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나는 김구 선생처럼 둥근 안경을 쓰고 검은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던 꿋꿋한 아버지의 모습에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유년시절부터 나의 든든한 바람벽이었다.
멋진 콧수염을 기른 아버지는 한약재 냄새 짙은 사랑방에서 손꼽히는 이야기꾼이었다.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 학내 사건으로 일 년 반 동안 감옥살이까지 하고 나왔던 나도 예외가 될 수 없어 5·18이 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릉에 있는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몇날 며칠 고문을 받으며 밤을 지새웠다. 짐승과도 같은 시절이었다.
그해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 밤 전기가 나가서 어두컴컴한 벙커에 초를 밝혀두고 혼자 앉아 있는데 누군가 행정반에서 올라와 쪽지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전보였다.
“김 일병, 안됐구먼.”
그의 말투 때문에 나는 어떤 불길한 예감에 싸인 채로 전보를 열어보았다.
부고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나는 갑자기 막막한 공간으로 붕 떨어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잠겼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텅 빈 상태로 얼마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살벌한 감옥과 군대를 거치면서 나는 나의 감정들, 이를테면 슬픔이니 그리움이니 사랑이니 하는 모든 부드러운 감정을 호두처럼 단단한 껍데기 속에 묻어둔 채 살아가고 있었다. 출구 없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 그러한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아버지의 訃告
나는 부고를 들고 벙커 밖 언덕으로 내려왔다. 검은 하늘에서는 쉴새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짐승처럼 거멓게 앉아 있는 강원도의 산이 보였다. 나는 방한모를 벗고 하염없이 어둠 속에 서서 눈을 맞았다. 그대로 얼어버린 채 눈사람이라도 되어버릴 생각이었다. 이윽고 호두 껍데기처럼 단단한 틈새를 뚫고 슬픔의 감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아아, 아버지! 세상에서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엔 객관적이기보다는 자신과 관계된 주관적인 요소가 더 많을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따랐던 나로서는 더욱더 주관적으로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 사십대 중반이 넘은 늦은 나이에 나를 보신 아버지는 내가 웬만큼 나이를 먹을 때까지 한시도 당신의 무릎에서 나를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이마에 움푹한 흉터가 있고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아버지는 경남 창녕 읍내에서 한의원을 하셨다. 담배 연기 자욱하고 한약재 냄새 짙은 사랑방은 언제나 뜨내기 손님, 동네의 할일 없는 늙은이, 이야기꾼들로 시끌벅적했다. 좀 허풍기가 있고 목소리가 우랑우랑한 아버지는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이야기꾼이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리는 법이 없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튀어나오는 침이 온통 내 얼굴로 쏟아지고는 했다.
전쟁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사람 이야기로 넘쳐나던 그 속에서 나는 유년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의 친구인 풍수 영감에게서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버지의 중년에서 노년까지 느지막한 시기다. 아버지의 소년기와 청년기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나중에 조금씩 들은 내용을 종합해 추론해보자면 대충 이러하다.
아버지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합병하던 1910년 경상남도 창원 땅에서 태어나셨다. 결코 부유하달 수 없는 시골 토반의 5남1녀 중 넷째였다.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서당을 다닌 덕분에 사람들은 아버지를 ‘서당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큰아버지(나는 얼굴도 모른다)가 빚 보증을 잘못 선 탓에 일가가 몽땅 야반도주를 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됐는데 그때 아버지는 창녕읍에서 10리쯤 떨어진, 지금은 우포늪으로 유명한 합천 가는 길가 직교리라는 마을 한쪽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궁벽하기 짝이 없는 집에서 다섯 남매를 남겨놓은 채로 첫부인이 돌아가셨다. 아마도 당시 유행했던 결핵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나서 한 해가 지난 뒤에 아버지는 열 살 아래인 새 아내를 얻으셨는데 그이가 우리 어머니시다. 어머니는 딸형제가 많은 시골 농가의 맏이로 무척 생활력이 강했고, 허풍쟁이인 아버지와는 달리 모든 일에 철저하고 민첩하셨다.
아버지는 대구의 전통적인 한의사 밑에서 한의학을 공부하셨는데 그 선생이라는 분은 내가 어릴 적에 벌써 호호 영감이 되어 있었다. 머리에 누런 호박 관자가 달린 망건을 쓰고 도폿자락에서 인삼주가 담긴 호로병을 꺼내어 조용히 마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영감이 다녀가는 날은 온 집안이 쥐죽은 듯 조용하였다. 아버지는 ‘동의보감’에 관해서라면 영남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미군정이 시작된 이후 의사시험에 합격해 한의사 자격증을 땄는데 당시 이 자격증을 딴 사람은 읍에서 단 두 사람뿐이었다.
전쟁이 나자 온 마을이 불타버리고 우리 가족은(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부산 쪽으로 피난을 갔다. 아버지는 의료기관에 지원하여 따라다니다가 때로는 인민군 쪽 의료기관에 소속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때 보고 들은 것을 사랑방에서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삼아 그중 많은 부분이 내가 뒤에 소설을 쓸 적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눈빛이 매섭고 콧수염이 멋있었지만 아버지는 실수투성이의 인간형이었으니 그 실수의 뒤치다꺼리는 자연히 어머니 몫이었다.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우리는 동네 어귀에서 동네 안의 새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때문에 빚을 많이 지게 되어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약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부산으로 돈 벌러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에 아버지를 따라간 사람이 바로 갓 다섯 살 난 나였다. 그때의 상황을 나는 어떤 소설에선가 이렇게 그렸다.
[아버지가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아버지의 발 밑에서 자갈이 와글와글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읍으로 올라가는 국도에는 자갈이 자동차 바퀴에 밀려 작은 둔덕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부황 든 얼굴색의 달이 언뜻언뜻 구름 사이로 비치는 길을 열심히 걸어갔다. 플라타너스의 그림자가 시꺼멓게 도깨비처럼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수지 둑길 밑으로 걸어갈 땐 저수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길다란 아버지의 회색 두루마기가 초겨울 바람에 날려 자꾸만 내 얼굴을 가렸다….]
읍에 와서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탔다. 짐과 사람이 뒤섞여 있는 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동안 나는 심하게 멀미를 했다. 마침내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때는 마악 전깃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초저녁 무렵이었는데, 그때까지 시골의 호롱불만 보아온 나는 불꽃이 피어난 그 정경에 그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에 잠겼다. 정류장 어디선가 낮은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어느 단층집의 귀퉁이 방 하나를 얻었다. 우리방 쪽에는 늘 응달이 졌지만 마당에는 화단이 곱게 가꾸어져 있는 그런 집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나를 남겨두고는 하루 종일 나가 있다가 밤이 늦어서야 돌아오고는 하셨다.
“아부지가 돈 많이 벌어올 테니까 잘 놀아야 된다, 알겠제? 우리 영현이도 이젠 다섯 살이니까 어른이지. 그리고 대문 밖에는 절대 나가서는 안 된다. 아이들 잡아가는 순사들이 득실거리니깐.”
“사나이 대장부가…”
그래서 나는 하루 종일 집에서 늙은이처럼 혼자 웅얼거리면서 구슬을 치거나 돌멩이로 소꿉장난을 하면서 놀았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서 왱왱 소리가 나는 양철 팽이를 여남은 개나 사다주셨는데 그게 그때에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
몸이 허약했던 나는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팽이를 돌리며 혼자 상상에 빠지고는 하였으니 그 뒤에 내가 좀 이상주의자가 된 까닭도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다.
몇 달을 그렇게 지내다가 어머니와 여동생도 따라왔고 아버지도 남의 한의원에서 고용의사로 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 어머니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건 그 무렵부터였다. 가족이 모이면서 딸기철에는 멀리 강가에 놀러가기도 했다. 구멍이 숭숭 난 철판다리를 건너갈 때에 나는 무서워서 아버지에게 매달렸는데 아버지가 뿌리치고 끝까지 혼자 가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사나이 대장부가…”라는 말을 입에 달고 계셨다. 키를 넘는 수숫대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석우석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한의사로서 아버지는 특히 장질부사(장티푸스)와 소아마비에 신통력을 보였다. 그래서 우리 형제 자매말고도 아버지가 목숨을 구해주셨다 하여 우리 아버지와 부자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은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은 말할 것도 없고 돌아가시고 나서까지도 아들로서 예를 다하였다. 의형제를 맺어 집안끼리 서로 일가처럼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부산 시절에도 육군 중사 한 사람이 아들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약을 갖다 먹기도 하고 장롱도 서로 바꾸어 가졌던 기억이 난다. 누추한 그의 단칸 살림방에 가면 “양분 먹어라”며 그는 꼭 밥 속에다 달걀을 하나씩 깨 넣어주고는 했다.
내가 여섯 살 때에 4·19가 터졌다. 그날 우리집 앞 큰길로 학생들이 경찰 지프와 버스, 소방차를 타고 소리치며 지나갔다. 길거리에 서 있는 시민들은 그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양동이에 물을 담아다 바가지로 퍼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사랑방 여론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이 있을 때마다 늘 붓으로 한지에다 메모를 해두었다가 사람들이 모이면 풀어보이고는 하셨다.
신문으로는 양이 차지 않았던지 아버지는 잡음이 심하게 나는 낡은 진공관 라디오를 하나 구해오셔서 눈만 뜨면 라디오에 스위치를 넣는 일부터 하셨다. 당시만 해도 전기 출력이 낮아서 라디오에 ‘도란스(트랜스 : 변압기)’를 연결시켜놓았는데 웅웅 소리가 나는 그 뜨끈뜨끈한 도란스를 아버지는 베개 삼아 베고 주무시기도 했다.
‘도란스’를 베고 주무시다니
내가 일곱 살이 되자, 아버지는 다시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오셨다. 별로 돈을 벌지도 못했지만 한 차례 병을 앓고 나자 향수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버지는 벌써 오십 고개를 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옛집을 큰형에게 맡겨두고 한의원 자리를 이번엔 10리나 더 떨어진 읍내에다 잡았다. 다행히 읍에서 아버지의 한의원은 꽤 성공적이었다. 그때 나는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62년이었다.
교실과 선생이 태부족인 그 학교에서 3학년까지 다녔는데 위의 형이 고등학교를 가느라고 재수를 하러 대구로 가는 통에 나도 덩달아 대구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와 최초의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와 헤어져 대구 산격동 아버지 친구집에 머물면서 그 집 아들인 문길 형의 자전거 뒤에 실려 학교까지 통학을 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날마다 눈물로 지새웠다.
당시 우리 담임선생은 빼빼 마르고 아주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는데 전학 온 나를 약간 무시하는 투로 ‘따뜻한 색을 다 대봐라’ ‘차가운 색을 다 대봐라’ 하고 묻고는 우리 어머니에게 성적이 중간 정도 되겠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어머니가 시골에서 전교 1등을 했다는 말에 담임선생은 노골적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예단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달 안 되어 우리반에서 최고의 점수를 따내었다. 나는 많은 질문을 생각해 내었고 공부 시간만 되면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담임선생에게 그 질문들을 해댔다. 고체, 액체, 기체를 공부할 때에는 선생이 “기체를 들어봐라” 하면 시시한 대답이 싫어서 “전기!” 하고 대답했다가 매를 맞은 일도 기억 난다.
그 무렵 기다려지는 것은 오직 방학뿐이었다. 그리운 아버지와 고향 산천을 보러 가는 게 꿈이었던 것이다. 방학을 하면 그날로 나는 하루 종일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대문 밖에서 큰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며 뛰어들어가서 방문 밖에서 절을 올린 다음에 아버지께 매달리고는 하였다. 그러나 방학이 되어 고향에 갈 적마다 아버지는 몰라보게 늙어가셨다. 어느 핸가 내려갔을 때는, 오랜 병을 앓은 탓인지 머리가 하얗게 세고 그토록 우랑우랑하던 목소리도 낮게 깔려 있었다. 아버지의 우랑우랑하던 목소리만 듣고 자랐던 나는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라진 ‘아버지의 집’
나는 그 뒤에 대구에서는 최고로 좋다는 경북중학교에 들어갔고 다시 경북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그토록 따르던 아버지의 구심력에서 벗어나 세상의 원심력 쪽으로 점점 나아가게 되었다. 사춘기를 맞을 때쯤에는 아버지보다도 세상사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늙은 아버지의 세대 감각과는 또 다른 세상을 동경하게 된 것이다.
방학에 고향에 내려가도 그 전처럼 아버지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그 대신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거나 했다.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의 속에 있는 것을 다 갉아먹어버린 새끼거미처럼 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러드리면서도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노인네 같은 이야기가 별로 흥미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름 내내, 또는 겨울 내내 ‘아버지의 집’에 머무는 것은 확실히 행복하고 편안한 일이었다. 그 행복과 평화를, 나는 한참 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어느샌가 ‘아버지의 집’이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뼈저리게 기억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나는 더 멀리 서울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인문사회계열에 입학한 나는 2학년에 올라가서 학과를 선택할 때 고등학교 시절에 빠졌던 실존주의 철학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감성적 허무주의를 더 공부하기 위해 철학과를 지망했다. 무조건 법대를 강요하는 형과 격론을 벌인 끝에 철학과를 선택한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나에게 어떤 선택이고 간에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었다. 학과 선택 역시 내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셨다. 시골 선비이기도 했던 아버지는 철학을 옛날 학문으로 이해해주셨고 학자가 되는 것이 관리가 되는 것보다 더 떳떳하다고 생각하셨다.
‘산은 높고 구름은 층층…’
1977년 가을, 유신 말기의 폭압이 극에 달했던 그해 대학 4학년생이던 나는 몇몇 친구와 함께 감옥에 가게 되었다. 시위 예비 음모에 의한 긴급조치 9호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우리 가족, 특히 늙으신 부모님이 당하신 절망과 좌절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머니가 영등포구치소로 첫 면회를 오시던 날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부지가 아모 걱정 말고 잘 지내라 그러시더라. 사나이 대장부가 그런 일 따위에 낙심하면 못쓴다 하시더라. 일제 때 왜놈들과 싸우다가 옥살이를 한 사람도 숱하게 많은데 그깟 일은 지내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시더라” 하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나는 검은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김구 선생처럼 둥근 안경을 쓰신 꿋꿋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모른다. 바로 그것이 유년시절부터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든든한 바람벽이 되어주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렇게 일 년 반을 감옥살이하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행여 내 마음이 흔들릴까봐 면회 한번 오시지 않았다. 보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 없으셨겠는가만 그렇게 꿋꿋이 기다려주는 게 아버지의 도리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 세월 동안 아버지는 무너지는 억장을 안으로만 다스리고 계셨는데 그때 지으신 한시에는 ‘산은 높고 구름은 층층이 끼었는데 그 사이 첩첩 길로 오르니 세상 소리들이 다 귓가로 스쳐가네’ 하는 구절도 있다.
내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병이 깊어 자리에 누워 계셨다. 머리를 빡빡 민 아들의 손을 잡고 그제서야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나 그런 만남도 잠시였을 뿐, 나는 곧 박정희 정권의 야비하고 극악스런 보복의 하나였던 강제 징집 조처로 인해 다시 군대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부산병무청으로 가서 책상을 뒤집어 엎으며 싸웠다. 그러나 병상에 계신 아버지 곁을 떠날 수가 없어 도망도 못 치고 있다가 기어코 몇 달 뒤인 늦가을, 마지막 코스모스가 햇살에 부서지는 날, 형사 한 명과 병무청 직원의 호위를 받으며 군대로 끌려갔다. 병상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지팡이를 짚고 서서 대문까지 따라 나오셨는데 그 하얗게 센 머리와 기침 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나는 그 뒤에 이렇게 시를 썼다.
내 다시 푸른 옷의 포로다,끝없는 도망질이다./햇살 짙노란 읍사무소 옆길,구월도 끝이다./형사는 앞서 가고 병무청 직원도앞서 가고 한적하고/조용하게 나는 포로다./흰머리 늙은 아버지 문간에 지팡이 짚고 서서 끝없는 기침소리/가슴에 탕탕 울리는 못질이다. 밑도 없는 울음이다.
(졸시 ‘군대가는 날’ 중에서)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헤아려보니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20년이 휠씬 넘었다. 나도 이젠 두 아들의 아비가 되어 그때의 아버지처럼 늙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 아버지를 잊고 살지만 어느 순간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서 무언가 말을 할 때면 갑자기 내가 또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그분께 안기는 듯한 기분에 싸이곤 한다. 그리고 어느샌가 그 옛날 아버지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아들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생의 어떤 수수께끼 같은 것에 사로잡힌다.
(부고를 받고서도 보안대에서 까탈을 부리는 바람에 사흘이나 지난 뒤에 눈길을 밟으며 집으로 올 수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아버지의 운구가 끝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