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협상 고비마다 정주영의 기지가 번뜩였다”

  • 심규선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입력2006-12-27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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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증권 고문인 박정두(朴正斗)씨로부터 ‘명예회장님이 꼭 금강산을 개발하고 싶다 하시니 중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받은 것은 1997년 초가을이었다.” 규슈대학의 고바야시 게이지(小林慶二·65) 교수는 이렇게 해서 현대로부터 교섭의 전권(全權)을 위임받아 북한의 김용순 비서와 접촉을 시작했다. 이어 베이징에서 현대와 북한의 첫번째 회합을 성사시키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북한 방문에 동승해 교섭 전과정을 지켜보는 등 현대와 북한의 접촉 채널로 활약했다.

    기자 출신인 고바야시 교수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1961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해 ‘세이부(西部)’ 본사 경제부와 ‘아사히저널’ 편집부를 거쳤다. 1976년 이집트 카이로 지국장을 마치고 귀국 후 아사히신문 외보부 차장(구주 담당)으로 일하던 중 81년 10월 갑자기 서울 지국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김대중씨에 대한 보도문제로 서울지국을 일시 폐쇄당했다가 다시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차장급에서 후임자를 내기로 하고 한국어도 모르고 한반도 정세에도 밝지 못한 고바야시 차장을 “단기간, 반년이라도 좋으니”라며 서울지국장으로 보냈다.

    부임 후 그가 처음 한 일은 동교동을 다니는 것이었다. 이희호 여사로부터 김대중씨의 옥중 상황을 들으며 동교동으로 온 옥중서한 복사본을 얻어냈다. 편지 복사본은 믿을 수 있는 친구를 통해 몰래 도쿄로 보냈다. 편지는 1982년 1월 김대중씨의 대법원 판결 1주년을 맞아 아사히신문에 게재됐다. 그날로 고바야시 지국장은 문화공보부로 소환됐다. “이미 정치생명이 끝난 3김에 대해 쓰는 것이 이상하다. 계속 쓰면 심한 일(국외추방을 시사)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는 한국에서의 첫 여행지로 광주와 목포를 선택했다. 현지에서 김대중씨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확인한 고바야시는 “전라도가 존재하는 한 김대중씨의 정치생명은 살아 있다. 정치생명이 있는 한 김대중씨에 대한 기사는 계속 쓰겠다”고 문공부에 통보했다.

    김영삼씨와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초여름, 일본 대사관에서 열린 파티에서였다. 김영삼씨는 며칠 전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전두환 정권을 혹평했기 때문에 주목받고 있었다. 일주일 후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김영삼씨는 자택연금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김영삼씨에 관한 보도는 금지돼 있었고 일본 매스컴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고바야시는 될 수 있는 한 김영삼씨의 동정을 자세히 전하려고 노력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사히신문 기사는 영어, 한국어로 번역돼 세계 각국으로 전해졌다.

    고바야시 기자의 이런 자세를 높이 평가한 김영삼씨는 단식으로 연금이 해제된 직후 고바야시에게 기자회견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입원중이던 서울대학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한 단독회견은 보기에도 안쓰러운 사진과 함께 아사히신문 석간 1면 톱을 장식했다.



    그 후 김영삼씨는 측근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바야시가 주최하는 일본인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고, 때로는 함께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부를 만큼 친해졌다. 이들 뒤에는 언제나 미행하는 수사기관 차량 2대가 뒤따랐다. 고바야시는 92년 여름 일본에서 ‘김영삼-한국현대사와 함께 걷다’라는 책을 출판해 김대통령을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고 95년 고바야시가 아사히신문에서 퇴사해 규슈국제대학 교수가 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고바야시 교수가 보내는 팩스는 직접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회답은 없었지만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만났을 때 직접 회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북한의 김용순 비서가 고바야시 교수와 연락을 끊지 않았던 것은 김대통령과 가까운 것을 중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바야시는 정치부 기자도 아니었고, 그런 뜻도 없었지만 한국 특파원 생활을 통해 폭넓은 기자가 됐다며 한국과 한국의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대학에서 아시아개론과 지역특수강의(한반도)를 하고 있다. 또 대학부속 도서관장, 국제상학부 부장(학장), 대학홍보부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신한국지도’ ‘관광코스가 아닌 한국’과 ‘북조선’(편저) 등이 있다. 1935년 도쿄 출생,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1998년 6월1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도 평양은 쾌청했다. 대동강 주변은 초여름의 부드러운 햇살이 비치고, 기분 좋은 미풍이 귓가를 스치고 있었다. 전날 북경을 경유해 평양에 온 우리-나와 현대그룹의 박세용(朴世勇) 종합기획실장 겸 현대종합상사 회장, 이익치(李益治) 현대증권 사장 등 현대그룹 간부들(이하 모든 직책은 당시 기준으로 한다)-은 오전 7시, 숙소인 초대소를 출발해 판문점으로 향했다.

    오전 10시 한국 쪽에서 육로로 북한에 오는 현대그룹의 총수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판문점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93년 방북 때와 비교해 흔들림도 적고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터널의 조명은 꺼져 있어, 절전중임을 알 수 있다.

    정회장의 굳은 표정

    도중 수비대로부터 판문점 입구에서 반 시간 정도 기다리라는 정차 명령을 받았다. 이유는 중앙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 전화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정명예회장의 판문점 통과가 민간인으로는 처음이며, 남북한 관계에도 획기적인 일이기 때문에 연락이 없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사고’로 우리가 판문점 지역에 들어섰을 때는, 정명예회장이 보낸 소 500마리가 벌써 판문점을 통과하고, 소를 태웠던 트럭은 길 주변에 쭉 늘어서 있었다. 트럭 45대에는 500마리의 소가, 나머지 5대에는 사료가 적재돼 있었다. 이 소들은 북한 각지의 공동농장에 암수 한 쌍씩 분배될 예정이었다.

    오전 10시 몇 분 전 우리는 군사분계선 바로 옆에 세워진 판문각에 들어갔다. 2층에서 한국측을 내려다보니 정부와 매스컴 관계자들이 서있었다. 아는 얼굴도 있었다. 저쪽에서도 나를 알아본 사람이 있어, 후일 서울에서 만났을 때 “어떻게 북쪽에 계셨습니까?”라는 의구심 섞인 질문을 받기도 했다.

    10시를 넘어서자 정주영 명예회장을 선두로 현대 방북단이 군사경계선을 넘었다. 선두에 선 검은 양복, 카키색 코트에 새하얀 모자를 쓴 정회장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화려한 한복 차림의 북한 접대원이 꽃다발을 증정했을 때도 어색하게 웃어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정회장은 이미 89년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방북은 민간인으로는 최초의 판문점 경유이며, 또 염원인 금강산개발의 성공 여부도 달려 있었기에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북한측은 총비서 취임 후, 한국을 포함한 외국의 주요인물들과는 일절 회견을 갖지 않았던 김정일 최고사령관과 정회장의 만남을 약속했다. 강의(剛毅)하기로 알려진 정회장이 긴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자위가 붉어졌다. 내가 중재했던 교섭이 이루어지려 한다는 기쁨 때문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북한이 자행한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그 뜻을 펴지도 못하고 죽은 이범석(李範錫) 외무부 장관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장관은 남북적십자회담에서 “통일로에 피는 코스모스는 판문점을 지나 평양까지 이어지는데, 왜 인간은 갈 수 없는가”라고 탄식했지만 지금 그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날 남북한 관계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금강산 개발 중개를 요청받고

    현대증권 고문인 박정두(朴正斗)씨로부터 “명예회장님이 꼭 금강산을 개발하고 싶다 하시니 중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부탁받은 것은 1997년 초가을이었다. 박씨는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경남중학 동기로, 오랫동안 김대통령과 민주화투쟁을 해왔다. 일어가 유창해 내가 김영삼씨와 회견을 할 때 통역을 겸해 동석하기도 했다. 또 내가 ‘김영삼, 한국현대사와 함께 걷다’라는 책을 집필할 때는 김영삼씨의 고향 거제도를 비롯한 각지를 안내해 주었다. 순박하고 요령 부릴 줄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는 내가 북한 대남공작 책임자인 김용순(金容淳) 비서와 친한 것을 알고, 중재를 부탁한 것 같다.

    며칠 생각한 끝에 나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첫째 이유는 정회장의 금강산에 대한 열정이었다. 81년 말부터 4년간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서울지국장을 지냈던 연고로, 정회장과 두 차례 비보도(非報道)회견을 할 기회가 있었다. 두 번째 회견 때라고 기억되는데 내가 산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자랑하는 설악산에 올라가본 뒤 “설악산은 웅장한 산입니다”라고 감상을 말하자, 정회장은 유창한 일본어로 의기양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자네, 설악산 정도로는 금강산에 견줄 수도 없네. 내 고향이 금강산 바로 옆이어서 여러 번 올라가봤지만, 설악산은 그 경색과 분위기에 미치지 못하네.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의 명산일세. 아직 관광개발이 되어 있지 않으나 시설이 완비되면 전세계 관광객이 밀려올 걸세.”

    당시 남북 관계가 긴장 속에 있었던 것을 고려해서인지 개발을 하고 싶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으나 그 의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둘째 이유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북한과의 교섭은 정회장처럼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교섭은 하나씩 쌓아올라가는 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당 정부 기관 등 각각의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주장해,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응하지 않는다. 아니, 하고 싶더라도 조직을 대표하고 있는 한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조직의 주장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교섭이 가능할 리도 없다.

    그러니 우선 큰 틀을 결정하고, 다음에 세부적인 사항을 결정하는 상의하달(上意下達)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큰 틀을 결정할 수 있는 조직 혹은 기업이 아니면 북한은 불신한다. 일본식으로 “중역회의에서 검토한 다음 대답하겠다”고 하면 현재의 상황에서 북한과의 교섭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이번 교섭 과정에도 정회장의 즉단(卽斷)과 아이디어가 거듭되는 교착 상태를 타개했다. 예를 들면 “땅을 밟고 북한에 가고 싶다”는 정회장의 강한 희망, 즉 판문점을 통한 방북 요구는 북한 군부의 반대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지만 “소를 데리고 간다. 소는 비행기나 배로는 운반할 수 없다”는 정회장의 제안으로 간단히 해결됐다. 그것도 단지 “한다”는 태도 정도가 아니다. “나는 옛날 부친의 소를 훔쳐 그것을 판돈 80원을 가지고 서울로 나왔다. 지금의 사업도 그 돈을 밑천으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훔친 한 마리는 돌려주고, 그 은혜를 1000배로 갚기 위해, 모두 1001마리의 소를 보내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북한도 받아들인 것이다.

    셋째 이유로 정회장의 마음속에는 금강산을 개발해 이익을 내고 싶다는 것보다 고향 개발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정회장의 고향은 금강산 기슭의 한촌이다.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세대인 정회장이, 스스로 일으킨 막대한 부를 고향 개발에 사용해 금의환향(錦衣還鄕)하고 싶어한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한국의 재벌, 아니 일본을 포함한 전세계에서도 지금처럼 불확실한 시기에 이해득실을 무시하고 금강산을 개발하겠다는 기업가나 회사는 현대 외에는 없을 것이다.

    넷째, 내가 중재를 수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현대측의 기획의도였다. 한국에는 1000만 명 정도의 이산가족이 있는데, 6·25전쟁을 전후로 남으로 내려온 1세대들은 이미 고령이다. 현대 관광개발의 주축은 1세대들이 살아 있는 동안 고향땅을 밟을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이런 인도적 측면뿐만이 아니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지금까지 정부관계자, 경제계 유력인사 등 특수계층에 허락된 북조선 방문을 일반인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남북간에 일방적이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교류’가 시작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나를 움직인 것은 정회장의 인품이다. 아사히신문의 히도스야나기(一柳) 사장이 동아일보 초대로 방한하고, 나도 전 서울지국장 자격으로 동행했을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열린 아사히신문 주최 파티에는 초대장을 보냈음에도 한국 재계 거물들은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정치사건 취재로 바빠 재계와 거의 교류를 하지 못했던 사정도 있었다.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정회장이 비서도 동반하지 않은 채 가볍게 들어왔다. 그 장소에 있던 아사히신문 관계자도 눈치 채지 못한 등장이었다. 회장은 히도스야나기 사장의 인사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나의 관찰에 의하면 사장의 인사말을 누구보다 열심히 경청한 사람은 가수 조용필씨와 정회장이었다. 그때 이후 나는 회장에게, 무언가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장 서울에 연락해 내게 교섭의 전권(全權)을 위임한다고 명기한 현대측의 위임장과 개발계획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도착한 위임장에는 내가 요구했던 정명예회장의 서명 대신,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의 사인이 들어 있었다. “교섭이 실패해 외부에 누설됐을 경우, 명예회장에게 누가 되기 때문에 이해해 주기 바란다”는 현대측 설명도 있었다.

    현대가 작성한 서류에 ‘금강산개발은 현대가 가장 적합하다’라는 취지의 내 편지(참고 1)를 동봉해 김용순 비서 앞으로 보내기로 했다. 우편과 팩스로는 비밀이 누설될 수 있어서 평양으로 가는 친구에게 편지 전달을 부탁했다. 이 친구는 나중에 또다시 등장하지만, 내가 김비서와 단독으로 만났을 때 통역을 해주었던 인물로 조총련 간부였다. 그는 북한에서 돌아온 뒤, 내게 곧 연락을 해 “확실히 김비서의 사무실에 전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도록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일·북 국교정상화 위해 나서다

    여기서 어떻게 내가 김용순 비서와 직접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경위부터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일본으로 귀국한 직후인 86년 봄, 대학 때 서클 동료였던 시부야 하루히코(涉谷治彦) 외무성 아시아국 참사관(전 주독일대사)이 “외무성은 공식적으로 북한과 접촉할 수는 없으나, 비공식적으로나마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줄 수 없는가”라는 상담을 해왔고, 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외무성 관료와 조총련 친구, 나 이렇게 세 명이 한 달에 한 번씩 부담 없이 만나는 형식으로 진행되다가 시부야 참사관이 시카고 총영사로 전임하자, 아시아국의 스즈키 가츠야(鈴木勝也) 심의관(현 브라질대사)과 오래 전부터 북한과 무역을 해온 신일본(新日本)산업의 요시다 다케시(吉田猛) 사장으로 멤버가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스즈키 심의관에게 북한과 접촉할 것을 제안했다. 다케시타(竹下) 총리가 국회에서 북한에 대해 사죄와 대화 의사를 표명한 뒤 몇 개월 지나 89년 여름 스즈키 심의관이 “외무성 수뇌의 OK를 받았으니 비밀접촉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외무성의 의도는 곧바로 요시다씨를 통해 북한에 전달됐다.

    90년 2월 드디어 평양에서 돌아온 요시다 사장이 “북한이 일본 외무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전언을 가지고 왔다. 거기에는 “전제 조건 없음, 원만히 진행되지 않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조건이 딸려 있었다.

    90년 3월28일, 일본과 북한의 최초 접촉은 파리의 개선문 가까이에 있는 조그마한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됐다. 파리에서 3일간 북한과 접촉한 후 도쿄, 오사카로 무대를 옮겨 3회에 걸쳐 진행됐다. 그 결과 90년 가네마루(金丸)의 방북과 후지산마루호의 선장과 기관장 (83년 11월, 일본의 화물선 후지산마루호에 북한군 병사 민홍구가 망명을 하기 위해서 타고 있었다. 북한은 후지산마루호의 선장과 기관장이 민홍구를 밀항시켰다고 하여 스파이혐의로 감금시켰다)이 석방됐다.

    가네마루씨의 방북 후인 10월 오자와(小澤) 자민당 간사장의 북한 방문 때 후지산마루호의 베니코(紅花)선장을 비롯한 2명이 석방됐다. 나는 북한에 사건 경과를 기사화하겠다고 통보했다. 비밀접촉에서 어떠한 성과가 발생하면 그 시점에 기사화한다는 것이 내가 중재를 받아들일 때의 약속이었다.

    그러자 북한은 갑자기 “평양에서 개최되는 남북한 총리회담 취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 총리회담 취재는 이미 일본 매스컴 관계자 35명이 가기로 결정돼 있었고, 조총련을 통해 등록이 끝난 상태였다. 그것을 갑자기 취소하고 신청도 하지 않았던 나를 포함한 5명의 베테랑 기자를 초대하기로 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기사 게재와 관련해 나와 의논하고 싶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이 방문 때 김용순 비서, 후일 서울에 망명한 황장엽 비서 등과 회견했지만 공동회견이어서 김비서와 단독으로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일·북 국교정상화 교섭은 시작됐지만 곧 일본인 납치문제 등으로 의견이 충돌, 무대 뒤의 조정자인 내가 나설 기회는 없었다. 92년 12월, 나는 서울에서 한국 대통령선거를 취재하고 있었다. 김영삼 후보의 당선이 결정된 다음날 아침 서울의 어느 호텔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동경에서 걸려온 전화에 눈을 떴다. 조총련 친구로부터 “김용순 비서가 곧 평양으로 와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초대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북한은 내가 김영삼 후보와 돈독한 관계라는 것을 알고, 신임 대통령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도 김영삼 대통령과 평양을 연결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꺼이 초대에 응했다.

    93년 1월 말, 나는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으로 들어갔다. 김용순 비서 회견은 2월 초에 이루어졌다. 김비서는 조선노동당 국제부장 비서 겸 정치위원후보이고, 최고인민회의(국회)의 외교위원장에 취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견은 만수대 의사당 위원장실에서 이루어졌다. 김비서가 “이번은 기자회견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희망해, 예정된 약 4시간 중 처음 2시간은 이야기를 나누고 나머지 시간은 회견을 하기로 했다. 김비서가 우선 세계정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해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먼저, 미·북 관계. 북한은 매우 열심히 미국과의 접근을 원하고 있으나, 미국이 북한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단지 핵개발에 관해서다. 핵문제만 해결되면 미국은 북한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며, 돈도 내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국가의 안전 면에서는 미국과의 화해가 불가결하지만 북한의 긴급 과제인 경제재건과 관련해 미국의 원조는 기대하기 어렵다.

    일·북 관계. 가네마루씨가 정치력을 잃어버리고 다나베(田邊) 전 사회당 비서장이 은퇴한 당시로서는 일본의 정치가 중에 진정으로 일·북 관계의 타개에 몰두하려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일본은 국교가 회복하지 않으면 일전 한푼도 내놓지 않을 나라다. 일·북 국교회복에는 지금까지의 경과로 볼 때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시급한 북한의 경제재건에는 도음이 될 것 같지 않다.

    따라서 북한이 진심으로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면, 한국과 협력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중국의 경제개발에는 외자도입이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알고 보면 재외 화교자본이 8할을 차지하고 있다. 북한처럼 리스크가 큰 나라에 보통의 나라는 참여하려 하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면 조국이기 때문에 이윤을 고려하지 않고 투자하리라 생각한다. 그러한 사정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북한에는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국에서 문민정권이 탄생한 지금이 교류를 촉진할 절호의 기회다.’

    대화는 2시간 이상 계속됐고 다음에 기자회견에 들어갔다. 회견중에 김비서는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반도의 분단, 통일에 일본이 책임질 이유는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지 않았다면, 분단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인민에게 입힌 한없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잘못을 빌고, 보상하고, 그리고 통일에 대해서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말했다. 또 한국에 대해 “신정권이 국가안전기획부(KCIA)의 해체, 국가보안법의 폐지 등 어떠한 민주화 정책을 실시할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김비서는, 내가 북한에 체재하는 동안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했으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귀국 후, 곧 서울의 김영삼 대통령당선자에게 편지를 썼다. 김비서와 대화한 내용을 자세히 전하면서 북한이 김대통령의 취임연설에 주목하고 있으니 북한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삼가고 통일로 나아가도록 제안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적었다.

    2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연설에는 “어떤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는 구절이 담겨 있었다. 미국과 일본이 중요한 우방국이지만 동포의 나라 북한은 그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의미였다.

    이 한 구절은, 그 후 북한이 핵개발의혹을 둘러싸고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의 탈퇴성명을 발표해 남북관계가 극도로 긴장되었을 때, 한국 국민 일부가 ‘김영삼정권은 북한에 대해 너무 무르다’는 비판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나는 남북관계의 긴장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김용순 비서에게 편지(참고2)를 썼다. 북한의 반응은 평양에서 돌아오는 지인들로부터 전달받아, 김비서가 내 편지를 읽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북·미 대립이 심각해져 사태는 간단히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북·미의 대립은 1994년 6월, 미대통령 특사로 방북한 카터 전 대통령의 조정으로 해결 조짐을 보였다. 카터 전 대통령의 권고를 받아들여 남북한 최고수뇌회담 개최를 수락한 김일성 주석은, 그 이유 중 하나로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연설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만일 김일성 수석이 회담예정일 2주 전에 급사하지 않고 예정대로 남북수뇌회담이 열렸다면 남북 관계는 엄청나게 바뀌었을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은 보답을 받지 못한 채 끝났다. 운이 없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북한에 15만t 식량 지원 성사

    북한의 식량부족이 표면화하고, 북한 정부도 그 사실을 인정해 각국으로부터 식량원조를 받기 시작했던 95년 7월, 나는 아사히신문을 퇴사해 규슈(九州)국제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무렵 후쿠오카의 내 아파트로 도쿄를 경유해 북한에서 팩스가 날아왔다.

    “우리(북한) 식량지원문제로, 남조선과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베이징에 주재하는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사무실과 접촉했지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대통령에게 우리(북한)의 진심을 알려, 교섭상대를 보내도록 부탁해 주지 않겠습니까”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김대통령에게 직접 연결되는 팩스번호를 알고 있어 내가 보내는 팩스는 측근의 체크 없이 곧바로 대통령의 손에 도착하게 돼 있었다. 나는 북한에서 온 팩스가 김용순 비서로의 의뢰이며 내용도 틀림없음을 확인한 뒤, 김영삼 대통령 쪽에 사정을 설명하고 “책임자를 베이징에 파견했으면 좋겠다”는 팩스를 보냈다. 한국 정부는 즉각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장을 베이징에 파견, 북한에 15만t의 쌀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해 8월 서울을 방문해 대통령 관저에서 식사를 하다가 나는 김대통령에게서 여러 가지 불평을 들었다.

    “한국은 북한에 식량원조로 쌀을 보냈습니다. 일본처럼 묵은 쌀을 보낸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제일 좋은 쌀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쌀을 보내주면 한국에 대한 비난을 그만두겠다는 베이징에서의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남북대화를 진전시키면 국민이 납득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나는 96년 1월말, 김용순 비서에게 편지를 띄웠다. 내용은 “남북관계를 개선할 용의가 있다면 그 신호로 김영삼 정권에 대한 비난을 1개월이라도 좋으니까 멈추어 주었으면 한다. 한국은 그것을 전향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은 북한의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책이다” 등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북한으로부터 아무런 응답도 오지 않았다. 나는 무력감에 휩싸였으며, 중개역할에 피로를 느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무렵 김용순 비서에게 내 편지가 전달되는 시스템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하급 지도원(과장급)이 상부에 보고하는 서류를 제멋대로 선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금강산 개발사업에 개입하다

    현대가 내게 중개를 의뢰 해온 것은 더 이상 중개자로서 내가 할 일은 끝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정부간 교섭이 불가능하다면 민간이 대신할 수 없을까 하는 기대에 나는 중개를 승낙했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편지를 띄우고 반년 이상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나는 재차 요시다 사장에게 중개를 의뢰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서 북한으로부터 “교섭을 하고 싶다”는 회답이 왔다.

    현대 일행과 평양에 동행했을 때, 이 문제를 담당했던 황이라는 지도원에게 “왜 연락이 늦어졌는가”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편지를 책상 속에 넣어 둔 채 비서에게 전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이익이 되지 않는 서류는 상부에 보고하려고도 하지 않는 그들의 습성 때문에 교섭이 반 년 이상이나 늦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겨우 교섭이 개시됐지만 실제 양자가 얼굴을 마주하기까지는 그 후로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현대가 내게 팩스와 전화를 보내면 그것을 요시다 사장이 평양에 전달했고, 북측의 응답은 역코스로 내가 현대에 전달했다. 요시다 사장은 그 사이 수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이와 같은 왕래가 수십 차례 있은 후 98년 1월 말, 드디어 2월3일부터 싱가포르에서 첫 회합을 갖기로 했다. 여행준비를 하고 호텔까지 예약했으나 이틀 전 갑자기 취소됐다. 원인은 현대측에 있었다.

    현대그룹은 그때까지 명예회장의 차남 몽구씨가 그룹회장으로 모든 것을 관리했다. 그런데 정명예회장은 북한과의 교섭에 앞서 삼남 몽헌씨를 그룹회장으로 승격시켜 2인회장제를 시행하고 몽구씨는 국내관계, 몽헌씨는 해외를 맡도록 지시했다. 양 그룹 사이에 북한을 ‘해외’로 볼 것인가 ‘국내’로 볼 것인가를 놓고 이견이 발생했던 것 같다.

    이미 북한과 거래를 하고 있던 몽구씨쪽 간부가 북한측에 “몽헌그룹과의 교섭은 현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팩스를 보냈다. 그 때문에 현대의 속사정을 모르는 북한측이 서둘러 회합을 취소한 것이었다.

    이 싸움은 명예회장이 “북한과의 교섭 책임자는 몽헌으로 한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금방 해결됐지만 이로 인해 첫 회합은 예정보다 2주 정도 늦어진 2월15일 베이징에서 열리게 되었다.

    나는 중개인 자격으로 이 회합에 참가했다. 북한측은 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김용순 위원장)의 송호경 부위원장이, 현대측은 정몽헌 회장이 대표로 나왔다. 베이징 호텔을 예방한 나에게 송부위원장은 “선생님이 지금까지 공화국을 위해 수고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며 정중하게 사의(謝意)를 표명했다. 이 모임을 계기로 교섭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그 후 교섭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현대측으로부터, 또 교섭에 참가한 요시다 사장 등으로부터 받은 보고에 따르면, 정명예회장의 집념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열의가 수많은 난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우선 교섭 초기, 북측은 개발을 허가하는 전제조건으로 ‘쌀 100만t 원조’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명예회장이 “쌀 100만t을 즉시 보내는 것은 어렵지만 옥수수라면 우리 농장에 5만t이 남아 있으니까 금방이라도 보낼 수 있다”라고 대답해 교섭은 단숨에 궤도에 올랐다. 북한은 그 후에도 생고무, 비료 등을 요구했고 현대측은 ‘정부가 허가를 내리면’이라는 조건으로 가능한 한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교섭이 진행되고 문제 해결단계로 접근하자 정명예회장 일행은 계약에 사인을 하기 위한 일정 조정에 들어갔다. 그 조정단계에 또 난관에 부딪혔다.

    앞서도 말했듯이 정명예회장은 “판문점을 통해 가고 싶다”고 요구했다. 이 문제는 정명예회장이 “소를 보낸다”는 묘안을 내 해결됐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북한측이 “소를 태워 오는 트럭을 갖고 싶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는 자동차는 군용으로 전용되기 때문에 기증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김대중 정권이 발족, 나의 오랜 친구인 강인덕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이 통일원장관으로 발탁됐기 때문에 강장관에게 이 문제 해결을 부탁했다. 공관에는 연락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극동문제연구소에 몇 번이고 전화를 하고 팩스도 보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돼 버렸다. 바로 그 전부터 중국 동북부에서 광우병이 유행, 한국측이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역병으로 북한도 오염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북한에 들어간 트럭은 그 병원체를 갖고 돌아올 위험성이 있으므로, 북한에 놓고 와야만 한다”고 결정한 것이다. 현대측은 드디어 낙착을 보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이와 같은 한국측 보도에 이번에는 북한이 “남조선은 우리나라에 존재하지도 않는 병이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며 심하게 반발, 한때 교섭이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최초의 방북 직후, 농장에 분배한 소가 급사하는 일이 몇 건 발생했다. 북한측이 해부를 한 결과 소의 위에서 비닐제품이 나왔다. 북한측은 이것을 현대측이 소를 사망시키기 위해 사전에 비닐제품을 먹였다고 판단, ‘남조선의 음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물론 그런 짓을 할 리 없는 현대측은 심하게 반발했고 교섭은 재차 중단됐다. 그 후 조사에 따르면 현대 농장은 매립지 위에 만든 초지로 땅 밑에 어망 등이 묻혀 있는 경우가 있고, 그것을 송아지가 먹은 것으로 파악됐다. 그 사실이 밝혀진 후, 쌍방의 대립은 겨우 해결됐다. 이와 같이 사소한 일이 심각한 문제로 발전해 교섭이 몇 번이나 중단된 것은, 북한 내부에 현대와의 교섭에 대한 뿌리 깊은 반발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 교섭은 현대측의 끈질긴 교섭 열의, ‘햇볕정책’을 표방하는 한국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강장관의 전향적인 대응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현대그룹의 방북은 난항 끝에 6월16일부터로 결정됐다. 나는 일본인이란 이유도 있고 해서, 판문점을 경유해 북한에 들어가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먼저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으로 갔다. 베이징-평양 간에는 특별기가 준비돼 있었다. 북한측의 배려였다.

    방북멤버는 정명예회장을 중심으로 명예회장의 형제 세 명, 두 명의 아들, 그룹에서 주요 지위에 있는 회장, 사장급, 의사, 명예회장 전속 사진기사였다. 평소 정명예회장의 웅변을 알고 있던 나에게 그날따라 정회장은 다른 사람으로 생각될 만큼 말이 없었다. 아랫사람의 부축을 받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등 체력도 많이 쇠퇴해 있었다. 그렇지만 권위적인 태도는 여전했다.

    권위적인 왕회장

    예를 들어 평양에서 조식시간이 되면 모든 사람이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으로(물론 나도 넥타이를 매고 참석했다) 정명예회장을 기다렸다. 정회장은 10여분 늦게 들어 왔다. 명예회장이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 때까지는 아무도 수저를 들지 못한다. 중역들은 전원 다 빠른 속도로 먹었다. “진수성찬이니까, 좀 천천히 드시지요”라고 내가 권했더니 “명예회장이 수저를 놓으시면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귀엣말로 이야기해 주었다.

    명예회장은 냉면을 무척 좋아한다. 도착한 다음날 초대소에서 내놓은 냉면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날은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날은 고려호텔에서, 이런 식으로 수일 동안 점심 때마다 냉면을 먹어야 했다.

    정명예회장은 1989년 첫 방북 때 수행했던 현대건설 부사장에게 “이 일은 자네가 책임지고 하게. 대신 사장으로 승격시켜줄 테니”라고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승진시켰다는 일화를 요시다 사장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이번 방북에서도 동행했던 사장과 부사장들은 그 후 한 단계씩 특진했다고 한다.

    일행은 교섭 중간에 금강산을 방문해 부근의 정명예회장 생가를 방문했다. 원산까지는 비행기, 거기서부터 명예회장을 비롯한 주요 멤버는 김용순 비서가 탄 요트로, 나와 나머지 사람들은 자동차로 도중의 항구까지 가 거기에서 요트로 내려온 명예회장팀과 합류, 정명예회장의 생가로 향했다.

    친족들과는 눈물의 재회였다.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끊어져 있는 남북한간 철도가 재개된다면 겨우 몇 시간 거리지만, 89년에 방문한 명예회장을 제외한 형제와 자식들은 남북분단 후 첫 방문이었다. 1시간 정도의 재회로는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다 풀지 못했는지, 명예회장은 예약했던 금강산 호텔을 취소하고 생가에서 이틀밤을 묵었다. 금강산 기슭의 숙박소는 생가에서 차로 40분 정도 거리였다.

    이번 방북에서 나는 교섭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완전한 ‘손님’이었다. 내 할 일은 ‘역사의 증언자’라고 생각해 보려고도 했으나 어쩐지 무료했다. 30여년 간 기자를 해온 습성에 적어도 생활양태 등을 조사해보려 해도, 북한주민에게는 직접 물을 수가 없었다. 지도원이 “이번은 기자가 아니라 현대의 요청에 따라 중개인 자격으로 오셨으니까”라며 몇 번씩이나 다짐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정일 총비서 면담 확약

    방문중 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고 현대 수뇌부들의 표정은 밝았다. 말 없는 정명예회장이 조찬 자리에서 농담을 해 폭소하는 일도 있었다. 딱 한 번, 귀국 이틀 전 현대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정을 물으니까, 북한이 약속했던 김정일 총비서와의 회견을 “총비서는 최고인민회의선거 때문에 지방 연설중이어서 이번에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명예회장은 “그렇다면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몇 개월이라도 기다리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문제도 김용순 비서가 총비서와 연락한 다음, “9월에는 총비서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낼 테니, 그때 꼭 만납시다”라는 확약을 주어 해결됐다. 이 때문에 정명예회장은 귀국 전날 열린 김용순 비서 주최의 만찬에서 시종 기분이 좋았다.

    나도 이 만찬에서 이별 인사를 나눌 때 김비서로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우리나라를 위해 노력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번은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다음번에는 천천히 말씀을 나눕시다”라는 인사를 들었다.

    이제 정부간 채널도 정비되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보아 내 일은 끝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남북한 문제와 북·일 국교정상화교섭 등에 작으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싶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는 일본의 국익 때문이다.

    한반도와 관련된 문제에서 일본에 가장 유익한 일은 무엇인가. 그건 한반도에서 만약의 사태(有事·전쟁)를 방지하는 것이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사일 한두 발은 일본에 날아올지 모른다. 1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밀려들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부담은 전후복구 차원에서 일본이 할 일이다. 전쟁은 아마도 군사·경제면에서 우위를 유지하고 있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한국이 승리하겠지만 인적·물적 피해는 막대할 것이다. 국토는 황폐하고 산업은 괴멸상태가 될 가능성도 있다.

    지금 일본에 필요한 것은 냉정하게 판단해서 장기적인 시야에서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한국의 석학 이어령 이화여대교수는 “전전(戰前) 일본의 천황제를 가장 충실하게 답습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아닐까”라고 말했지만 나도 북한사회가 전쟁 전의 일본사회와 어떤 의미에서 흡사한 점이 적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일본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일본이 걸어온 ‘언젠가 왔던 길’을 걷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본은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시기다.

    중개역할은 끝났지만 나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통일을 위해, 일본인으로서 미력이나마 계속해서 노력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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