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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용당했을 뿐 …” 누가 오스왈드를 쏘았나

케네디 암살과 음모론

“나는 이용당했을 뿐 …” 누가 오스왈드를 쏘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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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암살범, 수사 도중 저격당해 사망
  • ● 20명 넘는 관련자들, 의문의 죽음
  • ● 쫓기듯 사건 종결 시도한 FBI
  • ● 핵전쟁 공포 스멀스멀…“단독범행으로 하라”
“Sic Semper Tyrannis!(폭군에게는 언제나 이렇게 하라)”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는 1865년 4월 1일 링컨을 암살한 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미국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 사건의 주범 티모시 맥베이 역시 1995년 4월 19일 체포될 때 이 문구가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줄리어스 시저의 양아들 브루투스가 시저를 죽이고 그렇게 외쳤다는 설도 있다. ‘폭군에게는 언제나 이렇게 하라!’는 문구는 아이러니하게 미국 버지니아 주의 표어이기도 하다. 독재를 경고하고 민주정치를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나 이 문구는 암살범이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변명거리로 주로 사용한다.

운명의 총소리

1963년 11월 22일 선거자금을 모으고자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서 조찬 연설을 마친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은 서둘러 전용기 에어포스 원에 탑승했다. 다음 목적지인 댈러스에서 오찬 연설이 예정돼 있었다. 전용기는 오전 11시 25분 댈러스의 러브필드 공항에 도착했다. 오찬 장소는 댈러스 시내에 위치한 트레이드 마트. 공항에서 트레이드 마트까지 약 16㎞ 거리에서 카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케네디를 보려고 몰려든 20만 가까운 인파 탓에 카퍼레이드는 계속 지체됐다. 더욱이 케네디는 연도에 늘어선 사람들과 악수하느라 예정에도 없이 두 번이나 차에서 내렸다.

케네디를 태운 차는 많은 사람이 대통령을 볼 수 있도록 지붕을 없앤 무개차였다. 케네디는 아내와 함께 뒷자리에 앉았고, 앞자리에는 존 코널리 텍사스 주지사 부부가 타고 있었다. 낮 12시 29분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딜리 광장을 지났다. 텍사스 주지사의 아내 넬리 코널리가 케네디에게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댈러스가 대통령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시겠지요?” 케네디도 웃으면서 “잘 안다”고 대꾸했다. 몇 초 뒤 전용차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창고 앞을 지날 때 시계는 12시 30분을 가리켰다. 이윽고 총성이 울렸다. 세계를 뒤흔든 운명의 총소리였다. 역사를 바꾼 순간이었다.



암살 순간을 포착한 이른바 ‘자프루더(Zapruder) 필름’에는 총성이 울리자마자 차에 타고 있던, 케네디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총소리가 난 오른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담겨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면서 사냥을 즐겼던 코널리 주지사는 총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소총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조사 과정에서 진술했다. 코널리가 고개를 돌려 케네디를 쳐다보려 했으나 대통령을 볼 수는 없었다. 코널리는 등 위쪽에 총을 맞았다.

암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총격 당시 케네디는 연도의 시민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첫 번째 총탄은 빗나갔으나 두 번째 총탄이 대통령의 등에 맞고 목을 관통한 뒤 앞에 있던 텍사스 주지사의 등에 맞았다. 이후 세 번째 총탄이 대통령의 머리를 향했다. 두개골이 부서지고 뇌가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치명적이었다. 전용차는 전속력으로 달려 수 분 내에 병원에 도착했지만 대통령은 이미 숨진 뒤였다.

저격이 발생한 후 경찰은 용의자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총격 이후 몇 분 지나지 않아 교과서 보관창고 6층 창문에서 한 남자가 소총을 발사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가 나타났다. 경찰은 무선망을 통해 용의자의 인상착의를 알렸고, 주변 지역을 봉쇄한 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한 딜리 광장에서 약 5㎞ 떨어진 주택가에서 경찰관 티핏은 용의 인물과 인상착의가 비슷한 남자를 발견하고 불러 세웠다. 티핏이 경찰차에서 내리자 이 남자는 바로 총을 꺼내 티핏을 사살했다. 이 광경을 주변 신발가게 매니저가 목격하고 용의자가 극장으로 몰래 들어간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극장을 포위하고 극렬히 저항하는 용의자를 검거했다. 오후 1시 40분, 케네디 대통령이 총에 맞은 지 70분 뒤였다.

카스트로 추앙한 암살범

용의자의 이름은 리 하비 오스왈드였다. 그는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고 어머니는 재혼한 뒤 다시 이혼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무려 22번 이사를 했고 학교도 12번이나 옮겨야 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오스왈드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진 그는 제대 후인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당시 미 해병 출신이 소련으로 망명한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소련에서 결혼하고 딸도 낳았지만, 소련의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오스왈드는 1962년 아내, 딸과 함께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오스왈드는 자본주의를 증오했다. 그래서 새롭게 사회주의 혁명의 산실로 떠오른 쿠바로 가고 싶어 했다. 또한 카스트로를 맹렬히 추앙했다. 미국에는 쿠바 영사관이 없었기에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찾아가 쿠바 영사관을 방문했다. 열렬한 쿠바 혁명 지지자로 자신을 소개했지만 미국인을 불신하던 영사관 직원의 거부로 비자를 받지 못한 채 미국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럼에도 오스왈드는 뉴올리언스에서 미국의 쿠바 사태 개입 반대를 외치면서 반미 시위 대열에 적극 참가하는 등 쿠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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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jbalance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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