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입력2011-10-19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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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회 이야기>
    • 을사년의 11월은 을씨년스러웠다. 25년 전 을사조약 이야기를 당시의 국정책임자로부터 듣는 1929년의 세밑도 스산하다. 10월 말 뉴욕에서 불어온 세계대공황의 먹구름이 버림받은 조선 땅에까지 드리우고 있다. 11월 초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충돌사건은 날이 갈수록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경제적 패닉에 정치적 카오스가 뒤엉켜 고스란히 새해로 넘어가고 있다. 망국의 아침에 불쌍했던 사람들은 1930년의 전야에 불안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대답은 모던 경성의 겨울비 속에 잦아든다.
    (제3장)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1930년 조선일보 삽화.

    거리는 찬비에 젖어있다. 한림은 장교정을 빠져나와 큰길로 나섰다. 왼편으로 바라보면 청계천과 그 너머 북촌이고 오른편은 황금정과 그 너머 남촌이다. 올 때와는 반대로 길을 잡아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남산을 바라보는 걸음은 담배 한 대 태울 틈도 못되어 황금정 2정목 네거리에 닿는다.

    한림은 담배에서 손을 뗀 지 3년이 넘었다. 1926년 4월 순종임금이 창덕궁에서 세상을 뜨고 6월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때까지 최고조에 달하던 그의 흡연은 그해 10월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서 신청사 낙성식을 치르던 무렵 끝을 보았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야트막한 진흙 언덕 구리개는 1894년 갑오경장 때 동현(銅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병합이 되자 다시 개명해 황금정(黃金町)이 되었다. 비만 오면 질척대어 인적이 뜸해지던 황토 비탈길은 깎이고 포장되었다. 구리에서 황금으로 이름을 바꿔 단 거리는 새 서울, 경성의 중심가로 재탄생했다.

    뗑뗑 소리를 울리며 전차가 황금정 3정목 쪽에서 들어온다. 전차는 속도를 줄이며 십자로를 횡단해 1정목을 향해 진입한다. 퇴근하는 직장인, 하교하는 학생, 짐을 이고 진 사람, 이런저런 행색들로 전차 안은 북새통이다. 전차는 황금정 입구라 쓰인 팻말의 지붕 없는 정거장에 바퀴를 멈추었다. 황금정 입구는 이와 교차하는 남대문통의 입구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신시가지 남촌의 일번지가 시작된다. 금융과 비즈니스, 그리고 소비와 환락의 중심으로 가는 입구다.



    퇴물이 된 남녀칠세부동석

    정거장에는 한 무리의 승객이 승차를 기다린다. 여기는 남대문 방향과 안국동 쪽 노선이 갈라지고 합쳐지는 환승장이다. 내리는 이보다 타는 이가 많다. 옥신각신 소란 끝에 절반만 겨우 태우고 다시 출발한 전차는 황금정 입구 네거리를 크게 좌회전해 남쪽으로 향한다. 문간에 붙어 선 승객들이 느슨한 회전력에 의해 바깥으로 되밀린다. 나무 출입문이 삐걱 소리를 낸다. 남녀와 노소가 한 몸으로 뒤엉킨다. 눅눅한 습기와 쿰쿰한 땀에 전 시큼한 내음이 한겨울의 바람 숭숭한 황혼 전차 속을 흐른다. 말로만 살아있는 노소동락(老少同樂)은 전차 안에서 현실이 된다. 그러지 않아도 퇴물이 되어가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은 전차의 등장과 함께 종막을 고하고 있다. 신세기와 시작을 함께한 전차 운행이 어언 30주년이다. 사람들 사이에 거리가 사라졌다. 휘황한 거리에서 사람들은 날로 낯모르는 사람들과 더 자주 마주친다.

    26일 오후 1시20분경에 경성역전(京城驛前)을 출발하여 안국동(安國洞)을 향하던 176호 전차가 죽첨정(竹添町) 2정목 121번지 앞을 지나다가 돌연 탈선이 되어 차 안에 빽빽하게 붐비던 승객들은 넘어지고 자빠지는 등 큰 소동이 있었다.

    의주통(義州通)을 따라 올라와 서대문 네거리를 오른쪽으로 돌던 목요일 점심나절의 만원 전차가 궤도를 벗어난 사고다. 3개월 전 9월에 있었던 죽첨정 전차탈선에 대한 기사를 한림은 떠올린다. 경성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교통사고 여러 건을 모은 사회면 머리기사의 일부였다. 그 서두는 이러했다.

    그러지 않아도 교통사고가 빈발하던 경성 장안은 나날이 몰려드는 박람회 구경꾼들로 말미암아 요즘 교통사고는 더욱 빈발하여 배전(倍前)의 교통 순사로 교통을 정리해오는 중이나 워낙 시가지가 아직 채 정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차 자동차가 오가는 혼잡한 거리에 익숙지 못한 시골 구경꾼들은 좌우에서 울리는 요란한 경종(警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전차 자동차가 진행하는 앞을 갑자기 횡단하는 등 교통 순사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숭례문 근처 일본인 거주지.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황금정 입구 거리.

    9월12일부터 10월 말까지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가 열리는 동안 경성의 교통량은 크게 증가했다. 조선총독부의 시정 20년을 기념해 500만원의 예산을 들여 벌인 초대형 공산품 전시회였다. 일본은 물론 대만과 만주에서 온 최첨단 공산품들을 보러 전국에서 모여든 관람객으로 경성은 들썩였다.

    그런 큰 행사가 아니라도 서울은 이미 붐비던 중이었다. 경성부는 면적 33㎢에 인구 34만명가량이다. 사대문 안과 밖이 면적의 절반씩을 차지한다. 인구의 27%가 일본인이고 조선인은 24만명 남짓이다. 상주인구와 비슷한 규모의 유동인구가 매년 서울을 들고 난다. 교통사고는 이미 낯선 것이 아니었다. 앞서 4월에는 전차 운행 사상 초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운전수는 운전면허를 딴 지 일주일 만이었다.

    22일 오전 9시 반경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3, 4학년생 100여 명을 태우고 급한 속도로 적선동(積善洞) 전차정류장을 떠나 서십자각(西十字閣)의 커브를 돌아가던 효자동-남대문 노선 162호 전차가 돌연 탈선 전복하여 10여 명의 중상자와 60여 명의 경상자를 내어 조선에서 일어난 전차 사고로는 처음 보는 일대 참극을 연출하였다. 중상을 당하여 선혈에 젖은 부상자 중 세 사람은 생명이 위독하다. 학생들은 학교 창립기념일을 기념해 다음날 아침 등교 즉시 전차 3대를 대절(貸切)해 나누어 타고 순종비(純宗妃) 묘소 참배를 위해 청량리역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초대형 전차 사고

    과도한 속력을 낸 것이 사고의 원인으로 조사되었다. 진명(進明)여고보는 1906년 대한제국 황실이 세운 첫 여학교다. 고종의 비인 엄귀비(嚴貴妃)가 내어놓은 땅과 자금으로 경복궁 서쪽 창성동(昌成洞)에 세워졌다. 숙명여고의 전신인 명신(明信)여학교가 역시 엄비의 후원으로 설립되기 한 달 전이었다. 남자학교로는 휘문, 중동, 보성, 및 대구의 계성고가 황실의 지원을 바탕으로 줄줄이 세워졌다. 무너지는 대한제국에 학교 설립이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한꺼번에 일어나는 시절이었다. 한 해 전에 양정의숙이 엄비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1905년 이전까지 약 10년간 외국선교사가 기독교계 학교들을 세워 현대식 교육의 막을 연 이래 한국계 학교가 그 뒤를 잇기 시작했다.

    이제 부모들은 딸을 학교에 보내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여학교가 처음 생겼을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 되는 이화학당이 처음 초가집을 개조해 문을 열었을 때 사람들은 이 낯선 집을 외면했다. 길에서도 여자 아이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조선 땅이었다. 8개월이 지나 1886년 5월에서야 가까스로 학생 한 명을 받으면서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학생의 어머니에게 서약서를 써야 했다.

    미국인 야소교 선교사 스크랜튼은 조선인 박(朴)씨와 다음과 같이 계약하고 이 계약을 위반하는 때는 어떠한 벌이든지 어떠한 요구든지 받기로 함. 나는 당신의 딸 복순(福順)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서방(西方)은 물론 조선 안에서라도 단 십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을 것을 서약함.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이화학당의 수업 풍경.

    이화학당 학생들의 꽃놀이에 발칵 뒤집혀

    부모들은 어린 딸을 집 밖의 낯선 곳에 보내기가 두려웠다. 서양오랑캐를 바닷가에 얼씬도 못하게 물리쳐야 한다는 대원군의 엄명을 담은 척화비가 전국에 세워진 것이 불과 15년 전이었다. 1887년 이화학당 학생은 7명이 되었지만 기대와 달리 양반집 자녀는 오지를 않아 가난한 집 아이와 고아로 채웠다. 민비가 교명을 지어주고 편액을 보내오고 1888년 학생이 18명으로 늘어났다. 교사는 모두 여자로 한정되었다. 여자도 한문을 배울 권리가 있다는 여론이 일어 새로 초빙한 한문 담당 남자 교사는 여학생을 마주 보지 않고 뒤돌아서 수업을 진행했다. 체조 시간에 발을 벌리고 뛴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파문이 일었다. 딸을 끌어내오는 집, 가족회의를 여는 집이 있는가 하면 이 학교 여학생을 며느리로 삼아서야 되겠느냐는 논란도 있었다. 한성부(漢城府)는 체조 중단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여인의 걸음은 모름지기 발바닥 길이 이상을 떼어서는 상스럽다는 것이 법도 있는 집안의 규율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화학당 학생들은 1899년 5월 창의문(彰義門) 밖으로 꽃놀이를 나갔다. 학교 담장 안에서 체조하는 것보다 한성의 성곽 바깥으로 떼 지어 나간 일은 더욱 파장이 컸다. 개교 13년째였다. 성곽 안쪽에서는 도성을 가로지르는 전차가 개통되던 19세기의 마지막 봄날이었다.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일제강점기의 군자리 골프 코스.

    여학생들이 일년 동안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화류(花柳) 구경을 갔다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바, 여학원의 화류는 500년 이래 처음이다.

    감리교회의 아펜젤러 목사가 창간한 주간신문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는 이날의 봄 소풍을 그렇게 평하고 있다. 꽃과 버들을 뜻하는 화류의 원뜻은 500년간의 남성본위 풍토에서 기생방 또는 유곽을 상징하는 은유어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류계, 화류항과 같은 보통명사로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마당에 여인이 즐김의 대상인 꽃을 벗어나 즐기는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낯설고도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척화비를 세우게 되었던 그때 이후 익숙지 않은 사건과 사물이 안팎으로 계속하여 출현하고 있다. 여학교처럼 낯설고 놀랍기로는 전차와 기차와 자동차 또한 마찬가지였다. 바퀴 달린 것의 무서움, 속도의 가공할 파괴력이 언제부터인가 뒤늦게 실감되기 시작했다.

    조선 마지막 군주의 왕비를 추모하러 가다 사고가 나던 시각, 금곡리(金谷里)의 유릉(裕陵)에서는 순종의 3주기를 하루 앞두고 기신제(忌晨祭)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을사조약 1년 전에 순종보다 22년 앞서 간 그의 첫째 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는 이곳에 합장되어 있다. 용마산 자락 능동(陵洞)의 유택에 잠들어 있던 그는 3년 전에 순종이 묻힌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그가 떠난 빈 능역에는 버려진 석물들이 유강원(裕康園)이란 옛 이름과 함께 나뒹굴었고, 1년 만에 광대한 골프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8홀 코스에 전장 6500야드의 본격 골프장이 공사 2년 만인 올해 6월에 오픈되었다. 경성 골프구락부, 일명 군자리 골프장이다.

    사고를 당한 승차 학생 거의 모두가 상처를 입었다. 중상만 11명이었다. 그중 3명은 중태에 빠져 아직도 8개월째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학생도 있다 한다. 특히나 심각한 일은 대다수의 학생이 신체 부상 정도와 관계없이 신경증이라고 하는 생소한 증상을 보이고 있는 점이었다. 잘 자지도 먹지도 못하는 학생도 있고 심한 경우 멀쩡히 있다 발작을 일으키는 학생도 나타났다. 외상후증후군이라고 일본인 의료진은 진단했다. 정신이상 진단을 받은 학생도 있었다. 중상으로 분류된 11명 가운데에는 시를 쓰는 유명 학생인 4학년 노천명(盧天命)도 있었다.

    광장의 묘한 분위기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경성우편국.

    황금정 입구를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진 전차는 곧 250m쯤 떨어진 명치정 정거장에 설 것이다. 거기서 많은 사람이 내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네온사인과 함께 찾아드는 다운타운의 야경에 몸을 담글 것이다. 다시 250m를 더 가 선은(鮮銀) 앞 정거장에서 또 한 무리의 승객이 하차하고 나면 차내의 밀도는 비로소 떨어질 것이다. 광장을 향해 열린 혼마치(本町) 입구가 곧 다가올 밤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 있을 시간이다. 그 초입에 수문장처럼 랜드마크로 버티고 선 경성우편국(京城郵便局), 그리고 광장을 마주 보고 선 조선은행(朝鮮銀行)이 낮의 제국을 마무리하듯 어둠에 잠길 것이다. 조선의 경제와 조선의 통신을 운영하고 통제하는 정보의 양대 기관이다. 전차는 점점 그 위험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청결 상태는 조금 나아진 듯도 하다. 6년 전 1923년 1월의 기사다.

    경성의 전차는 사람을 잘 치고 정전이 잦으며 사이가 떠서 여러 가지로 불편이 많은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지만, 차 안의 소제를 게을리 하여 먼지가 켜켜이 끼고 숨을 마음대로 쉴 수가 없으며 먼지를 재우려고 함부로 뿌린 물은 추운 일기에 득득 얼어붙어서 위태한 일도 있다. 공중위생을 모르는 승객들이 차 바닥에 침을 턱턱 뱉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못하고 위생에도 극히 위험하다.

    전차가 활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가로지르는 선은(鮮銀) 광장은 행인과 인력거, 자전거, 우마차, 자동차가 한데 뒤엉켜 섞였다 흩어지며 사방으로 제각기 뿔뿔이 오간다. 광장은 늘 움직임으로 분주하지만 언제나 텅 빈 듯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이처럼 넓은 공간이 조성된 일은 일찍이 조선에 없었다. 광장은 채워질 수 없을 듯이 넓어 보인다. 주위를 에워싸듯 세워지는 장중하고 이국적인 신식 건물들로 인해 왜소한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은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이는 것도 같다.

    어느 여공의 한탄

    황금정에는 1분당 한 대꼴로 전차가 지나간다. 경성부청(京城府廳) 도시계획과 직원 10여 명이 경성상업학교 학생 500여 명을 동원해 작년 1928년 10월에 조사한 결과다. 경성상업학교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의 전신이 된다. 자동차도 비슷한 횟수로 지나간다. 행인의 통행은 시간차가 있지만 분당 평균 15명. 이 도로가 1911년 완공된 이래 10년 세월이 두 번 지났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의 의미를 절감케 하는 변화가 그 사이에 있었다.

    2정목 네거리 이남으로 시선을 옮기면 영락정(永樂町) 길이 뻗어내려 본정통까지 이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 우로 7년 된 극장 중앙관과 좌로 전매국(專賣局)이 마주 보고 있다. 한 해 앞서 1921년 설치된 전매국은 조선총독부의 독점적 담배 배급 창구다. 총독부가 고심거리이던 만성 적자 예산 타개책으로 모든 잎담배 매입과 담배 생산을 독점하면서 발족했다. 근년의 연간 담배 판매고는 3000만원 규모에 달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연간 예산 2억4000만원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전매국은 서울과 평양, 대구, 전주 네 곳에 연초제조공장을 가동한다. 이들 공장에 근무하는 직공은 3000명이 넘는다. 어느 여공의 사연이 두 달 전 신문에 소개되었다.

    연초회사 여직공 일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열일곱 살 되던 봄이었습니다. 매일 십전씩 받으며 3주일의 견습을 마쳤습니다. 조일(朝日) 담배 물부리 천 개 끼우는데 6전을 받습니다. 잘하면 하루에 5천개 내지 6천개까지 해 30여 전의 돈으로 그날그날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사히 담배는 대중적인 고급담배다. 저렴한 담배와 달리 입을 대는 물부리가 달려있다. 여공이 담배 천 개비에 물부리를 끼워 넣고 받는 노임이 담배 한 갑 가격이다. 1929년 조선에서 공장노동자로 일하는 여성은 조선인 2만5000명, 일본인 400명쯤 된다.

    그러나 그뿐인가요. 일만 하면 그 노릇 할 만하게요. 감독이나 순시(巡視)에게 아양을 부리면 하루가 곱게 넘어가고 비위를 거스르면 욕을 종일 먹고 온갖 고초를 받아 겨우 20전에 불과합니다. 그런고로 제삼자는 연초회사 갈보라고까지 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일 얼굴에 분을 바르게 되며 없는 옷이라도 하얗게 빨아 입게 됩니다.

    여공은 살기 위해 없는 돈에 애써 화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미국 리치몬드의 연초공장에서는 화장을 엄금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2주 전에 있었다. 1000여 명의 여직공이 근무하는데 백분과 연지의 향기가 연초에 흡수되어 연초의 향미를 나쁘게 한다는 이유였다.

    사자굴 같은 그곳을 들어갈 때에는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와 같이 싫습니다. 또 남자직공들의 색에 주린 무서운 유혹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뿐인가요. 퇴근할 때는 경찰이 죄인 다루듯이 일일이 검사하지요. 여러분! 놀라지 마셔요. 그 무리한 감독 손이 처녀의 유방으로, 하부에 이르기까지 조사를 합니다. 얼마나 원통합니까. 17세 처녀의 몸에 그 무리한 행동을 달게 받고 저주의 피눈물을 머금고 한낱 돈 30여 전에 얽매인 생활을 3년이란 긴 세월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매국은 전국 25개소에 지점망을 갖고 300곳 이상의 영업소를 운영한다. 거기서 담배를 받아 파는 소매 영업소는 전국에 6만개가 넘는다. 평균 50~60가구에 한 군데 꼴로 담배 가게가 있는 셈이다. 금주운동과 더불어 금연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펼쳐진 지 오래임에도 담배 소비량은 매년 5~6%씩 꾸준히 증가한다. 다만 요 한 달 사이 갑자기 주춤하면서 고급 담배에서부터 판매량이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뉴욕발 대공황의 여파가 실물경기로 체감되기 시작했다. 런던에서는 여성들의 흡연률이 뚝 떨어졌다는 소식이다. 치마가 길어지는 유행 때문에 철철 끌리는 치맛자락을 붙잡느라 두 손이 이전보다 훨씬 바쁘게 되어서라고 한다. 직접 가서 본 사람은 없지만 신문에 그렇게 났다.

    남산 딸깍발이 샌님들

    전매국이 마주 보는 곳, 중앙관 뒤편으로 오르는 언덕 위 황량한 고지에 프랑스 천주교회가 우뚝 솟아 있다.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거대한 몸채로 건축된 고딕식 건물이다. 남대문에서부터 동대문에 이르기까지 경성의 사대문 안 전역을 파노라마로 조망하고 있다. 천주교회는 경사면을 따라 북쪽을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다. 남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조선 전통의 가옥 배치와 달리 외국인과 일본인의 건물들은 방향보다는 입지 여건을 우선하는 듯 과감하게 경성 시가의 구획을 새로이 해나가고 있다.

    먼 훗날 명동성당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 이 천주교회당의 첨탑 뒤로 비 그친 남산이 먹빛 윤곽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초기 일본 거류민들 표현대로 ‘자줏빛과 비취빛 영롱한’ 목멱산 기슭에 ‘반도(半島)의 정사(政事)를 아우르는 총독부’의 구청사가 북편을 향하고 앉아 있다. 그 건물은 일본공사관에서 통감부로, 그리고 다시 총독부로 바뀌었다가 총독부가 경복궁 신청사로 옮겨가면서 과학관(科學館)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구 총독부 뒤편 산록에는 경성신사(京城神社)가, 옆으로는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가, 그 앞으로 적십자사(赤十字社)가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터를 잡았다. 마치 프랑스천주교회의 뒤통수를 일제히 굽어보는 형국이다. 교회당 첨탑 위 꼭대기의 십자가 너머로 지금은 고궁(古宮)이 되어버린 옛 궁궐이 보인다. 구 총독부 주변 일대는 오랫동안 왜성대(倭城臺)라 불려왔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1500명이 성을 쌓고 1년간 주둔한 곳이었고 1876년 개항 이래 조금씩 입국한 일본 거류민들이 처음으로 정착하는 기준점이 되었다. 그로부터 조선에 진출하는 일본의 세력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차츰 확산되었다. 그 초기 결실의 하나인 본정(本町) 거리가 산자락 아래로 해자(垓字)처럼 흐른다.

    본정은 진고개를 개수(改修)해 조성한 거리다. 남산에서 북악으로 달려가는 산줄기의 허리에 해당하는 진고개는 땅이 질어서 이현(泥峴)이다. 비가 내리면 일대가 진흙탕이 되어 논바닥처럼 변한다. 거기서 만약 싸움이라도 벌어진다면 그야말로 이전투구(泥田鬪狗) 꼴이 된다. 나막신을 신고 다닌다고 딸깍발이라 불리던 남산골 샌님들의 동네다. 진고개의 천주교회 후문에 일본 민간인 가옥 10여 채가 처음으로 지어진 것이 1885년이었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로 한성조약이 체결된 이해만 해도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100명이 되지 않았다. 10년 뒤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1000명을 넘어선 일본인은 다시 10년 뒤 러일전쟁을 기해 5000명을 돌파했다. 20년 이상 차츰차츰 정착해오던 일본 거류민단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마침내 미루어오던 토목공사 하나를 착수했다. 1906년 진고개의 땅을 파서 높이를 2.4m 낮추고 지름 1.5m짜리 하수관을 매설했다. 한성에서는 처음 보는 하수관거 매설 공사였다. 한성 거주 일본인은 1만명을 넘어서 있었다. 그렇게 생겨난 신작로 거리는 다시는 질척대지 않았고 모던한 거리로 변모했다. 그 거리에 이제 나막신은 별로 뵈지 않는다. 대신 그와 유사한 일본 나무신인 게다가 활보한다.

    모던 걸과 모던 보이

    본정은 유행의 최첨단이다. 온갖 진귀한 물건이 한데 모인 백화점(百貨店), 서양물건 전문인 양품(洋品)점, 서양의 가죽구두가 있는 양화(洋靴)점, 의류점, 모자점…. 일본인의 거리에 조선인이 뒤섞여 놀란 눈으로 서구문명의 구체적 결실들을 일본상점의 진열장에서 체험하고 있다. 이 일대의 서점들은 지식에 눈을 뜨고 급속히 지식에 허기져가는 사람들을 현대문명의 오아시스로 데려다주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본정은 모양내고 먹고 마시고 놀고 구경하는 유흥의 일번지가 되어 있다. 귀금속 장신구에 화장품, 의류, 비어, 커피, 칼피스, 빙수, 우동과 양식…. 유행에 민감한 청춘들은 본정 주변에서의 일과가 생활의 중심이 된 지 오래다. 일찍이 동경의 긴자 거리를 헤매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의 군상을 일컬어 ‘긴부라’라 한 것처럼 경성의 혼마치 주변을 맴도는 이들을 ‘혼부라’로 빗대어 명명하기에 이르렀다.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부라 족들을 두고 어떤 이는 ‘덴부라 같은 것들’이라 한다.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덴부라는 아무나 쉽게 먹어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본정과 명치정, 영락정 일대는 이미 ‘리틀 도쿄’라는 이름을 얻은 지 오래다. 이곳에 들어서면 조선을 떠나 일본에 여행 온 느낌을 받는다고들 한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라는 이름도 오래되어 이젠 거추장스러운지 모뽀, 모껄로 줄여서 불리는 청춘들은 아이스커피에 심취했다. 7월16일부터 8월15일까지 한 달 동안 최고기온이 33℃를 웃도는 날이 18일이나 됐다. 그중에 절반인 9일은 35℃를 넘어섰다. 남녀 한 쌍이 아이스커피 하나를 시켜놓고 머리를 비비대며 보리줄기로 쭉쭉 빨아먹는 ‘사랑의 아이스커피’는 이번 여름 길가의 진풍경이었다. 8월 상순 들어 경성 기온이 36.7℃까지 오르는 날이 이틀 있었다. 1919년 8월1일 37.5℃ 이후 10년 만에 찾아든 대폭염이었다. 36.5℃가 하루, 36℃가 이틀 더 있었다. 병원마다 일사병(日射病) 환자가 줄을 잇고 구루마를 끌던 소와 말이 여기저기서 자빠지고 죽어나갔다. 창고에 보관한 유황(硫黃)이 자연 발화하고 폭발해 더운 여름은 더욱 뜨거워졌다. 가뭄까지 겹쳐 논과 밭은 말라가고 저수지마저 바닥을 드러내는 지역이 나타났다.

    “이 모양으로 오륙일만 가뭄이 더 계속되면 전 조선 농작물은 거의 전멸할 것 같습니다.”

    총독부 농무과장은 연신 목덜미를 수건으로 훔치면서 말했다. 일본인이 더위를 느끼고 그것을 표시할 정도면 그것은 더위 이상의 것이다. 20일 가까이 비 구경을 제대로 못한 조선반도 전역이 거대한 화로(火爐)처럼 뜨겁게 타들어가고 있다. 낙원동(樂園洞) 경성측후소(測候所) 관계자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동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기압은 아직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오. 얼마 전 양자강 방면으로부터 온 저기압이 동북으로 진행하는 중이므로 북조선에는 약간 희망이 있으나 남조선은 여전히 개어 있어서 언제나 비가 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체온을 오르내리는 그 여름의 열기에 혼비백산해 그만 중독이 되어버린 것인지 겨울이 되어도 아이스커피를 찾는 진정한 모뽀와 모껄, 이른바 모모족이 등장했다.

    아이스커피 정도야 중독이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중독증이 생겨나고 있다. 그중 하나로 모르핀 중독이 있다. 올여름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의 공식 조사에 잡힌 수치가 4000명에 달한다. 실제로는 이 숫자의 서너 배에 달해 1만5000명가량은 될 것이라고 당국은 추산한다. 자기 몸에 모르핀 주사를 찔러 넣는 중독자를 자신귀(刺身鬼)라 부른다. 생선 회 뜬 것을 사시미(刺身)라 하는데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앙공동체

    남산을 내려와 말안장 모양으로 북으로 달리던 산줄기는 천주교회에서 한번 솟아오른 뒤 급속히 잦아들며 황금정으로 내려선다. 교회 일대는 조선조에 명례궁(明禮宮)이라는 별궁(別宮)이 있던 자리다. 행정구역은 명례방(明禮坊)이었다. 그 안에 명동(明洞) 종현동(鐘峴洞) 저동(苧洞) 장악원동(掌樂院洞) 남산동(南山洞)이 있었다. 천주교회 주변 언덕바지는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군대가 진주해 남산 쪽 왜성대의 일본군과 대치했던 곳이다. 구원병으로 원정 온 명나라 군사들이 저만치 보이는 숭례문(崇禮門)에 걸려있던 종을 떼어 가져다 이곳 진지에 걸어두었다 해서 종현동이 되었다. 불란서 천주교회를 사람들은 보통 종현교회 혹은 종현예배당이라 불러왔다.

    명례방은 1784년 천주교가 들어오던 초창기부터 신앙공동체가 생겨난 곳이다. 이 유서 깊은 선교의 중심지에 교회 측은 일찍이 부지를 물색했다. 천주교의 첫 희생자인 김범우(金範禹)의 집터 인근에 20여 차례에 걸쳐 토지를 매입했다. 김범우의 집은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 정약용(丁若鏞) 3형제와 한국천주교 창설의 주역인 이벽(李檗)과 권일신(權日身) 등 남인(南人) 학자 수십 명이 모여 예배를 보던 장소다. 이 명례방 공동체는 이듬해 집회가 발각되고 토마스 김범우는 고문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른바 1785년의 을사 사건이다. 을사조약이 있기 120년 전의 일이다. 안중근(安重根)이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기 110년 전이다. 연행된 다른 교도들은 양반 가문이어서 모두 방면되었다. 김범우는 역관 신분의 중인이었다. 명례방 공동체는 와해되었고 김범우는 얼마 안 가 유배지에서 숨졌다.

    을사년 이후 100년 가까이 진행된 천주교 박해는 1882년 서구와의 최초의 통상조약인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비로소 끝을 보게 된다. 시련은 끝났다. 종현교회 부지의 매입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시련은 이제 조선 조정에 찾아들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교회의 건축안에 난색을 보였다. 태조 영조를 비롯한 역대 여섯 왕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때마다 임금이 직접 제사를 올리는 영희전(永禧殿)의 주맥(主脈) 자리에 그런 건축은 불가하다는 풍수지리적 이유였다. 1886년 조불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프랑스공사관의 오랜 중재로 건축은 겨우 성사되었다. 프랑스 신부가 설계하고, 청나라 기술자들이 용산(龍山) 가마터에서 구운 20여 종의 붉은색 회색 벽돌로 짓고, 1000명의 조선인 신도의 무급 노동과 헌금을 바탕으로 성당은 6년 동안 축성되었다. 재정난과 청일전쟁으로 중단을 거듭해 1898년 봄 완공되었다.

    한 세기에 걸친 박해 끝에 조선의 천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다. 극형으로 다스리던 서학(西學) 무리의 성전이 올라가는 광경을 조선 조정은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46m에 달하는 종탑을 올린 교회의 고딕식 건물은 그 높이가 70m에 달했다. 더욱이 높다란 언덕 위에 위치해 도성의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순교한 선교사들의 유해는 발굴되어 종현교회의 지하묘지에 안치되었다. 1900년이었다. 숱하게 학살되었지만 프랑스 성직자는 40명으로 늘어났고 천주교회도 40곳을 넘어섰으며 신자는 4만명을 넘어섰다. 프랑스 초기 성직자들의 지하묘지는 일본인 초기 주거지역과 2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했다. 뾰족집으로 불린 천주교회는 마치 남산 아래 진을 친 일본인 구역 앞을 막아선 거대한 피뢰침처럼 보였다.

    예배당이 굽어보는 것조차 꺼렸던 영희전은 천주교회가 완공되고 11년 뒤인 1909년 철거되었다. 헐려나간 영희전 주위에는 남촌의 치안을 담당하는 본정(本町)경찰서가 세워졌다. 그 앞으로는 영락 2정목의 모던한 가로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때는 어느새 20세기였다.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1920년대 명동성당 일대.

    조선의 귀족 계급

    한림은 황금정 1정목을 향해 걷는다. 길 건너 남쪽 연도에 귀족회관(貴族會館)이 있다. 식민지 조선에는 1929년 연말 현재 약 60명의 귀족이 있다. 조선왕조에 왕족(王族)과 척족(戚族)이 있었다면, 그들이 소멸되거나 유명무실해진 새로운 조선에 귀족이라는 계급이 신설되었다. 작년 이맘때의 기사를 한림은 떠올린다.

    서산일몰(西山日沒)과 같이 점점 쇠잔해가는 계급 중에 조선귀족이 있다. 조선귀족은 일한합방 당시에 공로가 있다거나 또는 왕실에 가까운 사람에게 일본정부가 제수(除授)한 것이다. 당초에는 후작(侯爵) 6명, 백작(伯爵) 3명, 자작(子爵) 22명, 남작(男爵) 45명, 도합 76명이던 것이 반환하거나 박탈당한 사람들이 있어 현재 후작 7, 백작 3, 자작 18, 남작 33, 도합 61인으로 줄어들었다.

    1910년 병합과 함께 조선귀족령이 발효되고 일본의 제도를 본뜬 귀족제가 시행되었다. 유럽에도 있고 조선 이전의 고려 때도 있었던 귀족제이지만 병합된 조선의 귀족은 급조된 제도였다. 세습 왕통과 귀족 계급, 그것은 멀쩡한 사기다 ―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던 그해 세상을 뜬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그렇게 말했다.

    백작에서 시작해 10년 만에 후작으로 진급한 이완용(李完用)은 1926년에 죽어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가 바로 이 귀족회관 뒤 언덕바지, 명동의 천주교회 정문 앞에서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고 살아난 것이 20년 전 이맘때다. 1909년 12월22일, 왼쪽 어깨를 찌른 칼끝이 왼쪽 폐를 관통했다. 인력거에서 굴러 떨어진 51세의 이완용을 타고 앉아 19세의 이재명이 허리춤에 두 번 더 찔러 넣은 칼날은 신장 가까이에 이르렀다. 저지하던 인력거꾼은 단칼에 절명하고 정신을 잃은 이완용은 길 건너 저동(苧洞) 집으로 옮겨져 밤새 치료를 받고 다음 날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다. 10월26일, 68세의 생일을 막 지난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만으로 막 30세가 된 안중근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지 두 달이 되지 않은 때였다. 이완용은 ‘10·26’의 충격에서 채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6개월 뒤 총리대신에 복귀한 이완용은 피습의 후유증이었는지 이후 천식과 해소를 고질로 달고 살다 결국 폐렴으로 사망하게 된다.

    자작을 받은 박제순(朴齊純)은 이완용보다 10년 앞서 세상을 떴다. 을사조약 조인 5대신은 모두 작위를 받았다. 그들 중 자작 권중현(權重顯)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백작 이지용(李址鎔)은 고질적인 노름벽으로 화투판을 전전하다 도박죄로 곤장 100대의 태형(笞刑)을 언도받고 작위(爵位)를 몇 년간 잃기도 했다.

    그들의 생활정도는 박영효, 민영휘, 윤덕영, 이재곤, 권중현, 민충식, 민상호, 민병석, 고희경 등 20여 인이 겨우 근심 없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고 그 나머지 약 40명은 겉은 번지르하여도 속은 텅 빈 사람이 많고 심한 사람은 사글세도 못 물어 쫓겨 다니기가 일쑤이고 걸인 비슷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 노름 하나후다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이화학당의 김활란 메이 퀸 대관식.

    이지용이 백작 작위를 내놓겠다는 신청을 총독부에 제출했다는 소문은 1920년부터 이미 낭자했다. 화투놀이 때문인지 가산이 탕진되고 생계가 곤궁해져서 귀족 지위와 체면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좁은 두 칸 사랑방에 속절없이 들어앉아 손녀딸을 무릎 위에 앉히고 소일하며 60원의 사글세 내기가 힘든 곤경에 처해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열두 달을 상징하는 화초의 그림 딱지를 가지고 노는 일본식 노름 하나후다(花札)는 어느 사이 화투(花鬪)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정착했다. 단조롭던 조선 전래의 노름은 화투로 인해 아연 활기를 띠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지용이 특히 심취했다는 도리짓고땡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나라는 사라지고 귀족은 생겨났다. 급조된 귀족은 한 세대를 못 넘기고 쇠락해가고 새로 생겨난 화투판은 민족의 오락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도 조선귀족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처지라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세습재산을 만들어주려고 하나 부채만 있는 사람을 어찌 할 수가 없다. 총독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생활을 보장할 기초를 지어주려고 몇 년 전에 함북 무산(茂山)에 있는 국유림 50만원 짜리를 내어주었으나 보관할 힘이 없어 도벌만 당하고 있는 중이다. 경성에 있는 귀족들의 재산이라고는 취운정(翠雲亭) 방매한 돈 약 10만원과 현재 황금정에 있는 귀족회관 약 8만원짜리밖에 없는 형편이다. 총독부에서는 그 구제책을 강구하고 있기는 하나 시대가 귀족이라고 특별히 편파한 원조만 할 수도 없는 터이라 이 문제에 대해 고려 중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고 했던가. 이 말이 망국 조선의 귀족들에게 적용될 줄이야. 여간한 구제책도 물거품이어서 귀족은 총독부의 두통거리가 되었다는 작년의 기사를 한림은 떠올린다. 귀족은 당사자들이 대거 사라지고 그 2세가 작위를 세습받기도 하지만 갈수록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귀족회관은 귀족들이 사용하기보다는 이런저런 모임이나 행사에 대여되고 있다. 졸부(猝富)의 끝만큼이나 졸귀(猝貴)의 쇠락은 급속하고 뚜렷하다. 황금정 길을 사이에 두고서 남쪽의 귀족회관과 마주 보는 위치에 북쪽의 장교정으로 들어가는 사잇길이 나 있다. 길 안쪽 중간쯤에 한규설 대감의 저택이 살짝 보인다. 한규설은 자작 작위를 거부했다.

    열혈남아 나석주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동양척식주식회사.



    귀족회관 옆에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가 나란히 서 있다. 영국의 동아시아 식민지 경영의 거점이었던 동인도주식회사를 본뜬 것이다. 척식이란 개척(開拓)과 식민(殖民)의 준말이다. 국외의 영토나 미개척지를 개척하고 자국민의 이주와 정착을 촉진한다는 의미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 정리되는 1870년부터 홋카이도(北海道) 개척시대를 열었다. 주무 부서를 설치하고 전국에서 이주자를 모집했다. 아이누족이 살던 미개지를 농업기지로 개발한다는 거대한 사업을 위해 미국에서 교관단을 초빙했다. 미국의 서부개척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이때 자본집약적 농업과 함께 탄광, 목재, 맥주, 통조림, 토목 건설 기술도 대거 유입됐다. 하나코가 즐겨 마시는 삿포로맥주 병 라벨에는 삿포로맥주회사의 설립연도가 1876년으로 박혀 있다. 일본에서 처음 맥주가 생산된 해다. 조선이 일본에 문호를 연 해이기도 하다.

    개척시대를 거쳐 1차 척식(拓殖) 15년 계획, 2차 척식 20년 계획이 수행되었다. 이 계획 기간 홋카이도 전역에 세워진 초기 관청들은 르네상스식 외관의 이국적 건축물이었다. 그 모양이 동양척식회사 건물과 많이 닮았다고 하나코는 말한다. 여기 서울의 황금정과 남대문정의 교차점 부근을 지날 때마다 고향 삿포로의 도청을 비롯한 근대식 건물들이 떠오른다고 한다.

    미국 서부개척의 방법을 흡수한 북해도 개척, 영국 동인도회사의 방법을 흡수한 대만식민정책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동양척식회사는 조선에서 운영을 개시했다. 그리고 토지매수, 농업, 임업, 수리사업, 금융의 모든 분야에서 조선의 경제 체계를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했다.

    3년 전 나석주(羅錫疇)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것이 이맘때였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대신 일본인 7명을 권총으로 쏴 죽였다. 상해임시정부에서 경호원을 하고 일본 고관 암살과 관공서 테러를 전문으로 하는 의열단의 단원이 된 나석주는 낯선 서울에 잠입했다. 12월28일, 먼저 들어간 조선식산은행(殖産銀行)의 대부계에 던진 폭탄도 불발이었다. 식산은행은 총독부의 산업정책을 뒷받침하는 금융기관이다. 토요일 오후 2시를 막 지난 연말의 은행은 고객들로 북적였다.

    식산은행을 빠져나온 나석주는 금융기관이 즐비한 남대문 1정목 대로를 건너 권총을 빼들고 곧바로 동양척식회사 정문으로 뛰어들어갔다. 수위실 책상에서 무엇을 쓰고 있던 일본인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잡지 기자였다. 2층으로 올라갔다. 총소리를 듣고 따라 올라온 동척 직원에게 두 발을 발사했다. 이어 토지개량부로 뛰어들어 의자에 앉아있던 기술주임을 쏘았다. 옆에 있던 기술과장에게도 1발을 발사했다. 빗나간 탄환에 놀라 달아나자 뒤쫓아가며 쏘아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권총을 난사하며 옆방에 폭탄 1개를 던지고 1층으로 내려갔다. 같은 건물을 쓰는 조선철도주식회사 정문으로 들어가 수위를 쏘고 시계점 점원을 쏘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길을 가다 마주친 정복 차림의 경찰부 소속 경관을 쏘았다. 신고를 받고 본정경찰서에서 경찰이 출동했다. 나석주는 동척 앞길 전봇대 옆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34세였다. 일제의 분열정책에 국내가 개량화하는 현실에 각성을 촉구하는 의거가 필요하다는 김창숙(金昌淑)의 제안에 김구(金九)가 추천한 사람이 나석주였다. 동척 소유의 토지가 많은 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그는 소작 짓던 땅이 동척으로 넘어가자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동양척식회사 자리는 조선시대에 장악원(掌樂院)이 있던 곳이다. 악사(樂師)들이 상주하며 속악(俗樂)을 연습하는 악공(樂工)과 아악(雅樂)을 연습하는 악생(樂生)을 가르치는 궁중음악의 본산이었다. 이곳이 터가 세고 불길한 곳이어서 그 막히고 답답한 기운을 풀어헤치기 위해 장악원을 여기에 두었다고 전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일본군이 거류민 보호를 빙자해 1개 대대를 이끌고 도성에 들어왔을 때 그 병력의 일부가 장악원에 들어와 원생들을 내쫓고 주둔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헌병대가 주둔했다. 을사조약 기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진원은 이곳이었다. 사라진 장악원은 사라진 영희전과 함께 한 글자씩을 떼어 영락정(永樂町)이라는 지명을 남기게 되었다.

    주식의 참혹한 하락

    퇴근길 걸음들이 활기차다. 양복에 코트에 중절모 차림들이 동양척식회사에서 속속 빠져나온다. 동척의 활약으로 조선 땅의 4분의 1은 이미 일본인 소유가 되었다. 경복궁 서쪽 통의동에 동척사택(東拓舍宅)이 있다. 한때 영조(英祖)의 잠저(潛邸) 창의궁(彰義宮)이 있던 자리다. 정방형에 가까운 2층 집으로 양식과 일식을 혼합한 현대적인 주거단지는 경외와 질시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식산은행 앞에서 멈춰서 동척의 정문을 바라본다. 동양척식회사는 유행하는 건물 설계 방식대로 주 출입구가 가각(街角)의 모서리에 있다. 황금정을 따라 건물의 좌익이 뻗어있고 오른쪽 명치정으로 들어가는 사잇길을 따라 건물의 우익이 직각으로 들어서 있다. 그 안쪽에 경성주식취인소(株式取引所)가 있다. 12월27일은 올해 주식시장의 문을 닫는 납회일이었다. 그날의 시황을 기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금년의 주식계는 불황 침체의 일관이란 한마디로 족히 표시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악재가 연초부터 연말까지 속출하여 때로 급전직하의 참혹한 하락을 나타내고 또 빈사상태의 장이 계속되어 주식의 인기를 몹시 위축게 한 까닭에 근년에 보기 힘든 대폭락을 연출하는 저가로 금년의 납회를 고하게 되었다. (…) 최후의 입회인만큼 긴장미를 띠어 투매와 이식으로 다소 매매가 왕성하였다. 그동안 매수한 사람들은 유리한 기회를 보아 연내에 정리하려고 초조하게 방어를 하여왔으나 아무 재료가 나타나지 않은 채 최후의 납회에 몰리게 되어 마침내 실망투매로 인하여 모든 주가 일제히 폭락하였다.

    기사는 새해 초의 시장도 큰 기대를 할 근거가 없어 보인다며 투자자를 위해 한마디 조언을 덧붙인다.



    낙망을 말라 기뻐도 말라. 여하간 금년 1년의 경과를 돌이켜 생각하면 감개무량하다. 참으로 매수자의 수난시대였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실패는 장래 성공의 장본(張本)이 되는 터. 매수자여 낙망 말라. 또 매도자는 승리하였다고 너무 기뻐말라. 웃음 끝에 울음이 따름을 생각하라.

    대공황의 여파는 큰 것 같다. 그런데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들 한다. 이제껏 조선인이 겪어온 숱한 낯선 충격과 놀라움과는 또 다른 종류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그 정체를 정확히 모른다. 10월의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이 있고 열흘 뒤 이러한 기사도 있었다.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미국 뉴욕 월가는 금년 여름부터 보기 힘든 대번창을 이루었다가 그 투기의 격심으로 필경에 투기의 파탄을 보게 되어 뉴욕 주식의 대폭락을 연출한 것이다. 보라! 번영의 극치에 달하였을 때에는 그 기세가 얼마나 가관이었던가. 증권의 전당도 하루아침에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서소문 밖 사형터

    1정목 사거리에 섰다. 올해의 활동을 접고 잠든 주식취인소를 뒤에 가리고 큰길가에 선 경성전기주식회사가 경성의 밤을 책임진다는 듯이 장대한 5층 빌딩의 불을 밝히고 있다. 그 건너편 식산은행에서 직원들이 서둘러 문을 나선다. 식산은행의 직원 사택은 경복궁의 우측 송현동의 요지에 있다. 식산은행을 나서 북쪽으로 황금정 길을 건너 다옥정을 지나 광교를 건너서 종각 네거리를 지나 계속 북상해 안국동 오거리에 이르는 일직선 길은 1㎞ 구간이다. 거기서 경복궁을 향해 왼쪽으로 틀면 바로 오른쪽이 송현동 사택이다. 자매기관과도 같이 남촌의 관문 좌우를 나란히 지키고 선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은 그 직원 거주지도 경복궁의 좌우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황금정 길 끝자락을 향하여 네거리를 건너는데 식산은행 쪽에서 하나코가 길을 건너온다. 낮에는 관철동으로 가더니 지금은 또 어디를 다녀오나. 장을 봐 오는 길이란다. 가벼운 안줏거리를 구해 남대문시장에서 걸어서 오는 길이다. 시장에서 그의 가게까지는 1㎞다. 서울은 넓은 도시가 아니다. 사대문 안 면적은 약 17㎢. 사방 십리 정방형의 넓이 정도다. 도성의 성곽 둘레도 대략 17㎞다. 천천히 거리 구경하며 걸어도 20분이면 가게에 닿는다. 좁고 냄새나는 전차에 5전씩 들이기가 아깝다. 더구나 여기 황금정 입구에서 남대문시장까지의 길은 가장 번화하고 아름다운 길이다. 남대문시장은 1911년부터 칠패시장이란 재래식 명칭을 버리고 현대식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머리를 비비대며 보릿대로 쭉쭉 빠는 ‘사랑의 아이스커피’

    대표적인 기생집 명월관.

    한림은 왼쪽으로 환구단을 바라보며 경성부청 앞에 다가섰다. 부청 앞 공터는 오거리의 중심임에도 왼편으로 바라보이는 장곡천정 끝 조선은행 앞 광장보다 한산하다. 덕수궁을 끼고 남북을 종단하는 태평통의 대로 역시 언제나처럼 휑한 느낌을 준다. 덕수궁 부지를 잘라내면서 개설된 그 스산한 신작로에서 갈라지는 재래식 길이 서소문으로 통한다. 서소문은 태평통길이 개통되고 2년 뒤 1914년에 철거되었다. 실물은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서소문 바깥 가파른 언덕 위에 약현(藥峴) 천주교회가 바라보인다. 이 교회당은 천주교인들이 숨진 서소문 밖 사형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명동의 천주교회보다 6년 앞서 지어졌다.

    약현 산모롱에 해가 저물어

    어정어정 돌아가는 늙은 엿장사

    딱딱딱딱 딱따가딱딱 가위 소리 내면서

    어정어정 돌아가는 늙은 엿장사

    전기불이 들어왔네 저녁연기 자욱했네 내일 또 보세

    자아 자 어서 자고, 자아 자 어서 자고 내일 또 가자

    어디에서인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작년부터 유행하는 노래인데 일본 곡에 조선식 가사를 붙였다. 1절은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어”로 시작한다.

    한림은 경성부청 앞을 돌아 희미한 가로등 빛을 받으며 태평통을 오른다. 경성일보사를 지난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다. 한글판 기관지인 매일신보도 이곳에 함께 들어있다. 광화문통이 다가왔다. 야트막한 언덕배기 황토마루로 불리던 지역이다. 1908년 독립문 밖 현저동에 경성감옥이 생기기 전까지 범법자들을 수감하는 전옥(典獄)이 있던 곳이다. 조선에 징역형은 없었기 때문에 감옥은 판결 때까지 구금하는 곳이었다. 풍수적으로 길지인 이곳에 전옥을 마련한 것은 감금된 사람들이 건강을 해치거나 죽는 일이 없도록 하는 배려였다는 말이 있다. 전옥 자리에는 1909년 요릿집 명월관(明月館)이 들어섰다.

    명월관은 구한말 궁내부 출신 관리가 차린 회색 2층 양옥이었다. 궁중의 방식을 전수한 요리와 술에, 어전에서 가무를 하던 궁중 기녀들이 모여듦으로써 일약 고급 요리와 기생의 전당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명월관은 1918년 화재로 소실되어 별관과 분점의 명칭으로 두 곳으로 나뉘는데 분점의 이름은 태화관이 되었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 때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이다. 명월관이 사라진 그 터에 훗날 신문사가 들어섰다.

    검열, 검열

    한림은 신문사 3층 건물을 보고 섰다. 벌써 배달을 끝냈을 신문배달 수레들이 문밖에서 망연히 대기하고 있다. 해는 완전히 졌는데 신문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또 압수다. 한 해의 마지막 신문까지 이 진부한 소동을 벌여야 하나. 서울 지역 배달은 그 시간만큼 늦어지고 지방으로 가는 신문은 기차시간과 우편시간을 놓치게 되어 큰 타격을 입는다.

    3층 편집국에서는 검열 결과에 따른 압수 통보를 받고, 윤전기를 멈춰 인쇄를 중단하고, 문제의 기사를 삭제하고 다시 판형을 떠서 재인쇄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 지리하고 한심하고 속 터지는 일련의 과정을 한림은 안보아도 다 떠올릴 수 있다.

    오후 4시20분. 늦지 않게 무사히 마감을 하고 다들 안도의 숨을 내쉰다. 언제나처럼 규정에 따라 초벌 인쇄본을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로 보낸다. 오래지 않아 전화통에서 터질 듯 종소리가 울린다. 편집국장은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표정으로 직통전화의 수화기를 아령 들 듯 힘겹게 들어 올린다. 한 손은 펜을 든 채로 이마를 짚고 있다. 눈은 감은 채 전화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기계적으로 귀를 대고 있다. 한 자도 틀림없이 언제나 똑같은 일본말로 시작하는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여기는 도서과입니다. 기계를 세워주십시오.”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제 4권, 1995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교통사, 2000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독립운동사, 2009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경성발달사, 2010

    ● 청계천문화관, 이방인의 순간포착 -경성1930, 2011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화학당’

    ● 정진석, 한국언론사 나남출판, 2001

    ● 동아일보

    ● 조선일보

    박 윤 석

    동아시아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서울에서 식구들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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