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 ―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No sabemos lo que nos pasa, yeso es lo que passa.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아름다운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아내의 모습. 나는 차갑게 식어버린 아내를 부둥켜안고 잠 들곤 했다. 내 살갗 속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은 마치 아내의 숨결인 양 느껴졌다. 사랑을 나눌 때처럼 아내의 몸에 입을 맞추고, 아기가 엄마의 품속에 파고들듯 아내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영혼이 빠져나가 이제는 썩어서 흙이 될 살 껍질에 불과하지만, 아내의 영혼이 거주하던 그 육체, 나와 숱한 밤을 함께 보냈고, 나에게 부드럽고 따스한 체온을 전해주던 그 육체는 내게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내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례용품이 품귀현상을 빚고 있어, 차례를 기다리려면 몇 달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절망스러우면서도 어쩌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생각 끝에 열 배 가까운 웃돈을 얹어주고 장의사에게 목관을 하나 구입했다. 그리고 아내가 즐겨 입던 드레스를 입혀 밤을 틈타 아내의 시신을 차에 싣고 동네 뒤편 자그마한 동산으로 올라갔다. 햇볕이 잘 들 만한 양지 바른 곳을 골라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아내의 시신을 담은 관을 내렸다. 나는 흙을 덮기 전에 아내의 얼굴에 천천히, 나의 온 애정을 담아 입맞추고 나서 흙을 단단히 덮어 나지막한 봉분을 만들어주었다. 그날 나는 동이 터올 때까지 아내의 무덤을 지켰고, 슬픔으로 빚은 눈물을 한 잔의 술 대신 그녀의 무덤에 떨궜다.
그렇게 나는, 아내와 마지막 작별을 했다.
아내가 죽자, 나는 세상사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이 세계 전부가 무너져내린 듯한 절망과 슬픔, 적막과 고독이, 밤이 되면 어둠이 대지에 찾아들듯 죽음의 유혹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최 목사의 말을 떠올렸다. 그 순간, 그의 말이 진실이길 갈망했다. 그렇다면 나는 저승에서라도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죽음의 다리를 훌쩍 건너기만 하면 될 것이니. 하지만 나는 망설였다. 맹렬하게 달려드는 죽음의 유혹에 나는 격렬하게 흔들렸지만 내 속의 무언가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미련조차 없는데. 내 삶의 버팀목이던 아내마저 죽고 없는데. 죽으면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죽음이 두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죽음 뒤의 황홀한 세계를 맞는 기쁨의 강도를 더 높이기 위해 생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감내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끝까지 살아남아서 이 세계의 파국을 지켜보는 증인이라도 되고 싶은 것인가? 많은 젊은이들처럼, 짧은 순간이나마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율스런 삶의 폭발을 경험하고 싶은 것인가? 이 세계의 멸망을 냉소적으로 즐기려는 것인가? 나는 그 모든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내가 없는 불 꺼진 방에서 병든 짐승처럼 침대에 쓰러져 누운 채 며칠을 보냈다. 죽음의 유혹과 그것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어떤 존재 사이에서 나는 처참하게 찢어지고 있었다.
나는 끝없는 혼돈과 분열의 심연으로 깊이깊이 가라앉았다.
갑작스런 어떤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와아!” 하는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떴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날카롭게 두 눈을 찔렀다. 침대에 쓰러져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던 모양이다. 박수와 환호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베란다에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거기에는 이상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태양이 내리쬐는 아파트 공터에 많은 사람 모여 있었다. 그 중앙에 사형대 같은 물체가 높이 설치되어 있고, 한 남자가 그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망설이다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몰려든 군중 사이로 비집고 들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그 물체는 분명 사형대였다. 중세 시대에나 쓰였을 법한 그런 사형대. 나무로 만든 야트막한 단이 설치되고, 그 단 위에는 밧줄이 매달린 철봉같이 생긴 가로대가, 지상으로부터 15미터 높이로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엔 목을 졸라맬 밧줄 네 개가 기다랗게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 높이 치솟은 사형대를 올려다보았다. 하늘 꼭대기에서 불타는 듯 이글거리는 태양빛 때문에 사형대의 밧줄은 마치 저 빛나는 하늘 어딘가에서 내려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눈부심을 견디지 못해 시선을 떨어뜨렸다. 밧줄이 내려진 곳마다 자그마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 의자만 치우면 곧장 목에 걸린 밧줄이 숨통을 막아 단번에 끊어놓을 것이다. 사형대 오른쪽 끝에는 검은 복면을 한 남자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혼자 쓸쓸히 자살하는 것보다, 혹은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어 익사하는 것보다, 혹은 가스 중독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보다, 이 복고적인 죽음의 방식이야말로 여러분에게 한층 더 품격 있고 예술적인 죽음의 기회를 맛보여줄 것이오. 이제 죽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는 자, 이 세계의 몰락을 견딜 수 없는 자, 생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에 지친 자, 죽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갈망하는 자, 영원한 소멸을 꿈꾸는 자는 이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오.
게다가 훌륭한 보너스도 있지 않소! 여기선 혼자 죽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것도 자살자가 죽기 전에 이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일이오. 이 자리를 지켜보는 우리는 이 위대한 자살자들의 죽음을 증거하는 참관인이 되는 것이며, 이들의 참회와 분노와 애환을 경청하고 심판하는 판관이 되는 것이며, 우리를 통해 이들의 삶은 의미 있는 예술적인 죽음으로 승화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자살자를 모실 순서입니다. 여러분 박수!”
그 남자의 말이 끝나자 사형대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우레같은 박수를 보냈고, 어떤 이들은 휘파람을 불어댔다. 사람들 틈에서 먼저 네 사람의 신청자가 나왔다. 그들은 사형대 위로 올라가 각각 의자에 올라서서 둥근 밧줄 구멍에 목을 걸었다. 그러자 관중들로부터 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네 사람 중 한 명은 여자였다. 그녀는 검정 악기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일렬로 선 채로 관중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생의 체념과 죽음의 긍정에서 우러나는 여유와 담담함이 서려 있었다. 사형대 가장 왼쪽에 서 있는, 네 사람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늙은 자살신청자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렇게 많은 대중 앞에 서본 지도 꽤 오래된 것 같군요. 이중에는 혹시 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군중 가운데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저 사람 누군지 알아보았어! 저자는 시의회 의원이었소. 한 번은 부시장도 한 적이 있는 자요. 그렇지 않소이까!”
그 말을 듣고 늙은 자살 신청자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래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정치인이란 원래 대중의 이목을 양식 삼아 사는 인간이라,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비난을 즐기는 법이지요. 우리 같은 정치인들이 투쟁과 갈등, 전쟁을 즐기는 것도 그 심리 이면에는 그런 과장된 혼란으로 자신의 존재를 대중에 부각하고 역사 속에 영원히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각인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이 숨어 있는 것 아니겠소? 오래 전에 이 세계를 피의 광풍으로 몰아넣은 히틀러란 작자를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것이오. 대중은 그를 짐승 같은 인간, 피에 굶주린 살인마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종족은 겉으로 표방하는 반대와는 달리, 히틀러와 같은 무한의 권력과 능란한 세치 혀로 수천만 대중을 자신의 발 아래 무릎 꿇게 하는 그 위대한 능력을 흠모하는 은밀한 욕망을 감추고 있지요.
그렇소, 그는 세치 혀로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국민에게 영광스런 광휘를 부여해주었던 것이오! 알렉산더 대왕, 칭기즈 칸, 나폴레옹 같은 영웅들을 기억해보시오! 그들은 모두 잔인한 살육과 무자비한 피의 잔치를 벌였지만, 인류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이름은 면면히 빛을 발하지 않소? 권력자들이란 호시탐탐 세계 만방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절대적 권력, 신과도 같은 권력을 소유하기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영웅은 위기에서 태어난다는 말이 있지만, 실은 우리 같은 권력자가 세상의 위기에서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실상이었소! 위기를 두려워하는 정치인은 결코 위대한 권력자가 될 수 없소. 권력의 본질은 바로 파시즘이지요.” 그러자 군중 속에서 우우우 - 하며 비난하는 함성이 터져나왔고, “저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야! 어서 죽기나 해!”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서두르지 마시오. 난 지금 어차피 죽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고, 마지막으로 솔직하게 고백하려는 것이오. 여러분, 생각해보시오! 신이라는 작자도 없는 세상에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이오? 우리 인간에겐 가능한 모든 극단적인 행위조차 허용되지 않겠소? 자유, 우리 인간이란 종족이 꿈꾸는 그 절대적인 자유를 위해서라면, 한 인간이 자신의 절대적인 힘을 위해서 수백만, 수천만을 전쟁으로 몰아넣어 죽이고, 또 그와 똑같은 수의 인간을 굶어 죽게 만들거나 이런 사형대에 세운들, 그게 무슨 상관이겠소. 신이 부재하는 세계에서는 오로지 인간만 법과 도덕을 세울 수 있을진대, 권력과 힘을 가진 강자만이 인간 세상에 법과 도덕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 아니겠소. 그렇소, 강자만이 법과 도덕, 그리고 모든 인간적 가치를 부여하는 입법자요. 양심이니, 동정이니, 연민이니 하는 따위의 도덕률은 깨지기 쉬운 사기그릇 같은 나약한 인간들을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들이오.
위대한 힘을 가진 입법자들에겐, 도덕률이란 그저 밑 닦는 휴지에 불과할 따름이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히틀러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높은 자유를 입법화한 인간이었으며, 신의 위치에 올라선 인간이었소. 그는 비록 패배했지만, 그는 10년 넘는 세월을 그런 위치에서 이 세계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오!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절대 자유를 추구했으며, 그가 내세웠던 온갖 이데올로기는 단지 어리석은 가축떼 같은 대중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기 위해 내세운 장식품에 불과했던 것이오. 내게도 지금 히틀러와 같은 절대권력이 주어진다면, 오, 내게 그런 권력이 주어진다면, 나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십억 인구의 90퍼센트를 불태워 죽이고, 총칼로 학살한다고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오.”
그때 웅성거리는 군중 가운데 한 청년이 앞으로 썩 나서더니 그 늙은 권력자를 향해 소리쳤다.
“당신에게 그런 권력이 주어진다 해도 당신은 절대자유를 얻을 수 없을 것이오! 절대권력은, 결국 대중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자유는 결국 부자유에 불과한 것입니다. 당신의 절대권력으로 당신이 기반으로 삼는 모든 대중을 학살해버렸을 때, 당신의 절대권력은 무(無)에 봉착하게 될 것이오. 그러므로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인 자유는커녕 절대적인 부자유만을 초래할 뿐이오. 자기모순에 봉착하고 만단 말입니다! 히틀러의 결말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소! 그는 절대적인 부자유 속에서 비참한 종말을 맞았을 뿐이오! 극단적인 가학(加虐)에서 비롯되는 그런 자유는 결국 힘의 부재요, 무(無)란 말이오!”
청년의 외침에 늙은 권력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그 청년을 매섭게 노려보다 큰 소리로 외쳤다.
“망할! 몹쓸 놈 같으니! 남이 할 말을 가로채버리다니!”
늙은 자살 신청자는 청년을 향해 침을 탁 뱉더니 한쪽 발로 의자를 걷어차 버렸다. 의자가 덜컹하며 앞으로 넘어지자, 그의 목에 걸린 밧줄이 팽팽해지더니 사지를 바르르 떨다 몸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군중 속에선 한숨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깊은 정적이 흘렀다. 밧줄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죽은 권력자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시커먼 똥줄기가 빗물처럼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음 차례로 오십대쯤의 뚱뚱한 중년 남자가 말을 꺼냈다.
“생각해보니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소이다. 나는 그저 성실히 일했을 뿐이오.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 나오는 일개미들처럼 밤낮없이 생산 현장에서 생애를 보냈고, 그 결과 남들이 부러워하는 큰 부를 축적했을 뿐이오. 나는 거창한 이념 따위는 모릅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학교에서 배웠던 가치들, 즉 내가 추구하는 이익이 다수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자유주의의 기본 이념뿐이오. 나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애덤 스미스라는 학자가 ‘국부론’이라는 책에서 권고한 대로 성실하게 살아왔소.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며, 필연적으로 사회에도 가장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라고 그 책에서 말한 대로, 나는 성실히 나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해왔으며, 때때로 동정심을 발휘하여 내가 모은 부의 일부를 사회에 헌납하기도 했소. 물론 때로는 사회적 동정심에 대해 반발심을 품은 때도 있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하게 마련이고, 따라서 개개인의 능력차에서 비롯되는 부의 차이도 자연의 법칙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사회적 동정심은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개인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에게 비참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그 비참한 감정이 오히려 사회적 증오로 바뀔 뿐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솔직히 말하건대, 이런 내 속마음을 공공연하게 표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다수는 무능력한 개인들이어서, 굳이 그들의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켜 내 명예를 손상시킬 하등의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무능력하고 나약한 인간들은 그저 동정을 베풀기를 원하고, 또 그들에게 서푼어치 동정만 베풀어도 눈물을 찔끔거리며 감동을 해 동정을 베푼 자를 존경어린 눈으로 바라보니까 말입니다. 나는 내가 이룩한 부의 제국에서 황제처럼 군림했고, 부가 가져다주는 권력과 명예를 최대한 누렸으며, 내 개인의 부가 결국 국민 총생산의 일부로서 국부(國富)에 기여한다는 자긍심을 갖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살하려는 거요?”
군중 사이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자 그 부자는 고개를 들고 멍한 얼굴로 태양이 내리쬐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신앙심에서도 남에게 뒤진 적이 없었소. 내가 헌금한 돈으로 지은 교회도 여러 개입니다. 나는 엄청난 부를 가졌지만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며, 가정에도 충실한 남편이고 가장이자, 부모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내가 가진 부나 명예가 아니라 내 영혼의 구제요 내 존재의 불멸이었습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두려워했고 죽은 후에 내 영혼이 올라갈 심판의 저울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자신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신이 사라진 뒤에 내게 남은 것은 절망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이 세속적인 세계에서 큰 부를 축적했지만, 이 많은 부가 내 영혼의 완전함을 보장해주는 황금 갑옷이 될 수는 없었으며, 죽음의 세계가 무(無)이건, 혹은 자유이건 간에, 도대체 이 생이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 인간이 이 세계에 내던져져서 기껏 황금만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그가 황금으로 만리장성을 쌓고 그 안에서 지낸다고 한들, 그의 뱃속에는 거지와 마찬가지로 똥만 가득 들어 있을 뿐인데, 그런 빈곤한 영혼의 빈곤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단 말입니까? 결국 나는 짐승처럼 살아온 셈이며, 그걸 생각하면 내 생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죽음이 내 유일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나는 자살로서 잘못 살아온 내 생에 대해 보복하고, 내 영혼에 회개의 눈물을 보태려 합니다.”
“그래도 당신은 부자니 행복하지 않았소!”
내 옆에 서 있던,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한 남자가 외쳤다.
그러자 그 부자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행복이라구요? 당신은 지독하게 가난해 보이는군요. 그 가난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었던 게 틀림없소. 당신에게는 행복이 황금의 소유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일 것이오. 하지만 그 어떤 황금도 당신 뱃속에 처넣을 수 없을 뿐더러, 당신의 영혼에서는 똥보다 못한 것일 뿐이오. 내가 이 자리에서 선언하건대,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당신에게 물려주겠소. 당신이 원하는 그 행복을 마음껏 누려보시오!”
그는 이 말을 마치자 지겹다는 듯 의자를 걷어찼고, 즉시 남자의 목은 90도로 꺾였다. 남자의 몸은 기다란 밧줄에 매달린 채 앞뒤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몇 사람이 조용히 박수를 쳤다.
이윽고 군중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자살 신청자 중 유일한 여자가 들고 있던 악기 케이스를 열고 그 속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군중이 잠시 웅성렸다. 여자는 삼십대 초반으로 누가 보아도 매혹적인 미모를 갖고 있었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와 검은 드레스 차림이 마치 연주회 무대에 올라선 것처럼 우아했다. 그녀는 목에 걸린 죽음의 밧줄과 기묘하게 대비되면서 섬뜩한 아름다움마저 풍겨내고 있었다.
여자는 목에 밧줄을 건 채 말없이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연주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조용히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그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바이올린의 쓸쓸하고 음울한 음색은 아파트 공터 위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군중들은 깊은 침묵 속에서 그녀의 연주에 귀기울였다. 나는 그녀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곡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 즉흥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영혼의 울림을 담은 자작곡을 연주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이올린 연주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여자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질끈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바이올린도 그녀의 감정을 따라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점점 격렬해지는 손놀림, 미친 듯한 선율의 파장. 군중 사이에서는 훌쩍이며 우는 자,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는 자, 오, 오! 하면서 감탄사를 뱉어내는 자까지 생겼다.
여자와 바이올린은 마치 죽음을 앞둔 연인이 열렬한 사랑을 담은 애무에서 시작하여 격렬한 엉킴과 최후의 터질 듯한 오르가슴으로 이어가듯이, 그녀 자신과 바이올린이 합체가 된 것처럼 신들린 듯이 연주했고, 찢어지는 듯한 선율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듯한 순간, 여자는 갑자기 발 밑의 의자를 밀쳐 버렸다. 쿠당탕탕 하며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이 꺾였다. 그리고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몸은 허공에서 검정 포대자루가 흔들리듯이 앞뒤로 건들거리며 떠 있었다. 그런데 바이올린과 활은 여자의 양손에 꽉 쥐어진 채 그대로였다. 여자는 죽음의 세계에도 자신의 바이올린과 함께 간 것이다.
여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군중사이에서 한숨과 탄식이 이어졌고, 흑흑흑 하며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바이올린 소리가 끊긴 공터에는 다시 적막이 흘렀고, 그 무거운 적막은 섬뜩하고 불길하여 마치 온 세계가 죽음에 처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바이올린과 활을 쥔 채로 기다란 밧줄에 목을 매단 검은 드레스의 여인이 허공에 둥둥 뜬 채 앞뒤로 흔들리는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눈을 돌리고 말았다. 모두 여전히 여자가 연주하던 바이올린 소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모두 그 자리에 굳어버린 동상처럼 멍한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어디선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군중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네 번째 자살 신청자였다.
“저는… 지금 생각하니 이 자리에 올라올 자격조차 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마저 듭니다. 차라리 자살을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 남자도 방금 옆에서 죽은 여자처럼 아직 젊어 보였다. 마흔이나 되었을까 싶은 그는 양복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벌써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하게 맺혀 있었다.
“저는 권력도, 명예도, 부도, 열렬한 신앙심도, 그리고 예술에 대한 교양도 없는, 그저 주어진 작은 것에 만족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합니다. 저보다 앞서 죽은 세 사람과 비교해 본다면, 저는 야심도, 능력도, 별다른 노력도 없이 살아왔습니다. 만약 제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저 역시 권력이나 부를 추구했을 것입니다. 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평범한 행복에 만족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부를 갖기를 열렬히 갈구했던지! 저는 하루에 열 시간 이상 회사를 위해 일했고, 한 단계라도 더 승진하기 위해 비굴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여러분에게 일일이 다 보고하기에는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에 비해, 자살이라는 고귀한 죽음의 방식은 저처럼 우유부단한 소시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귀족적인 특혜입니다. 저는 그 동안 숱하게 저 자신의 비루한 생에 환멸을 느끼고 자살 충동을 느꼈지만, 비겁하게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죽음의 공포를 회피해왔을 뿐입니다. 형편없는 소시민답게 죽을 용기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당신 책임은 아니지 않소!”
갑자기 군중 속의 한 사람이 큰소리로 그 남자의 말을 가로막았다.
모두 그 목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역시 넥타이를 맨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나 역시 이 사람과 같은 평범한 소시민이오. 유아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장장 25년을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기술과 기능을 배워야 했고, 회사에 힘들게 취직해서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고, 외국어와 새로운 기술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틈틈이 공부에 매달렸으며, 회사에서 언제 쫓겨날지 몰라 위아래로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습니다. 나는 짐수레에다 무거운 짐을 가득 싣고 주인에게 채찍을 맞으면서 허겁지겁 내달리는 노새처럼 그렇게 일상생활에 노예처럼 결박되어 살았습니다. 과연 그런 노새 신세인 우리에게 인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영혼이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과 여유가 있었겠습니까? 비난받고 탄핵받아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을 이렇게 노새처럼 만든 이 빌어먹을 세상이지,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었던 인간은 아니잖습니까? 저기 저 권력자와 부자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지, 힘없고 선량한 우리 대중에게 무슨 책임이 있단 말입니까? 하다못해 짐승들도 드넓은 들판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보잘것없는 양식을 위해 하루종일 일하지는 않거늘, 존엄한 우리 인간이 빵을 위해 이토록 비참하게 하루의 절반 이상을 바쳐야 하는 게 과연 누구의 책임입니까? 일에 지쳐 파김치가 된 몸과 정신으로 아까 저 아름다운 여인이 연주했던 음악에 귀기울이며 예술에 심취할 여유를 어떻게 가질 수가 있 겠습니까? 자살해야 할 것은 저 가련한 소시민, 우리의 가련한 형제가 아니라, 권력과 부와 지식을 독점해온 특권층임을 감히 누가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옳소! 옳소!”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요란하게 박수를 쳐댔다. 그때 말을 멈춘 채 침묵을 지키던 마지막 자살 신청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런 그의 큰 목소리 때문에 군중은 조용해졌다.
“모든 책임을 자신의 외부에 전가하는 것에는 저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계급적 적대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중산층이었지만,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와 다름없다고 여겼고, 제 처지에 불만을 느낄 때마다 그 불만을 외부에 전가해 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뀐다고 해서 과연 소시민적 우유부단함과 나약함이 금세 당당하고 강인한 정신과 고귀한 영혼을 소유하게 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노예 같은 삶에 익숙한 인간이 하루아침에 주인의 삶을 속속들이 닮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썩어빠진 비굴한 노예 정신을 갈아치우지 않는 한, 당신들의 두뇌는 여전히 노새의 두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노예들, 노예들, 오! 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정신의 노예들, 나는 나와 이 세상의 노예 근성에 구역질을 느꼈고, 이 구토를 참지 못해 나는 차라리 자살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의자를 힘껏 걷어찼다. 의자는 멀리까지 튕겨 나가 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힘찬 발길질 때문인지 밧줄에 매달린 남자의 몸은 이미 자살한 세 사람보다 더 세차게 앞뒤로 흔들렸고, 그림자도 함께 단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군중 가운데 입을 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거나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목이 꺾인 채 흔들리는 남자를 저주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온몸으로 타고 올라오는 전율 때문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껴 몸을 돌려 군중을 비집고 나가려 했다.
그때 “잠깐만!” 하고 나를 불러 세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복면을 한 남자가 단 위로 올라가더니 나를 겨냥해 손가락질을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저자를 잡으시오! 저자야말로 가장 먼저 사형대에 올라가야 할 인간이오. 저자를 잡으시오, 어서!”
그러자 내 주위에 서 있던 남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나를 붙잡았다. 나는 “왜 이러는거요!” 하며 몸부림쳤지만 그들은 완강하게 내 몸을 낚아채고는 단 위로 끌고 올라갔다. 복면을 한 남자가 다시 외쳤다.
“저자의 목에 어서 밧줄을 거시오!”
복면의 명령에 따라 남자들은 마지막 남자를 끌어내리고 나서 단 아래로 떨어진 의자를 주워 올려놓았다. 이윽고 그들은 나를 의자 위에 세우고는 목에 밧줄을 걸었고 내 손을 등뒤에서 밧줄로 힘껏 묶어버렸다. 나는 꼼짝없이 사형대에 올라서게 되었다. 여차 발을 삐끗하면 덜컥, 하고 밧줄이 내 목을 죄어버릴 것이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자를 탄핵해야 합니다. 이 자는 비겁하게도 가장 먼저 자살했어야 할 인간임에도 군중 틈에 숨어서 타인들의 자살을 훔쳐보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자가 누군지 아시오? 바로 우리 인간 사회를 이토록 궁지로 몰아넣은, 바로 기자, 지식인, 학자라는 이름의 종족이오!”
그러자 군중 사이에서 “죽여라! 죽여라!”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복면을 한 남자는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우고는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기자나 학자야말로 가장 먼저 심판대에 올려야 할 종족입니다. 지식이 인간 세상에 가져온 죄악을 논하자면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밝게 빛나는 태양이 물러갔다가 내일 다시 떠오를 때까지 열거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첫째, 인간의 영혼과 내면을 고양하는 지혜(Wisdom) 대신 분별적인 지식만 추구하여 인간의 관심을 외부의 대상세계로 축소시킨 죄! 둘째, 이성을 신격화하고 논리만 숭배한 결과, 이 세상에서 신을 추방해버린 죄! 셋째, 인간의 이성을 지나치게 높인 나머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착취하고 파괴하게끔 유도하여 인간과 우주의 통일성을 잃어버리는 오만과 죄악에 빠지게 한 죄! 넷째, 전에 자살한 소시민이 말한 것처럼 대다수 평범하고 선량한 인간들에게 지식에 대한 과도한 부담을 지워서 소박한 삶에 대한 갈망을 앗아간 죄! 다섯째, 온갖 이데올로기로 권력자들에게 아첨하거나 그들 자신이 권력자가 되어 대중을 기만하고 볼모 삼아 이데올로기의 실험대상으로 삼은 죄! 여섯째, 자유언론을 빙자하여 사실상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퇴폐적이고 왜곡된 기사로 인간의 심성을 타락시키고 참된 진실을 은폐한 죄!”
“죽여라, 죽여라!” “더 들을 필요도 없다. 목을 매달아라!” 군중은 웅성대며 소리쳤고, 돌팔매질을 해댔다. 복면을 한 남자는 음산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무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복면을 쓴 남자가 갑자기 복면을 확 벗었다.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복면 뒤에 나타난 얼굴은 바로 내 아내였다. 아내는 나에게 바싹 다가오더니 싸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예수도 죄가 없었지만 십자가에 매달렸지요.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법정에 세운 자들이 죄인이었는 데도 말이에요. 하긴 예수도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 역시 인간의 껍데기를 쓰고 온 이상, 그는 인간의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거지요. 예수는 그걸 알았던 거예요.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만일 지식에 죄가 있다면, 당신의 머릿속에 가득 든 그 지식들도 탄핵의 대상이 될 것이니, 당신의 목을 매다는 건 결코 불의가 아닐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당신의 아내를 죽게 만들었어요. 사랑보다 더 큰 무엇을 위해서였죠? 일? 명예? 출세? 아니면 당신 자신?”
“오, 여보… ”
“그래요.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이제 우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지옥에서.”
아내는 말을 마치자 오른 발로 내가 딛고 서 있는 의자를 힘껏 걷어찼다.
나는 비명을 질렀고, 의식이 까마득해지다간 희붐한 미지의 공간 속으로 새처럼 날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번쩍 눈을 뜨고 말았다. 온몸이 마비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거칠게 숨을 몰아 쉬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새벽 어둠이 방 안 가득 밀려 들어와 있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식은 땀에 온몸이 젖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치 현실처럼 생생했던 꿈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목덜미가 욱신욱신 쑤셔왔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고,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는 듯한 고통에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3
거듭되는 내면의 고통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컴퓨터에 접속해 신문들을 훑어 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 철학자가 쓴 칼럼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날카로운 질문은 폐부를 찔렀다. 나는 그 칼럼을 읽고 또 읽었다. 그 칼럼은 미궁을 헤매는 나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인간이 동물에서 벗어나 죽음을 인식하는 유일한 동물로 진화한 이래,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왔다. “이 우주의 기원은 무엇인가? 신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우리는 어떤 힘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기쁨 속에서 혹은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누구의 의지 때문인가?”
기원전 수백년경에 ‘우파니샤드’에서 인도인들이 던진 이 형이상학적인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고뇌의 원천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철학과 종교, 과학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구하려는 인간적 노력이었다. 이 오래 되고 반복되는 질문에서 드러나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비극성!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순간부터, 인간이란 존재는 이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답을 구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비극적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순박한 고대인들은 직관적 통찰을 통해 발견한 신성(神聖) 혹은 자연과의 조화에서 삶의 의미를 구했다. 서구의 중세 시대조차, 기독교의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의 품속에서 정신적 삶을 구가하고 있었다. 아, 차라리 그 시대 인간들은 행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성을 발견한 근대 이래로 오늘날까지 시대의 인간은 비극적 이성의 사유를 철저하게 추구하여 신을 추방하고, 대신 인간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는 데서 삶의 가치를 찾았다. 역설적인 사실은, 인간 이성이 최고도로 발전시킨 현대 과학으로도 ‘우파니샤드’가 던진 이 질문에 해답을 주기는커녕, 무기력감만 더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현대 과학은, 그 질문이 담고 있는 가치론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철저히 유보하거나 외면한 채, 과학만을 위한 과학의 맹목성에 몰두하고 있었다. 혹은 현대 학문과 과학의 지나친 세분화와 전문화가 위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우리 인간이, 정확하게는 기업과 결탁한 과학이 공공연하게 생명을 복제하기 시작한 때부터, 인간의 몰락은 이미 예고되어왔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 생명이라는 원자핵을 가진 하나의 사물로 전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명 공학’이라는 단어는 이미 인간을 하나의 공학적 연구 대상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태도는 사실 저 먼 과거시대의 서구 철학인 데카르트주의에서 연원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세기 후반기에 일군의 철학자가 데카르트주의를 신랄하게 공격했고, 실제로 많은 부분을 해체했지만, 그들은 그러한 부정적 해체와 파괴 뒤에 새로운 긍정적인 종합을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러한 무차별적인 해체와 파괴로 인해 현재 상황은 인식론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가치의 아노미 상태로 빠져들었고, 이런 상황은 금세기 들어서도 지속되고 있다. 오히려 지나친 상대주의는 저급하고 천박한 니힐리즘과 곧잘 연계되어 오늘날 가치부재의 시대를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데카르트주의는 여전히 맹위를 떨쳤고, 그 극한점을 향해 치달았다. 데카르트주의가 초래한 근본적인 악은, 인간과 우주를 신성성(神聖性)의 숨결로 감싸주던 우주적 통일성을 파괴했다는 데 있다. 인간과 우주는 신의 품속에 안전하고 통일된 평화를 구축했는데, 데카르트주의는 그 신을 걷어차 버렸던 것이다.
신이 떠난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 이성의 우주적 주권을 선포했던 것이다. 데카르트주의란, 바로 그러한 인간중심주의적 가치관이었다. 그 결과 우주와 우주 내의 모든 사물 ― 생명적인 것이든, 비생명적인 것이든 간에 ― 은 신성성을 상실하고, 단순한 사물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도록 강제되었다. 무엇보다 인간과 우주, 그리고 사물이 대립적이고 적대적 관계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이다. 우주와 사물은 이제 인간에게 단지 인식을 통한 지배와 인간적 유용성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 데카르트주의가 말하는 것은 결국 다음과 같다. “이성이 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지배할수록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며, 인간은 그런 과정을 통해 고귀한 자기 완성이라는 목적에 다가간다.” 바로 이것이 계몽적 이성의 교리이며, 근대와 오늘날 초현대라는 시대 전체를 떠받치는 정신이었던 것이다.
계몽적 이성이 확립한 그러한 신화, 즉 사물에 대한 인간의 주권과 지배권은 성경 창세기에 대한 교묘한 해석으로 한층 정당화하고 합리화했다는 점을 잊을 수는 없다. “하느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 28)” 근대 기독교(프로테스탄티즘을 포함한)는 창조주인 신을 거부하지 않는 한, 피조물인 이 우주에 대한 인간의 주권은 그대로 인정했으며, 기독교와 데카르트주의의 기괴하고 섬뜩한 결합으로 서구적 이성은 비서구사회에 대한 약탈적인 제국주의마저 정당화할 수 있었다(실제로 데카르트는 여전히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이 식민지 착취와 약탈 행위의 과정에서 어떻게 기독교와 근대 국가가 행복하게 협력할 수 있었던가를 드러내는 기원 설화다. ‘야만과 문명’이라는 또 하나의 신화적 도식이 현대인의 두뇌 속에 각인되는 실로 거대한 착각의 역사의 시원이다.
진실로,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초현대적 물질문명 전체는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주의적 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초현대라는 지금의 시대도 결코 그 신화를 극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 초현대인의 가치관 속에 집단무의식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데카르트주의는 일종의 뿌리깊은 신화다. 유물론적으로 서구화한 모든 지구촌 사람들은 이미 수백년 전에 만들어진 그 신화에 삶의 근본적인 가치관을 의존하고 있다. 이성·진보·개인의 자유 등. 그런데 데카르트주의적 인간은 비극적 인간이다. 데카르트주의적 삶은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우주와 공동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이기 때문이다. 신의 예정, 조화조차 없는 라이프니츠적 단독자의 좌충우돌에 의한 자기 파멸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니체가 예견한 니힐리즘을 훨씬 넘어서는 비극을 안고 있다. 이것이 인간 존재론적 비극성의 근대적 특이성을 이루는 것이다.
오늘날의 초현대적 인간도 역시 비극적 인간이다. 데카르트주의에 의해 신이 죽임을 당하자, 그와 병행하여 인간도 죽기 시작했다. 신의 죽음은 바로 인간 자신의 죽음이었다. 오늘날 인간이란 존재가 기계가 되고, 여타 생물체와 다를 바 없는 단지 생물체의 한 분과로 분류되고, 길거리에 나도는 하찮은 사물처럼 존재하게 된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성에 의한 신의 살해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죽어버렸거나 혹은 이 세계로부터 숨어버린 신을 인류가 다시 불러들이고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 인간은 스스로 이성에 한계를 그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이미 백 년이 넘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인간의 몰락은 이백 년 동안이나 계속된 경고에 귀를 막고 있는 과학적인 현대인들에게 주는 이 자연 세계의 답변이 아닌가! 자살 페스트는 영혼,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묻기를 포기해버린 이성 과학시대의 기막힌 결과가 아닌가! 어쩌면 이 자살 페스트의 광기가 한바탕 인간 사회를 휩쓸고 지나가면, 로마 문명의 몰락 이후 신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처럼, 신중세(新中世) 시대라고 불릴 만한 그런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최 목사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역사 속에서 삭제되고, 신 앞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인간 자신에게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리고 사태에 대처한다면, 그리하여 인간과 세계가 전일적인 통일체로서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가 나선다면,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우리는 고대 인도인들이 던졌던 그 질문에 새로운 답을 내야만 한다.」
그 글을 읽고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어가는 말기 암 환자처럼 방 안에서 뒹굴며 절망에 빠져 있을 게 아니라, 거리로,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죽음을 뒤로 미루고, 우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 뒷동산에 있는 아내의 무덤을 찾은 후에, 차를 몰고 사무실로 향했다.
4
나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그렇다고 사태가 달라진 건 없었다. 내가 일주일 가량 자리를 비운 동안 편집부 기자 여러 명이 또 세상을 포기했다. 곳곳에서 배달사고가 나고 지국들은 문을 닫았으며, 그래서 신문을 만들고 배포하는 일도 어려워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기업들의 광고가 줄어드는 바람에 지면도 대폭 줄었다. 게다가 모든 신문, 방송들은 시당국의 홍보매체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당국의 지원이 아니라면 신문을 발행하는 일 자체가 곧 중단될지도 몰랐다. 때문에 언론들에서는 ‘자살 반대 범국민 결의대회 열리다!’ ‘자살 반대 천만 서명운동 개시’ ‘시장, 직장 복귀 촉구 담화 발표’ 따위의 반자살 캠페인성 기사만 가득 실리고 있었고, 방송에서는 종일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 성실하게 일하는 직장인의 모습을 담은 필름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최 목사의 자살사건이 발생한 지 2개월째로 접어드는 동안 자살의 광기는 블랙홀처럼, 우리의 삶을 그 검은 구덩이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 세계는 고장난 시계바늘처럼 정상 궤도를 벗어나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죽음과 파괴, 끝 모를 광란의 소용돌이뿐.
거리에는 자살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시의 홍보 차량과 무장 경찰 차량이 사이렌을 울리며 질주했다. 종교계에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자살 반대 선도위원회’ 소속 사람들이 길거리 곳곳에서 행렬을 이루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외쳐댔다.
“자살이 사회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자살자들을 기다리는 곳은 지옥뿐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가족을 버리시렵니까?”
“아빠, 엄마, 죽지 마세요.”
그러나 행인들은 그들의 외침은 외면한 채,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기만 했다.
만일 이 세상이 곧 망한다면, 혹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를 운명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경건하게 삶을 회고하며 신에게 회개 기도를 드리는 것? 억제하고 있던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는 것? 마음껏 타락하고 방탕해지는 것? 아니면, 이 세계가 무의미한 것을 알면서도 성실히 생에 임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반항이다, 라고 알베르 카뮈처럼 선언하며 최후의 순간까지 가족에, 일에, 사랑에 충실하는 것? 아니면 희생 정신을 발휘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살아남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몸부림치는 것…?
“신이 부재하면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었다. 신의 부재가 증명되고 이 세상에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의미있는 가치도, 구속도 발견할 수 없는 상태.
그런 상태는 일종의 유토피아였다. 인류가 오랫동안 꿈꾸던, 아무런 금기 없는 무제한적 자유가 부여된 유토피아.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누렸을 법한(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금단의 열매는 있었다. 인간은 그 최소한의 금기조차 위반하고 만 동물이지만).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침내 지금과 같은 혼돈스럽고 비정상적인 상황을 즐기려 드는 부류가 생겨났다. 그들은 이 사태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는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이런 기대감이 높았다. 그들은 학업과 취업이라는 무거운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억눌린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길 원했다. 욕정과 유희, 방종이 의미 있는 자유를 대체했다.
그들은 설사 나중에 사태가 정상화된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한, 그들에게는 풍부한 일자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과 또한 지금과 같은 비정상적인 대혼란과 광기의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나중에 그 어떤 도덕적 비난으로부터도 면제받을 수 있는 불가피한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간파하고 있었다. 또 이 세상에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한들 그들로서는 특별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정상적인 시기에, 힘겹게 경쟁을 뚫고 사회에 진출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남은 인생을 치열한 출세 경쟁과 권태로운 일상 생활 속에서 지지부진하게 살아가다 죽느니보다는, 젊은이답게 폭발적인 에너지를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소모해 버리고는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에 갈 필요가 없었다. 휴교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어도 그들은 결코 학교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학교나 도서관에 가는 대신에 밤이면 차를 타고 몰려나와 고함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무법자처럼 한적한 거리를 질주했고, 그들끼리 싸움을 일삼았으며, 강간과 방화, 술집이나 여타 가게들을 약탈했으며, 공권력에 공공연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때로는 광란의 자살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술에 만취한 채 대로를 역주하여 마주 오는 차와 충돌하여 죽어버리거나, 다리 난간을 부수고 강물로 질주하는가 하면, 경찰서를 습격하여 총기를 강탈한 뒤, 마치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듯이 거리에서 경찰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임꺽정이라도 된 듯 부자촌을 습격해 재물을 강탈하고는 돈을 마구 뿌리고 다니는 사례도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러한 사회 파괴적 범죄나 자살 사태만 아니라면, 시 당국으로서는 그 모든 인간 행위를 허용할 태세가 되어 있는 듯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사회의 최종 파국을 막을 수 있기만 바랐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정부는 이러한 모든 사태에 대한 통제력을 급격히 상실하고 있었고, 공권력의 두 기둥인 군과 경찰에서도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시 당국도 혼란을 억제하고 질서를 회복할 힘을 잃어버렸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군과 경찰에서도 자살 사태는 예외가 아니었으며, 때로는 무기를 소지한 채 병영을 이탈하는 사건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턱없이 부족한 경찰력 때문에 고민하는 와중에도 경찰 중에 국법질서를 수호하는 일보다는, 그 작은 공권력을 개인의 쾌락과 치부에 사용하는 자가 급증해 시 당국은 시민과 언론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시 당국은 마침내 최후의 카드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은밀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5
마침내 마곡시 당국은 ‘난국 극복 시민회의’란 것을 소집했다. 시 당국으로서는 마지막 카드를 내민 셈이다. 이 회의에는 시 당국자뿐 아니라 시의회 의원, 종교계, 각 이익단체 대표, 사회단체 대표들, 그리고 학계 대표들도 함께 참여했다. 회의가 열리는 의사당은 군과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했다. 살아 남은 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 회의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회의는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는데, 나는 기자석에 앉아 그 회의의 진행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위기의 중압감 때문인지 회의는 침울한 분위기에 짓눌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신문방송, 그리고 인터넷을 비롯한 매스컴이 도마에 올랐다. 매스컴의 상업주의, 선정주의, 대중추수주의가 죄목으로 비난되고 탄핵되었다. 이 악마적인 재앙의 원죄가 매스컴에 덮어씌워졌다. 한 시의원은 현 시장이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나머지, 최 목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민장’을 치르게 함으로써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므로 모든 사태의 근본책임이 현 시장에게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했고, 시장을 지지하는 의원들은 벌떼같이 일어나 손가락질을 하며 그 의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소란이 일어나자 회의는 일시 중단되었다. 잠시 정회 후에 시작된 회의 벽두에 한 의원이 연단에 올라 발언했다. 그는 지금까지 정부가 취해온 대책이 너무 안이하여 사태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극단의 조치가 무엇이냐는 다른 의원들의 질문에, 일시적인 법질서의 중단과 군사적 조처가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회의장은 갑자기 술렁대면서, 일부 의원들은 일제히 쿠데타 기도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법 질서 아래에서 모든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차례의 갑론을박과 웅성거림이 있은 후, 한 주교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연단에 올라섰다. 그는 최 목사에 대해 다시 한 번 ‘희대의 사기꾼’ ‘사탄의 분신’ ‘적그리스도’ 따위의 단어를 써가면서 격렬하게 비난한 뒤, 진시황이 저지른 ‘분서갱유’와 같은 일종의 조치를 요구했다. 쇼펜하우어의 저작들처럼 허무주의와 죽음을 부추기는 저작과, 반도덕적이고 신성 모독적인 소설과 영화에 대해서는 영원히 출판과 상영, 판매를 금지하고, 현재 나와 있는 것들도 모조리 불태워 없앨 것을 주장했다.
동시에 앞으로 어떤 매스컴에서도 자살에 대한 뉴스를 내보내지 말도록 법적으로 엄격히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특히 죄악과 범죄의 온상인 인터넷을 전면 폐쇄해야 한다고 강도 높게 요구했다. 이어 연단에 오른 산부인과 의사 출신의 대표는 인구의 급감을 방지하기 위해 앞으로는 콘돔을 비롯한 모든 피임제의 사용도 법적으로 금해야 하며, 임신 중절도 전면적으로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심지어 언어학자 출신의 어떤 대표는 인간의 언어에서 ‘죽음’과 ‘자살’이라는 단어 자체를 삭제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간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사유할 수 없고, 사유할 수 없는 것은 행위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사흘간의 길고도 지루한 토론 끝에 몇 가지 조처가 취해졌다.
이후 새로운 논란과 투쟁의 불씨가 될 ‘자살 금지법’의 제정이 그것이다. 이 법을 중심으로 몇 가지 주요한 조처가 발표되었다. ‘자살 금지법’에는 특히 연좌제를 도입한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다 적발될 경우, 그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살아 남은 자살자의 가족에게 묻는다는 것이었다. 자살자에게는 어떤 법도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살자에게는 장례를 금지했고, 호적에서 영원히 그 이름을 삭제하며, 자살자 소유의 모든 재산은 시에 몰수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처들은 자살자에게 남은 가족들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갖게 함으로써 자살을 방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둘째 방안은 자살을 부추기는 어떤 약품 ― 예를 들면 대표적인 것으로 수면제 같은 종류 ― 의 제조를 전면 금지하고 동시에 출산을 장려하기 위해 임신중절과 피임행위를 전면 금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콘돔을 비롯한 피임제의 생산 중단 조처가 포함되어 있었다. 셋째 방안은 자살의 위험과 반도덕성에 대해 집중적인 홍보를 해나가는 것과 자살행위에 대한 뉴스 보도를 금지한다는 ‘자살보도 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터넷을 당분간 전면적으로 폐쇄한다는 조처도 들어 있었다. 이 밖에도 자살을 감행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활동을 강화한다는 조처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에 과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인간생명과 죽음의 현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과학적으로 이 문제에 대처해 나간다는 결정도 포함되었다.
‘자살 금지법’이 제정된 직후, 한 신문의 칼럼은 그 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작금의 파국적인 사태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자살 금지법’의 도입이 불가피하다. 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존재 근거로 하는 오늘날의 문명화한 사회에서 이 법이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하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법이 지금 같은 초비상 상황 아래서 얼마나 실효를을 거둘지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필요한 조치이며, 여타 조치들과 함께 실시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자살 금지법이 인류 역사에서 전혀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내용은 다르지만 과거에도 엄연히 그런 법률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고대 로마시대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따른면 이유 없는 자살이나 노예, 병사, 재산몰수 처벌을 받은 사람들은 법적으로 자살이 금지되었다. 일반 로마 시민들이 자신의 명예나 병, 기타 합리적인 이유로 자살하는 경우에는 처벌되지 않았다. 반면에 노예는 사유 재산이란 이유로, 병사는 국가 재산이란 이유로 해서, 그리고 재산 몰수자는 경제적인 이유로 금지되었던 것이다. 로마시대의 자살 금지법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실용적인 법이었다 할 것이다.
중세시대에도 자살 금지법이 있었다. 서기 562년 브라가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자살을 금하는 교회법이 제정되었다. 초기 기독교시대에는 기독교가 박해 대상이었고, 그래서 순교로서의 자살 행위는 구원으로 이어지는 성스런 행위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기독교가 사회 위에 군림하면서 자살에 대한 인식도 바뀐 것이다. 자살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가장 심각한 범죄 행위로 규정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신의 소유인 만큼 인간의 자살은 가장 극악한 죄악이며 인간 사회의 정의와 안정을 위협하는 행위라는 논리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기 693년 톨레도 종교회의에서는 자살 미수자까지 종교적으로 파문하도록했는데, 11세기에 성 브루노는 자살을 ‘사탄을 위한 순교’라고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번에 제정된 자살 금지법은 중세시대의 그것처럼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는 로마시대처럼 실제적인 근거에서 마련된 것이다. 현대판 흑사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적인 자살 신드롬은 이제 우리 사회 전체를 근본에서부터 위협하며 파괴하려 들고 있다. 한 인간의 우스꽝스런 광란적 작태에서 비롯된 자살 유행병의 광기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 도시가 쌓아 올린 소중한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가치를 일거에 무너뜨렸으며, 도덕적 타락과 퇴폐적 풍조는 그 극에 달하고 있다. 계층간, 세대간 유대와 예의범절은 땅에 떨어졌고, 경제 활동은 파탄을 향해 치닫고 있다.
존엄한 인간의 가치가 이토록 파괴되고 몰락한 예는 역사상 일찍이 찾아볼 수 없을 정도라, 개탄을 넘어 분노마저 불러일으킨다. 이승의 삶을 포기해버린 자살자들은 죽음으로 뛰어들면 그만이지만, 만일에 지구의 모든 인간이 그런 식으로 세상을 떠나버린다면 인간이라는 종족을 말살되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자살자들은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사회 공동체와 국가의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 이번 자살금지법이 연좌제를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타심에 호소하기 위한 것이다. 법보다 중요한 것은 법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자신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타인도 생각해야 한다. 우선 가족과 친척, 이웃, 그리고 사회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말이다. 이번에 제정된 자살금지법도 그런 바탕 위에서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6
마침내 자살금지법 시대가 열렸다.
자살자의 가족은 금전적 처벌뿐 아니라, 재산 몰수와 식량공급까지 감수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이미 자살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 도덕적 책임감의 구애에 굴복할 것인가? 그 격렬한 죽음의 유혹을 물리칠 만큼 심리적 부담이 될 것인가? 이런 조처라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궁색해진 시 당국의 처지가 이해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조처들은 근본적으로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인터넷의 전면 폐쇄 조처에 대해서는 먼저 젊은 층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네티즌들은 시당국에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했다. “인터넷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구호 아래. 인터넷의 폐쇄조치는 인터넷에 의존하는 수많은 기업에게도 말할 수 없는 타격이 되기에, 인터넷 기업들도 당국의 조처에 실망과 분노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자살 금지법이 공포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예상외로 반발이 거세지자 시장은 갑자기 특별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동시에 무기한 계엄령을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또 모든 공적인 정치활동의 금지, 올해 실시될 예정인 시장 선거도 무기한 연기하고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초법적인 기구인 ‘시민위원회’의 발족도 발표했다. 비상사태 선포와 군부가 중심이 된 ‘시민위원회’의 출범은 사실상 현 시장을 중심으로 한 친위 쿠데타의 성격이 짙었다. 그런 조처는 경제 실정으로 신망을 잃은 현 시장의 지배를 장기화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곡시의 모든 권력은 이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이 초법적 ‘시민위원회’라는 기구에 집중되었다. 이 기구를 구성하는 핵심 세력은 모두 시장의 측근과 군부, 그리고 경찰로 채워졌다.
사태는 더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탱크와 장갑차, 자동화기가 순식간에 마곡시를 점령했다. 군인들은 곧 마곡시의 새로운 특권층이 되어 온갖 치외법권적인 특혜와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다. 마곡시의 가장 좋은 시설도 그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군인들은 재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며칠 밤 사이에 수많은 민간인이 달빛 아래 번쩍이는 총검의 감시를 받으며 트럭에 실려갔다. 사무실과 공장에도 군화가 진주했다. 상품의 생산과 유통, 나아가서는 직원의 출퇴근에까지 그들의 엄격한 지시가 적용되었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회사에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여자들은 더 심각한 위협에 처했다. 과거에도 전쟁 중에 흔히 일어났던 강간과 희롱, 약탈 같은 만행들. 여자들은 모욕을 당하기 전에 혀를 깨물고 자살하거나, 혹은 모욕을 당한 후에 자살하거나, 때로는 반항하다가 살해되기도 했다. 당국은 이 모든 사실에 귀와 눈을 닫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런 사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언론들은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관련된 소문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고, 끔찍한 유언비어들이 난무했다. 거리에서 여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군대 내에서도 군대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의 자살이 속출했고, 때로는 군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민들은 자살 유행병의 광기 못지않게 계엄군의 총칼이라는 실질적인 위협과 공포에 짓눌려 신음하게 되었다.
나는 동분서주하며 거리거리를 뛰어다니고, 사건들을 취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감만 깊어갔다. 계엄군의 폭력을 뻔히 보면서도 그것을 기사로 쓰지 못하는 일, 진심을 다해 쓴 기사가 검열에서 삭제되는 일, 이런 일들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긍지를 앗아갔다. 나는 예전에 꾸던 꿈을 떠올렸다. 군중에게 처형당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기자. 정의와 진실의 수호자가 아닌, 권력의 방패막이로 전락해버린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계엄령하에서 굶주리고 고통 받는 시민들보다 우대를 받는 현실은 더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줄만 알았던 정찬우 기자가 갑자기 내게 연락을 해왔다. 둘이서만 비밀스럽게 만나자는 것이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를 만나러 나갔다.
“사실은… 저는 지금 시민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그 준비 때문에 신문사로 올 수 없었습니다.”
나는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기구에서 일하고 있었다니. 그럼, 그가 그 기구의 발족과 관련된 모종의 프로그램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선배님, 전 지금의 사태를 흘러가는 대로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휴머니즘적 도덕관념이나 어설픈 동정심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말입니다. 전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인류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똑같은 사이클로 진행되어 왔지요. 기술 발전이 새로운 생산 양식을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생산력이 급속히 증대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대합니다. 그러나 급속한 인구증대로 인해 생산력은 한계에 봉착하고, 다시 새로운 기술양식이 개발되어 또다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인구도 동시에 급격히 늘어나고……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인류는 기술과 생산력, 인구 증가의 삼각구도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생존해왔습니다. 근대 이래, 인구가 과거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한 것도 기술이 발전한 덕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구의 증대에 비해 기술력의 비약은, 과거보다 아무리 급진적이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에너지 자원을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인 것으로 대체하지는 못했습니다. 여전히 석유나 가스 같은 천연 에너지 자원에 의존했습니다. 게다가 과잉 인구는 에너지 소비를 과다하게 촉진해 소위 말하는 엔트로피를 극대화했고, 이것이 결국 에너지 위기로 폭발하고 만 것이지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엄청나게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내지 못한 결과, 지금의 경제 체제가 궁지에 몰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자네는 인구를 줄이기 위해선 현 사태가 바람직하다는 말인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피웠다.
“아, 물론 개개 생명은 모두 소중합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인간을 중심으로 이 세계를 생각하는 관점은 부당한 것도 사실입니다. 지난 세기부터 이미 인구 과잉에 대한 경고가 계속되었지만, 마곡시는 적정 인구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매년 수 만 명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해야 하는데, 지속적인 고도 성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게다가 공업 시설의 기계화로 인해 실업 문제는 만성적인 사회 문제가 된 지 이미 오래고, 재작년부터 그 한계가 적나라하게 폭로되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문명은 근본적인 한계에 봉착했다는 사실입니다. 봉건시대에서 자본주의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도 엄청난 희생이 따랐습니다. 수많은 전쟁과 살육,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조건 등 한마디로 과거의 낡은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는 과정에는 어쩔 수 없이 과격한 희생이 수반되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자연법칙이고 필연성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이 자살 유행병의 광기는, 어쩌면 낡은 체제가 스스로 붕괴되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전쟁이나 강제력에 의한 퇴출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인간적이라는 판단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잔인한 말 같지만,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의 상황을 돌이켜보십시오. 직장마다 사람들이 자살해버리는 통에, 실업 문제가 절로 해결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의 요점은, 인간이 죽어간다는 사실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높은 관점에서, 한 문명 전체 혹은 자연 전체의 관점에서 현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도 어찌 보면, 자신이 포용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해버린 인간 사회에 대해서 자연이 자신의 숨은 힘을 발휘하여 정리해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결과로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단호하게 이런 관점에 서야 한다고 봅니다. 단지, 우리 인간은 다행히도 이젠 오랜 역사에 대한 연구와 통찰을 통해 어느 정도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현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젠 분명히 알겠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소속되어 일하는, 자네의 그 명철한 두뇌를 빌려 움직이는 그 시민위원회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도 무엇인지 알겠네. 한마디로 현 사태를 더 증폭시키고, 가능한 한 이 세상을 더욱더 파국으로 몰아가서 끝장을 본 후에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발상 아닌가. 한마디로 지금의 과정 전체를 일종의 불가피한 ‘사회 혁명’ 과정으로 본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자네와 ‘시민위원회’는 은밀하게 다음 사회의 건설을 대비한다는 것이고…… 안 그런가?”
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역시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는군요. 맞습니다. 이 사실은 아주 극소수만 알고 있는 극비사항입니다. 너무 음모적인 시선으로 보지는 말아 주십시오. 시민위원회에서도 처음부터 이런 발상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든 현 사태를 막아보려 발버둥쳤지요. 하지만 이미 때를 놓쳤고, 어떤 힘으로도 현재의 사태를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차라리 이왕 망할 거, 확실하게 망하게 한 후, 이후를 대비하는 게 낫다는 말인가?”
나는 다시 말을 가로막았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가슴속이 콱 맺힌 듯 갑갑해져왔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허파 깊숙이 빨아 들였다가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창 밖 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바위 같은 침묵이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갑자기, 그 침묵을 깨뜨리고, 요란한 호각소리와 함께 몇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창 밖 거리를 둘러보았다. 청년들이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붉은 페인트로 “살인 정권은 자폭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고, 계엄군들이 그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옥상 위의 청년들은 계속 구호를 외쳤고, 군인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마침내 플래카드를 들고 있던 한 청년이 총에 맞았는지 옥상 아래로 추락했고, 나머지 청년들은 도망쳐 이내 사라져버렸다. 총소리는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다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나는 몸을 의자에 깊숙이 묻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선배님.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저런 작은 희생은 불가피합니다. 오늘 하루도 수천 명이 자살할 것이고, 또 저런 희생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저희 정보로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 대열에 동참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차피 경제 활동도 거의 중단되었고, 곤궁해진 민중들은 폭동과 약탈을 일삼을 것입니다. 이미 식량도 거의 바닥나고 있습니다. 시 정부의 비축미는 ‘시민위원회’와 계엄군이 엄격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중에 풀린 쌀은 부자와 장사꾼이 거의 독점하고 있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더러 자네와 함께 일하자는 건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전 평소에 선배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야 인맥이 닿아서 이런 일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선배님이 함께 참여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래서 선배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선배님과 함께 힘을 합쳐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기획하고, 준비해보고 싶습니다.”
“이제 보니 자네는 이 시대의 로베스피에르였군.”
“로베스피에르라…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혁명을 시작한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이 사회입니다. 전 다만 이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대로 나아가면서 뒷수습을 할 뿐입니다. 사회가 완전히 절멸하는 것보다는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자세가 아닐까요? 무기력하게 그냥 구경만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가 대답을 촉구하려는 듯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토피아의 꿈… 새로운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서는 낡은 체제를 파괴할 수도 있고, 혁명은 불가피하게 개개인의 피를 요구한다는 논리. 나는 마곡시의 역사를 생각해보았다. 바다 한가운데 세워지는 거대한 인공낙원. 과학과 이성의 왕국. 모든 것이 인공적으로 완벽한 질서를 갖춘 도시. 이것이 마곡시를 처음 기획한 사람들의 이상 아니었던가. 과학과 기술의 합리성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의 신념. 그것의 결과는 무엇인가? 과연 이 마곡시는 인간의 유토피아였나? 인간이란 존재가 어떻게 완벽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오로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 히브리스… 인간의 힘을 절제하지 못한 데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이토록 잔혹한 폭력과 파괴를 대가로 과연 어떤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누굴 위해서….
난 긴 한숨 끝에 그에게 말했다.
“난 자네 생각에 동의할 수가 없어. 난 어떤 형태로도 그 위원회에 참여할 생각이 없어. 자네는 어쩌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결코 인간을 구원하진 못할 거야. 자네 머릿 속에 유토피아에 대한 어떤 완벽한 구상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의 사회체제건, 결국 인간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실패를 반복하게 될 거야.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나타난 모든 유토피아 이념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 정도 과도기를 거치면, 지금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저 역시 이 시대처럼 천박한 유물론적 사회를 추구하진 않습니다. 이 시대는 마치 배부른 돼지가 인간의 이상인 것처럼 간주되어왔지요. 인간의 위대함은 정신에 있지 물질이나 재력 따위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대 희랍인들은 분명 위대한 감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대 희랍의 ‘인간’ 개념은 오직 ‘정신적’인 개념에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아무리 재물이 많고 그 재물로 인해 또 다른 노예를 거느릴 정도로 부자라 할지라도, 부자라는 사실로 인간 대우를 받진 않았습니다. 인간과 재물은 아무 상관이 없는 개념입니다.
귀족적인 인간들은, 공공 정치에 참여하여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고, 예술이나 철학활동을 통해 정신을 고양할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 ‘인간’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15세기에 근대가 시작된 이래 지금에 이르면서 고귀한 인간에 대한 개념은 전복되고 말았고, 부자가 마치 진정한 ‘인간’인 양, 고급한 ‘인간’인 양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인간 정신의 퇴락과 몰락이 초래된 것이지요. 이제 다시 진정한 ‘인간’ 개념을 회복시킬 때가 왔습니다. 정신적으로 귀족적인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다행히 오늘날의 과학은 그런 사회를 가능하게 할 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인구만 적정하다면, 고대 희랍은 생산력이 취약하여 인간을 노예로 부림으로써 귀족사회를 영위할 수 있었지만, 이젠 과학기술력이 노예를 대체할 것입니다.”
“지극히 낙관적인 과학적 유토피아군. 플라톤적 과학공화국… 자네 말대로 오늘날 저속한 이 시대가 물질에 영혼과 정신을 빼앗겼다는 데는 나도 동의할 수 있어. 나도 저속한 이 시대를 환멸해. 하지만 인간에게 자네가 말한 그런 유토피아를 건설할 만한 힘이, 그런 능력이 과연 있을까? 그 철인들은, 그들 교육자는 누가 교육하는가? 자네에게는 저 바깥의 총성이 들리지 않나? 계엄군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 자네의 구상은 또 다른 전제 체제로 가는 첫걸음일 뿐이지. 어떤 인간이나 집단에게도 인위적으로 한 체제를 강요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네. 그런 건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의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듯 그렇게 단숨에 이루어질 수는 없어.”
그러나 정찬우는 지지 않고 자신의 논리를 폈다.
“어차피 누군가는 교육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자가 되느냐, 피교육자가 되느냐 결국 그것이 문제일 뿐이죠. 누구도 교육자가 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면, 지금의 인간 사회는 무정부 상태에서 혼란을 거듭하다 결국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사태를 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입니다.”
“물론! 나는 한때 회의적인 냉소주의자였지만, 냉소주의는 무관심의 지적 허영이나 비판을 가장한 자기방어적인 기만책에 불과하다는 건 나도 이젠 알아. 냉소주의는 반항도 비판도 아니지. 비판의 가면을 쓴 수동적인 복종에 불과해. 하지만자네가 말한 방식의 관심과 참여는 아니야. 냉소주의는 지식인들의 가장 큰 죄악이야. 적어도 지금 나는 그렇게 느껴. 자네는 이 사태에 마치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타인 위에 군림할 생각부터 하다니. 자네는 지금 이 세계의 자살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인가? 과연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어느 인간이 몰락해가는 이 세계에 책임이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저도 책임을 느낍니다. 아주 절실히. 사실 몰락해가는 이 세계에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계에서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결코 무죄일 수 없습니다. 설사 갓난아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그의 책임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졌지만, 이런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일종의 원죄가 되어버리는 거죠. 이것이 오늘날 이 저속한 시대를 사는 인간의 서글픈 비극입니다. 자살자들은, 자살로서 그 책임을 지는 것이고, 저는 제 방식대로 책임을 질 뿐입니다.”
정찬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책임을 지겠네.”
“정말 유감이군요. 전 선배님이라면 제 생각에 동의해주실 줄 알았는데.”
“천만에. 나는 완전한 구원 같은 건 믿지 않아. 거듭 말하지만 자네가 말하는 구원은, 내가 듣기엔, 지금까지 인류가 반복해서 실패해온 이념들의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해. 개개인의 정신이, 영혼이 스스로 노력으로 변하지 않고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그 어떤 이념도 위험하기 짝이 없을 뿐이야. 지금까지 모든 이념들이 실패로 돌아갔던 것은 인간은 그대로인데, 사회의 체질을 바꿈으로써 인간의 내면까지 바꿀 수 있다고 믿은 데 있지. 만약 혁명이 필요하다면, 각 개인이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혁명을 이루어야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혁명은 인간의 껍질만 바꾸어놓을 수 있을 따름이네. 참된 변화의 출발점은 인간의 내면이지 외부 조건이 아닐세. 더구나 외부 조건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인간 사회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인간은 복합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자네는 머릿 속에 ‘인간’에 대한 규정된 개념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규정된 개념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네의 인간 개념으로 구상된 사회도 또 다른 억압과 악을 낳고 말거야.”
“그럼 하는 수 없군요. 다른 사람을 찾는 수밖에. 실망했습니다, 선배님. 하지만 마음이 달라지면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그럼 이만.”
그는 말을 마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7
정찬우를 만난 후부터 나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이 거대한 재앙 앞에서 무기력한 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온 도시가 전대 미문의 ‘자살 유행병’이라는 질병에 잠식되었고, 이젠 정찬우의 말대로 막강한 당국의 힘으로도 손을 쓸 수 없어 포기해버린 채 이 광기가 제 풀에 꺾여 스러질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경인데, 과연 누가 무슨 힘으로 이 광기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정찬우 앞에서 격렬하게 지식인의 냉소주의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지고, 어떤 방식으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인가? 이런 글쓰기가 나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가? 인간과 세계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개인적 삶의 가치로서 긍정할 수 있는 글쓰기는 가능한가? 만약 이 세계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눈을 돌릴 수 있는 예술이란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환한 대낮에 권태에 지쳐 빠져드는 공허한 낮꿈에 불과할 것이다. 예술이란 현실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조차 그 시선을 현실로 향하고 있는 자의 깊은 고뇌일 터이니. 그러나 지금 나의 글쓰기는 예술이 아니다. 언어가 없다. 인간이 부재한 언어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몸부림에 불과할 뿐….
지금도 사람들은 각지에서 고독과 두려움,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광기 속에서 목숨을 끊고 있다. 이 몹쓸 병은 외상이나 징후도 드러내지 않는다. 차라리 흑사병이라면, 병에 걸린 환자가 있고, 또 어떤 방법으로든지 예방 조치라도 취할 수 있으련만. 이 세계는 결국 자살하고 마는가…?
‘자살 금지법’이 시행되었지만, 자살을 막는 데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었다. 그 법이 시행되자, 자살한 가족을 숨기기 위해 각 가정마다 마당을 파헤쳐 시체를 묻거나, 몰래 갖다 버리는 투기행위까지 횡행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자살한 가족을 어딘가에 몰래 버리기 위해 차에 싣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
경찰들이 감시하고 있었지만 이미 많은 경찰이 자살해버린 뒤라, 시체 투기 행위를 감시할 요원은 태부족이었다. 혹시라도 들키면 온 가족이 자살해버리기도 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 동네만 해도 그랬다. 아파트 단지 뒤의 숲 속과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개천은 근처의 주민들이 갖다 버린 시체들로 산을 이루었다. 길거리에는 시체가 넘쳤고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아무도 치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넘쳐나는 시체를 반기는 것은 주인을 잃고 방황하는 개와 고양이, 그리고 시체를 뒤덮은 구더기와 파리 떼, 그리고 다시 나타난 쥐 떼였다. 쥐들은 멸종하지 않았다! 쥐라는 종은 집단자살의 광란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었다. 나는 그 쥐들을 통해 오히려 가느다란 희망을 보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게도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하루 짬을 내 쉬는 날이었다.
나는 식료품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마켓에 나갔다. 정찬우의 말대로라면, 이제 식량을 비롯한 모든 생필품이 곧 바닥날 참이었고, 실제로 곳곳에서 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구하러 나서야 했다.
마켓 입구로 들어선 나는 깜짝 놀랐다. 이미 물자 배급제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마켓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마켓 입구에는 계엄군들과 군 트럭 두 대가 서 있었는데, 군인들은 완전 무장을 한 상태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마켓 출입구에는 밀치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혼잡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주차장에도 차들이 꽉 들어차 있어 하는 수 없이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나는 차를 세운 뒤에도 운전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냥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나는 겨우 틈을 비집고 마켓 안으로 들어섰다. 마켓 안에는 직원 뿐만 아니라 십여 명의 군인이 최신 자동화기로 무장하고 통로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을 노려보거나 무뚝뚝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그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진열대에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벌써 빈 진열대도 눈에 띄었다. 직원들이 핸드 마이크로 “질서를 지키세요! 질서를!” 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쌀은 벌써 떨어지고 없었다. 라면도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 밖에 채소와 생선류, 과일류는 찌꺼기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눈에 띄는 대로, 억척스럽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다만 한 가지라도 손에 넣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고함이 들리더니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까아악! 하는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다시 우당탕쿵탕! 하며 사람과 물건이 뒤얽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옆 통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마도 서로 물건을 차지하려고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일대 혼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소란이 벌어지자, 흥분한 사람들은 미친 듯이 진열대를 향해 달려들었고, 마켓 안은 삽시간에 광란에 빠져드는 듯했다. 흥분한 사람들이 밀치고 밀리면서 넘어지고 엎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타타타탕! 하며 기관총소리가 들려왔다.
“이 개새끼들이! 무슨 지랄들이야! 이것들이 전부 한번 뒈져봐야 정신을 차리겠군, 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둥 같은 총소리가 마켓 안에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으로 마켓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군인들은 무차별로 총을 쏘아댔고, 진열대 아래로 숨는 사람, 다른 사람을 짓밟고 도망치려다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으로 아비규환의 광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나는 사람들에 떠밀려 바닥에 쓰러졌다. 누군가 내 몸을 짓밟았고, 계속되는 총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속에서 넘어진 내 등 위로 다른 사람들이 넘어지고 엎어져서 나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내가 쓰러져 있는 바로 뒤쪽에서도 총에 맞은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만 둬, 뭐 하는 짓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군인끼리 총격전을 벌이는 듯 급박하고 미친 듯한 총소리가 마켓 안을 뒤흔들었다.
마켓 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나는 사람들에게 짓눌려 정신이 아득해져왔고, 얼마 후에 총소리가 그쳤다. 그제서야 내 위에 엎어진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고, 나는 겨우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출입구 쪽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 지옥의 수렁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내 주변에는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신음하며 몸을 비틀고 있거나, 이미 죽었는지 피를 쏟으며 쓰러진 시체들이 바닥에 즐비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이 뻐근하고 뼈를 쑤셔대는 듯한 통증이 왔다. 나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출입구는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로 막혀버린 듯했고, 거기서도 사람들은 서로 짓밟고 깔아뭉개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오른쪽 정강이에 칼에 찔린 듯이 격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어린 남자아이가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오른손은 어머니인 듯한 부인의 손에 꼭 쥐어져 있었다. 이런 위험한 곳에 아이를 데려오다니. 아니, 그녀는 아이를 혼자 남겨두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이가 떼를 썼을지도. 여자는 머리에 총을 맞았는지 머리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계속 고통스런 신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비척거리며 아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옮겨놓을 때마다 오른쪽 다리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지만, 이를 악물고 절룩대며 아이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출구를 통해 대거 빠져나갔고, 출구 주변엔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뭉개진 시체와 부상자가 신음을 내며 쓰러져 있는 것도 보였다. 아이는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옆구리에 총을 맞았는지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힘겹게 아이를 등에 업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쪽 다리가 바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러나 내 머릿 속에는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그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나는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아이를 내 차로 옮겼다. 마켓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와서도 비명을 지르며 놀란 개미 떼처럼 우왕좌왕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차 뒷좌석에 누인 후, 급하게 차를 몰았다.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는 오른쪽 발이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병원을 향해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마켓에서 가까운, 그 동네에서는 가장 큰 종합병원이 있는 곳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내가 그 병원의 산부인과에 다녔던 것이다. 병원 앞에 차를 세우고 어린아이를 안고 병원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입구에 서 있던 군인들이 총으로 나를 가로막았다.
“잠깐, 여긴 계엄군 전용 병원이오! 민간인은 다른 병원으로 가십시오!”
한 젊은 군인이 엄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것 봐! 지금 죽어가는 이 어린아이가 안 보이나! 이 아이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일단은 살려놓고 봐야 할 것 아냐! 어서 비켜!”
나는 분노로 가득 찬 고함을 질러댔다.
“아니… 이 사람이! 여긴 군용병원이라고 하지 않았소! 우린 명령에 따를 뿐이오. 다른 병원으로 가시오! 여기에도 지금 환자가 넘치고 있단 말이오!”
얼굴에 시커멓게 칠을 한 그 군인은 나에게 총구를 겨누며 소리쳤다.
“쏠 테면 쏴! 나는 들어갈 테니! 어서 쏴! 이 아이는 너희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았단 말이야! 알아? 이 아이한테 무슨 죄가 있어? 지금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이 아이는 죽고 말거야. 제발, 제발 부탁이야. 이 아이를, 이 아이를 봐서 좀 들여보내주게!”
내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당장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나와 보초병들이 승강이를 벌이는 사이에, 안에서 이 소란을 들었는지, 검은 선글라스를 낀 군인이 나타났다.
“왜 이리 시끄러워? 무슨 일이야!”
“옙, 대위님. 지금 이 사람이 막무가내로 들어가려 하는 바람에 저지하는 중이었습니다.”
선글라스를 낀 그 군인은 나와 어린아이를 돌아보았다.
“이보시오, 대위! 당신에게도 이런 어린 아들이 있지 않소? 이 아이는 지금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소. 저 아래 마켓 안에서 군인들이 무참하게 총을 쏴대는 바람에 이 아이가 총에 맞았단 말이오. 제발 좀 들여보내 주시오. 당신들은 이 세상이 망하는 걸 막기 위해 이렇게 나와 있는 게 아니오? 이 어린아이의 생명을 살리는게 바로 당신들이 해야할 일이오. 그렇지 않소? 대위, 제발 이 아이를 좀 살려주시오. 대신에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소!”
내 절규에 대위는 내 품안에서 피를 흘리며 축 늘어져 이젠 의식조차 없는 어린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좋소!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오. 이봐! 이분을 안내해!”
대위는 그를 따라온 한 군인에게 명령했다.
“정말 고맙소.”
그렇게 말한 후, 나는 군인을 따라 병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이는 곧장 수술실로 실려 갔다.
나는 수술실 앞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군인들이 놀란 눈으로 민간인인 나를, 온몸이 피투성이인 나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리를 벽에 기댔다. 마켓 안에서 벌어졌던 그 끔찍한 아비규환의 장면들이 머릿 속에서 생생히 떠올랐다. 총소리, 비명, 코를 파고들던 화약냄새와 끈적한 피냄새,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처절한 몸부림… 다른 인간들도 그들처럼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면, 이 미치광이 놀음도 끝을 맺을 수 있으련만… 살려는 자들은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고, 삶을 포기한 자들은 너무나 쉽게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으니…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저벅저벅하며 군화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떴다. 한 군인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벗었지만, 아이를 들여 보내준 대위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들었다.
대위는 그들 앞에 와서는 걸음을 멈추었다. 대위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도 그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선글라스를 벗은 얼굴을 쳐다보니 대위는 고작 서른이나 되었을까, 할 정도로 아주 젊은 얼굴이었다.
“도와줘서 정말 고맙소.”
“천만에요. 그런데, 저 아이 당신 아이입니까?”
“아니오.”
“그럼……. ”
“나도 모릅니다. 단지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저 아이가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걸 발견했고,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달려왔을 뿐이오.”
내 말을 들은 대위는 고개를 돌려 수술실을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누구 아이인 줄도 모르는데 목숨을 걸고 이 병원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습니까? 만일 내가 마침 그 소리를 듣고 나가봤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보초병들은 정말로 총을 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마켓 안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깔려 죽었소. 어쩌면 나도 거기서 죽었을 지도 모르는 사람이오. 나는 미련 따위도 없소.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소. 하지만 저 어린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소? 생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말이오. 그리고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가는지도.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저 아이는 생과 죽음을 선택하기엔 너무 어리지 않소? 저런 어린아이들까지 어른들이 만든 상황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야 한다면, 이 세상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한단 말이오? 당신들은 무엇을 지키려 한단 말이오? 이 세상의 몰락을 막기 위해 군인들이 병영에서 시민들의 세계로 나온 것이라면, 아까 마켓에서처럼 살려는 의지로 가득 찬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무차별로 살상을 해대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이오? 당신들은 지금 누구를 위해 총을 들고 싸웁니까? 세상의 구원이요, 세상의 멸망이오?”
나는 호소와 원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젊은 장교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장교는 내 시선을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수술은?”
그 말에 장교는 멈칫했다. 잠시 망설이던 장교는 결국 입을 열었다.
“실은… 수술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이가… 죽어버렸습니다.”
장교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갑자기 온몸의 맥이 탁 풀려버렸다. 아내의 얼굴과, 고통을 못 이겨 신음하던 아이의 얼굴이 겹쳐져 동시에 눈앞에 떠올랐다. 두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내와 그 아이를 둘 다 내 손으로 죽여버린 것 같은 죄책감이 나를 찔렀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컥컥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8
마켓에서 다친 다리는 날이 갈수록 부어 올랐다. 병원에서, 그 대위는 나에게 치료하라고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없다. 나는 더이상 회사에도 나갈 수 없었다. 아니, 다리가 멀쩡하더라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절망적인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리는 썩기 시작했고, 양식도 떨어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가 나갔다. 텔레비전도 볼 수 없었고, 신문도 배달되지 않았다. 이젠 아파트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버렸거나, 아니면 죽었다. 밤이 되면 완전한 암흑이 아파트 전체를 뒤덮었다. 깊은 산중과도 같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나는 병들어 서서히 죽어가는 짐승이 되어 있었다. 두뇌만이 여전히 인간의 사고를 지니고 있었을 뿐.
추락하는 인간, 몰락해 가는 인간.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이 몰락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인간의 시대는 끝나고 야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야수에 대한 인간의 오랜 투쟁은 결국 야수의 승리로 끝나고 마는 것인가? 아니다. 인간 역사에 나타난 모든 선과 악은 결국 인간 자신의 본성 속에 깃들인 두 성향 사이의 투쟁의 산물일 뿐이다. 인간 자신이 인간이며, 또한 야수다. 지금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의 내부에서 키워온 그 야수에 물어뜯겨 죽어가고 있다. 이 추락의 광기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여지없이 산산조각 나버렸고, 벌거벗은 야수가 인간의 껍질을 벗고 이빨을 으르렁대며 대지를 배회하고 있다. 인간의 시대는 가고, 짐승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것이 과연 인간 종이 감내할 최후의 운명이란 말인가?
인류는 그토록 오랜 역사에서 시행착오와 오류를 거듭해오면서도 어찌 이렇게도 역사와 자기 자신에 대해 백치처럼 무지할 수 있는지 실로 놀랍기만 하다. 수십만, 수백만 권의 책과 수십 가지의 학문으로도, 인간은 참된 생존과 행복에 대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배운 것도, 깨달은 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털 없는 원숭이인 인간이 지금까지 해온 것이라곤 그저 털을 대신할 온갖 사치스러운 옷과 치장물들, 그리고 동굴과 나뭇가지를 대신할 거창하고 허영에 가득 찬 거대한 건축물들과 눈과 코와 입과 귀를 즐겁게 해줄 온갖 사물들 같은, 삶의 껍데기를 치장하고 장식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여왔고, 남들보다 높은 지위와 더 많은 물질만 획득하는 데 전심전력했을 뿐, 정신적으로나 내적으로 어떻게 참된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거나, 적어도 그에 대해선 무관심하거나 교육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인간은 사물들을 다루고 개조하는 기술자로만 키워졌을 뿐, 정신적으로 고취된 인간으로 교육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자살 페스트가 아니라, 인간의 무지와 잔인함이 이런 파멸을 초래한 것이다. ‘시민위원회’는 언젠가는 그들의 행위가 결국 제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대지 위에 시체와 무덤들이 흘러 넘칠 때, 그들은 인간의 묘혈 위에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울부짖게 되리라.
나처럼, 살아 남은 자들에겐 생존 자체가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급기야는 살인, 강도와 같은 범죄가 또다시 횡행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고기가 부족했다. 사실, 잡식성 동물인 인간이 먹지 못할 것은 없다. 쥐고기보다는, 사람 고기를 먹는 것이 훨씬 더 인간답지 않은가! 게다가 사방에 널린 것이 인간의 시체였으니… 덕분에 길거리의 시체들은 말끔히 치워지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죽은 자들의 육체는 거듭난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시체들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을 휘감는, 타인의 먹이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섬뜩한 위협 앞에서 몸을 떨었다. 굶주림은 인간을 야수로 변질시켰다. 굶주림 앞에서 존엄한 인간 존재란 없다. 생존이냐 죽음이냐 하는, 동물적 상태로의 전락.
그런 상황에 나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며칠 전 일이었다. 쓰고 있던 글을 막 마쳐가던 때였다.
나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아 아파트의 빈 집을 뒤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빈 집에 들어갔다가 거기서 어떤 남자와 부딪쳤다. 그 역시 나처럼 먹을 것을 찾아 나선 굶주린 인간이었으리라.
그는 나를 발견하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사슴을 발견한 표범의 번뜩이는 눈빛을 하고서.
“아직 사람이 남아 있었다니… ” 하며 그는 음험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그를 피했다. 그러나 내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그는 돌연 짐승처럼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그때 그의 양식이 될 뻔했지만, 본능적으로 그에게 저항했다. 우리는 성난 야수들처럼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했다. 흉기로 변한 주먹과 이빨과 발길질이 오갔고, 삶과 죽음이 자리바꿈을 하려 들었다. 그의 두 손이 내 숨통을 죄어 왔고, 나는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남자는 불행했다.
내 주머니 속에 넣어온 칼이 그 순간 번쩍 공기를 가르며 그의 몸 깊숙이 찔러들었기 때문이다. 목을 죄던 손이 풀리고, 그 사내는 짐승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뒹굴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원망과 분노, 체념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 차라리 저 남자의 손에 죽어야 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목구멍에서 역한 구토가 치밀어 올라왔다. 나는 비겁하게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그 남자를 남겨두고 다리를 절뚝이며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쾅 하고 닫아버리는 순간, 나는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을 가능성은 없어졌다. 무엇보다 야수로 변해 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나 자신이 그런 야수로 변해 가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인간 사회가 아니었다. 게다가 내 육체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다리부터 썩어가고 있는 내 육체. 나는 어차피 곧 나를 대지에 되돌려주어야 한다.
9
이제는 때가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썩어가는 다리를 질질 끌며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의 난간에 올라서서 인간 세계를 굽어본다. 텅 빈 집들, 버려지고 불타버렸 차들, 파괴된 건물들, 사이렌 소리, 난장판이 된 거리들, 그 거리에서 사라져버린 인간들… 그러나 여전히 푸른 하늘과 회색빛 구름들, 눈부신 은빛을 반사하며 대지를 품어주고 있는 바다, 봄의 향기로 부풀어 오른 숲, 노래하는 새들, 우리가 그 가운데 하나로 포함되어 있던 저 모든 빛나는 아름다운 것들. 한 때 우리 것인 양 믿었지만, 이젠 더 이상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닌.
나는 낡은 세계의 포기와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주장하던 정찬우를 떠올린다. 그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혁명기구는 아직 존재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 자신도 자살페스트의 광기에 전염되어 지금쯤 딱딱한 시신이 되어 땅속에 묻혀 있거나 혹은 아무 데나 버려진 채 굶주린 짐승의 먹이가 되진 않았을까… 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인간이 광기로 인해 스스로 파멸한다 할지라도, 인간세계 전체가 완전히 멸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갑작스런 떼죽음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쥐들이 마곡시에 다시 나타난 것처럼,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현명해진 인류가 이 땅에 다시 나타나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나갈지도 모른다. 나는 죽어가지만, 그런 희망조차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과 죽음. 나는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었던가. 무엇을 위해서…? 내 모든 생은 단지 긴 불길한 악몽 같은 환영에 불과했던가? 단지 무에 불과한 것이었던가? 아니다. 나는 가능하면 끝까지 이 생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생을 긍정하고 싶었다. 무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생을 순수하게 긍정하고 싶었다. 생과 죽음을 대립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그 차이를 제거한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둘이 아니면서도 각기 다른 것(非二非異)으로서 그것들을 내 존재 자체에 품을 수 있기를 바랐다. 죽음이 단지 무(無)로 끝나버리는 종말이 아니라, 거기에도 또 다른 자유와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면, 이 현세의 생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온갖 고통과 시련, 절망과 불행들도 죽음의 행복만큼이나 긍정해야 할 가치가 아닌가? 불행을 모르는 자는 행복을 알 수 없듯이 고통을 모르는 자가 어찌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인가? 속박을 모르고는 어찌 자유의 환희를 느낄 것인가?
대립의 긍정과 대립하는 것들의 일치. 그 가운데서 찾아드는 존재의 진리.
하여, 죽음이 숭고하다면, 삶도 그만큼 숭고하고, 죽음을 긍정해야 한다면 생도 동시에 긍정해야 한다. 누군가가 인간에게 생과 죽음 중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고 어느 쪽이 더 일차적인 의미를 갖는지를 따진다면 그는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생만 보는 자, 죽음만 보는 자들 ― 이들은 모두 삶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삶은 생과 죽음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그 둘 다를 삶의 지반으로 공히 긍정하는 것이리라.
이 우주 자체가 생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다리인 것이다. 설사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꿈이요, 환영일지라도, 그것이 환영임을 알기 위해서라도 삶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필요할 뿐만 아니라, 깊이, 삶의 저 가장 깊은 곳까지, 그리고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것이리라. 이 모든 것은 죽어가는 내 다리가 말해준 것에 불과하다.
나는 내 두 눈을 찔러대는 푸른 하늘의 빛나는 태양을 본다.
나는 눈을 감는다, 꿈을 꾼다.
푸른 바다 위로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