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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⑪

개인적 책임에 몰두한 이상적 자유주의자 황순원, 사회적 책임 실천한 현실적 진보주의자 리영희

황순원과 리영희

  •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개인적 책임에 몰두한 이상적 자유주의자 황순원, 사회적 책임 실천한 현실적 진보주의자 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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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시절 소설가로 변신

개인적 책임에 몰두한 이상적 자유주의자 황순원, 사회적 책임 실천한 현실적 진보주의자 리영희

1953년 11월 ‘협동’지에 ‘소녀’라는 제목으로 실린 황순원의 ‘소나기’.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학교를 수학하고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일제 말기에 그는 평양과 대동군에서 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광복이 되자 북한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1946년 월남했다. 서울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7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됐으며 1980년 정년퇴직을 맞았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문학과지성사에서 1985년에 ‘황순원 전집’ 전 12권으로 완간됐다. 이후 작품들을 더러 발표하던 그는 2000년 세상을 떠났다.

황순원은 처음에는 시를 썼으나 일본 유학시절 소설가로 변신했다. ‘황순원 전집’의 순서는 단편, 장편, 시, 그리고 연구논문들로 이뤄져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소설가 황순원을 거의 모두 알고 있는데, 그것은 ‘소나기’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황순원의 작품세계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작품에 반영된 어떤 정신 또는 사상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의 장편소설이 꼽힌다. 이 작품들은 그 제재가 각기 다르다. ‘카인의 후예’가 북한의 토지개혁을 주목한다면,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6·25전쟁이 남긴 상처를 다룬다. ‘일월’은 백정을 통해 소수자 문제와 존재의 고뇌를, 그리고 ‘움직이는 성’은 우리 한국인의 심성 구조를 살펴본다.

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카인의 후예’다. 서울대 권장도서 100권에 박경리의 ‘토지’, 최인훈의 ‘광장’ 등과 함께 선정된 이 소설은 광복 직후 북한에서 이뤄진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한다. 지주 아들인 박훈과 마름 출신인 도섭영감의 갈등, 그리고 박훈과 도섭영감의 딸인 오작녀의 사랑을 축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한편으로 토지개혁의 진행과정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다양한 인물의 대응과 고뇌, 그리고 사랑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장편소설 못지않게 황순원의 문학세계가 잘 드러난 것은 단편소설이다. ‘국민 단편소설’이라 할 수 있는 ‘소나기’를 위시해 ‘별’ ‘목넘이마을의 개’ ‘학’ ‘잃어버린 사람들’ 등 그가 쓴 단편들은 우리 겨레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며, 그 속에서 살아간 이들의 삶을 격조 높게 그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황순원의 이런 작품들이 근대적 ‘소설’ 이전의 전근대적 ‘이야기’라고 지적하지만,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보기에 소설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은 삶이자 그에 대한 증거다.

‘기러기’, 식민지 시대의 광휘

황순원의 단편소설에서 중요한 변화는 첫 번째 단편집 ‘늪’과 두 번째 단편집 ‘기러기’ 사이에서 관찰된다. 일제 말에 쓰였음에도 ‘기러기’는 광복 직후에 쓰인 세 번째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보다도 늦은 1950년에야 출간됐다.

내 시선을 끈 것은 ‘기러기’의 서문이다.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은 ‘별’과 ‘그늘’을 제외하고는 발표되지 못했다. 우리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작품을 쓰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황순원은 이를 거부하고 고향 대동군에 칩거하면서 ‘기러기’에 실리게 될 소설들을 써뒀다. 다수의 문인이 친일로 전향한 당시 현실을 생각할 때, 비록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황순원은 원고지 위에서, 언어를 통한 독립운동을 조용히 전개한 셈이었다. 이육사, 윤동주의 시와 함께 ‘산골아이’ ‘황노인’ ‘독짓는 늙은이’ 등 ‘기러기’에 담긴 소설들은 겨레의 더없이 소중한 유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책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되는대로 석유상자 밑에나 다락 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기는 했습니다. 그렇건만 이 쥐가 쏠다 오줌똥을 갈기고, 좀이 먹어들어가는 글 위에다 나는 다시 다음 글들을 적어 올려놓곤 했습니다. 그것은 내 생명이 그렇게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명멸하는 내 생명의 불씨가 그 어두운 시기에 이런 글들을 적지 아니치 못하게 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서문을 읽은 것은 대학을 다닐 때였다. 한쪽 반 정도 분량의 이 서문은 황순원이 남긴 글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글이다. 아래서 다시 말하겠지만, 황순원은 현실 참여에 소극적이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권력 비판이 아니라 인간 탐구에 있었다. 작가는 과연 무엇을 하는, 또 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비록 발표를 기약할 수 없다 하더라도, 소중한 겨레의 언어로 오랜 시간을 견뎌온 겨레의 이야기를 전승함으로써 명멸하는 생명의 불씨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지식인이 보여준 최고의 정신적 광휘(光輝) 가운데 하나였다.

황순원의 문학 사상을 잘 보여주는 소설은 ‘움직이는 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작품은 ‘카인의 후예’ ‘일월’ 등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움직이는 성’은 황순원이 오랫동안 생각해 온 한국인의 심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회학 연구자인 내 시선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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