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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수 없는 백두 정찰기 2200억만 날렸다

자주국방 헛꿈 ‘백두사업’

날 수 없는 백두 정찰기 2200억만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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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청기는 휴대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한 전자기기다. 따라서 이를 항공기에 탑재할 때는 감청기와 항공기 모두가 간섭을 받지 않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 일이 여간 어렵지 않다(촬영기는 전자적 요소가 적어 감청기에 비해 전자 간섭이 적다. 백두사업에 비해 금강사업이 조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저고도로 비행하는 감청용 정찰기는 미국에서도 개발한 적이 없다. 따라서 백두 정찰기를 만든다면 감청기와 조종 장비 사이에 간섭을 막는 새로운 방법이 창안되어야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은 이러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나라는 사실상 미국뿐이다.

한국은 호커800XP와 시스테이션Ⅲ, 팰콘50EX를 생산하는 각 항공사에게, 감청기를 실었을 때 생기는 간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서 응찰하라고 했다. 이렇게 되자 세 항공사는 자기네 항공기와 결합했을 때 생기는 전자 간섭을 줄일 수 있는 감청기 생산회사를 찾게 됐는데 이것이 매우 복잡해졌다. 복잡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교롭게도 시스테이션Ⅲ를 생산하는 ‘세스나그룹’과 팰콘50EX를 생산하는 ‘닷소그룹’에는 감청장비를 생산하는 회사가 없었다(있더라도 실력이 약했다). 반면 호커800XP를 생산하는 레이시온그룹에는 E-시스템즈라는 감청장비 생산회사가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그룹사 소속이면 의사 소통이 원활해 간섭을 줄이는 방안도 찾기 쉬울 것으로 한국은 판단했다. 그래서 호커800XP를 생산하는 레이시온 항공기 제작사와 E-시스템즈사로 구성된 ‘레이시온 컨소시엄’은 타 후보에 비해 20% 정도 비싼 가격을 제시하고도 백두사업을 따내게 되었다. 우리로서는 ‘싼게 비지떡’일 수 있으니, 제값 주고 제대로 된 물건을 받자고 판단한 것이다. 더구나 그때는 비록 흑자 수지는 사라졌어도 OECD에는 가입할 무렵이라, 우리는 주머니가 두둑하다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백두 정찰기 제작을 끝냈을 때 과연 레이시온 컨소시엄이 우리가 요구한 성능을 발휘하는 정찰기를 제작해 주었는지 우리로서는 검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택한 방안이 ‘구관이 명관’이라고 다시 미국 정부에 의존해보자는 것이었다.

즉 미국 정부에 일정액의 수고비를 주고, 레이시온 컨소시엄이 생산한 백두 정찰기가 우리가 요구한 대로 만들었는지 검증케 하고 그에 대한 보증을 서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레이시온 컨소시엄에 속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백두 정찰기에 관한 모든 정보가 미국에 넘어가, 전략 정찰의 자주화는 ‘물 건너’가게 되었다.



여기서 처음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아주 중요한 결함이 발견되었다. 미국의 U-2R기는 27㎞ 상공을 비행하는데도 1960년 소련 미사일을 맞고 격추되었다. 그런데 일반 제트기와 같이 10㎞내외 상공을 비행하는 백두 정찰기가 북한 미사일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까? 백두 정찰기는 대략 휴전선 40∼50㎞ 남쪽에서 휴전선을 따라 비행하며 북한 지역을 정찰하는데, 이 경우 북한이 지대공 미사일 쏘면 이 정찰기는 영락없이 격추된다. 이러한 가능성이 발견되자 이 정찰기를 조종해야 하는 공군 쪽에서 “이 비행기는 안된다”는 의견을 강력히 제기했다.

셋째는 정찰기 외부 구조 변경 문제였다. 백두 정찰기는 정찰기 외부로 레이더 파를 쏘고 쏜 레이더를 받아들이는 안테나를 뽑아야 한다. 비행기는 매우 예민한 기계여서 기체외부에 새로운 장착물을 붙이면 속도 등이 크게 변하게 된다. 공군은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항공기 측면의 검토가 생략된 채 제작한 백두 정찰기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넷째로는 소프트웨어 상의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소프트웨어는 백두 정찰기에 탑재한 감청기를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인데, 적절한 시기가 되면 이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그런데 업그레이드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다. 소프트웨어 제작사인 E-시스템즈에서 1억 달러라고 하면 1억 달러를 줘야하고, 2억 달러라고 하면 2억 달러를 다줘야 백두 정찰기를 놀리는 사태를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피해가려면 한국 기술자들을 소프트웨어 개발에 함께 참여시켜, E-시스템즈로부터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술을 얻어내도록 했어야 하는데, 이 부분을 아예 간과한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다섯째로는 “왜 백두 정찰기를 구입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었다. 항공기에 탑재하는 감청기는 협소한 공간 등의 문제 때문에 감청 능력에 제한을 받는다. 반면 지상에 설치하는 감청기는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감청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한미연합 감청부대인 ○부대는 휴전선 곳곳에 감청기를 세워 충분한 감청 능력을 구축해 놓았다.

“군인들은 아주 순수하다”

린다김 사건이 터졌을 때 백두사업과 함께 거론된 동부지역 전자전 장비가 바로 지상에 설치한 감청기다. 이미 지상에 설치한 감청기만으로도 충분히 감청할 수 있는데, 감청 능력이 더 뛰어나지도 않은 백두 정찰기가 들어오게 됐으니 중복 투자 아니냐는 시비가 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일부 인사들은 유사시 국군이 북진을 해서 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갔을 경우, 백두 정찰기는 그 즉시 새로운 전선으로 이동해 전선 너머 적진을 감청할 수 있으니 효율적이지 않으냐고 지적한다. 그러나 지상 감청기 역시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으므로, 굳이 미사일을 맞을 가능성이 큰 항공기로 정찰할 필요는 적어진다.

백두사업은 이처럼 사업을 추진할 때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문제점이 나타나 끙끙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당한 사업비가 미국으로 건너가, 중단하는 것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IMF가 터져 주머니마저 텅텅 비어버리자 백두사업은 더더욱 ‘계륵(鷄肋)’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두사업을 추진해온 사람들은 “백두사업에 한번 빠지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하얗게 센다”며 ‘백두론(白頭論)’을 거론한다.

이에 대해 일부 인사들은 “그러한 시행착오들은 전략 정찰의 자주화를 이루기 위해 어쩔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한다. 미국도 이러한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해 가며 U-2R기를 발전시켰으니, 우리도 전략 정보의 자주화를 위해서는 이 정도의 판단 착오는 수업료조로 지불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도 나름대로는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현실론이므로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이양호 당시 국방장관과 린다김이라는 로비스트가 벌인 작태다. 지금까지의 보도를 종합하면 린다김과 이양호씨는 96년 초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해 4월 이장관은 백두사업이 이렇게 어긋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린다’에게라는 제목의 연서(戀書)를 만들어 린다김에게 보냈다. 국방 문제로 고민하고 고민해야 할 사람이 장사꾼으로 온 여성에게 빠져 국가에 대한 고민을 제쳐 놓고 연서나 쓰고 있었던 것이다.

통상 500억원에서 1000억원 사이의 무기 구매 사업은 국방부 장관이 최종 결재하고, 1000억원 이상의 무기 구매 사업은 대통령이 최종 결재한다. 96년 6월21일 김영삼 대통령은 백두사업 기종으로 국방부가 올린 호커800XP와 E-시스템즈 안을 최종 결재했다. 이장관이 린다김을 만난 지 5개월도 못 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백두사업은 레이시온 컨소시엄으로 결정된 것이다.

당시 이장관은 동부지역 전자전 장비로 이스라엘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미 백두사업이라는 선물을 건네 주고도 뭐가 모자랐는지 주한 이스라엘대사관의 무관인 나흐만 쏘버에게 린다김을 에이전트로 쓰라고 이야기한다(장관이 누구를 에이전트로 쓰라고 권하는 것은 이미 기종 결정이 끝났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사업은 프랑스의 톰슨-CSF사의 것으로 결정되었다). 왜 이장관은 린다김에게 이렇게 쏙 빠졌을까.

린다김은 5월11일 서울 안세병원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군인들은 아주 순수하다”고 말했다. 순진한 군인이란 이양호씨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이장관은 너무 순진해서 린다김이 금품으로 로비하지 않아도 넘어갔다는 뜻일까. 아니면 뭔가 로비가 있었다는 뜻일까. 이장관의 순진함, 더 큰 시야에서 본다면 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지는 정권 전체의 순진함은 엄청난 국익을 손상했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은 린다-양호 스캔들의 속편을 보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한 전략가는 “이양호씨의 망신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冬

신동아 200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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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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