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 11년차 이모씨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해외파견 근무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아내가 “영어는 기본이요, 제2외국어까지 가르쳐야 한다”고 고민하는 걸 보며 3~4년 해외에 나가 있으면 아이가 외국어를 수월하게 습득하지 않을까 싶었다. 특히 중국이라면 물가도 싸니 생활비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최근 중국 주재원들 사이에 한국발 사교육 열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중국 근무하면 돈 모은다’는 말도 옛말이 됐다. 저축해둔 돈마저 끌어다 과외비로 쏟아 부을 판이다. 2005년부터 상하이에서 거주 중인 필자가 현지 사정을 취재했다.
중국 상하이 교민신문에 실린 각종 학원 광고들. 한국의 사교육 열풍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생활을 꿈꾸던 중국 주재원들은 이내 자녀교육 다중고에 시달리게 된다.
38세 주부 A씨가 자명종 알람소리에 잠을 깬 시각은 새벽 5시30분. 3월에도 상하이의 아침 공기는 여전히 싸늘하다. 따뜻한 전기담요 속에 더 누워 있고 싶지만 꾸물거릴 틈이 없다. 6시40분에 출발하는 스쿨버스에 아이들을 태워 보내려면 얼른 아침상을 차리고 아이들을 깨워 등교 준비를 시키기에 빠듯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이 상하이 주재원으로 발령난 지 2년째.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아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에 웬만큼 적응이 된 듯한데, 올해 막 입학한 둘째는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며 투정을 부린다.
“엄마, 내 PE키트(kit) 어디 있어? 아이, ICT 홈워크 파일(homework file)은 어디로 간 거야? 어제 뉴스레터(News letter) 봤어요? 상하이 채러티(Shanghai charity)에서 나눠준 거. 그거 도네이션(donation)도 가져가야 하고, 런치 카드(lunch card)에도 돈 없어. 그리고 오늘 혜진이 어셈블리(assembly) 있는 거 알죠?”
준비할 것을 전날 미리미리 말해주면 좋으련만 아들은 꼭 정신없는 아침에 요구사항을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중간중간에 암호 같은 영어를 섞어가면서. ‘스쿨 런치’가 맛없다고 투정하는 둘째를 위해 도시락까지 싼 A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스쿨버스 정류장으로 나오는 시각은 6시30분. 인근 아파트에서도 아이들이 속속 잰 걸음으로 나온다. 잠이 덜 깬 둘째가 탄 스쿨버스가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출발, 뿌연 안개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면 졸음과 피곤이 몰려오고 이게 웬 고생인가 싶지만 A씨는 새삼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도 우리 애들은 최고의 인터내셔널 스쿨에 다니잖아.’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엄마 얘기 같지만, 상하이에 살면서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는 집에선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상이다. 국제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략 아침 6시30분쯤 스쿨버스에 오른다. 대부분의 국제학교가 한국인이 주로 거주하는 구베이, 훙메이루, 룽바이 등과 가깝게는 30분, 멀게는 1시간 이상의 통학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 학부모들은 이른 등교시간과 시속 130~140km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스쿨버스의 안전에 마음을 놓지 못해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할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인 밀집지역을 벗어나면 아이들을 한국식 학원에 보낼 수 없고 과외 교사를 구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이내 포기한다. 또 가장 멀리 있는 특정 학교가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 사회에서 최고 명문으로 꼽히고 있어 이 정도 불편은 기꺼이 감수한다. 특히 상하이에서 몇 해 지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주재원 자녀들에겐 영어와 더불어 한국 교육과정에 따른 학습을 병행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2년 후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돌아가면 우리 애가 고 1인데 그냥 놔뒀다가는 한국의 수학, 과학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거든요. 어느 쪽 수준이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니까요. 아이는 학교 갔다 와서 잠깐 간식 먹고 곧장 학원으로 가요. 그래도 학원 근처에 사니까 나은 거죠. 그렇지 않은 엄마들은 애들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아이가 나오면 책가방을 학원 가방으로 바꿔주고, 곧바로 학원으로 보내죠. 우리 아이는 하루 건너 학원에 가고, 나머지 날에는 영어만 집중적으로 과외를 받아요.”
상하이 생활 2년차인 주부 B씨는 한국식 학원에서 마련한 특례입학설명회에 가는 길이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초등생 ‘영어 밑천’, 길어야 30분
서울 대치동 학원가. 상하이 내 한국인 거주지역에도 이런 보습학원들이 여러 군데 들어섰다.
그러나 학비를 감당할 수 있다고 해서 아무 국제학교에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하이미국학교(SAS), 영국국제학교(BISS), 덜뤼치칼리지(DUCKS), 레고국제학교(SRIS), 예청국제학교(YCIS), 커뮤니티국제학교(SCIS), 콘코디아국제학교(CISS), 리빙스턴미국학교(LAS), 싱가포르국제학교(SSIS) 등 10여 군데 국제학교 중에서 한국 학부모들 사이에 선호도가 가장 높은 곳은 상하이미국학교. 이곳은 입학시험에 합격하고도 빈 자리가 없어 입학을 기다리는 대기자가 수두룩하다. 몇 달은 기본이고, 때론 재시험을 치르는 등 전형 절차가 까다롭다.
그 외의 국제학교들은 매학기 한국인 사회의 유행(‘한국 학생이 적은 곳이 좋다’ 등)과 소문(‘공부를 별로 안 시킨다더라’ ‘학사 운영이 엉망이다’ ‘ESL 프로그램이 좋다’ ‘왕따 문제가 있다’ 등)에 따라 선호도 순위가 바뀐다. 대체로 초등학교 저학년은 인터뷰만으로 학생을 뽑기 때문에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고학년으로 갈수록 필기시험을 병행하므로 입학이 수월하지 않다. 특히 고2, 3학년의 경우 받아주는 국제학교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국제학교에 입학한 한국 학생의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저학년의 경우 한국에서 ‘○○○ 영어교실’ ‘○○ 영어 클럽’ 등으로 꾸준히 학습했다고 해도 여러 나라에서 온 아이들과 어울리다보면 영어 밑천이 금세 떨어진다. 길어야 30분이다. 고학년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네이티브’ 수준이 아닌 이상, 전 과목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는 교육과정을 따라가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대부분의 국제학교가 미국이나 영국식 커리큘럼을 따르는데, 한국의 교과과정과 많이 다른데다 각자의 생각을 발표하고 글로 표현하는 수업이 대부분이고 과제도 많아 아이들이 적응하는 데 최소 1년 이상이 걸린다.
초등 교과 과목은 Literacy(읽기와 쓰기), Numeracy(수리), PE(체육), Art(미술), ICT(컴퓨터), Topic(논리), Music(음악) 등인데, 한국에서 온 학생이 특히 어려움을 겪는 과목은 Numeracy와 Topic이다. Numeracy의 경우 한국 학생이 계산 능력은 뛰어나지만 긴 영어 문장으로 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걸림돌이다. 영어로 된 수학 용어를 따로 공부해야 하며, 답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영어로 써야 해 아이들이 적잖은 부담을 느낀다.
숫자를 라운딩해라?
Topic은 사회, 지리, 역사, 과학 분야별 주제를 정해 토론, 글쓰기, 발표를 하는 수업이다. 입학 초기엔 수업 내용은 물론 과제가 무엇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한국 학생이 태반이다. 큰 범위의 주제를 놓고 스스로 정보를 찾고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는 수업이 대부분이라 한국 학생의 경우 숙제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는 날도 부지기수다. 두 아이를 국제학교 초등과정 6학년, 4학년에 보내고 있는 주부 C씨는 1년 전, 아이들을 처음 학교에 보내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Literacy는 영어, Numeracy는 산수’라고 생각했죠. 한국에서 산수는 잘했으니까 별 문제 없겠거니 했는데, 아이가 영어 실력이 부족하니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숫자를 ‘rounding’ 하라기에 뭘 돌리라는 건가 했더니 글쎄, 반올림하라는 뜻이더군요. 그러니 긴 문제는 아예 읽지도 않고 대충 눈치로 푸는 것 같아요. Topic 과제나 프리젠테이션 준비는 엄마, 아빠가 돕지 않으면 아이 혼자 하기 힘들죠. 영어로 글을 읽고 내용을 파악하기도 어려운 판에 생각을 정리한 글을 써야 하니 온 가족이 자정이 넘도록 인터넷을 붙들고 있는 날이 허다했어요. 미국이나 영국 검색 사이트를 이용해서 자료를 찾아야 하는데 좋은 자료를 골라내는 것도 영어를 못하면 ‘그림의 떡’인 거죠.”
‘중국은 한국보다 후진국이니 국제학교라고 해봐야 별거 없을 것’이란 생각으로 영어와 중국어를 ‘싼값에’ 마스터하고 돌아가겠다는 야무진 꿈이 산산조각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상하이에 새 거처를 마련한 뒤,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물가와 인건비 덕분에 현지인 가사 도우미를 고용해 집안일에서 해방되고, 쇼핑이며 외식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던 ‘사모님’도 얼마 못 가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허덕이는 아이를 발견하고부턴 한국에서보다 더 치열하게 아이 뒷바라지에 매달리게 된다.
상하이는 국제도시란 명성에 걸맞게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학교에 제2외국어를 쓰는 학생들을 위한 ESL(학교에 따라서 EAL, ESOL이라 하는 경우도 있다) 과정이 있다. 다만 초등학생을 위한 것이다. 중·고등학생의 영어 실력이 ESL이 필요한 수준이라면 일반 교과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무리여서 ‘실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받지 않겠다’ 혹은 ‘입학하더라도 어려움은 스스로 해결하라’는 게 학교의 암묵적인 방침이다.
중국인 월급과 맞먹는 영어 과외비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모는 자녀의 영어 실력 향상에 총력을 기울인다. 때문에 주재원 가정에서 1대 1 개인교습이나 학원 등 사(私)교육에 기대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방학이면 제3국으로 어학연수를 보내거나 아이만 한국으로 들여보내 학원에 다니게 하는 집도 있다.
학부모는 개인교습 강사로 국제학교 교사를 최고로 꼽고, 그 다음은 영어 원어민이다. 영어 원어민이라 해도 영어 교육 전공자나 TESOL(비영어권 국민 영어교육) 자격증을 갖춘 사람은 드물어 가르칠 대상이 초등학교 저학년이면 집에 와서 함께 놀아주는 데 불과하지만, 학부모는 ‘네이티브 스피커’와의 잦은 접촉이 어떤 식으로든 아이의 영어 실력을 높여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장기간 꾸준히 원어민 교사와 대화를 나누고, 놀이를 한다면 그보다 더 자연스럽게 영어 실력을 쌓을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을 대상으로 영어 과외를 하는 원어민 강사의 보수는 시간당 200~300위안(약 2만5000~3만8000원). 중국 현지의 대기업 대졸자 초임 월급이 2000~2500위안(약 25~33만원)이고 하루 8시간, 주 6일 근무하는 가사 도우미 월급이 보통 1200위안(약 14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비싸다. 주재원이 그 비용을 오랜 기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원어민 과외로 별 효과를 보지 못한 학부모는 상대적으로 강도 높게 수업하는 한국인 가정교사를 찾는다. 대개 중국 내 한국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영어권 국가에 유학 혹은 연수를 다녀온 대학생, 과외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은 소위 명문대 졸업생들로 경력과 인지도에 따라 시간당 100~300위안의 수업료를 받는다. 원어민에 비해 영어 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자녀 문제를 자연스럽게 상담할 수 있고, 학교에 면담하러 갈 때 통역을 부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부모로선 한국인 가정교사가 부담 없는 상대다. 주재원 자녀가 몇 년 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 한국인 가정교사를 선호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영문법을 배우더라도 순전히 영어로 학습하는 것보다 한국어로 된 문법용어를 동시에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주재원 자녀 과외를 업으로 삼은 강사들은 족집게 스타일의 지도법, 꼼꼼한 학사 관리 등으로 학생과 학부모를 만족시킨다.
한국식 보습학원 성업 중
상하이엔 한국인 대상 학원도 성업 중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필리핀, 미국인 등이 세운 소수정예(한 수업에 5명 내외) 학원을, 고학년은 한국 학원의 직영점과 한국 대학 특례 입학 준비를 돕는 학원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인 밀집지역인 구베이와 훙메이루 근처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4~5개의 영어학원과 국·영·수·과학 및 논술까지 가르치는 종합학원이 성황을 이루는데, 오후 6시경이면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을 볼 수 있어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다.
학원에서는 학년을 기준으로 반을 편성하되 실력에 따라 반 배정을 달리한다. 아이가 학년보다 낮은 반에 배정될 때도 종종 있는데 엄마들이 ‘아이 기죽일 수 없다’ ‘어린애들과 수업하면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반을 바꿔달라고 요구해 학원측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렇다고 주재원 자녀들이 영어에만 ‘올인’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교과 과정에 맞춰 다른 과목들도 선행학습 하는 학생이 많다. 원리 중심의 국제학교 수학과 정확한 계산력을 요구하는 한국 수학이 다르다는 것을 파악한 한국 엄마들의 발 빠른 대비책인 셈. ‘한국에 있었다면 줄넘기 과외도 시킬 판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자’는 마음으로 주요 과목 외에 그림 그리기, 플루트, 바이올린, 발레 등 레슨이 가능한 교습소를 발견하면 한 시간이라도 배우게 하기 때문에 아이의 하루 일정표는 나날이 복잡해진다. 덕분에 한국에 있는 각종 학습지 브랜드가 상하이에서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중국 상하이에도 한국식 소수정예 학원들이 등장했다.
상하이에 거주한 지 3년째인 D씨의 말대로 사교육비는 주재원 가정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중국 물가가 한국에 비해 싸다지만 사교육비는 전적으로 한국 물가를 따르고 있다. 주재원으로 중국에 있으면 돈 모아서 귀국한다는 얘기는 옛말이 된 지 오래고, 이젠 아이들의 사교육을 위해 한국에서 모아둔 돈까지 끌어들였다는 집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영어 과외비 1800위안(약 22만원), 바이올린 레슨비 1000위안(약 12만500원), 국어 학원비 1000위안(약 12만5000원), 수학 과외비 1800위안(약 22만원)…. 초등학생 한 명 사교육비로 어림잡아 한 달에 5000~6000위안(약 60만~73만원)이 지출되는 것. 오죽하면 주재원들 사이에 “중국에 오면 왕처럼 살 줄 알았더니 이젠 마누라도 나가서 돈 벌어야 할 판”이라는 웃지 못할 얘기가 나돌까. 실제로 중국 근무 연수가 긴 주재원 가정일수록 외식이나 쇼핑 빈도가 낮은데 ‘이 돈으로 아이에게 과외를 한 시간 더 시키자’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벙어리 냉가슴 앓는 거죠”
그렇다면 아이들의 학교생활은 어떠할까. 상하이에서 아이를 국제학교에 보낸 지 6개월째인 E씨는 얼마 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을 겪었다. 초등과정 5학년인 아들의 담임에게서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은 것.
“국제학교에 보내면 영어가 저절로 될 줄 알았어요. 언어는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니 영어로 공부하고 영어 하며 놀고…, 환경은 정말 완벽하니까요. 늘 재미있다고 해서 별 문제없이 학교에 다니는 줄 알고 대견스러워했는데, 얼마 전 첫 성적표를 받아보고 깜짝 놀랐죠.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준비물을 잘 빼먹으며 숙제를 제때 내지 않는다고 씌어 있는 거예요. 아이는 잘못한 게 없다고 하는데, 영어를 못해서 선생님의 지시사항과 수업내용을 못 따라가는 건지 아니면 아이 스스로의 문제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저 또한 영어가 신통치 않으니 선생님과 속 시원히 상담할 수도 없고…벙어리 냉가슴 앓는 거죠.”
국제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편함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차이에서 비롯된 크고 작은 문제를 겪는다. 상대방의 눈을 피하면서 말하거나 대답할 때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고, 짓궂은 장난을 하는 한국 아이를 서양인은 종종 문제아로 취급한다. 이 때문에 동서양의 급우 간에 마찰이 생기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국 학생과 부모는 서양인 교사가 서양 아이들을 편애한다고 인식하는 일도 벌어진다.
고학년 아이는 학교 수업이 끝나는 대로 학원에 가고 주말에도 과외를 받아야 하는 자신과 달리, 평소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즐기면서도 숙제를 ‘가뿐하게’ 끝내며, 방학이면 세계의 휴양지로 여행을 다니는 외국 아이들을 보면서 열등감을 갖기도 한다. “나는 왜 한국인일까,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다. 영어를 못하는 엄마를 한심하게 여기거나 무시하면서 학교에서 보내는 가정통신문을 보여주지 않거나 “엄만 봐도 모르니 사인이나 하라”고 해서 부모 자식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부모가 아이의 숙제를 도와줄 수 없고, 아이가 도와달란 말도 하지 않으면 상황이 심각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
한국인은 ‘훌륭한 손님’
저학년의 경우 모국어를 빨리 잊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정확히 말하면 새 단어를 배울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광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배운 적이 없는데 국제학교에서 ‘clown’을 배우면 아이는 ‘서커스에서 공을 굴리고 재주를 넘는 사람’을 ‘광대’가 아니라 ‘clown’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5~8세 어린이는 영어를 정말 빨리 받아들여요. 발음도 정확하게 따라 해서 영어 동화책을 잘 읽죠. 그런데 어떤 내용인지 한국말로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얼굴을 찌푸려요. 너무 어렵대요. 쉬운 물건 이름도 한국말로 물어보면 선뜻 대답을 못해요. 아마도 그 단어가 머리에서 뱅뱅 돌긴 하는데 퍼뜩 떠오르지 않나봐요. 아이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했더니, 한글로 된 산수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주재원 자녀를 대상으로 영어 과외지도하는 F씨는 아이들이 ‘영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말’을 쓰게 되는 것을 염려했다. 초등학교 1학년 딸이 “Mum, I learned about adjective today(엄마, 오늘 형용사에 대해 배웠어요)”라고 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던 학부모가 귀국 1년 전부터는 다시 아이에게 “adjective는 형용사”라고 가르치기 위해 과외를 시키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한창 한국어로 상상력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시기에 영어 배우기에 몰두하는 아이들의 에세이 쓰는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은 나중에 영어실력이 늘어난다 해도 어휘력과 작문실력이 양적으로 늘어날 뿐 한국어로든 영어로든 자신의 생각이 잘 표현된 글을 쓰긴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한다. 상하이엔 주말을 이용해 한국말이 서툰 초등 저학년에게 받아쓰기를 가르치는 학원도 있다.
국제학교에선 한국 학생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냉정하게 표현해 그들에게 한국 학생은 ‘훌륭한 손님’이다. 처음에는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조용하고, 영어가 좀 되고 공부 좀 하려나 싶으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수업료는 대부분 학부모가 다니는 직장에서 지급하므로 절대 기일을 넘기는 일이 없고, 학부모의 학교 행사 참여율이 낮으니 그만큼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하는 일도 없다. 기를 쓰고 자식에게 영어 공부를 시키는 탓에 한국 학생은 대부분 방과 후 특별활동에 빠진다. 얼마나 늦게까지 공부하는지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최근 상하이의 한 국제학교에서는 한국 학부모들에게 “정규 수업에 지장이 있으므로 아이들을 늦게까지 학원에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을 정도다.
국제학교는 고급 영어학원?
“한국 부모님은 이곳이 인터내셔널 스쿨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쉽게 망각하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개인의 능력과 특성에 맞는 교육을 하려 해도 부모님이 한국사회 나름의 기준을 고집하죠. 같은 시기에 입학한 다른 아이가 먼저 EAL 수업을 끝내고 정규과정으로 들어가면 ‘우리 애는 왜 못 가나?’ 하고 걱정해요. 책을 읽고 해석도 완벽하게 해서 시험에 대비했는데 왜 성적이 나쁘게 나왔냐고 물으면 난감하죠. 시험에서 요구하는 답은 해석이 아니라 이해를 통한 결과인데 말이죠.
또한 각 학교의 커리큘럼이나 학교 분위기, 수업 내용을 꼼꼼히 따져본 후에 아이가 다닐 학교를 정해야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학교를 무조건적으로 선호하죠. 어떤 해에 이 학교로 우르르 몰려왔다가, 다음해엔 그 학교는 한국인이 너무 많아 안 좋다면서 다른 학교로 옮기죠. 결국 어느 학교든 한국인은 몰려다니게 되는 거죠. ‘영국식 학교보다 미국식 학교가 공부를 많이 시킨다’는 얘기는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인이 많으면 영어를 늦게 배운다고 걱정하고, 한국인이 적으면 아이가 외롭고 인종차별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걱정이니 한국 부모님의 취향이 까다롭다고 해야 할까요?”
국제학교에 근무하는 미국인 교사 G씨의 눈에 한국 아이들과 부모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한국에서도 수학, 과학, 글짓기 등 모든 과목을 잘하는 건 어려운 일 아니냐”고 반문하며 “그런데 왜 영어로, 그것도 2~3년이란 짧은 기간에 이 모든 것을 다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또 “국제학교는 각종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화를 경험하는 곳이지, 고급 영어 강사들이 포진한 영어학원이 아니다”며 “영어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정이 이러니 주재원의 부인들이 “하루에도 열두 번 짐 싸서 한국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철저한 준비 없이 낯선 중국 땅에 와서 생각지도 못한 영어 복병을 만나 수학을 위한 영어, 체육을 위한 영어 과외를 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날로 늘어난다는데, 영어의 압박 때문에 중국에 와서도 “니 하오, 짜이찌엔(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니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