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넘치는 패거리주의, 부족한 자유의 공간에서 난숙한 지성, 편 따지지 않는 도발로 혹은 찬사받고 혹은 경멸당해온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 그에 대한 식자층의 ‘조울증적 반응’은 그의 궤변 탓인가, 그들의 반칙 탓인가.
그런데 요즘은 세상이 더 무서워졌다. 인터넷 때문이다. 이제 도처에 말 퍼뜨리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 만인에 대한 ‘선택받은 소수’의 감시보다야 얼른 봐도 합리적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말 퍼뜨리는 자들 사이에도 급이 있다. 그 중 진중권(42)은 단연 ‘슈퍼 울트라 급’이다. 우선 이 자는 자유롭다. 특정 조직에 속해 녹 먹는 바 없기에 걸리적거릴 것이 없다. 그러나 말 퍼뜨리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진짜 무서운 건 ‘내 편’이다. 이미 형성된 전선에서 적을 ‘씹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 어설픈 공격으로 심한 부상을 입는다 해도 위생병이 달려올 것이다. 상이군경으로 등록돼 훈장을 타고 노후 보장까지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자는 종종 아군을 씹는다. 그가 말 퍼뜨리는 자로 활동한 수년 동안, 적지 않은 별 셋, 별 다섯짜리들이 ‘아군’인 그의 비판과 조롱 앞에 스타일을 구겼다. 그의 말 자체가 파괴적인 경우도 있었고 공격당한 울분을 참지 못한 그들 스스로 자해를 한 사례도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도무지 이 자의 진짜 아군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의 ‘좌파적 사고’와 ‘당파성’, 또는 ‘인간적 친분’을 이유 삼아 그를 내 편이라 자랑했던 많은 이들에게 그는 유리알처럼 감정 없는 눈으로 ‘배신’의 쓴잔을 내밀었다.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세상에, 우리편이 아니었다니. 진중권의 이 방자한 자유로움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진중권을 말 퍼뜨리는 자 중 단연 돋보이게 하는 두 번째 것은, 누가 뭐래도 놀라운 그의 재능과 직관이다. 그는 글을 잘 쓴다. 매체와 대상의 성격에 맞게, 찰지게, 재미있게, 배꼽 빠지게, 때로는 무겁게, 유장하고 가슴 떨리게. 발상은 신선하고 공격은 매몰차다. 다양한 철학적 문제 의식을 지금 여기의 구체적 상황과 맥락 속에 끌어들여 예기치 않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항용 철학한 자는 숭고하지 않은 것들과는 대거리를 꺼린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이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니콜라스 푸생의 유화를 앞에 놓고 난숙한 미학이론을 펼치다가도, 몇몇 사이트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저없이 가차없이 한 마리 ‘개’가 된다. 풍자와 되받아치기에 능통한, ‘모든 우연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시니시즘(犬儒主義)의 참여정부형 버전. 진중권의 철학은 그의 ‘철학함’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에게 말 퍼뜨리는 자의 막강한 힘을 선사한 세 번째 것은 수많은 매체들이다. 여러 신문과 잡지, 방송과 출판사가, 각종의 인터넷 사이트들이 그의 글을 기다린다. 물론 꼭 잘해 보자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때릴 놈’이 없어 그를 찾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가 뭘 쓰면 자꾸 말이 나고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니 이 아니 좋은가. 그는 말 퍼뜨리는 자다. 진중권의 무엇이 이 계산 빠른 지식의 도떼기시장에서 도무지 그를 소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는가.
감정을 비운, 언뜻 무서운 눈
진중권은 경기도 김포의 아파트촌에 산다. 어머니와 그, 두 식구 살림이다. 방학이 되면 독일에 유학중인 일본인 아내가 돌아온다. 세 살 난 아들은 아내와 함께 있다. 그의 집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아무래도 가볍지 않다. 말 퍼뜨리는 자(기자)가 훨씬 더 왕성히, 열정적으로 말 퍼뜨리는 자를 헤집으려 가는 길 아닌가. 말 퍼뜨리는 자는 폭발하는 말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안다. 참고로 그는 자·타칭 ‘빨간 바이러스’, 남다른 전염력과 파괴력을 지닌 말의 다이너마이트다.
그런데 평범한 30평 아파트 거실에 마주앉은 그는 폭탄 노릇하기엔 좀 말랐다 싶다. 하얀 얼굴, 얌전한 음성, 가지런히 돋은 이.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실감케 한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것저것 잘 챙겨주고 대답도 성심성의껏 하는데 왠지 모를 불균형이 느껴진다. 말을 하긴 하는데 안 하는 게 있다. 일부러 감추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이 되어지지 않는 무엇. 말이 되어지지 않음으로써 그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그 무엇. 분명 두 사람인데 그는 혼자 있는 듯하다. 튀지도, 거칠게 구는 것도 아니련만 무리 속에 섞여 있는 그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장난스런 눈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아 언뜻 무섭고, 입가의 미소는 순진함의 표상인지 노회함의 가장인지 가늠키가 난망이다.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그는 매우 예의 바르다.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웃는다. 손톱은 보이지 않는다. 이빨도 없다. 그저 이렇게 되묻는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당연한 걸 모르죠?” 그는 자기 세계 안에서 한없이 차분하고 명쾌하다. 문득 부신 햇살 아래 홀로 소꿉놀이하는 아이가 떠오른다. 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진중권은 김포 언저리에서 태어났다. 2녀2남 중 셋째. ‘클래식 오디세이’를 쓴 음악평론가 겸 방송인 진회숙(49)씨가 큰누나, 독일에서 활동하는 세계적 작곡가 진은숙(43)씨가 둘째누나다. 아버지는 목사였고 서울사범학교 출신의 어머니는 피아노 교습을 했다.
-글을 읽으며 기독교적 세계관에 밝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충청도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중앙대 법학과를 다녔답니다. 그마저 생활고 때문에 불가능해지자 등록금이 면제되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셨대요. ‘목사님’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는 분이었어요. 날카롭고 지적인 스타일에 자존심도 강했죠. 동네에서 영자신문을 읽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간혹 근처 미군부대에서 영어 설교도 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유신체제 홍보 책자 같은 걸 보내오면 화를 내며 찢어버렸어요.”
-종교적 강압이랄까, 그런 것은 없었습니까.
“없었어요. 아버지는 합리적인 분이었어요. 방언(종교적 황홀경에 빠졌을 때 터져나오는 독특한 언어) 같은 것을 높이 치지도 않았구요.”
-생활은 안정적이었나요.
“개척교회 목사 수입이란 게 많지가 않아요. 어머니의 피아노 교습이 중요한 생활수단이었죠. 신도가 100명은 넘어야 겨우 먹고 살만하다던데, 우리 아버지는 꼭 그 때쯤 돌아가셨어요.”
-그게 언젠대요.
“1977년,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요.”
-학교는 어디서 다녔나요.
“전 계속 이쪽 동네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학교는 서울로 갔죠. 공항동 송정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 때 정동 덕수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중동중학교,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했구요.”
-일종의 유학인 셈인가요.
“집에서 버스 타고 다녔으니 그건 아니고…. 어쨌거나 좋은 학군 찾아간 건 맞지요.”
-공부를 잘했나봐요.
“덕수초등학교로 전학 간 첫 학기에 올 미(전과목 미)를 받았어요. 아버지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매를 맞았죠. 전 서울 애들 실력이 워낙 좋아선 줄 알았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나봐요. 중학교 1학년 들어가 첫 시험에 1등을 했고, 2학년 땐 좀 놀다, 3학년이 돼서는 얼굴에 버짐이 피도록 공부했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했나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 성문종합영어랑 1학년 수학을 다 뗐으니까요.”
‘에레베스트’와 ‘에베레스트’
-부친을 잃은 것이 한 계기가 됐겠군요.
“그랬죠. 1학년말에 돌아가셨으니까. 2학년 때는 충격 때문에 성적이 많이 떨어졌어요.”
-어쩌다 돌아가셨는데요.
“연탄가스를 마셨어요. 보통 그런 일을 당하면 2년 후쯤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랬죠. 그 2년 동안 사고 후유증으로 아버지나 식구들이나 고생이 많았어요. 뇌에 이상이 생겼는지 아무나 막 잡고 울고 방에 연탄화덕 피워놓고 문 잠그고. 때로는 폭력도 행사해, 내가 막 힘이 세져 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했지요.
하지만 돌아가셨을 땐 굉장히 슬펐어요. 상실감도 컸구요. 저랑 아버지는 잘 맞았어요. 말이 통했죠. 뭘 자꾸 사주고 그런 분은 아니었는데, 고궁이고 공장이고 데리고 다니며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트럼펫 연주도 할 줄 아시고, 감각이 예민한 분이었죠. 아버지의 죽음이 제게 굉장한 자유와 해방을 주었다는 건 나중에야 생각한 일이에요.”
-책 읽기나 글 쓰기를 즐겼나요.
“책은 뭐, 큰누나가 읽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것 좀 보고, 문고판 소설 읽고 그랬어요. 중3 때는 공부한답시고 영문판 소설도 봤구요. 글 쓰기는 싫어했어요. 학교에서 작문 숙제 내 주면 앞만 대강 쓰고 뒷부분은 여기저기 것 짜깁기해 베껴내곤 했어요.”
-중학교 때는 어떤 아이였나요.
“그냥 조용했어요. 근데 누가 틀린 말을 하면 그건 꼭 고쳐줬어요. ‘에레베스트가 아니라 에베레스트다, 잠수함을 움직이는 건 프로펠러가 아니라 스크루다’ 하는 식으로.”
-친한 친구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아, 한 명 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던 애 하나. 그 친구가 참 무던했거든요. 다 받아주고 이해해 주고. 근데 죽었어요, 몇 년 전에.”
-내가 좀 별난가보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저 별난 애 아니었어요. 특별하지도 않고, 남다른 재능도 없었구요.”
-남이 보는 나랑 내가 생각하는 나가 참 다르다, 그렇게는 생각지 않나요.
“그건 그런 것 같애요. (나는) 당연히 다 알 거라 생각하는 걸 남들이 모를 때 깜짝 놀라죠.”
-고등학교 때도 그저 얌전했나요.
“그 땐 완전히 달랐어요. 인생관이 바뀌었거든요. 범생이 생활 안 하겠다 마음먹었고, 일단 놀고 보자 생각했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너무 공부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학교 생물반에 들어갔는데 아주 골 때리는 서클이었어요. 깡패 짓 비슷하니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정학을 세 번 맞았는데 한 번은 폭행, 두 번은 흡연이었어요.”
-책은 뭘 읽었는데요.
“‘씨의 소리’ ‘해방 전후사의 인식’ ‘8억인과의 대화’ 같은 것들. 타임지에 난 DJ 기사를 구해다 친구들과 돌려보기도 했어요. 소설은 그 때부터 안 읽었어요. 사회과학서적에 판타지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죠.”
여기까지가 1982년 서울대에 입학하기까지 진중권이 걸어온 길이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재미있는 게 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할 때, 특히 글 쓰기를 업으로 삼는 경우 나름의 ‘구성’을 하게 마련이다. 묻지 않아도 가장 아팠던 일, 독특한 이력, 강렬한 체험 같은 것들이 말머리로 풀려 나온다. 과거를 자주 곱씹는 류의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진중권에게는 그런 게 없다. 묻는 말에 답할 뿐, 시간과 사건들은 같은 상자에 담긴 똑같은 모양의 유리잔처럼 무감(無感)하고 매끄럽다. 그러고 보니 그의 글에 간혹 등장하는 ‘체험’들은 대부분 공적인 것이었다. 사적 영역이라 해도 뭔가 공적인 문제의식을 자극하는 테마들이었다. 왜일까. 그만큼 정제된 인간이란 뜻인가, 아니면 ‘나’와 ‘상황’ 사이에 범부에겐 없는 어떤 미지의 완충막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그도 아닐진대 그저 말재주가 없을 뿐인가. 어쨌거나 그의 얼굴에선 친절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는 서울대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왜 하필 미학이었나요.
“이름이 예쁘잖아요. 누나한테 ‘김지하도 미학과 나왔다, 너도 잘 어울릴 거다’ 그런 말도 들었구요.”
-누나들 말을 잘 듣나봐요.
“우리 형제는 그렇게 친하지 않아요. 일년에 한두 번이나 볼까말까. 만나면 괜히 짜증나니까. 그저 그런대로 친한 친구 사이 정도라고나 할까요.”
-입학하자마자 시위부터 했겠군요.
“1학년 겨울방학 때까지는 조용했어요. 친구들이 뭐라 그러면 니체 갖고 딴지 걸구요, 시니컬하게. 그러다 친구 하나가 하도 권해서 ‘공산당선언’이랑 ‘정치경제학 원론’을 봤는데, 아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이더라구요. 마치 세상을 엑스레이로 찍어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2학년이 되면서 지하 서클에 들어갔죠. 책 읽고 시위에도 참가했어요.”
-열성적인 편이었나요.
“그 때는… 운동 그 자체보다 지식에 끌렸던 것 같아요. 선배들이 참 똑똑하잖아요. 뭘 물어도 답이 척척 나오고. 저도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영문판 ‘자본론’을 구해다 읽고 그랬죠. 근데 갈수록 고민되데요. 시위하고 감방 가고 현장 들어가고, 그게 어떤 공식 같은 거였는데 전 감방 갈 자신이 없었거든요. 상상도 못 했어요. 얘기 들어보니 주거환경이 상당히 안 좋더라구요(웃음). 제 미래, 그러니까 학문에 대한 꿈, 안락함, 어떤 가능성, 그런 것들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어요. 갈등이 클밖에요.”
-어떻게 해결했죠.
“결국 군대로 도망갔죠. 4학년 때요. 끝나면 현장이 아닌 대학원에 가겠다, 그래서 이론으로 봉사하겠다고 결심했어요.”
-비겁하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했죠. 그런데 전 뱅가드(전위·선봉)는 아니었거든요. 그저 선진적 대중, 그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거랑은 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전 MT 가서도 남들 운동가 부를 때 빌리 조엘 노래 부르고 그랬어요.”
-튀고 싶었나요.
“아뇨, 정말 좋아하는 노래니까.”
-감옥과 현장을 피했다는 것이 어떤 열등 의식으로 자리하고 있진 않나요.
“그런 건 없어요. 회색이었던 친구들이 지구전에는 오히려 강하잖아요. 아주 열심이었던 사람은 확 피었다 가라앉고. 일종의 역할 분담이라 생각해요.”
-대학 때는 뭘 잘했나요.
“어학이요. 대학원 다니면서는 영어, 독어, 불어, 일어, 러시아어를 했어요. 몇 개는 능통한 편이었고 나머지도 읽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죠.”
-군대 생활을 어땠어요?
“마초가 다 됐죠. 욕이 막 나오고. 처음 3일 동안은 아주 죽겠더니 곧 적응이 되더라구요. 거기서 ‘현장’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어요.
군대 가서 인간이 얼마나 드러운가를 알게 됐어요. 김치 쪼가리 갖고 싸우잖아요. 뭐 먹을 거 사면 절대 안 나눠주거든요. 첨 훈련받을 때 전 빵을 사면 옆의 놈한테 꼭 나눠줬는데, 제 돈 다 떨어지고 나니 그 친구는 자기 돈으로 빵 사 먹으면서 나한테 한 번도 안주더라구요(웃음).”
견딜 수 없는 것, 무식·타락·촌티
-그러고 보니 그 때쯤 운동 진영에 NL(민족해방)이니 PD(민중민주)니 하는 갈림이 생겨나기 시작했겠군요.
“복무중 한 여학생을 소개받았는데 김일성 신년사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거예요. 무슨 종교집단도 아니고. 또 막 대학 들어간 동생이 제게 ‘김일성장군항일무투사’라는 책을 내밀며 이제 토론할 때는 형제끼리도 존댓말을 쓰자 하데요. 너나 하라 그랬죠.”
대학 시절 정통 마르크시즘과 독일 고전 철학에 대한 폭넓은 교양을 쌓은 그에게 민족, 품성, 신심을 강조하는 NL의 주장이 먹혀들 리 없었다. 대신 그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소련식 사회주의, 그러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에 몰두했다. PD 라인이 된 것이다.
“교조적이었죠. 일종의 강령이니까요. 하지만 그 때는 그런 게 중요치 않았어요. ‘운동’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에 사회주의 혁명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입 밖에 내지는 못했죠. 조직에서 전 하나의 톱니바퀴일 뿐인데요. 아닌 것 같은데 안 갈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우리를 어디로도 데려가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할 수 없이 끌려가는….”
결국 그는 가지 않은 NL의 길은 물론 PD의 노선에조차 완전히 설복되지 못했다. 1999년 3월 그가 ‘당대비평’ 봄호에 기고한 글 ‘지배의 언어, 탈주의 언어’는 그의 대학원 시절 문제의식에 대한 언어철학적 자기해답서다. 그는 이 글에서 두 진영의 인식을 ‘맹목적 추종’(NL)과 ‘맹목적 거부’(PD)라며 거세게 질타했다. 특히 NL에 대해서는 ‘시대의 변화에 초연한 영원한 언어’를 쓴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과학적 논리가 아닌 눈물, 감동, 품성 등 봉건적 언어를 통해 ‘불패의 신화’를 만들고, ‘남한의 식민지성’ 등 비과학적 현상을 ‘증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사실 이 정도 비판은 점잖은 것이다. 다른 글에서 그는 NL에 대해 ‘윤리적으로 타락했고, 지적으로 무식하며, 미적으로 촌스러운 수구반동의 무리’라는 표현을 쓰길 주저하지 않았다. ‘타락했고 무식하고 촌스럽다’는 것은 그가 ‘극우’들에게 자주 던지는 말이다. 그가 보기에 ‘북한체제의 냄새가 나는’ 일부 운동권이나 극우 보수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거기서 거기였을 것이다. 여기서 그를 결정적으로 짜증나게 한 것은 ‘북한’ 체제의 냄새가 아니라 북한 ‘체제’의 냄새였던 듯하다.
-원래 비이성적인 걸 못 참나요.
“골상학으로 유명한 분이 저에 대해 ‘좌뇌가 특히 발달한 경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좌뇌는 논리뇌라고 하잖아요.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전 이해가 안 가는 건 절대 받아들이질 못해요.”
그는 서울대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에서 일하며, 하루 두 탕씩 과외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매달 250만원을 벌어 집안 살림을 꾸리고 등록금도 해결했다.
1990년 사회주의권이 붕괴했다.
-다들 충격이 컸죠.
“한 종교로 화한 사회주의에 대해 현실적 검증이 이루어진 거죠. 더 이상 ‘마르크스 가라사대’가 논거가 될 수 없는 상황. 더불어 주변 세상의 변화를 보며 새 답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꼈어요.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쯤엔 못 사는 애들이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원 다닐 때쯤, 그러니까 1992년쯤 입학한 애들을 보니 웬만하면 부모가 다 ‘사’자예요. 어느 날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 뭐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되묻더라구요. ‘왜요?’ 상당한 충격을 받았죠. 계급성이라는 것을 느꼈고, 아, 이제 평등의 가치조차 논증을 해야 하는 시대가 왔구나, 확실히 깨달았죠.”
“다시 태어난다면 유럽인 되고 싶다”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새 답’을 찾고자 독일 유학을 계획했다. 독일 정부가 주관하는 장학생 시험을 쳐 1등으로 합격했다. 그런데 막상 베를린에 도착해 보니 그가 점찍었던 교수는 이미 딴 대학으로 가버린 뒤였다. 그로 인해 장학금까지 취소돼 곤란을 겪을 즈음, 저서 ‘미학 오디세이’의 고료가 도착했다. 1990년대 중·후반 ‘책 좀 읽는다는 고등학생은 한 권씩 다 끼고 다닌’ 이 책으로 인해 그의 독일체류는 비교적 평탄했다. 유학 생활을 힘들게 하는 건 돈 문제와 학위 취득인데 그는 이 두 주제로부터 모두 자유로웠던 것이다.
-왜 박사학위를 포기했나요.
“모교에 자리잡을 수 없으리라는 건 유학 전부터 알았고, 어디 딴 데 낑겨 살기도 어렵다는 걸 알았고. 그러니 학위가 중요하지 않았죠. 논문은 그저 쓸 수 있으면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처음 3년은 그냥 놀았어요. 전세계에서 몰려온 애들하고. 걔들이랑 어울리면서 우리 인성이, 삶의 방식이 참 잘못됐다는 걸 알았죠.
우리나라 사람은 외국인을 만나면 먼저 그의 국적, 그 나라의 국민총생산 같은 것을 궁금해하잖아요. 그게 인간 관계를 심각하게 저해하거든요. 또 길에서 한국 차라도 한 대 보면 왜 그렇게 감동하는지. 외국에 오래 살수록 그런 민족주의적 호들갑은 더 심해져요. 전 그런 게 싫거든요.”
-차이 찾기에 능한 것 같네요.
“그런 편이죠. 어쨌든 유럽은 복 받은 땅이에요. 사소하게 피해 끼치는 일들을 거의 하지 않잖아요. 보장제도 탄탄해 사회가 잔인하지 않고, 멘탈리티에 있어서도 우리가 근대적이라면 오히려 그 쪽은 탈근대적인 동시에 전근대적이에요. 다시 태어난다면 전 유럽인이 되고 싶어요.”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연구했다.
-품고 갔던 문제의 답은 찾았나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글들에 보면 자주 언급되는 세 학자가 있는데요, 마르크스, 비트겐슈타인, 발터 벤야민이죠? 그들이 바로 답인가요.
“마르크스의 사회분석 틀·정치론·평등의 가치, 비트겐슈타인이 던진 언어철학을 통한 모던-포스트모던 간 대립 극복의 가능성, 발터 벤야민의 감성과 예술적 영감, 그 셋의 결합이지요.”
-벤야민은 특히 당신의 글 쓰는 자세, 문제 의식, 어법과 접근 방법 등에 총체적 영향을 끼친 것 같은데요.
“그의 글을 읽다 어느 순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게 됐어요. 일종의 ‘다락방 체험’ 같은 거죠. 같이할 수 없는 것들이 모여있는 곳, 가족이 짜증날 때 숨어 들어가는 곳이 다락방이잖아요. 벤야민에게는 그것이 유대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와 깊이 연결돼 있는 건데, 저도 그 비슷한 기억이 있었던 거죠. 구약성서적 이야기들, 상징으로 가득한 종교적 세계. 또한 그는 스타일리스트여서, 비평이란 단순히 텍스트가 아닌 쓰여지지 않은 것들을 읽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해줬어요.”
-바로 그 ‘스타일’ 때문에 당신은 종종 공격당하죠.
“스타일을 타깃 삼는 건 옳지 않아요. 스타일은 곧 그 사람이죠. 현실적 문제들은 거기 접근하는 데에 특정한 철학적 스타일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스타일이란 그저 글의 바깥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진리가 있다는 뜻이에요. 소크라테스가 결코 글을 쓰지 않은 것은 그의 진리는 오직 장바닥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의 논리, 실천을 공격하는 것과 그의 스타일, 인격을 공격하는 것은 층위가 전혀 달라요.”
그에게 스타일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어떤 대우주도 파괴할 수 없는 소우주의 절대적 권리’인 듯하다. ‘스타일의 독재’를, 그래서 그는 경멸해 마지않는다.
-근데 이상하죠. 당신을 비판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당신이야말로 ‘인격 모독형’ 공격을 한다고 주장하거든요.
“아니요. 전 욕을 하지 않아요. 조롱하고 짜증나게 할 뿐이죠. 설득도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머리가 컸으면 이제 꼬신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그런 글을 쓰는 목적은 공격의 대상을 ‘계도’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읽는 이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서죠. 보세요, 절 그렇게 많은 이들이 비난하지만 지금껏 고소고발 한번 당한 적 없잖아요.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인데 아무리 읽어봐도 걸 것이 없거든요. 저는 비꼬고 되받아칠 뿐 위험한 ‘인물론’은 펴지 않습니다. 사람은 변화하는 존재인데 그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고 칼을 들이대겠어요.”
-음…, 이 부분은 뒤에 다시 얘기하구요, 당신이 일반적 글쓰기에서 비트겐슈타인에 기대고 있는 바 또한 분명한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말이죠. ‘철학적 문제는 문법적 착각의 문제다’.
“이데올로기도 문법적 착각의 문제죠. 예컨대 자유라는 말을 보세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칭하는 공병호씨 같은 사람은 사실 ‘자유지상주의자’죠.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란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무제한적 영업의 자유예요. 그래서 그 자유라는 말로 재벌을 옹호할 수 있는 겁니다. 극우파가 말하는 자유의 반대말이 ‘억압’이 아니라 ‘무질서’인 것도 같은 맥락이구요.
물론 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렇다면 ‘민주’는 뭔가요. 평등의 이념이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따르는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가 서로를 보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완전한 평등을 얘기하지 않되 평등의 이념을 정의(=분배정의)라는 개념을 빌려 제시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진정한 자유주의자란 복거일씨나 공병호씨가 아니라 고종석씨인 거죠.”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에서 살아 남은 것은 오직 방법론과 ‘평등’뿐인가요.
“아니죠. 마르크스는 70% 이상 옳았어요. 그걸 버릴 순 없죠. 제 목표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에 바탕한 좌파 이론을 정립하는 거예요. 그를 통해 마르크스의 철학을 제대로 논증하는 것이죠.”
-중세시대 ‘신 존재 증명’ 처럼요.
“네, 바로 그것처럼.”
-결혼은 언제 했나요?
“독일에 간 게 1994년 5월이었고 결혼은 1997년에 했어요. 같은 아파트에 살던 유학생이랑요. 자꾸 같이 밥을 해먹다보니 정이 들어서요. 그냥 쭉 동거할 참이었는데 아이가 들어서고 보니 의료보험 혜택이 안되더라구요.”
-열렬한 사랑이었나요.
“우린 그냥 친구 같아요. 전 인생에 큰 기대가 없어요. 행복해질 거란 환상도 없구요.”
그는 1999년 9월에 귀국했다. 그 전에 이미 그는 ‘스타’가 돼 있었다.
진중권이 우리 사회에 본격 등장한 것은 1998년 8월이다. 그 전에도 ‘미학 오디세이’ ‘춤추는 죽음’ 등의 책 발간, ‘문학동네’ 계간 ‘인물과 사상’ 등에 기고한 글들로 꽤 주목을 받았지만 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책은 정치풍자집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다. 책 제목은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씨가 조선일보에 연재중이던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패러디한 것. 그의 날카로운 텍스트 비평, 절묘한 풍자, 글 쓴 이의 논리와 레토릭으로 바로 그를 공박하는 세련된 되받아치기는 실로 우리 지식계가 그제껏 보여주지 못한 무엇이었다. 이 책으로 인해 그는 ‘극우 사냥꾼’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단번에 ‘범 진보진영’의 대표 논객으로 급부상했다.
철학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
-그리고 한 3년 무척 바빴죠.
“2년은 안티조선운동에 매달렸고 1년은 진보정당 편에 섰죠.”
-그 때 ‘조독마(조선일보독자마당)’에서 당신이 벌이는 활동을 보며 혀를 내두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지독하게 싸우냐구요.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가 전투를 치르는 것이 불편하고 괴롭지 않던가요.
“해야 할 일이니까요. 이데올로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어요. 신문 칼럼이나 논문 같은 건 담론이고, 술 먹으면서 그냥 떠드는 게 세론이죠. 담론에서는 누구나 격조를 지키지만 세론은 다릅니다. 본성, 이드가 나오지요. 지금 인터넷이라는 것을 통해 세론이 공개되고 있어요. 세론에는 ‘습속’이라는 것이 녹아 있죠. 몸 속 깊이 박힌 것들. 그걸 그때그때 꼬집어 바로잡지 않으면 자신조차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게 됩니다. 점잖은 얘기만 한다고 파시즘적 이데올로기가 세척되는 것은 아니에요.”
-이론 정립과 정치 활동 사이에는 뭐가 있나요.
“이전에는 그 둘을 전혀 다른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데리다의 ‘법의 힘’을 읽다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마르크스를 처음 만나던 순간의 충격에 비견되는 것이었죠. ‘법의 힘’이라니, 제목만 보면 무슨 법철학서 같잖아요. 아니에요. ‘법의 힘’은 독일의 헌법체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과 독일의 법 정신, 헌법 체계는 전혀 다르죠. 아, 철학이 이렇게 현실에 발언할 수도 있는 거구나. (철학은) 이렇게 써먹어야 되는구나.”
그래서 그는 저서 ‘폭력과 상스러움’의 후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철학으로써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을 하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든 것이 너무 ‘고상하고 정신적’이어서 역겨운 시대에 철학은 광대가 되어 지저분한 장바닥에서 질펀하게 쌈박질을 하며 노는 게 낫다. … 이 평범함의 시대에 숭고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아마도 ‘희극적 숭고’, 즉 스스로 바보-광대가 되는 것뿐이리라.’
-지금 당신의 적은 누구이며 동지는 누구인가요.
“적이니 동지니 하는 개념은 낡은 거예요. 비유적 의미로나 쓰는 거지. 보수·진보·중도가 있다면 다 자기만의 맹점을 갖고 있죠. 하나의 입장이 절대적 진리일 수는 없어요. 내가 못 보는 걸 상대는 볼 수 있거든요. 그러니 싸우긴 왜 싸워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전쟁적 사고방식은 버려야죠.”
-하지만 요즘 당신이 진보누리(www. jinbonuri.com ; 진보정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적어 올리는 글들을 보면 민주당과 그 지지층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느낌도 드는데요.
“아니지요. 그건 말 그대로 논쟁이에요. 그리고 ‘진보누리’는 대중을 상대로 한 매체가 아니라 민노당원과 그에 관심 있는 자들의 ‘놀이터’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어쨌든, 민주당과 관련한 발언에 열심인 것은 지금이 전선을 만들 때이기 때문입니다. 민주당은 이미 5년을 집권했어요. 노대통령을 보세요. 벌써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잖아요. 이라크전 파병, 새만금 문제, 미국 방문 때의 망언. 상황이 이 정도면 이젠 깰 때도 됐다는 거죠.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 뭐 그리 큰 차이가 있습니까. 안고 있는 결정적 문제가 같고 돈 받아먹는 구조가 같은데요.
이미 민주당을 옹호하던 논객들은 거의 망가지지 않았나요. 강준만 교수는 파병이나 새만금 문제가 불거진 초기,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고(나중에야 동참했지만) 이젠 구주류에 ‘붙은’ 혐의가 짙습니다. 김동민 교수는 SBS의 사외이사가 됐으며, 유시민 의원은 현실 정치인입니다. 노혜경 시인은 아예 오빠부대 수준이죠. 지식인이라면 모름지기 비판적 거리를 둘줄 알아야 해요. 한편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경선 후 전방위 공격을 받아 흔들릴 때 언론에 나서 누가 그를 적극 옹호했나요. 저와 유시민씨였어요. 어쨌든 이제 민주당 논객들은 진보로서의 명분을 상당부분 상실했습니다. 당파성이 남은 것뿐이죠. 물론 이 모든 것이 개인적 문제라기보다 객관적 상황 자체가 확 바뀐 것에 가장 큰 원인이 있겠죠.”
-당신에 대해서도 비슷한 맥락의 비판이 가해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예를 들면 ‘시민사회의 상식’보다 민노당의 당파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는.
“전 민노당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습니다. 할 말은 하지요. 전교조도 비판하고 당 지도부도 비판해요. 또 민노당의 당파성이라는 것이 과연 시민사회의 상식을 배반하는 것일까요. 강령이라고 해봐야 ‘서민대중의 정당’ 수준인데요. 지금이 20:80의 사회라면 우리는 그 80을 대변하겠다는 거거든요.”
-하지만 논객으로서의 진중권과 민노당원으로서의 진중권을 구분해 달라는 것까진 좀 과한 요구 아닌가요.
“그게 당연하지 왜 과해요. 제가 신문에 칼럼 쓸 때랑 민노당 기관지에 글 쓸 때랑은 전제 자체가 다른 겁니다. 글이 실릴 매체의 성격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은 기본적인 자세지요. 글쟁이가 문체가 하나라면 그야말로 치명적 약점 아닌가요.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이나 기관지에 쓴 글을 가지고 신문 칼럼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건 문제가 있지요.
또 민노당은 사회당이나 민주당에 ‘상황이 이러하니 후보에서 사퇴하라’ 그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대선 때 민노당 사이트는 ‘권영길 사퇴하라’는 민주당 추종자들의 사이버 테러로 초토화됐어요. 다른 당에 대해 ‘연대하자’는 제안을 하는 거랑 후보를 내라, 내지 마라 충고하는 건 얘기가 전혀 다르죠.”
서울시장 선거를 중심으로 지난해 봄~여름 진보진영을 뜨겁게 달군 ‘강(준만)-진(중권)’ 논쟁에 대해서는 긴 얘기 하지 말자. 분명한 것은, 진중권이 그의 안티조선 시절 혹은 ‘아웃사이더’ 시절 동료들과 적어도 당파적으로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다. 진중권이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아직 말하는 이는 출판인 김규항씨와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홍세화씨뿐이다.
그들 사이에 세워진 벽은 여러 구구한 담론에도 불구하고 결국 특정 당을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지금 현실에선 민주당도 진보”라는 입장과 “민주당은 끝났다, 이제 진짜 진보를 하자”는 쪽의 대립이다. 어찌 보면 전략가 대 인문주의자(혹은 윤리적 이상주의자)의 피할 길 없는 시각 차다.
“그 사진은 쓰지 말았어야 했다”
진중권의 원칙론적 자세는 이외에도 곳곳의 진영에서 격렬한 논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진중권은 미군에 의해 살해된 윤금이 씨 사진을 수업에 사용하는 일부 전교조 교사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미순·효순양 사진을 시위에 사용한 여중생범대위도 마찬가지다.
‘이미 영혼이 떠난 몸, 막 내보여도 된다는 말일까? 그 사진은 두 소녀의 영혼을 무시하고 그들을 한낱 ‘살덩어리’로 격하하고 있었다. …소녀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사고를 낸 미군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것보다 덜 중요한 목적일까?’
또한 이미 그는 이전의 한 글에서 치밀한 논증을 통해 ‘운동권 ‘열사문화’의 변태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니 진중권에게 도저히 못 참을 것은 정치적 견해차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 희생되도 좋은 인권은 없다는 나름의 원칙이 훼손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힘의 맹목적 찬미, 이게 좌우익 파시즘’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같은 이유로 그는 오마이뉴스를 비판한다. 조선일보를 닮아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언론이 사설이나 사고를 통해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수는 있지만, 지면을 도배해가며 노골적인 선거운동을 하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요. 또 맘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기사를 활용해 적극 비난하구요. 권언유착은 어떤가요. 기사로 정치 하는 것은요. 지금 오마이뉴스가 참여정부와 친하지 않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하다 보면 타협이나 공조의 폭이 지나치게 좁아질텐데요.
“그렇긴 하죠. 저도 민주당 쪽을 공격하면서 독자의 2/3가 떨어져나갔는걸요. 글 팔아먹고 사는 이에게는 치명적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해요. 옳은 길이 명백한데 차악을 선택하고 미신(지역을 버려선 안 된다, 지방선거는 대선의 전초전이다 등)을 추종하는 건 안 될 일이죠.”
-‘내가 옳다’는 확신은 어디서 옵니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죠. 제가 무슨 신탁이라도 받나요. 하지만 제가 옳지 않으면 비판을 해야지요. 그 비판에 논리적 정합성과 정확한 논거가 갖추어져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제대로 된 반박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비난만 하는 거예요. 반박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이죠.”
-텍스트를 대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텍스트를 읽을 때는 기본적으로 ‘호의의 원칙’에 입각해야 합니다. 되도록 그게 다 말이 되게 엮어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하죠. 그럼에도 뭔가 문제가 툭 튀어나오면 비로소 비판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 텍스트 밖으로 나가 더 멀리, 더 정교하게 한 논객을 비판할 거면 그가 쓴 글을 되도록 많이, 성심성의껏 찾아 읽어야죠. 그렇지 않으면 강준만 교수가 인물 하나를 정해 완전히 초토화하는 식으로, 대상을 일종의 ‘판오디콘(원형감옥)’에 가둬버리는 꼴이 돼요. 말 하나 따서 비판하면 안 됩니다. 악의적이잖아요.”
-좌파이기 이전에 개인주의자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보다는 차라리 공동체주의자지요. 예를 들어 월드컵 응원물결 같은 건 허구의 공동체입니다. 제대로 된 공동체는 (패거리주의에서) 해방된 개인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유의미한 연대를 맺는 거죠.”
-그렇다면 자유주의는 뭔가요.
“그 모든 것의 전제입니다. 목적이 아니라요.”
-결국 사민주의적 사고가 뿌리내리기를 원하는 건가요.
“그렇죠. 우리나라처럼 ‘괴상한 집단주의’와 ‘천박한 이기주의’가 모순적으로 결합된 아수라에서는 개인의 해방이 무엇보다 급하니까요.”
-사실은 아나키스트 아닌가요.
짤막한 답변이 이어졌지만 그가 7월7일 오전 8시 ‘진보누리’ 사이트에 올린 글을 인용하는 것이 낫겠다.
“굳이 밝히자면 제 주관적 사상은 외려 녹색당+아나키에 가깝지만(이것이 내가 거울 뒤에 감추어놓은 난쟁이죠), 그건 제 주관적 소망이고, 그 소망에 내재된 가치를 조금이라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도, 즉 우리가 현 실정에서 내걸 수 있는 최대의 정치적 목적은 사민주의 정도가 적합하다고 봅니다.”
-서울시장 선거 때는 민노당 이문옥 후보의 사이버 대변인으로 뛰었는데, 대선 때는 왜 권영길 후보 진영에서 뛰지 않았나요.
“지방선거는 당과 당의 싸움이라기보다 지역 일꾼을 뽑는 것이죠. 그래서 당 공천이란 걸 아예 없애자는 얘기까지 나왔잖아요. 하지만 대선 공간은 명백히 현실 정치예요. 당파성과 당파성이 맞부딪치는 공간이죠. 제가 거기 뛰어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는 누구를 밀어주기 위해 글 쓰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에 부합하고, 논리적으로 정합하며,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지만 들어야만 하는 옳은 얘기를 하려고 글을 씁니다. 그 글이 우연히 누구를 밀어주게 되느냐는 별 관심 없습니다. 그건 제 글 쓰기의 목적이 아니라 우연적 결과에 불과하니까요.”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논리에 감명받는 스타일이지요.
“그래선지 누가 저를 막 공격해도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아요. 보통 저에 대한 공격은 세 가지거든요. 싸가지 없다, 애정이 없다, 기분 나쁘다. 어떤 것도 절 논리적으로 감동시키지 못하죠. 그러니 흥분도 되지 않을 밖에요.”
“그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
-다른 사람을 감정적으로 공격하는 편은 아닌가요.
“아니요. 전 욕 같은 거 안 하거든요. 예의 바르게 써요. 인신공격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인신공격이란 뭐냐, 인간성이 후지다, 그러는 거예요. 그의 글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영혼, 인격을 공격하는 거. 많은 사람들은 논쟁의 방법을 몰라요. 화내고 때리는 건 논쟁이 아닙니다. 흥분하면 곧 지는 거예요.”
-‘인신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데에는 반론이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매체가 어디냐, 대거리의 성격이 어떠냐, 말 되돌려주기 식의 풍자냐 아니면 맥락 없이 성격 물고 늘어지기냐, 그런 것들을 봐야지요. 예를 들어 사이트에 올려진 쪽글, 공개된 글이지만 ‘공적’ 글은 아닌 것들을 여기저기서 긁어와, 마음대로 짜깁기해 공격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더러 논쟁의 정도에도 어긋나죠.”
요즘 진중권이 주로 활동하는 사이트는 ‘진보누리’다. 그는 이곳에 거의 매일 새 글을 올린다. 그때마다 수십 개의 댓글이 올라오는 북새통이 벌어진다. 그는 개중 답할 가치가 있다 싶은 비판이 올라오면 지체없이 뛰어들어가 반론을 편다. 그를 씹는 글은 대충 반말이고 그에 대한 진중권의 댓글은 존댓말이다. 용어도 그리 과격하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글이 감정을 심히, 못 견딜 만큼 상하게 만든다고 화를 낸다. 이유가 뭘까.
“논리적 허점을 찾기 힘드니까요. 또 원래 풍자라는 게 사람을 무척 짜증나게 하거든요. 하지만 ‘대책 없음’으로 인한 분노까지 제가 고려해야 할 이유는 없는 거죠. 근데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상대가 하는 말이 기본적으로 웃기지 않으면 풍자도 잘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제 글이 재미있으면 재미있을수록 상대는 속이 아픈 거죠.”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건 그의 논리가 아니라 말하는 방식 아닐까. 이에 대해 진중권은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끌어들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노페의 시민들이 그에게 추방형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그럼 나는 그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
사실 진중권은 견유주의(기성의 풍습이나 세론, 사회 도덕 따위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인생관이나 생활 태도)의 시조랄 수 있는 디오게네스에 비하면 ‘개(犬)’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 그러기엔 지적인 것, 아름다운 것, 윤리적인 것을 너무 사랑한다. 함에도 그는 디오게네스에게 최고의 찬사를 바친다. ‘최초의 자유사상가, 최초의 세계시민, 최초의 변증법적 유물론자, 최초의 사회주의자, 최초의 실존주의자, 최초의 행위예술가, 대왕이 부러워한 개새끼, 디오게네스. 위대한 영혼.’
어쩌면 그는 무엇보다 그 ‘위대한 영혼’에 가까이 가고픈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누군가를 코너로 몰 때 마지막 한 구멍을 열어두는 건 대략 두 이유 때문이죠. 측은지심과 두려움. 당신은 그런 게 없나요.
“왜 틈을 주죠? 근거 없이 봐주는 순간 그건 ‘정치적 판단’이 되는데요. 고립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원체 인간관계라 할 만한 것도 없구요. 하지만 그 때문에 공적 관계를 망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쓸데없이 사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문제예요. 사적 조직이 갑자기 시도때도 없이 공적 영역으로 치고 들어오잖아요.”
언젠가 그는 한 에세이에서 대략 이런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보헤미안의 십계명이 있다. 대충 ‘부모 보기를 우습게 알고, 형제 보기를 개떡으로 알며, 친구 배반하기를 밥 먹듯 하라’, 뭐 이런 내용이다. 대책 안 서는 망나니가 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망이 답답한 구속으로 작용하는 시대에, 그를 대체할 새 관계 유형을 만들어내려면 과감히 ‘개새끼’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이란 사회에서 보헤미안 흉내를 내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욕 먹는 것은 사실 별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런 짓 했다가 남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는 데 있다.’
이러니 그에게 “당신은 ‘관계의 감수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대놓고 핀잔주기도 사실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욕망이 당신을 이끌어가죠.
“그저 지금 하는 일을 잘하고 싶어요. 글 쓰는 거요. 글 자체의 완성도가 높을 때,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아요.”
-명예욕은요.
“제게 명예욕이란 ‘욕을 먹지만 나는 지킬 것을 지켰다’, 그거예요. 다른 사람의 판단이란 것은 결국 정치적이라는 걸 아니까요. 진실이나 본질은 언젠가 밝혀진다고 생각해요. 당장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고 나면 밝혀지는 신뢰, 그런 것들을 쌓아가는 게 저의 명예지요.”
-궁극적인 목표는 뭘까요.
“학문적 난제에 독창적 해법을 제시하는 책을 쓰는 거요. 세계에서 500명만 읽어도 좋은.”
-그렇다면 지금의 생활이 소모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군요.
“전 조급하지 않아요. 이것도 가치 있는 일이니. 소모전을 해야 진보도 있는 거지요. 언젠가 둘째누나가 그러더라구요. 미친 짓도 10년 하면 인정받는다구요. 저 최소한 10년은 미칠 작정입니다.”
그 아이, 앙겔루스 노부스
-종교가 있나요.
“교회에 다니죠.”
-평소 이미지와 쉬 연결이 안 되네요. 우리가 흔히 ‘교조적’이라고 할 때, 거기엔 종교의 맹목성에 대한 불신 같은 것이 깃들여 있는데요.
“전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굉장히 합리적인 기독교 교육을 받았어요. 설교는 일종의 해석학이며, 불교건 기독교건 이슬람교건 그것이 세계 종교라면 안심하고 믿어도 좋다고 생각해요. 취향에 따라서는 소수 종교를 믿을 수도 있구요. 제 장인어른이 대처승인걸요. 제가 종교에서 가치 있게 생각하는 건 어떤 보편적 신성입니다. 또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것들이요. 오히려 전 ‘정치’ 가지고 ‘종교’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종교적 욕구는 교회 가서 해소하시고 정치는 맨 정신으로 하라구요.”
-당신은 종교에서 무엇을 얻나요.
“판단이 안 설 때, 개입하고 발언하는 게 옳다 싶지만 불안할 때 시편 23편을 떠올려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람마다 나름의 존재미학이 있다면 제겐 신앙이 그 한 뿌리인 거죠.”
진중권과의 긴 대화가 끝났다. 무척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그는 아직 미지의 사람이다. 왜 그의 눈에선 감정을 발견할 수 없는지, 공감하는 바가 있는데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는지, 무리에 섞여 같이 웃고 우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든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빈 골목, 부신 햇살 아래 혼자 소꿉놀이하는 그 아이는 누구인가.
돌아와 다시 그의 책 ‘앙겔루스 노부스’를 읽는다. 마지막 장, 파울 클레의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新天使)’를 소재 삼은 글이다. 그는 클레의 그림을 통해 ‘파라다이스의 들뜬 희망을 참담한 좌절감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80년대 우리들의 슬픈 경험을 처리하려 한다’고 적고 있다.
‘…날개를 펴고 뒤로 밀려 날아가는 신천사처럼 우리의 저항도 우리를 파라다이스에 가까이 가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후진성은 우리를 끝없는 절망에 빠뜨리며 우리 발 앞에 새로운 파국의 폐허를 던져놓을 것이다. 바로 이 위험의 순간에 나는 현재를 구원하고자 “죽은 자들을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다시 한데 모으고” 싶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이 눈에 확 들어온다.
‘저 한 장의 그림은 …나와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를 하기 원하며 그 슬픈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체, 무력하게 머리만 자란 또 하나의 멜랑콜리커(우울한 기질을 가진 자)다.’
앙겔루스 노부스. 그 아이가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