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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학자 출신이 공 세울 욕심에 남북정상회담 망쳐”

임태희<前 대통령실장> ‘MB정부 국정백서’ 강력 반박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관료, 학자 출신이 공 세울 욕심에 남북정상회담 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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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내가 ‘신동아’ 2월호에 밝힌 내용이 가장 정확”
  • ● “北은 정상회담 대가 요구한 적 없다”
  • ● “잘못 보고받은 MB, 대가로 인식한 듯”
  • ● “통일부가 더 얻어내려다 결렬됐다”
  • ● “현인택 전 장관에게 ‘프라이카우프가 뭐냐’고 물어보라”
  • ● 박근혜 정부, ‘팩트 중심’으로 복기해 신뢰 토대 삼아야
“관료, 학자 출신이 공 세울 욕심에 남북정상회담 망쳐”
서울 중구 회현동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사무실 책장에는 청와대가 2월 20일 발간한 ‘이명박 정부 국정백서’가 꽂혀 있었다. 임 전 실장은 이명박(MB) 정부 때 여당 정책위의장, 노동부 장관, 대통령실장을 맡으면서 국정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MB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으로 본다. 국정을 잘 꾸려서 제대로 된 나라를 다음 정부에 인계했으니 성공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뇌물로 달래는 관행 끊었다’

‘이명박 청와대’는 국정백서 중 ‘원칙 있는 대북·통일정책과 선진 안보’ 대목의 머리글에서 “북한이 막대한 지원을 조건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여 왔으나 이명박 정부는 ‘퍼주기’를 담보로 한 정상회담에는 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또 “이명박 정부와 이전 정부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대북정책이며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가 바뀌었다”면서 “북한의 오만방자한 행태에 끊임없이 끌려 다니며 ‘뇌물’로 달래는 관행은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우리를 현금인출기나 식량보급창으로 인식하는 북한의 ‘갈취 근성’을 근절하고 햇볕정책과 무조건적 포용에 대한 금단현상을 치유해야 올바른 남북관계의 기초가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국정백서대로라면 MB 정부 5년의 대북정책이 총체적으로 볼 때 실패했다는 일각의 평가는 수박 겉핥기 식 분석인 셈이다. 일부 비평가는 “북한을 올바르게 관리하지 못했고, 핵 폐기와 관련해 한 걸음도 못 나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MB 정부에서 고위 당국자로 북한 문제를 다룬 한 인사는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않은 것이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의 가장 큰 성과”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일은 잘 했는데 대북정책만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실상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지난해 총선 전에 야당이 아니라 여당에서 ‘이대로는 선거 못 치른다’면서 그런 비판이 나왔다. 그 사람들에게 ‘안 하는 것보다 나은 정상회담을 하려니 어렵다’고 말했다. 정상회담 안 한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보는 사람이 있지만,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것은 성과다. 무조건 정상회담을 하면 좋은 줄로 아는 사고방식을 고치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남북관계에서 무엇을 바꾸려 했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북한은 아직도 국내정치에서 흥행거리다. 북한이 정상회담 카드를 흔들면 김영삼, 노태우 정부 같은 보수정부도 걸려들었다. 북측은 경험적으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북에 45억 달러(현물+현금)를 줬다. 얼마 안 되는 것 같겠지만, 북한의 작년 예산이 56억 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년 한 해 예산의 10%씩 보태준 셈이다. 핵 개발 여력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MB 정부는 비핵화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핵을 포기하면 원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지 않으면 인도주의적 지원은 하지만 비료, 양식, 현금은 못 준다’는 게 우리 정책이었다.”

3차례 정상회담 시도

MB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시도한 것은 3차례인 것으로 확인됐다. 실패의 기록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통례다.

첫 번째 시도는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만나 정상회담, 납북자 국군포로를 포함한 이산가족 고향방문, 국군 유해 공동 발굴, 인도적 지원 등 6개 항목에 협의를 완료해 이명박-김정일 회담의 문턱까지 갔으나 결렬된 것이다. 첫 시도가 실패한 후인 2010년 3월 26일 북한은 천안함을 폭침시켰다.

두 번째 시도는 2010년 가을 김숙 당시 국가정보원 1차장이 수차 평양을 방문해 천안함 폭침 이후 대결 국면으로 치닫던 남북관계의 출구전략과 정상회담 추진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남측 국정원, 북측 국가안전보위부 라인이 가동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숙 1차장의 북측 카운터파트는 류경 당시 보위부 부부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측의 입장 표명과 관련해 북측 카운터파트는 “재량 범위에서 협의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즈음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포탄 수십 발이 떨어진다(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또다시 도발한 것이다.

류경 부부장은 김숙 1차장의 평양 방문 연장선상에서 2011년 1월 서울을 방문했다. 국정원, 보위부 고위 간부가 비밀리에 상호 파견된 것. ‘과거 불행한 사태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한다’는 수준에서 출구전략 관련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류경 부부장은 2010년 9월 북한 3대(代) 세습 권력자 김정은이 대장 계급장을 달던 날 상장(국군의 중장에 해당)으로 진급했다. 그는 보위부에서 간첩 및 반체제 인사를 색출하는 반탐(反探) 업무를 총괄했다. 보위부 부부장은 5명으로 알려졌다. 류 부부장은 김정일과 수시로 독대할 만큼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하고 돌아간 직후 총살됐다. 안보 당국자들은 그의 실각 원인을 파악하는 데 정보력을 모았다. 표면적 혐의는 수뢰, 부정축재였지만, “대남 전략을 남측에 노출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택에서 거액의 달러가 발견돼 간첩으로 몰렸다고 한다. 남측과의 접촉과정에서 불거진 문제가 숙청의 원인이 됐을 소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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