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친상을 당한 TJ에게 DJ가 조문을 보내고, 밀봉된 정치적 ‘연서(戀書)’를 전한 사연. 정권교체 후 빅딜정책을 건의하고 내각제를 유보한 사정. 그리고 인터넷 황제 손정의를 일찍이 발견했으나 손잡지 못한 뒷이야기.》
물론 이른바 김대중(DJ)-김종필(JP)-박태준(TJ) 연대라는 DJT연대를 통해 정권교체를 했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수십년 동안 상반된 노선에서 평행선을 긋던 사람들이 대통령과 총리로 만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과 박태준 총리의 행적을 자세히 관찰하면 이미 두 사람의 정치적 동거는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지난 88년 13대 국회에서였다. 이전까지 TJ에게 심어진 DJ의 이미지는 ‘박제된 정보’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조국 근대화’를 추진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위업을 방해하는, 정치적 색깔이 이상한 야당 정치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3대 국회 경제과학기술위원회에서 평민당 의원과 민정당 의원으로서 1년 동안 활동하는 모습을 서로 지켜보면서 이런 나쁜 인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TJ는 당시 측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DJ가 원고도 없이 조순 부총리와 일문일답을 하는 것을 보니까 경제에 대해서 참 많이 아는군. 그동안 강성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만나보니 굉장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야.”
당시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다. 서로 지켜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DJ가 상임위원회를 옮기는 바람에 이런 인연도 끝나고 말았다.
DJ의 공개적 호평
TJ가 90년 1월 민정당 대표위원이 됐을 때 DJ는 공개적으로 호감을 표시했다. 당시 YS가 총재로 있던 통일민주당에서는 의례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평민당 총재였던 DJ는 직접 나서 “박태준 대표위원은 합리적이고 안정된 분이다. 난마가 얽힌 정국을 풀어나가는 데 기대가 크다”라고 코멘트했다.
그후 묘하게도 90년 3당 합당으로 TJ는 YS와 민자당이란 한 지붕아래 살게 됐다. 그러나 대통령후보 경선 문제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결국 TJ는 민자당을 탈당하게 되었고 YS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일본 동경으로 떠나 사실상의 ‘망명 생활’을 했다. 당시 ‘개혁정치’로 서슬 퍼렇던 김영삼 정부는 TJ가 들어오기만 하면 구속할 기세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동경의 외로운 방에서 기구한 생활을 하던 TJ는 94년 모친상을 당해 잠시 귀국할 수 있었다. 이때 DJ는 측근을 통해 조의금과 함께 조문의 뜻을 전했다. DJ는 이때 ‘건강을 기원합니다’라고 쓴 책을 전달하는 것과 함께 “이런 부당한 대우는 오래가지 못하니 꿋꿋하게 견디십시오”라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96년 1월. 15대 총선을 앞두고 DJ는 박지원 현 문화관광부 장관을 통해 도쿄과 서울을 오가던 조용경 현 포스코 전무 편으로 도쿄에 있던 TJ에게 ‘박태준 회장님 친전’이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동경에서 밀봉된 봉투를 뜯어본 TJ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통합민주당 전국구 1번을 맡아주십시오. 전국구 1번으로 출마하시면 더 이상 누구도 박회장을 박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잡고 국가발전과 동서화합을 위해 일해봅시다.”
DJ가 일종의 정치적 연서(戀書)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를 받아보고 고민한 TJ는 마침내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장을 써서 조용경씨를 통해 동교동에 보냈다.
“좋은 제의를 해주셨는데 지금은 국회에 진출할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주변 정리도 해야 하고 행동도 아직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사에 조심스러운 편인 TJ는 답장과 함께 조용경씨가 DJ를 직접 만나 전할 구두메시지도 마련했다.
“이번에는 제의에 응해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멀지 않은 장래에 보다 발전적으로 동서화합을 위해 기여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때는 손잡고 지역 감정 해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로 돌아온 조용경씨는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DJ와 조찬을 하면서 편지를 먼저 전달했다. 기대를 가지고 편지를 뜯어본 DJ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조용경씨는 구두메시지를 전달하며 “보다 발전적인 동서화합이란 표현은 아주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그러자 DJ는 다소 위안을 받은 듯 식사를 하면서 조용경씨에게 TJ의 근황을 물은 뒤 “박회장의 경륜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사장돼서는 안된다”며 “건강에 유념하시라”는 당부를 전했다.
DJ는 ‘전국구 1번’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당했지만 97년 5월 포항 보궐선거에 출마한 TJ를 위해 보이지 않게 지원했다. 표면에 나서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DJ는 여당 의원들을 포항에 특파해 호남표를 TJ에게 몰아주도록 했다. 특히 김민석 의원은 포항에 상주하면서 TJ를 도왔다. TJ는 95년 봄 신병치료차 미국에 갔을 때 김민석 의원의 친형인 김민웅 목사로부터 종교적 감화를 받은 인연이 있다. 아무튼 TJ가 보선에서 당선되자 DJ는 당선 축하 떡을 TJ 집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TJ에게 줄기차게 ‘구애’하던 DJ는 97년 대선 3개월전인 9월경에 한일 월드컵 예선전에 참석차 일본에 들렀다가 TJ를 만나 ‘도쿄담판’을 성사시킴으로써 마침내 DJT연대를 만들어냈고 그 결과 정권교체라는 ‘옥동자’를 분만했다.
정권교체 직후부터 DJ가 추진했던 빅딜정책은 대우그룹 붕괴로 지금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애당초 아이디어는 TJ가 낸 것이다. 재벌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과잉투자를 막으려면 IMF상황이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구두나 보고서를 통해 빅딜정책을 건의한 TJ는 측근에게 “재벌개혁 방향과 관련하여 놀라울 정도로 대통령과 일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TJ는 대통령을 대신해 빅딜에 반대하는 재벌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TJ의 설득방식은 원칙에 입각해서 “난국을 타개할 만한 다른 대안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제의한 뒤 제시하지 못하면 “정부나 노조는 모두 기득권을 포기하는데 기득권 유지를 위해 그러는 것 아니냐”며 재벌들이 더 이상 반발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
TJ는 내각제 유보와 관련해서도 DJ의 난처한 입장을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TJ는 ‘제로섬 게임’인 대통령제가 동서간의 지역전쟁 등을 유발할 수 있다며 권력을 분점하고 책임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내각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공동 정부의 성립 기반도 ‘내각제에 대한 동의’였다.
그런데 DJT연대 이후 IMF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사태가 벌어지고 모든 상황이 난마처럼 얽히자 TJ는 국민들이 내각제 논쟁에까지 휩쓸리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벌개혁과 함께 노사문화를 새롭게 정립해서 경제가 안정될 때까지는 내각제를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 과정에서 DJ는 원군을 얻었지만 TJ는 자민련 총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원들로부터 욕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고 김종필 당시 총리와도 한동안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합당 문제와 관련해서는 두 사람의 의견이 초기에는 일치했지만 나중에는 엇갈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정권교체 후 자민련총재를 맡은 TJ는 IMF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한 정부가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TJ는 이와 관련, 공동여당뿐 아니라 한나라당 일부 인사와 재야 인사 등이 용광로처럼 용해돼 완전히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이들이 정치주체세력이 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에 대해 자민련의 충청권 의원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한나라당에서도 동조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TJ가 애당초 구상한 큰 틀은 흐지부지됐다. 게다가 DJ와 JP가 공동여당의 합당문제에 의견을 좁혀 나가자 논의 과정에서 소외된 TJ는 “공동여당만의 합당은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쪽으로 돌아섰다. 선거법 개정, 선거구제 확정, 지역구수 축소 등의 정치개혁을 선행하지 않은 합당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JP도 합당 불가쪽으로 돌아섰다.
TJ는 대통령을 만날 때 준비를 철저히 해서 모든 민심을 가감없이 전하는데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좀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난해 옷로비사건 파동 때는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 보좌를 잘못하고 있다”는 말을 대통령에게 했다고 밝혀 약간의 파문이 일기도 했다.
TJ는 대통령이 너무 원칙에 집착하고 인정이 많아 실기할 때가 많다는 점을 안타까워 하는 입장이다. 옷로비 사건만 하더라도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는데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못해 결국 난마처럼 얽히게 됐다는 것이다.
DJ와 TJ의 궁합
이제 총리가 된 TJ와 대통령의 궁합은 잘 맞을 것인가. 장고우회(長考迂回)형인 DJ와 정면돌파형인 TJ의 파트너 궁합이 잘 맞는다는 지적이 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연인같다”고 묘사하는 사람조차 있다. 김종필 전총리는 대통령을 ‘모시기’에 바빴다면 TJ는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할 수 있는 총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앞으로 대통령은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될 터이므로 경제총리인 TJ가 경제분야에서 보완을 하리라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포항제철이라는 개발시대의 신화를 창출한 인물이 정보화시대의 총리를 맡는 것은 부적합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TJ가 제안한 빅딜정책도 예전의 산업구조합리화정책의 틀을 못벗어났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TJ측에서는 이를 반박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보통신산업에 관심을 갖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화총리’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도 “박태준 총리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포항과 서울에 화상시스템을 설치해 화상회의를 한 분이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앞서 나간 분”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TJ는 미국이나 일본에 체류중일 때도 정보통신산업이나 첨단산업과 관련된 현장은 직접 방문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유망한 벤처기업가를 발견할 줄 아는 안목도 있다는 것이 주위사람들의 전언. 현재는 ‘인터넷 황제’라 불리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도 TJ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했다는 것.
손정의 회장이 유명인이 되기 이전인 1985년, 당시 포항제철 회장이던 TJ는 일본을 방문해 소프트뱅크 관련 기사가 실린 잡지를 읽고 ‘이것이 미래산업 방향을 결정짓는 모델이다’며 손정의씨를 86년 한국에 초청했다. TJ는 손정의씨를 면담한 뒤 “소프트뱅크와 포항제철이 합작해 한국에서도 소프트뱅크와 똑같은 회사를 하나 만들자”고 제의했다.
이런 제의에 대해 손정의씨는 한국에서는 시기상조임을 내세워 거절했다.
“기본적으로 아주 좋은 제의다. 포철과 같이 합작하면 좋은데 아직 한국은 소프트뱅크를 세울 여건이 되어 있지 않다. 우선 PC보급도 거의 안돼 있다. 따라서 PC보급도 되고 사회적 인식도 어느 정도 되면 그때 가서 합작 논의를 시작하자. 여러 가지 여건이 갖춰지면 반드시 박태준 회장과 합작하겠다.”
그후 TJ는 포항제철에서 PC를 보급하고 교육하는 일에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89년 12월에 포스데이타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1년 뒤인 90년 당시 성기중 포스데이타 사장을 일본에 있는 손정의 사장에게 보냈다. 성사장은 그동안 PC 보급과 교육에 기울인 노력과 현 상황을 설명한 뒤 손정의 사장에게 합작을 제의, 승낙을 얻어냈다. 그 결과 91년 2월12일 소프트뱅크사와 포스데이타가 합작해 소프트뱅크코리아란 회사를 설립했다. 지분은 포스데이타가 60%, 소프트뱅크사가 40% 소유했다.
94년에 TJ가 정치적 이유로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대신 회장에 취임한 김만제씨는 소프트뱅크코리아를 포기해버렸다. 포스데이타가 소유한 지분을 삼보컴퓨터에 매각한 것이다. 자본금 17억원으로 출발한 소프트뱅크코리아는 지난해 매출액이 1300억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지분 매각 당시 포스데이타의 매출액은 500억원 정도였고 지난해에도 700억원 정도 인데 비해 소프트뱅크코리아는 매출액이 포스데이타의 2배 가까이 성장했다. 유망한 벤처기업을 헐값에 팔아넘긴 셈이다. 소프트뱅크코리아의 매각 소식을 일본에서 들은 TJ는 통탄했다.
‘정보화 총리’ 될 것인가
TJ는 오래전부터 정보통신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찍이 86년에 우리나라에도 초고속통신망을 깔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으로 떠난 뒤에도 한전과 한국통신이 합작해 광통신망을 깔면 적은 비용으로 빠른 시일안에 초고속통신망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TJ는 일본에 체류한 4년동안 정보통신과 미래에 대한 책을 200권 읽었다고 한다. 치료차 미국에 갔을 때는 특별한 채널을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사 내부를 샅샅이 돌아보았다.
TJ는 총리 임명동의안이 통과된 뒤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정보화 총리’가 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정부조직 개편안이 통과되면 재경부 장관이 경제부총리가 되겠지만 그래도 TJ는 경제장관들을 꼼꼼히 챙길 것으로 예상된다. 정권교체후 조각을 할 때 업계 출신을 경제관련 장관으로 임명하라고 DJ에게 제안한 것도 TJ인 것으로 알려진다.
총리 비서실장인 조영장 전의원도 TJ의 정보화 참모로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체신고 출신인 조 비서실장은 정보통신업체를 운영한 경험도 있고 이 때문에 국회 정보통신위원회에서 8년간 활동한 바 있다.
정보통신업계에서는 이동통신업체인 011과 017이 합친 것도 조영장 전의원의 아이디어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뒤에는 TJ가 있다는 것. IMT-2000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서 미리 중복투자를 피하기 위한 방안인 것으로 풀이된다.
TJ가 총리가 된 뒤 경제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지 않지만 TJ를 잘 아는 사람들의 분석에 의하면 크게 3가지 방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앞으로 재벌구조조정은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계속 독려해나갈 것이다.
둘째, 외환 위기의 불은 일단 껐지만 아직 단기 채무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경쟁력 있는 상품을 팔아서 이를 갚는 데 유리한 산업 육성에 주력할 것이다.
셋째, 정보통신분야의 구조조정과 지원에 주력할 것이다.
이외에도 TJ는 부실공사, 부정부패 등 우리 사회의 원칙을 허무는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