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지권인을 지은 비로자나불좌상 형식은 화엄 불국사에서 불국세계를 총체적으로 구현해내는 과정에 처음 출현한다는 사실은 지난 24회 ‘비로자나불상의 출현’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나왔다. 그래서 불국사 비로전에 봉안된 국보 제26호 (제24회 도판 3)은 지권인을 지은 불상 형식의 시원을 이룬다는 사실도 지적하였다.
그런 비로자나불 형식이 선종의 도입과 더불어 선종사찰의 주불로 영입된다. 이는 깨달음의 목표를 불성(佛性; 불타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의 본질에 두고 있는 선종으로서는 그 불성의 본질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남종선의 총본산으로 공인되는 장흥 보림사에서도 이런 양식의 비로자나불상을 본존불로 모시었으니, 헌안왕 2년(858)에서 4년(860) 사이에 만들어지는 국보 제117호 (도판 2)이 그 효시를 이룬다.
이후 이런 비로자나불좌상 양식은 신지식인 선종 이념의 확산과 더불어 참신한 신식 불상양식으로 인식되어 차츰 전국으로 전파되어 나갔던 듯하니, 도 그렇게 만들어진 불상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은 과 동시에 만들어진 보물 제247호 (도판 3)에서 출현한 보물 제741호 (도판 4)에 새겨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황수영 선생이 1969년 ‘신라민애대왕석탑기(新羅敏哀大王石塔記)’라는 논문으로 세상에 알린 내용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가 새겨진 사리호는 1966년 전문 도굴꾼들에게 절취되는 과정에 파괴되어 그 파편의 일부가 분실됨으로써 전문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부분만으로도 과 이 만들어진 내력을 짐작할 수 있으니, 옮겨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국왕이 삼가 민애대왕(817∼839년)을 위해 복업(福業)을 추숭(追崇)하려고 석탑을 만든 기록. 대체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설치하면 이익 되는 것이 많다고 한다. 비록 팔만사천 법문(法門)이 있다지만 그중에 마침내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널리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은 탑을 세워 예배하고 참회하며 도를 닦는 것보다 더 넘치는 것이 없다.
엎드려 생각해보니 민애대왕 김명(金明)은 선강(宣康)대왕의 장자이고 금상(今上; 현재 임금인 경문왕)의 노구(老舅; 아버지의 외삼촌, 경문왕은 민애왕의 작은매형인 희강왕의 손자임)이다. 개성(開成) 기미(己未, 839년) 대족월(大簇月, 1월) 23일에 문득 백성을 버리니(돌아가니) 춘추 23세였다.(이하 파손되었으나 추정 가능)
이미 2기(二紀, 24년)가 지나서 복업을 추숭하려고 동수(桐藪; 오동나무 숲이란 뜻이니 동화사를 가리킴)의 원당(願堂) 앞에 석탑을 새로 세운다.(이하 파손으로 문맥 불통)
함통(咸通) 4년(863) 계미 무역월(無射月, 9월) 10일에 기록하다. 한림(翰林) 사간(沙干)인 이관(伊觀), 전지(專知) 대덕(大德)인 심지(心智), 동지(同知) 대덕인 융행(融行), 유내승(唯乃僧)인 심덕(心德), 전지대사(專知大舍)인 창구(昌具), 전(典)인 영충(永忠), 장(匠)인 범각(梵覺).”
여기서는 다만 현재 비로암 대적광전 정면에 서 있는 을 세운 내력만 기록하고 있다. 민애대왕(838∼839년)의 추복을 위해 경문왕(861∼875년)이 석탑을 그 원당 앞에 세운다는 것이다. 그 원당이 현재 대적광전이니, 원당과 함께 이 탑을 조성했다고 보아서 이 탑이 이루어지는 경문왕 3년(863) 전후한 시기에 대적광전에 봉안된 도 만들어졌으리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추론이다.
그런데 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에 봉안된 과 동일 양식인 것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우선 지권인을 지은 것이 같고, 육계(肉)가 상투인지 머리통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커진 것이 같으며,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으로 가사를 두 벌 입어 양쪽 옷깃을 풀어헤친 듯 앞가슴을 드러내 놓은 것도 같다. 보림사 철불이 858년에서 860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니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은 목과 허리가 좀 짧아지고 무릎 높이가 높아져 있다. 지권인을 지은 두 손 높이도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다 조금 더 긴장된 모습을 보여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옷주름을 도식적으로 처리한 것이나 결가부좌한 두 발을 모두 옷자락 속에 숨긴 표현도 이 불상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어놓은 요인 중의 하나다. 형식의 틀에 갇혀서 이를 탈피하지 못한 채 말라 죽어가는 신라 왕도문화의 실상을 반영하는 듯한 조각기법이다.
이에 반해 은 옷자락을 자유분방하게 멋대로 풀어헤치고, 옷주름도 사실성을 염두에 두며 형식성을 타파하고, 두 발은 시원스럽게 옷자락 밖으로 드러내 활달한 기상을 표출하고 있다.
틀에 얽매여 노쇠화해가는 신라의 왕도문화와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참신하고 건실한 새 문화의 창조를 모색해 가는 변방문화의 대조적인 현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에서는 국화잎새 구름무늬와 불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에 구름을 탄 화불(化佛)이 좌우에 4구씩 돋을새김되고, 그 정상 부분에는 삼존불좌상 형태의 화불이 하나 더 표현되어 모두 9구의 화불이 장식됨으로써 그 화려한 장식성을 과시하고 있다.
문성왕 이래 왕권의 정통성을 되찾고 추악한 왕위 다툼을 청산하여 실추된 왕권을 잠시나마 회복하고 난 뒤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과 대타협을 이루어냄으로써 일시 재봉춘(再逢春; 가을에 꽃피는 현상)을 맞이하였던 경문왕 시대의 왕권 과시 욕구가 이렇게 화려한 장식성을 요구했을 것이다.
연화대좌의 상대(上臺)는 위로 핀 연꽃잎(仰蓮)을 2중으로 돌려 장식했는데 연꽃잎 표면에 다시 배추잎새 같은 덧장식을 가하였고, 중대석에는 국화잎새 구름무늬와 사자상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전면을 장식해 놓았다. 8면을 상징하기 위해 운각(雲脚; 구름 모양으로 만들어낸 상다리나 난간 기둥) 형태의 구름당초 기둥을 8면에 세우고 그 사이 8면에 사자상을 입체조각에 가깝게 높게 돋을새김해 놓았다. 그리고 하대는 아래로 핀 연꽃잎(覆蓮; 뒤집어진 연꽃)이 쌍엽으로 장식되어 있다. 연화좌와 사자좌, 수미좌의 의미를 함축한 복합적 의미의 좌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바로 (제25회 도판 9)의 기단부에서 보여주던 복합적 대좌의 의미다. 이것이 이미 이 불상에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의 대좌도 이런 형태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철감선사 도윤(道允, 798∼868년)이 돌아간 해가 경문왕 8년(868)이고 이 조성된 것이 858∼860년이며 이 이 조성된 것이 경문왕 3년(863) 전후한 시기이니 이 셋이 서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셋은 서로 미묘한 인연에 얽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제 그 얽힌 사연을 대강 정리해 보겠다.
원성왕(785∼798년)이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으로부터 왕위를 훔치고 나서 그 손자인 헌덕왕(809∼826년)이 조카 애장왕(800∼809년)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면서부터 신라 왕실은 근친간의 왕위 다툼으로 편할 날이 없게 된다. 특히 헌덕왕의 아우인 흥덕왕(826∼836년)이 죽고 나서는 다툼이 극에 이른다.
이미 헌덕왕 14년(822) 정월에 헌덕왕이 그 아래 아우인 흥덕왕을 태자로 삼고 그 아래 아우인 선강(宣康)태자 충공(忠恭)을 각간으로 삼으니, 선강태자 김충공은 흥덕왕 10년(835) 2월까지 13년 동안 상대등 자리에 있으면서 대권을 행사한다. 사실상 부군(副君)의 위세를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선강태자 김충공이 흥덕왕에 앞서 흥덕왕 10년에 돌아가게 된다. 이에 흥덕왕은 충공의 맏사위이며 자신의 사촌아우인 아찬 김균정(金均貞)을 상대등으로 삼고 충공의 장자인 대아찬 김명(金明, 817∼839년)을 시중(侍中)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흥덕왕이 다음해인 흥덕왕 11년(836) 12월17일에 갑자기 돌아간다. 후사를 분명히 결정하지 않은 채 돌아갔던 듯하다.
이에 상대등 자리에 있던 김충공의 큰사위 김균정이 김양(金陽, 808∼857년)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나아간다. 김양은 명주군왕 김주원의 증손자로 태종 무열왕의 9세손에 해당하므로 왕위 계승문제에서 발언권이 가장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당연히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생각하던 시중 김명은 이에 반발하여 작은매형인 희강왕 김제륭(金悌隆, 836∼838년)을 부추겨 왕궁으로 쳐들어가서 큰매형인 김균정을 잡아 죽이게 한다. 김제륭은 김균정의 손아랫동서이기도 했지만 친조카이기도 했다. 김명의 야심을 눈치채지 못한 김제륭은 큰동서이자 숙부인 김균정을 죽이고 자립하고 나서 처남인 김명을 현재 총리격인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이때 김명의 나이 21세였다.
그러나 김명은 자신에게 대권을 넘겨줄 줄 알았던 작은매형 희강왕이 자립하여 보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희강왕 3년(838) 1월에 시중 이홍(利弘)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의 좌우를 살해한다. 김명의 야심을 그제서야 눈치챈 희강왕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고 목매 자살하고 말았다. 이에 김명은 22세로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희강왕 2년(837) 5월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김명의 야심을 간파하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난다. 그는 낙동강 하구인 양산 황산강(黃山江)에서 배를 타고 장보고가 대사(大使)로 있는 청해진으로 간다. 장보고에게 1만 군사를 빌려줄 때 그가 시중으로 있으면서 이 일을 적극 후원했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김우징은 여기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김명이 본색을 드러내 희강왕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우징은 군왕을 시해한 역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장보고에게 군사를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장보고로부터 5000군사를 빌린 김우징은 김양과 함께 3월에 무진주까지 공략해 들어갔다가 민심의 향배만 확인하고 되돌아온다.
민심의 소재를 파악하고 난 그들은 왕도 공략에 자신감을 가지고 군세를 다시 정비해 12월에 대공세를 취하여 쌍봉사 근처인 무주 철야현(鐵冶縣; 지금의 南平面)에서 왕의 군대를 대파한다. 승승장구 밀고 들어가 민애왕 2년(839) 기미 윤정월 19일에는 대구에 당도한다. 민애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구 서교에서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왕군이 대패하여 죽은 자가 과반수나 되었다.
왕은 나무 아래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패군하자 좌우가 모두 달아나 홀로 남게 되었다. 왕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댁(月遊宅)으로 들어가니 병사들이 뒤쫓아와 왕을 시해하였다. 이에 우징의 조카이자 사위인 김예징(金禮徵) 등이 김우징을 맞아들여 보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신무왕(839년 4월∼7월)이었다. 그러나 신무왕은 등극한 지 3개월 만에 돌아가고 그 장자인 경응(慶膺)이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다. 이가 문성왕(839∼857년)이다.
문성왕은 등극하고 나자 이런 교서(敎書)를 내려 장보고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군사권을 공식 인정한다.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은 일찍이 군사로 선대왕을 도와 선조의 큰 역적을 토멸하였으니 그 공업(功業)과 열의(烈義)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진해장군(鎭海將軍)을 삼고 아울러 장복(章服; 관리들이 입는 의복)을 내려주노라.”
그리고 문성왕은 청해진에 피란해 있을 때 약속했던 대로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 둘째 왕비)로 맞아들이려 한다. 먼저 문성왕 4년(842) 3월에 진골왕족으로 왕위계승에 가장 확실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김양의 딸을 첫째 왕비로 맞아들인 다음 문성왕 7년(845) 3월에 진해장군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아들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왕도 귀족들이 섬 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완강하게 반대하므로 왕도 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문성왕 부자를 보호하여 옹립하는 데 절대적인 공로를 세운 장보고는 이 소식을 듣자 몹시 분노하였다. 그래서 다음해인 문성왕 8년(846) 봄에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신라 왕도로 다시 진격해 들어가 반대한 귀족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주인 염장(閻長)이 거짓으로 반란에 가담하는 척 장보고 진영에 들어와 환대하던 장보고를 술자리에서 칼을 빼앗아 찔러 죽임으로써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자 구심점을 잃은 청해진 해상세력은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산발적으로 신라조정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던 듯하다.
그래서 신라 조정은 문성왕 13년(851) 2월에 청해진을 혁파하고 그 무리를 곡창지역인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김제)으로 옮겨 농사를 짓게 한다.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던 뱃사람들이 농사짓는 일에 적응할 리 없다. 그래서 이 정책은 실패하고 이들은 모두 다시 바다로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문성왕 17년(855) 정월에 문성왕이 사신을 보내 서남 백성을 어루만졌다는 사실은 다시 돌아온 청해진 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국왕의 배려였을 듯하다. 그래서 청해진 세력은 강화만이나 아산만 등의 해양세력과 연계를 맺으면서 서서히 제해권을 되찾아가는 듯하니, 이 시기 일본에서 신라구(新羅寇)의 침략에 시달리며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런데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립하는 흥덕왕 3년(828) 4월 이후로 이 청해진 선단(船團)에 의해 수많은 당나라 유학생과 유학승들이 내왕했던 것을 현존하는 비문(碑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흥덕왕 5년(830)에 쌍계사 진감(眞鑑)선사 혜소(慧昭, 774∼850년)가 귀국하고 희강왕 2년(837)에는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이 당나라로 건너갔다. 이해 9월12일에는 봉림산문(鳳林山門)의 시조인 원감(圓鑑)선사 현욱(玄昱, 787∼868년)이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 무주 회진(會津)으로 귀국했다 하니 장보고 선단이 아니고서는 이런 뱃길을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무왕 원년(839) 2월에는 적인(寂忍)선사 혜철(慧哲, 785∼861년)이 돌아와 쌍봉사에 머물다가 곡성 동리산(桐裏山)에 대안사(大安寺)를 짓고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이때가 장보고 세력이 극성을 한 시기이니 이 쌍봉사나 대안사 모두가 장보고의 시주와 후원으로 설립 경영되는 절이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문성왕 2년(840)에는 보조선사 체징이 귀국하여 무주(武州) 황학(黃鶴) 난야(蘭若; 精舍, 즉 절의 의미)에서 거주하였고, 문성왕 7년(845)에는 성주산문의 시조인 낭혜(朗慧)화상 무염(無染, 800∼888년)이 귀국한다. 장보고의 피살 소식을 듣고는 문성왕 9년(847) 4월에 쌍봉사 철감선사 도윤(道允, 798∼868년)이 돌아오고 사굴산문(山門)의 시조인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 810∼889년)도 뒤따라 들어온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오가는 뱃길에서 장보고 선단과 깊은 인연을 맺어 청해진 주변의 서남해안 지방을 근거지로 삼고 남종선을 전파해 갔던 것이다. 적인선사 혜철이 곡성 동리산에 대안사를 건립하여 동리산문을 개설하고 살다가 그곳에서 열반하여 과 그 비석을 남긴 것이나 철감선사 도윤이 화순 중조산 쌍봉사에 살면서 남종선지를 전파하다가 열반하여 과 그 비석을 남긴 것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보조선사 체징은 장흥 가지산에 가지산문을 개설하고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최초로 조성하거나 주변의 선배 선문 조사들의 부도를 감조(監造; 감독하여 만들어 냄)하여 선문조사들의 부도와 탑비 양식을 정비해 놓음으로써 선종미술의 선구를 이루어 놓는다.
이것이 모두 장보고 선단과 무관한 일이 아닌데 바로 그 선종미술 양식이 장보고 세력이 타도한 민애왕의 원찰을 짓는 데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역사 속에서 물고 물리는 오묘한 인과는 헤아릴 수 없다 하겠다.
이 신라 국토의 서남해안에서 처음으로 출현하자 이 양식은 선사들이 곧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던 듯, 신라의 동북변경 지역인 철원에서도 이런 양식을 가진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국보 제63호인 (도판 5)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조상기(造像記)를 등뒤에 새기고 있어 그 조성 연대가 함통 6년(865, 경문왕 5)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만들어지고 난 뒤 5년 만의 일이고 이 만들어지고 난 뒤 2년 만에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조상기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불기(佛紀) 1806년에 멀고 가까운 데 사는 향도(香徒)들이 장혼(長昏; 오래 묵은 어리석음)을 깨우쳐 대각(大覺; 큰 깨달음, 부처의 경지)을 이루고자 절 일에 스스로 몸을 던져 이 불상을 조성해 냈다. 때는 당 의종(懿宗) 함통(咸通) 6년(865, 경문왕 5) 을유 정월이고 장소는 신라국 한주(漢州) 북계(北界) 철원군(鐵原郡) 도피안사(到彼岸寺)다. 그 대표는 용악 견청(龍岳 堅淸)이고 인연을 맺은 거사(居士; 불교를 믿는 남자 재가신도)는 1500인이다.”
이 국왕의 발원과 시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은 변방 철원 일대의 평신도 1500명의 발원과 시주 및 노력봉사로 조성된 것이니 그 성격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권인을 짓고 이중착의법으로 옷을 두 벌 입어 가슴이 넓게 드러나 있으며 육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육계 부분이 커져 있다는 양식적 공통성이 있으나 느낌은 전혀 다르게 전해 온다. 우선 순박한 얼굴 표정에서 가식없는 천진난만성을 읽을 수 있고 거침없는 옷주름 표현에서 꾸밈없는 당당한 생활 자세를 감지할 수 있다. 굵고 긴 목과 넓고 튼튼한 어깨, 늘씬한 허리와 장대한 팔다리, 두툼하고 큰 손, 이 모든 것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건강하고 순진한 향촌의 청년상이다.
그러나 지략과 무예에도 만만치 않을 듯하니 이 지방을 다스리던 호족(豪族) 자제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세련되고 복잡한 표정과 살집 좋은 몸매, 도식화한 옷주름 처리, 화려한 광배와 대좌, 이런 것들이 의 면모이니 과는 비교할 만한 특징들이다.
이 시기에 조성연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니 경북 봉화군 물야면(物野面) 개단리(皆丹里) 취서사(鷲棲寺) 대웅전 서벽에 봉안되어 있는 (도판 6)이다. 얼핏 보아 과 같은 계열의 불좌상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 에 비해 양식화 현상이 두드러져 동화사 불좌상을 의식하며 조성했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이중착의법으로 가사를 두 벌 입었으나 두 벌 입은 가사의 상호 연결이 불분명하여 두 벌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표현한 것 같지는 않다. 오른쪽 어깨 위로 반단식(半袒式; 반쯤 어깨를 드러내 놓는 방식) 표현을 한 옷자락이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나온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허리띠 매듭도 둥근 고리 형태로 처리해 사실성을 잃었고 두 팔뚝을 타고 내린 옷주름이나 두 다리에서 생긴 옷주름도 모두 도식화되어 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마치 수면(水面) 위의 물결처럼 상징화되고 말았다. 가슴으로 흘러내린 가사 깃에 화문단(花文緞)을 댄 것 같은 표현도 장식성을 더 보탠 것이라서 이 역시 양식화 현상으로 보아야 할 요소다.
이렇게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도 그 앞에 건립된 석탑에서 석탑조성기(石塔造成記)가 새겨진 사리석호(舍利石壺)가 발견됨으로써 그 조성연대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경에 벌써 이 사리석호는 석탑으로부터 반출되어 이 절의 승려가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1929년 일본인의 소유가 된 것을 총독부 박물관이 매입해 들였다고 한다.
이 (도판 7)의 생김새와 표면에 글자를 새겨 넣는 방법 등은 출현 (도판 4)와 거의 동일한 양식이다. 크기도 서로 비슷하다. 출현 의 높이가 8.5cm이고 에서 출현한 의 높이가 8.1cm다.
양식이 양식과 유사했던 이유를 이것으로 재확인할 수 있다. 의 표면에 새겨진 조탑기(造塔記)의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석언전(釋彦傳)의 모친 명단(明端)과 돌아가신 아버지 이찬(伊) 김양종(金亮宗) 공(公)의 막내딸이 친히 스스로 큰 서원(誓願)을 일으켜 전담(專擔)으로 불탑을 세운다. 이미 정토(淨土; 깨끗함으로 가득 찬 이상의 나라인 불국토)의 업(業)에 감응(感應)하여 겸해서 예국(穢國; 더러움으로 가득 찬 현실세계인 중생의 나라)의 생령(生靈)을 이롭게 하였으니 이 뜻을 효심(孝心)으로 순응(順應)하여 이 탑을 세운다.
불사리(佛舍利; 부처님의 사리) 10알이 들어 있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면(面)을 만들어 넣었다. 도사(導師; 인도승)는 황룡사 승 현거(賢炬)이다. 대당(大唐) 함통(咸通) 8년(867)에 세우다.(이상 표면) 석장(石匠; 돌을 다루는 장인) 신노(神)(밑바닥).”
승려인 언전의 막내 누이동생이 그 부모인 이찬 김양종(金亮宗) 부부를 위해 이 탑을 세우고 불사리 10알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한 장을 봉안한다는 내용이다. 그해가 함통 8년, 즉 경문왕 7년(867)이라 했다. 이때 이미 이찬 김양종은 돌아갔던 모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란 의미인 고(考)자를 쓰고 있으나 김양종의 부인 명단(明端; 김씨였기 때문에 성을 생략했을 것이다)은 아직 생존해 있었던 모양이라 모친(母親)이라 쓰고 있다.
이찬의 지위에 있었다면 김양종은 왕실 측근인 진골귀족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10 헌덕왕(憲德王) 본기(本紀) 2년(810) 조에 보면 정월에 파진찬(波珍) 김양종으로 시중(侍中)을 삼는다는 기록이 있고 3년(811)조에서는 정월에 시중 김양종이 병으로 면직하였다 쓰여 있다. 김양종이 헌덕왕(809∼826년) 초에 이미 총무처장관격인 시중을 지냈으므로 고관인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관등 제4위 파진찬으로 시중을 지낸 인물이 관등 1위인 이찬에까지 올라 있었다면 상당한 나이까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왕실 측근 인물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민애왕의 복권(復權)을 상징하는 동화사 비로암의 창건(863년) 직후에(867년) 이보다 약간 규모는 작지만 거의 같은 양식으로 원찰을 세웠다면, 이 원찰의 주인공인 이찬 김양종은 민애왕과 함께 복권된 그의 측근 중신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민애왕으로 인해 야기된 극심한 왕위쟁탈전으로 골육간에 원한이 사무쳤던 신라 왕실의 대타협을 위해 경문왕이 민애왕의 원찰을 세워 그의 복권을 공식 인정하자 민애왕 편에 섰다가 신분과 지위를 박탈당하였던 왕족들도 따라서 사면 복권이 이루어졌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양종 집안에서도 승려가 되었기에 살아 남았던 석언전과 그 막내딸이 김양종 부부를 위해 그들과 인연 있는 땅인 봉화 물야에 원찰을 세우게 되었던 모양인데, 그 건립 방식은 민애왕의 원찰인 동화사 비로암을 모방했던 듯하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현존하는 미술품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남종선맥을 이어온 원적(元寂)선사 도의(道義; 784년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821년 귀국)의 법손(法孫; 법을 이은 손자 제자)으로 그의 의발(衣; 가사와 발우, 정법의 법통을 이어가는 상수제자에게 전해주는 상징물)을 이어받은 전법제자(傳法弟子)다.
그래서 그는 전라남도 장흥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우고 도의선사를 초조(初祖; 첫째 조사)로 하는 가지산문을 열었다. 이후 보조선사는 이곳 가지산문에서 20여 년간 주석하면서 선지(禪旨; 선종의 종지)를 널리 전파하며 서남해안 지역을 교화하다가 헌강왕 6년(880) 4월13일에 77세로 열반에 든다.
그러자 제자 의거(義車) 등이 헌강왕 9년(883) 3월15일에 선사의 행장(行狀)을 엮어 왕에게 바치며 사리탑과 비석을 세워줄 것을 청한다. 이에 왕은 곧 시호(諡號)를 보조(普照)라 하고 탑호(塔號; 탑 이름)를 창성(彰聖)이라 하며 절 이름을 보림사(寶林寺)라 정해 주고 정변부사마(定邊府司馬) 김영(金穎)에게 비문을 지으라 명한다.
보림사는 중국 남종선의 시조인 6조(祖)대사 혜능(慧能, 638∼713년)이 남종선의 총본산으로 광동성 영남도 소주(韶州)부 곡강(曲江)현 쌍봉산(雙峯山) 조계(曹溪)에 짓고 살았던 절 이름이다. 그러니 가지산문이 우리나라 남종선의 중심 선문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것이었다.
그런데 보림사가 6·25전쟁중에 전각 대부분이 불타 없어지는 참화를 입었으나 그 당시에 만들었던 을 비롯해서 (제25회 도판 1)와 (도판 8) 등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초기 선종미술의 면모를 온전하게 전해 주고 있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비문을 통해서 이 보조선사 창성탑과 탑비가 조성된 것이 헌강왕 10년(884) 9월19일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돌아간 지 만 4년 5개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탑과 비석을 세우는 공사 기간이 이만큼 걸렸다는 얘기인데 적인선사의 탑과 비석을 세우는 데 11년 걸린 것에 비하면 상당히 신속하게 진행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지산문의 비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뿐만 아니라 이미 남원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 산문을 연 시조)의 부도인 보물 제38호 (도판 9)을 비롯해서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산조 혜철(慧徹)의 (제25회 도판 7)과 사자산문(師子山門)의 초조(初祖) 도윤(道允)의 (제25회 도판 9) 등 우수한 사리탑이 만들어지고 있어 사리탑 양식이 어느 정도 정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공기를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물 제157호인 이 의 구조를 자세히 관찰하면 어째서 이런 추측이 가능한지 그 의문이 풀리게 된다. 우선 기단부 하대 맨 아래층 8면에 안상(眼象)을 새긴 것과 그 위층 8면에 사자상을 새긴 것이 (870년)의 의장(意匠)을 계승한 것이다. 더 소급하면 바로 그 사부(師父) 염거(廉居, ?∼844년)화상의 부도인 (제25회 도판 5)의 사자상과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위층은 운당초문(雲唐草文; 직역하면 구름당초무늬라는 의미이나 당초의 의미가 모호하므로 국화잎새 구름무늬라고 바꿔 부르겠다), 즉 국화잎새 구름무늬를 둥글게 높은 돋을새김으로 표시하였으니 이는 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상·중·하 삼층으로 이루어진 하대석은 사자좌와 수미좌를 상징한 것이다. 이들 삼층 하대석은 각층이 한 돌로 되어 있어 상당히 높은 느낌인데 지대석 높이도 만만치 않아 그 높이를 더해 주고 있다.
그 위로 8면 중대석이 드높게 자리하고 있다. 스승 염거화상의 부도인 (국보 제104호)이나 (보물 제273호) 및 (국보 제57호)에서 보인 낮고 좁은 중대석의 빈약한 표현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이는 보물 제38호 의 중대석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할 터인데, 안상 안에 팔부신장상(八部神將像)을 돋을새김한 의 장식성을 배제하고 단순하게 안상만 8면에 가득 차게 새겨놓았다.
그런데 그 안상 새기는 기법이 의 탑신석 받침돌 부분에 8면에 안상을 새기던 기법 그대로다. 기둥 전체를 배흘림으로 깎아서 팽만감으로 넘치게 한 다음 안오금을 주며 2중으로 안상을 파고들어가 8모의 모서리가 실패의 손잡이처럼 둥글게 불거져 나오게 하고 가운데에 가로금을 그어 대나무 마디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팽만감을 과시하고 있다. 드넓은 공간에 어떤 장식도 베풀지 않은 것이 그 팽만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이렇게 한껏 부풀어 오른 중대석 위에 그보다 지름이 그리 넓지 않은 앙련(仰蓮; 위로 핀 연꽃) 연꽃대좌를 한 돌로 만들어 얹었다. 그런데 연꽃잎 표면에 배춧잎 모양의 장식무늬를 넣은 것이나 널찍한 연꽃잎 표현이 의 연화상대석을 그대로 계승한 느낌이다. 이로써 사자좌, 수미좌, 연화좌의 의미를 모두 함축하는 기단부를 마련한 것이다.
다만 의 탑신석 받침에 해당하는 연꽃 씨방 부분의 팽만감 넘치는 처리방식을 중대석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 부분은 8면의 낮고 예리한 층급받침을 중복하는 것으로 단순화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이 낮고 예리한 층급받침을 별개의 돌 하나로 처리하여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날카롭게 깎아서 시퍼렇게 날이 선 층급받침 위에 조금의 여유를 주지 않고 거의 그 넓이 전체에 해당하는 크기의 탑신석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8면의 벽면을 만들고 있는 모서리 기둥과 아래위 방목(枋木) 표현도 예리한 수직선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면서 약간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상촉하관(上促下寬) 현상을 나타냈다. 8면 중 앞뒷면에는 문비(門扉; 출입하는 문)를 상징하는 문고리와 자물쇠 장식이 표현되어 있고 그 양 옆면에는 사천왕(四天王)이 하나씩 표현되어 있다. 수미산 꼭대기에 모셔진 조사의 사리를 사천왕이 수미산 기슭 사방에서 지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 위에 또 처마 끝이 넓지 않고 물매 급한 기와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딴돌로 새겨 덮어 놓았다. 8개의 지붕마루가 합쳐지는 정상의 용마루 위에는 복발(覆),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주(寶珠)를 굵은 대나무 형태의 찰주(刹柱)에 꽂아 높이 장식해 놓았다. 대나무의 마디 표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맨 위에 얹은 보주는 불꽃을 사방에서 피워내고 있는 화염주(火炎珠) 형태다.
이 화염주 형태는 (제25회 도판 14)의 이수에 꽂혀 있던 그 모습 그대로다. 이 이런 구조를 갖추게 되니 이제까지 지붕돌의 물매가 넓고 중대석이 낮고 좁아서 마치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와 앉은 듯하던 선사들의 사리탑 양식이 거꾸로 땅에서 솟아오르는 죽순 모양으로 강인하고 굳센 느낌을 표출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중국의 남종선이 우리 선종으로 토착화해 나가는 현상으로 파악할 만한 미술 양식의 변화라 하겠다. 보조선사가 중국에 유학 갔다가 중국의 여러 선문을 역방하고 나서 도의선사의 가르침과 다름이 없음을 간파하고 그곳에서 인가를 받지 않고 3년 만에 그대로 귀국하여 본국선맥을 계승하여 가지산문을 개설한 사실과 일치하는 부도양식의 변화라 하겠다.
이제는 외부에서 날아온 선종이념보다 우리 땅에 뿌리를 내려 거기서 솟아난 선종이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듯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도 양식은 경남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가지산 석남사(石南寺)의 도의선사부도로 그대로 이어지니 보물 제369호 (도판 10)가 그것이다.
이는 이 완성되는 884년 직후인 89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가지산문이 신라 왕경 쪽으로 세력을 확산해 나가면서 언양 가지산을 도의선사와 인연 있던 터로 만들기 위해 이 부도를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도 양식이 양식을 바로 뒤잇고 있어서 이 부도를 세운 사람이 보조선사의 제자였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두 사리탑을 비교하여 동일양식 계열임을 밝혀 보겠다.
우선 기단부 하대 아랫단 8면 중 4면에 사자가 돋을새김되고 윗단에 국화잎새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사자좌와 수미좌를 상징하는 것이 같다. 중대석이 배흘림으로 깎이고 8면을 안상 처리한 것이 같은데 다만 이 에서는 안상 중심에 십자형 꽃무늬를 넣고 그 양쪽에 두 줄의 가로띠를 새겨넣은 것이 다르다.
그 결과 중대석에서 마치 북통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하고 있다. 상대석은 위로 핀 연꽃 모양으로 넓지 않으며 위에 8면의 탑신석이 올려져 있는데 비록 처럼 연화대석 위에 꽉 차지는 않지만 거의 같은 넓이를 차지하여 양식을 계승한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게 한다.
지붕돌의 짧은 처마와 급한 물매 역시 을 계승한 것이고 노반과 복발, 보륜, 보개, 화염주 형의 보주 등도 이를 계승한 것이다. 다만 앙화와 보개가 커지고 찰주의 죽절문(竹節文; 대나무 마디 무늬)이 보륜형태로 양식화한 것이 다를 뿐이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보아 처럼 땅에서 솟아나는 죽순 모양을 하게 되었다.
국보급이 보물급 대접받아
역시 현존하는 사리탑비 중에 완전한 것 중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그런데 보물 대접밖에 받지 못하고 있으니 재고해야 할 일이다. 이 비석의 조형적 가치는 물론 그 내용과 현존 유물의 관계 등을 연관지어 생각하면 이처럼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 없을 터이니,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귀부와 비신(碑身; 비석 몸체), 이수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는 부도와 마찬가지로 그 이전에 존재했던 부도비의 여러 양식을 참고하여 독특한 탑비 양식을 고안해 낸 듯하다.
귀부의 거북머리가 용머리 형태인 것은 (제25회 도판 12) 귀부와 (제25회 도판 14) 귀부와 마찬가지다. 정수리에서 뿔이 솟지 않은 것은 의 귀부를 닮았고 귀갑 주변을 조개 모양으로 특별처리하지 않고 귀갑의 연속으로 처리한 것은 의 귀부 양식을 계승하였다.
비신꽂이에 장식된 비운문(飛雲文; 나는 구름 무늬)과 연꽃잎 무늬의 자잘한 표현이나 입을 크게 벌려 이빨로 여의주를 물고 있지 않은 모습 및 오른발을 뒤집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진전된 양식이다. 이수에서 세 개의 화염주(火炎珠; 불꽃을 피워 내는 구슬)를 중앙과 양쪽 귀에 뿔처럼 꽂는 대신 용머리를 그렇게 돌출시켰고 세 마리씩의 용머리를 좌우 비석 머리에 배치하였다. 이는 (도판 11) 양식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홉 마리 용머리를 이수에 표시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수의 높이를 낮추고 좌우에 구멍을 뚫어 무게를 줄임으로써 경쾌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이런 구조 때문에 비석이 천 년 세월을 온전하게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대체로 비석이 쓰러지는 것은 비신이 이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그렇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