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신동아’ 2월호에 밝힌 내용이 가장 정확”
- “北은 정상회담 대가 요구한 적 없다”
- “잘못 보고받은 MB, 대가로 인식한 듯”
- “통일부가 더 얻어내려다 결렬됐다”
- “현인택 전 장관에게 ‘프라이카우프가 뭐냐’고 물어보라”
- 박근혜 정부, ‘팩트 중심’으로 복기해 신뢰 토대 삼아야
‘뇌물로 달래는 관행 끊었다’
‘이명박 청와대’는 국정백서 중 ‘원칙 있는 대북·통일정책과 선진 안보’ 대목의 머리글에서 “북한이 막대한 지원을 조건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여 왔으나 이명박 정부는 ‘퍼주기’를 담보로 한 정상회담에는 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또 “이명박 정부와 이전 정부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대북정책이며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뀌었다”면서 “북한의 오만방자한 행태에 끊임없이 끌려 다니며 ‘뇌물’로 달래는 관행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우리를 현금인출기나 식량보급창으로 인식하는 북한의 ‘갈취 근성’을 근절하고 햇볕정책과 무조건적 포용에 대한 금단현상을 치유해야 올바른 남북관계의 기초가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국정백서대로라면 MB 정부 5년의 대북정책이 총체적으로 볼 때 실패했다는 일각의 평가는 수박 겉핥기 식 분석인 셈이다. 일부 비평가는 “북한을 올바르게 관리하지 못했고, 핵 폐기와 관련해 한 걸음도 못 나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MB 정부에서 고위 당국자로 북한 문제를 다룬 한 인사는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않은 것이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가장 큰 성과”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일은 잘 했는데 대북정책만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실상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지난해 총선 전에 야당이 아니라 여당에서 ‘이대로는 선거 못 치른다’면서 그런 비판이 나왔다. 그 사람들에게 ‘안 하는 것보다 나은 정상회담을 하려니 어렵다’고 말했다. 정상회담 안 한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보는 사람이 있지만,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은 성과다. 무조건 정상회담을 하면 좋은 줄로 아는 사고방식을 고치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남북관계에서 무엇을 바꾸려 했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북한은 아직도 국내정치에서 흥행거리다. 북한이 정상회담 카드를 흔들면 김영삼, 노태우 정부 같은 보수정부도 걸려들었다. 북측은 경험적으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북에 45억 달러(현물+현금)를 줬다. 얼마 안 되는 것 같겠지만, 북한의 작년 예산이 56억 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년 한 해 예산의 10%씩 보태준 셈이다. 핵 개발 여력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MB 정부는 비핵화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핵을 포기하면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지 않으면 인도주의적 지원은 하지만 비료, 양식, 현금은 못 준다’는 게 우리 정책이었다.”
3차례 정상회담 시도
MB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한 것은 3차례인 것으로 확인됐다. 실패의 기록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통례다.
첫 번째 시도는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만나 정상회담, 납북자 국군포로를 포함한 이산가족 고향방문, 국군 유해 공동 발굴, 인도적 지원 등 6개 항목에 협의를 완료해 이명박-김정일 회담의 문턱까지 갔으나 결렬된 것이다. 첫 시도가 실패한 후인 2010년 3월 26일 북한은 천안함을 폭침시켰다.
두 번째 시도는 2010년 가을 김숙 당시 국가정보원 1차장이 수차 평양을 방문해 천안함 폭침 이후 대결 국면으로 치닫던 남북관계의 출구전략과 정상회담 추진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남측 국정원, 북측 국가안전보위부 라인이 가동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숙 1차장의 북측 카운터파트는 류경 당시 보위부 부부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측의 입장 표명과 관련해 북측 카운터파트는 “재량 범위에서 협의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즈음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포탄 수십 발이 떨어진다(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또다시 도발한 것이다.
류경 부부장은 김숙 1차장의 평양 방문 연장선상에서 2011년 1월 서울을 방문했다. 국정원, 보위부 고위 간부가 비밀리에 상호 파견된 것. ‘과거 불행한 사태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한다’는 수준에서 출구전략 관련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류경 부부장은 2010년 9월 북한 3대(代) 세습 권력자 김정은이 대장 계급장을 달던 날 상장(국군의 중장에 해당)으로 진급했다. 그는 보위부에서 간첩 및 반체제 인사를 색출하는 반탐(反探) 업무를 총괄했다. 보위부 부부장은 5명으로 알려졌다. 류 부부장은 김정일과 수시로 독대할 만큼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간 직후 총살됐다. 안보 당국자들은 그의 실각 원인을 파악하는 데 정보력을 모았다. 표면적 혐의는 수뢰, 부정축재였지만, “대남 전략을 남측에 노출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택에서 거액의 달러가 발견돼 간첩으로 몰렸다고 한다. 남측과의 접촉과정에서 불거진 문제가 숙청의 원인이 됐을 소지가 크다.
그가 숙청된 후 남북관계는 더 악화된다. 2011년 2월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북한군 대표단은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후 MB 정부는 세 번째로 정상회담을 시도한다. MB가 2011년 5월 베를린 연설에서 이듬해 3월 핵안보정상회의에 김정일을 초청한 것을 계기로 남북이 베이징, 선양 등지에서 접촉했다. 세 번째 시도는 북측이 폭로전에 나서면서 일부 내용이 공개됐다. 2011년 6월 9일 조선중앙통신은 이렇게 보도했다.
“그(김천식 당시 통일부 정책실장)는 우리와 만나자마자 이번 비밀접촉은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시와 인준에 의해 마련됐다고 하면서 그 의미를 부각시켰다. (김태효 당시 대통령대외전략비서관이) 시간이 매우 급하다고 하면서 대통령의 ‘의견’을 반영하여 작성했다는 일정계획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접촉이 결렬상태에 이르자 김태효의 지시에 따라 홍창화(국정원 국장)가 트렁크에서 돈봉투를 꺼내들자 김태효는 그것을 받아 우리 손에 쥐여주려고 하였다. 우리가 즉시 쳐던지자 김태효는 얼굴이 벌게져 안절부절 못하였으며, 홍창화는 어색한 동작으로 트렁크에 황급히 돈봉투를 걷어 넣고 우리 대표들에게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협상에 관여한 인사들은 하나같이 이런 주장이 거짓이라고 했다. 김태효 전 대통령대외전략비서관은 2월 17일자 ‘중앙선데이’ 인터뷰에서 “북한 당국이 참 간도 크다. 우선 그 내용 자체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고 녹취록을 공개할 거면 다 하지 왜 못했겠나. 그랬으면 북한이 오히려 굉장히 곤란한 처지에 빠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 시도 때는 2011년 6월 판문점, 8월 평양, 이듬해 3월(핵안보정상회의 때) 서울 등 연쇄 정상회담 시간표가 논의됐으나 천안함 관련 사과 문제와 북한의 무리한 요구가 발목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핵화 논의는 회피하면서 물적 대가만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안에는 “대화를 통해 풀어야 한다”는 쪽과 “원칙을 갖고 ‘갑을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쪽이 나뉘어 있었다. 실제로 ‘파벌’을 구성한 적은 없으므로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편의상 기사에선 ‘대화파’ ‘원칙파’로 표현하기로 한다. 김태효 전 기획관(“북한의 전략적 목표에 봉사하느니 정상회담을 안 하는 게 오히려 나았다”),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남북관계가 불편하더라도 북한의 앵벌이나 갈취 관행을 고쳐야 한다”)은 원칙파였다. 재임 시절 남북 간에 벌어진 일과 관련해 함구하고 있는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 원세훈 전 국정원장도 강경한 쪽이었다. 임태희 전 실장, 김성환 전 외교부 장관 등은 ‘대화파’였다.
‘남북정상회담, 그 실패의 기록’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린다.
“원칙을 지킨 대북정책으로 북한의 악습을 근본적으로 바꿀 계기를 마련한 것인지, 아니면 남북관계 진전의 호기를 놓친 실책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남북 간에 은밀하게 벌어졌던 일들을 세밀하게 복기하고 전략적 실패는 없었는지 꼼꼼히 따져보는 일은 박근혜 정부의 몫이다. 이를 위해 MB 정부 정상회담 ‘실패의 기록’이 가감 없이 새 정부에 넘겨져야 한다. 박 대통령이 꿈꾸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의 출발점도 결국은 과거 정부에서 남북 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팩트 파인딩’이라고 본다.”(2월 26일자 ‘동아일보’ 칼럼 ‘남북정상회담, 그 실패의 기록’에서 인용)
첫 접촉만 성사 직전까지
세 차례 정상회담 추진 시도 중 성사에 근접한 것은 임태희 전 실장이 김양건 부장을 만난 첫 번째 접촉이다. 김대중-김정일,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도 북한의 통일전선부 쪽을 통해 이뤄진 바 있다. 정상회담 비밀접촉의 주역인 임 전 실장은 1월 9일 ‘신동아’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털어놨다. 그는 작심하고 증언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남북관계가 더 악화될 것 같았다. 실제로 있었던 일과는 다른 얘기가 언론에 사실처럼 보도되면서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 우려돼 내가 한 일의 팩트를 공개하기로 했다.”
북측이 정상회담 대가로 현물 5억~6억 달러를 요구했고, 남측이 제안을 거절하자 협상이 결렬됐으며, 이듬해 천안함 도발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엉터리 얘기를 하고 있다”
신동아 2월호는 “북한은 모욕적 협상 응했다, 뒷돈 요구한 적도 없다”는 제목으로 그의 증언을 기사로 실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정상회담을 포함해 6개 항목에서 협의를 완료했다. 실무만 남은 상황에서 깨졌다. MB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후 납북자·국군포로 ○명과 함께 돌아왔을 것이다. 부처 간 불협화음이 있었다. 회담장소를 평양 혹은 판문점으로 바꾸자고 하면 얘기가 되겠느냐? 협상이 깨지는 과정에서의 팩트를 분명히 해두는 것은 앞으로의 남북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남북이 다시 대화를 시작할 때는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은 모욕적 협상 응했다”는 증언은 국정백서의 갑을 관계 언급과 일치하지만 “뒷돈 요구한 적도 없다”는 발언은 국정백서의 내용과 충돌한다. 원칙파에 속한 인사들은 북측이 정상회담과 관련해 물적 대가를 요구해 정상회담이 성사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같은 정부에서 일한 고위 인사들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진실은 뭘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2월 14일 동아일보와의 퇴임 인터뷰에서 남북 비밀접촉의 일단을 처음으로 직접 공개했다. 동아일보 2월 18일자 “납북자 송환 등 합의… 北 ‘6억 달러 현물’ 요구로 물거품” 제하 기사를 읽어보자.
“북한에서 드디어 신호가 왔군.”
2009년 중국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통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 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의 핵심 인사들은 흥분과 걱정이 교차했다고 한다. 중국 최고위층 인사를 통해 들어온 남북정상회담 요청은 충분히 신뢰할 근거가 있었고 앞으로 추진 과정에서 중국이 적극적인 중재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의 민감성 안에 어떤 변수가 숨어 있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 새롭게 드러나는 3차 정상회담 추진의 막전막후
청와대 고위 당국자는 “남북 중간에서 대화를 추진하겠다고 나서는 브로커 장사꾼이나 사기꾼도 많다”라면서 “중국 정부를 통한 제안은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북한의 회담 요청을 적극 검토키로 한 배경에는 ‘퍼주기’ 비판을 받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현 정부의 원칙에 마침내 북한이 응하기 시작했다는 판단도 깔려 있었다. 이 대통령은 14일 동아일보와의 퇴임 인터뷰에서 “북한은 그동안 일방적으로 남측이 자신들을 만나려 안달한다. 그러니까 남쪽이 자기네한테로 올 것이라고 생각해왔다”라며 “우리가 그동안 무조건 찾아가서 만나기에 급급해왔으니 그런 것”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이참에 남북관계를 정상화하자. 우리가 2차례나 평양에 갔으니 이번에는 북쪽에서 내려와야 한다”라며 제주도와 파주, 인천, 판문점 등을 회담 장소로 제안했다. 북한 측이 난색을 표하자 원 총리는 “북측이 먼저 만나자고 했으니 장소에는 너무 구애받지 않는 게 어떠냐”라며 남한을 설득했다. 이에 청와대는 장소 문제를 양보했고 북한은 김양건 통일전선부 부장을 싱가포르로 보내 당시 이 대통령의 핵심 비선인 임태희 고용노동부 장관과의 협상에 응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임 장관과 김 부장은 2009년 10월 전후로 최소 3번 이상 접촉하고 구체적인 정상회담 의제들을 조율했다. 독일 ‘프라이카우프 방식’처럼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을 조건으로 한 대북 경제적 지원, 북한 내 국군 유해 발굴 등까지 사실상 합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북한은 그 과정에서 최소 5억∼6억 달러 규모의 현물을 대가로 요구했다. 이를 받아 줄 것인지를 놓고 정부 내에서도 강온파 사이의 의견차가 커지면서 결국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이 대통령은 당시 실무 접촉 과정과 관련해 “남북이 양해각서를 체결했다는 이야기도 당시에는 나왔지만 내가 듣기로는 서로 간에 오간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차원에서 (작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김정일이 원 총리한테 정상회담 의사를 전달하면서 경제적 지원 이야기까지 꺼냈겠느냐”라며 “김양건은 아마 ‘한국의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기존에 해 오던 습관대로 (제안)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게 김정일의 생각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라며 아쉬움도 내비쳤다.
○ 끝내 닫힌 대화의 문
3월 26일은 천안함 폭침 3주기다. 경기 화성시 궁평항에서 제2함대사령부에 근무하는 이상엽 중위가 3월 6일 국화 3송이를 들고 바다를 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
중국은 두 번째 회담 시도에서는 2009년 당시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밑 접촉이 진행되던 시기에 중국을 방문한 김 위원장이 남측을 편드는 중국 고위당국자에게 반발해 회담 추진을 중단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협상에 깊숙이 개입했던 전직 고위 당국자는 “2차례의 협상 모두 북쪽이 먼저 의사를 타진해 왔고, 협상이 결렬된 것도 우리 쪽의 문제가 아니라 김 위원장의 건강 문제로 인한 불안한 내부 정세와 후계 세습 문제 등으로 초조했던 북한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북한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한꺼번에 많은 것을 얻어내려 한 정부의 욕심이 일을 그르쳤다”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외교소식통은 “북한이 먼저 정상회담을 요청했다는 사실만으로 자만심에 빠져 정부가 섣불리 북한을 길들이려 한 측면도 있다”라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은 이 전 대통령의 언급이 알려진 후인 2월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신동아’ 2월호 기사 전문을 올렸다. ‘신동아’는 3월 11일 임 전 실장을 다시 만났다. 그는 “신동아 2월호 기사가 가장 정확하다. 내가 당시 일을 가장 잘 안다. 당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엉터리 얘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팩트, 다른 주장
북한이 “정상회담 대가로 현물 5억~6억 달러를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고 밝힌 이들도 임 실장 못지않은 고위인사들이다. 더구나 이 전 대통령도 “김양건은 아마 ‘한국의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기존에 해오던 습관대로 (제안)했을 것이다. 그게 김정일의 생각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같은 사안을 두고 고위인사들이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또한 이 전 대통령은 실제로 김 부장을 만난 임 전 실장보다 원칙파의 견해에 가까운 쪽으로 당시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 열쇳말은 ‘신뢰’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성공하려면 싱가포르 비밀접촉→개성 협상결렬→천안함 폭침→국정원-보위부 비밀접촉 및 연평도 포격→북한 국방위 비밀접촉→북한의 비밀접촉 내용 폭로 등으로 이어지는 전(全) 과정을 팩트 중심으로 복기해봐야 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의 틀을 짤 때 교사, 반면교사로 삼을 내용이 넘쳐날 것이다.
정상회담 추진 및 결렬 과정과 관련해 원칙파가 가진 시각부터 들어보자. 이명박 정부 국정백서의 외교안보 부분 작성에 관여한 한 고위인사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비보도를 전제로 말했지만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익명으로 공개한다).
▼ 왜 주무부처 장관이 아닌 노동부 장관이 싱가포르에 갔나. 같은 사안을 두고 같은 정부에서 다른 주장이 나오는 까닭은 뭔가.
“대북협상을 할 때는 북한을 아는 사람이 가야 하는데, 대통령이 신뢰하는 사람을 보냈다. 또한 중요한 협상을 할 때는 정부가 대통령 주재로 대책회의를 하고 훈령을 준다. 가서 훈령대로 해야 한다. ‘이야기만 들어보고 오라’고 했으면 그렇게 해야지, 훈령 범위를 벗어난 약속을 하면 안 된다. 북한이 협의 내용을 써달라 한다고 해서 대통령 지침을 안 받은 상황에서 써주면 안 된다. 상대가 ‘당신 말만 듣고 어떻게 보고합니까? 그냥 가면 죽습니다’ 하더라도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된다. 관련 장관들이 검토하고 대통령이 결재한 후 ‘써줄 만한 것이다’라고 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실무자들이 구체적 협의를 하러 갔는데(2009년 11월 7일, 14일 개성 회담을 의미), 북한 사람들한테 들어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는 당황해서 북측에 ‘그런 것이 아니다, 합의된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임 전 실장이 대표단이 가기 전에 ‘내가 이런 것을 북측에 써줬다’고 말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위에 보고도 안 되고….”
북한이 정상회담 대가로 현물 5억~6억 달러를 요구했다는 데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현물 5억~6억 달러를) 주고, 안 주고 한다지만 정상회담이 실패하지 않으려면 그라운드워크를 해야 한다. 할만한 정상회담인지 판단하려면 저쪽이 무슨 생각인지 알아야 한다. 과거에 하던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이 식량, 비료 자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런 식의 정상회담이 수지가 맞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된 것이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쌀, 비료를) 준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을 것 아닌가. (국군포로, 납북자) 한두 사람 만나게 해주는 게 정상회담까지 해서 할 게 뭐 있나. 제일 중요한 건 핵 문제인데, 핵에 대해 얘기하겠다는 것은(임 전 실장은 ‘신동아’ 2월호 인터뷰에서 김양건 부장을 설득해 비핵화를 정상회담 의제에 넣기로 했다고 밝혔다) ‘비핵화는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수준의 얘기 아닌가. 구체적으로 뭘 하겠다는 게 있어야 한다. 5억~6억 달러는 본질적 이슈가 아니다. 받아낼 것이 100억 달러 가치가 있으면 100억 달러를 갖다줘도 안 아깝다. 외교안보팀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졌는지 임 전 실장이 잘 모를 수 있다. 큰 틀은 외교, 안보 쪽에서 정하는 거다.”
“누군가 대통령에게 잘못 보고”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의 페이스북.
“북측에서야 당연히 쌀, 비료를 요구하죠. 예전엔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조건으로 쌀, 비료를 줬습니다. 북측이 원하는 게 있듯 우리도 원하는 게 있으니 그것을 연계해서 하자는 거였습니다. 북측이 우리가 원하는 조치를 시행하려면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쌀과 식량이었습니다. 두 정상이 납북자, 국군포로를 포함한 이산가족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해 해법에 합의한 후 북측이 조치를 취하는 것에 따라 남측이 경제지원을 하는 게 협의의 골자입니다. 정상회담을 여는 대가로 얼마를 주기로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북한 처지에서 보면 (정상회담 대가로 쌀, 비료 등) 요구하지 않은 것을 요구했다고 지금 우리 측에서 얘기하는 것인데, 북한이 그런 요구를 했다면 제가 협상을 했겠습니까. 또 북이 그런 요구를 했는데 대통령이 협상을 허용할 리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 문제는요, 남북대화를 아예 안 할 거라면 몰라도 앞으로 남북이 대화할 때 이 문제와 관련한 팩트가 매우 중요해요. 김양건 부장은 그렇게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팩트’를 다르게 얘기하는 것이다. 임 전 실장이 김 부장과 협의했다는 건 정상회담에서 논의한 결과에 따라 북한이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고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것인데, 원칙파는 북한이 과거처럼 쌀, 비료 지원을 받아내고자 정상회담 개최를 타진했다고 해석한 것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쌀, 비료가 건너가는 만큼 그걸 정상회담 대가라고 본 것이다. 북한이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쌀, 비료를 얻는 게 주목적이었을 수 있다. 반면 임 전 실장은 정상회담을 남북관계 진전의 호기로 봤다.
임 전 실장은 3월 11일 ‘신동아’와의 두 번째 인터뷰에서 1월 인터뷰 때는 언급을 자제했던, 협상이 깨지는 과정과 관련된 내용을 공개했다.
▼ 협의내용을 서면으로 정리한 것은 훈령 범위를 벗어난 것 아니었나.
“내가 훈령을 어겼다면 나중에 대통령실장이 됐겠나. 논의한 사안을 하나도 정리해주지 안으면 협상 상대자는 평양에 돌아가서 뭐가 되나. 그 사람들이 정리해 온 내용에 볼펜으로 죽죽 그으면서 ‘이건 맞다’ ‘이건 논의된 게 아니다’ ‘이건 논의된 건데 이런 취지다’라고 가필했다. 내 글씨가 가득한 문서에 ‘임태희’라고 써준 것이다.”
▼ 싱가포르에 다녀와서 통일부에 논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나.
“북측이 정상회담 대가로 5억~6억 달러를 요구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되물어보라, 김양건 부장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그런 얘기를 했느냐고. 김 부장을 만난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나.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이 ‘납북자, 국군포로 고향방문이 되겠느냐’고 하더라. ‘결국 돈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더라. 나는 ‘북측의 조치에 상응하는 지원’이라고 강조했다. 현 장관이 ‘북측이 이행을 안 하면 어떡할 거냐’고 묻더라. ‘(우리도) 안 주면 되는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눴다. 누군가 대통령에게 두 사안을 엉터리로 연결해 보고했거나 정상회담 대가로 돈을 주는 것이라고 잘못 해석한 것이다. 대통령께서도 (그 사람들 얘기를 듣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싱가포르 비밀접촉의 성격은 뭔가.
“마지막으로 김양건 부장을 만나러 갈 때 대통령께서 거의 모든 정무 관련 수석을 소집했다. 정정길 대통령실장, 이동관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 정무수석 등 당시까지 내용을 전혀 모르던 사람까지 다 들어와 회의를 했다. 이제는 공개할 만한 때가 됐다고 여기고 모두를 불러 모았다. 원래는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 협의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협상 도중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결론을 내리지 말고 최종 서명은 통일부에 넘기라고. 싱가포르에서 큰 원칙을 결정하고 실무협의는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서 하는 것으로 김 부장과 정리했다.”
2009년 10월 임 전 실장이 싱가포르로 떠난 뒤 원칙파는 이 전 대통령에게 “비선(秘線)이 협상을 마무리하면 안 되고 통일부-통일전선부 공식 라인을 통해 확정해야 한다”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 싱가포르 협의 내용이 수지가 맞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정부 내에서 정상회담과 관련해 어떤 조건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 장소를 인천으로 하자, 판문점으로 하자, 파주로 하자 등의 얘기가 나왔다. 군함을 남포항에 대놓고 그곳에서 기숙하는 형태로 하자는 아이디어까지 나왔다. 군함은 우리 영토 아닌가. 거꾸로 모란봉호를 인천에 대놓는 방식도 거론됐다. 결국은 장소에 관계없이 하자는 쪽으로 정리됐다. 그렇게 하는 조건이 국군포로 귀환이었다. 이런 내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정상회담은 역사적 소명을 갖고 하는 거다. 어떻게든 남북관계가 풀려야 대한민국이 글로벌 국가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인식으로 협상에 임했지, 짧은 계산으로 한 게 아니다. 짧게 보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 봐야 할 사안이다.”
“시샘하고 功 차지하려다…”
▼ 싱가포르 협의 내용은 남측에서 정상회담 조건으로 삼기로 한 것을 다 받아낸 건가.
“정무 관련 수석들이 참여한 마지막 회의에서 논의한 것보다 더 했다. 서울에서 받아간 것보다 더 얻어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사인하기 전에 통일부 장관이 한번 협상을 더 해야 한다고 연락을 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송환하는 국군포로, 납북자 숫자를 10~20명으로 더 늘려보라고 하더라. ‘그거 안 된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라. 어떻게 10~20명을 데려오나’라고 답했다.
우리 협상팀도 노력은 했다. 한두 가족을 데려오는 방식이 어떻겠느냐고 김 부장에게 제안했다. 김 부장은 ‘임 장관이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결혼해 살고 있는데 자녀들이 남쪽에 가려고 하겠느냐, (본인을) 설득해서 남쪽으로 보내기도 쉽지 않은데, 가족까지 보내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고 하더라. 결국 송환대상을 한두 가족으로 하기 위해 노력해본다는 것으로 정리했다. 북측은 합의를 마무리하는 회담으로 생각하고 싱가포르에 나왔다. 북측에서 우리가 해달라는 거 다 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결국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서 마무리할 쟁점으로 남겨둔 게 한두 가족으로 송환대상을 늘리는 것이었다. 아주 미세한 부문만 남은 상황에서 깨졌다.”
▼ 11월 7일, 14일 개성에서 열린 통일부-통일전선부 회담에는 실무자들이 참여했다.
“현인택 장관이 갔어야 한다. 현 장관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다 알려줬다. 현 장관이 책임 있게 마무리를 했어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 실무회담을 열어 회담 장소를 서울, 판문점으로 바꾸자고 하면 일이 되겠나. 북측 처지에선 ‘파토 놓으려고 마음먹었구나’ 여겼겠지. 그래서 깨진 거다.”
▼ 원칙을 강조한 이들이 다된 협상에 어깃장을 놓았다는 건가.
임 전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현 장관을 포함해 북한 문제에 경계심을 가진 사람들은 나와 얘기할 때는 명분이 달려서 ‘해보자’고 해놓고, 내가 없을 때는 나만 빼놓고 같은 소리만 냈다. 노동부 장관이 아닐 때는 나를 향해 뭐라고 못했는데 내가 장관 신분이 되니까 문제 삼을 게 생긴 거다. 국회의원 신분이었다면 대통령 특사로 협의를 끝내도 되는데, 노동부 장관은 특사라고 하기엔 어색하거든. 노동부 장관이 최종합의를 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주장한 거다. 노동부 장관이 아니었다면 일이 성사됐을 것이다.”
그는 “시샘한 거다” “공을 차지하려고 했다”는 표현도 썼다.
“통일부 주도로 사인하려고 했는데, 더 얻어내려다 북측에서 ‘이건 깬다는 얘기구나’ 해서 깨진 거다. 현 장관에게 다 얘기해줬다. 북측에서 내가 가필한 문서를 내밀면 그게 원본이다, 그렇지 않으면 속이는 것이다, 그런 얘기까지 해줬다. 통일비서관이었던 정문헌 의원이 내용을 잘 안다. 정 의원이 하는 얘기가 가장 정확하다.”
정문헌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북의 손을 잡아줬어야 하는데 (통일부가) 더 누르려고 했다. 통일부가 전임 정부처럼 비선으로 하지 말고 공식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 협상을 (임태희에서 통일부로) 넘겨줬다. 통일부에서 추가요구를 했다. 안 그래도 됐는데 무리하게(요구해서 정상회담을 못 했다). 그때 남북관계를 풀었으면 참 좋았다. 우리 입장에서는 핵 문제가 어젠다 세팅(의제)이 됐다. 대통령이 가서 비핵개방 얘기하면서 풀도록 돼 있었다. 우리가 주는 것도 없었다. 인도적 지원은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인도적 지원을 대가로) 납북자 문제도 해결되는 것이었다.”
▼ 북한을 잘 모르는 비전문가가 협상에 나섰다는 지적도 있다.
“그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북한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나봤는지. 마지막 협상 때는 부처에서 고르고 고른 베테랑 2명이 나를 보좌했다. 싱가포르 협상까지 2년에 걸쳐 북측과 접촉했다. 나와 나를 지원해준 팀이 우리 돈 써가면서 노력해 대단한 협의 결과를 도출해냈다. 대화를 거듭하면서 ‘그쪽이 아픈 게 이런 거구나’ ‘북측의 의사결정 구조는 이렇구나’ 파악했다. 신뢰도 쌓았다. 오죽하면 서로 사진이 왔다, 갔다 하고 그랬겠나. 신뢰가 쌓여야 협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 뒷받침 없이 학자, 관료 출신이 책상에 앉아 사무적으로 대화해서 남북관계를 푼다? 불가능한 얘기다. 공식 채널은 관전자가 많기 때문에 협상에서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에서의 마지막 협상은 공식적인 것이었지만, 정책위의장 시절의 접촉은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신뢰할 만한 비공식 라인과 공식라인이 함께 가는 방식이 가장 좋은 것 같다. 남북관계 일은 단기적 이익을 계산하거나 개인의 자리를 생각하는 자세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보이지 않는 노력을 장기간 하면서 신뢰를 쌓고, 긴 안목으로 해야 한다.”
임 전 실장이 ‘부처에서 고르고 고른 베테랑 2명’이라고 표현한 이는 홍창화 국정원 국장과 김영탁 당시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대표다. 홍 국장은 국정원 소속이라는 점 외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는 김태효 전 기획관의 대북접촉 때도 이름이 등장한다.
朴 정부 ‘팩트 파인딩’ 나서야
▼ ‘같은 정부’에서 벌어진 ‘같은 일’을 두고 엇갈린 얘기가 나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나.
“현인택 장관이 풀어야 한다. 프라이카우프를 처음 얘기한 게 현 장관이다. 2009년 정기국회 속기록을 찾아봐라. 현 장관이 국회에서 프라이카우프 얘기를 계속했다. 내가 협상한 방식이 프라이카우프다. 프라이카우프가 그 정도 지원조차 하는 것이 아니라면 프라이카우프는 도대체 뭔가.”
서독은 냉전 시절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 사업을 벌였다. 3만3755명을 서독으로 데려온 대가로 34억6400만 마르크 상당의 현물을 동독에 건넸다. 서독은 이 프로젝트를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산다’는 뜻)라고 불렀다. 현인택 전 장관은 2009년 10월 23일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국군포로·납북자 문제의 해법과 관련, 일정한 대가를 주고 데려오는 ‘독일 정치범 송환방식’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 어쨌거나 국정백서에는 북측이 정상회담 대가를 요구해 정상회담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돼 있다.
“누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그렇게 얘기했다는 건지 밝혀보라고 해라.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현인택 장관이 당시 내용을 잘 안다. ‘당신이 생각하는 프라이카우프가 뭐냐’고 물어보라. 부처에서는 엄종식 차관(전 통일부 차관), 김영탁 씨(전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대표)가 잘 안다. 통일비서관으로 일한 정문헌 의원도 소상히 안다. 홍양호 차관(전 통일부 차관)은 다는 모를 것이다. 김천식 국장(전 통일부 차관), 천영우 수석은 내용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천 수석은 외교부 차관인가 그랬다. 그렇게 구성을 맞춰보면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싱가포르에 함께 간 김영탁 씨 같은 분은 ‘관료 생활 30년 동안 이렇게 잘된 협상은 못 봤다’고 했다.”
현물 5억~6억 달러 지원과 관련한 진실은 본질적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 같은 정부에서 같은 사안을 두고 다른 얘기가 나오는 것은 당시 정상회담 추진과정에 난맥(亂脈)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해 일을 바로잡은 것일 수도 있고, 남북관계 진전의 호기를 놓친 실책이었을 수도 있다. 임 전 실장은 정치인의 시각으로 접근했고 다른 이들은 관료적으로 사안을 봤다는 해석도 나올 수도 있다. 임 전 실장과 다른 이들이 북한을 들여다보는 시각 차이에서 비롯한 일일 수도 있다. 박근혜 정부는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시도와 관련해 남북 간에 벌어진 일을 세밀하게 복기하고, 팩트 중심으로 따져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