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두 살 정영숙(가명)씨. 지난 5월 그는 13년 전 자신이 일했던 한 방직공장의 문을 두드렸다. 자신과 함께 일했던 친구 양미정(가명)씨를 찾기 위해서였다. 또래 친구들이 꿈 많은 여고시절을 보낼 때 공장 먼지에 파묻혀 잔업과 철야를 밥 먹듯 했던 지난날을 함께 추억하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다.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게 됐고 단란한 가정도 꾸리게 된 그 친구와 서로 도움이나 주고받으며 지내자고 찾아온 것은 더욱 아니다. 영숙씨가 미정씨를 13년 만에 찾은 이유는 엉뚱하게도 미정씨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미정씨는 뜻밖에도 13년 전 다니던 그 공장에 그대로 근무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둘 사이엔 반가움보다 서먹함이 앞섰다.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영숙씨는 미정씨에게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고 넌지시 물었다.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한 미정씨는 영숙씨의 이 질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영숙씨는 왜 13년 만에 친구를 다시 찾았으며, 기껏 만난 친구보다는 그 아버지의 행방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또 미정씨는 아버지의 소재를 묻는 물음에 왜 정색을 한 것일까. 13년 전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두 달 뒤, 영숙씨와 미정씨는 경찰서 형사계의 한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다. 영숙씨는 어린 남매를 유괴한 피의자로, 미정씨는 그 아이들의 어머니로.
여느 유괴사건 같으면 피해자가 가해자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으며 경찰서 안이 소란스러웠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취재진이 몰려들고 카메라가 유괴범인 영숙씨의 얼굴을 비췄지만 그녀는 얼굴을 숨기기는커녕 짜증스러운 듯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난 그냥, 미정이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그것만 알고 싶었단 말이에요!”
아이들을 납치하고서도 그 아이들의 할아버지를 자꾸 거론하는 이 희한한 유괴사건으로 인해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된 13년 전의 사건이 새삼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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