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호

“겨울은 이미 왔다, ‘투 코리아’의 차가운 공존 모색하라”

[Special Report | 이재명 시대, 한국의 길] 차태서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5-06-25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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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냉전 팍스아메리카나 30년, 긴 여름이었다

    • 다극체제 공식화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속내

    • 자비로운 패권은 없다…‘패전 세대’가 주도하는 美 현실주의

    •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모든 것은 대만으로 통한다

    • 동맹의 딜레마와 이재명 실용 외교가 가야 할 길

    • 비핵화와 남북통일 접고, 한반도 전략 전면 재검토해야

    • 신냉전기 전략적 위상 높아진 북한과 협상하는 법

    • 가치동맹? 약속 지키지 않는 미국 압박용으로 써라

    차태서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해윤 기자

    차태서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해윤 기자

    “팍스아메리카나가 무너져 내리면서 탈단극적 국제 체제가 부상하고, 기존의 국가적 합의가 붕괴되는 지금의 상황을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말로 비유하면 ‘윈터 이즈 커밍(Winter is coming)’이라 할 수 있다. 탈냉전 이후 30년간 이어진 미국 중심의 질서가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긴 여름이었다면, 이미 시작된 긴 겨울을 견뎌내야 한다.”

    차태서(43)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실주의(Realism)의 시각에서 신냉전시대 국제관계를 연구해 온 국제정치학자다. 현실주의 관점에 따르면 국제정치란 국가 간 권력 경쟁이며 국가들은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힘을 추구하므로 국가 간 갈등은 필연적이라고 본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이나 오늘날 미·중 패권 경쟁이 그 사례다. 

    현실주의 대척점에 있는 이론이 자유주의(Liberalism)다. 자유주의 관점은 국제사회에서 협력과 제도를 통해 평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보고, 유엔 등 국제기구를 통한 집단안보체제와 유럽연합과 같은 글로벌 경제통합, 다자협력, 초국가적 연대를 추구해 왔다. 

    점입가경 미·중 패권 경쟁, 현실주의가 맞았다

    그러나 최근 국제사회의 흐름은 현실주의의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2008년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 말기에 발생한 전 지구적 금융위기와 진퇴양난에 빠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탈단극의 신호탄이었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트럼프 1기), 이어지는 미·중 패권 경쟁의 심화, 코로나 팬데믹 기간 글로벌 거버넌스의 기능 부전, 결정적으로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와 탈레반 재집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단극 체제’의 균열과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종료됐음을 확인시켰다. 

    차 교수는 2024년 초 이와 같은 탈단극 시대 미국과 세계질서를 조망한 ‘30년의 위기’(성균관대학교출판부)를 펴내면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1918~1939)’의 패턴이 탈냉전 30년 동안 반복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간기가 영국 패권에서 미국 패권으로 이행하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미국 패권이 하강하면서 새로운 세력 균형이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차 교수는 “미국이 건설하고 주도해 온 자유주의적 이상주의 프로젝트는 사실상 파산했다”며 “건국 이래로 미국의 압도적 패권 질서를 디폴트 삼아 대외정책을 수립해 온 대한민국의 국가전략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에 대해서는 “탈단극 시대 미국의 세계관과 대전략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싱크로율을 보이는 전략적 노선을 선택했지만, 이념적 요소가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외교 전략상 비타협성이 증대될 수밖에 없고 열강 간 경쟁에 직접 노출된 중간국의 입장에서 이는 융통성 없고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시대에 미국 스스로 포기한 ‘가치 외교’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탈냉전 30년 대북한 정책은 실패했다

    차 교수는 남북 관계에 대해서도 “일반적 인식과 달리 탈냉전 기간 남한의 주류 정치권에서 추구한 대북정책의 목표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통일, 정확히는 북한의 핵개발 포기와 남한으로의 흡수통일이었다”면서 “그러나 탈냉전 30년의 대북한 정책은 결국 실패했다. 패권국 미국 주도의 강도 높은 제재와 외교 협상이라는 채찍과 당근의 조합이 여러 행정부를 거쳐가며 시도됐지만 우리는 비핵화도 통일도 달성하지 못했다”고 했다. 덧붙여 “비핵화와 통일이 당분간 달성할 수 없는 목표라는 점을 인정한 뒤 새로운 접근법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현실주의적 패러다임을 강조했다. 

    그사이 미국에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했고, 한국에서는 계엄과 탄핵, 조기 대선을 통해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다. 이재명 대통령은 6월 3일 당선 이후 미국(6일), 일본(9일), 중국(10일) 정상과 차례로 전화 통화를 한 뒤 6월 15일 시작되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외교 무대에 데뷔했다. 6월 22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 10월 아세안 정상회의,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G20 정상회의 일정이 예정돼 있다. 특히 노무현·문재인 균형 외교를 넘어 실용 외교를 표방한 이 대통령이 한미동맹과 한·중 관계 개선 사이에서 어떤 현실적 외교 전략을 마련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이고 있다. 

    6월 13일 차 교수와 인터뷰가 진행된 날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농축 시설과 군사시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습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전해졌다.

    이스라엘의 이란 선제타격은 무엇을 의미하나.

    “일단 미국의 억지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미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때부터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미국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지난 4월부터 오만의 중재로 미국·이란 핵협상이 진행되던 와중에 이스라엘이 대규모 도발을 한 것이다. 미국은 수차례 이스라엘에 ‘협상 국면이니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이스라엘은 독자적으로 공습을 단행했다. 미 국무부는 즉각 ‘우리와 협의된 바 없고 우리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고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행동이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란에 ‘미국이 한 일이 아니니 우리한테 화풀이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미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해 왔지만 신고립주의를 표방해 온 트럼프로서는 딜레마 상황 아닌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처음으로 ‘다극체제(multipolar system)’라는 표현을 쓴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전에도 탈냉전시대가 끝났다거나 단극 체제가 종식됐다고 했지만 공식적으로 ‘다극’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다. 오히려 러시아나 중국에서 자신들의 시대가 왔다는 의미로 ‘다극’이라고 했다. 그런데 올해 초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언론인 메긴 켈리와의 인터뷰에서 ‘세계가 단순히 단극적인 힘을 갖는 것은 정상이 아니고 예외적일 뿐’이며 ‘이것이 냉전 종식의 산물이었지만 결국에는 다극 세계, 즉 지구의 여러 지역에 여러 강대국이 존재하는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2기에서 다극체제를 언급한 것은 미국이 글로벌 공공재(국경을 초월해 전 세계적으로 혜택을 제공하는 재화)를 제공하는 ‘자비로운 패권자’ 노릇을 더는 하지 않겠다고 대놓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쉽게 말해 트럼프의 구상은 우크라이나 전쟁부터 끝내고, 중동도 안정화시키고, 하루빨리 중국과의 관세 협상을 마무리지어 최대 경쟁 상대인 중국을 견제하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패권 하강기에 접어든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라 동시다발적으로 통제 불능이 되고 있다.”

    다극체제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무엇인가. 

    “한반도를 둘러싼 문제들이 자유세계 질서나 미국 패권 질서 안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세력권 경쟁 안에서의 문제로 바뀐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한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지만 앞으로는 미·중 경쟁이라고 하는 거대한 세력권 안에서 작동하는 전략상 하나의 하위 파트로 역할이 바뀔 것이다. 최근 브런슨 신임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고정된 항공모함’이라거나 ‘주한미군은 북한 격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며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한미동맹의 성격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인가. 

    “국제정치에는 동맹의 딜레마라는 개념이 있다. 국가가 동맹에 참여할 때 직면하게 되는 두 가지 상반된 위험 사이의 긴장과 선택을 가리키는데, ‘연루, 휘말림’의 딜레마와 ‘방기, 버려짐’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트럼프 시대, 탈단극 시대에 하나의 원인에 의해 정반대의 딜레마가 동시에 우리한테 다가올 가능성이 있다. 그 하나의 원인이 바로 대만이다.”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와 ‘연루’의 딜레마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말하나. 

    “양안 관계의 갈등은 한반도의 위기와 직결된다. 대만에서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최근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이 군 내부에 발송한 임시국가방어전략지침에 따르면 중국을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유일한 기준 위협(sole pacing threat)’으로 규정하고, 대만 및 미국 본토 방어와 안보 강화에 군사적 역량을 집중하며, 이 과정에서 유럽과 기타 지역에서 일정 수준의 군사적 위험을 감수하는 전략적 조정의 가능성도 시사했다. 미국 싱크탱크인 ‘애슬랜틱 카운슬(Atlantic Council)’은 중국의 대만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한반도로 확전되는 시나리오를 공개했는데, 중국은 대만 침공 시 북한과 모종의 거래를 해서 북한이 동시에 기동하도록 한다. 북한의 역할은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놓는 것이며 이로 인해 한국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워싱턴의 관심과 에너지가 대만해협에 집중된 상황을 평양이 전략적 호기로 포착할 가능성도 있다. 미·중 경쟁에 모든 것이 집중되면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시각에서 북한 이슈는 2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주한미군은 대만에 유사 사태가 발생하면 출동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이미 콘셉트가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도 구체적 지원 방안을 문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은 스트라이커 여단을 한국에 두는 것이 유리한지, 괌에 있다가 대만으로 출격하는 것이 유리한지 계산하고 있다.”

    ‘방기’의 딜레마에 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이 상원 청문회에서 대만 문제를 언급하며 대만은 미국에 ‘매우 중요한 이익(very important interest)’이지만 ‘실존적 이익(existential interest)’은 아니라고 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현실주의자들에게 이것은 무시무시한 발언이다. 국제정치에서 국익의 단계는 중요한 이익, 매우 중요한 이익에서 점차 올라가 최상위에 사활적(vital) 이익 또는 실존적 이익이 있다. 다시 말해 사활적이거나 실존적 이익이 아니라면 언제든 협상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콜비 차관의 말대로라면 대만 문제는 미국이 전쟁까지 치르면서 지켜야 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찰스 글레이저 조지워싱턴대 교수 같은 학자들이 대만을 잃는 것이 미국에 사활적 이익에 해당하는지 계산하기 시작했다. 2022년 바이든 정부 때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해 ‘대만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한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대조점이다. 기자들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면 바이든은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트럼프는 지금까지 한 번도 ‘군사적 개입’을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대만 때문에 미국 반도체산업이 무너졌다고 동문서답을 하곤 했다. 아마 그 말을 듣고 대만 사람들은 살 떨리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이것이 방기의 딜레마다. 미국이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하면 ‘사이공 함락’과 같은 대만의 중립회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느꼈던 공포와 고뇌였다. 미국을 더는 신뢰할 수 없다면 독자 핵무장론이 급격히 힘을 얻을 것이다.”

    북·미 관계 비핵화 건너뛰고 군비통제 협상으로

    북·미 대화가 재개될 가능성은 없나. 

    “전통적으로 미국이 북한 핵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원칙을 어겼으니 제재를 가하고, 그것을 회복하면 제재를 풀어주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북한 핵문제를 NPT나 북한 인권 문제와도 연결하지 않는다. 트럼프는 싱가포르나 하노이 회담 때에도 NPT를 언급한 적이 없다. 단지 북한이 ICBM을 쏘고 핵 개발을 해서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되니 우리끼리 흥정을 해보자는 것이다. ICBM 같은 것 쏘지 마라, 우라늄 농축도 하지 마라,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것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자. 대신 한미연합훈련은 중단하겠다는 식으로 협상할 수 있다. 북한은 미중 세력권 조정에만 관심이 있는 트럼프에게 이런 카드를 내밀 수 있다. ‘사실 우리도 중국과의 관계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주한미군도 크게 반대할 생각이 없다. 대신 미국이 북한 핵을 조금만 용인해 주면 베트남처럼 중국과 거리를 띄우겠다.’ 트럼프는 바로 반응할 것이다. 2기 트럼프는 김정은을 ‘핵보유국(nuclear power)’ 지도자라고 지칭한 바 있으며, 미국 싱크탱크에서는 비핵화가 아니라 바로 군비통제 협상으로 넘어가자는 얘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향후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비핵화 회담은 아닐 것이다.”

    북한이 미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중국이 지켜보고만 있을까. 

    “북한이 러시아와 밀착하면서 북·중 관계는 여전히 냉랭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미 국방정보국은 ‘북한이 수십 년 만에 가장 강력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는 내용이 담긴 ‘2025년 세계 위협 평가’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동북아에서 미군과 동맹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했고, 점점 더 정교해지는 무기로 미국 본토를 위협할 능력을 키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는 상당 부분 일리가 있다. 팍스아메리카 시대에 북한의 전략적 위치가 최저점이라면 신냉전 시기인 현재 최상위 단계에 오른 것이다. 2021년부터 김정은은 연설에서 ‘신냉전’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신냉전이 왔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왕좌의 게임’ 식으로 얘기하면 ‘드디어 겨울이 왔다. 여름 동안 너무 더워서 타 죽는 줄 알았는데 겨울이 와서 살 것 같다’는 감격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구냉전기 북한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하며 이리저리 이득을 챙겼다. 그것이 주체사상의 국제정치적 배경이었다. 그런데 다시 중국, 러시아, 미국 사이에서 시계추 외교를 할 기회가 온 셈이다. 김정은 정권의 안정성 차원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신냉전시대, 전쟁을 막는 것이 보텀라인 

    한반도 비핵화나 남북통일은 포기해야 하나. 

    “나는 이론적으로 현실주의자다. ‘겨울이 온다’가 아니라 ‘겨울은 이미 왔다’. 여기서 우리가 바라는 최대치(비핵화 남북통일)에 도달하겠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즉 최선의 옵션은 당분간 포기하고 우리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보텀라인을 정해야 한다. 나는 그것을 최소한의 생존과 안정이라고 생각한다. 즉 전쟁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신냉전, 다극화의 세계에서 어떻게든 재앙적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리스크를 관리하며 앞으로 20~30년의 겨울을 버텨야 한다. 지금은 ‘투 코리아’ 사이의 차가운 공존을 고민해야 할 때다.”

    미국이 보수 대통령일 때 한국은 진보 대통령이 집권하는 엇박자가 이번에도 일어났다. 

    “미국에서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의 구분이 큰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 공화당은 레이건 시절에 만들어졌다.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국제정치적으로는 네오콘, 적극적인 개입주의, 민주주의 전파 등을 앞세웠지만 트럼피즘이 득세하면서 싹 뒤집어놓지 않았나. 밀레니얼세대가 주도하는 민주당의 변화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때 대학가에서 반전 시위가 벌어진 것이 중요한 관찰 지점이다. 기성세대에게는 이스라엘을 돕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20~30대 젊은 층은 동의하지 않는다. 거기에 대해 바이든 정부도 움찔했고, 실제로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인 해리스의 표를 갉아먹는 원인이 됐다.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보다는 국제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는 전반적인 ‘미국의 내향화’에 주목해야 한다.”

    국제정치에서 위기 발생 요인으로 ‘투키디데스의 함정’과 ‘킨들버거의 함정’을 말하는데 지금 상황은 후자가 더 우려된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신흥 강국이 부상하면 기존의 강대국이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으로, 중국이 언제쯤 미국을 따라잡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강대국 간의 ‘객관적’ 국력 측정이 관심사였다. 그런데 ‘킨들버거의 함정’은 반대로 ‘주관적’ 의지의 문제에 주목한다. 물질적 능력을 갖춘 초강대국이 국내 정치적 문제로 국제 공공재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할 때 위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간기 미국은 패권국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고립주의로 가버리는 바람에 대공황이 계속되고 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지금 미국이 또다시 딱 그런 모양새로 가고 있다. 중국의 추격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 스스로 내향화하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내향화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나.

    “지금까지 미국의 외교정책을 주도했던 세대들은 승전 이후의 세대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이어서 냉전의 승리를 맛보았고,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 명분이 됐다. 그러나 밀레니얼이나 젠지(Gen-Z) 세대는 다르다. 이들은 이라크전쟁, 아프간전쟁, 금융위기와 같이 패배하는 미국만 바라보며 자랐다. 밴스 부통령이 딱 그 세대다. 밴스는 해병으로 이라크전에 참전해서 환멸을 느꼈고, 금융위기를 일으킨 월스트리트 귀족에 대한 분노를 토로한다. 이들은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를 넘어 미국 예외주의나 대외개입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들 세대가 점차 요직을 장악하고 결정을 하게 되면 훨씬 더 내향적인 대외정책을 펼치게 될 것이다. 미국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새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도 점차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국제질서의 근본 전제가 바뀌는 시점에서 계엄 이후 6개월간의 외교 공백 기간 동안 숙제는 고스란히 쌓여 있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고정된 항공모함’이라고 한 주한미군사령관의 말을 새겨야 한다. 미·중 간 지정학적 경쟁의 판에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세력권 경쟁의 경계선이 획정되는 속에서 우리의 국제정치 문제들도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새 정부의 인선이 너무 과거의 경험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과거 북한과 접촉했던 분들이 다가가면 북한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질 거라는 기대도 난망하다.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상정하는 김정은·김여정 남매가 일종의 북한판 MZ세대로서 민족문제에 대해 과거 세대와 전혀 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남북 관계가 다시 정상화하고 과거와 같은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기보다 최소한의 공존과 안정을 추구하는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는 것이 현실주의자의 시각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 여부 결정이 늦어지고 있다. 

    “내 추측이지만 트럼프는 동맹국들에 GDP 5%로 방위비를 올리라는 얘기만 할 것이다. 트럼프 정부에서 자유니 가치니 하는 말은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가치동맹은 유럽의 동맹국이나 호주, 뉴질랜드 같은 IP4 국가들이 연합해서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며 미국을 압박할 때 쓸 수 있는 카드가 됐다. 얼마 전 미국은 호주, 영국과 체결한 안보동맹 ‘오커스(AUKUS)’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하면서 호주에 팔기로 한 핵잠수함 거래도 보류하지 않았나. G7과 이어 열릴 NATO나 APEC 같은 다자외교 무대가 미·중 사이에서 어느 편을 선택할지 강요받는 전장이 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트럼프 시대에는 다소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오히려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의 미국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해 다른 서방국가들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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