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이문열 파동’의 전말은 이렇다. 6월29일 국세청이 언론사 세무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분개한’ 이씨가 7월2일자 조선일보 시론을 통해 정부의 ‘언론탄압’을 비판했다. 다음날 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당4역회의에서 “일부 신문의 지면을 통해 성장한 지식인이 곡학아세를 하고 있다”고 이씨를 공격했다.
이때부터 이씨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네티즌들의 공방으로 난장판이 됐다. 7월5일 추미애 의원의 취중욕설은 논쟁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문열같이 가당치 않은 놈이….”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조선·동아일보를 비난하던 추의원이 ‘덤으로’ 이씨에 대한 감정까지 드러냈던 것. 다음날 조선일보가 이를 보도하자 대부분의 언론이 뒤를 따랐다.
그 와중에 이씨는 한차례 더 신문에 글을 써 논란을 부채질했다. 7월9일자 동아일보에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라는 제목의 시론을 올린 것이다. 이후 각 신문과 방송은 이씨 글에 대한 지식인들의 논쟁을 앞다퉈 다뤘다. 그가 왜 ‘이 시대 최고의 문화권력’으로 불리는지를 새삼 일깨워준 사건이었다.
인터뷰는 7월9일 오후 경기도 이천에 있는 그의 집에서 진행됐다. 서가용 사다리까지 있을 정도로 책숲을 이루고 있는 집필실의 서재는 바깥의 더위를 한순간에 잊게 해줄 만큼 서늘했다. 며칠 전 앓던 이 2개를 뺐다는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난 20여 년간 엄청난 분량의 소설을 쓰면서도 가욋일로 시론 독후감 등 다양한 종류의 글을 언론매체에 발표하고 각종 문학상심사위원으로 활약해온 이 왕성한 정력의 작가는 여간해선 남들의 비판에 개의치 않는 대단한 뚝심을 갖고 있다. 타고난 낙천주의자는 아닌 듯싶지만, 자신에게 비판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도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참 나쁜 놈들이네” 하고 껄껄 웃고 넘어간다.
이씨의 이런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요 몇 년 동안 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부쩍 높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가 좋다.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고 예전에 쓴 작품들은 부동의 스테디셀러다.
지난해 10월 동아일보와 여론조사기관 ‘갤럽’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한국 작가로는 이씨가, 외국 작가로는 시드니 셸던이 꼽혔다. 그 이유를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인터뷰의 문을 열었다.
“글쎄요, 다른 말로 하면 인기의 비결이 뭐냐는 것이겠지요? 일종의 자기 분석인데, 전에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글을 쓰되 시류를 겨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통시성을 가진 작품이라는 거지요. 그 다음, 나 자신이 독자라는 사실, 혹은 내가 독자였던 때를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독자였을 때 작가한테 원했던 것을 쓰는 것입니다.”
―예전에 마광수 교수가 이선생의 인기비결이 교양주의라고 분석한 바 있지요.
“그것도 이유가 될지 모르지요. 나 스스로도 어떤 작품을 읽을 때 그것을 통한 교양의 확충을 기대하니까요. 재미라든가 쾌락적 측면이 아닌 지적 기대지요. 마교수 말고도 몇 사람이 그렇게 얘기한 것을 들었습니다.”
―이선생께서는 작품에서는 사회참여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반면 사회적인 이슈가 생길 때마다 언론매체에 등장함으로써 여론형성에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인가요?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없지는 않지만 상황이 나를 그렇게 몰고 가는 경우가 많아요.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어떤 시비거리가 생기면 꼭 나한테 물으러 와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언제부터인가 중대한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내가 곧 끌려 들어가겠다 싶은 예감이 들곤 합니다. 내 지지를 바라는 사람들이 나한테 각자에 유리한 정보를 전해주며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그 시작입니다. 한 10여 년 된 현상입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지지하는 쪽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이상하게 몰리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가게 된다”는 말에서 그의 타고난 ‘전투성’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정권 들어와서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지난해 (중앙일보에) 홍위병 얘기를 한 번 썼죠.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을 거론하며. 이 정권 들어 그때까지 신문에 쓴 칼럼은 그것 하나뿐이에요. 내 기억으로는 (정권 출범 후) 만 2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나는 그 만 2년을 이 정권에 대한 예우기간으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정부가 성립하는 데 정말 도움이 안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다수가 원해 이 정부를 만든 것이니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처음부터 비판하고 나서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조합에 지배되는 신문
―이선생께서는 작가 또는 지식인으로서 정국에 대해 일정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말하자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그 뒤에 벌어질 사태가 추측되고 상상이 됩니다. 그 뒤에 전개될 상황이 끔찍하고 견디지 못할 측면이 있다고 추측되면 쓰지 않을 수 없죠. 이 정부가 들어선 후 (신문에) 시론을 세 개 썼는데 그중 두 개가 홍위병 얘기라. 지난번 조선일보에 나간 칼럼에 빠진 얘기가 하나 있어요. 뭐냐 하면 이걸(세무조사를) 하면 신문이 둘 중에 하나가 되리라는 추론, 하나는 정부에 코가 꿰인 신문이고 또 하나는 사주 없이 다중·우중이 주인인 신문, 말하자면 대자보 같은 신문이 되는 것인데, 둘 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신문의 경우 노동조합 내의 역학관계가 모든 걸 결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춘투(春鬪)인가 추투(秋鬪)인가, 뭐 그런 것의 결과에 따라 신문사의 ‘라인’이 다 바뀐다는 겁니다. 논조는 그 라인의 것이 되고.”
―그런 정도는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예전에 소설심사를 할 때 결심(結審)에서 그걸 소재로 한 작품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싸움에서 승리한 계열이 다 가져가는 걸로 돼 있더군요.”
―사주가 있어 단일한 라인을 가진 신문사와는 달리 다양한 계열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하여튼 지금은 모 신문도 그런 식으로 바뀌는가봐요. 말을 잘못하면 시비 걸릴지도 모르지만, 노동조합의 패권이 그 신문을 좌지우지하는 거죠. 이념투쟁을 통해 패권을 잡는 쪽은 선명성이나 순정성을 중시하고, 선동성과 공격성을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다분히 중우적(衆愚的) 직접민주주의라고 할까, 대중선동에 목표를 둔 논조를 띠게 되죠.”
이씨는 노동조합의 패권에 의해 움직이는 신문으로 2개 신문을 꼽았으나 “(기사에서) 신문사 이름은 빼자”고 제의했다. 이어 “이거 굉장히 예민한 얘기인데,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요?” 하며 기자의 ‘협조’를 구했다.
―이선생을 싫어하는 쪽에선 반발하겠죠.
“그런 신문들에서는 전통적인 논조라는 게 없고 그때그때 구성원들의 세력 향배에 따라 논조가 결정되죠. 그래서 다분히 대자보 같은 신문이 되는 거죠.”
―그 얘기는 곧바로 반론에 부닥치지 않을까요. 뒤집어 말하면 사주가 있는 신문에서만 올바른 논조가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그렇겠죠. 자칫 신문사에 꼭 사주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는데, 그런 뜻은 아니고요.”
―논조의 방향이 옳다면, 또 보도의 객관성을 유지한다면 노동조합이 어떻게 하든 문제될 건 없잖아요? 너무 소유구조에 치우친 논의가 아닐까요?
“논의를 소유구조로 좁힌다면 답이 없어요. 미국 신문들도 그 문제를 안고 있으니까요. 이상적인 것은 그야말로 경영과 편집이 완전히 분리돼 편집이 편집 내부의 이성적 합의에 의해 결정되는 형태겠지요. 그렇지만 그 합의가 노동조합이 관련된 세력투쟁의 결과에서 도출되는 것이라면 다분히 걱정스럽죠. 미국식 소유와 경영의 분리 제도는 우리나라 일부 언론에서 실현된 사원주주제와 다른 것 같던데요.”
―프랑스 르몽드지의 경우 사주가 없는 사원주주제 신문인데, 편집권이 독립돼 있고 세계적인 정론지로 정평이 나 있지 않습니까. 아주 잘된 경우죠. 반면 미국에는 사주가 있으면서도 편집권 독립이 잘 보장된 신문들이 있죠.
“80년대의 후유증인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잘될 거라는 예측은 지금 아무런 위로가 안 되고 현재의 수준이 미덥지 않은 것이 걱정스럽습니다.”
―지금 전개되는 양상에 비춰 말이죠?
“예. 그리고 지금 운동의 양상으로 추구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도 잘 돼가는 데가 있다, 이거죠. 그래서 사주가 있냐 없느냐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씨의 주장 중 압권은 역시 홍위병론이다. 시민단체 등 이른바 개혁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이 이론에 대해 그는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홍위병 이론이 타당성을 갖기 위해선 현재의 혼란상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이 뒷받침돼야겠죠?
“지난 며칠 동안 이번 사태를 정리하며 스스로에게 반문해봤어요. 아직 조짐도 안 보이고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 과민한가 하고. 그랬더니 몇 가지 짚이는 게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1980년대를 휩쓸었던 이른바 운동권, 또는 운동 성향을 가진 젊은층의 의식이에요. 아마도 나는 그들에게서 중국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의 행태를 느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게 몸에 배인 것 같습니다. 한 불안의 형태로.
특히 내가 경계한 것이 뭐냐 하면 첫째, 비전문성에 의한 전문성 억압입니다. 그 다음, 운동의 관성이에요. 즉 한 방향으로 와 하고 밀려가면 멈추지 못하고 계속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구조. 그 다음은 소수에 의한 다수 위장, 그리고 폭력성이에요. 이런 것들이 1980년대를 지나면서, 그리고 당시의 그 세력이 점차 사회 전면에 진출하면서 한층 구체적인 불안으로 자란 것 같습니다.
또 하나, 내가 왜 지금 와서 자꾸 홍위병 얘기를 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이 정권의 성격과 관련돼 있어요. 정치권 상황을 보면 이 정권은 홍위병에 대한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본질적인 문제는 이 정권이 소수정권이라는 데 있습니다. 소수정권이 갈 길은 크게 두 가지밖에 없어요. 정권을 잡은 후 어떤 형태로든 국민을 설득해 다수를 확보하든지, 아니면 다수를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공권력을 잘 활용해 정국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정권은 그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충분할 만큼의 다수를 확보하지 못했어요. 거기에 조직이나 공권력을 활용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제일 활용 가치가 높은 조직이 군대와 경찰인데, 경찰에 대해선 이승만 대통령이 악용한 탓에 사람들의 경계심이 매우 강해요. 군대는 더 해요. 30년 이상 군대가 동원돼 사회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 했잖아요. 검찰이 있다고는 하지만 제가 보기엔 검찰은 한계가 있는 조직이에요. 직접 뛰는 것은 하부조직인 경찰인데다 최종 판결은 또 법원에 맡겨져 있거든요.
다수를 확보하지도 못하고, 공권력도 함부로 휘두를 처지가 못 되니 국정을 운영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유혹을 느낄 수 있죠. 비정규의 조직과 운동성에 대한 유혹. 이런 점 때문에 홍위병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한쪽에는 다분히 홍위병을 닮은 의식과 행태가 분출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모택동, 혹은 임표나 강청처럼 홍위병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권력이 있으니까 불안해하고 앞질러 경고를 보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비전문성에 의한 전문성 억압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를 들면 예술에 정치논리가 개입하는 경우죠. 이데올로기로 예술을 평가하는 겁니다. 예술의 전문성이 정치적 목적에 예속되기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특히 문학 분야에서 그렇다는 건가요.
“1980년대에도 현실정치와는 역으로,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이 그런 억압을 받았을 걸요. 그 결과 특정 이데올로기만 이해한 상태에서 문학을 그 이데올로기로만 재단하는 세력이 적어도 문학판에서는 주류를 이뤘습니다.”
―홍위병이라면 정권과 완전히 한 패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호 교감은 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습니까.
“중국에서도 홍위병은 자발적인 조직으로 출발했지요. 모택동 친위세력과 연계한 것은 북경대회 이후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 교감만 없어요. 딴 건 다 갖춰져 있고.”
다 갖춰져 있고 교감만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좀더 분명한 설명을 요구하자 망설임 없이 얘기를 이어간다.
“교감만 없다는 것은 후하게 말한 겁니다. 사실은 어느 정도 교감이 있으리라고 보죠. 개혁세력으로 자처하는 단체들이 정말 (정부와) 전혀 무관하게 활동해왔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믿기에는 너무 자주 그들의 주장과 정부의 정책이 일치하는 겁니다. 우연치고는 심하지 않습니까? 옛날에 우리가 관변단체들이 벌이는 운동을 싫어했던 것은―옳고 틀린 것과는 상관없어요―그들의 목소리가 늘 정부의 견해와 일치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이 정권에서만 예외를 인정해줄 수는 없지 않겠어요? 또 시민운동은 정부 또는 정치의 빈틈을 보완하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정부가 하는 일에 손뼉 치며 따라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쪽에서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겠죠. 우리는 순수하게 개혁에 대한 열망에서 하는 일인데 그것이 정부 정책과 맞아떨어진 것뿐이라고.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경우도 많은데요?
“있기는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정부를 지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특히 중요한 사안에서는. 시민단체가 반드시 정부에 반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반은 된다거나 (비판하는 경우가) 조금 많아야 하는 것이 원칙 아닌가요? 그런데 정부가 이미 추구하고 있는 일을 시민단체가 또 나서서 떠들썩하게 외치고 다닌다면 이거야말로 옥상옥(屋上屋)이지 않겠어요? 그 사람들을 가장 발끈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말(홍위병)인데, 어딘가 찔리는 데가 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겠어요?”
그가 운영하는 ‘부악문원’의 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서재에 들어오는 바람에 얘기가 잠시 중단됐다. “책이 왔다”고 하자 이씨는 “수취인불명으로 해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그의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벌어진 이른바 ‘책값 환불 논쟁’이 현실로 옮겨진 것이다.
논쟁이 시작된 후 이날까지 일주일 남짓 동안 이씨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오른 글은 7000여 건. 이씨에 대한 지지발언과 욕설과 비방이 뒤엉켜 아수라장이다. 여기에 ‘책값 환불 논쟁’이 덧붙여졌다. 이씨가 “당신한테 실망했으니 책을 반납하겠다”는 한 네티즌에게 “책을 보내면 최고 이율을 붙여 책값을 돌려주겠다”고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이 화근이었다. 즉각 네티즌들의 환불 요구가 쏟아졌다. 이씨는 “내 말뜻을 고의적으로 오해해 사람을 아주 우습게 만들고 있다”며 혀를 찼다.
그가 홈페이지를 개설한 것은 지난해 가을. 한 달에 한 번 꼴로 게시판을 들여다보고 대화방에 들어가 독자들과 채팅을 한다. 처음엔 “괜히 했다 싶을 정도로” 실망스러웠으나 차츰 대화의 질이 나아져 다행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혼자 힘으로는 이메일을 이용하지 못하는 컴맹이다. 인터넷 이용도 “애들을 불러야” 가능하다. 그는 며칠 전 ‘애들’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를 처음 들여다봤다. 추미애 의원 관련기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홍위병에 대한 본능적인 후각은 인터넷 공간에서도 발동된 모양이다.
“인터넷 여론은 홍위병의 특성을 갖고 있어요. 의사전달방식이 충동적이고 공격성이 강하고 과장이 심해요. 익명성이 부추기는 무례 혹은 무모함이라고나 할까. 완전히 ‘황제폐하 만세’의 분위기를 풍깁니다.”
―7월2일자 조선일보 시론이 발단이 됐는데요. MBC 라디오 프로그램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시론 제목이 잘못됐다’고 하셨다면서요?
“신문사에서 그런 제목(‘신문 없는 정부 원하나’)을 뽑았는데, 원래 제목은 ‘기관사들이여 브레이크를 밟아라’이고 또 그것이 옳은 제목이라고 말해줬지요.”
―신문사가 자기네 구미에 맞게끔 제목을 고친 거네요?
“그런 셈이죠. 그런데 보통 시론 제목은 신문사에서 정해요. 저도 어떤 때는 아예 제목을 맡겨버립니다. 일종의 편집권으로 봐서죠. 사실 조선일보만 나무랄 수 없는 것이 동아일보도 어제(7월8일) 그랬거든. 가판 보고 화가 나서 동아일보에 전화했어요. 내가 정한 제목은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였는데 동아일보가 ‘홍위병이 판친다’로 고쳤더군요. 완전히 홍위병으로 단정한 거라. 그래서 ‘이건 안 된다. 지난번에 조선일보 시론도 제목 때문에 욕을 더 봤는데 같은 일을 또 당할 순 없다’고 항의해 원래 제목으로 바꿨어요.”
―글의 논조를 보면 조선일보측이 정한 제목이 그다지 틀린 것 같지는 않은데요.
“글쎄, 적어도 엉뚱한 제목을 붙이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래도 아니죠. 왜냐하면 내가 글 맨 뒤에 덧붙인 두 줄은 가정 아닙니까. 만약 정부와 언론 양쪽이 끝까지 싸운다면 나는 언론 쪽에 선다는 얘기지, 아무런 전제 없이 무조건 어느 한쪽을 편든 건 아니거든요. 원래 제목으로만 보면 양비론이지. 그런데 제목을 그렇게 뽑은 건 고의지요. 언론도 지금 위기감 때문에 균형감각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입니다.”
―시론은 조선일보 요청으로 쓴 겁니까.
“아닙니다. 화가 나서 내가 먼저 시작했어요. 그날(언론사 세무조사결과 발표일) 아침에 TV를 틀어보니 3사가 똑같이 생중계를 하더라고요. 이게 도대체 3개 방송사에서 동시에 1시간씩이나 중계할 일이 되는지 의문이 불쑥 일더군요. 선동의 냄새가 짙었어요. 또 끝날 때도 이상하게 끝나더라고. 이상한 질문이 나오니까 생중계를 끝내더라고요. 보셨어요?
―끝까지는 못 봤습니다.
“나치의 대국민 선전·선동이 생각나 격앙된 상태에서 글을 썼습니다. 처음엔 조선일보에 기고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조선일보는 여러 모로 부담이 돼서요.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다 지난 2월엔 조선일보 후원으로 시베리아에 갔다왔거든요. 그래서 동아일보에 보낼 생각으로 쓰고 있었는데 마침 조선일보 기자한테 원고청탁 전화가 걸려왔어요.”
―어쨌든 사태가 확대되는 데는 추미애 의원이라는 조연이 한몫했지요. 조선일보에 시론이 실린 다음날 민주당 4역회의에서 이선생의 글을 ‘곡학아세’라고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이 이 사건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닌지 모르겠어요. 나보다 더 피해를 입지 않았나 싶어요.”
뜻밖에도(?) 이씨는 추의원에 대해 그다지 분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딱하게’ 여기는 듯싶었다. 언론이 추의원의 취중발언을 보도한 것에 대해 “적절치 않은 일”이라며 허허 웃었다.
“술 취한 상태에서 뭔 얘기를 못하겠어요? 술자리에선 누구나 추의원처럼 욕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까지 기사화한 건 심했어요. 언론의 품위를 깎아 내리는 짓이에요.”
―추의원의 곡학아세론은 사실 이선생만 두고 한 얘기는 아닙니다. ‘야당이 합법적인 세무조사를 언론탄압으로 몰고 가는데, 반정부적인 논조를 펴는 지식인들이 지면에 등장해 그에 동조하는 건 거대언론을 포함한 이른바 수구기득권 세력에 영합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죠.
“추의원의 말은 나한테 조금도 상처를 주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세무조사가 국가의 정당한 권리행사라는 말이잖아요. 그런 논리야말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논리거든요. 가장 단순한 논리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정치적 폭력, 억압을 생각해보세요. 언제 폭력이다, 억압이다 하는 것 봤어요? 5공 정권이 저지른 어떤 나쁜 일, 유신시대에 행해진 어떤 폭력, 어떤 억압도 당시엔 다 정당한 법 집행으로 포장했습니다. 이번 세무조사는 의도도 수상쩍은 데다 방식도 공정하지 않아요.”
―현 정부에 비판적인 메이저 신문들이 표적이 됐다는 거죠?
“그렇죠.”
이씨는 특히 방송이 신문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을 문제삼았다.
“하나는 백조처럼 희고 하나는 까마귀처럼 검을 리가 없죠. 어떤 특정한 종류의 비리만 겨냥한 듯한 느낌이에요.”
―국세청 발표대로라면 조선·동아의 경우 전체 추징세액 가운데 사주일가의 추징세액이 절반에 이릅니다.
“하긴 신문사의 사주 부분은 좀 딱해요. 사주의 편집권 침해나 탈세 부분은 만약 지금의 발표대로라면 변론이 어려울 거란 말입니다. 기자들도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다고 짐작돼요. 그러나 제한된 시론에서 사주 문제까지 짚을 수는 없었습니다. 또 그 문제를 언급하면 ‘이판사판의 충돌은 안 된다’라는 주장이 약화될 수도 있고. 내가 아무리 (언론) 편을 들려고 해도 그 문제에 대한 논리는 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언론사 세무조사가 형벌 불소급 및 사후법(事後法) 금지 원칙에 어긋난다며 ‘법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강조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법의 함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많건 적건 법의 이름으로 언제든 처벌될 수 있어요. 법 위반행위 중엔 하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라 죄의식조차 없는 것도 많습니다. 재미있는 예를 들자면 지금 대부분의 산부인과 의사들과 우리나라 여자들 몇백만명을 일거에 감옥에 넣을 수 있는 죄가 하나 있습니다. 낙태죄. 그건 분명히 큰 죄예요. 하지만 수십 년째 죄가 아닌 것으로 인식돼 죄의식도 없이 저질러져 왔어요. 그런데 갑자기 낙태죄를 엄격히 적용해 아직 소멸시효가 끝나지 않은 모든 범법자를 잡아들인다면 아마 이상한 혼란이 일어날 겁니다.
사주의 비리혐의 중엔 당시에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당연하게 여긴 것도 있을 거란 뜻에서 해본 얘깁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두 전직 대통령을 잡아들이며 ‘역사바로세우기’를 할 때 내 형량을 따져보니 나도 한 15년 정도는 살아야 되겠더군요. 왜냐하면 나는 경제사범에 정치사범이었기 때문이죠. 전두환·노태우가 반란을 일으켰다는데, 그러면 종범은 누구냐. 엄격히 법을 적용하면 반란을 지켜보며 묵시의 동의를 한 사람도 종범이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투표장에 나가 사후 승인을 했으니까. 어쩌면 그때 저항하거나 징역 가거나 맞아죽은 사람 빼고는 다 종범일지 몰라요. 그 정권에 세금 내고, 때로는 안정논리로 부화(附和)까지 한 나는 거의 빠져나갈 길이 없고.
경제 분야도 그래요. 나도 옛날에 집 살 때 말이죠. 돈 모자라면 은행에서 돈 빌렸는데, 비록 뇌물 봉투는 안 줬지만 도와준 친구에게 나중에 술 한잔 샀어요. 그런데 향응도 뇌물 아닙니까. 그렇게 보면 나는 뇌물 주고 은행돈을 많이 빌린 셈입니다. 한 다섯 번 이상 빌렸을 거예요. 부동산투기도 했어요. 바로 이 ‘부악문원’을 지은 땅도 투기꾼 방식대로 산 땅이라. 왜냐하면 그때(84년) 내가 서울에 살면서 주민등록만 옮겨서 샀거든. 그것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나중에 투기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집필실을 지은 후에는 주민등록을 그대로 두고 죽 여기서 살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땐 분명히 불법이었을 겁니다.”
―그런 식으로 꼬리를 늘이면 법 집행 기준이 모호해지지 않겠어요?
“세무조사에 대한 인식이 문제입니다. 우리 세대의 경우 세무조사를 처벌의 일종으로 인식하거든요. 왜냐 하면 현실적으로 모든 기업에 대해 세무조사를 할 수는 없는 데다, 5년마다 할 수 있다는 거지 꼭 해야 한다고 규정된 것은 아니거든요. 모든 기업을 다 조사하려면 세무직원 수가 지금보다 10배는 돼야 될 거예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어느 기업이든 세무조사 들어가면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세무조사라는 ‘희한한 사건’
―언론사 세무조사에 찬성하는 언론학자들이나 시민단체 주장은 어떻게 보세요?
“원칙은 참 좋은 것이지만 그게 다른 목적으로 악용되면 세상에 그보다 더 무서운 일도 없을 겁니다.”
―문민정부 때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여러 모로 비교가 됩니다. 그때는 조사결과를 땅에 묻어버렸어요. 추징도 하지 않았고. 그게 잘한 일일까요?
“YS 때는 지금처럼 심각하게 충돌하지 않았어요. 신문의 대응도 그때는 ‘까짓것 하면 당하지’ 하는 정도였지, ‘한번 붙어보자’ 하는 식은 아니었어요. 그게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해요. YS도 ‘너희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고. 그런데 이번에는, 세 신문 모두 그 조짐을 알면서도 ‘하려면 해라, 한번 붙어보자’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어요. 정부도 끝까지 밀고 갈 기세고.”
이씨는 세무조사 결과를 공개한 것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았다. 다만 ‘의도’와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아울러 ‘시기’도.
“어제 박희태 의원이 말한 대로 시기도 기분 나빠요. 왜 (정권) 초기에 안 하고 지금 하느냐는 의문입니다. 이 정권의 임기가 1년 반이 채 안 남았단 말이죠. 소박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우리 대통령은 사람으로서 더 이상 가질 게 없을 만큼 많은 걸 성취한 분입니다. 민주투사의 상징에서 국가원수가 됐지요. 그것도 가장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또 정확한 평가는 유보해야겠지만 IMF 위기를 극복했어요. 남은 임기를 무난히 채우기만 해도 역사에 남는 큰 실책은 없을 거예요. 그런데 정권 말기에 굳이 위험한 모험을 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죠. 그게 굉장히 불길하고 기분이 안 좋아요.”
―어떤 배경이 있다고 보십니까?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겠죠.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합리성이 끼어 들었거나, 완전하게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섰거나.”
‘방어’만 하는 것이 성에 차지 않는지 그가 돌연 ‘공격’을 감행한다. “조기자가 보기에는 어때요? 왜 지금 (세무조사를) 했을까요?”
―글쎄요. 정치 상식으로 보면 대선을 앞두고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것은 뜻밖의 일이죠.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설사 가능성이 높다 하더라도 언론 협조를 끌고 가는 게 정상이거든요.
“그러니까 언론 지원을 받지 않아도 있다는 거지,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과연 그것이 뭘까요?”
―빅3 신문에서 말하는 이른바 언론재편 기도일까요?
“그런데 동아일보만 해도 당장은 꿋꿋이 버티고 있잖아요? 듣기로는 언론이 2차, 3차의 배수진까지 치고 있다는데.”
―정부 의도대로라면 기가 꺾여야 하는데, 기가 꺾이기는커녕 이판사판의 결전 분위기예요.
“그렇죠. 그러면 저쪽도 이판사판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내가 (조선일보 시론에서)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라는 말을 쓴 거예요. 아마도 우리가 이해 못할 불합리성이 있다면 이런 상상도 가능할 거예요. 그들이 진정 개혁의 화신이라면 ‘우리가 이 일에 실패해 정권이 넘어가고 역사에서 죽어도 상관없다. 어쨌든 언론은 개혁해야겠다’, 뭐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지요. 좀 황당하기는 해도 그렇다면 차라리 이해는 되지요.”
이씨는 “어쨌든 참 희한한 사건”이라는 말로 세무조사의 배경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정권의 의도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죠. 그런데 조선일보 기고에서 방송사가 세무조사발표를 생방송한 것을 두고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한 나치의 선전·선동에 비유하셨죠?
“방송을 통한 대국민 선전·선동을 지적한 거죠.”
―그건 지나친 표현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유태인 학살이라는 범인류 차원의 범죄와 언론사 세무조사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요.
“글의 인상을 강화하려다 보니 좀 과장됐어요. 그러나 그날 내 기분은 그랬어요. 국세청의 한 관리가 세무조사결과를 공개하고 고발하는 장면을 3개 방송사가 다 생중계를 하다니. 대중매체 동원수법을 보고 절로 그런 생각이 든 거죠. 그런데 듣고 보니 나치라는 표현은 좀 과했던 것 같습니다.”
―언론이 반성할 점은 없겠습니까?
“사실 문화계 쪽에서도 우려하는 바가 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줄 리바이어던이 있다면 바로 거대언론이지 않을까 하는. 정치권력이 문화에 폭력을 행사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봐요. 그런데 거대언론은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언젠가는 대응할 마땅한 수단도 없는 리바이어던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요. 그래서 언론이 무조건 크기만을 기대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토머스 홉스가 말한 리바이어던 말이죠?
“홉스는 그것을 국가라고 했는데, 국가의 공권력이 문화를 억압하는 기능은 점점 제한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씨는 “앞으로 언론의 힘이 더 비대해지면 정반대로 언론과 싸울 일이 생기리라는 것을 강하게 예감하고 있다”며 언론의 권력화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언론의 자유와 언론기업의 자유를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가 안 돼 있듯이 언론의 자유와 언론기업의 자유가 얽혀 있습니다. 언론기업을 압박하면 언론자유도 위축됩니다. 원칙대로 하면 범법은 처벌받아야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 둘의 관계가 워낙 밀접해 간단치 않은 상황입니다.”
―조선일보 기자들이 국세청 발표를 이틀 앞두고 정권과의 투쟁을 선언하는 성명서를 냈습니다.
“그걸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자기 반성이 빠져서. 동아는 자기 반성을 넣었던가요?”
―아니, 동아 기자총회에서는 아직 성명서를 내지 않았어요.
“동아 기자들이 온당했다고 봐요. 조선 기자들의 성명서를 보면서 왜 자성이 빠졌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되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맞서겠다, 이래야 맞지. 우리는 완전히 결백한데 저 악당이 나를 친다는 식은 곤란하죠. 내 생각에 그건 실수다 싶더라고. 하기는 내 시론도 그런 측면이 있죠. 내가 거기서 언론사의 반성을 촉구했다면 정부를 비판하는 힘이 그만큼 떨어졌을 거예요. 그런 고려에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기들 내부에서만큼은 그런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국민의 상당수가 언론사 세무조사의 당위성에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난 여론조사 결과에도 이씨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런 여론조사입니다. 대중에게 질문을 던지면, 특히 특권층이나 기득권층에 관한 부분에 대해 물으면 답이 뻔해요. 그것은 좌파적, 사회주의적 힘의 영원한 기반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이 바뀌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다고 칩시다. 만약 모든 사람을 줄 세워 의사를 확인한다면 맨 뒤에서부터 49등까지만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야 이치에 맞아요. 왜냐, 51등부터는 (세상이) 바뀌면 손해니까. 그런데 실제 조사를 해보면 뒤에서 70등까지 그 수가 늘어납니다. 70등은 자기 뒤에 있는 69명을 보지 않아요. 단지 자기 앞에 서 있는 30명이 싫은 거지요. 마찬가지로 일부 신문사는 돈 많고 떵떵거리는 특권층이라는 인식이 사람들 마음속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론조사결과는 정확하다고 봐요. 질문방식에 문제가 있다면 몰라도.”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언론개혁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습니다. 이선생께서 홍위병이라고 지칭한 세력은 이 정권 초기부터 꾸준히 언론개혁을 부르짖어 왔습니다.
“그것도 이상해요. 제 책 반품논쟁과 비슷한 얘기인데, 어차피 신문도 상품이잖아요. 문화상품이죠. 상품은 상품의 원리가 있어요. 이번에 드러난 납세부정 같은 것은 어차피 바로잡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논조가 나쁘다고 그 신문을 보지 말라고 하고, 신문사 앞에까지 가서 구독반대시위를 한다는 건 좀….”
원칙의 악용이 싫다
―안티조선운동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 그건 업무방해 아니에요?”
―그걸 소비자운동이라고 주장하지요.
“그게 어째서 소비자운동이에요?”
―같은 논리라니까요. 신문을 상품으로 보기 때문에, 그리고 불량품이라고 판단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신문뿐이겠습니까. 그 논리대로라면 문화라는 게 어떻게 존재하겠어요? 그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몹시 오만한 계몽자들이에요. 독자들에게 ‘이 신문, 나쁜 신문이다. 그거 모르나. 알아줘 알아줘’ 하고 떠드는 건데, 그건 대중을 무시하는 겁니다. 국민 교육수준이 우리처럼 높은 나라도 없을 겁니다. 겉보기에는 냄비처럼 파르르 끓어오르고,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일 때 균형감각을 회복하거나 자정능력을 발휘하는 걸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씨는 골초에 가까웠다. 10분 간격으로 담배를 물었다. 아래채에서 그의 부인이 수박과 케이크를 내왔는데, 그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결국 언론개혁 주장에는 전혀 공감하지 않으십니까.
“적어도 지금 사태를 봐서는요. 하지만 앞으로 언론이 우리를 가장 억압하는 리바이어던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분명히 갖고 있어요.”
―그렇다면 언론에도 개혁해야 할 점이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첫째는 언론의 특권의식이 문제예요. 지나친 말인지 모르지만 언론의 자신감이 너무 강해요. 거의 못할 것이 없다는 식이에요. 지금도 대통령이 화가 나 떠드는데도 고개 한번 까딱하지 않고 목에 힘 주는 것 보세요. 그 정도로 자기들 힘을 과신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힘이라는 것은 독자한테서 나오는 것이지요. 독자가 안 떨어져 나가니까 힘이 있는 것이지 독자가 다 떨어져 나가면 어디서 힘이 나오겠어요? 독자의 무서움을 알아야 해요. 언론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교훈자, 계몽자로서의 역할은 좋지만 그것을 넘어 조작자가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 다음, 언론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여러 가지 임무 또는 책임이 있을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은 여러 차례 어려운 시기를 겪어서인지 기자들이 독특한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일종의 사명감이지요. 그런데 요즘엔 그런 기자정신이 좀 퇴색하지 않았나 싶어요.”
―언론사 소유지분을 제한하는 정간법 개정안이나 소유와 경영의 분리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가야죠. 결국은 그렇게 될 걸요. 다만 이런 시기에 이런 형태로 진행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또 검증되지도 않은 몇몇 젊은 사람들이 운동 차원에서 그런 주장을 펴거나 별로 미덥지 않은 사람들이 나서서 ‘내가 가니까 너희는 따라와’ 하면 일단 반감부터 갖게 되는 거죠.”
―어쨌든 정권의 의도와 맞물려 세무조사의 시기와 방식을 문제삼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언론개혁에 대해선 찬성하신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죠. 그건 원칙이죠. 그런데 그 원칙이 악용된다는 기분이 들어요. 내가 못 견디는 것이 바로 원칙이 악용되는 사회예요.”
인터뷰를 시작한 지 세 시간 가까이 지났다. 간헐적으로 셔터를 눌러대던 사진기자가 옆구리를 찔렀다. 햇볕 좋을 때 밖에 나가서 한판 찍자는 제의였다. 뒤뜰로 나갔다. 바랜 금빛으로 출렁이는 잔디밭 한 구석에 커다란 가마솥이 놓여 있고 그 주변에 나무등걸 3개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씨는 사진기자의 ‘지시’에 따라 그 중 하나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기자가 앉은 등걸이 더 높은 탓에 이씨를 내려다보는 형국이라 부자연스러웠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언론사 세무조사를 맞아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 이를테면 개혁 대 보수의 충돌이 정점에 이른 듯한 느낌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부가 소신 있게 정책을 펴기에 충분한 다수를 확보하지 못한 데 있어요. 국민들이 다 정부를 좋아하면 언론도 그에 맞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권이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하니 언론도 국민 눈치를 보고 비협조적이거나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는 거지요. 소수 정권의 한계랄까요. 언론이 공연히 그러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시장논리인데, 영남권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정권을 조진다는 비판이 그래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남이니 호남이니 하는 지역적인 구분은 적절하지 못하지만, 시장논리라는 말에는 동의합니다. 나도 그렇게 봐요. 사실은 심각한 이념논쟁이나 정치적 문제를 떠나 문제의 본질은 언론의 시장논리와 소수정권의 한계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늘 다수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흘러가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죠.”
―그렇다면 언론이 시장논리에만 충실한 것은 문제지요?
“그것도 그렇지만, 사실 문제의 근원은 우리 사회에서 양적인 팽창과 질적인 향상이 중단됐다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는 좌우로 나뉘기도 하고 진보대 보수로 나뉘기도 하는데, 이 구도는 사회가 양적인 팽창을 멈추면서 생긴 정체와 적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지난 60, 70년대 우리 사회는 지속적으로 팽창해왔어요. 그런데 80년대 들어 팽창의 속도가 떨어지고 정체와 적체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제5공화국 시절에 마지막 팽창이 있었는데, 그 정권이 끝나고 나선 계속 휘청거리다 결정적으로 IMF를 맞아 아예 팽창이 축소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지금 겉으로 드러나는 대립의 밑바닥에는 바로 경제적 정체와 인사의 적체에 따른 불만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이씨는 군대와 언론계, 학계의 사정을 예로 들며 우리 사회의 정체와 적체현상을 한참 동안 설명했다. 그런데 모기 때문에 그의 얘기를 더 들어줄 수 없었다. 허벅지와 엉덩이를 물린 기자가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자 그는 “하던 얘기를 마저 끝내자”며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조금 더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제서야 일어서며 태평스럽게 말했다. “거 참 모기가 있어요? 나는 하나도 안 물렸는데.”
서재로 들어가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그에 따르면 이 정권의 지지기반은 “80년대에 구체적이고 대량으로 분출된 불만세력”이다.
―기득권층이나 기성세대에 불만이 쌓인 사람들이란 말이죠?
“그렇죠. 양적 팽창은 다른 말로 하면 발전입니다. 그들이 기성세대에게 ‘당신들이 잘못해 발전이 중단됐으니, 혹은 사회구조가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으니 이제 우리가 나서서 해보겠다’고 말하며 전면에 나선 것이죠. 그들이 지적하는 잘못은 주로 정치적인 부분, 특히 개발독재와의 야합이에요. 기성세대 혹은 보수세력의 방패막이는 경제적 성취였습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에 IMF 사태가 터지자 그마저 무너졌지요. 이제 개혁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대전제가 돼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진보니 보수니, 개혁이니 반개혁이니 해서 벌어지는 대결구도의 밑바닥에는 대북정책과 통일에 대한 시각차이도 있지 않습니까.
“수구세력 또는 반통일세력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DJ의 정책을 반대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햇볕정책은 이솝의 우화에서 따온 것이지만 그리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 같아요. 나그네가 햇볕이 자기 옷을 벗기려는 의도를 알았다면 절대 옷을 벗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건 방법론적인 문제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소수정권의 한계입니다. 이 정권은 그토록 노력하고 애썼음에도 아직 정책수행에 필요한 절대다수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현 상황에서 이 정권이 다수를 확보할 방안은 크게 두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북한카드를 활용해 우리 내부에서 다수를 확보하는 것인데, 한나라당이 의심하는 게 바로 이거죠. 그런데 이른바 극우반동들은 그 이상을 의심하고 있어요. 우리 내부에서 다수를 확보하기가 힘드니까 북한 쪽을 수에 포함시킬 생각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씨는 말해놓고 나서 지나쳤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말을 너무 함부로 하나” 하며 기자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모든 걸 소수정권의 한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시는군요.
“현재 첨예하게 드러난 갈등의 뿌리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통일을 열망하는 젊은 세대나 진보세력이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건 정권의 다수확보 의도와는 상관없는 일 아닐까요?
“아마 홍위병의 특징이 바로 그런 점일 겁니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의 행동은 모택동의 권력욕과 맞아떨어졌어요. 하지만 그들의 의식은 대부분 순수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민의 적을 처단하고 자본주의추구세력을 몰아내고 중국을 발전시킨다는 사명감에서 뛰었지, 권력을 쳐다보고 움직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일련의 대북정책 성과를 휘황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이 정권을 역대 정권과 변별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아요. 72년 7·4 공동성명이 나왔을 때의 충격은 6·15 남북정상회담 때보다 훨씬 컸어요. 나만 해도 세상이 달라진 줄 알았어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당시로서는 대공정책의 총수가, 평양에 가 동족상잔의 원흉인 김일성과 악수를 하고 왔단 말이에요. 놀라도 깜짝 놀랄 일이죠. 그러나 정권은 그 감동과 감격을 몇 개월 후 유신을 선포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아마도 기성세대의 대부분은 ‘두고보자’는 심정일 겁니다. 이번에도 옛날처럼 통일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지. 즉 다수 확보나 정권연장 카드로 이용하는지 안 하는지.”
이씨의 ‘보수적인’ 대북관과 관련해 일부 비판론자는 ‘빨갱이 콤플렉스’를 거론하기도 한다. 6·25 때 월북한 아버지를 둔 이씨가 공산주의에 대한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는 추론이다. 2년 전 언론은 그의 아버지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느라 부산을 떨기도 했다. 이씨는 이와 관련된 질문을 대수롭잖게 받았다.
“그건 추미애 의원이 한 오해보다 더 큰 오해예요. 아마 젊었을 땐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몰라요.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으니까. 그 근처에도 안 갔죠. 그런데 지금은 범죄 증거를 잡은 후에 갖게 되는 확고한 믿음 같은 것을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여기서 많은 걸 버리고 그쪽을 선택한 분이라 그쪽에 가서는 잘 사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기대와 달리 비참하게 살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솔직히 북에 대한 감정이 좋지는 않아요. 이건 레드 콤플렉스와는 상관없어요.”
또다시 ‘반품’이 도착한 모양이다. 현관 밖에서 “또 왔는데요”라는 소리가 들리자 이씨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저런 게 지금까지 세 개째 왔는데, 개인이 집에 보관하고 있던 책이 아닌 것 같아요. 사과상자에 50권씩 담아 보내고 있다고요. 실제로는 환불이 안 된다는 걸 잘 알 텐데 이런 짓을 해요. 조리와 상식에도 안 맞고. 개별적으로 저한테 허락을 받은 적도 없고. 지금까지 제 책이 2500만부 팔렸는데 그거 다 환불하려면 수백억이에요, 수백억.”
―이선생 작품의 경향을 보면요. 탈이데올로기 성향이라고 할까요. ‘영웅시대’를 비롯해 이념 대립이 빚어낸 인간성의 파괴에 주목하는 작품이 많지요?
“나는 인간들이 무슨 주의니 원칙이니 원리니 하면서 모여서 떠드는 게 딱 싫어요. 집단, 특히 집단히스테리에 대한 극단의 공포와 혐오가 있어요.”
―양극단을 싫어하는 중도지향적인 성향이지요? 이선생 작품을 저도 적지 않게 읽었는데, 예전에 읽은 것 중 ‘칼레파 타칼라’가 생각나는데요.
“맞아요.”
―복고주의나 회귀성도 강하잖아요? ‘황제를 위하여’나 ‘시인’ ‘선택’ 같은 작품을 보면.
“‘황제를 위하여’는 동양적인 가치를 얘기하다보니 복고적 냄새를 풍겼는지 모르겠는데, 실은 양극단에 대한 빈정거림이에요. 기독교, 공산주의, 현대 산업 등을 빈정거린 거지요. 복고적 경향이라 할 만한 건 ‘선택’ 정도인데, 좀 예외적인 작품이죠.”
―어쨌든 새로운 경향이나 시류에 신뢰를 보내지 않는 편이지요?
“의심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 성향 때문에 현 정부와 잘 맞지 않는 건 아닙니까. 현 정부가 워낙 ‘개혁’ ‘개혁’ 하잖아요.
“개혁이야 김영삼 대통령은 안하고, 노태우 대통령은 안 했습니까.”
―세 정권이 차이가 없다고 보십니까.
“차이는 있죠. 주도세력이 다르니까.”
이럴 때 이씨는 지독한 냉소주의자로 보인다. 그는 무엇이든 ‘중도’를 벗어나거나 열정이 돋보이면 신뢰하지 않을 뿐더러 위험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YS 정권은 이 정권과는 달리 광범위한 지지층을 업고 출발했지만 개혁에 실패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 보세요?
“너무 ‘개혁’ ‘개혁’ 하는 게 사람들한테 편안함을 주지 못했는지도 모르지요. 그 개혁의 내용이 때로는 소급형(遡及刑)이나 사후법에 의한 처벌 같은 효과를 가진 것도 있었고….”
―이선생께서 싫어하는 강준만 교수가 최근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라는 책에서 그 비슷한 얘기를 했어요. 국민들은 겉으론 개혁을 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자신의 안전에 위협을 주는 경우엔 거부감을 갖는다는 것이죠.
“싫어한다기보다는 이해가 잘 안 돼서…. 어쨌든 국민들이 본질적으로 불편한 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는 옳게 본 것 같군요.”
―결국 마음 따로 몸 따로 논다는 얘기인데, 그게 좋은 건 아니잖아요? 개혁할 건 해야지요.
“물론 해야지요. 하지만 개혁을 위한 개혁이 망쳐요. 개혁의 원리가 악용돼선 안 되고, 주체세력의 사명감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주체세력의 사명감도 미덥지 않고, 원리도 악용되는 경향이 있어요. 이러면 별로 기대할 게 없지요.”
―이선생께서는 생래적으로 변혁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수도 있죠. 웃기는 게,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적이라는 말을 욕설처럼 씁니다. 보수의 개념이 이상하게 자리잡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보수주의자로 자처하는 경우 그 사람이 과거에 나쁜 짓을 했으니 보수는 나쁜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되지요. 외국에서는 보수주의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경우가 많아요. 프랑스에서 내가 몇몇 지식인들에게 보수주의자가 주는 인상을 물어본 적이 있어요. 뜻밖에도 진지한 사람, 심각한 사람, 성실한 사람 등 우호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던데요. 미국에서도 물어보았는데 반타작은 한 걸로 기억해요.”
―국가보안법 개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사회가 건강하려면 좌파와 진보세력이 있어야, 그것도 많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그것을 무리한 주장으로 보는 이유는 남한 사회만 놓고 본다면 그 말이 옳을지 모르지만 한반도 차원에서 본다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방 직후 북한은 좌와 진보를 체제의 원리로 선점했고, 남한은 부득이하게 우와 보수를 떠맡았어요. 거칠게 말하면 좌와 우, 진보와 보수로 한반도가 분리된 셈이지요. 남한에서 우를 다시 쪼개 그 반을 좌로 만들면 결국 우는 4분의 1만 남는 거예요. 그러면 북한도 좌를 쪼개 반은 우로 만들어야 균형이 맞지, 북한은 놔둔 상태에서 남한만 반을 내주자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남한만을 생각할게 아니라 한반도 차원에서 봐야죠.”
―이선생의 소수정권 논리에 따르면 이 정권은 어찌 보면 탄생부터 불행했다는 것 아닙니까? 하는 것마다 다 그 논리에 걸리잖아요?
“내 말뜻은 개혁도 중요하지만 개혁을 하기 위해선 진정한 다수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죠. 처음에 나는 이 정권이 노동자·하층민을 끌어들여 한국판 페로니즘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의심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튼 개혁에만 의지해 다수를 확보하려 한 것이 무리가 아니었나 싶어요.”
다시 홍위병 이론이 화제가 됐다. 어느순간 질문자와 답변자가 뒤바뀌었다. 그가 물었다.
“시민운동이라는 것에 진정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어느 정도 있다고 봅니다.”
그가 실망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낙선운동도 필요한 거라고 보십니까. 거기에도 진정성이 있을까요?”
“꼭 정치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는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낙천·낙선운동의 문제점과 폐해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대상자 선정기준이 한나라당과 같은 구 정치세력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이었으며 운동의 실효도 없었다는 것이 그 요지. 그에 따르면 오히려 ‘초원복집 효과’를 내는 바람에 한나라당이 대구·경북 지역을 싹쓸이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당시 총선시민연대의 운영비와 활동비 출처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한마디로 시민단체들의 주장이나 활동을 신뢰하시지 않는 것이죠?
“예.”
그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혼란상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우리 사회의 분열이라는 것이 나를 굉장히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어요. 예전에도 갈등은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선명하게 분열돼 싸우고 있어요. 왜 이렇게 분열이 나타나는지 나도 아직 정리가 안 돼요. 80년대부터 쌓인 것이 폭발한 것인지, 아니면 지금 어떤 필요에 의해 분열이 심화되는 건 아닌지.”
‘필요에 의한 분열’이라니? 기자는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필요에 의한 분열이라면?
“음모론적인 시각에서 보면 사회가 분열돼 있으면 통치하기가 좋죠. 하지만 정치의 궁극적인 지향은 사회통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분열상, 난맥상이 심하고 갈등의 골이 깊으니 걱정입니다. 내가 이 정권에 가장 크게 기대한 것은 바로 지역감정 치유였어요. 이 정권의 출현으로 우리 사회의 큰 상처인 지역감정 문제가 좀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이쪽은 이쪽대로 불만이 많고… 성이 안 차는 거지요. 저쪽은 저쪽대로 부채의식이나 미안한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너희도 이제 해봤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런데 이쪽은 이쪽대로 ‘우리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욕만 얻어먹고 있다’고 말합니다. 더 심화된 것 같아요.”
―지금 워낙 대립이 심하니까 그렇게 보이지만,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낫지 않을까요?
“나도 (이 정권의 출현이) 지역감정 해소에 도움이 되길 바래요. 며칠 전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희들끼리 치고 받는데, ‘전라도 개땅쇠야’ ‘경상도 문둥이야’ 하며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욕설이 난무해요. (논쟁이 시작된 지) 이틀만에 바로 지역감정으로 번진 겁니다. 내가 오죽했으면 경고 메시지를 띄웠겠어요? 게시판에 들어와 나를 욕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욕하라, 그러나 지역감정만은 안 된다, 그리고 계속 이런 종류의 글이 올라오면 게시판을 폐쇄하겠다고 경고한 겁니다.”
이씨는 이번 일을 겪으며 지역감정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실감한 듯했다. “경제나 정치보다 훨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지역감정”이라며 탄식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언론문제의 해결방안을 물어봤다.
“내가 언론 문제에 대해 과격하게 의사를 표현한 것은 언론이 정부에 비해 약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더 양보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이판사판으로 가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언론은 자성을 보이고 정부는 보다 많은 양보를 해야지요. 언론이 굽히지 않는 바람에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적절한 합의점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치가들이 지혜를 모아야지요. 나 같은 글쟁이는 옆에서 구경하다가 어떤 양상을 해석하거나 정서적인 편들기나 할 뿐입니다. 해결을 찾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 인식이지요. 그런데 지금 정치권이 움직이는 양상을 보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양쪽이 전혀 상반되게 인식하는 것 같아요. 지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는 탁월한 정치력이 발휘돼야 할 시기예요.”
이씨는 네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내내 열정적이었고 진지했다. 그리고 난처함이나 곤혹스러움, 자신 없음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적’이었다.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때요? 내 얘기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같습니까. 아니면 횡설수설하긴 해도 나름대로 논리를 가진 것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