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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김정일은 피눈물의 역사를 만나야 한다

통일잔치에서 소외된 통일전사 백기완의 분노

김대중과 김정일은 피눈물의 역사를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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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통일의 기본원칙을 밝힌 6·15선언. 이산가족의 상봉과 비전향장기수의 송환…. 한반도 전역이 통일무드에 들떠 있지만, 한평생 통일운동에 몸바쳐온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피눈물을 쏟고 있다. 》
지난 7월이었다. ‘신동아’는 ‘남북관계와 통일문제에 관한 오피니언리더의 견해’를 취재하는 과정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에게 전화를 건 일이 있다. 당시 수차례에 걸쳐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백소장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세상천지가 다 통일을 얘기하는데 누구 하나 나를 찾아와서 통일문제를 묻는 사람이 없어. 김대중 정권이 나를 악랄하게 탄압하고 있단 말이야.”

남북 정상이 포옹하는 화해무드의 뒤안길에서 한평생 통일운동에 몸바쳐온 ‘통일전사’가 울부짖고 있었다. 장준하 선생과 함께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가 31년 만에 쓸쓸히 문을 닫을 때도 눈물을 참아냈던 그가 절규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백소장과의 인터뷰는 그 의문을 푸는 데서 시작됐다.

“광주시장과 김대중씨는 답변하라”

6월16일 오후 3시30분. 백소장은 광주시청에서 초청강연을 하게 돼 있었다. 주제는 ‘우리문화의 실질로 세계 암흑을 깨자’였다. 하지만 백소장은 광주로 내려가지 못했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김대통령이 출국하기 이틀 전 광주시청으로부터 강연이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고, 내부적으로 토론을 거쳐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광주시청 문화예술과의 해명이다.



“광주시청 문화예술과장이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여기까지 사과하러 찾아왔어. 내가 ‘정치적 편견이나 지방정서가 개입된 거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고 위에서 시킨 거래. 그래서 ‘광주시장이냐 청와대냐’고 했더니 대답이 없어. 그날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는데 갑자기 위경련이 오는 거야. 소화제를 먹어도 소화가 안돼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들어가는데 웬 젊은이가 나보고 그래. ‘백기완씨는 통일운동전선에서 추방됐다죠? 통일운동이 어떻게 되는가 보려고 관중석에 앉았는데 관람권이 없다고 끌려나왔다면서요’ 하는 거야. 소화는 안되고 가슴은 울렁거리는데 전철을 탔더니 ‘김대중씨와 김정일 위원장이 내일 만난다’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어. 한심하고 울적해서 전철칸을 나와 소주 반병을 마시고 울었어. 한편으로는 통일을 말하면서 백기완이가 광주시민도 못 만나게 하는 째째한 분열주의는 누가 획책하는 음모냐 이 말이야.”

―왜 선생님의 강연이 취소됐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압력 때문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도대체 한 달 전부터 광주시청에서 나하고 광주시민이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걸 못하게 하는 분열주의는 무슨 범죄적인 작태냐 이 말이여. 광주시장과 김대중씨는 답변을 해야 합니다. 나는 분명히 광주시민을 못 만나게 하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오.”

―올해의 광주는 어느 때보다도 말이 많았습니다. 특히 가라오케에서 술판을 벌인 386세대 정치인들이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18일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광주의 민중들이 끊임없이 싸워오다가 80년 5월18일에 폭발했던 겁니다. 따라서 광주민중항쟁은 지금도 계속되는 겁니다. 민중들이 갖고 있는 긴장성은 지금도 계속 폭발되는데 혹시 일부 젊은이들이 그 긴장을 해체하는 작태를 했다면 이것은 마땅히 역사의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반성도 해야 할 겁니다.”

“나는 소외된 게 아니라 탄압받고 있어”

세상이 모두 통일을 얘기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만났고 비전향 장기수가 송환된다. 사회 각계의 전문가들도 남북관계에 대한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어디에도 백기완 소장의 목소리는 없다. 안보논리가 판을 치던 군사정권 때부터 목숨을 걸고 통일운동을 해온 백소장이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는 것이다. 백소장 자신은 ‘소외당하는 것이 아니라 탄압받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분명 그를 외면하고 있다.

―최근 신문과 방송에서 통일에 관해 얘기하는 전문가가 많습니다. 그분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통일문제연구소가 문을 연 지 올해로 꼭 33년이 됐소. 그런데 그동안 우리 연구소가 한 일이 딱 하나밖에 없어. ‘통일’이라는 ‘통’자를 일반화시키는데 기여했어. 박정희 때는 통일문제 들고나오면 그냥 잡아갔어. ‘이 자식아 반공, 안보지 무슨 통일이냐. 너 빨갱이 아니냐’며 무조건 때리는 거야. 그런 탄압을 받으면서도 우리 통일문제연구소가 ‘통일’이라는 말을 일반화시키는데 이바지해왔어. 그런데 말이야 이 얘기는 꼭 좀 써줘. 정치하는 사람들 중에 나하고 친한 사람들 많은데 말야. 그 사람들 내 책 한 권도 안팔아줬어. 날마다 신문과 방송에 나와서 통일을 얘기하는 정치인들, 교수들, 통일전문가들 단 한 권도 안샀어. 노동자, 농민, 철거민들이 몇백권씩 팔아줘서 통일문제연구소를 끌고 나가는 거야.”

“김대통령의 통일노선은 이율배반”

김대중 대통령과 백기완 소장. 70년대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같은 목소리를 냈다. 어찌 보면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도 김대통령이 백기완 소장과 인연이 깊다. 하지만 백소장은 최근 국민의 정부를 향해 강도높은 비판을 퍼붓고 있다. 87년과 92년 대통령선거 때의 앙금 때문일까. 그보다는 최근의 변화된 환경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지난 7월17일 오후에 벌어진 ‘사건’도 김대통령에 대한 백소장의 분노를 폭발시킨 계기가 됐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문화특강을 하고 오후 1시쯤 청와대 앞길로 해서 집으로 가던 중이야. 난데없이 백차가 가로막고 길 옆으로 서라는 거야. ‘오늘이 제헌절인데 왜 청와대 앞에서 길을 막느냐’고 했더니 ‘백기완씨 맞죠? 조사할 게 있습니다’ 라고 해. 그래서 ‘이거 누가 시켰느냐? 청와대 김대중이 나오라고 해’ 라고 했더니 경찰들이 몰려와. 제헌절 날에 내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 나를 조사한다는 거야. 지금도 그때의 수모가 풀리지 않아. 50년 동안 통일운동한 나를 백주대낮에, 그것도 제헌절날 청와대 앞에서 신분조사하는 이유는 뭐야. 청와대 김대중씨는 대답을 하라 이 말이야. 뒷골목에서 이렇게 억울하게 탄압을 받고 있는 시민의 목소리를 누가 대변해. ‘동아일보’가 대변해? 아니면 내가 주주로 있는 ‘한겨레’가 대변해? 왜 이런 얘기를 신문에 한줄도 안내는 거야? 이런 인권탄압을….”

―일부에서는 김대통령이 통일논의를 독점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김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텔레비전에 그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통일을 떠드는데 신문 방송에서 나한테 통일을 묻는 사람이 없어. 나는 언론이 어용화돼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 김대중 정권의 언론통제고 언론탄압이라고 생각해. 나는 이 시점에 김대중씨에게 꼭 요구하고 싶은 게 있어. 더 이상 민중이 주도하는 통일운동을 탄압하지 말고 언론통제하지 말고 통일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다루는 민족적 관점으로 돌아오라고 말해주고 싶어.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시절부터 통일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다가 용공시비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김대통령의 통일관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나는 그분이 통일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잘 몰라. 나는 김대통령이 통일문제에 앞장서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지만 이율배반은 꼭 지적하고 싶어. 겉으로는 평양에 가서 통일을 말하지만, 남한 사회를 완전히 미국 자본에 넘겨주었잖아. 통일이 돼도 미군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말하잖아. 통일을 우리 민족이 주도할 것이냐, 아니면 미국이 주도할 것이냐. 이 문제를 가파르게 대립시켜 놓은 사람이 바로 김대중씨라고 생각해. 심정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김대중씨는 미국이 주도하는 통일로 기울지 않을 수 없게 돼 있어. 어떻게 냉전구조를 고착화시키는 미군을 그대로 두고 통일을 할 수 있겠어. 그래서 김대중씨는 입으로 통일을 말해도 실제로는 이율배반에 빠져 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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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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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김정일은 피눈물의 역사를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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