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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스커트 정장에 진주귀고리를 다세요!”

패션 전문기자가 ‘파워드레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빨간 스커트 정장에 진주귀고리를 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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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취임식 날 선보인 다섯 벌, 합격선은 넘었지만…
  • ● 여성 지도자에게 패션은 ‘메시지’이자 ‘감각’
  • ● “국내 디자이너 옷 입어달라”
  • ● 클래식 핸드백, 스카프로 고유의 오브제를
“빨간 스커트 정장에 진주귀고리를 다세요!”
“나는 박근혜가 뭘 입어도 예쁘더라.”

논쟁은 일흔 넘은 아버지의 한마디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2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 갈아입은 다섯 벌의 옷에 대해서 가족들이 제각각 던진 심사평이 난무하던 자리였다.

그렇다. 박 대통령이 무엇을 입든 ‘예쁘기만한’ 52%의 국민과 뭘 입어도 ‘그저 유감인’ 48%의 국민이 살아가는 나라에서, 오늘 입은 이 옷은 지지하나, 어제 입은 그 옷은 반대하며, 내일은 빨간 스커트 정장을 입어주기 바라는 의견은 ‘국민 여론’에 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막 런웨이를 끝낸 패션쇼장처럼 떠들썩한 SNS는 말할 것도 없고, 언제나 ‘정책 우선’을 강조하는 점잖은 신문들까지 박근혜 패션을 대대적으로 분석하는 현상은 우리가 확실히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여성 국가원수 시대에 진입했음을 실감하게 한다.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역사 이래 무채색의 슈트와 넥타이로 ‘위장’해온 남성들과 대조적으로 여성들은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입은 것을 통해 성의식(젠더), 권력, 경제력, 교양과 취향 등을 표현하는 길을 걸어왔다. 남녀 정치인과 유명 인사들도 예외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유력 인사들의 옷차림은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미쳐 ‘파워드레싱(Power Dressing)’이란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파워드레서는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도 파워드레서였지만 패션이란 말조차 쓰기 어려웠던 1960, 70년대 상황에서 이렇다 할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박 대통령은 최초의 파워드레서이기도 하다.



고백하건대, 최고의 파워드레서인 박 대통령이 취임식 날 무채색 정장 한 벌로 모든 일정을 마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나는 안도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중국의 인민복 시대에 살고 있는 악몽을 꿨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상황에 맞춰 다섯 신(scene)을 보여줬으니, 기본 점수에서 일단 합격선을 넘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박 대통령은 여성 대통령의 패션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줬기 때문이다.

‘점퍼’는 이제 그만

“빨간 스커트 정장에 진주귀고리를 다세요!”
취임식 날 박 대통령의 첫 번째 옷차림은 검은색 롱 패딩 파카와 짙은 회색 목도리, 검은색 바지, 검은색 로퍼였다. 서울 삼성동 자택에서 나와 첫 방문지 국립현충원으로 이동하면서 처음 국민을 만나는 모습이었다. 컬러는 적절했지만, 패딩 점퍼는 너무나 아쉬웠다. 여성 대통령의 첫 인사, 순국 영령들에게 참배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모직 코트로 성장(盛裝)한 모습이 적절하지 않았을까. 지난겨울 다운패딩이 보온성을 인정받으며 인기를 끈 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손주들과 함께 패딩 차림으로 전통 시장을 돌았기 때문인지, 대선 기간 중 많은 정치인이 ‘점퍼’ 차림으로 현충원 참배 등 공식행사에 나섰다. 추운 건 알지만 옷의 예절에는 무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 폴란드 아우슈비츠 해방 기념식에 파카 차림으로 참석했다가 전 세계 언론으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맞은 딕 체니 전 미국 부통령의 사례를 전해준 참모는 없었나보다.

현충원 참배를 끝낸 박 대통령은 카키색 모직 재킷과 보라색 스카프 차림으로 국회의사당 취임식 단상에 올랐다. ‘시작’을 알리는 적절한 변신이었다. 선거 운동 내내 입어 국민의 눈에도 익숙한 패딩 파카. 혹한과 경쟁자들에 맞서 용맹하게 싸워준 제1 참모, 검은 점퍼의 임무는 여기까지라고, 박 대통령은 치하했을까.

흥미로운 점은 박 대통령이 공식 취임식 코트로 카키색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카키색은 우리나라에서 ‘국방색’이라는 애국적인 이름으로 불리며, 군필 남성들이 가장 기피하는 색이다. 그만큼 강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외국 여성 정치인들에게 카키색은 베이지, 회색과 함께 ‘중립’ 컬러로 분류되나, 국군 통수권자이자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파워드레서에겐 강력한 ‘국방의 의지’에 따라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정치인 박근혜의 파워드레싱은 언제나 메시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이나 ‘강렬한’ 국방색이었다. 그와 매치되지 않았던 보라색 머플러는 많은 패션 전문가가 주목한 나비 브로치와 어울려 ‘미래’와 ‘희망’을 웅변했다. 서울 광화문 식당에 모여 취임식 장면을 보던 60, 70대 어르신들은 “꼭 여군 같구먼” “여자 대통령이라고 북에서 깔보지 못할걸?”이란 말로 국방색 재킷에 화답했으니, 보수층에게 확실한 메시지를 준 셈이었다.

권력의 상징, 진주(Power Pearls)

박 대통령은 취임식에 이은 광화문 복주머니 행사와 밤의 외교사절 만찬에서 각각 다른 두 벌의 한복을 입었다. 유명 인사들의 한복을 많이 지은 김영석 디자이너의 작품으로, 국민 행사와 외빈을 초청하는 행사에서 한복을 입기로 한 것은 박 대통령의 뜻이었다고 한다. 이는 박 대통령의 동양적 마스크와 올림머리가 제대로 돋보였다는 점에서, 어머니 육 여사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는 점에서 탁월한 전략이었다. 동시에 외국 언론이나 외교관들에게는 박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민족적인 자긍심을 정치력의 한 기반으로 삼을 것이라는 사인으로 전달됐을 것이니, 외교적 갈등이 잠재한 주변 국가들 사이에선 다소의 긴장감도 오갔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현대화한 국가의 여성 정치인이 전통 의상을 입는 것은 민족 감성에 호소하는 특별한 이벤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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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채널A ‘스타일 A’ 진행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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