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서울 종로구 인의동 인의빌딩 13층. 백발 성성한 30여명의 노인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둘러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민족화해와 통일이라는 미명 아래 평양을 방문했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초청으로 답방하겠다는 김정일(金正日)의 서울방문을 반대하는 이유는 ….”
보수우익 단체인 자유민주민족회의(대표상임의장 이철승·李哲承)가 주축으로 추진중인 ‘김정일 서울방문 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 준비모임이었다. 사회자가 낭독한 발족취지문의 요지는 한마디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대량학살 요인암살 등을 지령·지휘하고, 핵과 미사일의 생산 수출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등의 행적에 대해 사과와 재발방지약속도 없이 서울에 오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8·18판문점 도끼만행사건도 넣어야 해요”
“아사자·국군포로 문제에 관해서도 별도의 문구를 추가시켜야죠”
참석자들은 보다 강도높고 ‘완벽한’ 문구를 경쟁적으로 주문했다. “앞으로 반공 보수 진영이 연합해야 한다”는 한 참석자의 발언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또다른 참석자는 “여기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은 공산당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어제 서울역에서 보니까 김정일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 입고 무슨 대회에 참석하러 올라온 대학생들이 수백 명이야. 이거 빨갱이 나라 다 됐다구”
한 참석자가 걱정스레 개탄조로 말하자 참석자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날 모방송국 시사토론 프로그램 담당자의 전화통엔 잇딴 항의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시오. 당신들 지금 여기가 뭐 인공(人共)치하인줄 아시오? 이 나라가 어떻게 지켜온 나라인데 공중파 방송이 반미운동의 앞잡이 노릇을 하느냐, 이 말이야.”
방송사측이 전날 밤 TV토론에서 매향리 미 공군사격장 피해주민에게 발언기회를 주면서 6·25전몰군경 유자녀에게는 ‘시간상 이유’를 들어 발언기회를 주지 않은 것을 따지는 것이다.
“보수우익의 항복을 강요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져가는 남북관계 속에서 한동안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이른바 보수진영 인사들이 이처럼 한켠에서 조금씩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아직은 북한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과도한 포용정책’이 가져올 ‘문제점’을 지적하며 물밑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수준이지만 ‘행동’에 나서려는 일부 적극파도 없지 않다.
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도 잇따라 보수우파들의 목소리가 분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88년 당시는 재야 학생운동세력 등이 87년 민주화운동의 여세를 몰아 이른바 ‘통일투쟁’ 열기를 높여가자 권력 내부 또는 그 주변에서 ‘진압’ 차원의 이념적 공세를 전개했다. 반면 지금은 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를 통해 들어선 새 정부가 대대적인 대북 유화정책으로 기존의 남북간 이념적 대결구도를 뒤흔들자, 불안과 불만을 느낀 ‘소외된 보수’들이 저항 차원에서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배경이야 어떻든, 지금은 비록 ‘야당’이 된 보수라고는 해도, 이들은 해방 이후 남한사회의 다수파요, 주류(主流)를 형성해왔던 세력이다. 이들의 행보는 향후 언제든지 남북관계에 무시못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이 엄청난 전환기에 복잡미묘한 고민과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한국 보수파의 현주소를 파고들어가 봄으로써 향후 남북관계에 관해 의미있는 시사점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앞서 잠시 여기서 추적할 ‘보수’의 개념부터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보수주의(保守主義·conservatism) 개념은 매우 복잡하고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소 다른 뉘앙스로 사용돼 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랜 시간을 통해 발전돼온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러나 분단 한국에서 ‘보수’라 할 때는 대개 건국기의 좌우대립과 6·25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치르면서 형성된 현실의 특수한 역사적 세력을 의미한다. 즉 대개 북한에 대한 적대적 시각이 뚜렷하고 반공을 중시하는,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체제수호 내지 국가안보를 다른 가치보다 중시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 부류를 통칭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 가운데 현재의 남북관계 변화를 가장 비판적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그룹으로는 서두에 언급한 자유민주민족회의를 들 수 있다. 민족회의는 1994년 자유민주총연맹,건국청년협의회,대한반공청년회 등 33개 보수단체들로 결성된 대표적 보수연합체다.
정상회담 이후 남한 내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호의적 평가가 급증하기 시작한 지난 7월, 민족회의 기관지 ‘민족정론’은 표지 타이틀을 ‘친북용공정권은 용납할 수 없다’고 달았다. 강창홍 편집장은 “평화공존과 긴장완화를 위한 군사적 신뢰구축도 없이 추진되고 있는 ‘주체적’ ‘자주적’ 통일이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민족회의를 이끌고 있는 이철승 상임의장은 “우릴보고 냉전적 또는 보수적이라 비판하는데 건국 이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서온 우리야말로 진정한 진보”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북한이 조국을 배신하고 월북한 외무장관 부인을 단장으로 내세워 남한을 방문시킨다는 것은 남한의 자유민주체제에 대한 모욕이자 도발”이라고 흥분했다. 이의장은 또 군사독재자들이 자기들 이익을 앞세워 정권을 잡는 바람에 반정부세력이 성장, 우리 보수우익더러 항복을 강요하고 있다”고 진단한 뒤 “우리는 이제 늙었다”고 걱정했다. 물론 이 ‘늙은 보수’들이 탄식만 하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민족회의는 9월 비전향 장기수 북송에 때를 맞춰 ‘김정일 저지 범국민투쟁위’를 발족시키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들어간 교과서 폐지운동을 벌인다는 방침이다. 이의장은 이미 교육부장관실에 전화를 걸어 “성난 애국인사들에 의해 교육부가 폭파되도 책임 못진다”고 일갈한 바 있다.
“김정일 방문저지운동 힘 모을 것”
그러나 민족회의 내부에서도 과연 자신들의 ‘김정일 저지 운동’이 국민적 호응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뜻 자신이 서지 않는 표정이다. 민족회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요즘 우리 민족진영 행사에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고 신문 방송에도 기사를 잘 내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다른 관계자도 “과거 안기부에서 우리 반공보수 진영에 뭔가 주고 나라에서 과자 부스러기라도 줄 때도 이 쪽 사람들은 분파주의가 심했다”면서 “지금도 보수는 숫자는 많지만 제각각이어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민족회의 공동상임의장을 맡고 있는 손진(孫塡)대한민국건국회장은 보수우익 진영의 결속력이 부족한 원인을 이렇게 진단했다.
“우익진영이 가두에 나가 데모하는 예가 드문 것은 기본적으로 나라의 안보체계를 손상시킬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능력이 없어서 데모를 안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린 능력이 있을 때도 안했다. 정권이 어떤 정권이든 우린 평화적으로 해왔고 사회혼란을 조성할 수 있는 행위는 삼갔다. 게다가 우리가 50년 세월이 흐르면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방관한 결과 오늘날 젊은이들이 자유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쉽게 잊고 나라걱정을 하지 않는다. 5·18 시위 참여자에겐 나라에서 보상을 해주면서 우리같이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보상을 해주지 않으니까 우리집 애들만 해도 ‘그런 운동을 뭣하러 하시느냐’ 소리를 한다.”
손회장은 “김정일이 여기 온다는데 이젠 우리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면서 “김정일방문 반대운동을 위해 원로들을 모셔 울타리를 치고 전몰군경유자녀 등 ‘피해자들’은 물론 그동안 서로 협조가 잘 안된 다른 보수단체나 여러 종교계에도 적극 동참을 호소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민족회의가 상대적으로 적극적 투쟁적인 행동방식을 보이는 연합체라면 같은 보수성향이면서도 보다 ‘계몽적’ 방식으로 활동하는 보수 연합체가 ‘밝고 힘찬 나라 운동본부’다. 97년 11월 박근(朴槿) 전유엔대사가 중심이 돼 설립한 이 모임에는 박홍 전서강대총장, 유기천 전서울대총장, 박정수 싸이버텍사장, 이신 사랑의 쌀나누기운동 사무처장, 김철영 한국기독언론연구소장 등 130여명이 결성식에 참여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그에 기초한 통일한국의 실현을 지향목표로 하고 있으며, 소식지를 발행하고 세미나 강연회 등을 개최해 오고 있다. 6월22일 이 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정상회담 이후의 상황전개와 관련해 독특한 분석이 제기됐다.
“(정상회담으로 시작된) 김정일위원장과 김대중대통령간의 힘겨루기는 끝내 남북한 주민들간의 지지경쟁에 의해 판가름나게 돼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김정일은 북한을 완전히 장악·통제하고 있다. 그가 현재 남한사회까지도 장악·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을 추종·지지하지 않는 남한인구의 상당수가 그의 편으로 끌려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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