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휴일이 늘어야 나라가 산다

  • 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2-21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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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는 즐거움의 향유나 소박한 행복에는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게 됐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김대리가 하루 쉬려고 휴가원을 냈다. 사장이 김대리를 불렀다.사장: “김대리! 1년은 365일이지? 하루는 24시간이고, 그중 자네 근무 시간은 8시간이지? 하루 3분의 1을 근무하니, 이 말은 1년에 일하는 날이 122일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라구. 게다가 52일의 일요일과 반만 일하는 52일의 토요일을 26일로 치면 44일이 남아. 그걸 자네가 다 일하나? 밥 먹는 시간에 화장실 왔다갔다 하는 시간이 하루에 3시간은 넘어. 그것 빼면 자네가 일하는 시간은 27일이라는 소리지. 게다가 자네 여름휴가는 10일이지? 그럼 17일이 남는군. 신정, 구정, 식목일,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현충일, 제헌절, 광복절, 추석, 크리스마스 그리고 회사 창립기념일까지 노는 날이 16일이라구! 그럼 일하는 날은 딱 하루가 남아. 그런데 휴가를 내겠다구? 자네 입이 있으면 대답 좀 해보게….”

    김대리: “사장님, 전 너무 피곤해요. 이유를 말씀 드리죠. 우리나라 4500만 인구 중 2500만은 퇴직했거나 노인들이죠. 2000만이 일하고 있는 겁니다. 그중에서 1600만은 학생이거나 어린이죠. 400만이 일하고 있는 거죠. 100만명이 국방을 위해 군에 가있거나 지역을 지키고, 또다른 100만명은 국가 공무원입니다. 그럼 200만이 남는 거죠. 180만명이 정치를 하거나 지자체 공무원이구요. 20만명이 일을 한다는 말이죠. 18만8000명이 병원에 누워있으니 1만2000명이 남습니다. 그리고 1만1998명이 감옥에 가있으니까 결국 2명이 일을 하는 셈인데, 바로 사장님과 저. 게다가 사장님은 제가 한 일에 결재만 하시고요. 더 말 할 필요도 없이 제가 얼마나 피로한지 아시겠죠? 모든 일을 죄다 저 혼자 하고 있답니다.”

    사장: ???

    ‘망할 놈의 주식 회사(http://galaxy. channeli.net/quad)’라는 웹사이트에서 퍼온 ‘샐러리맨 유머’ 중 한 토막이다. 원래는 ‘부장’으로 돼 있는 것을 ‘사장’으로 바꾸어보았다. 어차피 부장도 월급 받고 일 하는 거야 대리와 마찬가지일 테니까. 한번 웃고 넘어가기에는 유머의 뒷맛이 너무 씁쓸하다. 한 회사에서 일하는 두 사람의 계산법이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실제로 노동에 대한 사용자와 노동자의 생각은 유머의 세계에서만큼이나 큰 차이를 보인다.

    노동시간 단축 3년째 제자리뛰기



    벌써 옛날 얘기처럼 들리지만 98년 11월 온 국민이 추운 IMF겨울을 ‘악’으로 버티던 시절 노사정위원회에서 대표자들이 모여 ‘노동시간 단축’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김소영(노사정위 책임전문위원, 이하 직함은 당시 기준임): 노동시간 단축은 우리사회가 달성해야 할 목표다. 현재 상황이 노동시간 단축을 논의할 시점인가 하는 의구심이 있으나, 생산성 향상을 수반한 노동시간 단축은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생각한다.

    이정식(한국노총 기획조정국장): 고용유지 및 창출을 위한 패러다임 전환으로 임금삭감 없는 주 40시간(법정기준근로시간)으로 가야 하며 노사의 부담을 분배하기 위해 ‘노동시간단축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윤우현(민주노총 정책국장): 우리나라 노동자의 실노동시간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장시간이어서 재해발생률이 높은 원인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경제위기 하에서 실업대책으로도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절실하다. 법정근로시간을 주40시간으로 단축하되 임금삭감은 없어야 하며, 실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본급 비중 확대, 연장근로시간 제한, 휴일·휴가 확대, 교대제 변경 등의 장치가 필요하다.

    김영배(경총 상무): 경제위기 이후 우리나라 기업의 과잉인력이 20%를 넘고 있어, 노동시간 단축을 전제로 한 노동자의 고용보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총노동시간은 휴가일수를 감안할 때 과도하지 않고, 실노동시간도 빠르게 단축되고 있어 현시점에서 노동시간 단축 논의는 시기상조다. 오히려 할증임금제도 개선, 탄력적 근로시간제 도입, 휴일·휴가제도 개선 등 전반적인 제도 개선을 해야 한다.

    이 토론의 쟁점은 크게 4가지였다. 첫째 노동시간 단축을 논의하기에 적절한 시점인가 아닌가, 둘째 지금의 노동시간은 과도한가 아닌가, 셋째 노동시간 감축이 고용창출 효과가 있는가 없는가, 넷째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은 가능한가 아닌가(이는 노동시간 단축에 따르는 생산성 향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용자측 주장을 정리하면 하필 IMF 위기 상황에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하느냐는 불만이고, 노동계는 고용창출 효과까지 생각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적기라며 팽팽히 맞섰다. 문제는 이런 식의 논의가 2000년이 된 지금까지도 제자리뛰기만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말 ‘한겨레21’이 마련한 노사정 3자 토론회를 보자. 이 자리에는 민주노총 허영구 부위원장, 경총의 김영배 상무, 노사정위 이목희 사무처장이 참석했다.

    허영구: 우리나라는 OECD 주요국가에 비해 연간 1000시간 이상 노동을 하고 있다. 또 실직자와 일자리를 공유하고 기존 노동자의 해고를 막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

    김영배: 사용자쪽도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충분한 휴식과 휴가가 필요하다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노동시간 단축이 빨리 이뤄질 경우 경제에 부담이 된다는 점이다. …겨우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상황에 법정근로시간을 단축해야만 하는가.

    이목희: 선진국 기준으로 하면 우리의 노동시간은 엄청 길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그리 길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처한 경제·사회적 조건과 노동자의 삶의 질, 미래지향적 비전 등을 놓고 볼 때 노동시간은 단축돼야 한다. 지금은 단축속도와 폭을 협의하기 시작할 시점이라고 본다.

    주5일 근무는 쟁취대상이 아니다

    98년은 IMF위기 상황이어서, 99년은 IMF위기를 막 빠져나오는 상황이어서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시기상조라고 하는 사용자측의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2000년에는 또 어떤 이유를 대며 시기상조라고 할지…. 한편 애초 IMF 상황에서 실업대책의 하나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주장해 온 노동계가,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 ‘삶의 질’ 과 기존 노동자들의 실업을 막기 위해서라며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는 것 역시 사용자가 보기에는 말바꾸기 같을 것이다. 양측을 절묘하게 오가는 노사정위 역시 발전적 논의를 이끌어가기에 역부족이다.

    이 논의가 3년째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에 대해 이화여대 법대 이철수 교수는 “노사가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정확한 실태조사 없이 양쪽이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인식의 차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독일의 법정근로시간은 48시간이지만, 실제로는 사업장마다 단체협상을 통해 35시간 미만으로 일한다. 그런데 사용자측은 법전을 기준으로 “독일도 48시간 아니냐”고 말하고, 노동계는 실질근로시간으로 따지자고 응수한다. 또 사용자는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를 비교대상으로 삼고, 노동계는 OECD 국가를 비교 대상으로 삼으니 양자간에 발전적인 대화가 될 리 없다.

    이교수는 ‘휴일·휴가제도에 관한 연구’ 논문 결론 부분에서 “무엇보다 각 나라의 제도에 관한 종합적인 실태조사(grand survey)가 선행돼야 한다. 휴일·휴가제도를 법률로 보장한 나라가 대부분이지만, 영국 미국과 같이 단체협약을 통해 보장하는 경우, 법률상으로 보장된 국가 중에서도 단체협약을 통해 휴일·휴가를 늘리는 경우가 있는 등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에 단순히 법조문만 갖고 비교하면 정확한 사실을 포착하기 힘들다. 경영계와 노동계가 제시하는 통계치가 엇갈리는 것도 이해 못할 바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국제기업전략연구소 윤은기 대표는 현재의 노사관계는 정면충돌을 앞둔 열차처럼 위태롭다고 말한다.

    “양대노총이 기자회견을 하고 주5일 근무제를 쟁취하기 위해 총력투쟁하겠다고 하는데 이런 발상으로는 노사 모두 망해요. 21세기에는 삶의 질을 확보하기 위해 주5일 근무제로 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이것을 놓고 경영자들은 곤란하다,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노동자는 총력투쟁으로 쟁취하겠다고 하니 말이 안 되죠. 왜 때가 아닙니까? 노동시간을 연장할수록 생산성이 떨어지고 재해의 원인이 되며, 반대로 노동시간을 줄이면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지금은 주5일 근무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질 때가 아니라 경영자들도 하루 더 노는 게 손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주5일 근무제로 간다는 전제하에 노사가 협력해야 합니다. 노동자는 생산성을 높이고, 경영자는 거기서 얻은 이익과 잉여시간을 노동자에게 돌려주는 신뢰관계를 회복하는 것부터 해야합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한국 노동자들의 장시간 근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표1). 우리나라 연간 노동시간은 2434시간(97년 기준, 10인 이상 사업체의 상용 노동자. 99년에는 2452시간으로 추정)에 달한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 국가와 비교해 연간 900~1000시간 이상 일을 하고 있고, 선진국 가운데 노동시간이 긴 편인 미국 일본, 우리와 경제수준이 비슷한 멕시코 스페인과 비교해도 400~700시간 더 일한다.

    게다가 노동부가 발표하는 10인 이상 상용노동자의 노동시간은 노동계로부터 실제보다 낮게 잡혀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사업체를 대상으로 하는 조사이기 때문에 초과근로 법정 상한선(주 12시간)을 넘어서는 곳의 실태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체 취업자(자영업자, 무급 가족종사, 임시직, 일용직 등 포함) 기준으로 보면 연간 노동시간은 2673시간(97년 기준)으로 늘어난다.

    연간 휴일·휴가 일수(표2)를 비교해도 한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너무 짧고, 그나마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이철수 교수의 조사를 보면, 98년 한국인의 평균 휴무일수(법정공휴일, 주휴일, 연월차휴가는 평균 26일로 함)는 총 96일인데 사용일수는 76.8(89%)일에 불과했다. 법정공휴일이나 주휴일에 모두 쉰 것으로 했을 때 연월차유급휴가는 26일 중 7일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고 있다.

    세계관광기구에서도 지난해 재미있는 통계를 발표했다. 한국은 명목 휴가일수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 3위(조사대상은 세계관광 소비의 73%를 차지하는 상위 18개 국가)인데, 실질휴가는 중국·미국·싱가포르·일본에 이어 말레이시아와 함께 적게 쓰는 순위 5위여서 명목과 현실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전체 휴일·휴가에서 주휴일(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한 것. 대부분의 선진국이 주5일 근무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일요휴무만 인정하는 우리나라에 비해 52일 가량 주휴일이 많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명목상의 휴일도 선진국에 비해 절대 부족한 상태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연간 1800시간(97년 기준 1891시간)을 목표로 정부가 앞장서 단계적으로 노동시간을 단축시켰으며, 일본의 사용자 단체인 일경련도 이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2002년부터는 학교에서도 토요일 수업을 전면 폐지할 예정이어서 전 사회가 ‘인간다운 삶’을 목표로 주5일제를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에서의 노동시간 단축논의는 IMF위기 상황에 실직자에게 ‘목숨’과도 같은 일자리를 나눠주자는 지극히 실용적이고 절박한 노동자들의 요구로 시작됐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이 기업의 신규고용을 유발하리라는 노동계의 기대는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 같다.

    “법정근로시간을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인다고 해서 실질노동시간이 줄어들지 않는 한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기업 쪽에서는 신규 근로자를 채용하는 것보다 연장근로수당을 주고 기존 숙련된 근로자를 이용하는 게 훨씬 유리하니까요. 신규채용과 해고비용, 교육기간까지 고려해야 하니까요. 또 워크셰어링(Work-sharing:시간 분할제)을 통해 사양산업에서 떠나려는 사람들을 자꾸 묶어두면 당장은 사회적 통합이나 고통분담 차원에서 의미가 있겠지만 경제구조조정을 저해하고, 나중에 호황기가 왔을 때는 오히려 노동의 기회를 줄이는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기업은 추가로 고용할 여력이 생겨도 향후 다가올지도 모를 불황기를 대비해 적게 충원하려 할테니까요.”

    한국개발연구원의 유경준 연구위원은 최근 OECD 국가에서 발표되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과 고용창출효과 연구를 보면 지금까지는 고용창출 효과는 미미하거나 고용유지효과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노동계가 계속 고용창출효과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여가를 확보해 삶의 질을 높이고, 생산성을 높여 그 증가분이 노동자에게 환원될 수 있는 노동시간단축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 이 시점에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쉬지 않으면 바보 된다

    왜 한국 사람들은 덜 일하고, 좀더 많이 쉬어야 하는가. 노동시간단축과 생산성의 관계를 설명하기 전에 ‘잠’에 관한 재미있는 실험결과를 살펴보자.

    캐나다 브리티시 칼럼비아 대학 심리학 교수인 스탠리 코렌이 ‘잠을 줄이는 법’을 연구했다. 일을 너무 사랑했던 그는 매일 밤 8시간씩 잠으로 낭비하는 것이 아까워 수면시간을 5시간으로 줄이기로 결심했다. 대신 매일 3시간씩 벌면, 일주일에는 21시간, 1년에 1092시간(8시간 기준 근무일수로 치면 136일), 10년 뒤에는 일할 시간을 거의 4년이나 더 가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렇게 얻은 시간에 책을 더 쓰고, 더 많은 연구를 하고,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떴다.

    방법은 첫주에 30분, 다음주에 30분 하는 식으로 6주에 걸쳐 단계적으로 3시간을 줄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매일 상황변화를 기록했다.

    1주 목요일 : 내 옷이 실제보다 몇 파운드 더 무겁게 느껴지는 정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2주 수요일 :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자명종이 꼭 필요하게 됐다.

    4주 금요일 : 내가 소집한 모임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부랴부랴 모임에 가서도 왜 내가 이 모임을 소집했는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5주 목요일 : 정말 당황스럽다. 나는 세미나 도중, 그것도 내가 굉장히 관심을 갖고 있는 발표를 듣던 중 잠이 들었다. 누군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코를 골았던 모양이다.

    6주 목요일 : 사람들은 내가 우울하고 무덤덤해 보인다고 말한다.

    7주 월요일 : 아침에 숙취상태인 것처럼 일어나기 힘들었다. 내 사무실로 가면서 예전 사무실이 있던 건물 현관에서 3,4분동안 멍청하게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냈다.

    7주 수요일 : 오늘 밤으로 잠 줄이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현재 나는 난독증에 걸려있다. 자동응답기에 남긴 전화번호를 몇 차례나 잘못 옮겨적었다. 운전을 하다가 졸고, 뒤차가 경적을 울렸을 때야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스탠리 코렌의 ‘잠도둑들’ 1998)

    코렌 교수가 이 실험에서 내린 결론은 “잠을 줄이면 바보가 된다”였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노동윤리는 가능한 한 수면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잠을 자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트럭, 자동차, 비행기, 기차의 운전대에 졸린 사람들이 앉아 있다. 졸려서 비틀거리는 투자관리자가 당신의 평생 저축을 좌우할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 해마다 잠과 관련된 실책과 사고가 미국에서만 56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가져오고 있으며 거의 2만5000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사고로 인한 장애에 빠뜨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서 ‘잠’을 ‘휴식’으로 바꾸면 곧바로 장시간근로 산재왕국 한국이 나타난다. 민주노총의 주진우 정책국장은 “한국이 산재왕국(98년 국제노동기구 자료를 보면 1만명 당 산재사망자가 3.33명으로 미국의 67배, 일본의 33배, 프랑스 6배, 독일의 4배에 이름. 태국보다도 2배나 많은 수치다)이 된 것도 장시간 노동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말한다. 특히 산재가 주로 마지막 노동시간대(대개 연장근로)에 발생한다는 것도 이미 사례연구를 통해 밝혀져 있다.

    반면 충분한 여가는 신경쇠약과 피로와 소화불량 대신 인생의 행복과 환희를 가져다 준다고 버트런드 러셀은 말했다.

    “만약 누구나 하루 4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것이다. 따라서 여가에 지쳐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사람들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오락거리들(스포츠를 보고, TV를 보는 등 도시인들이 즐기는 수동적인 오락)만 찾진 않을 것이다. 적어도 1%는, 직업상의 일에 써버리지 않은 시간을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데 바칠 것이다.”

    실제로 노동시간단축이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다는 연구도 있다. 노동계에서 자주 인용하는 일본 노동성의 ‘노동시간백서’(91년)를 보면 “노동시간단축은 경영개선, 노동시간관리의 합리적 개선, 노동자의 의욕 향상 등을 유발한다. 노동시간과 출근일수를 1% 줄이면 생산성은 3.77% 향상된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서는 96년 1·4분기 노동생산성(생산액을 노동시간과 근로자수로 나눈 것)이 1년 전에 비해 10.9%로 크게 오른 적이 있다. 원인은 노동시간단축. 특히 경기 흐름에 민감한 연장근로시간이 업종에 따라 월평균 2.2~3.1시간씩 줄어들자 오히려 생산성이 올라가는 현상을 보였다.

    휴가 대신 돈, 연월차수당의 함정

    지금까지의 주장이나 사례로 보면 노동시간 단축 논의는 노동계의 판정승이다. 사용자측은 시기를 놓고 “단축속도가 너무 빨라 부담스럽다”고 할 뿐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의의 타당성 자체를 부인하지는 못했다(주 40시간으로 단축하는 문제는 이미 98년 6월 노사정위에서 ‘그 방안을 논의한다’고 합의했다).

    학자들은 노사가 쟁점 싸움만 계속할 게 아니라, 무역과 노동을 연계시키는 ‘블루라운드(EU국가들이 중심이 되어 무역과 각국의 기본 노동권을 연계시키자는 움직임)’에 대비해, 지금부터 세계적 추세에 맞게 실질노동시간의 단축에 힘써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 예로 독일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장시간 노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자 유럽국가들이 공정한 경쟁을 위해 노동시간을 단축하라는 압력을 넣어 실노동시간을 30시간대로 줄였다. 일본 역시 주변국가의 압력으로 노동시간을 줄여나가고 있다.

    그러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원칙에는 동의하면서도 사용자측이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노동계가 이것을 임금보전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 때문이다. 즉 일량은 변하지 않은 상황에 법정근로시간을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이면 노동자들은 주어진 시간내에 열심히 일해 생산성을 높이고 4시간의 여가를 갖는 게 아니라, 40시간에 기초한 연장근로수단만 더 받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하는 것이 한국 특유의 ‘연월차수당’ 제도. 월차는 매월 하루씩 계산해 1년에 12일이고, 1년 이상 계속근무를 하면 연차 10일을 합해 22일의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 특이한 것은 근속일수가 늘어날수록 가산점이 있다는 것. 한 직장에 평균 5~6년 근무한다고 했을 때 연월차 휴가는 25~26일이 되므로 제대로 찾아 쓴다면 거의 한 달을 쉴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연월차를 휴가가 아닌 임금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연월차는 휴가가 아니라 놀지 않고 일하면 근속연수가 많은 사람일수록 많은 임금을 가져갈 수 있는 사유가 됐죠. 그래서 사람들은 법대로 휴가를 쓰기보다 30일 가까운 휴가를 일주일만 쓰고 나머지는 돈으로 받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사용자측으로서는 인건비 부담이 늘고, 근로자는 과로해 가면서 대신 돈으로 받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제 과로하면서도 과로라고 못 느껴요. 고작 일주일 쉬고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법정근로시간을 줄이거나 휴가를 늘리자고 주장하기 전에 정말 쉬는 게 목적이라면 현재 법이 허용하는 휴가만이라도 제대로 쓰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철수 교수는 이미 근로자들이 휴가 대신 연말에 몰아서 받는 연월차수당이라는 ‘목돈’에 길들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된 데는 쉬고 싶어도 쉴 수 없게 만드는 저임금 구조와 휴가를 사용하는 데 눈치가 보이는 기업풍토가 원인이 된다. 우리와 사정이 비슷한 일본의 경우 한때 노동법에 “휴가를 쓴다고 해서 근로자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뒤집어 보면 “그동안 휴가를 쓰면 괘씸죄로 불이익을 줬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와 자료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국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

    ●노동시간 단축은 고용창출 효과가 있다 (△) -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이 생산성을 높인다(○) - 이것은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노동시간 단축은 시기상조다 (X)

    행정자치부의 허명환 서기관이 쓴 ‘강제퇴근’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일과 여가’에 대한 미국인과 한국인의 의식 차를 읽을 수 있다.

    일리노이주 정부에서 ‘흑인 고아문제’ 해결을 위해 관련 목사와 전문가들을 불러 세미나를 개최하기로 했다. 세미나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다면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저녁 7시에 개최하는 세미나를 누가 맡아서 준비하고 진행할 것이냐였다. 주공무원의 퇴근시간은 5시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연방 정부, 주 정부, 시군 정부에서 전 공무원이 진지하게 토론을 하며 끙끙거렸다. 특근수당을 더 주자, 임시직을 구하자, 예산확보가 되겠는가 등등…. 별나라 이야기 같았다. 우리나라였으면 당연히 해당과 직원들이 모두 남아 일을 하고, 일 끝나면 소주 한 잔 걸치고는 ‘오늘 정말 보람있는 일 했다’면서 퇴근할 일인데, 뭐가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이들에게 한국에서는 93년 최형우 장관이 내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후 공무원 근무행태 개혁의 일환으로 정시 퇴근, 연가 20일 확행, 일요일 근무 지양 등을 개혁과제로 내세우고, 장관이 6시만 되면 복도를 돌아다니면서 퇴근 안 하는 공무원에게 빨리 퇴근하라고 호통을 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대해 미국 공무원들의 반응은, 일국의 장관이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란다. 퇴근시간 되면 모두 나가고, 일요일은 쉬고, 휴가도 가는 것이지, 당연한 일을 장관이 챙기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얘기다. (허명환 ‘관료가 바뀌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

    최장관의 ‘강제퇴근’ 해프닝은, 한두 시간 연장근무는 필수고, 일요근무도 마다 하지 않으며, 연월차 휴가는 그저 일주일 정도 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허서기관은 미국인의 노동경제학은 철저하게 하루 24시간을 근로와 여가로 양분한다고 말한다. 노동시간은 임금으로 되돌아오고, 여가는 돈벌기를 포기하는 대신 개인생활을 하는 데 쓴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들은 여가를 단순히 ‘논다’는 개념이 아니라 임금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한다.

    반면 한국의 기업풍토는 일단 경영자나 관리자부터 휴가 사용에 인색하고 부정적이다. 아더앤더슨코리아의 이충노 부장은 변화를 위해서는 경영자와 노동자의 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관리자 중에 상습적으로 ‘나는 입사 이래 휴가 가본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들은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면서 남에게도 은근히 강요하죠. 직원이 휴가를 내면 농담조라도 ‘휴가 간다면서? 일이 별로 없는 모양이지?’ 라고 빈정거립니다. 오후 4~5시가 돼서야 업무를 지시하고 무조건 오래 잡아두면 일이 되는 걸로 압니다. 성과측정 수단이 없으니 근태관리로 통제할 수밖에 없죠.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노동자들 또한 노동시간에만 집착하고 근로윤리도 희박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1일 표준 노동시간 중에서 정말 일하는 시간은 50%도 안 될 겁니다. 업무시간 중 치과에 다녀온다, 집을 보러 다닌다 하면서 사적인 일을 하고도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풍토죠. 우리 회사를 예로 들면 휴가계산을 시간 단위로 하기 때문에 매우 합리적입니다. 개인업무를 보려면 1시간짜리 휴가를 내는 거죠. 그러면 앞으로 휴가는 ‘18일 22시간 남았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윤은기씨는 일과 휴식에 대한 개념은 사회의 성숙에 따라 변화한다고 한다.

    “제가 공군장교를 마치고 처음 종합무역회사에 입사하니까 무역상사는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무슨 뜻인가 했더니 매일 야근하라는 말이에요. 별도 지시가 없으면 일요일은 정상출근이고, 오후 3시에 결혼하는 사원이 오전 근무를 마치고 식장에 갔죠. 그때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렇게 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요. 오히려 일요일에 나와 일하니 수당 받아서 좋고, 회사 돈으로 점심 먹으니 좋고, 집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는데 아내 눈치 안 봐도 되니 좋다고 생각했죠.

    만약 요즘 그렇게 일을 강요하면 회사 그만두겠다고 할 겁니다. 과거에는 노동시간의 양이 생산량을 결정했지만 이제는 시간의 질, 즉 시간에 어떤 성과를 냈느냐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몇 시간 일했느냐는 의미가 없어졌어요.”

    내 안의 적, 성공신화

    ●미국 노동자의 42%는 하루가 끝나면 ‘기진맥진’함을 느낀다.

    ●69%는 좀더 편안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30년 전보다 40% 줄어들었다.

    ●최근 20년 동안, 1인당 소비 증가는 45%에 이르지만, 사회건강지수에 나타난 삶의 질은 51% 감소했다. (찰스 핸디의 ‘헝그리 정신’)

    영국의 경제평론가인 찰스 핸디는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 전문가와 경영자들의 ‘일중독’에 주목했다. 이들은 시간으로 관리되는 생산직 노동자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일에 얽매여 있다. 영국 정신노동자들은 36%가 일주일에 48시간 이상 일하며 그들은 자유의지로 일하고 있으므로, 법정근로시간 따위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지만 93년 영국경영협회가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77%가 일로 스트레스를 느끼며, 77%는 가족관계를, 74%는 배우자 관계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일단 쉬거나 미끄러지면 영원히 패배하고 말 거라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페달을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핸디는 “생산성이 사회의 존속을 위해 필수적이라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생산성과 그가 속한 경제모델은 고차원의 굶주림, 즉 삶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고 경고했지만 그의 지적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직 소수다.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각각 1966, 1731시간에 불과한 미국과 영국이 이 정도라면 ‘일 권하는’ 한국사회의 실상은 더욱 심각하다. 아주 조금만 쉬고, 너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성공신화’가 이 나라 전체에 만연해 있다.

    “벤처기업 사장 ○○○씨. 그의 하루는 아침 8시 사무실 잠자리를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조간신문의 관련 기사를 꼼꼼히 훑어보고나면 9시반께가 된다. 이때부터 울려오는 전화벨소리. 보통 사람들의 일과가 끝나는 저녁 6~7시가 돼도 숨 돌릴 틈이 없다. 이때부터 사업기획, 사내팀별토론, 서류작업 등 회사 내부의 일처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토론을 하다 자정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이젠 퇴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중요한 시간이다. 각종 보고서 점검, 전자우편을 체크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과에 대한 되새김까지 하고 나면 새벽 3~4시. 이때가 그의 퇴근시간이다. 주말이라고 쉴 수 있을까?”(한겨레)

    매스컴은 이와같은 ‘노동 예찬’을 통해 새로운 성공신화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에게는 은근히 ‘좀 더 오래 좀더 열심히 일하라’고 부추긴다. 여성들도 이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화과학’ 99년 겨울호에 신경아씨(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상임연구위원)는 이처럼 무자비할 정도의 장시간 노동체제를 숭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가정생활까지 꾸려나가야 하는 여성노동자들은 작은 성공을 위해 큰 희생을 치르고 있다고 말한다.

    “근무시간은 9시반에서 5시반이지만 책임자는 9시까지 와야 돼요. 보통 8시반에 와서 6시에 퇴근해요. 관리자는 오티(연장근로수당)도 안 주게 돼있어요…. 주위에서 책임자 직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희생을 거친 사람들이에요. 시간적으로 투자해야 돼요. 출퇴근 시간 지키고 중요한 것은 가정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그만두게 되는 거예요.”(정영애의 ‘생산중심적 조직내의 성별관계’)

    강내희 교수(중앙대 영문과)는 지난해 우리사회에 유행처럼 번진 ‘신지식인 담론’도 따지고 보면 생산성 증대를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은, 즐겁게 자기 착취를 하는 인물형을 바람직한 상으로 내세우는 지배담론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강수돌 교수(고려대 경영학과)도 “처음에는 정말로 일에 흠뻑 빠져 일을 즐기다보면, 주변의 응원(성실하고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에 나도 모르게 더 몰입하게 되고 어느날 ‘과로사’의 위기에 빠지는 것이 일중독증”이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성공신화’를 만들기 위해 쓰러지는 순간까지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실제로 지난해 성공가도를 달리던 30대 은행 지점장이 “나는 은행만을 위해 일한 결과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은 ‘일 권하는 한국사회’가 몰고온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는 유서에 “사랑하는 당신,그리고 ○○,○○야,미안하다.미안하다.하지만 아빠는 최선을 다했다.바보같은 아빠의 삶을 살지 마라.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썼다. 최선을 다했는데 왜 그는 바보같은 삶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가족에게는 무엇이 그리도 미안했을까.

    개미의 비극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게으른 자, 놀기 좋아하는 자에게 가혹한 저주를 퍼붓는다. 하지만 현실은 여름철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개미에게 안락한 집과 풍성한 양식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역설은 ‘노역에 시달려 디스크에 걸린 개미와 최신 곡이 떠서 잘 나가는 베짱이’이다(강내희 ‘노동거부의 사상’). 일중독자에게는 억울한 일이지만 그것이 더 현실에 가깝다. IMF 상황에서 퇴출된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맹목적으로 매달려온 노동으로부터 배신을 당했다.

    고병권씨(연구공간 ‘너머’회원)는 ‘노동거부의 정치학’에서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노동으로부터 은퇴한 개미들의 비극을 이렇게 설명했다

    “개미는 베짱이가 놀 때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지금 놀 수도 있으나 또한 그것을 억제할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인내가 수고로운 삶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내력과 금욕의지, 그것은 내게 있는 것이고 베짱이에게 결여된 것이다’라고. 그러나 노동을 하지 못하게 된 개미는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나서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수행하던 ‘노동’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 ‘내일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휴식’을 위해 ‘오늘 열심히 일하고자’ 했던 개미의 믿음은 ‘내일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 ‘오늘 푹 쉬어야 하는’ 현실의 삶과 도치돼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강수돌 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젊을 때 일하고 늙어서 인생을 즐기기는 꿈에 불과하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일하는 시간과 인생을 즐기는 시간을 우리의 시간표에서 주중과 주말 또는 직장생활과 정년 이후 생활 등으로 분리하여 진정한 삶의 시간을 자꾸 뒤로 ‘유보’할 게 아니라, 일상적 노동생활의 하루하루를 ‘일하는 동시에 삶을 음미하며 사는’ 것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강수돌 ‘작은 풍요’)

    그는 삶의 질 차원에서 반드시 확보돼야 하는 4가지 요소로 ‘인격(인간의 존엄성), 건강, 공동체(더불어 살기), 생태계의 건강성, 삶의 여유’를 꼽았다.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생산성을 위해 이 4가지 요소를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이것이야말로 삶의 질을 위해 버려야 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또 현대인의 ‘일 중독증’을 치료하려면 먼저 솔직하게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투쟁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라는 내면을 향한 물음이다. 찰스 핸디의 말처럼 인간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왜 사는가’라는 ‘고차원적인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강교수는 노동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열 번 설명하는 것보다 이야기 한 편이 훨신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들려준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부 이야기.

    어느 조용하고 아늑한 어촌의 아침. 햇빛이 내리쬐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고기잡이 노인이 평화롭게 단잠을 자고 있었다. 휴양을 온 한 관광객이 바닷가를 거닐다 노인의 잠자는 모습을 보게 됐다….

    “할아버지는 고기 잡으러 나가지 않으세요? 벌써 해가 저만치….”

    “벌써 새벽녘에 한 번 다녀왔구먼.”

    “아, 그러세요. 그러면 또 한 번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 뭐하게?”

    “…참, 할아버지두, 고기 많이 잡으면 저 낡은 거룻배를 새걸로 바꾸실 수 있잖아요.”

    “그래가지고?”

    “새 거룻배로 고기를 잡으시면 훨신 빨리, 한결 많이….”

    “음… 그 다음에는?”

    “그야, 크고 좋은 배를 몇 척 더 사시고, 사람도 많이 부리고…. 돈 버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니겠습니까?”

    “옳거니, 그래서는?”

    “…이 마을에 생선가공공장도 세워 싱싱한 통조림도….”

    “음, 그리고나서는?”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께서는 아무일도 안하고 가만히 누워, 그저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지요.”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잘 지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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