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더구나 얼마 안 가 자식이 두 명이나 생겼다.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는 그 화공약품 장사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얘기한다.
“장사가 잘 돼서 밥 걱정은 안 해도 되겠는데, 그것만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뭔가 활동을 해야겠는데 활동할 공간이 없다는 것이 비극이었지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민족평화운동을 하자는 것이었어요.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으로는 할 수 없으니까 예술을 통해서 하자, 그래서 붓글씨에 매달리기 시작했어요.”
동기가 그러했기에 그에게 서예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다. 몇 년 동안 정진했더니 서예전에서 금상도 타고 초대작가도 되고, 아시아와 유럽 등지에서 초대 전시회도 가질 만큼 되더라는 것이다.
―박정희 시절 이후로도 혁신을 표방하는 정당들이 부단히 명멸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활동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그런 정권 시절에 혁신세력임을 표방하고 가끔 ‘허가받은’ 좌파성 발언을 하는 세력이 있었는데, 나는 그들 대부분을 권력의 앞잡이로 봅니다. 한번 앞잡이 노릇을 하면 계속해야 돼요. 글쎄, 5·16 쿠데타 세력 쪽에서 결혼자금도 대주고 돈도 주겠다면서 혁신정당 하나 만들라고 회유를 하더라니까.”
전옹은 자신은 성격이 ‘군인 기질을 타고난 혁명가적 성품’이라고 얘기한다. 이념이니 정치적인 신념이니 그런 걸 떠나서 박정희와 손잡았다면 아마 ‘죽이 잘 맞았을 것’이라고. 듣고 있던 부인 정 여사도 한 마디를 보탠다.
“쉽고 편히 살자고 작심했으면 그럴 기회가 있었지요. 유혹이 많았어요. 그러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처음 혁신정당 만들 때의 지조를 버렸다면 지금 많이 후회할 겁니다.”
전세룡옹이 현실정치 공간에서의 활동 대신 선택했다는 ‘민족평화운동’은 그저 선언적인 얘기가 아니었다. 그는 ‘태극기 바로 세우자’라는 제목이 달린 꽤 두툼한 유인물을 내놓았는데, 태극과 팔괘의 이치를 음양사상에 입각해서 상세히 해설하고, 현재 우리가 국기로 쓰고 있는 태극기는 실제로는 태극기가 아니라 음양기(陰陽旗)라는 사실을 복잡한 도표와 이론을 동원하여 풀이해놓고 있었다. 지면 사정으로 그의 열정과 땀이 배어 있을 그 방면의 연구성과를 소개하지 못하고, 내 붓이 그의 정치적 역정만을 좇을 수밖에 없는 점이 못내 아쉽다.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진보당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여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해나갈 것이고, 죽산 조봉암이 최후를 맞았던 옛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 진보당 기념비 세울 계획이다. 걸핏하면 색깔공세를 해대는 풍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터에, 그런 기념물을 설치한다면 우익 인사들의 반발이 있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부서지면 또 세우면 되지.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잡자면 그런 걸 무서워해서야 되나!”
여든세 살의 전세룡 노인. 그는 역사에 묻힌 과거의 어떤 사건을 단지 기억하고 있을 뿐인 화석(化石)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지금도 혁신정치를 꿈꾸는 역동적인 청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