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세계 언론의 각광을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에 국내 언론을 향해 세무조사라는 칼을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투명하고 공정한 언론개혁을 위한 정지작업일까,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일까.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부터 세무조사에 이르기까지 언론과의 관계를 추적해보면….
박수석은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당시 콰이강의 다리 폭파라고 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답방을 의미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되돌아보면 폭파라는 뉘앙스는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 발표에 더 걸맞은 표현이었다.
6월29일 세무조사 결과에 대한 국세청 발표는 한마디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중앙언론사 23곳의 법인과 대주주에 대한 추징액은 5056억원. 이중 언론사 및 언론사 출자 법인에 대한 추징액은 3229억원, 대주주에 대한 추징액은 1827억원이었다. 국세청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국민일보의 법인과 사주를 조세범 처벌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중앙일보 한국일보 대한매일의 법인과 당시 대표이사를 고발했다. 세금을 추징당하지 않은 언론사는 단 한 곳도 없었으며 언론사들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만천하에 드러내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그동안 신문업계의 관행이었던 무가지(無價紙)에 대한 세금추징액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 발표에 대해 여야는 즉각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은 국세청의 언론사 사주 및 법인에 대한 고발조치가 조세정의와 정당한 법집행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검찰의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한편, 야당에 대해서는 ‘정치공세’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반해 한나라당은 언론사와 사주에 대한 고발의 목표가 ‘언론자유 말살을 통한 정권재창출’에 있다고 보고 강력 대응해 나간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고발당한 언론사들도 각각 사고(社告)를 통해 세무조사와 관련한 회사의 입장을 발표했다.
동아일보사는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반성과 다짐’이라는 제목으로 “고발대상이 됐다는 자체를 사과하고 고발 내용 중 합당한 것은 받아들이되 부당한 부분에 대해서는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아일보사는 또 “사주가 취재비를 전용했다는 발표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IMF 당시 퇴직자와 사원들의 격려금, 회사간부들의 판공비로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조선일보사는 이번 세무조사가 “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을 탄압하려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진행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이 때문에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당당한 언론의 자세를 유지할” 것임을 밝혔다.
중앙일보사는 “조사 결과 일부 드러난 잘못된 관행은 과감히 시정하고 내야 할 세금은 당연히 납부할 것”이라 말하면서도, “정부의 비판적 언론에 대한 장악의도에 대해서는 당당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동아 조선 중앙 3사의 기자들도 입장을 밝혔다. 가장 먼저 입장을 표명한 것은 조선일보 기자들이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6월28일 기자총회를 연 지 15분만에 언론탄압에 맞서 싸운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채택해 발표했다. 중앙일보 기자들은 성명서는 발표하지 않았으나 노보를 통해 언론탄압에 맞서 싸울 것이며 경영진도 굴복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입장을 보였다.
한편 동아일보 기자들은 6월29일 부별대표자회의를 갖고 성명기초소위를 만든 뒤 7월2일에 기자총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편집국·출판국 기자 170명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성과 투쟁의 필요성에 모두 동감하면서도 투쟁 방향과 선후문제로 논란이 계속되자 성명서 채택을 유보했다.
연두 기자회견이 신호탄
김대중 정부가 언론과의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은 올해 초인 1월11일 청와대 춘추관 대회견장에서 열린 내외신 연두기자회견에서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과 일반 언론인 사이에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언론계와 학계, 시민단체, 국회가 모두 합심해서 투명하고 공정한 언론개혁을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대통령은 “언론자유는 지금 사상 최대로 보장돼 있는 만큼 공정보도와 책임있는 비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김대중 대통령은 언론개혁에 대해 언론자유에 따른 책임과 자율적인 개혁을 강조하는 정도의 발언만 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언론개혁의 주체를 언급하고 대책을 세우라고 주문까지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미 언론개혁의 밑그림을 그려놓고 공개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듯한 인상마저 풍겼다.
김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기 전부터 여권의 핵심인사들은 “언론을 이대로 놔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강성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상당수 언론들은 비판적인 논조에 대한 ‘협박용’ 정도로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한 언론사 논설위원의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김대통령의 발언은 언론사에 손을 대겠다는 결심이 섰음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론사들이 김대통령의 의지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채널을 통해 알아봤지만 그들은 입을 맞춘 듯 선언적인 의미 외에는 큰 뜻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언론사들도 그래서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겁을 주려는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발언은 단지 말에만 머물지 않았다. 2월1일 국세청은 신문 방송 통신사 등 중앙언론사 23곳에 대해 정기법인세 조사를 하겠다고 서면 통보를 한 뒤 2월8일부터 6월28일까지 서울 지방국세청 조사국 인력 400명을 투입해 장장 5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였다. 단일업종으로는 최대 조사인력이 투입됐고 업종 전체에 대해 진행된 것도 처음이었다는 점 등에서 국세청 사상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면 김대중 정부가 그동안 언론관련 시민단체들과 방송 및 일부 신문사의 언론개혁에 대한 끈질긴 요구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야 강도높은 개혁프로그램을 작동시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일부 언론이 사상시비를 제기하고 대통령 선거기간에도 일부 편파적 보도를 하는 행태에 대해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언론 전반에 대한 개혁보다는 특정 언론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뒤 정권인수위의 한 관계자는 언론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재벌언론의 문제는 소유제한 쪽보다는 공정거래위의 기능을 강화해 계열사에 대한 특혜와 부당거래를 줄여나가고 세무조사를 철저히 하는 등 제도적 개혁을 하는 한편,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나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98년 3월경 한국언론연구원에서는 ‘한국신문산업 위기와 개혁’이란 연구보고서를 통해 신문개혁에 대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이 보고서는 “정부가 비합리적이고 부당한 신문시장에 대해서는 조정기능을 통해 사상의 자유시장 정상화를 꾀할 수 있는 제도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집행해야 한다”며 조건부 정부개입을 주문했다.
이 보고서는 신문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법인세, 특소세 등을 불성실하게 신고하는 신문사에 대해서는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를 공표할 것을 제시했다. 소유구조의 개선과 관련해서는 재벌기업에 한해 신문사 지분 소유한도를 2분의 1로 제한하고 있는 현행 정기간행물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것을 주문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정부 당국의 언론정책을 보면 이 보고서가 주문한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권 초기에 대통령정책기획자문회의에서도 원칙적인 언론개혁에 관한 정책보고서를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IMF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언론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했고 또한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일부 언론과의 밀월에 젖어 언론개혁에 개입할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김대통령은 자율적인 언론개혁을 강조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집권초기 대통령정책기획자문회의에서 언론개혁에 관한 건의서를 올렸으나 이를 무시하고 ‘위스키 앤 캐쉬’정책으로 언론을 길들이려다가 안되니까 뒤늦게 칼을 뺀 것이다. 집권 초기에 원칙적인 언론개혁을 했더라면 오해를 받지 않았을 터인데 이제 와서 언론개혁을 외치니 오해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여당 중진의원도 “언론개혁과 관련, 당에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어요. 뒤늦게 돌격대로 나선 분위기고 청와대 공보쪽도 언론개혁에 대해서는 어떤 역할도 맡지 못했어요. 아예 나서지 말라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면 국세청이 스스로 알아서 했다는 것인데 삼척동자라도 믿지 않을 겁니다. 대통령도 버거워 하는 언론들을 상대로 국세청이 어떻게 독단적으로 일을 벌입니까. 언론개혁과 관련된 일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거나 대통령의 뜻을 관련기관이나 사람에게 전달하는 고리가 있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아무튼 김대중 정부와 주요 신문의 밀월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지 1년이 채 못되면서부터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가 신문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정부에서도 설득이나 해명 차원이라는 형식을 통해 ‘압력성 협조요청’을 행사했다. 그 과정에서 1999년 6월 중앙일보 사주인 홍석현 회장의 구속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이 사태는 재벌기업 세무조사 차원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홍석현 회장은 보광그룹의 대주주이자 중앙일보 사주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세청은 보광그룹의 탈세혐의를 조사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중앙일보는 김대중 정부가 비판적인 언론을 길들이려는 것이라고 크게 반발했다.
당시 한나라당에서는 “고급옷 로비의혹이나 검찰의 파업유도 의혹으로 집권층의 도덕성에 큰 흠집이 나는 등 궁지에 몰리자 언론에 재갈을 물림으로써 돌파하려는 게 아니냐”고 의심했다. 특히 내각제 문제와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언론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하려는 의도가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계에서는 “대선 당시 중앙일보가 이회창 후보를 노골적으로 편든 데 대한 보복”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세계일보에 대해서도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세무조사에 대해 국세청은 “정기조사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설명했다.
중앙일보 사주 구속의 의미
그러나 당시 대한매일 편집국의 한 간부가 쓴 칼럼은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속마음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적어도 이땅의 일부 보수언론은 지난 정권 시절 김대중 대통령을 엄청나게 음해하고 모함했다. 그들은 정치인 김대중이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간다고 시비하고, 왼쪽으로 가면 왼쪽에 서있다고 몰아붙였다. 이는 지난 40년간 집권세력이 조작한 과격 이미지 논리에 순치되거나 그런 논리를 개발, 전파해주며 사익(社益)을 챙긴 결과물이다. 특히 지난 수십년간 형성된 지배엘리트층과 보수 기득권층의 선봉이 되어온 언론이 야비한 지역감정 조작을 확대재생산하면서 호의호식해왔다. 이들 언론은 그동안 특정지역과 계층적 기반이 같다는 이유로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지역패권주의를 한껏 즐기는 데 앞장서왔다. 이로 인해 정치인 김대중은 지역감정의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 동시에 반발심리로 혜택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언론이 지금 정권교체가 되었다고 해도 승복할 리가 없다. 사소한 허점도 가차없이 흠집을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간교한 하이에나보다 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이는 정권을 얕잡아본 표현에 다름 아니다. 계층적 기반이 다르고, 그들이 조작해온 과격 이미지가 아니라 생각보다 물렁해보이고, 권력시스템도 정교해보이지 않자 더욱 밟아보는 것이다. 그런 언론이 탄압을 받고 있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이 정권에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그동안 독재권력, 부패권력에 협력하며 여론을 왜곡하고, 때로 반민족적 반민주적 언론행태를 밟아온 타락언론 기생(妓生)언론에 대해 세무조사든 불공정거래법이든 주어진 법테두리에서 과감히 시정해나가야 한다. 굳이 말한다면 그들에게 빚진 것이 없는 현정권에게 때묻고 병든 언론을 청산하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당시 홍석현 회장 구속과 관련, 중앙일보에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은 “정권이 언론을 탄압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 정권을 탄압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세계일보 세무조사에 대해서도 폈고, “국세청에서 세금탈루 혐의가 있거나 오랫동안 조사를 받지 않은 기업에 대해 공평과세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정부와 언론이 대립적인 구도를 형성하게 된 것은 1999년 5월에 터진 옷로비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언론이 연일 옷로비사건을 보도하면서 김태정 당시 법무부장관의 퇴진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는 듯하자 김대통령은 “언론이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고 격분했다. 그러나 김태정 법무부장관은 결국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도 한빛은행 대출사건과 관련, 언론에 오르내리다 혐의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내놓았다. 당시 여권의 한 관계자는 “언론이 여론몰이를 하면서 대통령이 총애하는 측근들을 계속 낙마시키는데, 언론에 대한 심기가 편하겠나”는 말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언론의 두 번째 악연은 노벨평화상 수상 관련 보도였다.
“그동안 언론에 계속 두들겨 맞다가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면서 좋은 평가를 받는가 했더니 약효가 얼마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통령께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니까 언론이 제대로 보도해주리라고 생각했는데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까지 시비를 걸어요. 외국에서는 가는 곳마다 기립박수를 하는데 국내에서는 신문들이 기립 삿대질을 해대는 판이니 대통령의 마음이 오죽했겠어요.”
청와대 한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주요 신문이 지역감정을 선동하고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정치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데 미칠 지경이었다”고 덧붙였다.
여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김대중 대통령은 국내언론의 노벨평화상 보도에 대해 몹시 섭섭했던 것 같다. 이때부터 ‘언론개혁’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는 관측이 많다.
개혁정책에 대한 저항과 반발이 확산되고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지자 나름대로 특단의 대책도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개혁정책이 실패하고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진 원인을 비판적인 언론보도 때문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정부가 잘한 것도 제대로 보도해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했습니다. 청와대내에서도 더 이상 신문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언론개혁의 정면돌파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김대중 대통령은 1월10일 언론개혁 발언 이후 국세청 세무조사나 검찰 조사에 대해 “어떤 외압도 없으니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처리하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언론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순수한 동기에서 언론개혁의 칼을 뽑았다고는 볼 수 없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언론사가 자율적으로 개혁하기를 기대했지만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상황에 왔기 때문에 세무조사를 실시했다”고 하지만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감정적 앙금’이 있었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특히 2001년 2월 시사저널이 공개해, 정가에 파문을 일으킨 언론개혁문건을 보면 동아 조선 중앙 등 빅3에 대한 여권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이 문건은 “동아 조선 중앙 등 반여 일간지들의 대정부 비판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면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언론개혁을 통해 ‘언론 방어벽’을 구축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이 문건은 1999년 10월 폭로된 중앙일보 북경특파원 출신인 문일현 기자(당시 휴직하고 중국 유학중)가 이종찬 국정원장에게 보낸 언론장악문건과도 논리적 전개가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민주당이나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은 습작품에 불과하다고 애써 무시했다.
어쨌든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 발표와 검찰 고발에 대해 여야 정당과 정치인, 방송사와 신문사, 메이저신문사와 마이너신문사, 시민단체들, 지식인들간에는 언론탄압이냐 조세정의냐, 비판언론 죽이기냐 재벌·족벌언론 개혁이냐, 정권재창출용이냐 김정일 답방 사전 정지용이냐, 곡학아세냐 홍위병이냐 등 다양한 설전들이 벌어지고 있다. 언론사 세무조사 발표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양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번 세무조사의 성격을 언론탄압-언론장악-언론말살로 규정하고, 목적은 김정일 답방 사전 정지-개헌과 정계개편-정권재창출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이번 세무조사는 조세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법 테두리 내에서의 언론개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올해 1월에 대통령이 언론개혁을 언급했을 때만 해도 여당인 민주당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당시 여권은 지난해 12월 청와대에서 있었던 정동영 파동의 여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2월초부터 국세청 세무조사를 실시할 때도 민주당 정치인들은 언론개혁에 대한 발언을 자제했다. 다음은 여당 중진의원의 말이다.
“대통령은 여당 의원들이 언론개혁에 대해 소극적 자세를 보이자 상당히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최고의원들이 나서달라고 여러번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세무조사는 행정적인 과정으로 축소하는 것이 좋지 정치인이 나서면 정치적인 논쟁이 돼버리니까 선뜻 나서기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여권 정치인 중 언론에 대해 가장 먼저 포문을 연 사람은 노무현 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이었다. 노장관은 올 2월7일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 ‘언론과의 전쟁 불사 발언’에 이어 “조폭적 언론이라는 말에 공감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노장관의 발언은 김대중 대통령의 속내를 읽고 나름대로 계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그 전날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언론사 세무사찰 즉각 중단을 주장하자 이를 맞받아 친 것이다. 그의 발언에 청와대는 침묵했고 당시 김영환 민주당 대변인은 “당과는 무관하다”며 발뺌을 했다.
한나라당은 노장관의 발언이 여권의 집단심리를 드러낸 것이라며 공격했다. 언론사의 세무조사 문제가 정치권으로 비화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노무현 민주당 고문은 언론전쟁의 ‘전위대’ 역할을 맡으며 동아 조선 중앙을 제외한 언론의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최근에는 김근태 민주당 최고위원이 텔레비전 토론에 나서 언론개혁 필요성을 역설하는 논리를 펴 김대통령으로부터 격려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나라당에서는 박종웅 의원이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언론사 세무조사의 정략적 성격을 성토하고 나섰다. 세무조사에 군사작전처럼 대대적인 인력을 투입한 것은 언론개혁보다는 비판언론 죽이기 의도가 있다는 것.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도 자신의 홈페이지에 언론사 세무조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글을 계속 올려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홍사덕 의원은 KBS 심야토론에서 언론사 세무조사가 김정일 답방 사전정지용이라는 세간의 소문을 전해 정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세무조사라는 행정적 행위가 ‘전쟁불사’ 발언으로 정치적 싸움으로 비화되고 다시 ‘김정일 답방 정지용’이라는 발언으로 번지면서 김대중 정부의 정체성 문제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이번 세무조사의 성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시민단체들과 일부 신문과 방송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언론개혁의 필요성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고 공감대를 확산시켜 언론개혁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
1998년 8월27일 30여개 언론·시민단체가 모여 출범한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련)는 첫 사업으로 ‘신문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에서는 신문의 소유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영향력이 큰 신문일수록 최대주주의 지분한도를 더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처럼 언론개혁을 지향하는 단체의 출범에 대해 한겨레신문과 대한매일은 관심있게 보도한 반면 다른 언론들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언개련은 ▲언론법제 개선운동 ▲수용자 운동 ▲대안매체 운동 등 3가지 과제를 내걸고 방송법 민주적 개정, 정간법 개정안 입법청원, 해직언론인 명예회복특별법 제정 촉구 등의 활동을 해왔다.
언개련의 밀고 당기기
그러다가 올해 1월11일 김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언론개혁을 언급하자 언개련은 1월17일 성명서를 발표, “그동안 시민단체들의 요구를 수렴한 것에 대해 환영”은 하면서도 “더이상 언론개혁에 개입하지 말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달라는 요구였다. 그후에도 언개련은 정부당국이 주춤하는 듯하면 ‘질책’하고, 자기들의 요구수준에 맞는 조치를 취하면 ‘환영’하는 식으로 ‘언론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한편 한겨레 등 일부언론은 언론권력 시리즈와 칼럼을 통해 동아·조선·중앙일보를 집중공격했다. MBC 등 방송도 기획특집 등을 통해 동아·조선·중앙일보를 공격했다. 언론계는 마치 동아 조선 중앙이라는 진영과 나머지 진영으로 양분되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언론계의 분열 현상에 대해 KBS의 한 직원은 “주구언론과 수구언론과 들러리언론간의 싸움”으로 표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작가 이문열은 ‘정부없는 신문론’ ‘홍위병론’ 등 신문칼럼을 통해 언론개혁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펼쳤고, 민주당의 추미애 의원은 곡학아세론으로 이문열씨를 공격했다. 이외에도 많은 논객들과 지식인들이 각종 매체에 세무조사에 대한 지지와 반대 입장을 밝혔다.
신문에 종사하는 한 간부는 언론개혁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동안 보수진영은 정치권력을 쥐고 군과 경찰이라는 물리력에 주로 의존했다. 언론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군과 경찰력이 김대중 정권의 손에 들어가자 보수진영에게 남은 것은 보수언론과 보수야당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김대중정권은 서울 강남의 주류층이 드디어 자기 보호의식을 갖기 시작하고 반DJ정서가 보수언론을 통해 확산되는 듯하자 이들 언론을 타격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해도 지지도가 오르지 않자 언론개혁을 결심한 것이다. 결국 양 진영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지금 김대중 정권이 밀어붙이는 방식을 보면 진다는 가정은 없는 것 같다. 이긴다는 자신이 없었으면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향후 전망은 어떻게 될까. 현직언론인들과 정치권의 전망을 종합해보면 두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언론지형의 변화론이다.
“현정부의 언론정책 중 하나는 보수언론의 영향력 축소인데, 무가지는 국세청에서 때리고 강제투입은 공정거래위에서 때렸다. 그동안 보수언론의 영향력은 방송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막강했다. 그러나 세무조사 등으로 앞으로 신문시장의 파이는 줄어들 것이다. 물론 마이너 신문의 파이도 줄어들겠지만 상대적인 비중에서는 메이저가 줄어들고 마이너가 증가할 것이다.”
둘째는 기존구도의 강화론이다.
“정부가 정간법을 통해 소유지분을 제한하고 편집 경영 소유 분리를 해야 하는데 소유지분의 제한은 정부가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위헌의 소지가 있는데다가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의 힘이 정부보다 세기 때문이다. 결국 언론개혁은 실패하고 기존구도를 더 강화시켜 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인규 경향신문 미디어팀 부장이 지난 4월3일 새언론포럼이 주최한 ‘언론개혁의 바람직한 방향과 과제’에서 한 말은 아직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김대중 정부의 언론개혁조치라는 것이 과연 순수하게 언론개혁을 위한 것이냐를 솔직하게 봐야 한다. 어떤 정략적인 측면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짜 언론개혁에 뜻이 있었다면 왜 취임 초에 하지 않고 3년이나 지나서 시작하는가. 1월11일에 김대중 대통령이 언론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 후 세무조사도 하고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조사했다. 족벌신문이라고 하는 데서는 언론탄압이라고 말하고 한겨레 등에서는 언론개혁이라고 하는데, 모두 진실의 일면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전체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언론개혁이냐 탄압이냐를 가지고 설왕설래하는 것보다는 진정한 언론계의 개혁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언론개혁의 핵심은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과 소신에 따라서 글을 쓸 수 있게 만드는,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를 없애는 거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