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하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전직 국회의원이 나무를 사랑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영화를 사랑한 것은. 이상하다. 노란색 곤룡포와 호탕한 웃음으로 일세를 풍미하는 임금 역을 단골로 맡던 배우가, 흙냄새 풀풀 풍기는 질박한 뚝배기 같은 머슴 역에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는 사실은. 더더욱 수상하다. 돈과 명예를 거머쥔 당대의 호남배우가 스캔들 한번 없는 성실한 가장이었다는 것은.
치과의사로, 직업배우로, 성공한 기업가로, 정치인으로, 신영균은 일평생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살아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일마다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거뒀다는 점이다. 아무리 보아도 신이 사랑했거나 운명의 여신이 보호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이 억세게 운 좋고 재수 좋은 배우는, 그러나 ‘노력했다’는 말 외에는 성공의 비결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영균의 성공은 이미 40여년 전에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찾아본 1960~70년대의 인터뷰들은 한결같이 배우 신영균에 대해 ‘말이 없고 겸손하며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말하고 있다.
1962년 ‘여원’지에 당대의 여성작가 장덕조씨가 쓴 신영균에 대한 평가는 ‘이글거리는 검은 눈이 인상적인, 명동 어느 바에서 어깨로 도어를 밀고 나온다면 깡패처럼 보일 것이오, 합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괭이를 든다면 농삿군일 것이고 미남은 아니지만 쾌남이다. 야성의 정, 신영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표기법은 당시의 것을 그대로 살렸음).
배우로서 신영균은 1960년부터 1978년까지 근 20년 동안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데뷔 다음해에 ‘마부’ ‘상록수’ ‘연산군’ 등 대한민국 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영화에 줄줄이 출연했던 그는 김수용과 유현목, 이만희, 신상옥 같은 한국 영화계의 거장들이 가장 선호하는 남자 배우였다.
뭐니뭐니 해도 신영균은 선이 굵은 배우다. 당대의 배우 최무룡과 김진규가 섬세하고 부드러운 연기로 정한이 가득한 멜로물에 등장해 고뇌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면, 신영균은 누군가를 호령하고 지휘하는 능동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역시 선 굵은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배우로 남궁원을 들 수 있겠지만, 남궁원이 댄디한 멋스러움, 귀족적인 고아함을 갖춘 배우라면 신영균은 스펜서 트레이시를 사랑한다는 취향답게 자연에 가까운, 속 깊은 심성이 작중 인물에 배어나오는 그런 배우다.
임금 머슴 군인 장남
그리하여 필모그래피에서 신영균의 역할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데뷔작 ‘과부’를 필두로 ‘갯마을’ ‘무영탑’ ‘봄봄’ 등에서 보여주었던 머슴 역할. 이들 영화에서 신영균은 가진 것 없이 힘 하나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연 그 자체의 괴력과 담력을 지닌 사나이로 등장한다.
곰처럼 미련하고 소처럼 순박한 대한민국 민초의 원형적인 모습을 담은 이 역할은 사실 김유정이나 김동리 같은 한국문학 작가들이 즐겨 그려낸 남성상의 하나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신영균이라는 배우가 지닌 자연친화적인 동력은 그로 하여금 1960년대 부흥했던 문예물 영화의 단골주인공으로 자리잡게 하는 요인이 됐다.
둘째로는 배포 큰 임금 역할을 들 수 있다. 신영균은 인터뷰에서도 밝히듯 연극에서 연기 기량을 닦아 행동이 크다거나 내면연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거침없는 연기가 원색의 곤룡포를 입었을 때는 전혀 사정이 달랐다. 임금임에도 인간적인 고뇌에 사로잡혀 포악함으로 뭇사람을 벌벌 떨게 만든 ‘연산군’은 단연코 신영균을 1960년대 최고스타의 자리에 세워놓았다.
이외에도 ‘대원군’ ‘태조 이성계’에서 그는 당대를 호령하는 권력자의 기개를 펴며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는 남성적인 매력을 스크린 가득 발산한다. 껄껄 웃으며 책상을 치거나 여성의 치마폭을 헤집고 다니며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연산군의 이미지는, 신이 내린 어릿광대 같은 비통한 카리스마와 광폭한 에너지가 부딪치며 묘한 자장(磁場)을 형성한다. 그것은 신영균이 선천적으로 지닌 풍모와 장쾌함의 에너지가 연산군의 본질과 가장 맞아떨어지는 지점이었다.
셋째는 군인 혹은 장수의 역할이다. 신영균은 ‘5인의 해병’ ‘군번 없는 용사’ ‘인천상륙작전’ ‘빨간 마후라’ ‘천년호’ ‘남과 북’ 등 여러 영화에서 군인 또는 장수로 분했다. 이 역할이 전자의 임금 역과 다른 점은, 욕망에 충실한 권력지향적인 인물이라기보다 의리와 정절로 똘똘 뭉친 충성스러운 인간이라는 점이다. 진성여왕의 끈질긴 유혹에도 결코 아내를 버리지 않는 ‘천년호’에서의 비운의 장수, 비록 남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깡그리 저버리는 ‘남과 북’에서의 군인 역, 전사한 동료의 아내를 남몰래 사모하는 ‘빨간 마후라’에서의 교관 역 등이 그것이다.
본인 스스로는 “멜로는 어색했다”고 말하지만, 차마 사랑을 입에 담지 못하는, 정서적 억압이 심한 남성상은 신영균의 연기세계에 묘하게도 정서적인 향기를 불어넣는다.
마지막으로 그가 주로 맡았던 장남 역이 있다. ‘마부’에서 신영균은 여동생으로 분한 엄앵란이 밤늦게 귀가하자 아버지 대신 꾸중하고 단속한다. 가장에 버금가는 권위를 행사하며 당대의 이상적인 아들이나 남편감으로 자리매김하는 이 역할은, 후에 ‘상록수’에서 채영신의 배필로서 성실하게 주변의 땅을 가꾸어 나가는 인물이나 ‘화조’의 독립운동가, ‘쌀’의 근대화 역군 등으로 변모했다.
한마디로 신영균에게 없는 것은 최무룡이나 신성일에게 투영되는 바람의 이미지, 반항의 이미지다. 그는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늘 주류였고 아버지였다. 성실하고 책임감 넘치는 인간이자 배우였다. 예술가의 마음과 사업가의 마음이 한 몸에 공존하는 참으로 기이한 이 사내의 욕망은 그로 하여금 일탈하고 떠돌아다니도록 충동질하기보다는 머물고 다지고 모으게 만들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내면의 무의식이 그를 배우로 만들었다면, 안정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인 비즈니스에 관한 직관과 앞날을 보는 혜안, 그 단단한 자아 기능은 그를 성공한 ‘신영균 회장’으로 만들었으리라.
그리하여 그는 식물적인 수줍음이나 내면보다는 동물적인 능동성과 감각, 일찍이 장덕조씨가 읽어낸 강인한 표현성과 즉물성으로 한세상을 헤쳐나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지난해 내내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해온 그가 한국영화사에 의미 있는 자료를 남기고 싶다는 일개 평론가의 장문의 편지를 보고 선뜻 인터뷰에 응해줬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렇게 이성적인 동시에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는, 진심이 통하는 멋진 사나이였다.
-황해도 평산 태생으로 열 살 때 상경해서 연극을 하다 영화계에 입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학교는 서울대 치대를 나왔고요. 어떻게 치대를 다니다가 연극을 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자식들 앞날을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용단이었죠. 그때부터 교회를 다녔어요. 어머니는 모태신앙인이었거든요. 초등학교 5학년 땐가,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축하 연극을 했는데 그게 계기였어요. 연극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됐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영화를 즐겨 봤고요.
고등학교를 다니며 연극부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는 아예 대학을 안 가고 연극만 하려고 마음먹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졸업 후 1년 동안 연극인 생활을 했지요. 그런데 선배들 고생이 말이 아니었어요. 생활도 안 되고 질서도 없고.
하루는 대전에서 공연 하고 트럭 하나를 빌려서 배우들을 다 싣고 대구로 가는데, 차가 미끄러져서 뒤집혔어요. 그때 단원 가족들이 병원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하는 것을 보고 배우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그만두어야 하나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해서 치과대학에 갔지요.
당시 서울대 치대에는 박암 선배님, 작곡가 길옥윤씨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연극부의 전통이 아주 셌지요. 미술대에는 이낙훈씨가 있었고요. 차츰 서울대 전체를 포괄하는 연극부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었어요. 박진 선생이 연출기획한 작품을 명동의 ‘시공간’에서 공연하면서 서서히 연극에 빠져들었습니다.”
‘서울대 치대 나온 신인배우’
-영화에 입문한 계기는 따로 있겠죠. 서른둘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스크린에 데뷔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치대 졸업 후에 연극만 하다 다시 1년 동안 의사고시만 준비했어요. 해군 군의관으로 진해에서 근무할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죠. 군의관을 마치고 나서 치과를 개업해 의사로서의 삶을 살까도 생각했지만 연극에 대한 열망이 내버려두지를 않더군요. 아내는 내가 치과의사라서 결혼했다고도 하지만, 나는 병원을 단지 생활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거죠. 게다가 변기종 선생님 같은 연극계 원로나 허장강, 최무룡, 윤일봉씨 등 배우들이 병원 단골손님으로 드나들고요. 이분들이 자꾸 연극을 하자고 꾀었던 거죠.
그 무렵 국립극단에서 ‘여인천하’라는 작품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병원 일을 보고 저녁에만 연극을 하기로 했지요. ‘여인천하’는 금세 엎어지고 다른 작품을 했는데, 조긍하 감독이 그 공연을 보고 저를 자신의 영화 ‘과부’의 주인공 남자역할로 점찍었어요. 영화평론가 허백련씨가 저를 조 감독님에게 소개해주었죠. 작품을 보니 황순원 원작인 데다 참 좋았어요.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었죠, 머리를 깎으라는. 머슴 역이니까요. 그래서 진짜로 머리를 깎고 촬영했죠.
당시 영화배우 중에 의대 출신은 거의 없었거든요. 대중이 그 점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대부분 평이 좋았죠.”
인터뷰 자리에 동석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인 김선희씨가 이 대목에서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이 양반은 배우를 해야만 했어요. 처음엔 반대했는데 대본만 가져오면 그걸 읽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고요. 그러니 그걸 어떻게 말려요. 당시에는 후시녹음을 했는 데도 대본을 통째로 외웠다니까요. 그래야 감정이 산다고. 참 못 말리는 양반이었죠.” (웃음)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다분히 숙명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초기작품 가운데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인상 깊습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성실한 장남 역이었죠? 신영균씨 이미지의 한 축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이었는데요. 후에 ‘상록수’에서 맡은 채명신의 배필인 사회운동가와 맥을 같이하는.
“‘마부’는 김승호씨와 황정순씨의 연기호흡이 정말 잘 맞았어요. 저는 고학으로 법대를 다니다가 사시에 붙는 장남을 맡았죠. 당시 장남의 전형을 연기한 거였는데, 눈 내리는 길거리에서 시험에 붙은 나를 가족들이 얼싸안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군요.”
‘마부’에서처럼 실제로도 장남이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장남에 가까운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장남처럼 보이는 차남’인 셈이다.
-그 해, 1961년에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작품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에 출연했습니다. 신영균씨의 대표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연산군’은 신영균씨가 현대물보다는 사극에 더 어울리는 배우라는 고정관념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연산군은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으면서 흘린 금삼의 피를 보고 나서 폭군이 되는 인물이죠. 남자로서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역할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연극배우 출신이어서 영화를 할 때 오버한다는 지적을 받곤 했습니다. 연극무대에서 하듯이 연기를 하면 화면에는 액션이 굉장히 커보이거든요. 데뷔작 ‘과부’ 때부터 그런 지적을 받았죠. 그러나 연산군은 폭군이고 광포한 면이 있는 임금이라서 오히려 연기 폭이 넓고 커야 했어요. 저의 연극적인 연기 특징과 연산군이라는 배역이 잘 맞아떨어진 거죠.
신상옥 감독은 배우의 연기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까다롭게 요구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일단 연기를 하면 배우를 믿고 맡기는 편이었지요. 그 시절엔 누구나 다 시나리오를 들고 거울 앞에서 연기연습을 했습니다. 요즘처럼 녹화했다가 테이프를 재생해 보며 공부할 수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연산군’에는 말 타는 장면이 많았어요. 말에서 떨어지는 연기도 다 직접 소화했지요. 당시 남자배우 중에서 제가 말을 제일 잘 탔을 거예요.”
-개인적으로 ‘연산군’에서 받은 느낌은, 기존의 폭군 이미지에 어떤 희화화된 이미지를 첨가한 게 돋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채홍사가 보낸 여자들을 훑어보는 장면이라든지, 임금의 체통에 걸맞지 않게 혀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긴다든지, 웃음이 일그러지는 모습이라든지…. 연기해석이 참 좋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렇게 연기했다기보다는 시나리오에 맞춰서 갔다고 봐야겠지요. 시나리오를 쓴 작가 한운사씨의 해석이 다분히 들어가 있었어요. 사실 연산군은 처음부터 폭군이 아니었어요. 나중에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고나서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하죠. 그런 부분을 연기할 땐 저도 신경을 많이 써야 했죠.“
노란색의 비밀
-영화 ‘연산군’에서 노란색은 욕망의 빛깔입니다. 오직 임금만이 노란색을 입지요. 40년 전 장덕조씨가 신영균씨와 인터뷰한 기사를 읽어보니 이 점에 대해 지적했더군요. 원래 대궐에서는 노란색을 불길한 색이라 해서 절대 사용하지 않는데 신상옥 감독의 사극에서는 계속 노란색이 나온다고요.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적인 장치이므로 크게 상관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요.
“신상옥 감독님과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때 잠깐 출연하면서 처음 만났죠. 신 감독은 작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연산군’을 만들 당시 신필림이 좀 어려웠어요, 빚쟁이들이 쫓아다니고. 당시에는 필름 값이 굉장히 비싼 데다 돈 주고 사기도 어려워서 감독들은 대개 필름을 무척 아꼈습니다. 그렇지만 신상옥 감독은 달랐죠. 조명이나 연기가 잘못되면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다시 찍었습니다. 한마디로 영화에 미친 사나이였죠. 카메라 위치를 정하느라고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뒷걸음질치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큰일 날 뻔한 적도 있어요. ‘연산군’을 찍을 때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모두들.”
‘연산군’은 사극의 거장으로서 신상옥 감독의 역량을 최초로 보여준 작품이다. 월탄 박종화의 원작소설(1938)을 모태로 한 이 영화는 폭군 연산의 야만적 광기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140분에 걸쳐 장대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 장면을 실제 조선왕조의 궁궐에서 촬영한 이 작품은 그 호화로운 스케일만으로도 당대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① 1965년작 ‘갯마을’ ② 1965년작 ‘남과 북’
신상옥 감독은 연산군의 본질을 통해 폭력적인 욕망에 스스로 갇힌 인물, 그 어떤 왕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지만 사회적 역할의 수행을 거부함으로써 결국 파멸해가는 인물을 그리려 했던 것 같다. 그가 이 욕망의 빛깔로 표현한 것이 바로 노란색이다. 신상옥이 그린 연산군에서 노란색은 오히려 인간성을 상실한 색, 시대와 정치의 층위에서 곪아가는 색, 말 그대로 미래가 없는 색감이다.
-‘연산군’으로 제1회 대종상을 수상했습니다. 감회가 남달랐을 텐데요.
“처음 시작하는 영화제였고 또 영화계에 데뷔해서 처음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니 기쁜 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주위에서도 모두들 부러워했고요.”
-당시 함께 연기했던 연기자들에 대한 기억은 어떻습니까. 여배우들의 경우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얼굴이 조금 커보이는 것도 같고요.
1965년작 ‘태조 이성계’(위), 1968년작 ‘미워도 다시 한번’(아래)
-이후에도 탄탄대로를 달리며 연기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마라’ ‘로맨스 그레이’ ‘쌀’ 그리고 ‘빨간 마후라’ 등이 있습니다.
“그 무렵에는 출연교섭이 지나치게 많아 일일이 거절하느라 힘들었어요. 13편에 겹치기 출연한 적도 있죠. 그때는 그게 다반사였어요. 집에서 잘 시간도 없고 계속 시달리다 보니 연기도 제대로 못하겠고. 그런 시절이었죠.”
실탄 쏴대는 촬영현장
-‘빨간 마후라’에서는 ‘산돼지’라는 별명의 교관 역할이었습니다, 최은희씨를 좋아하는. 동료의 미망인을 좋아하는데 표현은 못하는 캐릭터였습니다. ‘빨간 마후라’는 신상옥 감독의 본격적인 스펙터클이었죠. 대한민국에서 처음 시도된 스펙터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이른바 ‘컬러 시네마스코프’의 첫 작품이 ‘연산군’이고 그 다음이 ‘빨간 마후라’예요. 특수촬영이 많아서 신상옥 감독이 굉장히 고생했죠. 나는 나대로 비행기 타고 출격하는 장면이 있어서 위험했고.
‘빨간 마후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라스트신이에요. 다음날 합작영화를 찍기 위해 홍콩으로 출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거든요. 비행기를 타고 출격하다가 총알을 맞고 죽는 장면이었는데, 조종석 앞 유리가 뚫려야 했죠. 지금 같으면 특수장비로 뚫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거든요.
별수없이 실제 사수를 데려다가 내 머리 바로 뒤에서 진짜 총을 쏴서 유리가 뚫리는 장면을 찍기로 했죠. 실탄이 머리를 스치고 날아갈 판인데 긴장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무척이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웃음)
-이만희 감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군번 없는 용사’와 ‘5인의 해병’을 함께 작업했는데요.
“그 무렵 신상옥 감독은 자기 프로덕션이 있어서 여유 있게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만희 감독은 그렇지 못했죠. 더욱이 나는 신필림에 전속되어 있던 터라 이만희 감독과는 딱 두 편밖에 못 찍었어요. ‘군번 없는 용사’를 촬영할 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죠. 바쁘게 촬영을 다니느라 군용지프를 개조해서 타고 다녔는데, 히터가 없어서 차 안에 석유난로를 넣고 다녔거든요. 팔당호 근처에서 차가 뒤집혔는데 다행히도 절벽이 아니라 산 쪽으로 굴러서 살았죠. 용케 석유난로도 터지지 않았고요.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나 다름없죠.
‘5인의 해병’도 위험하게 찍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추격신을 실감나게 찍으려고 발 밑에서 흙이 튀는 장면을 만들기로 했죠. 그래서 실제 총을 발밑에 쏘곤 했거든요. 그게 모래에만 맞으면 괜찮지만 종종 돌에 맞고 튀는 일이 생기곤 했어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 무렵에는 전쟁물을 촬영하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었어요. 이만희 감독은 전쟁물을 많이 찍어서 스태프나 연기자들이 목숨을 거는 일이 많았죠.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찍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내가 인민군 포로의 머리에 총을 쏘는 장면이었는데, 진짜 총은 아니고 모조였거든요. 감독이 그걸 엑스트라 머리 위에 쏘라고 시키더라고요. 아무래도 찜찜해서 골판지에다 대고 시험 삼아 쏴봤는데, 골판지가 퍽 하고 뚫리는 게 아닙니까. 무척 놀랐어요. 생각 없이 감독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엑스트라가 크게 다칠 뻔했던 거죠. 여건은 안 되는데 감독은 의욕이 앞서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어요.”
1960년대 대표감독들과의 작업
-이만희 감독의 개인적인 스타일을 평가하자면 어떻습니까. 예술가 기질이 굉장히 풍부했던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당시에는 학구적인 감독이 많았죠. 신상옥 감독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이만희 감독은 신 감독에 대해 라이벌 의식이랄까, 그런 걸 가지고 있었어요. 신상옥보다 더 잘 만들어야겠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연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공동묘지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 주정을 부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늘 고심하는 스타일이었죠. 결국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돌아가신 거나 다름없어요. 그 무렵에는 영화감독들이 모두 가난했으니 건강이 좋을 리 없었죠.
그에 반해 신상옥 감독은 워낙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만나면 제가 영화계를 너무 일찍 떠났다고 탓하곤 하지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다시 시작하자고도 하고.”
-이후에는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 김수용 감독의 ‘월급봉투’, 유현목 감독의 ‘잉여인간’에 출연했습니다. ‘잉여인간’은 비디오가 나와 있지 않아서 어떤 작품인지 확인이 어렵더군요.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었다는 평은 있습니다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작품 자체는 잘 기억이 안 나요. 대신 유현목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 양반은 연출이나 연기지도가 굉장히 섬세하고 꼼꼼한 편이에요. 배우에게 자신의 연기관을 많이 설명하는 스타일이고. 그 양반이 연기 한번 지도해서 표현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었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안경을 수십 번씩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그림을 찾아내는 거죠. 사적인 자리에서는 술도 많이 먹고 농담도 잘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내향적인 성격이었거든요.”
1925년 태어난 유현목 감독은 1955년 ‘교차로’로 데뷔한 이후, 굴곡이 심한 한국 현대사와 척박한 한국 영화의 토양 속에서도 고집스럽게 작가주의의 길을 걸었다. 현실과 실존, 종교와 이데올로기, 전통과 근대라는 화두를 통해 한국사회를 질문해온 이 감독의 행보는 이 시기 가장 강도 높은 사회비판을 전개하며 ‘오발탄’ 이후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을 확립했다는 것으로 요약될 것이다.
그러나 유현목을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으로만 안다면 그것은 반만 아는 것이다. 유현목은 영상을 위한 심리 묘사와 공간 활용의 거장이었다. ‘김약국의 딸들’이나 ‘막차로 온 손님들’ 등 파멸해가는 가족이나 이 사회의 막장에 다다른 공동체를 묘사함으로써, 역사와 전쟁, 종교 등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 산물이 어떻게 서로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꼼꼼하게 성찰한 그는 한국영화에 실존주의적 성찰이라는 새 장을 열었다.
영화 ‘잉여인간’은 서만기라는 치과의사에게 찾아오는 두 사람, 입만 열면 애국애족을 부르짖는 채익준과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실의의 나날을 보내는 천봉우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남아도는 사람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멜로나 코미디는 정말 어려워“
-‘남과 북’의 경우에는 흥행도 잘 됐고 대단한 화제작이었죠.
“대단했죠. 아마도 남북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번째 영화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래서 연기자들도 관심이 많았고 또 열심히 했지요. 나는 고향이 이북이어서 사투리 연기를 하기가 편했어요. 애인을 따라 내려온 북한군 소령 역이었는데, ‘사랑을 택하겠냐 자유를 택하겠냐’는 물음에 ‘사랑을 택하갔시오’ 그렇게 대답하던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았죠.”
-이 영화에서 신영균씨와 최무룡씨의 연기대결이 치열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이 남궁원씨였고요.
“최무룡씨는 연기의 선이 섬세한 편이고 나는 상대적으로 선이 굵은 편이었습니다. 아마 보는 이들도 차이점을 느꼈겠죠.”
-김수용 감독과는 1965년 ‘갯마을’과 1967년 ‘산불’에서 함께 작업했습니다. 이렇게 훑어보니 60년대 한국 대표감독들의 대표작에는 모두 출연한 거나 다름 없네요.
“‘산불’은 차범석씨의 희곡이 원작이었죠. 김수용 감독이 문예물을 많이 했거든요. 사실주의 영화인 동시에 일종의 반공영화였죠. ‘갯마을’에서는 고은아씨, ‘산불’에서는 주증녀씨와 도금봉씨가 상대역이었죠.”
-김수용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어땠습니까.
“그분은 뭐랄까, 조금 쉽게 한다고 할까, 연출을 어렵지 않게 하는 편이죠. 일단 머리가 좋고 영화이론에도 조예가 깊었어요. 유현목 감독에 비하면 아이디어가 많은 편이었죠. 연기지도를 할 때도 표현력이 풍부해서 연기자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곤 했어요.”
-1968년에는 그간 해오던 작품 스타일에서 벗어나 정소영 감독의 멜로물 ‘미워도 다시 한번’에 출연합니다. 문예물이나 전쟁물에만 출연하다가 갑자기 상업적인 멜로영화에 출연하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나요.
“하도 남성적인 것만 하니까 멜로드라마를 한번 하고 싶더라고요. 때마침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정소영 감독으로부터 제의가 왔고. 제가 출연한 1편이 히트하는 바람에 4편까지 제작됐죠. 간단히 말해 유부남이지만 처녀하고 연애를 해서 애를 갖게 하는 역할이었죠. 그런데 관객들이 그 역할에 굉장히 흥미를 가졌어요. 아마도 당시에 그런 사람이 많았나 보죠. 어쨌든 관객은 아주 많이 들었거든요.
상대역은 문희씨와 정기원씨였는데, 문희씨와는 코미디물도 함께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문희씨랑은 색다른 작품만 했네요. 멜로나 코미디나 내겐 다 어렵더라고요. 어렵지만 또 하다보니 그런대로 재미도 있었고. (웃음) 문희씨는 당시에 샛별처럼 나타난 스타였는데 ‘미워도 다시 한번’의 역할에 아주 적역이었죠.
제가 대작영화의 주인공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안 해 본 역할은 거의 없어요. 군왕에서 말단 거지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에서나마 인생을 다양하게 산 것 같아요. 영화 ‘촌색시’에서는 문희씨를 쫓아다니며 바보스럽게 구는 연기를 했죠. ‘바보온달’의 주인공도 맡았고요. 코미디물은 정말 쉽지 않아요. 우선 쑥스럽더라고요.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있었어요. 그런 캐릭터일수록 연기도 연기지만 시나리오가 재미있게 구성돼야 한다는 점도 배웠죠.”
-개인적으로 임금이나 머슴 같은 역할은 신영균씨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동물적인 감각, 광포하면서 혹은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그런 감각을 끌어낸 것이라고 봅니다. 정서적으로 섬세하게 이끌어가야 하는 현대물보다 사극에 더 잘 어울리는 것도 이런 면 때문이 아닌가 싶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그런 걸 느꼈다기보다는 감독들이 그런 캐릭터를 끌어냈다고 봐야죠. 지금 얘기한 그런 부분을 내 안에 가지고 있었다면 감독들이 그걸 알아본 거겠고요.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에요. 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해서 쫓아다닌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신영균씨가 과연 ‘끼 있는 배우’였던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듭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감정표현을 굉장히 쑥스러워하는 편이었던 것 같거든요. 연기 스타일도 어떻게 보면 안으로 움츠러드는 식이었고요. 에로틱한 영화를 거의 찍지 않은 것도 그런 측면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에로틱한 영화를 아예 안 찍었던 것은 아니에요,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실 그런 부분을 내가 쑥스러워한 것은 맞아요. 하다못해 키스신 하나만 해도 배우 중에는 입술에 감정을 실어 카메라 앞에서 부드럽게 표현하는 배우도 있거든요. 나는 그렇게는 못해요. 정열적으로 한번에,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그런 남자 연기가 내 스타일이었던 거죠.”
스펜서 트레이시의 ‘노인과 바다’
-영화계에서 발을 뗀 게 1979년입니다. 김수용 감독의 1978년작 ‘화조’가 마지막이었죠. 무슨 특별한 일이나 계기가 있었던가요.
“그 무렵에는 영화판이 참 작았어요. 군사정권이어서 제약도 무척 많았고요. 제대로 된 시나리오가 안 나오니 제작하는 영화마다 다 망했어요. 한 해에 만들어지는 영화 숫자 자체가 굉장히 줄어들었죠. 그러다 보니 조금씩 흥미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조용히 사라진 거죠. 좋은 역할만 선택해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졌어요. 꼭 은퇴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었고요.
‘화조’는 화가 나혜석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였어요. 나혜석 역은 윤정희씨가 맡았고요. 프랑스 현지촬영이 많았죠. 그리고는 기독교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마지막이었어요.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죠. 지금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 (웃음)
은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연기자가 적합한 작품이 주어지면 출연하는 거지 꼭 은퇴하고 영화계를 떠나고 영화를 안 하고 그럴 이유는 없잖아요. 당장이라도 맞는 역할이나 해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하는 거지.”
-최근에도 제의가 들어옵니까.
“예전에 한 번 들어왔었어요. 작년까지는 드라마 출연제의도 들어오곤 했는데 제주도에 있다 보니 시간이나 일정이 안 맞아서 잘 안 됐어요, 의욕은 있었지만. 사실 난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를 무척 좋아해요. 시간만 나면 그 사람이 주연한 ‘노인과 바다’ 같은 영화를 보곤 하죠. ‘노인과 바다’는 벌써 10번도 넘게 봤을 거예요. 그런 작품을 보다 보면 나도 좋은 소재를 골라 한번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내 욕심인지도 모르겠지만.”
-스펜서 트레이시를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그 양반은 아주 자연스럽고 리얼하게 연기를 소화해내요. 영화배우인지 진짜 바다의 노인인지 모를 정도로. 미남은 아니지만 마스크도 아주 독특하고, 그가 화면에서 풍기는 걸 보면 바로 저게 배우고 연기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신영균씨의 이미지와 통하는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순박하고 자연과 닮아 있고 또 계산적이지 않은, 남성미가 넘치는 역할. 그게 일종의 지향점이었던 모양입니다.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요즘도 앉아서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마지막으로 그런 역할 한번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마음이 들어요.”
영화박물관을 만들고
-누구나 신영균씨를 대단히 성공한 인생이라 평가합니다. 성공의 요인을 꼽을 수 있을까요.
“왜 사업을 시작했는지부터 얘기해야겠네요. 일단은 가족 생각이 앞섰어요. 그때는 영화 제작여건이 워낙 열악해서 출연료를 계약금만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2~3개월 전에 당좌수표로 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이 당좌수표라는 게 촬영이 끝나기 전에 현금으로 챙겨 받지 않으면 휴짓조각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결국 계약금 외에는 전혀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거죠.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더군다나 가족이 있는데 말 타다가 떨어지거나 실탄을 쏘다가 죽든지 장애인이 되면 누가 가족을 먹여 살립니까. 사업을 시작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예전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출연료가 70만원이었고 집 한 채 값이 500만원 이었는데, 5년 동안 돈을 모아서 금호극장을 샀다는 기사가 있더군요. 본래 배우들은 영화제작에 나서는 경우가 많은데 극장을 했단 말입니다. 이것도 신영균씨의 특징 가운데 하나죠.
“실은 손윗동서가 극장을 했어요. 마침 잘 알고 지내던 배급업자가 극장을 같이 해보자고 제의를 해오기도 했고요. 여러모로 따져보니까 제작보다는 안전하거든요. 그때만 해도 TV를 보유한 집이 많지 않던 시절이니까 영화만 만들면 관객이 몰려오곤 했어요. 명절 때는 아예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실제로도 금호극장은 그럭저럭 운영이 잘 됐어요. 한 해 출연료보다 극장 한 달 수익이 더 나았으니까요. 아내가 극장 수익금하고 출연료를 모아 을지로에 있는 명보제과 건물을 인수했죠. 담보가 많이 걸려 있어서 집 한 채 값으로 살 수 있었어요. 여러모로 운이 좋았고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던 거죠.”
-제주도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는 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뭐였을까요.
“1967년에 영화 ‘마적’을 제주도에서 찍었어요. 경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데 땅값은 한 평에 300원이었으니 정말 쌌죠. 영화배우도 한계가 있잖아요.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여기에 조그마한 호텔이라도 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그 땅을 샀죠. 그런데 외국을 다녀보니 선진국엔 어디나 영화박물관이 있어요. 그래서 여기다 박물관을 짓겠다는 쪽으로 생각을 고쳐먹게 됐죠.
문화적으로 앞서 있는 나라에서는 박물관 건립 비용을 전부 국가에서 지원해줘요. 우리나라는 아직 그 수준은 아니죠. 이 박물관은 사재를 털어서 만들었어요. 단순히 전시만 하거나 영화만 관람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지금도 버려지고 있는 영상자료를 모아 보전하고 싶었던 거죠. 앞으로는 정부에서 이런 작업을 맡아주거나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전시자료를 수집하시는 데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화장도구나 시나리오 같은 사소한 물건이 영화 역사의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잖아요. 용케 그런 물건이 남아 있다 해도 기증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애를 먹는 경우도 있고요. 자료는 국내외에서 경매를 통해 직접 구매하는 경우도 있고 영화인들로부터 기증받는 경우도 있어요. 촬영용 소품이나 전시용 패널 같은 것은 실물을 얼마 동안 전시하다가 나중에 교체하기도 하죠.”
“결과가 참 좋았다”
-정치가, 사업가, 배우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일을 꼽자면요.
“영화배우가 좋죠. 후회는 안 해요. 사업이나 정치도 후회하지는 않지만요. 정치는 영화계를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하다 보니 정치인도 남자로서 메리트가 있는 직업이더라고요. 나라를 책임진다는 경험도 참 의미가 있었고.
영화배우를 하는 동안에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생활이 안정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죠. 단순히 노후를 생각해서 사두었던 땅이 값이 크게 올라서 돈을 번 셈이지만, 막상 여기다 호텔을 짓지는 않았거든요. 대신 영화인으로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됐죠. 그 모든 일이 꼭 돈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가 참 좋았던 거죠.”
-어느 수준에 이르면 돈을 더 번다는 게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아요. 어느 순간 의미가 없어져버려요. 사업가의 목적은 사업에 성공하는 거예요.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장차 그 돈을 어떻게 투자하고 써야 할지 욕구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얼마를 벌었다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해야 할까가 중요해지는 거죠. 그런 욕심이 있어야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거죠.
굳이 내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된 이유를 꼽자면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거, 그거예요. 배우로서 인기 있을 때 즐기거나 놀러다니거나 하는 대신 극장이나 제과점 하면서 사업을 배웠던 거죠. 모르죠, 내가 만약 경영학을 전공해서 사업가만 했다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그래도 난 배우를 했다는 사실이 참 좋아요.”
(‘한국영화를 빛낸 스타들’은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