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대학 제 구실 하려면 교수부터 바꿔라”

  • 안기석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입력2006-12-27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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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개혁을 추진하다가 98년 8월 딸의 ‘고액과외’문제로 사퇴한 선우중호 전서울대 총장이 못다 이룬 대학 개혁의 꿈을 오랜만에 털어놓았다. 》
    선우중호(鮮于仲皓) 전 서울대총장(59). 총장에 취임한 96년부터 서울대 개혁을 추진하다가 98년 8월 자녀의 ‘고액과외’ 문제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사퇴했다. 지난해부터 대한토목공학회 회장을 맡고 있지만 교수직은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교육공무원법상 국립대학총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면 재임용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구랍 30일 오후 서울대 공대의 한 연구실에서 선우 회장을 만나보았다. 이 연구실은 서울대 BK(두뇌한국)21 사업단이 사무실로 사용하는 곳인데 기자가 서울대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인터뷰 장소로 빌린 것이다.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그동안 골치 아픈 일 때문에 좀 쉬고 있어요. 평소에 하고 싶은 일도 하고요. 서울대 BK21 사업도 도와줍니다.”

    골치 아픈 일이란 딸의 고액과외 문제로 중도 하차하게 된 일을 의미한다. 당시 선우 총장은 법적으로는 물러날 이유가 없었지만 여론에 밀려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총장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법보다 정서가 더 강하게 작용해요. 외국에서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선우 회장은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은 듯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의 관심은 역시 총장직 사퇴로 못다 이룬 서울대 개혁 문제에 있었다.

    “시점을 놓친 것이 아쉬워요. 당시는 IMF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두 개혁의 대세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거든요. 이제는 사회 분위기가 IMF 이전으로 돌아가 개혁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선우 회장은 서울대 개혁의 호기를 놓친 것이 몹시 안타까운 듯 ‘시기를 놓쳤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면 앞으로 서울대 개혁은 힘든 것인가.

    “현재 총장을 맡고 계신 분이 잘하리라고 믿습니다만 아직 구체적인 청사진을 알 수 없으니까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개혁이란 조직 구성원의 합의가 이뤄지면 개개인이 희생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하는데 대학사회에서는 이런 것을 요구하기가 힘듭니다.”

    ―일각에서는 총장이 되신 후 추진한 서울대 개혁도 소신보다는 새 정부의 교육개혁 압력에 떠밀려 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총장이 된 후 서울대발전위원회에서 각 단과 대학 교수들이 모여 서울대가 세계적인 대학이 되려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오랫동안 연구와 토론을 하면서 모델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IMF사태가 터지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추진한 교육개혁과 우리가 만든 개혁안이 맞물리게 된 겁니다. 새 정부가 갑자기 국립대학교 개혁안을 만드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만든 개혁안이 많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죠.”

    ―당시 개혁안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서울대를 연구 중심 대학으로 만든다는 것이었죠.”

    ―그 개혁안에는 학사과정 폐지도 포함돼 있었습니까.

    “연구 중심 대학으로 전환하더라도 학사과정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다만 서울대를 대학원이 주가 되고 학사과정이 부가 되는 대학으로 바꾸어 교육과 연구의 비중을 동등하게 부여하자는 것이었어요.”

    ―사회의 변화에 따라 기존학과를 통폐합하는 것도 개혁안에 포함됐을 텐데 관련학과 교수들의 반발이 심했죠.

    “상당한 반발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가 다양하게 변하고 있는데 학사과정부터 특정분야에 고정된 인력을 양성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 학과 졸업생의 사회 진출을 누가 책임지겠어요. 그래서 학부에서는 학과간 벽을 허무는 폭넓은 통합교육을 실시하고 대학원에 가서 전문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어요.”

    ―총장직에서 물러나기 전에 당시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총장공관에 들러 서울대 단과대학장들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아는데 특별한 주문은 없었습니까?

    “이장관은 주로 듣는 편이었어요. 서울대가 이런 방향으로 개혁을 할 테니 예산을 지원해달라고 한 거죠. 아무리 좋은 개혁안이라도 이를 뒷받침하는 예산이 없으면 현실화하기 힘들죠. 서울대가 벤치 마킹하고 있는 대학이 미국의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인데 이 대학의 연간 예산이 1조5000억원 정도인 것에 비하면 서울대 예산 3000억원은 너무 적은 액수입니다. 그래서 당시 대통령을 면담했을 때도 서울대를 국가를 대표할 만한 대학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예산이 필요하다며 지원을 요청했어요. 새 정부와 서울대가 당시에는 상당한 교감을 갖고 있었어요.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니까 제가 총장을 그만둔 뒤 BK21 프로그램으로 변질되고 말았죠.”

    ―서울대가 국내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모았어도 국제 경쟁력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는데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서울대는 효율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16개 단과대와 3개 전문대학원에 190여개 학과가 있습니다. 너무 많아요. 세계 어느 대학을 보더라도 이렇게 많은 단과대와 학과가 있는 나라는 없어요. 이처럼 방대한 학사와 행정조직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하느냐는 겁니다. 이제는 서울대도 경쟁력이 있는 분야는 더욱 발전시키고 없는 분야는 퇴출시켜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대학이라 하더라도 모든 학문을 커버할 수는 없어요. 호주의 뉴사우스에 있는 한 대학은 경쟁력 없는 단과대학 하나를 없애는 데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대요. 그렇게 빨리 없애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결국 구조조정을 해서 경쟁력을 갖춰야 할 텐데 경쟁력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학의 위상이나 질은 교수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버드대 등 세계적인 명문대가 그런 명성을 유지하는 것은 우수한 교수들의 활동 때문입니다. 이제 서울대도 연구 중심 대학으로 경쟁력이 있는 분야를 키워야 합니다. 다양한 교수제도를 채용하고 이들이 안정적으로 연구와 교육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는 동시에 가혹하리만큼 엄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합니다.”

    선우 회장은 현재 서울대 총장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사조직 개편부터 우수교수진 확보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못다 이룬 개혁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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