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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략과 책략의 광휘였으되 구차하고 초라하도다

1896년 병신년 아관파천

  • 송우혜 | 소설가 swhoo@daum.net

지략과 책략의 광휘였으되 구차하고 초라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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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0년 전 병신년, 너무도 괴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난민수용소같이 어지럽던 조선왕조 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쳤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강대국들에 휘둘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1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 않은가.
지략과 책략의 광휘였으되 구차하고 초라하도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공사관. 동아일보

1896년 병신년(丙申年) 2월 11일.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음력 섣달 그믐 전날 새벽. 설맞이 준비로 들떠 있던 조선 천지를 뒤집어엎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조선의 대군주(大君主, 고종)와 왕태자(王太子, 뒷날의 순종)가 궁녀가 타는 가마 안에 들어앉아서 몰래 경복궁을 탈출, 아관(俄館)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관’은 아라사(러시아) 공사관, ‘파천’은 임금이 자신의 궁궐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함을 가리키기에, 역사는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북악산 기슭 경복궁에서 서소문 근처 아관까지는 불과 2400여m. 그러나 그날 새벽에 조선의 대군주와 왕태자가 가마를 타고 몰래 지나간 뒤 그 ‘2400m’가 지닌 의미는 거대한 다이너마이트처럼 강력하게 폭발했다. 당시 앙숙이던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비중을 일거에 완전히 뒤바꾸는 상전벽해의 격동을 일으킨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후폭풍

아관파천의 근본 원인은 고종의 정비(正妃) 중전 민씨(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세칭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에 있다.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의 야망을 꺾기 위해 중전 민씨가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 세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이를 막았다. 이 사건 이후 일본 세력과 친일파들은 고종을 경복궁에 연금하고 그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한 나라의 국모를 그처럼 처참하게 살해한 뒤 그로 인해 일어날 반작용과 후폭풍을 막기 위해 극도의 경계조치에 나선 것이다.
일본의 잔혹한 위세와 강력한 통제에 억눌린 고종은 극심한 심신의 고통에 시달렸다. 일본인들이 자신을 폐위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연금된 경복궁 안에서 자신도 명성황후처럼 피살될 수 있다는 생명의 위협까지 체감하고 있었다. 명색이 일국의 통치자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세력에 완전히 장악당한 불쌍한 포로에 불과했다.
고종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이런 사정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 국외 인사들에게도 관찰됐다. 그래서 일본 신문에 ‘조선의 군주가 자신의 궁궐을 탈출해 러시아공사관이나 미국공사관으로 가려고 한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런 판국이니 고종을 감시하는 자들의 경계심은 극도로 고조됐고, 그 때문에 고종의 경복궁 탈출은 그만큼 더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그런 악조건에도 연금 상태의 무거운 압박을 견디지 못한 고종은 마침내 거사에 착수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미 예측하던 대로였다. 고종은 일본 측의 날카로운 감시망을 힘겹게 뚫고 믿을 만한 극소수 신하들에게 밀조(密詔, 비밀조서)를 내려 “나를 구출하라!”고 명했다. 그는 전·현직 고위 관료들 중 친러파와 친미파에 속하는 인사들이 자신을 구해주기를 희망했다.
밀조를 받은 신하들은 충성을 다짐하며 최선을 다해 일을 벌였다. 을미사변 50일 만인 1895년 11월 28일, 그들은 어렵게 병력을 동원해 경복궁의 동쪽 협문인 춘생문 앞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거사에 동원된 군사들은 총포를 쏘아대며 궁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동원군 지휘부의 한 인물이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사전에 밀고하는 바람에 궁궐 안에서는 군사를 대거 동원해 단단히 대비하고 있다가 응전했고 결국 거사는 수포로 돌아갔다. 거사에 참여한 자들은 붙잡혔고 이내 재판이 시작됐는데, 임금은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라며 시치미를 떼고 빠져나갔다.



엄 상궁의 거사

궁궐을 향해서 총을 쏘았기에 이 사건은 ‘역모’로 규정됐고, 주동자인 전 시종 임최수와 이도철 참령이 사형을 선고받고 곧 처형됐다. 처형을 모면한 나머지 관련 인사들, 즉 왕족인 이재순을 비롯해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윤웅렬, 윤치호, 이하영, 이채연 등 친러파와 친미파에 속하는 명문 거족의 유명 인사들은 유배형과 태형 등으로 처벌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했고, 더러는 서울에 있는 외국 공관이나 시골로 달아나 숨었다. 이 일은 역사에 ‘춘생문 사건’이라 기록돼 있다.
고종으로서는 가뜩이나 견디기 힘들던 경복궁 연금 상태가 춘생문 사건 실패 후 더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뻗대면서 빠져나가긴 했지만, 춘생문 사건이 고종의 밀조로 시작됐음은 누구나 아는 진실이었다. 군사를 이끌고 춘생문에 이른 지휘부가 임금의 밀조를 꺼내 휘두르면서 “여기, 임금님이 내리신 밀조가 있다!”고 고함치면서 궁궐 진입을 독려했기 때문이다. 감시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면서 이후 병력 동원을 통한 거사는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임금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 속에 갇힌 듯한 당시 상황을 해결하고 경복궁을 무사히 탈출하게 할 방도가 있다고 나선 이가 있었다. 대전(大殿, 임금의 처소)에 소속된 궁녀 엄 상궁이었다. 엄 상궁은 ‘두 채의 가마 작전’이라는 복안을 내놓았다. 워낙 기발한 생각이라 처음 들었을 때는 황당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했다. 그의 계획은 이러했다.
엄 상궁과 그의 심복 궁녀인 내인 박씨가 가마에 들어앉아 궁궐을 드나드는 일을 매일 자주 반복함으로써 두 채의 가마가 나란히 궁문을 드나드는 것이 사람들 눈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그들이 두 채의 가마를 타고 궁

지략과 책략의 광휘였으되 구차하고 초라하도다

곤룡포를 입은 고종. 동아일보

밖에 나가는 것은 ‘서소문에 있는 엄 상궁의 친정집으로 들어오는 뇌물을 챙기기 위해서’라는 소문을 내고 다닌다. 현재 고종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처지라 충분히 먹혀들 것이다. 궁문을 드나들 때마다 수문병들에게 후한 행하(行下,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금품)를 내린다. 그래서 두 사람이 궁문을 출입할 때마다 큰돈을 받는 군사들이 굳이 가마문을 열고 안에 있는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신원을 확인하는 일이 점차 미안해지도록 한다. 그리 되면 얼마 안 가서 수문병들이 가마를 열어보지 않고 궁문을 통과시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거사한다.
거사 계획은 이러하다. 가마 한 채에는 임금이 안쪽에 들어앉고 문 앞엔 엄 상궁이 앉는다. 다른 한 채에는 동궁이 안쪽에 들어앉고 문 앞에 내인 박씨가 앉는다. 출궁할 궁문은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으로 한다. 거사할 때는 평소 엄 상궁과 박씨가 궁문을 출입할 때처럼 경호 인력이 전혀 없다. 가마 두 채가 무사히 건춘문을 나서면 평소처럼 서소문의 엄 상궁 친정집에 가는 듯 여유롭게 걸어서 주변의 경계를 피하며 아관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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