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는 노골적으로 조선과 조선인을 멸시한 악질적 식민 관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주리주기론을 통해 근대적 의미에서 조선의 유학을 연구한 최초의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왜 조선의 사상을 연구했는가? 주리주기론은 그의 손에서 어떻게 식민철학으로 변질했는가? 황국정신에 기초하여 유학을 연구하고 국민 도덕의 본의를 천명하여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것(명륜학원 교육목표)이 제국주의자의 연구 목적이었다. 21세기 한국 철학의 과제는 다카하시를 극복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
“조윤제가 다카하시 교수의 출장명령을 받고, 제주도로 민요채취를 다녀왔는데, 이 조사한 내용을 모두 내놓으라고 명한 것이다.”(같은 책, 197쪽)
“졸업을 앞두게 되니 그때까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취직 문제가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제2강좌 주임(실제로는 제1강좌였음-필자) 다카하시 선생을 찾아가 의논했다. 어학 담당인 오구라 선생을 찾는 것이 도리였겠지만, 그런 문제에는 다카하시 선생이 적임자였다. 다카하시 선생의 주선으로 나는 졸업과 동시에 취직이 됐다. 경성사범학교 교유(교수)자리였다.”(‘딸깍발이 선비의 일생-일석 이희승 회고록’ 창작과 비평사, 94쪽)
경성제국대학 학생에게 다카하시 도오루는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다카하시를 백안시하면서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다카하시는 매우 문제가 많은 학자였고, 학자적 자질을 의심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학문적 연구에 힘을 쓰는 이판(理判)교수가 아니라, 교육 행정일을 담당하는 사판(事判) 교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카하시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경성제국대학의 현실적 한계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이러한 점이 다카하시를 잊혀진 인물로, 아니 잊고 싶은 인물로 만들게 했던 것 같다.
황국신민 만들려고 식민철학 연구
다카하시의 경력은 화려하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교수 외에 한성중학교 교사, 조선 총독부 촉탁,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장, 경학원 강사, 혜화전문학교 교장, 명륜연성소 소장을 지낸다. 주로 교육과 관련 있는 직책으로 정치나 외교분야와 같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특히 서울대, 성균관대, 동국대의 전신이 되는 학교들을 세우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아울러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에 자문 노릇을 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위상이 심상치 않다.
그러나 다카하시는 이러한 행정가적 능력만 있었던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조선 사상사(思想史)’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 점이야말로 그를 지금에 와서 다시 살펴보게 하는 이유다.
다카하시가 처음부터 조선 사상사를 쓰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뿌리 깊은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의식은 동경제국대학 지도교수였던 다케베 돈고(建部遯吾)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진화론에 입각한 우등과 열등 이론에 따라 그는 철저히 조선과 조선인을 멸시했다.
그가 ‘조선인’이란 글에서, 조선의 사상을 고착성과 사대성으로 파악한 것도 ‘열등’한 조선 민족에 대한 일본인의 우월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다카하시가 조선 총독부 촉탁 자격으로 조선의 종교를 조사한 것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는 총독부 명령으로 합병 직후 유생의 동향을 조사하기 위해 삼남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의병장의 책상에 ‘퇴계집’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조선 유학을 연구하게 된다. 또 사고(史庫) 조사를 위해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르면서 승려들의 근면하고 바른 행동을 보고, 조선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로부터 조선에 대한 다카하시의 부정적 시각이 긍정적으로 바뀐다. 하지만 그것조차 ‘황국신민’을 만든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조선 사상사를 3부작으로 구상했다. 조선의 불교, 조선의 유학, 조선의 특수 종교가 그것이다. 그중 조선의 불교만 완성되고 나머지 둘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다카하시는 ‘이조불교’를 써서 조선 불교사를 정리했다. 신라나 고려에 비해 조선에서 불교는 실제적으로 거의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는 조선 불교라는 불모지에 학맥을 정리하고, 조선 불교가 어떻게 국가와 관계를 맺었는가를 상세히 논하였다. 일종의 교리사라기보다는 정치사 혹은 사회사적 연구였다(앞으로 다카하시의 조선 불교에 대한 연구도 곧 번역할 예정이다).
그러나 다카하시가 조선사상연구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유학이었다. 퇴계학파를 주리파, 율곡학파를 주기파로 규정한 그의 이론이 아직까지 한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그대로 인용되는 점만 보아도 그의 연구는 상당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다카하시도 조선 유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조불교’를 쓴 다음, ‘이조유학’은 쉽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 유학은 공부하면 할수록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자학이라는 보편적 틀 속에 규정돼 있는 조선 유학을 연구하려면 중국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 부분이 부족했다. 현상윤의 ‘조선유학사’ 서평에서 그가 “조선 유학을 비판적으로 보고, 그 논쟁이나 학파의 대립에 대해 일가견 있는 비판을 하려면, 시비 모두 근본으로 소급하여 송학 특히 주자학을 구명하고 이에 덧붙여 변치 않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것은 아마도 자신에 대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노예의 철학으로 이용당한 주리주기론
조선 멸망의 필연성을 주리파와 주기파의 대립에서 찾은 다카하시 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전에 ‘주리(主理)·주기(主氣)’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개념은 조선에서 이황이 가장 먼저 언급했다. 이황은 사단(四端)을 주리, 칠정(七情)을 주기로 파악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리(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르는 경우가 있는 것은 리를 주로 해서(主於理) 말한 것이며, 사단이 이것이다.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경우가 있는 것은 기를 주로 해서(主於氣) 말한 것이며, 이것이 칠정이다.”
이처럼 이황은 사단과 칠정이 개념적으로 주리와 주기로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모두 리와 기로 이루어진 것이며, 같은 종류지만 지나침과 모자람의 유무로 구분될 뿐이라고 한다. 이이는 기대승의 비판을 이어받아 사단과 칠정의 분리를 반대하고,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하여 리가 타는 것(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 규정한다.
이황의 사상을 계승한 퇴계학파는 사단과 칠정을 주리주기의 기준으로 삼아, 사단과 칠정의 분리를 반대하는 율곡학파를 주기론으로, 자신들은 주리론으로 규정짓는다. 특히 이진상은 “이황이 제창한 학설의 본뜻은 ‘주리’”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율곡학파는 주기론으로 자신들의 동일성을 확보하려 하지도 않았고, 퇴계학파를 주리론이라고 규정짓지도 않았다. 율곡학파는 사단 칠정을 주리주기로 분류하는 이황의 방식을 비판한다. “사단은 리의 발동이고, 칠정은 기의 발동”이라는 데서 출발한 이황이, 리와 기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합리화하기 위해 한 설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율곡학파는 “사단은 리의 발동이고 칠정은 기의 발동이다”라는 말이 주희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들은 이러한 말이 ‘주자어류’에 단 한 번 보인다고 주장하고, 주희의 이 말은 기록자의 착오거나 한순간의 견해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 말은 주희의 철학 체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소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주희의 말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부분을 골라내 그 진위 여부를 가림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이 올바름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것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서 시작하여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거쳐,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완성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주리주기론은 퇴계학파가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다카하시 도오루가 나타나 주리주기를 철학적·범주적 개념으로 이용하여 조선 유학의 근대적 재구성을 시도했다. 이는 조선 유학의 학파와 지역별 분류를 넘어서 개념적인 분류를 시도한 최초의 성과다.
그는 당시의 일제 어용학자(鄭萬朝·呂圭亨·尹喜求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들이 여전히 퇴계학파를 따르는 남인과 율곡학파를 존숭하는 노론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을 사단 칠정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당파와 철학 이론을 결합시킴으로써, 조선이 멸망한 계기를 당쟁과 연결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었다. 그는 ‘조선 유학 대관’에서, 조선의 사상이 640년 동안 주자학 일변도로 고착되어 진보·발전성을 상실했다고 하면서, 이를 국민성과 연결짓는다. 또 정당과 학파의 결합이 그 뚜렷한 특징이라고 논한다.
다카하시는 사단 칠정을 기준으로 퇴계(영남)학파와 율곡(기호)학파를 나누고, 그것을 주리주기의 틀에 넣어 조선 철학사에 관철시킨다.
그러면 다카하시의 주장이 지닌 문제점을 살펴보자. 우선 다카하시의 주장은 조선 철학사 전체를 포괄하는 도식이 되기에 적절치 못하다. 이것은 다카하시 자신이 이미 사단 칠정을 기준으로 조선의 모든 유학자를 영남(주리)과 기호(주기)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기준에 맞지 않는 학자들을 따로 분류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정경세(鄭經世, 1563~1633)는 퇴계학파에 속하지만 사단 칠정에 대해서는 이이의 견해를 취한 경우이고, 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율곡학파지만 이이를 비판했으며, 임영(林泳, 1649~ 1696)·조성기(趙聖期, 1638~1689)·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율곡학파지만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절충’한 경우로 분류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사단 칠정에 대한 각 학파의 입론 차이를 주리주기로 명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사단 칠정이 기준이 된다는 것은, 사단을 칠정 속에 포함시키느냐 아니냐에 따라 학파적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카하시에 따르면 사단이 칠정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는 문제는, 단순히 도덕적인 감정과 일반적인 감정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기심성(理氣心性)의 이해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황은 사단(도덕적인 감정)을 칠정(욕망 전반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감정)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단은 리를, 칠정은 기를 주로 한다. 이것은 리가 기의 움직임(發)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움직인다는 사고로 연결되고, 당연히 이황의 철학은 주리론이 된다. 이이는 리발(理發)을 인정하지 않고, 따라서 사단은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일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이는 “어떻게 칠정 중에서 순수하고 완전하게 리에 해당하는 사단이 발생했는가?”란 문제를 제기한다. 이이의 논지는 기가 곧바로 리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을 둔 것으로, 리와 기의 대립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연의 기’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기에는 본연의 기가 있어, 그것은 순수하고 청명하여 리를 싣고, 리 그 자체로 움직여 그대로 정(사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 ‘본연의 기’에 대한 관심은 늘 율곡학파의 중심 과제가 됐다. 그러나 이이가 “담일 청허한 기는 없는 경우가 많다”고 언급하고 있듯이, 율곡학파는 ‘본연의 기’를 리와 같은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카하시는 이황과 이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사람의 리기설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차이는 선한 정과 악한 정의 근원을 주로 리 쪽에 두는가, 기 쪽에 두는가에 있다. 즉 이황은 리 그것에도 약간의 발동을 인정하기 때문에, 리가 충분히 기를 지배한다면 정(情)은 모두 리발(理發)이 되고 선하게 된다. 그것과 반대로 리가 기를 충분하게 지배하지 못하여 만약 기에 질 때는, 정은 기발(氣發)이 되고 위태로워져 악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므로 도덕의 수양은 결국 리를 왕성하게 하여 항상 언제 어느 곳에서나 기를 지배하게 하는 데 달려 있다.
…그것에 대해 이이는 리는 운동도 없고 작용도 없어 단순히 형식적인 조리이고, 하늘이 만물을 생기게 하여, 만물에 리를 부여하는 데 절대 공평하여 더하거나 뺌도 없다. 그리고 본연지성에 나아가서 본다면 사람과 사물의 차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情) 즉 마음의 작용에 선악이 생기는 것은 본연지성, 즉 리의 있고 없음과 많고 적음 때문은 아니다. 오직 리를 타고서 이것을 구체화하는 바의 기의 성질에 달려 있다. 맑은 기가 타면 리는 똑바로 나와 정이 선하게 되고, 탁한 기가 타면 리는 가리워 정이 악하게 된다. 여기서 도덕 수양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각각 기질을 변화 개선하여 탁한 기를 맑고 순수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이는 성인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그 기질을 변화시켜 성인이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의 기질은 학문, 즉 수양으로 말미암아 그 중요한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이는 사람의 수양에서 기를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황이 처음의 본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이는 처음의 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이황은 마음의 본성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주리론으로 나눌 수 있고, 이이는 본성에 초점을 두면서도 기의 수양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주기론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 구분은 가능하지만, 주리주기의 도식적인 구분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황·이이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기가 리를 은폐하는 것을 극복하고, 리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리가 올바르면 기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하는 것이 주자학의 기본적인 사고다. 이러한 사고는 이이와 이황의 공통된 기반으로, 결코 어느 한쪽만 강조하지 않는다.
다카하시는 이러한 견지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전체에까지 확장시켜, 이황의 주리론은 유성룡(柳成龍), 장흥효(張興孝), 이현일(李玄逸), 이재(李栽), 이상정(李象靖), 남한조(南漢朝), 유치명(柳致明), 이원조(李源朝)를 거쳐,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心卽理)’에서 정점을 이룬다고 했다.
한편 이이의 주기론은 김장생(金長生),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을 거쳐 임성주(任聖周)의 ‘성즉기(性卽氣)’에서 최고봉에 달한다는 것이다.
다카하시가 사단 칠정을 기준으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 나누고, 그들을 각각 주리와 주기로 파악하려고 시도한 것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낸다. 율곡학파는 주기론으로 볼 수 없다. 율곡학파는 비록 기에 대한 관심이 퇴계학파보다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기에 대한 리의 우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율곡학파를 이이의 사단 칠정론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율곡학파의 ‘최소 공배수’는 ‘사단 칠정’이 아니라, ‘기발’만을 인정하고 ‘리발’을 인정하지 않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다카하시는 사단 칠정을 내용적으로 분류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정의한다. 그는 사단과 칠정에 대한 이황의 호발설이나 이이의 혼륜설을 모두 부정한다. 이황의 경우 칠정에도 절도에 맞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기발에만 한정시키는 잘못이 있고, 이이의 경우는 사단을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이라고 인정하는데, 이는 사단에도 선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단을 세우면 칠정에서 모순을 일으키고, 칠정을 세우면 사단에서 모순을 낳아 결국 논리상 난점을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런 식으로 조선 유학은 해결할 수 없는 난점을 가지고 소모적인 당쟁을 벌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다카하시는 사단이나 칠정 모두 리발 기발을 적용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공평한 감정은 리발, 즉 이성이고, 개인적인 감정은 기발, 즉 감정이라고 한다.
또 이런 사고를 한 사상가로 정약용을 추천한다. 정약용의 사단 칠정에 관한 주장이 조선 유학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주리론은 이성에 초점을 두고 주기론은 감정에 초점을 두었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욕망과 결부되지 않는 감정 논의를 주기론으로 보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주리주기식 구분은 일본과 한국 학자들에게 계승됐다. 일본에서는 아베 요시오가 선구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아베 요시오는 ‘일선명(日鮮明)에서 주자학, 그 두 계통과 주자학의 제 특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주리·주기를 조선 유학뿐만 아니라, 일본 유학과 중국 유학을 분석하는 틀로 확대시킨다. 아베는 주희 철학을 ‘주리적 리기 철학’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주지 박학파주기파자연주의파와 체인 자득파주리파정신주의파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주기파는 기를 주로 하기 때문에 수양법에서 기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이와 같은 수양법은 일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는 기를 리의 운동법칙으로 파악하여, 사물의 법칙성을 탐구하고 외적 경험을 쌓으며 박학을 강조하는 주지주의 견해를 주기파라고 한다.
반면 주리파는 기를 움직이는 근원이 리라고 주장하며, 이 리를 체인하는 내적 경험을 통한 도덕 실천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분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주기파든 주리파든 기본적으로 도덕 실천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 실천의 강조를 단지 주리파의 고유한 특성이라 생각한 것은 잘못이다.
반면 요근래 학자 미우라 구니오(三鋪國雄)는 “주리주기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것은 이황이지만, 소위 주기파가 처음부터 학파를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니고(율곡철학은 리기이원론이다), 주기파란 주리파가 자기 반대파에 대해 폄칭한 것이다”(‘주자’ 중앙공론사)라고 하여, 다카하시의 도식론이 조선 주자학을 설명하는데 문제가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현상윤이 이미 ‘조선유학사’에서 주장했던 것이다.
미우라 구니오는 주리주기의 도식을 조선 주자학이 아니라, 중국의 역학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상수역과 의리역의 대립을 조선 주자학의 용어를 차용하여 주기파와 주리파의 대립으로 막연히 생각했지만 아직 체계를 이루지는 않았다.” (‘주자와 기와 신체’ 평범사, 1997, 150쪽)
어쨌든 일본학자들은 주리주기론을 가지고 조선 주자학을 설명하기보다는 일본유학이나 역학을 설명하는 데 쓰고 있다.
다카하시를 답습한 한국 철학자들
반면에 한국의 학자들은 다카하시의 주리주기론을 답습하여, 한국철학사를 쓰면서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한국 유학에 대한 새로운 도식을 만들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다카하시의 도식을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다카하시의 주리주기에 대해 제일 먼저 반응한 이는 박종홍이다. 박종홍은 이황의 리의 자기 촉발이 가능함을 설명하는 예로 다카하시를 들고 있고(‘박종홍전집’ 권1, 434쪽), 이황과 기대승, 이이, 기정진의 학설이 “주리와 주기의 입장 차이에서 생긴 논쟁이다”라고 하여 주리주기 도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주리론이 “주기론자처럼 리기를 대상적인 자연계에서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감성의 관계로 먼저 보았다”(‘박종홍전집’ 권4, 225쪽)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주리주기를 이성과 감정으로 보는 다카하시와 정신과 자연으로 보는 아베를 절충한 것이다.
어쨌든 박종홍은 “기왕에 일제시대에 일인 다카하시 도오루 박사가 이에 착안하여 어느 정도 연구 정리한 업적도 남겼거니와, 우리로서 좀더 철저하게 이퇴계 기고봉 시대에서 훨씬 이전으로 소급하여 조선왕조 초기 혹은 그 이전에는 이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면밀하게 알아보아 그 계통이 밝혀졌으면 좋을 줄 안다”(‘박종홍전집’ 권4, 259쪽)라고 하여, 다카하시의 주리주기론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종홍이 적극적으로 주리주기 도식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론에는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병도는 다카하시의 주리주기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이를 이황과 이이에 적용하지 않고, 이황과 서경덕에 적용한다. 주기라는 개념은 서경덕에서부터 사용해야 한다(‘徐花潭及李蓮坊에 대한 小考’, 112쪽)는 것이다. 이는 이황과 이이의 대립이 아니라 이황과 서경덕의 대립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카하시의 관점을 확대 설명한 것이다.
배종호는 ‘한국유학사’ ‘한국유학 자료집성’에서 주리주기 도식을 그대로 원용하고 있다. 주리파, 주기파, 절충파로 나눈 것은 다카하시 도식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그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를 주리주기로 나누는 방식에 회의를 품으면서도, “관용적으로 주리주기를 사용했을 뿐이다”라고 함으로써, 조선 철학사 분류방식에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윤사순은 처음으로 다카하시의 식민사관을 비판했지만, 주리주기 도식은 그대로 사용한다. 그는 성리학과 실학을 주리와 주기로 구분한다. 리는 추상적·관념적인 데 반해 기는 구체적·경험적이다. 그리하여 주리를 강조하는 쪽은 조선 말에 국권수호적 보수가 되고, 주기를 강조하는 쪽은 개방적 진보 개혁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리학 안에 주기론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성리학적 주기론이라고 부르고, 실학적 주기론과 구분했다.
“성리학적 주기설은 예나 도덕의 합리화를 꾀하는 것이나 그 사고 방식 등에 있어서 주리설과 같으며, 다른 것은 다만 리의 사고 내용을 기로 바꾸어 이해하는 것뿐”(‘한국유학사상사론’, 361쪽)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학 안에서도 주리론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이익과 안정복 정도에만 나타나며 ‘(온건한) 주리’ 혹은 ‘실제성 일상적 중시의 태도가 좀더 강조된 정도의 주리’에 지나지 않는다”(같은 책, 356쪽)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성리학적 주기론은 주리론인가 아니면 주기론인가? 그리고 실학적 주리론은 주리론인가 아니면 주기론인가? 이러한 문제를 그는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기를 단순히 경험적으로 분류하는 데서 나타나는 문제다. 전통시대에 기는 자연, 심리, 물질(제도)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조선 철학의 과제
기는 경험적인 성격도 있지만, 경험으로 파악되지 않는 점도 있다. 실학의 주기론이 모두 경험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학이 주기론이라고 한다면, 물질 혹은 제도 개혁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실학자 중에도 주리파가 있는데, 이익과 안정복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너무나 이익과 그 학파를 무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호학파는 조선의 근간이 되는 토지제도를 근본적으로 반성한 사람들이다. 토지제도에 대한 반성은 곧 리의 책임성과 연결된다. 현실이 잘못되면 곧 리의 책임이다. 이러한 사고는 이이적인 사고라기보다는 이황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한국의 학자들은 다카하시의 주리주기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리주기론은 조선 철학사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다. 주리주기를 존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폐기할 것인가, 존속시킨다면 어떠한 기준에 따르는가에 따라 철학사는 다르게 씌어질 수 있다.
기존 학계는 주리주기론을 가져다 쓰기 전에 이것이 다카하시 도오루에게서 나왔고, 그는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가를 고찰했어야만 했다. 그 일을 선행하지 않고, 전제로 한다면 그야말로 우리의 철학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주리주기론에 대한 문제제기야말로 계속되는 철학의 과제다. 철학적 진리는 합의에 의해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단 칠정으로 주리주기론을 세워서 모든 조선 유학을 설명하려는 방식은 상당한 문제점을 가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선 유학을 설명하는 것은 과도한 존재론적인 사고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사단 칠정을 리기로 환원하는 것은 리기의 존재론적인 특징만 강조하는 것이다. 리기론이 송대 철학에서 존재론적인 위상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리기론과 사단 칠정론은 인간과 우주를 좀더 실제적으로 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인간에 관심을 두지 않고, 리기론과 사단 칠정론만으로 조선 유학을 설명한다면, 단순한 관념 계산에 빠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단 칠정이 리기로 환원하는 것은 리와 기의 성분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계산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