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씨는 56년 서울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중3 때 골수염을 앓고 3개월간 병원신세를 졌다. 현주씨는 “오빠는 그때 의사가 돼 아픈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내내 1,2등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가난한 탓인지 그늘이 있었다.
신씨는 77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입학 후 동아리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면서 사람보다는 사회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불교서적을 탐독하면서 사찰의식화 운동을 전개한 것. 본과 1년 시절 그는 기어코 인천의 한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82년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고 집에 은신중이던 신씨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투옥됐다. 집에서 전격 연행되는 아들을 지켜본 신씨의 어머니는 다음날 뇌졸중으로 쓰러져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봉제공장 행상 등을 하며 세 남매를 어렵게 키워낸 노인이었다.
83년 1년을 채우고 출소한 신씨는 야학활동을 병행하면서 성남으로 내려와 노동운동을 계속한다. 이 과정에 서울교대를 중퇴하고 서울 구로공단에서 대한불교학생연합회 활동을 하던 부인 김미숙씨를 만났다. 이들은 4년후인 87년 결혼해 현재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생 딸 둘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신씨는 89년 서울의대에 복학했다. 하지만 신씨는 ‘남들이 다하는’ 전문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반의다. 한국의 전문의 과정이 왜곡돼 있고 지방에서 의원을 열 거라면 4년간 큰 병원에서 ‘진짜’ 의사들 심부름 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92년 신씨는 성남 상대원 공단 주변에 병원을 열었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공단 근로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지금도 하루 평균 10여명 정도는 무료환자라는 것이 부인 김씨의 말. 어쨌거나 병원을 운영하면서 8년여만에 빚을 다 갚았고 1년 전에는 집도 장만했다.
93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 조직국장을 맡은 그는 95년 성남 기독교협의회에서 주는 인권상을 받았고, 그 해 성남시민모임 초대총무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여기서 그는 쓰레기 소각장 문제, 아파트 관리비 문제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해결에 힘을 썼다. IMF 직후에는 성남시민 실업극복을 위한 운동본부 일을 맡기도 했다.
신씨 가족들은 한결같이 “신씨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직선적인 성격이면서도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한 울타리로 결집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며 “그런 성격이 이번 의약분업에서 의쟁투를 중심으로 의료계의 의견을 모으는데 큰 힘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강경파? 원칙주의자?
올해 4월 그는 성남의사협회장에 추대되면서 ‘폭풍속’으로 들어간다. 그전까지는 의협 활동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성남 의쟁투 위원장을 겸하면서 한국의 의료현실을 파악, 강경노선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가족들은 “원칙주의자지 강경파는 아니고, 회원들의 의견을 경청해 하나의 결론을 내릴 뿐 독선적인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의 표현에 의하면 민주의사회에 ‘떠밀려’ 의협회장 선거까지 나온 신씨는 당시 경선에서 승리한 김재정 회장 추천으로 결국 의쟁투 위원장이 됐다. 부인 김씨는 “남편은 자신이 의쟁투 위원장을 맡으면 의약분업에 대해 ‘선시행-후보완’을 생각하는 회장과 의견이 달라 의료계가 분열된다며 거부했었다”고 말했다.
한사코 의쟁투 위원장을 거부하던 신씨는 결국 의약분업 시행과 관련한 정부와의 협상이나 대정부 투쟁결정 등에 대한 전권을 얻은 후에야 수락했다. 김미숙씨는 “내가 알기로 1차 폐업을 철회한 뒤 정부는 의협과 의쟁투 지도부에 대해 사법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이면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남편은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잠수’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도피를 시작하는 신씨가 “예전 처럼 구타나 고문같은 것도 없을 테니 오랜만에 한번 들어가 책도 보면서 푹 쉬는 셈 치겠다고 했다”며 “대다수 의사들이 폐업에 찬성하는 입장이니 총대를 멘 의쟁투 위원장으로서 폐업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남편을 존경했지만 지금처럼 남편이 크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김씨는 “의쟁투 위원장을 처음 맡았을 때 감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우리 남편이 그 일을 잘해낼 것인가에 대한 걱정 뿐이었다”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토록 강해 보이던 김씨도 기자가 14일 저녁 신씨와 통화를 했다고 전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잘 계시던가요?”라며 안부를 물은 김씨는 ‘가족이 보고 싶지 않다더라’는 기자의 전언에 “그분답네요…”라며 피식 웃었다.
의료계의 주장과 정부의 방침이 현재와 같이 평행선을 그리는 상황에 의약분업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는 않다. 설령 극적으로 의료계의 폐업이 철회된다 할지라도 충분한 준비없이 시행된 의약분업에 대한 크고 작은 잡음은 끊이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의쟁투는 완전한 의약분업 정착을 위한 특별기구로 당분간 활동을 계속할 전망이다.
쉽게 가라앉지 않을 갈등
한편 지난 6월 인터넷에는 한 의사가 ‘판도라의 상자’라는 글을 올려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이 글은 의약분업파동을 의료계와 약계의 갈등, 그리고 제도시행을 강행하려는 보건복지부 삼자간의 갈등 정도로만 보던 시각을 뛰어 넘어 청와대, 시민단체, 의료보험관리공단, 제약회사, 보험회사, 미국까지로 확장, 분석했다.
의사의 경우도 ▲30∼40대 개원의 ▲전공의 ▲의대교수 ▲의협 ▲의쟁투 ▲병협 등으로 나누어 분석해 의료계 내에 존재하는 이견을 면밀히 분석했다. 이 글은 의약분업을, 판도라의 상자로 정의했고 그 판도라의 상자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의료사회주의’와 ‘의료자본주의’의 싸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 글을 쓴 필자는 “의약분업 문제는 보건복지부로 대표되는 의료사회주의자와 의료자본주의자인 의사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이데올로기 전쟁’”이라며 “의료계가 폐업을 철회한다고 해도 전쟁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휴전’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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