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세계가 기대하는 ‘젊은 피’ 한국

  • 기 소르망

    입력2006-12-15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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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속기획 ‘세계 석학들이 보는 새 밀레니엄’의 두 번째 필자는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인 기 소르망(Guy Sorman)이다. 칼럼니스트·저술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는 ‘신동아’에 기고한 이 글을 통해서 21세기 세계의 전망과 함께 한국의 장래에 대해서도 통찰력있는 시선을 드리우고 있다. 지구 반대편 유럽에 사는 한 지성이 전하는 메시지가 독자들의 시야를 넓혀줄 것으로 기대한다.<편집자>》
    21세기는 20세기와 전혀 다를 것이고 그래서 더 좋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인간적으로 말해서, 지난 세기의 대차대조표는 끔찍합니다. 인류는 가장 살인적인 이데올로기들과 가장 파괴적인 무기들, 가장 사악한 거짓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20세기는 기술의 진보와 도덕의 진보, 그리고 행복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믿었던 커다란 환상을 앗아가버렸습니다. 사실 이미 밝혀졌듯이, 그 세 가지 개념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시대는 과거의 교훈을 해석하고, 그로부터 몇 가지 가르침을 이끌어내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로부터 가르침을 이끌어내려면 빨리 인류가 합리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전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사람들도 국가처럼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정열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우리 내면에서 합리적인 부분은 비교적 제어할 수 있고 심지어 예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정열적인 측면, 다시 말해 우리 내면의 광적인 측면은 본질적으로 통제할 수 없으며 전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시티즌에서 네티즌으로

    미래학자들은 보통 이성의 진보를 알리는 데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쉬우면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러 가지 사실은 그들이 전반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그들도 조롱과 처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직업적인 낙천가들과는 반대로, 내게는 미래를 탐구하는 모험을 감행한다는 것은 이성이 우리에게 약속해주는 것과 끊임없이 대결한다는 조건에서만 적합한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정열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분명히 그 두 실타래의 교차에 의해서 짜일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측면에서는, 각 개인은 20세기 말엽에 윤곽이 잡힌 경향들을 따라가는 데 동의합니다. 그래서 시장경제가 번영과 혁신을 향한 상승의 흐름을 계속해 나가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전적인 조작에 의한 건강, 그리고 웹(인터넷)이나 그것을 뒤이을 기술발전 단계에 의한 통신은 진보를 향한 흐름의 가장 뚜렷한 징후들일 것입니다.

    또한, 현재로서는 힘의 균형이 수정되리라고 예언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도 명백합니다. 부유한 자들은 더 부유해질 것이고, 부유하지 못한 자들은 뒤떨어진 것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경우, 대중 빈곤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이 기술적으로는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들의 이기주의는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구 전 지역이 개발 국가들에 대한 집단의식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적인 그런 굴곡은 기술 혁신에 의해 심지어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경제 사회에서 각 경제 생산자는 국민적 집단이나 국제적 집단과 관련해 점점 더 자립하게 될 것입니다. 위치를 측정할 수 없고 세금을 부과할 수 없는 네티즌이 시민(시티즌)을 대체할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위치가 정해지지 않는 전자우편 주소를 통해서만 네티즌과 접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네티즌은 자기가 선택한 동류 공동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커다란 집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아주 무관심할 것입니다.

    그런 발전은 네티즌들에게는, 서비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비용이 드는 것처럼 보이는 민족·국가들을 약화시킬 것입니다.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 속에 들어가 있는 국가의 그러한 약화에 대한 보상으로, 네티즌이 서비스를 구매하는 새로운 초국가적인 민간기구들이 세계 시장에 등장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민간 대리점들은 가입자의 안전을 보장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 지구와 인터넷 시민의 공용어는 영미어가 되리라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들은 또 몇 가지 집단적인 기술 표준들과 어떤 통일된 정보 언어를 자유로이 이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엘리트는 전지구 인구의 10%나 15% 이상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후쿠야마·헌팅턴은 전적으로 틀렸다

    기술과 개인주의가 강자의 이데올로기가 된다고 해서, 정열이, 즉 기술의 거부가 자기 영토와 전통에 뿌리박은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정열은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될까요? 그것이 반드시 민족적인 형태를 띠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이나 성별 혹은 종교간의 연대처럼, 그것들도 공동의 이해를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정열들이 반드시 폭력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반대로 비폭력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파룬궁이나 혹은 인도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마하트마 간디의 보편적 사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새로운 예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운동들은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 집단들 역시 초국가적일 수 있고, 권력과 결정의 새로운 중심들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거기서도 국가는 그 효용이 한계를 넘어갔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확실해 보이는 유일한 예상은, 20세기 말에 인기를 끌었던 엄청난 예언들이 부정확했다는 것이 판명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모든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에 다시 가담하리라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생각은, 그것을 추구하지 않고 더욱 정열적인 대안들을 구할 사람들의 실망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비록 그 대안들이 자유민주주의보다 덜 합리적이고 덜 효율적일지라도 말입니다.

    더욱이 인류가 자유민주주의 이외에는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도 만들어내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은 지식인의 풍부한 상상력을 모르는 말입니다. 비록 지식인들이 광적일지라도 말입니다. 더불어, 새뮤얼 헌팅턴이라는 형편없는 미국의 사상가처럼, 문명들이 미래에 대해서 한 가지 집단적인 지향만을 가질 것이라고 믿게 내버려두는 것은, 백미러에 비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잠재적인 새로운 공동체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이며, 미국적인 이데올로기를 인간 본성과 혼동하는 것입니다. 그런 예상은 아마도 미국의 문화적 열정의 위력으로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반향이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문화의 중요성입니다. 문화라는 용어의 의의에 대해서 동의하기만 한다면, 문화는 미래에 점점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현대 문화는 과거에 반복되어온 작품들의 묘지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은 창조적 역량이거나 그런 역량의 부재입니다. 새로운 기호와 소리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 문화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으며, 걱정스러운 것은, 구어(口語)의 수가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이라는 점입니다.

    21세기의 발랄한 문화 창조자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유행과 생활과 사고의 양식들을 강제하는 행동규범들을 강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 중국이 하는 것처럼 창조자를 억압하는 정부는 나머지 세계에 가져다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국민을 정신적·경제적 빈곤에 빠뜨립니다. 그와는 반대로, 문화적 창조가 개화하는 곳에서는 국가가 번영을 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단지 물건들이나 서비스만을 거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국가간의 거래는 사람들간의 거래처럼 항상 문화적·정신적·심미적 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 물건들은 단지 포장일 뿐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그림에서 한국에는 어떤 자리가 돌아갈까요? 정교하게 완성된 훌륭한 문명 중에서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준거 표시로 인정받는 데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뜻밖의 일입니다.

    실상 우리가 중국을 들여다보면, 생기없는 별 같은 이 나라는 이제 과거의 빛에 대한 기억만을 선전하고 있다는 것이 확연해집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엘리트들을 몰살하면서 중국 민족의 문화적 활력을 죽여버렸습니다. 중국은 단지 제국의 변두리에만, 특히 대만에, 잔존할 뿐입니다. 21세기에는 십중팔구 세계가 그 속임수를 찾아낼 것이고, 아쉽게도 위대한 중국이란 경제적인 신화만큼이나 문화적인 신화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일본은 모호한 상황을 제시합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고미술과 세련됨을 찬양하고 있지만, 주목할 만한 별다른 것이 생산되지 않고 있습니다. 마치 경제적 열의가 문화적인 창조성을 흡수해버린 것처럼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런 창조성의 빈곤에 허덕이게 되자, 이제 상상력의 부족으로 다시 빈혈에 빠지게 된 것은 바로 경제입니다. 이런 곤경에서 단순한 경제적 조치가 아닌 신속한 해결책은 내게 보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메이지 유신이 없다면, 일본은 점점 더 지친 국가로 보일 것입니다.

    21세기 새로운 피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는 이웃 나라들과는 대조적으로 젊고 활기에 차 보이는 한국이 남게 됩니다. 조형예술, 영화, 패션, 무용 등에서 한국 예술가들의 창조는 억누르기 힘든 그런 활력을 입증합니다. 한국에서는 경제적인 열정이 예술적인 열의를 집어삼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권위주의 체제가 싹을 품고 있던 문화적 무감각을 단절시켰습니다. 남은 일은 그런 창조적인 열의를 나머지 세계에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정신이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한국이 그 이미지를 더욱 잘 수출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처럼 한국인의 머리 위에도 북한의 그림자는 하나의 위협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북한의 급속한 붕괴보다는 일정한 안정을 말하던 이들의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런 예측에 힘입어, 내게는 또한 북한이 10년이나 지속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북한은 인접국들과 미국의 암묵적이고 약간은 수치스러운 동의에 의해서만 생존하고 있습니다. 연착륙이나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더 개연성이 있는 것은, 북한 내부의 혁명이 지나치게 잘 계산된 그 시나리오를 중단시키리라는 것입니다. 북한 민중에게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무한정 금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는 북한 내부 사정으로 보건대 북한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공포정치 국가입니다. 그것은 종말이 있을 것이며, 무한정 연장될 수는 없습니다.

    북한이 남한으로 넘어가는 날 남쪽의 생활수준이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불편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한국인 전체는 결국 통일에서 공동의 큰 계획을 재빨리 찾아내게 될 것이고, 또한 인구 증가의 효과는 한국을 더 이상 어중간한 강국으로서가 아니라 일류의 강국으로서 위상을 정립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나의 제안들과 내기들은 아무에게나 기쁨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내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관찰들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서양인의 영혼에 내재하는 일종의 필연성에 의해 자양분을 얻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우리는, 우리의 경제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바로 그 경제 때문에, 일종의 우울증과 환멸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정녕 우리를 깨어있게 하지만 우리를 매료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계에 대한 매혹을 다시 기대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입니다. 특히, 20세기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지 못한 문명들로부터 도래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문명들은 21세기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피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특히 극동에서는 한국, 남아시아에서는 인도,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아르헨티나를 생각합니다. 그곳에는 아직 미처 이용되지 않은 보편적 사상의 위대한 자원들이 있습니다. (번역·김진하)

    21세기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

    김세원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문명비평가, 사회평론가, 정치학자, 칼럼니스트….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프랑스의 기 소르망에게는 붙여야 할 적당한 타이틀이 딱히 없다. 현재 그가 가진 공식적인 직함은 파리교외 남서쪽 블로뉴 비양쿠르의 부시장이자 소르망 출판사의 대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직함만으로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규정하기는 힘들다. 파리 2구의 뒤제스 거리 13번지 건물 4, 5층에 자리잡고 있는 소르망 출판사에서 만난 그는 특유의 자유분방함으로 20세기 인류 문명을 명쾌하게 정의하고 21세기의 비전을 밝혔다.

    ― 미국의 세계 지배는 21세기에도 계속될 것인가.

    “물론이다. 그 경향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미국의 세계지배는 정치·경제적 측면보다도 기술면에서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투명한 푸른색의 애플사 제품인 E-mac 데스크톱 컴퓨터를 가리키며) 이 컴퓨터도 미국의 기술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본체는 한국이나 대만에서 만들었겠지만 소프트웨어는 미국 것이다. 미국이 전세계 컴퓨터에 쓰이는 소프트웨어를 지배할 수 있는 까닭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기술자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일본, 중국, 한국 등 전세계의 뛰어난 과학자와 연구원들도 미국에서 일하고 있거나 일하기를 원한다. 바로 이들이 미국의 기술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지 제국주의를 꿈꾸던 구소련과는 다르다.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의도가 없다. 각국이 필요에 의해서 미국의 기술과 전략을 도입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보라. 아프리카는 미국 시스템을 도입할 필요성이 없으니까 미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미국에의 종속은 오히려 선진국일수록 두드러진다. 미국은 중심부이고 나머지 선진국은 주변부인 셈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반미(反美)주의는 옳지 않다고 본다.”

    ‘문명의 충돌’은 허구다

    ― 21세기 유럽연합의 발전은 미국을 위협할 것으로 보는가.

    “경제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유로화가 강해진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군사적으로 유럽이 독자 방위체제를 갖춘다 해도 미국이 전세계적으로 갖고 있는 확고한 지위에 대한 도전이 될 수는 없다. 유럽연합은 미국처럼 중동 등 주변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군사적으로 개입할 능력이 없다. 중동, 아프리카는 고사하고 유럽 내에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에 요청하지 않고 분쟁에 개입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독립을 희망하고 있으나 독일, 영국, 이탈리아가 모두 미국 쪽에 기울어 있어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진행중인 체첸내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러시아는 10∼20년 후에 호전적인 국가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발트해 국가들을 러시아가 다시 정복하려 할 경우 유럽연합은 이를 막아낼 능력이 없다. 결국 냉전시절 유럽이 미국의 우산 속에서 보호받아왔던 역사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

    ― 21세기에는 이슬람문명권과 기독교문명권의 충돌이 더욱 심화될 것인가.

    “이슬람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세계 이슬람 인구가 10억이란 얘기는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의 새뮤얼 엘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이란 ‘멍청한’(그는 주저없이 멍청한, 바보같은 이라는 뜻의 ‘imbecile’이란 표현을 썼다) 주장을 하는데 전세계 무슬림은 분열돼 있다. 아랍, 인도, 자바, 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은 제각기 다르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분모도 없다. ‘이슬람세계’란 말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나 서구인들이 만든 신화일 뿐이다.

    이슬람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문명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만 해도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전인구의 3%에 불과한데 이를 두고 가톨릭 국가라고 얘기하는 것은 난센스다.”

    ― 중국은 21세기에 강대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중국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다. 이미 중국의 경제발전 속도는 상당히 느려지고 있다. 중국은 역사적·문화적 유산이 파괴된 나라다. 그런 나라가 그동안 이룩한 경제발전은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이제 중국의 기적은 끝났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경제적으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인터넷이 만드는 보편적 문화

    ― 영국의 석학 에릭 홉스봄은 시장자본주의의 전면적 지배는 21세기에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민주주의와 시장의 양립 가능성에 대한 견해는?

    “그는 마지막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다. 나는 그에게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 30~40년대에는 인기를 끌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50년 동안 역사적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검증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토론은 이론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끝났다고 본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는 많은 카테고리가 있다.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의 자본주의를 보자. 종업원 주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벤처기업의 구성원들은 월급쟁이이면서 동시에 주주다. 여기에는 노동과 자본, 노동자와 경영주의 구분이 없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미래의 자본주의는 그런 모양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가 강한 것은 진화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공산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진화능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공산주의를 개혁하려다가 결국 소련 공산주의 정권 자체를 무너뜨리지 않았던가. 공산주의는 모두 비슷하다. 지역적 특수성을 존중하는 적응능력이 없다.”

    ― 인터넷과 디지털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 인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이 대목에서 그는 아주 흥미있는 주제지만 동시에 답하기가 매우 어려운 주제이기도 하다면서 눈을 반짝였다.

    “이제 초기 단계에 불과한 인터넷혁명은 정치·경제·문화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탄생시킬 것이다. 19세기 공산주의도 산업혁명의 결과로 탄생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사상의 태동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선 인터넷이 진화하면서 만들어가는 사이버 컬처는 전통적인 국가공동체의 의미를 퇴색시킬 것이다. 웹사이트와 디지털 전자제품 덕분에 전세계의 개인들은 서로 자유롭게 연결된다. 여기서 국적이나 지리적 원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 개인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와 공통적 관심사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거나 이미 만들어진 공동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편적인 인류문화가 형성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인터넷으로 이뤄지는 상거래와 주식거래 각종 정보교환에 대해 국가는 통제능력이 없다. 전통적인 시민(시티즌)의 개념은 무너지고 이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네티즌이 탄생한다. 인터넷은 문화의 생산과 소비에도 절대적인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TV와 라디오로 대표되는 매스미디어는 사라지고 개인이 선택하고 맞추는 수천수만개의 마이크로 미디어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문화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쌍방향 소통도 활발해진다.”

    그는 20세기초 전화와 전기가 발명됐을 때 유럽국가 중에서 프랑스가 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가장 느렸다며, 21세기의 인류는 인터넷을 거부하거나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두 부류로 나뉠 것이라고 예견했다.

    정치모델로서의 사회주의는 죽었다

    ― 당신은 많은 저술을 통해 문화의 힘을 강조해왔다. 문화는 국가경쟁력을 결정하는 잣대이며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근거는 무엇인가.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문명이 사라졌다. 20세기 초만 해도 3000개가 넘었던 언어가 20세기 말에는 300개로 줄었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통용되는 언어와 문화의 숫자는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문화는 살아남을 것이다.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고 현대적인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회, 시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문화는 살아남을 수 있다. 나에게 문화란 살아 있으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문화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 인터넷 시대의 개막이 미국문명의 세계 지배를 강화하면서 문화의 획일화를 초래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특히 유럽에서 인터넷의 발달로 독일어나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이 영어에 밀려 국제공용어 지위를 상실할 것이란 우려가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려할 일이 아니다. 인터넷에 의한 세계화가 진행되면 모든 사람은 두 개의 문명에 속하게 될 것이다. 한국이나 프랑스 같은 특정 국가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이고 동질적인 세계문명의 주민이 되는 것이다.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개념 정의도 달라질 것이다. 이미 인터넷용어와 기술용어는 영어로 굳어졌다. 유럽인들은 바이링구얼리즘(2개어 병용주의)의 전통으로 돌아가면 된다.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자기 나라 말과 함께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배우고 사용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면서 라틴어 그리스어 교육이 폐기됐다. 다민족이 사는 인도나 중국을 보라. 지방언어와 표준어를 같이 쓰고 아랍 국가들도 아랍 고전어와 자기 나라말을 병용한다. 지리적으로 오랫동안 고립돼온 한국과 일본이 예외다.”

    ― 그래도 프랑스 언론들은 프랑스어권 국가 정상회담의 참석대표 수가 매년 줄어든다고 걱정하던데.

    “그건 정치가가 걱정할 문제다. 그들은 아직도 18,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프랑스가 누렸던 영화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개방이 진행될수록 위협받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바로 권력이다. 지식인들은 세계시민(코스모폴리턴)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시애틀각료회의에서나 각종 국제무대에서 늘 ‘문화적 예외’를 주장하고 있지 않는가.

    “문화적 예외는 웃기는 얘기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영화 분야에서만 유독 문화적 예외를 떠든다. 영화제작은 많은 돈이 드는데 프랑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해 프랑스영화는 2,3편만 흥행에 성공하고 나머지 20∼30편은 관객이 2000명도 들지 않았다. 극장이 텅텅 비는데도 영화제작자와 극장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막대한 정부보조금 덕분이다. 내가 아는 영화제작자는 영화의 흥행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미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작가들은 정부보조금을 받지 않으니까 아무도 문화적 예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 영국과 독일에서 시험중인 제3의 길은 사회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사회주의는 가치가 있으나 사회가 추구해야 할 정치모델로서의 사회주의는 죽었다. 새 시대에 맞는 정치적 이념을 만들어내야 하는 고민에 빠진 사회주의자들이 제3의 길이란 표현을 빌려 자본주의를 시행하고 있지만, 21세기를 사회주의가 지배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유럽은 오랫동안 사회민주주의 전통을 유지해 왔으나 사회주의로는 더 이상 경제가 가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됐다. 블레어 총리나 슈뢰더 총리는 제3의 길이란 이름으로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유럽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돈은 프랑크푸르트, 국가운영전략은 워싱턴, 기술은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돼 전파되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여기서 정통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프랑스만은 예외다. 조스팽 총리의 사회당 정권이 사회주의 정책에 충실한 이유는 프랑스가 관료국가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당 정권은 관료의 이익을 대변하고 수호한다. 프랑스의 공무원은 경제활동인구의 25%로 유럽 국가의 평균 공무원 비율 12%의 두 배 이상이다.”

    기 소르망은 누구인가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인 기 소르망(56)은 오랫동안 사회주의 전통을 간직해온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예외적인 존재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소리높여 비판하는 프랑스 정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는 자유무역에 의한 세계화와 미국 지배의 불가피성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르피가로’ ‘렉스프레스’ ‘렉스팡시옹’ 등 프랑스 언론과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기 소르망은 70년부터 국립파리정치학교에서 정치철학과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75년 소르망 출판사를 설립, 경제·환경·지방행정·중소기업·도시계획 등 14개 분야의 주간소식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79년에는 기아해결을 위한 국제행동단체를 창설, 인권보호에 앞장서는 행동가다운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93∼95년 프랑스 외무부 문화자문, 95∼97년 총리 전략기획위원회 자문을 지냈으며, 95년부터 파리 교외 남서부 블로뉴 비양쿠르시의 부시장을 맡아 자신의 주장을 현실에 적용시키고 있다.

    1944년 독일에서 이주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최고 명문인 파리국립정치학교와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하고 파리동양어대학에서도 수학했다.

    대표적인 저서로 ‘미국의 보수혁명’(1983) ‘자유주의적 해법’(1984) ‘국가의 새로운 부(富)’(1986) ‘공산주의의 비상구’(1990) ‘우리시대의 진정한 사상가들’(1989) ‘야만인을 기다리며’(1993) ‘자본론, 그 이후와 종말’(1994) ‘프랑스에서의 아름다운 날’(1998) 등이 있다.

    그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과 하루에 20~30통의 E메일을 주고받고 한 달에 40여권의 책을 읽는다. 요즘 흥미있게 읽는 것은 인도, 파키스탄 등 여러 나라의 문학작품들. 신문과 TV는 거의 보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을 통해 하루에 10분정도 세계뉴스를 제목만 읽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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