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13일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이익단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새로 출범하는 민주노동당을 통해 적극적인 정치참여 의사를 밝힌 민주노총, 의정평가와 후원회를 통한 합법적 지원은 물론 낙선운동까지 펼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경영자총협회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 이익단체의 활발한 움직임에 대해 정치선진화의 서곡(序曲)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있는 반면 이익단체간 세력대결의 장으로 보는 부정론도 만만치 않은데…. 》
16대 총선이 노동계에 주는 의미는 크다. 이번 총선은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 및 정치자금 모금 금지 조항 등 갖가지 법적 제약이 모두 풀린 상태에서 치러지는 첫 선거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난해 우여곡절 끝에 민주노총이 합법화하면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간의 치열한 경쟁도 예상된다. 한국노총은 이번 총선을 2004년 창당을 겨냥한 ‘징검다리’로 규정하고 있고 민주노총은 1월30일 가칭 민주노동당 창당을 통한 원내 진출을 목표로 총선에 임하고 있다. 두 노총은 이번 총선이 어느 때보다 유리한 조건이라며 상당한 결실을 얻을 것으로 장담한다. 따라서 최대한의 의석 확보를 위한 총선 프로젝트 수립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데 노동계의 고민이 있다.
한국노총은 지난해 5월 ‘의석 20석 확보를 목표로 정당제휴를 통해 총선에 참여한다’는 방침을 정한 바 있다. 그러나 총선을 불과 3개월 앞둔 1월 중순 현재까지도 어느 정당과 손을 잡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조합원이 영남 호남 등에 산재해 특정 정당과 제휴를 할 경우 조직 내부에서 역풍이 불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97년 대선 때 한국노총이 당시 김대중(金大中)후보 지지를 표명하는 과정에도 영남지역 조합원들이 반발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 20석 확보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비판도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정당제휴를 포기하고 ‘반노동자 후보’에 대한 당선 및 낙선운동만 펼치는데 그칠 수도 없다. 노조의 정치활동이 보장된 국면에 스스로 활동을 제약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볼 때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조합원들의 의견을 투명하게 취합해 최대한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정당과 손을 잡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겠느냐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한국노총은 이를 위해 1월 중순 조합원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여론조사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대체적인 방향은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 관계자는 “국민회의와의 정책연합을 파기한 상황이긴 하나 그렇다고 보수적 성향인 한나라당이나 자민련과 제휴를 모색할 수도 없고 가칭 민주노동당이나 각종 개혁신당과의 제휴는 명분은 있지만 원내 진출 가능성이 의문”이라고 말했다. 새천년 민주당과의 제휴가 가장 현실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다.
한국노총 내부에선 나아가 집권여당이 한국노총을 도외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총선은 전국 단위가 아닌 지역 단위로 치러지기 때문에 대선 때처럼 노동계의 향배가 중요한 변수가 되지는 않더라도 노정갈등 형국이 계속되는 것은 집권 여당으로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새천년 민주당과의 물밑 교섭을 통해 최대한 지분을 챙기는 전략을 수립중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노총은 이와 함께 정치세력으로서 집단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 조합원 주소록을 활용. 선거인 명부 수집을 2월말까지 완료하고 총선 전까지 조합원 l인당 1000원씩 갹출해 정치자금 10억원을 마련키로 했다. 나아가 2002년 대선 때까지 총 50억원, 2004년까지 100억원의 정치자금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또 정당제휴 여부와는 별도로 당선운동과 낙선운동도 전개해 나갈 방침이다. 이를 위해 ▲친노동계 후보 ▲개혁적인 후보 ▲깨끗한 후보 ▲당선가능한 후보 ▲제휴정당 후보 등 평가 기준을 선정해 놓고 있다.
노동계 정치세력화의 원년
한국노총은 아직 총선출마 후보를 확정하지 않은 상태다. 박인상(朴仁相)위원장은 출마하지 않겠다고 여러번 밝혔으나 비례대표 케이스로 원내에 진출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박위원장의 원내 진출 문제에 대해서는 조직내부에 찬반 양론이 분분하다. 이광남(李光男)상임부위원장 이남순(李南淳)사무총장 현기환(玄伎煥)정치국장 등이 비례대표 후보 또는 지역구 출마자로 거론되는 수준이며 노총 지역본부 간부 중에 출마 희망자가 여럿 있으나 확실한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조직내부에서조차 다른 정당과 정책제휴를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팽배해 있고 각 정당에서도 노총과의 제휴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어 한국노총의 바람은 자칫 ‘그들만의 꿈’으로 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노총은 가칭 민주노동당을 통해 총선에 참여키로 방침을 정하고 후보 선정에 착수한 상태. 민주노총 위원장을 지낸 권영길(權永吉)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상임대표는 “비례대표까지 포함해 10석 안팎의 의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총선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2002년 지방선거 때 2000여명을 출마시키는 한편 ▲2002년 대선 때 10% 이상 득표해 도약기를 거친 뒤 ▲2004년 총선 때 20만 정예당원을 조직하고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다는 장기적 플랜 아래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꿈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자체 여론조사에서 나오는 민주노동당 지지도는 실제 선거에 돌입하면 결국 거품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이번 총선과 관련해 민주노동당 내부에선 ‘전면적 승부론’과 ‘전략지역 승부론’이 엇갈리고 있다. 전면적 승부론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는 것을 감안해 가능한 한 많은 지역에서 후보를 내 지역구 의원은 물론 비례대표 의원을 단 1,2석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다. 전면적 승부론자들은 “70∼100곳에 후보를 출마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전략지역 승부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후보 규모나 자금 문제 등을 감안할 때 전면출마는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잇따라 성공을 거둔 울산 등 전략지역을 선정해 집중적으로 역량을 투입, 반드시 1석 이상을 차지해 의회 진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는 것.
이런 논란은 1월 8,9일 도고온천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간부수련회와 중앙위원회에서도 반복됐다. “전국 각 지역 당원들이 당의 이름을 내걸고 적극적으로 총선에 임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많은 곳에 후보를 내야 한다” “전략지역에 후보를 내는 것이 현 조건을 반영하는 상식적인 안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성공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울산 동구에 권영길대표를 출마시켜 재벌 대표인 정몽준의원과 전면 승부를 벌이자” “의미있는 차별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울산에 집중하고 그외에 재정과 조직이 갖춰지는 곳에도 출마시키자” “중앙은 정책을 생산하고 후보 전술에 대해서는 지역 자체적으로 결정하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등등.
현재 내부 분위기는 전략지역에 적정선의 후보를 내 역량을 집중 투입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으나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도입될 경우 후보자의 적정 규모는 늘어날 가능성이 많다.
여하튼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을 통해 후보를 추천하고 전략지구에 당선가능한 후보를 책임지고 지원한다는 방침 아래 총선 후보 물색에 들어갔다. 후보자가 선정되면 민주노동당 차원에서 지역별 당원대회를 거쳐 후보로 최종 확정된다.
권영길대표와 함께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인 박순보(朴淳甫)씨가 부산 연제구에서 출마할 예정. 박씨는 92년 3만4000여표, 96년 2만6000여표를 얻은 바 있다. 이밖에 정윤광(鄭允光)전 민주노총정치위원장 이상현(李尙炫)전 민주노총조직국장 노회찬(魯會燦)매일노동뉴스발행인 등이 출마자로 거명되고 있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밀집지역인 울산 창원 안산 등 공단형 선거구와 30∼40대 개혁적 유권자가 몰려 있는 유성 일산 등 도시형 선거구에서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민주노동당 당원은 1만1000여명. 창당전까지 40개의 지구당을 조직한다는 계획이다. 또 선거자금은 당비와 노조의 출연, 후원회 등을 통해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을 바꾸자는 의견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농민 빈민 계층의 소속감을 결여시키는 등 당명이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창당을 눈앞에 둔 시점에 당명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고 조직상의 어려움은 당의 활동방식과 구조를 재검토해서 해결할 문제지 당명은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는 반론이 많다.
어쨌든 이번 총선은 명실공히 노동계 정치세력화의 원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그러나 정치세력화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은 터라 노동계가 이번 총선을 디딤돌로 보수 일변도의 한국정치에 진보정당의 뿌리를 내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정용관/동아일보 사회부기자
[ 재계 ]
지난달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건물 상임 부회장실. 조성하 비서실장은 경영자총협회가 걸어온 전화를 끊자마자 급하게 손병두(孫炳斗)부회장을 찾았다. 다음날 오전까지 가능하면 모든 일정을 뒤로 미루고 마포 경총회관에 와달라는 전갈이었다. 다른 경제단체에도 비슷하게 긴급 연락을 취한 것 같았다.
노사문제에 관한 한 재계의 입은 경총으로 통일돼 있다. 경총은 일부 여야 국회의원들이 며칠전부터 의원입법 형태로 2000년이 오기 전 노동관계법을 개정하려 한다는 징후를 여러 경로로 포착하고 있었다. 내버려 둘 경우 97년 어렵사리 확보한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시 사용주 처벌조항’은 2002년 1월 시행도 해보기 전에 휴지조각이 될 게 뻔했다.
다음날 합동 기자회견에 나선 경제단체 부회장들은 경총의 제안대로 전임자 임금문제에 대한 방침이 강겸함을 재확인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활동 참여를 공식 선언했다. 발표문을 읽은 뒤 조남홍(趙南弘)경총 부회장에게 기자들의 질문이 폭주했다.
“정치활동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정경유착이라는 비난을 살 수 있다”
조부회장은 일단 정치활동의 한계를 의정평가와 후원회를 통한 합법적 지원으로 못박았다. 그러나 경총 및 전경련 관계자들은 익명을 전제로 ‘낙선운동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임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 낙선운동을 표명하지 않더라도 국회 노동위원회 의원들의 의정평가는 곧 (물밑)낙선운동으로 치달을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미 재계 ‘블랙리스트’엔 야당 K의원 등 몇몇이 올라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경제단체의 한 해 의정평가는 이들이 발간하는 정간물, 보도자료 등을 통해 각계에 전파되고 이는 후원회 성금 등에 영향을 끼칠 소지가 높다. 전경련 관계자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원만 300만명에 가깝다”며 “의원들은 누구의 이익을 좇아야 하는지 금세 알아차릴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전임자 임금’을 둘러싼 노사 갈등은 현재 ‘접점’이 없다. 정부 중재안은 처벌조항을 삭제하되 ▲노조전임자 상한선을 두고 ▲전임자 임금지급을 쟁의대상에서 배제하는 조항을 삽입하자는 것. 이 절충안은 ‘무노동 무임금’의 대원칙을 훼손한다는 재계의 강력한 반발과, 노조전임자 상한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노동계의 저항에 직면해 있다.
재계의 으름장
‘합법’으로 포장했지만 재계가 ‘후원회를 통해’ 거사를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 선거철이면 재벌들마다 여야를 불문하고 ‘보험금’ 성격의 후원금을 내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이는 대개 물밑에서 이뤄져왔다. 의원 후원회장에서도 재계 인사들은 봉투만 내고 돌아오는 것이 상례. 기업 내부에서도 정치자금을 담당하는 임원은 최고경영자의 ‘최고 심복’으로 간주된다. 비밀유지가 중요한만큼 충복에게 일을 맡기기 때문이다. 이런 재계가 후원회를 압박수단으로 거론했다.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은 경총 공동 기자회견을 마치고 난 뒤 기자와 만나 “겁 좀 줬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체 설문조사 결과 무노동 무임금에 대한 여론은 우리편이지만 그쪽(노동계)에서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 우리도 맞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재계의 정치활동 선언은 망국적인 정경유착에 넌덜머리가 난 국민들에게 일파만파를 불러왔다. 당장 3일뒤인 12월6일 오전10시40분 전경련 회장단 회의실이 한국노총 대의원과 집행부에 점거됐다. “망국적인 정경유착, 전경련은 자폭하라”.
점거농성은 그날 오후 풀렸지만 재계의 정치활동 재개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 시작했다. 전경련 내부적으로도 정치활동 재개가 ‘서툰 작품’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유한수(兪翰樹) 전경련 전무는 “자기방어 차원의 대응이었지만 더 합리적인 대안을 찾았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그렇다고 재계의 주장이 바뀐 것은 아니다. 정치활동 재개가 노동계의 국회 압박에 대한 맞불작전이었던만큼 상대측의 주장이 바뀌지 않는 한 마찬가지 노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
경총은 한발 더 나가 12월17일 경제 5단체와 업종별 단체대표들이 참가하는 ‘경제단체협의회’내에 ‘의정평가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의평위는 매달 정기회의를 열어 의원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연 1회 ‘집중 지원할‘ 의원들을 선정, 발표한다. 낙선운동을 처벌하는 현행법 규정을 우회해 지지운동을 하겠다는 포석. 지지대상의 범위가 넓다면 여기에서 탈락한 의원들은 사실상 낙선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재계의 강경한 방침은 지난 연말에도 확인됐다. 정부측 절충안이 12월28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다음날 이번에는 노동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에 이른 것이다. 경총은 회장단회의를 열어 “‘노사 모두 중재안 통과를 바라고 있다’고 노동부가 대통령에게 왜곡 보고한 것이 틀림없다”며 이례적으로 책임자 처벌까지 요구했다. 이상용 노동부장관과 김유배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을 타깃에 올린 것이다. 만년 관(官)앞에 허리를 굽혀온 재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역공이다.
재계의 의정평가 및 후원회 차등지원 움직임은 최근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치활동 개시선언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정치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총 관계자는 “의정평가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계 움직임에 맞춰 탄력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래정/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지난해 11월23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서울올림픽공원내 체조경기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주최한 ‘전국 교육자 결의대회’에 참석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 자리는 원래 신임 교총 회장을 선출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대통령이 참석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사에 대한 선심성(?) 정책을 내놓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퇴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전국 교사는 42만3000여명으로 그 숫자를 놓고 볼 때 어느 정권도 무시할 수 없는 집단이다.
김 대통령은 이른바 교육개혁 정책에 교사들이 반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 듯 교원 연금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등 교단의 불안요인을 제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교사들의 박수 소리는 크지 않았다. 김 대통령이 퇴장한 뒤 3당 대표들의 연설에서 교사들의 불만은 더욱 노골적으로 터져나왔다. 교육정책을 비판하는 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총재의 연설에 환호를 터뜨리며 박수를 쳤던 교사들이 국민회의 이만섭(李萬燮)대표의 연설에 야유를 퍼부은 것이다.
“획기적인 교원정책 내놓아라”
올해 4·13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교사들의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치러지게 돼 이들의 향배가 정치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총선 기간에 교사들이 여권에 반대하는 집단 활동을 벌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교원단체가 교총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법적 단체로 인정받은 민주노총 산하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한국노총 산하의 한국교원노조가 등장했다. 이들 단체는 서로 선명성 경쟁을 벌이면서 회원 확보에 주력하고 있는 단계다. 이 때문에 총선과 관련된 각 교원단체의 활동과 대책은 각 단체의 활력과 영향력을 자랑하는 경연장이기도 하다. 이는 올해 총선에서 교사들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교사들은 현행 법에 의해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돼 있다. 국가공무원법 65조는 공무원은 정당이나 기타 정치단체에 가입할 수 없으며 특정 정당이나 특정인을 지지 또는 반대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공립학교뿐만 아니라 사립학교 교사들에게도 준용된다. 또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도 제3조에 교원노조는 일체의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개정된 노동관계법은 노조의 정치활동 및 정치모금 금지조항을 삭제해 노조의 정치활동을 사실상 허용했다. 노조가 특정인을 지지하거나 낙선시키는 운동을 할 수 있으며 후보를 낼 수도 있다. 교원단체들은 현재로선 법의 테두리 내에서 총선대책을 세우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치활동도 할 것으로 전망된다.
회원수 17만5000여명으로 최대 교원단체인 교총은 우선 정책활동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교총은 총선과 관련해 각 당이 교사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정책을 채택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지난해 초반까지만 해도 유일한 교원단체였던 교총은 정부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선에서 모든 활동을 조절했다. 하지만 교원노조 출범 이후 교총의 움직임은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교총은 최근 발간한 총선자료집에서 크게 21개의 교육 및 교원정책을 제시했다. 주요 정책은 ▲2003년까지 교육재정 GNP의 6%선 확보 ▲시군구 기초 단위까지 교육자치 확대 ▲교육위원 및 교육감 주민직선 ▲2003년까지 유치원 완전 무상교육 실시 ▲2002년부터 중학교 무상의무교육 실시 ▲주 5일제 수업 ▲교육행정부서의 장학직 정원 증원 ▲교무회의의 법정 심의기구화 ▲교사에게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장 선출자격 부여 ▲교원단체의 단체교섭법 제정 ▲교원정년 65세로 환원 ▲우수교원확보법 제정 ▲교원 법정정원 확보 ▲교원보수 인상 ▲교원예우법 제정 ▲교원 잡무 경감 등이다.
이들 정책과제 가운데 교원정년 환원 등은 각 당의 주장이 크게 달라 총선 기간에 쟁점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 국회에는 교원의 정년 연장에 관한 법률이 계류중이어서 2월 열릴 임시국회에서 논란을 불러 일으킬 전망이다. 특히 교원 정년 단축은 김대중 정부의 대표적인 개혁정책으로 불릴 만큼 상징성이 있어 정부와 여당은 이에 반대하고 있지만 공동 여당의 한 축인 자민련은 교원 정년을 62세에서 63세로, 신한국당은 65세로 연장할 것을 주장하고 있어 각 당의 주장이 서로 다른 사안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한국교원노조
교총은 1월 하순부터 각 정당의 중앙당을 방문해 획기적인 교원정책을 당의 공약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하고 각 지역에서는 출마자에게 지역 특색에 맞는 교원정책을 추진하라고 권유할 것으로 보인다. 교총은 총선 기간에 정부와 교섭을 강화하고 캠페인을 추진하며 현행법에 보장된 교섭권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전략이다. 교총은 또 경우에 따라 다른 시민단체와 연계해 활동한다는 복안도 지니고 있다.
전교조와 한교조는 교총보다 더욱 적극적인 정치활동 의지를 다지고 있다. 우선 이들 노조는 현행법상 교원의 정치활동은 불가능하지만 노조 차원의 정치활동은 가능하기 때문에 이 점을 충분히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물론 교육부는 교원노조는 교원노조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노동관계법 규정에 따라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고 본다. 이에 교원노조는 교육부의 법 해석이 지나치게 교원노조의 활동을 제약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5만1000여명의 노조원을 지닌 전교조는 1월말 경 총선대책을 확정할 예정이다. 전교조는 아직 올해 사업계획을 마련하지 못해 구체적인 언급을 삼가고 있지만 노조 차원의 활동은 활발히 전개한다는 기본 원칙을 갖고 있다.
전교조의 총선 활동은 크게는 민노총의 총선전략과 맞물려 있다. 민노총 산하 핵심노조인 전교조가 민노총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교조는 학교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교원노조라는 점에서 민노총 내 다른 노조와 성격이 다르다. 또 전교조는 한교조와 함께 교육부를 상대로 총선 기간에 단체교섭을 진행한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말 전교조 측에서는 학교 현장에서 전교조 분회 간판을 내걸고 노조활동을 본격적으로 벌일 수 있다는 점을 교육부에 시사하기도 했다. 현행 교원노조법은 학교 단위의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교원노조측은 노조의 조직에 관한 사항은 단체협약에서 정할 수 있으며 노조활동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맞서고 있다.
교육부는 전교조가 학교 현장에서 노조활동을 할 경우 학생들의 학습권을 내세워 국민 여론을 몰아 대응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어 총선기간에 학교 현장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이것이 정치문제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2만여명의 노조원을 지닌 한교조의 정치활동 계획은 현 단계에서 전교조보다 구체적이다. 한교조는 한국노총의 정치활동 계획에 맞춰 총선 활동을 충실히 하며 선거자금조성, 특정후보에 대한 낙선운동을 노총과 함께 벌일 계획이다. 한교조는 또 교사들의 공명선거운동은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보고 시민단체와 연계해 공명선거감시단을 조직할 계획이며 곧 총선대책반을 출범시킬 예정이다.
총선과 관련된 전교조와 한교조의 교육정책은 교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교원노조는 교장 교감 등 관리직이 포함된 조직인 교총과 달리 교원인사문제 등에서 평교사의 권한을 중시하는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 전교조는 한교조에 비해 교육정책 이외에 사회정책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교원단체가 법을 일탈할 때 정부가 보일 반응도 관심거리다. 총선기간에는 쟁점을 만들기 꺼리는 속성상 정부는 교원단체가 심각하게 법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 이들의 활동을 묵인할 가능성이 있다. 교원단체의 주장이 김대중 정부에서 소외받았다고 생각하는 교사들의 마음을 달래는 유일한 위안거리라는 점에서 이들의 활동을 억압하는 양상을 보일 경우 교사들의 ‘표심(票心)’을 얻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교원단체와는 별도로 사학재단들로 구성된 한국사립중고등학교협의회는 교원노조와 맞서 교사해임권 학생선발권 등록금자율책정권 등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 협의회는 상층부 로비에만 전력할 뿐 구체적인 행동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이밖에도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전국 국립대학 교수협의회’ ‘전국 사립대학교수협의회’ 등 많은 교원 관련 단체들이 있지만 아직은 총선에 대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준우/동아일보 사회부기자
[ 여성계 ]
시민단체들이 낡은 정치인들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여성단체들은 어느 단체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남성중심주의가 뿌리깊은 정치권에 새판을 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것.
여성계가 가장 역점을 두는 선거대책은 역시 낙선운동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성연합)을 중심으로 ‘2000총선시민연대’에 참여한 여성단체들은 공천반대 가이드라인과 리스트 작성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성연합 이경숙(李京淑)정책부장은 ▲여성관련 개혁법안에 반대하거나 비우호적인 의원 ▲여성관련 예산을 삭감했던 의원 ▲여성비하발언을 했던 의원 ▲인권침해행동을 한 의원 등이 공천반대의 기준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근거자료가 부족해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한두번 여성비하발언을 했다고 ‘반여성적’의원으로 단정해 낙선운동을 펼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여성관련 정책을 다루는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꾸준히 활동한 의원이 없는데다 이들의 발언을 담은 소위원회의 속기록도 자료로는 부실할 수 밖에 없다.
새판짜기 절호의 기회
여성계는 공천이 마무리되는대로 여론조사와 자체 평가를 거쳐 다음 단계 낙선운동에 돌입할지를 결정할 계획. 낙선운동이 결정될 경우 공천받은 이들에 대한 자료수집과 평가를 통해 낙선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한다는 방침이다. 물론 낙선운동은 ‘2000총선시민연대’와 보조를 맞춰 진행하고 개별사업도 회원단체와 힘을 합쳐 전개할 계획.
그러나 여성연대와 함께 여성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의 ‘낙선운동’에 대해 조심스럽다.여협의 권수현(權秀賢)정책실장은 “‘2000총선시민연대’가 제시하는 ‘반여성’의 기준에는 공감하지만 국가보안법철폐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회원단체간에 합의점을 도출해내기 어렵다”며 “대신 ‘후보바로알기운동’을 통해 유권자에게 후보에 대한 정보를 알려 당락에 영향을 끼치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여성계는 선거 때마다 전개해온 여성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도 적극 나서고 있다. 사실 그동안 여성의 정치참여는 남성 중심의 기존 정치권이 구색맞추기로 한두명 정도 끼워넣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독자적으로 여성 정치인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15대 국회에서 여성의원은 여야 모두 11명으로 3.7%. 유권자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 지역구의원은 3명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해 최근 ‘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가 16대 총선을 앞두고 활동을 재개했다. 여성연합의 28개 회원단체와 여협의 42개 회원단체,여성정치네트워크의 4개 소속단체 그리고 기타 7개 단체가 모인 ‘여성연대’는 선거때마다 여성의 정치참여확대를 위한 공동사업을 벌인다. ‘여성연대’는 새정치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이 정당법에 명시키로 합의한 ‘비례대표 여성 30%할당’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남녀교호순번제로 후보명단을 작성할 것을 각 당에 요구하고 있다. 특히 여협은 각 당이 그동안 ‘인물이 없어 여성후보를 내지 못한다’고 했던 점을 고려,여성후보추천 리스트를 각 당에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여성연대’는 비례대표 뿐 아니라 지역구 공천에서도 30% 이상의 여성할당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각당 공천심사위원회의 활동이 투명하게 진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해서도 정당에 국고보조금을 배분할 때 정당의 여성참여정보를 참고하도록 요구할 계획이다. 장하진(張夏眞)충남대교수는 “30% 여성할당제가 당선권내의 비례대표뿐 아니라 지역구 공천에도 적용돼야 한다”며 “준비된 여성들은 여성정치인에게 가장 어려운 관문인 정당 공천에 30%가 할당되기를 요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예 지역구 출마를 희망하고 있는 여성들을 선정해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하려는 여성정치세력 민주연대(여세연)가 최근 출범했다. 장교수가 대표로 있는 이 단체는 여성계뿐 아니라 언론계 문화계 학계 등 각계 인사가 참여하고 있는 것이 특징. 이 단체의 김영옥(金永玉)사무국장은 “여성들이 당선가능지역에서 공천받을 수 있도록 각 당에 유망 신인 50여명을 제시할 예정”이라며 “더 나아가 모금운동을 통해 지역구에 출마하는 여성후보를 금전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발기인을 모집할 때 3228명이나 몰려와 놀랐다”며 “많은 여성이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번 총선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치개혁은 여성의 손으로’
그러나 선거철이면 단체 대표들의 정계진출로 자체역량이 많이 약화됐다고 판단한 여성단체들은 ‘내부단속’에도 열심이다. 여성연합의 공동대표들은 ‘임기중’ 정계진출을 금지하는 지침에 동의했고 한국여성민우회의 공동대표들도 ‘임기중’에는 정계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더 많은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진력하겠다는 얘기다. 여성단체들의 정치교육도 활발해서 이미 교양강좌 수준을 넘어서 실전에 대비한 정치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치연맹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한국여성정치연구소 등 여성들에 대한 정치교육과 훈련에 주력하고 있는 여성단체들은 아예 ‘여성정치네트워크’를 구성해 연대활동을 펴고 있다. 여성정치네트워트는 그동안 총선출마 희망자와 참모진을 대상으로 ‘여성후보자 교육’을 실시해왔다. 여성후보뿐 아니라 남성후보들이 양성평등정책을 공약으로 삼도록 하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여성연대’를 중심으로 16대 총선대비 여성공약 우선과제 개발을 위한 워크숍이 잇따라 열리고 있으며 3월이면 구체적으로 ‘호주제 폐지 문제’등을 공약으로 삼도록 요구할 예정.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유권자들의 의식. 여성연합은 ‘여성의 손으로 정치를 확 바꾸자 뒤집자’란 주제로 여성유권자축제를 전국적으로 벌여오고 있다. 여성유권자축제를 기획한 여성연합 남인순(南仁順)사무처장은 “삶과 정치가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여성유권자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라며 “총선 전까지 지역별로 여성유권자축제 등을 펼침으로써 여성유권자의 관심을 높이고 여성들의 삶이 정책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권에 있는 국민회의 어느 지구당 조직부장(36)은 여성유권자들의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동안 여당의 ‘돈선거’에 신물이 났기 때문에 여당이 된 뒤 ‘돈선거’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돈’이 개입하지 않으면 유권자들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 한계를 느낀다”며 안타까워했다. 돈선거의 공격대상이 되기 쉬운 것이 주부임을 생각하면 여성유권자의 올바른 의식이 여성후보를 돕는 길이기도 하다. 그동안 여성후보는 ‘돈과 조직’ 때문에 남성후보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니만큼 공명선거 분위기가 여성후보의 운신폭을 넓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여성단체의 선거운동이 금지돼 있다는 점이 이와 같은 여성단체들의 움직임에 발목을 잡고 있다. 백영옥(白永玉)명지대교수는 “여성단체의 선거운동과 정치자금지원이 가능하도록 선거법 개정운동을 벌여야 한다”며 “이렇게 될 경우 여성의 정치세력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영애(李永愛)단국대교수는 “여성단체의 선거운동이 허용돼 여성후보자 개인에 대한 조직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이재경(李在京)이화여대교수도 “여성단체에 고위공무원이나 선거후보자 등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 및 공식적 통로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단체들의 선거법 개정운동은 그동안 ‘구호’에 머무른 감이 없지 않다. 이 점은 여성단체들도 인정한다. 여협의 권수현정책실장은 “할당제에 매달리다 보니 선거법개정운동에 소홀했다”고 말했고 여세연의 김영옥사무국장은 “이번에는 여성후보추천에 전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김진경/동아일보 생활부기자
역대 선거 때마다 막강한 이익단체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고 지역구든 전국구든 수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해온 대한약사회의 경우 올해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편이다.
4만5000여명의 회원을 가진 약사회는 지금까지 한약분쟁 등 첨예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국회 정부 등을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해왔고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설 등으로 시끄러웠으나 현재 특별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지 않다. 약사들이 이처럼 조용한 것은 총선에 약계의 이익을 반영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7월 의약분업 시행이라는 혁명적 변화를 목전에 두고 준비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강선원 약사회 홍보부장은 “과거와는 달리 현 김희중회장이 정치색이 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의약분업에 약사들의 생사여탈이 달려 있어 선거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고 말했다.
때문에 약계에서는 새로운 인물보다는 약사 출신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도전이 활발한 양상이다. 현재 약사 출신 의원은 전국구를 포함해 모두 5명이다. 김병태(金秉泰·국민회의), 김명섭(金明燮·국민회의), 어준선(魚浚善·자민련)의원 등 지역구 출신은 모두 재선에 도전하고 있다. 전국구인 한나라당 오양순(吳陽順)의원은 고향인 전북을 포기하고 최근 경기 고양시 일산에 조직책 신청을 낸 상태.
제몸 추스르기에 여념없는 의약계
여기에다 14대 의원을 지낸 정필근(鄭必根) 제약협회 이사장이 자민련 간판을 달고 진주갑에서 출마할 예정이며 부산에서 약국을 운영하면서 대한약사회장을 지낸 정종엽(鄭鐘燁)씨가 부산 동구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출마를 준비중이다. 약사회는 이밖에 3∼4명이 개별적으로 총선을 향해 뛰고 있지만 약사회 차원의 지원이나 공동대응 방침은 없다고 밝혔다.
대한의사협회의 사정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의협은 1월8일 열린 대의원총회에서 의약분업에 합의했던 현집행부가 불신임되고 부회장이었던 김두원(金枓元)씨가 4월 정기총회까지 임시로 회장직을 맡았다. 보수적인 단체인 의협에서 이러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도 도입 ▲병원 신용카드 사용 ▲의약분업 실시 등 의료환경이 격변하면서 ‘의사들의 몫’이 크게 줄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의사들의 위기감이 과장된 것은 아니다. 작년 말 약가인하 조치로 많은 병의원이 타격을 입은데다 약값 수입으로 병원을 꾸려오던 내과 소아과 등 동네의원은 실제로 연쇄 도산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임시 집행부는 의약분업을 앞두고 의료계의 요구사항을 강경파인 의권쟁취투쟁위원회에 일임했으며 의쟁투는 의료보험 진료수가 인상 및 의약품 분류 등 7개항을 요구하고 있다.
의쟁투 위원장인 김재정(金在正)서울시의사회장은 “의료계의 요구사항을 달성하기 위해 특별히 총선 국면을 활용할 생각은 없다”며 “현재 의사들의 주장은 국민의 건강권 보호와 교과서적 진료를 하기 위한 정당한 요구로 정치적으로 타협할 사안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의협에서는 의사출신 현직 국회의원들 외에 시도별로 10여명이 개별적으로 출마를 타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명단도 파악하지 않고 있으며 의약분업에 대한 의료계의 총력 대응 방안 때문에 이들에 대한 지원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정성희/동아일보 사회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