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의 메사추세츠 애비뉴는 세계 각국의 대사관들이 밀집해 있는 외교가(外交街)다. 한국 대사관도 물론 그 길가에 위치해 있다. 그것도 여러 나라의 대사관 건물들 중에서 보일 듯 말듯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길 중간 쯤에 제법 상당한 규모의 건물로 번듯하게 서 있다.
한국이 IMF 구제금융에 매달리던 1997년 초겨울에 그 길을 오가던 세계 각국의 외교관들은, IMF 환란(換亂)이 터지기 한참 전에 우리 정부가 욱일상승하는 국세(國勢)를 과시하듯 매입했다는 그 건물을 도대체 어떤 느낌으로 바라보았을까? 혹시 “그것 봐.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더니”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1월7일 오전, 워싱턴의 한국 대사관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가며 떠오른 단상(斷想)이었다.
기자를 안내한 대사관 직원은 “요즘은 오랜만에 대사관 주변이 참 조용하다”고 전했다. 경제위기도 이제 한숨 돌렸고, 작년 가을 이후로는 북한의 미사일위기 역시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을 말하는 듯했다. 오랜만에 대하는 이홍구(李洪九·66) 대사의 표정 역시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평온해보였다.
― 주미(駐美) 대사로 부임하신 지가 이제 거의 2년이 돼 가시지요?
“1998년 5월에 부임했으니까 21개월째가 됩니다.”
― 그동안 국가적으로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전반적으로 소감이랄까, 주미 대사로 재임하신 기간을 회고해주시지요.
“전반적으로 보면 비교적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저 자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가 갑자기 주미대사로 오게 됐습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취임 2주일 후에 저에게 주미대사로 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처음엔 두어 차례 고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워낙 급박했던 상황이라 여야를 가리지 않고 다함께 국난을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98년 3월이라면 우리 경제가 아직 국가부도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그런 상황 아니었어요? 그런 상황에 제가 워싱턴에 부임해서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은행 사람들을 만나서 ‘한국은 절대로 부도를 내지 않는 나라다. 한국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다녔습니다.
사실 98년 당시 제가 미국사람들을 만나 우리 상황을 설명하면서 ‘99년에는 한국경제가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이다. 플러스 1∼2%, 잘하면 3%까지 성장할 수도 있다’고 말했는데, 지금 보면 제 말이 틀렸어요. 그보다 훨씬 높은 성장률을 보였으니까(웃음).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국민이 일치 단결했고, 우방들도 많이 도와준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이 곳에서 다뤄야 했던 또 한 가지 큰일은 98년 여름부터 시작된 북한 금창리 지하 핵시설과 미사일 위기였습니다. 이게 다시 또 1994년 위기 때처럼 커지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뭐, 우여곡절이 있었고 또 지금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를 통해 해결 가능한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무난히 잘 되지 않았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농담 같은 얘기지만 사실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인데,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대체로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이제 그만 서울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는데, 서울쪽에서는 ‘좀 더 있으라’고 그러더군요.”
“나 같은 사람은 정치에 안 맞아”
― 많은 분이 이른바 ‘정치인 출신 대사’의 성공 케이스로 이홍구 대사를 꼽는 것을 봤습니다. 지금 말씀처럼 그토록 중요한 시기에 이대사 같은 분이 주미 대사를 맡아서 대미(對美) 관계가 원만하게 처리됐다는 게 일반적인 평인 듯 합니다. 그런데 이대사의 친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야당 쪽에선 그동안 이대사와 관련해서 연령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고, 아무튼 썩 흔쾌했던 것 같지는 않더군요.
“특히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정치인 출신 대사가 유리하다는 말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국무총리와 당대표를 지낸 사람인지라 미국 정부나 의회 등 각계각층 사람들을 만날 때 뭐랄까 대접을 해준다고 할까요, 일하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았겠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다음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국방이나 외교에는 여당도 없고 야당도 없다는 점입니다. 대사직이란 국가이익을 위해서 국가 정책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자리지 특정 정당의 이해에 좌우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연령 문제와 관련해서는 애초부터 혼선 여지가 있었고, 야당이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은 꽤 적절한 측면이 있었다고 봐요. 그래서 외교부에서도 그 일을 계기로 법적 정비작업이 마무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서울로 돌아가시면, 혹시 자의건 타의건 정치활동을 재개할 생각도 갖고 계십니까?
“전혀 없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97년 당시에 내가….”
― 당시 어느 자리에선가 “나같은 사람은 한국정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신 적이 있지요?
“그래요. 제가 97년 6월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리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스스로 물러난 겁니다. 당시 제가 그런 말을 한 것은, 그 전까지 대학과 행정부, 정당에서 두루 일해봤지만 아무래도 제가 정치에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됐기 때문이에요.”
― 99년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 한 말씀 하신다면….
“특별히 말할 것은 없어요. 대사는 정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웃음)”
DJ, 미·북 대화 길 터줘
―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서 미국측에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앞서 말씀처럼 작년 9월 이래로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를 통해서 북한 문제를 조율하고 있지요. 북한 문제와 관련한 요즘 미국 내 분위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잘 알려진대로 미국 조야에서는 김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종식된 상황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 지역인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해결하느냐는 게 과제로 남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김대통령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는 철저하게 대응하면서도 평화적으로 북한과 대화를 하고,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한다는 정책을 확고하게 견지해왔다는 겁니다.
거기에다 두 번째로 김대통령께서 쉽지 않은 결정을 했는데, 미·북간 대화가 남북관계보다 다소 앞서 가더라도 이해하겠다, 이런 생각을 밝히신 겁니다. 미국으로선 이 부분을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진전시킬 필요성을 느꼈을 때 한국측이 내세웠던 ‘미북대화가 남북대화보다 앞서가면 안된다’는 원칙을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 작년에 북한 미사일 문제, 금창리 핵시설 문제가 제기됐어요. 세계 정치의 중심에 서 있는 미국의 주된 관심사가 바로 미사일 및 핵무기를 줄이는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북한이나 이라크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이 관심사일 수밖에 없던 터에 김대통령께서 미국에 북한과 협상할 수 있는 길을 터주니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된 겁니다. 이런 배경 덕분에 전반적으로 북한에 대응하는 한·미간 접촉이 대단히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페리 프로세스를 거부할 경우 북한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사라지고 오히려 불이익만 커지기 때문에 북한도 이걸 쉽사리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북한은 사실상 외부 수혈로 체제를 연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외부원조가 끊어질 경우 그 타격은 심대할 수밖에 없지요.”
― 지난 2년간도 국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시기였지만,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 본다면 향후 1, 2년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 중에는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틀 자체가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분이 많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인식 변화도 그렇지만, 일본도 조만간 대북 수교협상을 재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외교역량을 축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지금 중대한 전환점에 와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구요. 단순히 한반도만의 변화가 아니라 전세계가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특히 동북아는 21세기의 강대국 중국을 위시해서 경제대국 일본, 그리고 지금은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지만 다시금 강대국으로 올라설 게 분명한 러시아가 교차하는 지역입니다. 이런 곳에서 평화와 안전과 번영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과제라는 거지요. 다시 말해 한반도 문제는 단순히 한반도만의 일로서가 아니라 넓은 시각에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점은 지난 30∼40년 사이에 한국의 위치가 참으로 놀랄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이런 문제에서 우리는 주요 변수가 아니라 종속변수에 그쳤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한국은 세계 10∼11위권의 무역대국입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시절, 우리는 세계 정세에 어두웠고 나름의 확고한 생각과 힘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라를 잃고 분단까지 겪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로 넘어가는 지금, 우리는 그동안 축적한 힘을 바탕으로 상황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미국 같은 나라도 결국은 모든 일을 자기 위치에서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북한 핵무기나 미사일이 관심사지 저들이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책을 연구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말은, 결국 한반도의 장래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기본 구상은 결국 우리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우방인 미국, 일본에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을 기초로 공동 보조를 취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우리 외교의 창의력과 조직력, 추진력이 중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 요즘에는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도 해외에서 외교관에 준하는 활동을 많이 합니다. 그런 정치인들이 해외에서 적절치 못한 발언을 한 사례가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중차대한 시기에 국내에서 우리 외교정책, 통일정책의 방향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미약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희망사항에 그치는 미래상이 아니라 현 상황에 대한 냉철한 진단에 입각한 청사진, 그리고 우리 현실에서 실제 선택할 수 있는 대안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저한 분석 위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 이런 것들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만 비로소 힘있는 외교를 추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정치가 외교정책, 통일정책을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젠 분단비용도 생각해야
― 지금 말씀하신 그런 면 때문에 미국측의 전문가들은 큰 틀에서 햇볕정책이 지향하는 목표와 이상에 대해서는 완전 동의한다고 말하지만, 특정 국면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의 세부 전략·전술에 대해서는 다소간 문제를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요?
“그런 점도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 대북정책에 대해서 지적할 또 한 가지는, 사실 우리나라의 대북정책, 통일정책에는 상당한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책이 나온다고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저 개인과도 관련이 되는 얘기이지만, 예컨대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첫 번째 통일원장관 재임시절) 여야를 포함해서 전국민이 통일에 대해서 많은 논의를 했습니다. 텔레비전 방송에서 심야 토론도 했고, 대학에서는 학생과 교수들 간에 토론이 이어졌고, 각 언론매체들을 통해서 가위 전국민이 통일 논의에 참여했어요.
그런 논의를 거쳐서 나온 게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었지요. 물론 그 과정에 임수경씨 방북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무튼 그게 1989년 광복절에 공식적으로 우리의 통일방안으로 제시됐고, 이것을 1994년 광복절에 김영삼 대통령이 재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김대중 대통령께서 추진하는 정책도 바로 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1988년 당시에 나왔던 게 경제공동체, 사회공동체, 문화공동체, 그리고 정치공동체까지….”
― 당시 이대사께서 통일원장관으로 그 틀을 직접 만드셨지요.
“그래요. 아무튼 바로 그런 흐름 속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오고, 비핵화 공동선언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절대 핵 프로그램을 가동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무슨 미·북관계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유구한 안전을 위해서는 한반도를 비핵화 지대로 만드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런 합의를 우리가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민족을 위해서도 꼭 지켜줘야 한다는 차원에서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보면 우리 정책이 일관성은 갖고 있는데, 정책이란 것이 기본 원칙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그때 그때 상황에 대응하는 적절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을 부지런히 만드는 것이 행정부가 할 일이지요. 그런데 정치가 원활하게 움직여주지 않으면 정책을 만드는 메커니즘이 잘 작동되지 않게 되기 때문에, 밖에서 볼 때 상당히 허술해보이고 우려를 자아내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 9월12일 미·북간 베를린 합의를 계기로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일반인들 이 보기엔, 그 전까지 북한 미사일로 그토록 호들갑을 떨다가 어느날 갑자기 조용해지니까 좀 어리둥절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한 것일 뿐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즉 미사일 문제는 미·북간에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지요. 앞으로 미·북간의 협상 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 북한 미사일 문제는 미사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북한으로서는 자신의 존재와 주장을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이 미사일이나 핵밖에 없는, 어떻게 보면 문제를 일으켜서 자신의 존재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아닙니까?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북한이라는 존재 를 새로 인식하지 않으면 북한문제 해결이 참 어렵게 돼 있고, 바로 여기에 우리의 포용정책이 기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구도는 미·북 국교정상화까지를 포함해서 북한을 세계체제에 어떻게 편입시키느냐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공산체제와 협상을 한다는 게 대단히 어렵습니다. 더욱이 북한체제는 전체주의 공산체제에서도 극단으로 간 체제이기 때문에 협상이 더 어려워요. 그래서 단숨에 어떤 결실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최근 북한 고위인사의 미국방문도 우여곡절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튼 조급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또 한 가지, 미사일이나 핵문제도 중요하지만, 올해로 분단 55년째입니다. 이걸 이렇게 마냥 끌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통일비용만을 얘기하지만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가져온 비용, 즉 분단비용이 얼마나 큰지도 계산해봐야 해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 스스로가 자꾸 안(案)을 만들어서 현재 진행중인 페리 프로세스에 반영시키는 것, 즉 넓은 의미의 민족공동체 건설에 긍정적으로 공헌하는 게 우리의 당면 과제라고 생각해요.”
한국, 더 이상 종속변수 아니다
― 향후 한반도 문제의 해결방안 모색과 관련해서 중국 변수, 그리고 미국의 대(對)중국정책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만….
“많은 석학들은 21세기 중반 이후에는 중국이 경우에 따라서는 세계 제1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을 상대할 수 있는 가장 큰 나라가 중국이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와 함께 21세기에는 동북아 지역의 비중이 매우 커질 겁니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는 부분은 미국이 현재 당면한 최대 과제라고 할 수 있어요. 일단 현재 미국 내에서 합의돼 있는 것은 미·중관계를 갈등의 관계가 아닌 협조와 공생의 관계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장기적으로는 통일문제, 단기적으로는 북한을 다루는 정책 역시 중국이 수용하고 합의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결을 모색한다는 것이 아마도 미국의 방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미·북 대화도 중요하지만, 남북한과 미·중이 참여하는 4자회담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인다면, 중국 외에 일본 역시 앞으로 계속 중요한 국가로 남을 것이고, 러시아 역시 미국 쪽에서 보면 앞으로도 중요한 국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바로 그 한가운데에 위치한 게 한반도라는 겁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과거엔 한국이 그저 종속변수였지만, 이제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자체가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맹국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미 동맹관계는 한국에도 물론 필하지만,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 대중국 정책에 필수 조항이라는 인식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미 외교는 19세기나 20세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외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노근리 사건과 반미감정
― 한국정부가 지난 2년간 추진해온 경제개혁을 미국에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우리가 이렇게 빨리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줄은 몰랐거든요. 세계은행, IMF, 각종 연구소 등의 경제전문가들 중에서 한국이 이렇게 빨리 위기를 극복하리라고 짐작한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당연히 높은 평가를 줄 수밖에 없지요.
다만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은, 과거에도 잘된다 잘된다 하다가 위기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경제성장률이 높고 외환보유고가 많다는 것만 갖고 잘된다고 얘기할 수 없고, 경제의 기본 구조에 대한 고려가 커졌기 때문에, 잘된다고 하면서도 꼭 ‘그러나’가 붙게 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앞에서 외교정책에 대해서도 똑같은 내용을 호소했지만,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장기적인 기본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진지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동안 우리 국회나 정당들이 그런 청사진을 국민에게 제시한 것을 보지 못했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국제주의자고 세계주의자입니다. 1995년 총리로 있으면서 세계화 내각을 이끌기도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국민들에게 미안하고 자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 금융 시스템이나 기업의 세계화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97년에 우리가 위기에 처했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때를 교훈삼아서 정말 제대로 된 세계화를 강력하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일각에선 요즘 조사중인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과 관련해서 미국측에서 한국내 반미감정 고조를 우려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사건들이 밝혀지는 것 자체를 곤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역사를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지요.”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노근리 사건도 피해자인 우리가 아니라 미국 AP통신이 처음 제기했는데….
“자칫 오해하면 미국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미국은 모든 기록을 보존하고, 몇 년이 지나면 공개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두었고, 공개되면 누구나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도 노출되는 것 아닙니까? 노근리 사건도 AP통신이 처음 제기한 이후 ‘뉴욕타임스’ 등 유수 언론에서 자세하게 보도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겁니다.
아무튼 노근리 문제에 대해서는 한·미간에 두 가지 원칙이 합의돼 있습니다. 하나는 투명성입니다.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사실대로 조사해서 밝히자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그렇게 밝혀진 사실에 입각해서 공정하게 처리하자는 겁니다.”
미국은 6·25 50주년 기념행사 준비중
― 미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줄 수도 있겠군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지요. 이번에 미국측 조사단이 서울에 갔는데, 한·미간에 조사를 해서 늦어도 5월까지는 모든 사실을 밝히기로 했습니다. 그 다음에 피해자 문제를 공정하게 처리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우려하는 건, 이것이 반미감정으로 연결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금년은 6·25전쟁 50주년입니다. 노근리 사건도 6·25 당시에 일어난 사건이니까 미국에서도 60세가 넘지 않은 사람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의 미국은, 예컨대 코소보 사태에서 미군 병사 몇 명만 죽어도 소란스러워지는 그런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 국제분쟁에서도 어떻게든 자국민을 다치지 않으려고 하는데, 6·25 때에는 미국 젊은이 5만4000명이 전사했습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는 신념 하나로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싸우러 가서 5만4000명이 전사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을 아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국으로 생각해온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노근리사건 하나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는 건 좀 곤란하지 않으냐, 미국측에서 이런 시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튼 그 일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걸 외면하는 건 더더욱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겁니다.”
― 말씀을 듣고 보니 2000년이면 6·25전쟁 50주년이 되는 해군요. 이 곳에선 무슨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이걸 계기로 미국민들에게 한국을 널리 알리는 홍보활동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한국전 50주년이 큰 계기가 될 것입니다. 미 국방부에서 연락이 오기를, 미국 내의 8000여 지역사회가 관련행사를 하겠다고 통보해왔으니 도와달라는 겁니다. 미국 쪽에선 이미 거기에 필요한 교재를 다 만들었어요. 1950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지도 만들고…. 사실 미국인 80% 이상은 당시 상황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올해를 대대적인 교육 기회로 삼으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6·25를 기억하는 나이 드신 분들은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 20세기의 중간점이었던 당시 우리 땅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교육을 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 대사관에서도 이번 기회에 미국 사회에 한국을 적극 알릴 겁니다. 사실 우리를 알릴 기회는 많습니다.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회의도 있고, 2002년 월드컵대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릇 홍보라는 건 우선 집안이 잘 돼야 바깥에다가 홍보를 하는 겁니다. 서울에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데, 무턱대고 미국 학교에 자료를 나눠준다면 그게 잘 되겠어요? 그래서 이번 일은 국가적으로 잘 진행이 됐으면 해요.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가 국내에 대해서 하자는 일이 너무 많아서 좀 그렇지만, 여기 나와 보면 그렇게 돼요.”
새천년, 한국과 미국
― 마지막으로, 2000년대 바람직한 한·미 관계에 대해서 한 마디 해주시지요.
“21세기에 들어와 한·미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세계적으로는 새로운 세계체제를 건설하느냐, 못하느냐가 최대 관건입니다. 한편으로 기술발전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다른 한편 지역갈등·인종갈등·빈부격차 등의 난제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문제입니다.
이걸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미국은 세계중심 국가로서 여기에 상당한 책임이 있고, 우리도 이제는 남의 뒤만 따라가는 나라가 아니라 새로운 지역질서와 세계질서를 건설하는 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도 우리를 아시아·태평양 국가들 중 가장 가까운 동맹국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우리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미국도 자신과 아주 가까운 나라가 그렇게 많은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북아를 놓고 볼 때, 일본도 미국과 가까운 나라지만 미국에 대한 잠재적인 견제 의식이 있고, 중국은 미국에 운명적인 라이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는 원래부터 미국과는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지요. 파키스탄과 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까 ‘그래도 아시아에서 앞으로 함께 일을 해나갈 수 있는 상대는 한국뿐’이라는 의식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을 토대로 한·미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이 과제인데, 우리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미국과 이렇게 가까운 동맹관계라는 점은 우리에게 대단히 긍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끗이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21세기에 우리가 선진국 대열에서 확고한 자리를 확보하는 데에 한·미 동맹관계가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바탕 위에서 치밀한 외교전략, 경제전략을 수립해서 실천에 옮기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요. 가능한 한 금년 내에 우리의 방향을 좀 더 확고하게 설정하는 노력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