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도 공창(公娼)을 허용해야 할까. 공창이 미성년자 윤락과 성범죄를 예방한다는 지지론과, 실질적 ‘공인 매춘지역’인 사창(私娼)도 모자라 공창을 만든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반론이 팽팽하다. 그렇다면 이미 오래 전에 윤락가를 합법화한 나라들의 사정은 어떨까. 그들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는 없을까.
그러다 보니 ‘보호해야 할 성’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논란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성의 일상화가 성 담론의 일상화를 부추기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공창(公娼) 제도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일고 있다. 특히 이 문제는 서울 종암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미성년 매춘과의 전쟁’을 벌인 바 있는 김강자 서울경찰청 방범과장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특별강연에서 공창제가 “왜곡된 성문화와 각종 성범죄, 미성년자 윤락을 척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이라는 개인 의견을 개진한 것이 계기가 되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강지원 서울고검 검사는 “사창은 사법 단속에서 제외된 실질적인 공인 매춘 지역이다. 그런데도 매춘을 축소하는 방안을 놔두고 섣불리 공창 제도를 주장하는 것은 (행정) 편의주의적인 발상이다”고 주장한다.
매춘은 일부일처제의 산물?
성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태어나는 것도 그렇거니와 삶의 대부분을 남녀가 만나 꾸려가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이 문제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각자는 제 나름의 성에 관한 의식과 태도, 방식이 있으므로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 한 어느 한 가지 방식이 옳다, 그르다고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성은 원래 종족 번식과 관련된 것이라 본능적인 요소가 강하다. 매춘과 윤락은 일부일처제가 정착되는 과정에 파생한 것이라는 측면이 있다.
이에 대해 “일부일처제가 정착된 것이 언제 일인데 지금까지 그 여파가 미친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부일처제가 남녀평등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인간의 본능을 통제하는 제도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아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인류는 이미 군혼제,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등을 경험했고 이중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TV 동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발정기 수컷들이 마음에 드는 암컷을 차지하려고 벌이는 잔인한 쟁탈전을 눈여겨보라.
성은 이렇게 본능적 요소가 강하게 지배하기에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때그때 지역 사회가 나름의 제도와 방식으로 근절하려 했던 매춘이 지금까지 끈질지게 지탱해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글에서 공창제 도입이 필요하냐 아니냐를 주장할 생각은 없다. 필자에겐 그것을 논할 만한 전문지식과 능력도 없다. 공창제 논의가 촉발된 시점에서 그간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이 문제와 관련해 보고 느낀 바를 통해 우리 사회가 앞으로 이에 관해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이런 것들도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공창제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댄다.
하나는 우리의 법체계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매춘이 실제로 행해지는데도 묵인하고 있으니 그럴 바에야 정부가 매매춘을 합법화해 관리함으로써 ‘노예 윤락’으로 전락한 윤락녀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게 오히려 차선의 방안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성들의 성욕을 법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이상 그들에게 성욕을 배출할 장소를 합법적으로 제공하는 대신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유사 행위를 뿌리뽑아 미성년자를 보호하고 동시에 공중 위생보건 상태도 개선하자는 것이다.
김강자 과장도 어느 인터뷰에서 “사창가에서 구출된 열네 살짜리 소녀가 성병으로 눈동자가 누렇게 변하고 성기가 문드러진 것을 본 순간 확 돌아버릴 것 같았다”고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라면 공공연한 현실이 돼버린 윤락행위를 놓고 위법이다 아니다를 따지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윤락녀에게 인권을 찾아줄 수 있는 길인지를 먼저 묻는 게 순서이리라. 삶과 죽음을 오가는 게 당장의 현실인데 다른 무엇이 그에 앞설 수 있단 말인가. 과거에 우리가 ‘종3’(서울 종로3가에 있었던 사창가)을 없앴다지만 그 결과 종3류의 사창가가 서울 외곽과 수도권 곳곳으로 확산됐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충분히 검토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그에 앞서 고려해야 할 것들도 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 사창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도 대부분 이를 묵인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매춘을 합법화한 곳은 네덜란드나 미국의 네바다주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왜 수많은 나라와 도시가 합법화를 주저하는 것일까. 합법화의 효과를 몰라서일까, 아니면 그것이 자기네 나라와 지역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일까.
물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네덜란드가 매춘을 합법화했다고 해서 우리가 네덜란드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필자가 보기에는 많은 나라가 이렇듯 어정쩡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합법화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네덜란드는 공창에 대해 아주 떳떳하다. 필자는 그 이유가 이 나라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네덜란드는 좀 특이한 나라다.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아 ‘국토난’에 시달려온 탓에 이들은 17세기 이래 바다 멀리 나가 식민지 경영과 무역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왔다. 장사의 요체는 개인의 자유와 영리 추구다. 그래서 이들도 자유와 영리 추구를 무엇보다 앞세웠고 또 그것을 위해 투쟁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개척과 진보의 의지를 부추겼다.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을 향해 떠났던 곳도 네덜란드였고, 국제법과 해양법의 모태가 된 ‘전쟁과 평화의 법’의 저자도 이 나라 출신의 그로티우스였으며, 19세기 말 아르누보 건축의 기치를 올린 이도 네덜란드 건축가 리트펠트 슈뢰더였다. 이들은 모든 면에서 진보적인 성향의 민족이었다.
왕궁과 시청 옆이 홍등가
주로 외지로 이동하는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거리의 여자를 찾게 만들었고 성에 대해서도 자연 개방적인 태도를 갖게 했다. 홍등가가 주로 항구도시에, 그리고 신흥 공업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본격적인 공창이 해상식민지 경영과 무역으로 번창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됐다는 점도 이를 증명한다. 당시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는 독방식(cell) 오두막집이 많았는데, 그곳이 대개 그런 장소로 이용됐다.
네덜란드인들의 이처럼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은 세계 최초로 연성(軟性) 마약의 사용과 판매를 허용하게 만들었고, 안락사 인정에서도 선구적인(?) 태도를 취하게 했다. 또한 이들은 결혼보다 동거를 더 선호한다. 형식보다는 내용을 우선하는 것이다. 자기 딸이 다른 사내와 동거한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남들 앞에서 이야기해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에 맡길 뿐 국가나 제도가 그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것이 이 나라의 문화다. 창녀를 찾는 것도 사생활로 보기 때문에 공창에 대해서도 그렇게 떳떳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운하의 도시다. 유명한 ‘홍등가(Red Light District)’도 운하를 끼고 있다. 한밤에 야한 불빛이 운하 주변의 수면에 어리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볼거리가 된다. 실제로 그곳은 당당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용무가 없어도 호기심에 이 지역을 한번쯤 배회한다. 놀라운 것은 그 지역이 왕궁과 시청 근처라는 사실이다. 서울로 따지면 종로 1가쯤 되는 위치에서 버젓이 매춘이 행해지는 것이다.
어떤 업소는 ‘이곳을 지나면 시청입니다. 더 이상 이런 집은 없습니다(De Laaste Pomp voor Het Stadhuis)’라는 간판을 내걸고 한 사람의 손님이라도 더 붙들어 보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그 업소를 지나면 또 그런 간판을 건 업소가 나타난다. 서로 ‘원조’ 간판을 내걸고 ‘오리지널 싸움’을 벌이는 우리네 음식점들을 떠올리게 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런 집에서는 으레 얇은 옷을 걸친 여인들이 희미한 불빛의 창문 너머로 마치 팬터마임 배우처럼 특이한 몸짓을 지으며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한 사내들은 문 앞에서 흥정을 한 다음 안으로 들어간다. 업소 주변에는 섹스에 도움을 주는 각종 기구와 약품, 포르노 비디오와 책자를 파는 가게도 즐비하다. 그곳에는 성에 대해 보수적인 동양인으로선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물건도 많다. 신기해서가 아니라 뭐 저런 것까지 동원해가면서 그 일을 치러야 하나 하는 생각에 민망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선 연성 마약도 거래된다. 섹스와 포르노, 거기에다 마약까지 넘쳐나다 보니 성에 대해 꽤 자유롭다는 서유럽에서도 으뜸가는 ‘성역(聖域)’이자 ‘성역(性域)’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먼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이 찾지만 고객의 주류는 이웃 프랑스나 독일에서 온 원정팀들이다. 국경이 없어져 버린 지금 이들을 통제할 마땅한 방법이 없는 다른 EU(유럽연합) 국가들은 네덜란드 정부를 향해 “그래도 마약은 안 돼!”라고 항의해보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다 알면서 무슨 소리냐”며 코방귀를 뀔 뿐이다.
이곳이 홍등가로 자리잡은 것은 약 100년 전의 일이다. 암스테르담 시가 매춘과 호객 행위를 할 수 있는 일정 공간을 제공하는 대신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면서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이다. 시 당국은 매춘행위가 불법이라며 근절 일변도로 나가기보다는 일정 지역 안에서 성욕을 해소할 수 있게 하고 또 그 일을 통해 가난한 여성들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함으로써 윤락가가 주거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성병의 전염도 예방할 수 있다고 봤다.
실제로 그들은 이처럼 합법적인 홍등가가 있어 이웃 나라에 비해 성 범죄율이 낮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또한 네덜란드 성인의 절반은 매춘부를 친구로 갖는 데 대해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며, 75%는 매춘을 직업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이런 사정이라면 암스테르담의 공창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공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도 이런 사례에서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서구화한 삶의 방식과 성문화에 제법 익숙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그들의 성문화를 그대로 모델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내놓고 즐겨야 할 대상으로는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성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성에 대한 의식이나 태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세월이 좀더 흐른다면 지금의 그들처럼 개방적인 태도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단지 공창을 인정한다고 해서 허가된 윤락 지역 내에서의 위생수준과 윤락녀의 인권 상황이 해결될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이에 대해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해주는 책이 올해 5월 미국에서 출간됐다. 문제의 서적 ‘매음굴 머스탱 랜치와 여인들(Brothel; Mustang Ranch and its Women)’의 저자는 하버드대 의대 출신의 여의사 알렉사 알버트. 그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3년 동안 끈질기게 네바다 공창협회를 채근해 허락을 받고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머스탱 랜치’라는 매음굴에 머물면서 윤락녀의 위생상태 등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그녀가 조사작업에 투입한 시간은 무려 6년이었는데, 그 가운데 6개월을 윤락녀들과 동고동락했다. 그들이 왜 그곳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어떤 생활을 하고 있으며, 성관계시 콘돔은 착용하는지 등을 현장에서 조사한 후 그녀가 내린 결론은 “매춘을 합법화한 지역에서도 윤락녀들은 죄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사기간 동안 그녀는 의사가 아닌 학생의 자세로 진지하게 이 문제에 천착했던 만큼 그냥 흘려들을 얘기는 아니다.
‘인권 선진국’이라는 미국, 그곳에서도 유일하게 공창이 허용된 네바다주(이곳은 도박, 이혼 등에 대해서도 진보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에서도 윤락녀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무시당한 채 죄수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다른 나라 윤락녀의 사정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하다.
우리가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시사점은 윤락녀의 인권과 위생수준의 향상은 공창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그것을 위한 별도의 대책과 노력이 뒤따라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 우리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공창에 ‘공정거래’는 없다
또 매춘의 구조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매춘은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 없이도 가능한 생계수단으로 인식돼 있다. 실제로 그런 이유로 많은 여성들이 그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윤락녀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밝혀진 것이다.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없는 노동은 경제학적으로 말한다면 ‘경쟁력’이 없는 노동이다. 몸이 재산이라고 하지만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매춘은 ‘완전 경쟁시장’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 수준 높은 교육과 기술을 습득하려는 것은 시장이나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인데, 그저 몸 하나만 갖고서 돈과 시장을 움켜쥔 포주와 맞설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른바 ‘정글의 법칙’이 가장 리얼하게 적용되는 매춘시장에서 ‘공정거래’를 요구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을 이 책은 새삼 일깨워준 셈이다.
윤락녀들을 향해 “멀쩡한 몸 가지고 먹고 살 일이 그것뿐이더냐”, “너희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그 길로 들어섰느냐” “한 순간 잘못 생각해 그 길로 빠졌다 해도 ‘이게 아니다’ 싶으면 어떻게든 빠져 나올 생각을 했어야지” 하는 식으로 나무랄 수도 없다. 그런 이성적인 타이름이 실제로는 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힘들고 더딘 일이 되겠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그 길로 빠지지 않게끔 사회·경제·문화적 조건을 갖추는 일이 더 시급하다.
몇 년 전 ILO(국제노동기구)도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말로만의 평등’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등을 실질적으로 이룰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죄수 취급받는 윤락녀들에게 ‘인권, 인권’ 하고 외치는 것보다는 그들이 정말 자신의 인권을 주장하고 또 그걸 지킬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
필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관찰한 그들의 프리섹스 문화였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이 속해 있는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네덜란드 못지않게 성이 개방된 곳이다. ‘프리섹스’란 말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에는 공창은 말할 것도 없고 사창도 눈에 띄지 않는다. 프리섹스의 고향이라고 해서 성 관계가 난잡하고 ‘거리의 여성’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다. 스톡홀름에 사는 한 교민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오래 전 스톡홀름의 한 가게에서 거리의 여자를 두고 영업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개점하자마자 문전 성시를 이뤘다. 고객들이 몰려든 게 아니라 자신들을 모독했다면서 시민들, 특히 여성들이 몰려와 거세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주인은 문도 열어보지 못하고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아무도 그 일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스칸디나비아에 ‘애정 없는 성관계는 없다’는 얘기다. 그들이 말하는 프리섹스란 무절제한 남녀간의 성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맺는 관계를 뜻한다. 프리섹스의 ‘프리(free)’란 ‘자유롭다’의 뜻이 아니라 ‘없다’는 뜻이다. 이때 ‘없다’는 것은 성차별이 없다는 의미다. 그들은 실제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남자다, 여자다 하며 따지지 않는다. 성의 차이를 차별이나 보호의 구실로 삼기보다는 가치의 다양성 차원에서 이해한다. 이런 그들에게서 ‘남자니까 사창가를 찾아도 되지’ 하는 태도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여성의 직업 가운데 무당과 함께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매춘이 성행하는 이유가 만일 가난 때문이라고 한다면 매춘은 스칸디나비아 땅에 발붙일 수가 없다. 밥을 굶는다든지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든지, 돈이 없어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못할 만큼 사정이 어려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는 ‘복지의 천국’답게 이미 오래 전에 사회보장제도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성을 사려는 이유는 이성의 육체가 그리워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성에게 사랑을 느낄 때에만 관계를 갖는 편이라 그럴 개연성도 적다. 그런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충동적인 성의 본능을 그들은 그런 사랑의 태도로 절제해낸다.
인간사를 지배하는 세 가지 요소를 들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돈과 권력과 성이라고 할 것이다. 필자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그리 간단하게 생각할 것들이 아니다. 인간의 영원한 숙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잘 다루면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주지만 잘못 다루면 개인과 사회를 모두 망치는 독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그 사회가 어떻게 마련해내느냐 하는 것이 바로 문화이고 문명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에 대한 의식과 태도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는 요즘 우리가 그에 대한 사회적 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분야에 종사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맡겨둘 만큼 한가로운 사안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머리를 짜내고 짜내 단기적. 장기적 대안을 찾아봐야 할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