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사 중 한 명인 민주참여네티즌연대 이준호(32) 대표가 ‘주권을 포기한 노무현은 국민 앞에 사과하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내걸린 단상에 올라 인공기를 찢는 퍼포먼스를 하려던 찰나, 단상 옆에 있던 사복 경찰관 몇 명이 소화기 분말을 뿌리며 인공기를 뺏았다. 그러자 집회 참가자들 일부가 그중 김모 순경을 에워싸고 10여 분간 집단폭행을 가했다.
얻어맞은 김순경의 이마에선 핏물이 흘러내렸고, 집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전경들의 보호를 받아 김순경이 경찰버스에 오를 때까지 흥분한 집회 참가자들은 연신 “잡아라, 잡아!” “빨갱이 죽여라!”는 구호들을 외쳐댔다. 강원도 속초에서 왔다는 한 30대 남성은 단상으로 뛰어올라 “예비역 해병대, 예비역 공수부대원들은 앞으로 나와 연단을 보호하자”고 소리치기도 했다.
이날 집회는 8·15 국민대회에서의 인공기 소각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유감 표명, 8월24일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이하 대구U대회) 미디어센터 앞에서 벌어진 보수단체와 북한기자들 간 충돌에 대한 조해녕 대구U대회 조직위원장의 유감 표명, 뒤이은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의 유감 표명 등을 규탄하는 성격의 행사. U대회 기간중이어서 경찰의 경비는 부쩍 삼엄했다.
집회는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가 제창(4절까지), 멀티비전 상영, 자유발언, 성명서 낭독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서해교전 당시 전사한 고 황도현 중사의 아버지 황은태씨도 연단에 올라 “한총련 학생들은 몽땅 빨치산 후손이다. 북한 미녀응원단은 특수훈련을 받은 특수요원들이라 생각한다”며 한총련과 북한 응원단을 강력 성토했다.
노대통령과 이장관의 ‘사죄’를 촉구한 집회 참가자들은 “노무현 대통령은 하야해야 한다, 시골군수감도 안된다” “집회가 끝난 뒤 이창동이 사무실을 때려부수자” “다음에 모일 땐 청와대의 좌익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등 극단적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400여 명(경찰 추산)의 집회 참가자들은 대부분 50∼70대 남성. 태극기를 든 참전용사들 사이로 그들의 가족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이철승(81)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지만원(61) 시스템클럽 대표 등 익히 알려진 보수인사들의 얼굴도 보였다. 집회장 한 켠엔 ‘월간조선’의 자사 출판물 가판대도 자리잡고 있었다.
집회가 막바지에 다다른 오후 5시45분, 사회를 맡은 인터넷 ‘독립신문’ 신혜식(35) 대표는 인공기를 찢는 퍼포먼스에 실패한 걸 의식한 듯 마무리 멘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헌법 아래서 우리의 주장을 얘기하고 있는데, 인공기를 찢거나 태우는 게 대체 무슨 죄가 됩니까. 애국시민 여러분! 다음주에 한 번 더 합시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9월5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북한기자 대구만행 및 자칭 국민의 힘 테러 규탄대회’ 집회에서 ‘김정일 타도’를 부르짖은 300여 명(경찰 추산)의 ‘행동하는 우익’은 결국 인공기를 찢고 불태우는 데 성공했다.
‘총궐기’ 나선 보수진영
보수단체들은 올들어 세 차례의 대규모 집회를 잇따라 개최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다. ‘반핵반김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3월1일 개최, 경찰추산 7만명 참가), ‘반핵반김 한미동맹 강화 6·25 국민대회’(6월21일 개최, 11만명 참가), ‘건국 55주년 반핵반김 8·15 국민대회’(8월15일 개최, 1만5000명 참가)는 똘똘 뭉친 보수세력의 기세를 한껏 과시한 ‘파격’이었다.
보수단체들의 이같은 ‘집단행보’는 1970년대의 소위 ‘관제데모’ 이후론 그 전례를 찾기 힘든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뭉치게 한 것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국민대회의 성격과 흐름을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3·1절 국민대회의 경우 (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회장 길자연 목사·이하 한기총)가 지난 1월 개최한 평화기도회와 무관하지 않다. 한기총이 1월11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개최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가 보수단체 인사들의 이목을 끌면서 자연스럽게 국민대회를 한기총과 함께 열자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10여 개 보수단체가 연합해 ‘구국협의회’를 만들어 3·1절 대회를 열게 됐다는 게 북핵저지시민연대(www.cceo.or.kr) 박찬성(50) 상임대표의 귀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