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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茶母’들의 맹렬 활약기

조폭 잡는 주부 형사, 시체 들쑤시는 처녀 형사

‘현대판 茶母’들의 맹렬 활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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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여형사의 삶을 다룬 TV 드라마 ‘다모(茶母)’가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면서 ‘현대판 다모’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 국내에 여경(女警)이 창설된 지 59년이 지났지만, 여경이 ‘경찰의 꽃’인 형사·수사 업무로 진입하기엔 장벽이 여전히 높다.
  • 그러나 여형사들은 특유의 꼼꼼한 수사력과 뛰어난 위장술로 범인들의 빈틈을 파고든다.
  • 날카로운 눈매로 범죄현장을 누비는 맹렬 여형사들의 24시간.


서울 충정로에 있는 경찰청 로비에는 ‘자랑스런 경찰관들’이란 게시물이 걸려 있다. 10여 명 경찰관의 사진과 업무성과를 붙여놓았으니 당사자들에겐 영예가 아닐 수 없다. 9월 초, 이 게시물의 맨 앞자리는 여경인 강순덕(37) 경위가 차지했다. 강경위는 외국인 범죄를 다루는 외사과와 기획수사를 전담하는 특수수사과에서 남자 수사관보다 뛰어난 첩보 및 기획수사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베테랑 수사관이다. 지난 6월에는 군 수뇌급 인사들이 H건설 상무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사건을 해결하는 공을 세웠다.

“하청업체 이사가 건설회사 상무에게 접대비도 쓰고 군 인사도 소개해줬는데 약속과는 달리 공사를 수주하지 못해 억울해 한다는 얘기를 지인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를 찾아갔더니 ‘여자가 군에서 오는 압력을 견딜 수 있겠느냐, 잘못되면 나만 다친다’며 의심스런 표정을 짓더군요. ‘요즘은 그런 것 없다’고 잘라 말했죠.”

확고한 태도의 강경위를 신뢰한 하청업체 이사는 모든 사정을 털어놓았고, 본인도 뇌물공여 혐의로 불구속 수사를 받았다. 그러나 군 수뇌부가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증명하려면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양측이 ‘안 줬다’ ‘받은 적 없다’고 발뺌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영장 기각에 자존심은 무너지고



해당 건설회사 상무를 찾아가 수사협조를 요청하자 “부하직원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따라가겠다”고 했다. 강경위는 그가 직원과 팔짱을 끼는 척하며 양복 저고리에서 무언가를 슬쩍 꺼내 전하는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강경위는 후배 수사관들을 시켜 직원으로부터 그 ‘물건’을 받아왔다. 강경위가 예상했던 대로 군 장성급 인사들에게 뇌물을 건넨 사실을 꼼꼼하게 적어놓은 수첩이었다. 이후 이들의 혐의 시인과 구속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특수수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첩보능력이다. 얼마나 ‘양질’의 첩보를 얻어내느냐에 따라 사건을 맡게 되고, 팀을 이뤄 일하는 동료 수사관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첩보원 대부분이 남자일텐데 여자 경찰관에게 중요한 얘기를 해주느냐”고 물었더니 강경위는 “그것은 전적으로 신뢰의 문제”라고 답했다.

“첩보원들은 자신이 첩보한 내용을 가장 신속하게, 그리고 제대로 해결해주는 경찰을 신뢰하기 마련이며, 한번 신뢰가 쌓인 뒤에는 듬직한 첩보원이 된다”는 것. 굵직한 사건 대부분은 첩보원이 주는 ‘알짜’ 첩보 덕분에 수사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1998년 가을 수해 당시 이재민 구호품 횡령사건을 해결한 것도 첩보 내용을 꼼꼼하게 수사한 끝에 이룬 쾌거였다. 잘 알고 지내는 고향(전남 나주) 사람이 “마을 창고에 이상한 의약품이 가득 쌓여 있다”고 제보하자 강경위는 일주일 동안 시골 아낙네로 위장해 창고 주변에서 잠복근무했다.

그 결과 미국의 종교단체가 이재민들을 위해 보내온 의약품을 한 의약재단이 빼돌려 시중에 유통시키고 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5t 트럭 8대 분량으로 5억원이 넘는 규모였다. 강경위는 “압수한 의약품을 경찰청 앞마당에 쌓아놓는 것도 엄청난 일이었고,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뛰어나가 비닐로 덮어놓느라 애를 먹었다”며 웃었다.

강경위는 경찰로서 가장 자존심 상하는 일이 “검사가 영장을 기각할 때”라고 했다. 구호품 횡령사건 때 강경위는 검사가 “미국의 종교단체가 이 의료재단에 의약품을 위탁한 것인지 기증한 것인지 그 소유의 한계를 명확히 하라”는 지시와 함께 영장을 기각하는 바람에 쓰린 속을 달래며 애써 잡은 피의자들을 일단 풀어줘야 했다. 위탁이라면 ‘횡령’ 혐의가 인정되지만, 기증이라면 혐의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강경위는 “법을 잘 몰라 실수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실수한 내용을 노트에 적어놓고 종종 꺼내 읽는다”며 꼼꼼한 면모를 드러냈다.

우리 경찰에는 지난 7월 말 기준으로 3344명의 여경이 근무하고 있다. 이는 10만명에 달하는 전체 경찰의 3.5%에 불과하다. 프랑스(20%), 스웨덴(17%), 미국 마이애미(22.3%) 등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다. 더욱이 경찰 업무의 ‘꽃’이라는 형사·수사분야에 종사하는 여경은 극히 드물다. 여경이 배치되지 않은 부서는 없지만, 대개 행정업무 등 내근업무를 맡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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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지남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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