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상처를 보석으로 만든 영적 트레이너 ‘들꽃피는 마을’ 김현수 목사

“지도자와 낙오자는 ‘한끝’ 차이죠”

  • 글: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4-09-24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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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둑질과 환각제 흡입을 일삼던 가출 청소년들을 제 자식처럼 거둬 보듬은 사람. ‘다친 마음이 다친 마음을 품어줄 수 있다’는 믿음이 상처받은 아이들을 당당한 인격체로 길러냈다.
    • 그가 꾸려가는 공동체엔 낮은 데로 임하는 교감의 향기가 들꽃처럼 번지고 있었다.
    상처를 보석으로 만든 영적 트레이너 ‘들꽃피는 마을’ 김현수 목사
    ‘들꽃피는 마을’은 들꽃이 피는 벌판에 자리잡은 동네가 아니다. ‘들꽃피는 학교’는 교실에 들꽃을 꽂아둔 학교가 아니다. 경기도 안산시 외곽 와동의 자그만 벽돌건물, 이곳 2층이 학교고 3층은 마을이다. 거기 있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들에서 피어난 꽃이란 얘기다. 들꽃피는 마을과 학교는 소위 말하는 가출청소년의 집이다. 대안가정이고 대안학교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집을 나온 아이들이 거기 모여 함께 살고 함께 공부한다. 방학인 데도 교실 컴퓨터 앞엔 아이들 대여섯이 싱그럽게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거기서 그 마을을 ‘창조’해낸 김현수 목사를 만났다. 반쯤 희어진 짧은 머리, 칼칼하나 따스한 눈, 맑은 웃음, 잰 걸음. 이런 묘사는 암만 해봤자 수박 겉핥기다. 수줍고도 열렬하게 자기 삶을 토로하는 그를, 아이들과 함께 땀흘려가며 맛있게 상추쌈을 먹는 그를, 지도자와 낙오자란 한끝 차이에 불과하며 상처가 재산인 것을 발견해내는 힘이 신성이라고 말하는 그를, 내가 엉성한 말의 그물로 포박해낼 수 있을까.

    평범과 위대가 둘이 아니란 것쯤이야 나도 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목사라 한들 어찌 그리 기운찬 일을 시작했을까. 제 발밑만, 제 가족만 껴안고 사는 보통사람의 삶을 뿌리치고 나선 힘의 근원이 도대체 뭘까. 삶의 질, 그 최고 단계가 뭔지 그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고난에 처한 이웃과 아픔을 나누는 마음 안에 강렬한 만족이 있더라는 생의 비밀을 스스로 찾아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내 입에 뱅뱅 도는 시가 있었다. 장돌뱅이 사생아로 자라 그 상처의 힘으로 글을 쓰는 송기원, 그의 시 ‘교감’을 함께 읽으면 들꽃피는 마을에서 내가 느낀 눈부심이 설명될까. 김 목사의 본질을 포착하는 촘촘한 그물이 되어줄까.

    터진 입술이 터진 입술을 더듬어마침내 검붉은 멍과 멍끼리 엉키면눈부셔라

    밤새 하얗게 지붕을 덮은 눈!



    “다친 마음만이 다친 마음을 품어줄 수가 있어요. 영적 지도자란 다른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껴안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에요. 자신의 눈물과 고통을 극복해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눈물과 고통을 이해하고 치료해줄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 우리 들꽃피는 마을 아이들의 상처는 그 자체가 개인적 재산이고 동시에 사회적 재산이에요. 제각기 그걸 성찰해서 깨닫고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와 우리 선생님들이 할 일이지요. 방치되지 않고 사랑으로 극복된 상처는 힘으로 변합니다. 사회도 우리 아이들을 ‘깨달은 자’로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해요. 그럴 때 우리 아이들은 세상을 고치는 영적 트레이너가 될 수 있어요. 그런 날이 꼭 올 거라고 믿습니다.”

    나는 은연중 송기원의 시가 김현수 목사가 한 이 말의 다른 버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교회로 찾아든 거리의 아이들

    그의 교회에 거리의 아이들이 찾아온 건 지금부터 10년 전 여름이다. 올 여름처럼 그 여름도 열대야가 계속되어 연일 숨이 턱턱 막히게 더웠다. 새벽기도를 나간 목사 부부의 코에 악취가 진동했다. 교회에서 운영중인 공부방에 열두셋 나이의 아이 여덟 명이 뒤엉켜 자고 있었다. 더럽고 꾀죄죄한 옷, 걸레 같은 양말, 다 떨어진 운동화. 냄새의 진원지는 바로 거기였다. 아이들을 깨워서 내쫓았다. 애들은 비척거리며 물러갔으나 밤이면 또 왔다. 가엾은 마음에 때로는 아침을 먹여 보내기도 했다. 아귀아귀 밥을 퍼먹는 애들을 보며 간절히 타일렀다. “다시는 오지 마라. 얼른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집으로 들어가라!”

    그러나 애들은 걸핏하면 교회로 몰려왔고 때로는 똥까지 싸놓고 도망갔다. 화가 난 그는 튼튼한 자물통을 네 개나 사서 교회의 셔터문을 잠가버렸다. 10월이 되었다(들꽃피는 학교 개교일이 10월9일이다). 이날 김 목사는 거리에서 자신이 쫓아낸 그 아이들을 또 만났다. 문 잠긴 교회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미 쌀쌀해진 날씨에 한데서 날밤을 샌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얼굴을 안다고 “목사님, 사모님, 밥 좀 사줘요” 하며 애처롭게 따라왔다.

    “밥이나 한 끼 사주고 말았으면 될 일을 내가 사고를 치고 말았어요. 문득 왜 그토록 거리를 헤매는지 그 애들의 얘기를 듣고 싶어진 거예요. 일단 밥을 먹인 후 밤에 다시 교회로 오라고 불렀지요.”

    아이들은 밤을 꼬박 새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앞다퉈 털어놓았다. 온갖 사연이 다 있었다. 지옥 같은 얘기들이었다. 김현수, 조순실 부부는 이들을 위해 한 주일만 시간을 내기로 작정했다. 애들을 데리고 가정방문을 가보기로. 달래기도 하고 야단도 치고 도울 수 있는 한 돕기도 하면서 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그러나 착오였다. 찾아간 집은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집엔 모조리 엄마가 없었다. 가난과 폭력과 술과 절망과 한숨이 가득한 곳. 아이들을 그곳으로 보낼 수도 없고 보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거리를 헤매는 한 아이 뒤에는 오래 누적된 복잡한 가족사가 숨어 있어요. 거리를 헤매는 아이가 바로 그 집안 역사의 현재 흐름이거든요. 단순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에요. 너무 오래 왜곡돼서 고칠 수조차 없는 문제. 가정방문을 해보니 그게 한꺼번에 다 드러나더군요.”

    가정방문 이전엔 가출 아이들 부모를 원망했다. 오죽하면 자기 애 하나 건사하지 못하나 싶었다. 그러나 막상 집에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아이들 아버지 중에 나와 동갑이 셋이나 있었어요. 또래란 게 묘해서 그 집안의 상처를 너무 깊게 알아버린 것이 되레 죄스럽고 미안했어요. 결국 그들은 지금까지 내가 눈감고 싶었던, 나와 내 또래의 상처를 그대로 짊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원망을 할 수가 없었어요.”

    시청을 찾아가도 또 어디를 두드려 봐도 마땅히 아이들을 맡길 만한 데가 없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거리를 떠돌았다. 간간이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경찰에 잡혀가면 애들은 보호자로 목사 김현수의 이름을 댔던 것이다. 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면 동네사람들도 교회로 찾아와 항의했다. 어느새 그는 공공연히 애들의 보호자가 돼있었다. 결국 애들을 거두기로 했다. 예수님이 진작에 세운 계획이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살림집에 여자애 2명을, 교회 공부방에 남자애 6명을 데리고 살았다. 들꽃피는 마을의 시작이었다.

    몸에 밴 좀도둑질

    그는 며칠 전 ‘똥교회 목사의 들꽃피는 마을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삭막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김현수 목사와 들꽃 아이들이 피워낸 눈물과 웃음, 그리고 행복공동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은 대체로 담담하다. 실제의 강렬한 경험들을 유연하게 서술했다. 아이들과 함께한 생활은 처음부터 혼란의 연속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힘 탓에 자신도 모르게 발 들여놓은 일이지만 집 나와 떠돌던 아이 여덟을 한꺼번에 맡는 일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제일 먼저 문제가 된 건 아이들의 좀도둑질 버릇이었다. 널어놓은 빨래를 슬쩍하는 일부터 세워둔 자전거 타고 오기, 오락기 자판기 공중전화의 동전 털기, 식당이나 가게의 금고 털기, 혹은 교회 털기까지.

    “애들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훔쳐야 할 대상처럼 보였나 봐요. 이웃주민에게 맞기도 하고 경찰서도 꽤나 들락거렸지요. 암만 말려도 듣지 않으니 속도 상하고 무력감도 생기고. 그러나 예수가정에 와서 한 1년 지나자 애들이 뭘 훔치려 하면 가슴이 뛰고 겁난다고 말하기 시작했어요. 안정이 가져다준 작은 변화였죠. 모금이라 부르는 앵벌이 노릇도 골치를 썩이는 일 중 하나였는데, 그것도 한 1년 지나자 차츰 자취를 감추데요.”

    환각제와의 전쟁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환각제 흡입이었다. 1995년 그의 일기장은 온통 약물에 취한 아이들과의 전쟁 같은 나날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그의 아내 조순실씨 일기에도 끔찍하고 생생한 기록이 있다.

    ‘본드 하려고 숨겨둔 것을 빼앗으니 명현이가 먹을 것을 빼앗긴 듯 날뛴다. 도로 빼앗으려다 안 되니 내 팔을 물어뜯는다. 더 물어봐 하고 팔을 들이대니 여기저기 조금씩 물다가 그만두고 식칼을 들이댄다. “어디 찔러봐. 사모님은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야.” 그 순간은 정말 찔려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담대한 마음이 속에서 우러나왔다. 칼 든 명현이에게 다가서니 슬그머니 칼을 떨어뜨린다. 날뛰던 아이들이 큰방 소파에 얌전히 앉은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릎을 꿇고 아이들에게 호소하고 기도했다. … 하나님께서 내게 눈물을 주신 것은 눈물로 화를 빼내라는 뜻이리라. 그리고 내가 흘린 눈물을 보고 아이들이 자랄 것이다. 그래서 눈물은 아이들과 나 사이에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이다.’

    상처를 보석으로 만든 영적 트레이너 ‘들꽃피는 마을’ 김현수 목사

    ‘들꽃피는 마을’에 거주하는 아이들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김현수 목사.

    이런 극한상황을 한두 번 겪었으랴. 집안은 늘 작은 전쟁터였다. 그들 부부에게는 딸 심지가 있었고 시골서 올라오신 어머니를 교회사택에서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는 한 달쯤 아이들과의 생활을 지켜보시더니 기어이 폭탄선언을 하셨다. “안 되겠다. 내가 집을 나가마!” 집 나온 떠돌이 녀석들을 택하든지 늙은 어미를 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도 단호하게 맞섰다. “어머니는 집에 계세요. 제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한술 더 뜨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결국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동안 몹시 앓으시더니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그 이후 한마디 없이 어머니가 앞장서 아이들을 거뒀다. 다니던 공장도 그만두고 팔 걷어붙이고 아이들과의 싸움에 나섰다. 하나뿐인 손녀 심지를 몸소 지키려고 다짐하신 건지도 몰랐다. 한번은 애들이 어머니에게 따지고 대들었다. “왜 심지와 우리를 차별대우하느냐”고. 어머니는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는 심지가 너희보다 더 신경 쓰인다. 하나뿐인 내 손녀 아니냐!” 이런 솔직한 대답을 아이들은 좋아했다. 상대방 입장이 이해가 된다는 거다. 지금 그 어머니는 들꽃마을을 가장 힘차게 이끄는 대안가정을 이루고 있다. 다섯 남매를 길러낸 따스한 가슴으로 망아지 새끼 같은 사내아이 여섯을 품고 사신다.

    김 목사는 강원도 횡성군 태기산 자락 황골에서 자랐다. 우리나라에서 육안으로 별이 가장 많이 보인다는 맑은 동네였다. 부모님은 소작농이었고 당연히 가난했다. 어렸어도 봄이면 장리쌀을 얻어야 한다는 고통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교회 비인가학교에서 開眼

    아버지는 억척 같은 농부였다. 그러나 한번 술을 입에 댔다 하면 며칠이고 일어설 줄을 몰랐다. 해방이니 전쟁이니 좌우대립이니 해서 다들 울분이 목 밑까지 차올랐던 시절이었다. 술이 취하면 그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그는 어둡고 답답한 공기가 짓누르는 집이 싫었다. 1955년생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 황골을 떠나 서울로 왔다.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원도 소작농 집 장남의 서울유학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외가가 중랑천변에 있었다. 천변에다 판잣집을 새로 지어야 했던 외가는 가난한 그의 집에 도움을 청했다. 대신 장남을 서울로 데려가 공부시켜주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는 서울 오기 위해 양치질이란 것을 처음 해봤다. 버스도 처음 타봤다. 그러나 서울 입성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강원도 깡촌놈의 눈에도 중랑천변 풍경은 한심했다. 게딱지만하게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에 강둑 가득 들어선 연탄공장에 그 위로 시꺼멓게 불어오는 바람에.

    당시는 중학교에도 입시가 있었다. 그는 시험에 낙방했다. 그러나 그도 외삼촌도 개의치 않았다. 후기 시험은 아예 보지도 않고 그냥 강둑 너머, 교회 부설 비인가학교인 무궁화학교에 들어갔다. “돌아보면 그 학교가 내 인생을 결정지었어요. 거기서 예수님을 알게 됐거든요. 새벽마다 외할머니를 따라 기도하러 다녔죠. 어쩌다 빠지는 날이면 내가 큰 벌 받겠구나 싶어 불안했어요. 뭐가 뭔지 몰라도 열심히 다니긴 했나봐요.”

    하나님은 도와주지 않고…

    그 교회는 부흥회를 많이 하는, 지금 생각하면 순복음 계열의 교회였다. 그는 밤새 기도하고 찬송하느라고 곧잘 목이 쉬곤 했다. 지금도 말을 많이 하면 금방 목이 쉬는 건 그때의 후유증인지도 모른다. 그는 기도하고 찬송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신비체험을 하고 싶었다. 방언도 하고 귀신도 쫓고 안수도 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도해도 은사를 주시지 않는 거예요. 차마 하나님께 섭섭하다고 말할 수는 없고 내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겠지, 하면서 포기하는 마음이 어찌나 울적하든지….”

    그토록 하나님이나 세상관심에 민감했던 건 그가 정규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무궁화학교에서 그는 비교적 천진난만해도 좋았다. 정규학교가 아니라는 설움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문학이나 신앙에 대해 얘기 나눌 동류(同類)가 많았던 까닭이다.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을 했다고 남산까지 걸어간 기억도 있고 초대권을 얻어 중랑교 어귀 새서울극장에도 자주 다녔다. 무궁화학교에 다닌다는 자격지심이 없지 않았지만 세월은 금방 갔다. 졸업 무렵 검정고시를 봤지만 다시 낙방이었다. 처음에 50명이던 무궁화학교 인원은 졸업에 이르자 달랑 그 혼자만 남았다. 쓸쓸했다. 제대로 졸업식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 썰렁하던 졸업식은 지금도 가슴 뜨끔거리는 아픈 기억이다.

    무궁화학교를 마쳤다. 다들 어려웠으니 이번에는 다른 친척집으로 옮겨야 했다. 중랑천변 외가에서 상도동에 있던 고모네로 짐을 옮겼다. 이전보다 훨씬 어둡고 외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머리가 굵어지니 소외감도 커졌을 것이다. 잘사는 동네 끄트머리에서 자그만 만화가게를 하던 고모댁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교회에 가면 소속이 없었다. 정규학교 아이들과 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어울릴 수가 없었다. 교회도 싫어졌다. 새벽기도 때나 잠깐 남의 눈을 피해 다녀오는 정도가 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당시가 참 힘들고 외로웠어요. 동류가 없었거든요. 학원도 혼자 다니고 도서관에도 혼자 가고. 국어와 수학은 웬만큼 하겠는데 영어는 혼자 하려니 통 발음을 알 수가 있어야죠. 때를 놓쳐서 재미를 잃었어요.”

    운동권 신학도와 ‘막걸리 반공법’

    드디어 고입,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을 때 그는 이미 신학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결심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당시 중랑천 판자촌에는 뭐랄까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철학 아니면 신학, 그것도 아니면 문학을 하겠다는 분위기. 그게 결국 같은 공부고 존재를 해결하는 문제라고 생각한 거지요. 말하기 쑥스럽지만 직접적 이유로는 이런 게 있었어요. 학원 다니면서 자위를 했는데 뭔가 잘못돼서 피가 사정없이 나오는 거예요. 순간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었죠. 난 이제 성불구가 되는구나. 결혼은 할 수 없겠지. 그럼 신과 결혼해야겠다. 신에게 내 존재를 바치는 사람이 돼야겠구나. 하하.”

    또 다른 한 사건도 피와 관련되는 이야기다. 한번은 기침을 하는데 피가 섞여 나왔다. 병원에 가는 동안 그는 얼른 눈물을 머금고 기도했다. “회개할 시간을 주세요. 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 되겠어요.” 나중에 성불구도 결핵도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진 후 극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자신의 무의식만 또렷하게 남았다. 선택은 신학대학이었다. 그는 말을 퍽 논리적으로 한다. 간명하게 요약하기도 즐긴다. 본질을 꿰뚫는 사람의 어법이다. 웃기는 이야기를 경쾌하게 할 줄도 안다.

    “하늘빛이 달라진 얘기를 해볼까요? 첨에 성불구가 되는 줄 알았을 때는 하늘이 노랗더니 나중 기침에 피가 섞여 나올 때는 하늘이 까맣게 변하데요. 나중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힐 때 하늘은 어두운 잿빛이었죠. 하하.”

    따지고 보면 신학대학 선택도 이국적인 것에 대한 끌림, 혹은 다른 세계를 향한 동경에 있었다고 그는 진단한다.

    그가 입학할 1975년 당시 한신대는 연일 시위에 휩싸여 있었다. 매일 모여 저항의 찬송을 불렀다. 십자가를 메고 행진을 계속했다. 하긴 동아일보앞 데모대를 보고 한신대를 택했던 그였으니. 경찰이 교내에 상주했다.

    “입학했더니 술을 엄청나게 멕이데요. 고정관념을 깨부수라는 거지요. 3월에 입학했는데 5월에 휴업령이 내렸어요. 공부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학교주변을 떠돌기만 했죠.”

    학도호국단이 생기고 분위기는 점점 경직돼갔다. 76년엔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동월교회에서 빈민선교 훈련에 참여했고 77년엔 한신대 고난선언 문구를 준비했다. 채플실에서 고난선언을 낭독하고 유인물을 뿌리다가 드디어 북부경찰서로 끌려갔다. 죄목에는 각오했던 긴급조치 9호 외에 어처구니없이 ‘반공법 4조 1항’이 추가됐다. 노동운동 탄압을 비판한 것이 북측을 고무 찬양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막걸리 반공법은 아무데나 적용하면 그대로 먹혔거든요. 악명 높은 4조 1항!”

    선언문 하나 낭독에 2년4개월의 옥살이였다. 성동구치소에 갔다 전주교도소와 광주교도소를 전전했다. “그 안에서 유명한 사람들 다 만났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0.75평 감방에 갇혀 있는 비전향 장기수들을 봤어요. 도깨비인 줄 알았던 간첩이 인자한 노인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됐지요. 우리가 분단국가라는 것을 감옥 가서 비로소 실감했어요.”

    막강한 동반자, 조순실

    민족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알게 됐다. 철학, 문학, 신학책을 비로소 읽기 시작했다. 출옥했더니 아버지는 뼈만 남아 있었다. 미워했던 아버지였다. 그는 내심 깊이 아버지와 화해했다. 나뭇짐에 산딸기를 꽂아오던 아버지, 함께 물고기를 잡던 아버지 기억을 비로소 회복했다. 양평으로 이사 나온 그의 집은 그새 어처구니없게도 ‘빨갱이 집안’이란 낙인이 찍혀 있었다. 복학은 했지만 정국은 더 시끄러웠다. 10·26이 터지고 5월 광주 일이 생기면서 그는 또다시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이쯤에서 그의 막강한 동반자, 동지이고 사랑인 아내 조순실을 얘기해야겠다. 도피 도중 그는 이른바 위장취업중이던 아내를 만났다. 유복하고 평탄하게 자란 사람이었다. 인가 안 난 학교에 검정고시를 거친 그와는 배경이 달랐다. 그러나 이 땅에서 가난과 불평등을 몰아내고 자유와 민주를 추구한다는 삶의 방향성이 같았다. 조순실은 서강대 시절 제일교회 박형규 목사가 운영하던 야학에서 어린 노동자를 만나면서 그들과 어울려 사는 것을 꿈꾸게 되었다.

    상처를 보석으로 만든 영적 트레이너 ‘들꽃피는 마을’ 김현수 목사

    들꽃피는 학교는 현재 11개의 대안 가정으로 이뤄져 있다.

    그는 “순하고 옹이진 데 없고 유쾌하고 구체적인 사람”이라고 아내를 평했다. 그가 관념에 매달려 있을 때 아내는 얼른 그걸 실천했다. “내가 세상을 파악하는 사람이라면 조순실 선생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죠. 내가 느려터졌다면 아내는 순발력이 빼어나요. 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에 당황하는데 아내는 막연한 일에는 관심조차 없어요. 어느새 나는 들꽃피는 마을의 비전을 구상하는 일을 하게 됐고 아내는 구체적인 행동을 맡아 하게 됐어요.” 둘은 지금 들꽃피는 마을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러나 교사회의의 주재나 사단법인 상임이사는 여전히 아내 조순실의 몫이다.

    사귄 지 일 년쯤 지나 둘은 양평집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그날 조순실은 그야말로 울음 봇물을 터뜨렸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펑펑 울었다. 그후 조순실은 마치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빈털터리 그에게 시집왔다. 이후 조 선생은 한번도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인 일이 없다. 늘 유쾌하게 깔깔 웃었고 명랑하게 수다를 떨면서 문제를 풀어냈다. 학습지 판매도 하고 어린이책 방문판매도 해가며 초창기 이곳 안산노동자교회의 민중목회를 이끌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술 취한 부모들과 상대하기 벅찬 싸움이 벌어져도 늘 조 선생이 먼저 나섰다. “나요? 늘 조순실씨 뒤에 숨어 있었죠.”

    투쟁의 현장에서 일상의 공간으로

    그들이 반월공단이 있는 안산으로 내려온 건 1985년이었다. 한신대 졸업 후 일반교회 전도사 노릇도 1년 반 정도 해봤다. 교우들은 따뜻했지만 벌판을 쏘다니기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에 맞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저 민중교회 만들기를 소명으로 알았다. 노동자를 찾아 안산으로 왔고 1986년 18평짜리 연립주택 안에 ‘안산노동자교회’ 간판을 걸었다. 이름 안에 교회의 위치와 역할을 다 담은 작명이었다.

    노동운동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정식 교회라서 당장 꼬투리를 잡지는 못했지만 경찰은 늘 눈에 날을 세워 교회 주변을 얼쩡거렸다. 민중의 권익을 위해 옳은 소리를 할 줄 아는 옛 산업선교회의 역할을 맡고 싶었던 게 그의 뜻이었다. 선교 소식지를 만들면 그런 얘기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합법적 종교단체로서 노동자와 빈민을 위해 부도덕한 정권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함께 광주현장을 담은 비디오를 돌려본 것도 화근이었다. 얼마 안 가 그는 교회 안에서 연행되었다. 아내 조순실도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교회는 어머니 손에 맡겨졌다. 죄목은 음반에 관한 법률 위반, 언론기본법 위반. 100일간 형을 살고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아무래도 목회자라 오래 가둬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징역을 100일밖에 안 살았는데 처자식을 두고 들어가는 것은 학생 때와는 전혀 다르데요. 훨씬 더 힘들었어요.”

    감옥을 나온 1987년 이후 교회는 늘 북적거렸다. 선교사업으로 교회 안에 노동상담소와 탁아소를 운영하고 음식 솜씨 좋은 어머니는 청년 노동자를 위한 민중식당을 운영했다. 지금도 당시 어머니의 닭발요리를 못 잊는다는 친구들을 만나곤 한다. 1987년 6월 항쟁을 넘고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지나 민중운동은 점점 자리잡아갔다. 교회 건물 처마 아래서 그 모든 운동이 이루어졌다. 그도 엄청나게 바빴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오면서 교회는 갑자기 썰렁해졌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물러가고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투쟁의 대상을 잃은 느낌이었다. 매사가 시들해졌다. 노동 상담소와 탁아소는 지역사회로 독립해나갔다.

    “이제 투쟁의 현장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교인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투쟁 목표와 과제를 놓고 만나는 게 아니라 상처와 무력감을 가진 사람들의 내면을 직접 만나야 했어요. 가난과 공허와 일상의 질곡 속에 빠진 사람들. 질문을 처음부터 다시 하는 거예요. 내가 목사인데 이 사람들에게 뭔가 힘을 주고 싶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뭔지 몰라도 하여튼 기쁘게, 그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어요. 내가 목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강렬하게 전하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중학교 때 바라던 그것이 다시 나오데요? 내가 설교를 하면 말이야, 뭔가 감동을 받고 용기를 얻고 일도 잘 풀리고 하는 그런 거. 엎어지고 자빠지고 뿅 가고 말이야. 말하자면 민중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되고 싶었던 거지…. 점점 기도가 힘들어졌어요. 기도가 힘이 없어. 자꾸만 중언부언하고 말예요. 몇 시간이고 기도하는 힘도 주고 아픈 사람도 낫게 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통 응답이 없는 거예요.”

    중학교 시절부터 갈구하던 미해결의 숙제였다. 방언이나 신유 같은, 은사 자체라기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었다. 피부로 하나님을 느껴보고 싶었다. “하나님 당신 참 인색하시군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더 이상 목회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아내에게 고백했다. 그 아내가 누군가. 탁월한 카운슬러 조순실 선생은 마침 안식년이니 예수원 공동체로 휴가를 떠나보라고 권했다.

    “내 몸에 나도 모르게 지식적인 독이 밴 거예요. 한신대가 원래 성경에 지적 해설을 많이 하는 편이라서…. 더 이상은 하나님을 말하기도 싫었어요. 하나님이 답답하고 지겹더라고요. 모든 것이 공허해졌어요. 경찰서 앞에 붙어 있던 ‘니 좆꼴리는 대로 해라’는 말도 생각나고 말야. 몸부림을 치든 뭘 하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라는 실체에 다가가고 싶었죠. 그래서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 갔어요. 가톨릭 분위기가 나는 곳이죠. 고해성사 제도가 있어요. 지금까지 지은 죄를 전부 회개하라는 거예요.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두려운 건지를 알았어. 자신의 추악한 면과 콤플렉스를 인정하기보다는 합리화하고 도망가게 돼 있거든요.”

    마침내 만난 하나님

    그의 예수원 이야기를 나는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종교를 구분하는 게 얼마나 사소하고 부질없는가. 어느 절의 선승이 해주던 이야기와, 깊은 절망에 빠졌다 헤어나온 친구의 이야기와 어쩌면 그리 맥락이 같은지. 깨달음의 궁극은 결국 한 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을 만났다. 앞이 아니라 뒤에서. 쳐다보는 하나님이 아니라 등 뒤에 선 하나님의 실체를. 그가 그토록 원했듯 피부로 생생하게 감촉했다. 눈물이 터졌다고 했다. 그는 엉엉 울었다. 그러면서 세 마디를 외쳤다. 하나님 당신은 참 좋은 분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습니다! 저를 인도하여주십시오. 그 인도가 바로 ‘들꽃피는 학교’였음을 뉘라서 의심할까.

    “거기서는 노동을 많이 시켰어요. 내가 도배를 잘하거든요. 공동체 속에 어울려 살다 보니 기술이 는 거죠. 도배를 하면서 날마다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봤어요. 어렸을 때 사이다 한 병 훔친 것에서부터 민중 선교 한다면서 술이나 마신 것, 성적인 부끄러움들, 비겁했던 것, 소심했던 것, 모조리 다! 정말 쪽팔리더라고요. 나도 명색이 목산데 이런 것을 고백하다니 날 인간으로 보겠나 싶고….

    그런데 내 말을 듣는 신부님의 눈을 봤어요. 너무 따뜻한 거예요. 굉장히 부드러웠어요. 안타까워하고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눈빛. 내가 용납받고 이해받는 것을 느꼈어요. 바로 하나님의 눈길이었어요. 그때부터 나는 인류를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그전까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불가능한 줄 알았어요. 조심하고 경계하고 경쟁 상대로 보는 측면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내 나이 서른여덟이었죠.”

    예수원에서 그는 도약했다. 말하자면 새로 태어났다. 하나님이 저 멀리 하늘이 아니라 바로 자기 곁에 있는 존재라는 실감을 했다.

    “나는 그때까지 앞만 보고 달린 거예요. 앞에 계신 하나님만 찾았어요. 하나님에게서 능력을 뽑아내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목회가 잘되게 해주고 힘을 주고 설교를 잘하게 해주고 리더십을 발휘하게 해줄 하나님만 원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내 뒤에, 자신에게조차 거부당한 나약한 나와 함께 계셨던 거예요. 38년 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기도가 뭔지 비로소 알게 됐다. 기도는 고백이었다.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거리의 아이들이 그에게 왔다.

    소외층 돌아보는 당당한 아이들

    지금 들꽃피는 마을은 11곳의 대안가정으로 이뤄져 있다. 안산노동자교회에서 세상 밖으로 떠밀린 8명의 아이와 밥과 잠자리를 나눈 지 올해로 꼭 10년. 민들레가 바람에 홀씨를 날리듯 대안가정의 수는 조금씩 늘어났다. 아이들과 함께 사는 생활교사들 중엔 미혼도 있고 기혼도 있다. 사정에 따라 둘에서 여섯 정도의 아이를 품고 산다. 들꽃학교 선생님도 있고 다른 교회 목사님도 있다. 김 목사의 어머니도 한 가정을 맡아 꾸리신다. 혈연이 아닐 뿐 이들의 삶은 여느 가정과 다를 바 없다. 일반학교에 다닐 수도 있고 들꽃학교에 다닐 수도 있다. 어린아이들이 아니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필자는 들꽃학교 학생회장이라는 중3 유섭이와 곁에서 책 읽던 고1 경준이와 한참 얘기했다. 또래 여느 애들보다 태도와 말씨가 훨씬 반듯했다. 눈빛이 진지할 뿐 아니라 표정에 그늘이라곤 없었다. “집이 어디냐”란 질문에 “상록수 가정” “한신예수가정”이란 대답이 남과 다를까. “나중에 뭐가 되고 싶냐”고 묻자 유섭이는 천진하게 “그야 당연히 CEO죠”라고 답한다. 경준이는 “작년까진 소설가였는데 올해는 바뀌어서 웹서버 관리자예요”라고 답했다. 여기 오게 된 과정을 물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러워하자 망설임 없이 서글서글하게 자신의 힘겨웠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상처는 수치가 아님을, 지금 오히려 그게 힘으로 발효되는 중임을 애들은 어느새 깨달은 모양이다. 하긴 김 목사가 그걸 가르치지 않았을 리 없다.

    “애들에게 재정교육을 시켜요. 어떻게 후원금이 들어왔으며 그걸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보여주죠. 그래야 애들이 이 마을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거든요. 여러분은 대안가정에서 공짜로 얻어먹고 사는 게 아니다. 한 사람에 후원금이 80만원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누려라. 의문 나면 질문하고 토론해라. 아낄 수 있는 건 최대한 아껴서 남은 돈으로 교육비에 투자해라. 학원도 다니고 취미생활도 하고…. 그런 식의 교육을 체계화했죠.”

    들꽃학교의 커리큘럼은 일반학교도 본받아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치매노인, 장애인 공동체, 교도소 같은 소외된 곳을 방문하고 그곳에 있는 분들과 편지교환을 한다. 실제 들꽃아이들의 편지를 읽는 걸로 하루하루를 견뎠다는 재소자도 많다. 출옥하자마자 감사인사를 오는 이들도 종종 있다. 아이들은 그런 편지교환을 통해 제가 겪은 상처가 남을 격려할 수 있는 에너지로 변하는 걸 체감한다. 저희들끼리 기획한 캠프도 자주 보낸다. 해외에도 보낼 예정이다. 그룹을 만들고 주제를 정해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을 통해, 애들이 부쩍 성장한다. ‘가출과 학업중단의 상관관계와 대책’ 같은 보고서는 저희끼리 설문지를 만들고 가출 청소년 100명을 만나 인터뷰해서 만들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깨달음은 그 과정에서 저절로 얻게 된다. 유섭이와 경준이가 그렇게나 당당하고 의젓한 건 그런 교육과정 덕분이었을 게다.

    “아직 할 게 많아요. 지난 10년이 겉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젠 안을 다져야지요. 방향성과 비전을 제시했으니 이젠 각론을 만들 차례입니다. 교육방법론을 구체적으로 만들 겁니다. 칭찬하는 법, 꾸중하는 법, 소통하는 법, 경청하는 법, 자기표현법 같은 각론이 필요해요.”

    나눔의 동심원

    그는 나눔의 동심원이라는 탁월한 비유를 내게 들려줬다. 낮은 곳에 살기를 선택한 그의 철학이 거기 응집돼 있었다.

    “나눔은 자신의 상처를 만나는 데서 시작됩니다. 가진 자가 무언가를 베푸는 동정과는 전혀 달라요. 맨 안쪽 원에 사회적 약자가 있고 바깥 원을 강자가 둘러싸고 있죠. 안쪽 약자들은 바깥쪽 강자의 보호를 받는 대신 그들의 나약한 내면을 어루만져주죠. 서로 소통하고 나누면서 사랑으로 연결되는 진정한 공동체. 낮은 데로 향하는 이런 동심원이 많은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일 겁니다.” 들꽃피는 마을은 맨 안쪽에 아이들, 가운데가 생활교사, 바깥쪽이 후원자라는 세 개의 동심원으로 구성된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새 집이 지어지는 걸 지켜본다. 낡은 학교 곁에 멋진 현대식 건물이 거의 완공 단계다. 기적이 일어났다. 땅을 보탠 사람, 시멘트를 준 사람, 벽돌을 쌓아준 사람들의 힘이 모여 우뚝한 건물로 변해가는 중이다. 이 안산들꽃청소년센터가 제발 빚 없이 완공되는 것이 지금 그의 꿈이다. 책을 서둘러 출간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나님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외친 후 12년 뒤 나타난 기적. 허름한 바지 차림의 김현수 목사가 저기서 들꽃학교 아이들과 달리고 있다. 물방개처럼 부지런히, 도토리처럼 야물게! (도토리, 물방개는 그의 어릴 적 별명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들은 모두 상처를 보석으로 만든 ‘깨달은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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