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꿈에서 세상으로 내려온다’ ‘전사 그리스도’로 불리는 체 게바라가 그의 무덤이 된 볼리비아 밀림속 나무에 마지막 순간을 예감하며 새겼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꿈을 놓고 세상에 내려오고 싶은 인간이 얼마나 될까. ‘문 세표’로 불리는 경기도 광주의 문학진(45) 민주당위원장은 최근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을 꾸었다.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났어요. 재검표에서 내가 당선됐다는 겁니다. 16표로 역전됐다는 판결문 낭독이 아직도 귓전을 울립니다.” 꿈 이야기를 하는 그는 “왜 16표였을까”라면서 현실처럼 생생했다고 회고했다.
지난 4·13총선에서 한나라당 박혁규의원에게 3표 차로 분패한 문위원장은 재검표를 위한 당선무효소송과 재선거를 치르게 해달라는 선거무효소송을 동시에 제기해 놓은 상태다.
현재 진행중인 일부 재검표 과정에 표차가 2표로 줄어 ‘문 두표’로 별칭이 바뀌기도 했지만 4월 이후 현재까지 장장 4개월에 걸쳐 선거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그가 꾸었다는 꿈이 얼마나 달콤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더구나 그의 운명이 재검표 담당 재판부가 미처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14표에 달려있다면 더욱 그렇다.
유례없는 최장 선거에 피를 말리고 있는 그는 “매일 ‘러시안 룰렛(총알 하나를 리볼버 권총에 장전한 뒤 참가자들끼리 돌아가며 머리에 쏘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2년간의 우여곡절
그의 ‘피말리는’ 정치적 운명은 사실 총선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13년간의 기자생활을 접고 96년 15대 총선에 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경기 하남·광주에 출마해 패배할 때만 해도 그는 얼마나 많은 희비가 단기간에 교차할지 몰랐다.
정권교체의 기쁨과 함께 여당지구당 위원장으로 ‘격상’되고 98년 6·4지방선거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그의 앞날은 순탄하게 보였다. 하지만 지방선거 직후 당시 지역구의원이었던 한나라당 정영훈 전의원 입당설이 돌면서부터 그는 높낮이가 심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그해 8월 소수 여당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영입차원에서 정 전의원이 입당했고, 그는 3년간 가꿔온 지구당을 양보해야 했다. 무보직 설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이때 수모를 자서전 형식의 저서 ‘백범 김구처럼’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여당위원장이 된 내게 부동자세로 ‘하명만 하십시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라던 경찰서장이 정 전의원 입당 후 만난 행사장에서는 아는 체도 안하고, 입에 대고 있던 오리고기만 먹고 있더라.”
16대 총선 공천도 정 전의원에게 밀려 거의 기대할 수 없던 막막한 시절이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선거구 재조정 문제가 한줄기 빛으로 날아들었다. 그렇지만 1차 선거구 조정에서 하남·광주가 분리되지 않기로 결정돼 다시 낙담에 빠져들었다.
천우신조였을까, 국회 본회의장에서 일부의원 반발로 선거구 조정이 원점에서 시작되어 일말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여야 협상과정에 기사회생으로 광주와 하남이 분리됐고 그에게도 공천 티켓이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 종료는 아니었다.
그의 지지세가 광주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한 하남을 정전의원이 고집하는 바람에 ‘현역의원 우선배려 원칙’에 따라 내주고 광주로 출전하게 됐다. 그리고 3표차로 아슬아슬하게 낙선하는 불운을 겪고 이제, 최고 클라이막스인 재검표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문위원장은 “당선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이나 여권내부의 여론조사 결과로 당선을 확신했다는 설명이다. 개표 도중 TV에 당선 유력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박혁규의원의 몰표지역 투표함이 마지막으로 열렸고 14일 새벽, 그의 표현에 따르면 ‘황당한’ 터널이 검은 입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개표종료후 무엇보다도 먼저 개표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현실을 인지한 즉시 그는 민주당 김옥두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소송 의사를 밝히고, 친분이 있는 율사출신 신건 민주당 공명선거대책위원장에게 소송을 의뢰했다.
1차 심리서 2표차로 따라 붙어
곧바로 광주군 선관위 상대 소장을 접수하고 애간장이 녹는 재검표 단심소송을 시작했다. 첫 재판부터 “생사를 넘나드는 격전이었다”고 그는 토로했다. 지난 총선에서 근소한 표차로 낙선한 후보들이 제기한 9건의 당선 무효 소송이 광주군 경우만 제외하고 이미 무번복으로 결정났음에도,이 재판 결정이 여전히 보류되고 있는 점이 양측의 치열함을 감지케 한다.
담당 재판부인 대법원 특별 1부는 지난 6월5일 성남지원에서 첫 심리를 열고 재검표를 실시했다. 문위원장과 박의원측이 그날 선관위의 검표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표는 모두 42표. 이 42표가 승부를 가름짓는 열쇠로 부상한 것이다. 당락차가 3표였음을 감안할 때, 무수한 변수를 갖는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42표는 대부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미묘한 표들이어서 결과를 섣부르게 예단할 수 없다. 투표용지가 훼손되거나 지장이 함께 찍혀 있는 경우, 기표 인주가 다른 후보에게 번진 경우(전사), 어느쪽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인지 판단하기 난해한 경우가 다수였다.
7시간50분 동안 진행된 첫 심리에서 재판부는 42표 중 일단 28표에 대해 잠정 판단을 내렸다. 나머지 14표는 현재까지 보류돼 있다. 이날 심리 결과 표차는 2표로 줄어들었다.
28표 중 당초 박의원 표였던 1표는 절반이 절단된 뒤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진 채 발견돼 재판부가 무효로 처리하기도 했다. 1표에 생사가 달린 만큼 박의원측이 이의를 거듭 제기해 재판이 2차례나 정회됐다.
이날 재판부의 판정에 대해 양측은 모두 불만이 역력하다. 문위원장은 “28표 중 12표의 판정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고, 박의원측도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진 1표 등에 강력하게 항변하고 있다.
양측은 나머지 14표뿐 아니라 28표도 여전히 최종판정이 된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황이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대법원측은 견해가 다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일단 판정이 된 만큼 합리적인 이의가 아니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게 관례“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현재 전반전은 2표 차의 게임 스코어로 끝났으며, 후반전은 14표로 치러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우선 재판부가 일단 무효처리한 스카치테이프가 붙여진 표를 놓고 양측이 언제 찢겼느냐를 놓고 맹렬히 맞붙어 있고, 대법원 특별 1부에 소속됐던 대법관 4명 중 2명이 퇴임하고 신임 대법관 2명이 새로 배속돼 28표의 판단이 바뀔 확률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대법원측은 “28표의 판단은 개별 대법관이 아닌 총괄적인 재판부가 한 것이므로 대법관 변동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고 그럴 가능성을 거의 일축하고 있다.
첫 심리가 열리는 동안 문위원장과 박의원은 문제가 된 표를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양측 대리인인 변호사만 참석이 허용된 까닭이다. “손에 땀이 강물처럼 흘렀다”고 문위원장은 말했다. 박의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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