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서울 도심의 숨은 명당 ‘안국동 8번지’

해위(海葦) 윤보선(尹潽善) 고택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입력2005-04-11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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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수적 기운이 짱짱한 화강암 지반의 종로구 일대, 특히 안국동 지역은 서울의 대표적 명당터. 그중 ‘안국동 8번지’ 윤보선 고택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명택이다. 한국 정치의 산실이라고도 불리는 이 고택을 처음으로 낱낱이 밝힌다.
    서울 도심의 숨은 명당 ‘안국동 8번지’
    서울은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반도의 중심으로 우뚝 선 도시다. 현재 한국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200만 가량의 인구가 살고 있는 메트로폴리탄이기도 하다. 시간적으로는 600년의 역사가 축적되어 있고, 공간적으로는 1200만이라는 대규모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세계적인 도시 서울.

    그 서울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과연 어떤 집을 꼽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분야의 원로들에게 자문한 결과, 정치인 이종찬씨 집안과 윤보선 전대통령 집안을 꼽았다(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음).

    이종찬씨 집안은 선조 때 인물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직계 후손으로서 8대에 걸쳐 내리 판서를 배출하였고, 대대로 서울에서 거주하며 삼한갑족(三韓甲族)이란 소리를 들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이시영(李始榮),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서 최근 조명받고 있는 이회영(李會榮) 형제가 모두 이 집안 사람들이다.

    또 윤보선 전대통령 집안은 단지 대통령을 배출했기 때문에 명문가로 지목되는 것이 아니다. 근·현대사에서 활약한 이 집안 윤씨들이 한국인명사전에 무려 50여 명이나 등재돼 있기 때문이다. 한 집안에서 이렇게 많은 인물을 배출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씨 집안은 아쉽게도 고택이 남아 있지 않고, 윤씨 집안은 다행히 고택이 남아 있다. 그 집이 바로 종로구 안국동 8번지에 위치한 해위 윤보선(1897∼1990) 고택이다. 그러니까 윤보선 고택은 1200만 인구가 살고 있는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명택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외부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고택

    고택 풍수에 관심 있는 필자로서는 진작부터 한 번 구경해보고 싶은 집이 바로 이 집이었다. 그러나 윤보선 고택은 연고가 없는 외부인이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한국의 이름난 고택들은 대체로 외부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편이지만, 이 집만큼은 예외였던 것이다. 그동안 TV 방송국을 비롯한 언론 매체들도 수차례 취재 또는 촬영을 시도했지만 집 주인의 허락이 나지 않아서 실패하고 말았다.

    현재 이 고택 안채에서 장손 가족이 살림을 하고 있으므로 찾아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살고 있는 안방 모습을 공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집 주인은 윤보선 전대통령의 장남인 윤상구(尹商求·53)씨. 개인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교회 장로를 맡고 있다는 간단한 신상만 밝힌다. 조용한 성품이어서 남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할 뿐만 아니라, 언론에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은 더더구나 기피한다. 사실 명문가 후손은 언론에 노출될수록 돌아오는 것은 사생활의 제약이다.

    다행히 필자는 윤상구씨로부터 취재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인터뷰는 하지 않고 고택에 대한 사진 촬영만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고택 내력에 관한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은 컴퓨터 통신인 이메일로 주고 받았다. 필자가 이 집에 대한 참고자료로 이용한 것은 한옥 전문가인 신영훈씨가 1991년에 취재한 ‘한국의 종가집’이란 잡지 연재물 뿐이다.

    원래 이 집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쯤인 구한말에 민씨 성을 가진 대감이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인품이 훌륭해서 ‘민부처’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이었다.

    그가 장안의 유명한 도편수를 동원해서 99칸이 넘는 거대한 규모의 저택을 짓는다는 소문이 임금인 고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고종이 민부처를 소환하여 “네가 대궐만큼이나 큰 집을 짓는다고 하는데 반역할 의사가 있느냐”하고 추궁하였다고 한다. 이때 민부처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이 집은 부처가 살 집입니다”라고 하였다나. 부처가 살 집이라는 것은 불교 사찰을 의미하고, 사찰이라면 당연히 크게 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동시에 자신의 별명이 부처이니 자기가 살 집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그의 재치있는 답변에 고종도 파안대소하고 그냥 넘어갔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 박영효 대감이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하여 적당한 거처를 마련할 수 없었는데, 고종이 민부처를 불러 박영효 대감에게 집을 넘겨주라고 명령을 내려 박영효(1861∼1939)가 얼마간 살았다고 한다.

    담장 하나 사이로 붙어 있는 옆집은 ‘열하일기(熱河日記)’와 ‘허생전(‘許生傳)’의 저자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그의 손자로서 개화파의 수장격이었던 박규수(朴珪壽, 1807∼1876)가 살던 집이다. 우리나라에 몇 그루밖에 없는 백송(白松)이 아직 그 터를 지키고 있다. 현재는 헌법재판소로 바뀌었다.

    개화기 역사를 보면 박영효는 갑신정변(1884)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자 일차 일본에 망명한 적이 있고, 그 후 김홍집 내각의 대신으로 있으면서 고종폐위 음모에 가담한 일로 인해 다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1907년에 귀국하여 용서를 받았다. 두 번의 일본 망명과 귀국 등 여러 정황을 감안하면, 박영효가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시기는 아마도 일차 망명에서 돌아온 1880년대 후반쯤이 아닐까 싶다. 김옥균(1851∼1893)이 박영효에게 써준 편액이 이 집에 남아 있으니 두 번째 망명 이후는 아닐 것 같다.

    이후로 잠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1910년대에 윤씨 집에서 이 집을 구입하였다. 그 이후로 윤씨 집안이 계속 살아 왔으며 종가로 유지되고 있다.

    100칸이 넘는 저택이라서 사람이 많이 모여 살 때는 일가 친척 70여 명에다가 하인들까지 합쳐 모두 100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바깥 행랑채, 큰 사랑채, 뜰 아래채, 곳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고 문간채, 산정채, 안채, 작은 사랑채만 남아 있는 상태다. 현재 대지 1400평에 건평 250평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윤보선 전대통령은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의 새말에서 태어나 10세쯤에 이 곳으로 이사온 이후 줄곧 이 집에서 살았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이 집에서 살았고 대통령을 그만 둔 후에도 이 집에서 살았다.

    고택의 돌담길을 따라 대문 앞에 서니 왼쪽으로 40∼50cm 높이의 네모난 돌이 눈에 들어온다. 말을 타고 내릴 때 발을 디디기 위한 용도의 하마석(下馬石)이다. 서울의 전통가옥 대문 앞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하마석은 매우 희귀한 사례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3개의 소문(小門)이 나타난다. 맨 오른쪽의 소문은 별채인 ‘산정(山庭)채’로 들어가는 문이고, 왼쪽의 문은 작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가운데 나무 사이로 몇 미터 들어가서 여는 문은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다.

    큰 대문 하나에 작은 대문 3개의 구조는 셋이 모여 하나로 귀결되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구조다.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고려가 세워질 때 자주 등장하던 논리가 회삼귀일이어서 그런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이를 회통과 통합의 원리로 존중해 왔다.

    3개의 소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문은 산정채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다. 아주 귀엽고 아담한 문이다. 그러면서도 철제로 되어 있어 튼튼한 질감과 심플한 맛을 준다. 문의 전체 높이는 180cm, 여닫이의 높이는 1m 정도로 낮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또 문 위로는 작은 지붕이 얹혀 있는데 문이 지녀야 하는 품위를 모두 갖추고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문을 통과하고 있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준다.

    윤상구씨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는 나무로 된 문이었는데 6·25전쟁 때 부서져서 60년대 초반 해위 선생이 직접 모양을 설계하여 쇠문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예쁜 문은 해위 윤보선의 작품이다.

    수많은 고택을 다녀 보았지만 이처럼 예쁘면서도 실용적이고 분명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문은 보지 못하였다. 전통의 상징성과 모던한 아름다움이 이상적으로 결합된 문이다.

    문은 무엇인가? 동양문화에서 문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성(聖)과 속(俗)의 경계다. 성스러운 공간과 세속의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가 문인 것이다. 바깥에서 중심부로 들어갈 때마다 문을 하나씩 통과하게 되는데, 바로 그 때마다 세속의 세계에서 좀더 성스러운 공간, 즉 중심부로 진입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마치 옷을 한 꺼풀씩 차례차례 벗는 것처럼 문을 많이 통과할수록 때를 벗고 정화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찰에 들어설 때 제일 앞에 서 있는 일주문(一柱門)부터 시작해서 사천왕문(四天王門), 불이문(不二門), 금강문(金剛門) 등 여러 개의 문을 거쳐서 대웅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배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구중궁궐(九重宮闕), 구중심처(九重深處)라고 할 때 구중이라는 의미 역시 9개의 문을 지칭함은 물론이다.

    이처럼 동양세계는 문을 통해 성스러운 공간을 확보하려 하였다. 반면 서양에서는 실내 공간의 높이를 통해서 성스러움을 확보하려 하였다. 서양의 유명한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동양의 사찰에 비해서 천장이 유난히 높다. 천장이 높으면 건물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외감과 신성감을 주기 마련이다. 반대로 천장이 낮으면 아주 답답하다.

    아무튼 윤보선 고택도 여러 개의 문을 통해 중심부로 진입하도록 배치돼 있다. 일단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다음에 산정채로 가는 작은 소문을 통과하고 다시 산정채의 출입문을 열도록 되어 있다. 문을 하나 더 통과할수록 그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 신성하고 깊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용을 하므로, 결과적으로 철제로 된 소문(小門)의 존재는 산정채의 품격을 높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이 많아서 걸리적거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생활에 너무 쫓기면서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산정(山庭)채는 어떤 용도의 집인가? 우선 이름부터 특이하다. 뫼 산(山)에 뜰 정(庭) 자이니까 산 옆의 뜰에 있는 집이라는 뜻인데 이 집 어디에 산이 있단 말인가?

    산속의 별장 이미지 주는 산정채

    그런데 과거의 집은 현재의 집과 전혀 달랐다 한다. 옛날에는 현재 연못 자리에서 대문쪽까지 작은 산맥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연못이 있었고, 연못을 건너가는 다리도 있었으며, 그 옆에 작은 동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 동산을 산으로 간주하고 산 옆에 있는 별채라는 뜻에서 산정채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산정채는 집 안에 있는 별채이지만 마치 산속의 별장에 있는 것과 같은 호젓함과 한가함을 주어 그렇게 이름 짓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는 집에 있으면서도 관념상으로는 산에 들어와 살고 있는 셈이다. 임천간(林泉間)에 노니는 걸 좋아했던 옛 선비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는 작명이다.

    산정채에는 그 풍류에 걸맞은 현판이 큼직하게 걸려 있다. ‘유천희해(遊天戱海)’라는 글씨가 바로 그것인데, 하늘과 바다 위에서 노닐고 춤춘다는 뜻이다. 하늘과 바다에서 놀 수 있어야 진짜 노는 것 아니겠는가. 그 호탕함이 부럽다. 산정채에 드나들던 선비들이 가슴에 품었던 호방한 기개가 그대로 묻어 있는 글씨체로 보인다. 집주인에게 확인해 보니 추사의 친필이라고 한다.

    정면이 4칸, 측면이 2칸 통의 크기인 산정채에는 이 현판 글씨 외에 조그만 편액이 하나 더 걸려 있다. ‘태평만세(泰平萬歲)’라고 새겨진 편액이다. 그런데 그 편액의 모양이 특이하다. 동행한 사진작가 권태균씨의 설명에 의하면 편액의 모양은 박쥐를 본딴 것이라고 귀띔한다. 그는 중국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가 살았던 장춘의 궁궐에서도 박쥐 모양을 한 편액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빨래를 두드릴 때 쓰던 다듬이 돌의 양 옆에도 박쥐 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 박쥐인가? 서양에서는 박쥐가 악마의 상징이지만 동양에서는 반대로 오복(五福)의 상징으로 본다. 박쥐를 한문으로 복()이라고 쓰는데, 박쥐 복 자가 복 복(福)자와 모양이 비슷해서 같은 의미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신구에도 박쥐 문양을 새겨놓은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산정채는 한국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윤상구씨의 설명에 의하면 영국 에딘버러대에서 고고학을 공부한 후 1932년 여름 귀국한 해위 선생이 1945년 광복될 때까지 13년 동안 일체의 바깥 활동을 삼가면서 칩거하던 곳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이었고,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 야당의 회의실로 쓰이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일들이 바로 이 산정채에서 논의되었던 것이다. 김영삼 전대통령, 김대중 대통령도 젊었을 때부터 여기를 드나들던 멤버이다. 지난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해위 선생이 당시 야당의 양대 거물인 김영삼, 김대중씨를 이곳으로 불러서 야당후보 단일화를 당부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것이 해위 선생의 공식적인, 마지막 정치행위였다. 산정채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곳이다 보니 TV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한 무대로 눈독을 들이는 곳이기도 하다.

    산정채에서 눈여겨볼 장치 하나는 ‘양실(洋室)’이라고 불리는 햇볕가리개다. 산정채의 한쪽 면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서 오후가 되면 석양이 낮게 깔려 실내로 깊숙이 들어오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이 햇볕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고택 가운데 이러한 햇볕가리개가 설치되어 있는 건물은 강릉의 선교장, 해남 녹우당, 그리고 비원의 연경당과 산정채라고 한다. 그런데 산정채의 햇볕가리개는 다른 곳과는 달리 러시아 양식이라는 특징이 있다. 구한말 개화기 때 러시아 사람들이 제작하였다는 설이 있다.

    녹색의 잔디와 붉은 베고니아 꽃을 배경으로 고요한 중후함 속에 서 있는 산정채. 한국적인 격조와 품위가 배어 있는 건물임에 틀림없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건물 한 채라도 아직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시골도 아니고 1200만 인구가 복작거리는 서울에서 이처럼 품위 있는 건물을 유지하려다 보니 함부로 집을 개방할 수 없는 집주인의 심정을 이해할 만도 하다.

    이번에는 안채를 보자. 이 집의 안채는 다른 고택의 안채와는 달리 누마루가 있다. 대개 누마루는 남자들이 사용하는 공간인 만큼 사랑채에 달려 있는 경우가 흔하지만, 이 집은 안채에 누마루가 달려 있어서 다른 집의 안채와 같이 여성 전용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건물 크기도 산정채보다 훨씬 크고 높아서 안채 특유의 아늑함은 적고 대신 당당한 위엄이 풍긴다.

    이름은 안채이지만 윤보선 대통령이 한때 여기서 집무를 하였던 것이다. 4·19혁명 이후 내각책임제 하에 장면씨가 총리에 취임했으나 거주할 사무실이 마땅히 없어서 반도호텔을 임시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당시는 경무대)는 당시 윤보선 대통령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세총리가 처한 상황을 감지한 윤대통령은 그림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장면 총리에게 자신이 머무르던 청와대에 와서 살기를 권유하였다.

    윤대통령의 인품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윤대통령 자신은 안국동 집의 안채에 들어와 살면서 동시에 대통령 집무도 겸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5·16에 이은 대통령직 하야로 인하여 그 계획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대통령이 집무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접견할 수 있도록 안채의 구조를 일부 바꾸었기 때문에, 일반 고택의 안채와는 다른 당당한 분위기를 가진 건물로 변한 것 같다. 안채의 ‘국태민안(國泰民安)’ 현판이 한때의 그런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다. 현재는 장남인 윤상구씨 가족이 안채에 살고 있다.

    안채에서 눈에 띄는 점은 마당에 깔린 모래다. 마당에는 흰 모래가 깔려 있어서 정갈한 느낌을 준다. 한옥에서 모래는 빛을 반사해주는 작용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낮이라 해도 방안의 조도(照度)가 낮아 아무래도 약간 어둡기 마련인데, 이걸 보완하기 위해 모래에서 반사되는 빛을 이용하였다. 모래는 빛을 받으면 반사하게 마련이고, 그 반사된 빛이 방안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즉 마당의 흰 모래는 일종의 간접 조명장치였던 셈이다.

    흰 모래는 이러한 실용적 용도 외에 감춰진 미학이 있다. 바로 정갈함과 고요함이다. 모래에 담겨 있는 정갈함과 고요함을 맛보려면 절 마당에 가보아야 한다. 방문객이 오기 전인 새벽녘이 좋다. 행자 스님이 대빗자루로 쓸어놓은 절 마당에는 규칙적으로 왔다갔다 한 대빗자루의 흔적이 물결처럼 남아 있다. 방문객의 등산화 발자국이 찍히기 전의 꼭두새벽에 그 대빗자루의 선명한 흔적을 바라보노라면 정갈함과 고요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선적(禪的) 희열(喜悅)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특히 일본 사찰에 아침 일찍 가보면 이와 같은 빗자루 자국이 선명한 마당의 모래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 필자가 오전 10시쯤 방문했음에도 이 집 안채 마당에는 가지런한 빗자루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풍수에 관심 없는 집주인

    이 집의 풍수를 보자. 집주인은 기독교도인이라 명당에 관심이 없는 듯했고, 덕을 쌓으면 복이 온다는 정도만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이 집터에 관련돼 가전(家傳)되는 정보는 하나도 얻어들을 수 없었다. 풍수를 볼 때 직접 살펴본 것과 가전 정보가 대략 일치할 때 집 터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로 규정할 수 있는데, 가전 정보가 없는 경우는 직접 보고 판단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 필자가 만에 하나 착오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약간의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헤아려주기 부탁드린다.

    먼저 서울의 전체 풍수를 스케치하면서 안국동으로 좁혀 들어가보자. 전통 도읍지의 풍수 조건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사방(四方)에서 산이 받쳐주고 있어야 한다. 사방이라 하면 패철상에 나타난 건(乾)·곤(坤)·간(艮)·손(巽)이나 자오묘유(子午卯酉) 또는 인신사해(寅申巳亥) 네 방향에 산이 있는 조건이다. 사방에 산이 있다는 것은 그 안쪽에 사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나오는 산의 정기를 받을 수 있어서 좋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산을 진지 삼아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두 번째는 강이 흘러야 한다. 강은 물이고 산은 불로 본다. 동양사상에서는 수(水)와 화(火)가 오행을 대표하는 선수로 보기 때문에 가장 중시한다. 화만 있고 수가 없으면 건조해서 생명이 잉태될 수 없다. 비유하자면 고층 아파트에 가습기가 없으면 몸도 뻣뻣해지고 목도 건조해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반드시 강물이 흘러야 한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강물은 운송수단이다. 육상교통과 자동차가 발달하기 전에 강물의 존재는 고속도로와 같은 운송수단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고대사회는 강을 통해 물자를 운송했으니까 말이다.

    세 번째는 자급자족할 수 있을 정도의 들판이 필요하다. 도읍지에는 인구가 밀집되기 마련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식량의 자급자족이다. 그래서 넓은 들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갖춘 곳은 도읍지가 되었다. 신라의 경주가 그렇고, 고려의 개성, 조선의 서울, 북한의 평양, 후백제 견훤의 전주가 이 조건에 해당한다.

    이렇게 도읍지로서의 면모를 갖춘 서울은 경복궁 뒤의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 남산을 안산으로 한다. 여기서 한가지 부족한 부분이 목체(木體)의 산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의 국지사(國地師) 노릇을 했던 지창룡 선생의 이론에 따르면 제왕이 사는 수도에는 오덕구(五德丘)라고 해서 수, 화, 목, 금, 토형의 산이 전부 갖춰져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경복궁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목산(木山)이 보이지 않는 결점이 있다. 그래서 부득불 남산 이름을 목멱산(木覓山)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멱(覓)은 찾는다, 구한다는 뜻이므로 그 이름에 목을 찾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남산은 형태로 보아서는 목산이 아니지만 이름으로 대신 비보(裨補)한 셈이다.

    조선의 이씨(李氏) 왕조에서 특히 목을 중시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그 성씨 탓이다. 한문으로 이(李)자를 풀어보면 나무 목(木)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씨 왕조는 풍수도참(風水圖讖)적인 맥락에서 목을 자신들의 운명과 동일시하였던 것이다.

    윤보선 고택이 들어서 있는 안국동 일대(계동, 가회동, 화동)는 거시적으로는 경복궁의 좌청룡인 낙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좌청룡의 큰 줄기는 낙산이지만, 미시적으로는 낙산 안쪽에서 다시 여러 갈래의 소청룡(小靑龍) 소백호(小白虎)로 분화되면서 그 안에 살기 좋은 명당자리를 형성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의 양반들이 모여 살았던 북촌(北村)이 바로 이 청룡자락 내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진 소청룡 소백호에 앉아 있는 동네다. 역대로 서울의 명사들이 이 줄기에 살았다.

    이 동네를 관찰하면 작은 지맥들이 희미하게나마 이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윤보선 고택에서 보자면 중앙고 뒷산에서 나와 인촌고택, 그리고 현대 본사로 이어지는 라인이 내청룡(內靑龍)이라면, 감사원쪽에서 나와서 정독도서관 - 소격동 - 미대사관저 - 한국일보 - 인사동까지 이어지는 라인을 내백호(內白虎)로 볼 수 있다. 도로가 나면서 잘리긴 했지만, 이 동네에는 아직까지 희미하게나마 작은 용맥들의 융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큰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들 지맥은 잘리고 훼손되고 있다.

    북촌지역 만큼은 큰 건물의 신축을 가급적 피함으로써 그나마 남아 있는 아기자기한 용맥들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그 자그마한 용맥들의 꿈틀거림을 바라다보면 삶에 대한 새로운 의욕이 솟아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암반이다. 종로구청에서 발행한 ‘종로구지(鍾路區誌)’를 보면, 종로구 전역은 지층이 화강암 지역이라고 적혀 있다. 종로구 주위에는 편무암이 많지만 종로구 지반에는 유독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것이다. 이 지역의 풍수적인 기운이 짱짱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소설가 김종록씨의 집이 인사동에 있어서 일이 있을 때마다 가끔 하룻밤씩 자곤 했는데, 자고 일어나면 아파트에서 잔 것보다 몸이 훨씬 부드럽고 개운하였던 경험이 있다. 산 속의 암자에서 자고 일어나는 것 같은 상쾌함이 아닌가! 인사동이 사람도 많이 복작거리고 공기도 탁해서 잠자리가 불편할 것으로 예상했던 나에게는 의외의 결과였다.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김종록씨가 몇 년 전 인사동 집에 정화조를 묻기 위해서 땅을 2m 정도 파내려 간 적이 있었다. 혹시 물이 나오면 방비하려고 동판까지 준비하였다. 그러나 파내려가 보니 뜻밖에도 마사토(磨砂土)가 나왔다. 마사토란 비석비토(非石非土)로서 화강암이 흙으로 변해가는 중간과정의 특별한 흙을 가리킨다. 마사토는 기가 지나치게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아서 지관들이 선호하는 흙이기도 하다. 이 지역 일대의 지반에는 화강암이나 마사토가 깔려 있어서 잠자리가 개운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추측컨대 윤보선 고택의 지층도 같은 상태일 것이다.

    건물마다 좌향이 달라

    윤보선 고택의 풍수에서 가장 흥미 있는 대목은 건물마다 각기 좌향(坐向)이 다르다는 점이다. 좌향이란 쳐다보는 방향을 일컫는 것이므로, 건물마다 쳐다보는 방향이 다르다는 말이다.

    먼저 기준이 되는 대문의 좌향을 보자. 대문은 갑좌(甲坐)로 서향이다. 서향으로 대문을 잡은 이유는,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옛날에는 삼청동 가는 길에 개천이 흐르고 있어서 이 개천을 앞에다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향은 이 개천을 의식한 좌향이다.

    산정채는 니은(ㄴ)자 모양이지만 창문은 세군데로 향하고 있어서 3개의 좌향이 나온다. 갑좌, 병좌(丙坐, 북향), 임좌(壬坐, 남향)가 그것이다. 한쪽은 대문과 같은 방향인 서향의 갑좌이고 다른 한쪽은 북향의 병좌다. 병좌는 주산이면서 동시에 백호에 해당하는 북악산 쪽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산정채 마루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북악산의 끝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끝봉우리 모습이 꽃봉오리 같기도 하고 문필봉 같아서 상서롭게 보인다. 그러니까 병좌는 다분히 이 북악산 봉우리를 받기 위한 좌향으로 해석된다. 남향의 임좌는 햇볕이 많이 들어오도록 한 배치다.

    또 안채의 정면은 해좌(亥坐)다. 하지만 안채 역시 기역자(ㄱ)로 굽어 있기 때문에 굽어지는 부분에서 또 하나의 좌향이 성립된다. 그것이 유좌(酉坐)다. 유좌는 동향인데,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이 동향이다. 안채 옆에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작은 사랑채는 임좌(壬坐)다. 해좌와 임좌는 15도의 각도 차이를 보이지만, 거의 같은 방향으로 남향에 속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집 건물들의 좌향은 갑, 병, 유, 해, 임의 5가지다. 일반적으로 집터의 좌향이 1개 아니면 2개인 경우에 비해서 5개의 좌향은 좀 많은 편에 속한다. 왜 이렇게 윤보선 고택은 여러 방향의 좌향이 복잡하게 혼합되어 있는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풍수를 모르는 사람은 이 부분을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풍수의 이기론(理氣論)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공부거리다. 풍수의 이기파(理氣派) 이론에 의하면 패철상에 나타난 24개의 좌향 각각에는 비밀이 숨어 있고, 좌향마다 효력 발생의 시점이 각기 다르다고 한다.

    아침, 한낮, 오후의 시간대마다 해가 떠 있는 위치가 다르듯이 패철상의 24방위도 시간에 따라 순환하면서 어떤 때는 갑좌에 발복하고 어떤 때는 병좌에 발복하고 다시 시간이 흐르면 경좌에 발복하게 된다는 것이 이기파의 이론이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영원 불변토록 발복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 다른 좌향으로 발복이 옮겨간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로테이션 발복’의 이치다. 이 세상에 영구불변이란 없고 순환하는 것이 우주의 이치다. 로테이션 발복의 이치를 파악한 이기파 지관들은 집을 지을 때 미음(ㅁ) 자로 짓는다. 왜냐하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순환하는 발복의 기운을 그때마다 받아먹기 위해서다. 그래서 조선조의 풍수 마니아들은 명당도 하나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여러 개를 잡아 놓고서야 안심하였다고 한다. 물론 미음(ㅁ) 자 집을 짓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다른 건축학적인 이유도 작용하였겠지만, 풍수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로테이션 발복의 이치가 숨어 있다는 이야기다.

    건축학자가 아닌 풍수학자의 안목에서 윤보선 고택의 다양한 좌향 배치는 우연이 아니며 로테이션 발복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시대적으로도 조선후기가 한국풍수사(韓國風水史) 상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인 만큼, 서울 북촌의 요지에 있는 이 집을 지을 때도 당연히 당대의 일급 지관들의 컨설팅을 받았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그때의 지관이란 오늘날로 치면 건축설계사였으니까 이만한 저택을 건축설계사 없이 지었을 리 없다.

    지관의 임무를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자연과 얼마나 멋지게 조화를 이룬 집을 지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있다. 산세와 용맥이라는 자연과, 건축이라는 인위(人爲)를 어떻게 최대한 조화시킬 것인가, 즉 자연도 살고 나도 사는 ‘상생적(相生的) 건축의 묘용(妙用)’이 풍수라고 규정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급 지관이란 그 조화의 묘용을 극대화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한편으로 자연과 인위의 조화를 모색하는 학문이 풍수라고 할 때, 그 조화의 터득은 단순히 테크니컬한 분석과 지식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다. 분석과 지식도 물론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윤리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이때의 윤리적 뒷받침이란 바로 덕을 쌓는 일이었다. 적덕을 않고는 큰 명당 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게 풍수가의 신념일 뿐만 아니라 동양사상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부분이다.

    도교에서도 신선의 조건으로 호흡과 정신통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전제로 삼천공덕(三千功德)을 꼽는다. 즉 공덕을 삼천 가지 이상 쌓아야 신선이 될 수 있는 자격이 발생한다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도교에서 말하는 ‘공과격(功過格)’이 바로 공덕을 체크하는 장부다. 머리만 좋고 약아 빠진 사람은 명당도 걸려들지 않고 신선 승급에서도 반드시 탈락한다.

    필자가 적덕과 공덕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집안이 바로 그러한 공덕과 명당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세간에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7년 전인 1994년 초가을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에 있는 윤보선 대통령 선산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이 선산과 관련해 전라도 풍수가에서 회자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이 집의 어느 윗대가 낙향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집에 스님이 탁발을 왔는데,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마땅히 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집 할머니가 얼른 옆집에 가서 보리쌀을 한 됫박 꾸어 와서 스님에게 드렸다고 한다. 옆집까지 달려가 보리쌀 한 됫박을 구해 보시하는 성의를 보인 것이다. 몇 달 뒤에 다시 그 스님이 탁발을 나왔다. 그때도 옆집에서 빌려 보시를 하였다. 세 번째 방문에서 역시 그러한 성의를 보이자, 그 고운 마음씨에 크게 감동한 스님은 보답으로 명당 자리를 하나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 자리를 쓰고 난 후부터 윤씨 집안이 크게 발복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책(‘한국 명가의 풍수’)을 보면 윤씨 집안의 명당에 대해서 내용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채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의정부 공찬(恭贊)을 지낸 윤득실이 당파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충남 아산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형편이 넉넉할 리 없었고, 가장인 윤득실마저 죽자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윤득실의 아들은 항상 적선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면서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날 윤씨가 둔포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진맥진해 쓰러져 있는 스님을 만났다. 늙은 스님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생사의 기로에 있었고, 윤씨는 스님을 업어다 집안에 모시고 극진히 보살펴주었다. 그 극진한 보살핌에 대한 보답으로 스님이 잡아준 자리가 현재 윤보선 전대통령 선산이 위치하고 있는 음봉면 동천리의 명당자리라는 이야기다.

    전해오는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윤씨 집안의 활인공덕(活人功德)으로 명당을 얻었다는 내용이고, 명당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설화들이다.

    그때 스님이 잡아주었다는 묘자리를 가보니 좌측으로 마체(馬體)의 봉우리 2개가 선명하게 바라다보이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말 귀의 형상처럼 하나는 크고 하나는 약간 작은 두 개의 둥그런 봉우리가 나란히 아름답게 서 있었는데, 필자의 풍수 선생님은 이 마체 봉우리가 귀물(貴物)이라고 지적하였다.

    현재 이 선영에는 제일 위쪽에 윤보선 전대통령의 묘가 있고, 그 밑으로 명당이라고 소문난 윤득실 공의 묘가 있다. 그 아래에 윤보선 전대통령 부모의 묘가 합장되어 있다. 명당도 명당이지만 이 집 선산을 둘러보면서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영을 관리하는 후손들의 정갈함이었다.

    선영 전체가 아주 정갈했다. 정갈하다는 것은 무덤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는 커다란 상석이나 기타 석물이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갑자기 큰 돈을 번 졸부들 묘지를 가보면 잡다한 형태의 석물들로 덕지덕지 치장을 해놓기 마련인데, 이 선영에선 그러한 덕지덕지 석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묘역 전체는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어 머리카락 하나 떨어진 것이 없을 정도였다. 묘비석도 50cm 내외의 자그마한 것 하나만 사용하였다. 아주 소박한 단장이다.

    家相學의 세계

    다시 윤보선 고택으로 가보자. 대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한 고택은 주변 전망을 확보하기가 불가능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택 주위에 건물을 신축해서 높이를 올려버리면 주변 전망이 흐트러질 뿐만 아니라 풍수적으로도 변화가 발생한다.

    현재 이 집의 대문 바로 앞에 교회건물이 있고, 옆으로는 4층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 이 집을 빼꼼히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주변 건물이 높이 올라가거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 당연히 이 집의 전망이 바뀐다. 전망이 바뀐다는 것은 풍수적으로는 주변 산봉우리들(砂格)이 높이 올라가거나 바뀌는 것과 같은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고 건물을 짓지 못하게 통제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므로 현대에 들어와서는 도시에서 명택을 구한다는 것이 별다른 의미가 없다. 언제 도로가 날지 모르고 언제 대형건물이 들어설지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좋았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주변 사격이 통째로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명당을 보존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도시적 특수 상황에 적응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실내풍수(室內風水)’ 또는 ‘가상학(家相學)’이라고 불리는 풍수다. 집 바깥의 거시적인 형세보다는 집 내부의 책상 배치, 문을 어느 쪽으로 낼 것인가, 침대를 어느 쪽에 둘 것인가, 벽지를 무슨 색으로 사용할 것인가 등등을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흐름의 풍수를 소풍수(小風水)라 표현하고 싶다. 청룡, 백호, 득수, 안산과 같은 주변 경관의 스케일을 중시했던 대풍수(大風水)의 시대는 가고, 집 내부의 공간배치에 관심을 갖는 소풍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현대인이 자연과 격리되면서 인공구조물이 밀집된 도시로 삶의 공간을 이동시키면서 나타난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대풍수가 자연을 다루는 풍수라면 소풍수는 인공구조물을 다루는 풍수다. 결국 대풍수 시대에서 소풍수 시대로의 전환은 문명의 방향이 자연 대신에 인공으로 대치되는 상황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좋게 말하면 풍수의 진화이고 나쁘게 말하면 풍수가 인스턴트화 한 것이다.

    소풍수의 발생지는 홍콩이다. 홍콩은 땅은 좁고 인구는 밀집된 과밀도시였기 때문에 청룡 백호를 따지는 전통적인 차원의 대풍수가 유통될 수 없었다. 또 산 사람이 거주할 땅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죽은 사람이 들어가는 묘지에 공간을 배려할 수는 없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니 음택 문제는 뒷전으로 제쳐놓고 양택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양택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소풍수로 발전한 것이다.

    현재 홍콩, 일본을 비롯하여 유럽과 미국에서는 소풍수가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는 추세다. 유럽과 미국에 가보면 소풍수에 관한 책이 수십 종류나 출판되어 있다. 죽음 이후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서양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볼 때 묘지를 명당에 쓰면 후손이 복을 받는다는 음택은 수용이 불가능할 것이고,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사업이 잘될 수 있겠는가 하는 양택 쪽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풍수를 문화산업적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에서 유명한 중국 지관이 건물 풍수 상담료로 받는 금액은 통상 건물가액의 1% 쯤 된다. 그러니까 5억달러짜리 건물이면 5백만달러를 상담료로 받는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한 건에 말이다. 이만하면 풍수도 고부가가치 벤처 문화사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외국의 풍수는 중국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상태다. 우리가 우리 전통을 무시하고 망각한 채 살아갈 때 중국인들은 자신의 전통문화를 우직하게 지켜나갔으며, 그것이 지금 돈 버는 사업이 된 것이다.

    인명사전에 50여 명이나 등재된 해평 윤씨, 윤보선 대통령 집안의 가계를 살펴보자. 이 집안 가계와 인물들의 프로필에 대해서는 조남준씨의 ‘신명가(新名家)’에 자세하게 정리돼 있는데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해위의 10대조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평양으로 진격해 오자 여러 대신들이 함흥으로 옮기자고 하고 선조도 뜻이 같았으나, 윤두수는 함흥보다 영변(寧邊)이 방어하기에 유리하므로 영변으로 옮기자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후에 함흥이 함락되고 두 왕자가 왜군에게 포로로 잡히자 그 선견지명에 모두들 감탄하였다.

    윤씨 집안이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해위의 조부때부터다. 큰할아버지가 구한 말 군부, 법무대신을 지낸 윤웅렬(尹雄烈)이고, 할아버지가 안성군수와 육군참장을 지낸 윤영렬(尹英烈)이다. 윤웅렬은 치호(致昊), 치왕(致旺), 치창(致昌) 세 아들을 두었다.

    윤치호는 1881년 최연소자(17세)로 신사유람단에 끼어 일본을 다녀와서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뒤에 미국유학을 하였고 귀국한 후에는 서재필, 이상재, 이승만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했으며 현재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를 작사하였다. 1904년 외무협판으로 있을 때 인천항에 들어온 영국 함대가 “대한제국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요청하자 다급해진 고종의 명에 따라 윤치호가 애국가의 가사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치호의 장남 영선(永善)은 일제시대 미국으로 유학, 오하이오 주립대 농화학과를 나왔다. 자유당 때 농림부장관, 서울 YMCA 총무를 지냈다. 차남 광선(光善)은 어장을 경영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됐다.

    윤치왕은 영국 글래스고대 의대를 졸업하고 산부인과 의사자격을 얻어 왔으나 제국대학 출신이 아니면 대학교수가 될 수 없다고 하자 일본 경도제대에 다시 유학, 의학박사 학위를 딴 인물이다. 광복 전 세브란스병원장 및 의전교수를 지냈다. 치왕의 장남 도선(燾善)은 서울대 의대를 나와 산부인과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차남 훈선(薰善)은 서울법대를 나와 브라질로 이민, 상 파울루에 거주하고 있고, 삼남 연선(然善)은 교통부 시설과장, 고속철도건설공단 관리이사를 지냈다.

    윤치창은 초대 주영공사와 주터키대사를 지낸 외교관이다. 부인 손진실(孫眞實)은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큰딸이다. 윤치창의 장남 종선(淙善)은 생화학박사로 뉴욕치과대 교수이고 장녀 원희(沅姬)는 미국 국무부 공무원이다.

    해위의 친할아버지인 윤영렬은 아들 치오(致旿), 치소(致昭), 치성, 치병(致昞), 치명(致明), 치영(致暎) 6형제와 활란(活蘭), 노덕(老德) 자매를 두었다.

    윤치오는 일본을 다녀온 사촌형 치호의 조언을 따라 단신 도일, 경응의숙을 다녔다. 37세때 대한제국학무국장, 중앙중학교교장을 지냈다. 치오의 장남 일선(日善)은 일본 경도제대 의학부를 나와 우리나라 근대 병리학을 선도한 의학계의 태두다. 광복후 서울대 창설에 참여, 1956년에서 1961년까지 서울대 총장, 원자력원장을 거쳐 과학기술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차남 명선(明善)은 동경제대 법문학부 졸업, 일본고등문관시험 합격, 만주국 간도성창장을 지냈다. 부인은 공주갑부로 유명한 김갑순(金甲淳)의 딸인 김정자(金貞子)다.

    윤치소는 중추원 의관을 지낸 인물로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다. 6남 가운데 장남이 바로 보선(潽善)으로 제2공화국 대통령이 됐던 것. 해위(海葦)라는 아호는 상해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신규식 선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 는 뜻이라고 한다. 윤보선의 장남 상구(商求)는 시러큐스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자재 사업을 하고 있고, 차남 동구(同求)는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 학교를 나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장녀 완구(琓求)의 남편 남흥우(南興祐)는 일본고등문관 시험에 합격, ‘형법강의 1’ ‘형법강의 2’ 등의 저서를 낸 형법학계의 권위자로 고려대 교수를 지냈다. 차녀 완희(完姬)는 화가로 활동하였으며, 남편은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신규식(申圭植)의 아들인 신준호(申俊浩)다. 윤치소의 2남인 완선(浣善)은 경도제대를 졸업했고, 3남 원선(源善)은 일본 동경농림대를 나와 2공화국때 민선 경기지사를 지냈다 그의 부인 이진완(李辰琓)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증손녀다.

    윤치병은 구한말 육군정위를 지낸 인물로 자녀가 없어서 치소의 5남 택선(澤善)이 양자로 들어갔다. 택선은 일본대를 나와 교통부장관 비서관, 국회교체위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윤치영은 와세다대, 하와이대, 조지워싱턴대를 연달아 졸업한 인물.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과 관계를 맺었다. 귀국해 초대 내무장관, 서울시장, 3공화국에서 공화당 의장을 지냈다.

    이들 다음세대에 배출된 인물들은 지면관계상 부득이 생략할 수밖에 없다. 이 집안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물들과 안국동의 윤보선 고택을 보면서 “개화기 이래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집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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