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2월호

신라 선덕여왕은 미륵보살의 화신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입력2006-12-27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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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불교 수용

    한반도의 등골을 이루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은 백두산을 기점으로 동해변을 따라 휘어져 내려오다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서쪽으로 방향을 크게 틀어 속리산으로 이어지고, 속리산에서는 다시 남쪽으로 진로를 꺾어 지리산으로 내려간다. 그 결과 한반도의 동남지역은 높은 산맥으로 차단되어 별구(別區; 따로 떨어진 구역)를 이루게 되니, 옛 신라땅인 경상도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이 지역은 교통의 불편으로 자연 문화전파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어 외래문화 충격을 상당 기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 인심 역시 자연 보수성과 배타성이 강화돼나갔으므로 외래문화 유입을 갈수록 꺼리게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 지역이 중국의 한사군 설치로 인해 유교문화의 충격을 받아 세계화하고 있을 때, 이 지역만은 이를 외면한 채 전통문화의 순수성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성숙과 인접 국가의 문화 성장은 신라로 하여금 더 이상 외래문화 유입을 거부할 수 없게 하였으니, 김씨 왕들이 본격적으로 세습을 시작하는 눌지왕(訥祗王, 417∼457년)대부터 불교의 전도승들이 고구려로부터 흘러 들어와 문호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사문(沙門; 쳒ramana의 음역으로 출가 수행자, 즉 승려를 일컬음)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으로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아도기라(阿道基羅; 아도가 신라에 터잡다)의 내용은 이런 상황을 짐작케 해준다.



    그런데 배타적인 신라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던 듯, 묵호자는 모례의 집에서 굴실을 파고 숨어 살아야 했다고 한다. 이때 눌지왕은 이미 불교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22년(412), 즉 신라 실성왕(實聖王) 11년에 눌지왕의 둘째아우인 왕자 복호(卜好)가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고구려 장수왕 6년(418)인 눌지왕 2년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복호왕자는 광개토대왕릉의 수묘인(守墓人; 묘를 지키며 보호하는 사람)이 되어,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말하고 있는 한예(韓穢) 220가(家) 수묘인 연호(烟戶; 굴뚝에서 연기 나는 집이란 의미로 백성의 집을 가리킴) 중의 하나로 편입돼 있다 돌아온 듯하다. 그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경주 호우총(壺塚)에서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는 명문이 바닥에 양각된 청동제 대접(壺)이(도판 1)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니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 있던 6년 세월 동안 당시 신지식이던 불교와 충분히 접촉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불교는 환란을 구제하는 구세의 이념이고 복호는 강국에 인질로 잡혀와 있는 약소국의 왕자로서 항상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을 터이니, 불교 미전도국(未傳道國)의 왕자와 불교 교단의 접촉은 상호 이해관계 위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묵호자의 선산 지역 전도는 복호 왕자와의 선약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워낙 배타적 성향이 강하여 도저히 드러내놓고 불교를 전도할 수 없었으므로, 묵호자는 집 안에 굴실을 파고 들어앉아 인연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은밀히 전도하였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모례는 눌지왕으로부터 특명을 받고 이와 같이 외래이념을 수용하는 데 앞장선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사실 눌지왕 자신이 실성왕 16년(417) 5월에 고구려에 인질로 가던 도중 실성왕이 자신을 살해하도록 밀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고구려 사람에게 들은 뒤 신라로 돌아와 실성왕을 시해하고 자립해 왕이 된 인물이다. 그러니 그를 차마 죽이지 못할 만큼 친교를 맺었던 고구려 사람으로부터 당시로서는 최신의 국제 지식인 불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눌지왕은 복호의 불교 지식에 쉽사리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눌지왕은 실성왕을 시해했다는 도덕적 결함 때문에 배타적 성향이 강한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외래 이념인 불교를 드러내놓고 수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소극적인 방법으로 비밀 전도를 시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생각된다.

    불교 배척한 보수세력의 음모

    이후 신라 왕실에서는 불교에 대한 이해를 점차 확대해갔던 듯하다. 눌지왕을 뒤이은 자비왕(慈悲王, 458∼478년)의 왕호가 불교식이고, 그 다음 소지왕(炤知王 혹은 照知王, 479∼499년) 역시 그런데, 비칠 소(炤)자의 의미대로 소지왕을 우리말인 ‘비처’왕(毗處王)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데서 비처를 부처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이름답게 이 왕대(王代)에는 왕궁 안에다 불전(佛殿)을 두고 불교의식을 맡아 집전하는 분수승(焚修僧)도 기거하게 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 권1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집을 쏘다) 조에서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제21대 비처왕(소지왕이라고도 한다)이 즉위 10년(488) 무진에 천천정(天泉亭)에 갔는데 그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우는 일이 있었다. 쥐가 사람 말을 지어 하되,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라’ 한다.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따라가라 하니 남쪽으로 가서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촌(讓避寺村)이니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에 이르렀다.

    마침 두 마리 돼지가 서로 싸우므로 잠시 머물러 보다가 홀연 까마귀가 있는 곳을 놓치고 말았다. 길거리를 헤매는데 그때에 늙은 할아비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바치는 일이 있게 된다. 겉면에 쓰기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만 죽을 뿐이라’ 하였다.

    심부름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바치니 왕이 이르기를 ‘그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열어보지 않아서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한다. 그러나 일관(日官; 길흉을 가리는 직책을 맡은 관리)이 이렇게 아뢴다. ‘두 사람이라는 것은 백성이고 한 사람이라는 것은 왕입니다.’ 왕이 그럴듯하게 여겨 열어보니 ‘거문고 집을 쏘라’고 씌어 있다.

    왕이 궁으로 들어와 거문고 집을 보고 그것을 쏘니 이에 내전(內殿) 분수승(焚修僧)이 궁주(宮主; 왕비)와 몰래 사통하여 간음하던 사실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처형되었고 이로부터 나라 풍속에 매양 정월 첫 돼지날(上亥日)과 첫 쥐날(上子日) 및 첫 말날[上午日; 말 오(午)가 까마귀 오(烏)와 동음(同音)이므로] 등의 날은 온갖 일을 꺼리고 삼가 감히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15일로는 까마귀 제삿날을 삼아 찹쌀밥으로 제사지냈는데 지금까지 행해지며 우리말로 달도()라고 부른다. 슬프고 근심되어 온갖 일을 꺼리어 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 못을 서출지(書出池; 글이 나온 못)라 이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기사를 자세히 음미해 보면 어딘지 보수세력들의 계획된 음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불교가 왕실 포교에 성공하자 보수세력이 왕비와 전도승에게 파렴치한 누명을 씌워 이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불교의 공식 전파를 저지하려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동고승전’ 권1 아도전에 따르면 이후 고구려승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垢 )가 연이어 들어왔다가 모두 살해되었다 하였으니, 이를 통해 보아도 비처왕비와 분수승의 간통은 조작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그래서 비처왕도 곧 이 사실을 깨닫고 수습에 나섰던 듯하다. 이 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여 왕실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다음 2월에는 왕이 일선군으로 가서 홀아비와 과부 및 부모 없이 혼자 사는 이들을 위로하고 곡식을 내려주었으며, 3월에는 돌아오면서 오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주군(州郡)의 죄수들을 석방했다고 했다.

    왕이 1월 중순에 왕비와 분수승을 처형하고 2월에 곧바로 일선군을 위로 방문했다면 분수승 처형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선군은 이미 불교 포교의 거점이 되어 상당한 불교세력이 형성돼 있었고, 분수승도 이곳으로부터 초빙돼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삼국유사’ 권3 아도기라 조의 다음 내용과 연관시켜 보면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비처왕 시에 아도(阿道 혹은 我道)화상이 시자 세 사람과 함께 역시 모례 집으로 왔는데 겉차림이 묵호자와 비슷했고 몇 년 살다가 병 없이 죽었다.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전과 율문을 강독하니 가끔 믿고 받드는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도 본전(本傳)을 인용하여 “아도는 고구려 사람으로 그 어머니는 고구려 여자 고도령(高道寧)이고 아버지는 위(魏)나라 사신 아굴마(我堀摩)”라 하고 있다. 선산 일대의 불교세력이 고구려와 중국까지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 대목이다. 비처왕이 분수승을 처형하고 곧장 일선군으로 달려가서 백성들을 달래야 했던 이유를 알 만하다.

    그러나 그것이 음모였든 아니었든 간에 승려와 왕비의 간통이라는 불미스러운 사건은 배타적 보수세력들에게 불교수용을 반대하는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지왕의 후손들은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던 듯, 눌지왕의 외손자이자 눌지왕 아우의 손자인 지증왕(智證王, 500∼513년)이 소지왕, 즉 비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지증왕의 왕호 역시 지혜(智慧)로 증득(證得)한다는 의미의 불교식 왕호다. 본래 왕호는 지철로(智哲老) 혹은 지대로(智大路), 지도로(智度路)라는 신라 고유어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알 수 없으되 ‘삼국유사’ 권1 지철로왕 조에서 그의 음경(陰莖) 길이가 1척 5촌[이 당시 사용하던 건초척(建初尺)에 의하면 1자가 25.1415cm였다], 약 37.5cm나 돼 짝을 구하기 어려웠다 하니 혹시 이것과 연관된 이름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이름을 불교식 한자 이름으로 세련되게 표현하여 지증이라 하였을 것이다.

    이 지증왕은 등극할 때 이미 나이가 64세였으므로 재위 15년만에 79세로 돌아가고, 장자인 법흥왕(法興王, 514∼539년)이 뒤를 잇는다.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법흥왕이 즉위하던 때(514년)는 중국 문화권 전체가 불국토화(佛國土化)하여 불교 발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북위에서는 세종 선무제(宣武帝, 500∼515년)가 이미 당금(當今; 현재)의 여래로서 낙양 용문산에 부모인 고종(高宗) 효문제(孝文帝, 471∼499년) 부부를 기리는 추선굴(追善窟)인 빈양중동(賓陽中洞)을 거대한 규모로 조성해 낸다(제7회 도판 8).

    선무제 서거 후에는 그의 황후로 섭정을 맡았던 영(靈)태후 호(胡)씨가 섭정 초기인 숙종 효명제 희평(熙平) 원년(516)에 낙양성 안 영녕사(永寧寺)에 1000척(약 250m) 높이의 9층 목탑을 세울 정도였다. 그리고 남조 양(梁)나라 무제(武帝, 502∼549년)는 스스로 보살제(菩薩帝)를 자처하며 조회(朝會)를 불교의식처럼 치르는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 백제도 미구에(527년경) 무령왕의 초상 조각으로 사람 크기의 (제7회 도판 7)을 조성해낼 정도였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백제가 무령왕 21년(521) 고구려로부터 제해권을 되찾고 11월에 양나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법흥왕도 이 편에 딸려 양나라에 사신을 보냄으로써 국제사회에 처음 얼굴을 내놓게 된다.

    이때 사신들이 백제와 양나라를 둘러보면서 불교문화의 극성현상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들의 충격적인 보고에 놀란 법흥왕은 반드시 자기 대에 불교를 공식 수용하여 국제사회에 손색 없는 일원으로 성장하려는 욕망을 품는다. 이는 사실 외증조부이자 종증조부인 눌지왕 이래 김씨 왕들의 숙원사업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타적이고 보수성이 강한 신라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여 시끄럽게 떠들자 가까이 모시던 신하인 이차돈(異次頓)이 자신의 머리를 베어 뭇 사람의 의논을 진정시키라고 한다. 이에 법흥왕은 본래 불도를 일으키려는 일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인다면 잘못이라고 하며 이를 듣지 않자 이차돈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불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유감이 없습니다.”

    이에 법흥왕이 신하들을 불러 물어보니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 승도(僧徒)를 보니 어린애처럼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며 의논하는 것이 기괴하여 일상(日常)의 도가 아닙니다. 이제 만약 그것을 좇는다면 아마 후회가 있을 듯합니다. 신 등은 비록 중죄를 받는다 해도 감히 조칙을 받들 수 없습니다.”

    그러자 이차돈이 혼자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입니다. 대저 비상(非常)한 사람이 나와야 그런 후에 비상한 일이 생긴다 하였는데, 이제 들으니 불교는 연원이 분명하고 뜻이 깊어서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에 법흥왕이 “뭇 사람의 말은 뭉쳐서 깨뜨릴 수 없는데 너만 홀로 말을 달리하니 양쪽을 쫓을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옥리(獄吏)에게 내려주어 그를 죽이라 했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법을 위해서 형벌을 받으러 나가니 부처님이 만약 신통력이 있다면 내 죽음에 반드시 남다른 일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차돈의 목을 치자 피가 솟구치는데 빛이 희어서 젖과 같았다. 뭇 사람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서 다시는 불사(佛事)를 헐뜯지 않았다.

    이런 얘기는 ‘삼국사기’ 권4 법흥왕본기 법흥왕 15년(528) 조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려 고종 때 각훈(覺訓)이 지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석법공(釋法空; 법흥왕의 법명)전에는 더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법흥왕이 불법을 일으키기 위해 크게 가람을 세우고 불상과 설비를 갖추려 하자 대신 공알(恭謁) 등이 이렇게 간했다.

    “요사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편안치 않고 더하여 이웃나라 군사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어느 겨를에 백성들을 수고롭게 부역시켜 쓸데없는 집을 짓겠습니까.”

    이에 왕은 좌우 신하들이 믿고 따르지 않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16년(529)에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염촉(朴厭觸, 이차돈 혹은 居次頓이라고도 한다)이 26세의 의혈(義血)청년으로 왕의 큰 뜻을 돕기 위해 이렇게 은밀하게 아뢴다.

    “폐하가 만약 불교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신이 거짓 왕명으로 맡은 관청에 전하기를 왕이 불사를 시작하려 한다고 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뭇 신하들이 반드시 간할 터이니 마땅히 칙령을 내려, 짐은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누가 왕명을 바꾸었는가 하십시오. 저들이 마땅히 신의 죄를 탄핵할 터인데 만약 그렇게 아뢰기만 한다면 저들은 꼭 굴복할 것입니다.”

    왕이 이르기를 “저들이 이미 사납고 거만한데 비록 경을 죽인다 해도 어찌 굴복하겠는가”라고 한다. 이에 박염촉(이차돈)은 이렇게 말한다.

    “큰 성인의 가르침은 천신(天神)이 받드는 바이라 만약 소신을 목 베면 마땅히 하늘과 땅에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변이 일어난다면 누가 감히 어기고 오만하겠습니까.”

    이후 진행 상황도 ‘삼국사기’에서 요약한 내용보다 훨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지루하니 생략하기로 하고, 목이 잘리면서 이변이 일어나는 대목만 옮기면 이렇다.

    “목을 치자 그 머리가 날아가 금강산 산꼭대기에 이르러 떨어졌다. [경주에 있으니 뒷사람들이 이곳에 자추사(刺楸寺)를 세웠다. 자추는 법추(法楸)라고도 한다]. 흰 젖이 목이 잘린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었다. 날이 새까맣게 어두워지고 하늘은 기묘한 꽃으로 꽃비를 내리며 땅은 크게 흔들려 움직이니 임금과 신하 및 백성들이 모두 위로는 하늘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사인(舍人), 즉 박염촉이 무거운 법으로 죽은 것을 슬퍼하여 서로 보고 슬픔을 표시하며 통곡하였다. 드디어 남긴 몸을 받들어 금강산에 장사지냈는데 예법에 맞게 하였다. 이때 임금과 신하는 이렇게 맹세하였다. ‘지금 이후부터는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께 귀의하겠습니다(自今而後 奉佛歸僧). 이 맹세를 변경하는 일이 있으면 천지신명이 벌을 내리십시오.”

    ‘삼국유사’ 권3 원종흥법(原宗興法; 원종이 법을 일으키다) 염촉멸신(厭滅身; 염촉이 몸을 버리다) 조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다만 이 해가 법흥왕 14년(527) 정미(丁未)이고 염촉의 나이 22세였다는 정도의 차이만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의 염촉멸신 내용은 원화(元和)연간(806∼820년)에 남간사(南澗寺) 사문 일념(一念)이 지은 촉향분예불결사문(香墳禮佛結社文; 염촉의 향기 나는 무덤에 예불하기 위해 모임을 만드는 글)을 요약해 옮긴 것이라 한다.

    이에 따르면 원화 12년(817), 즉 헌덕왕 9년 8월5일에 국통(國統) 혜륭(惠隆)과 법주(法住) 효원(孝圓), 김상랑(金相郞) 및 대통(大統) 녹풍(鹿風), 대서성(大書省) 진노(眞怒), 파진찬 김억(金) 등이 이차돈의 제삿날을 기리기 위해 옛 무덤을 개수하고 큰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도판 2)일 것이다. 마멸이 심하여 비문 내용은 대부분 알아보기 어려우나, 다만 제1면에 목이 떨어져 나가며 흰 피가 솟구쳐 오르는 광경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 이차돈 순교 장면을 표현한 것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로 보면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해는 ‘삼국사기’(1145년 편찬)의 법흥왕 15년설과 ‘해동고승전’(1215년 편찬)의 법흥왕 16년설 및 ‘삼국유사’(1281년 편찬)의 법흥왕 14년설 등 세 가지 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중에 어느 설을 따라야 할지 자못 혼란스러우나, 아무래도 ‘삼국사기’가 유교사관에 입각해 기술한 정사(正史)이니 이를 따를 수밖에 없겠는데, 3설을 절충해도 법흥왕 15년(528)이 된다.

    경주 남산 불곡(佛谷) 선정불좌상

    이토록 밀고당기는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불교의 공식 승인이 이루어지자 신라사회는 이제까지 어떤 외래 문화의 충격도 받아본 적이 없는 순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백지에 물감이 스며들듯 급속도로 불교화가 이루어져 나간다. 법흥왕 16년(529)에는 살생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21년(534)에는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의 조영에 들어가며 국왕은 스스로 출가하여 법공(法空)이라는 법명(法名)을 가지고 이 절에 주석한다.

    이는 대체로 양(梁) 무제(武帝)의 사신[捨身; 몸을 버려 삼보의 노예가 됨. 527년 3월 1차로 동태사(同泰寺)에서 사신하고 529년 9월과 547년 3월에 같은 절에서 2차 3차로 사신한다]에 영향받아 한 수 더 뜬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왕비도 영흥사(永興寺)를 짓고 비구니가 되었다.

    어떻든 이로부터 신라가 곧 불국토이고, 현재의 김씨왕족이 곧 석가족(釋迦族)과 같은 크샤트리아(Ksatriya, 刹帝利)라는 관념이 점점 깊어졌다. 그리고 이런 이념으로 국민정신을 한데 묶어 장차 통일을 이루어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 많은 불상이 조성될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초기의 국가사업으로 이룩되었다는 흥륜사나 영흥사·황룡사 등의 불상들이 모두 현존하지 않아 그 양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시기 신라가 백제와 밀월관계에 있었고 또한 양나라로부터 전해지는 남조불교도 백제를 통해 들어온 듯하니, 백제의 불장(佛匠)들이 들어와 이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커서 처음에는 백제 양식의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실례가 바로 남산 불곡의 선정불좌상(禪定佛坐像)(도판 3)이다. 천연암석에 감실(龕室)을 경영하면서 입체조각에 가까운 고부조(高浮彫; 높은 돋을새김)로 조각함으로써 중국의 운강·용문 등 석굴조영방식을 원용하고 있다. 이는 전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제 태안반도의 (제7회 도판 7)이나 (제7회 도판 9)에서 그 양식적 선구를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이 불상이 포복식(抱腹式) 불의(佛衣)와 포수좌(袍垂座-裳懸座)를 갖춘 백제 불좌상의 특징을 그대로 보이면서 둥글고 온화한 백제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음에야!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인 초기 불상의 유일한 예라고 해야 하겠다.

    법흥왕은 불교의 공식 수용에 의해 국제사회로 웅비(雄飛)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자 우선 해상진출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법흥왕 19년(532)에 지금의 김해 지방을 근거로 해상왕국을 이루고 있던 금관(金官)가야를 합병한다. 그 왕인 김구해(金仇亥)와 왕비 및 세 왕자인 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 삼 형제가 나라의 재산과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왔다고 한다. 신라의 국세가 배로 늘어나며 해양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에 법흥왕 23년(536)에는 독자 연호(年號)를 처음 세워 건원(建元) 원년을 일컫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백제의 성왕은 법흥왕 25년(538) 봄에 도읍을 사비(泗, 부여)로 옮겨 신라의 해상도전에 대비하게 된다.

    법흥왕이 돌아가자 법흥왕의 외손자이자 조카인 진흥왕(眞興王, 540∼575년)이 불과 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한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우 입종(立宗)과 법흥왕녀 사이에서 난 왕손이었다. 왕이 어렸으므로 법흥왕녀인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게 되었는데, 진흥왕 5년(544) 갑자 2월에는 법흥왕 22년부터 짓기 시작한 대왕흥륜사를 완공하고 신라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니(僧尼; 비구승과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명실공히 불교의 공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신라승 각덕(覺德)이 최초로 양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진흥왕 10년(549) 1월에 양무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각덕으로 하여금 불사리를 모시고 함께 돌아가도록 한다. 이것이 양무제가 보낸 최후의 사신이었다. 2월에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제를 유폐시켜 5월에 굶어 죽게 했기 때문이다.

    어떻든 신라에서는 최초의 유학승이 불사리를 최초로 모시고 귀국하게 되자 진흥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까지 나가서 받들어 맞이해 들이도록 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진흥왕 11년(550) 3월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서로 침공하여 뺏고 뺏기는 틈을 타서 이찬(伊)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1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거드는 체하고 두 성을 모두 빼앗아 한강 유역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해 놓는다.

    진흥왕이 불과 17세의 나이에 이와 같은 통치수완을 발휘하니 왕태후는 다음 해인 진흥왕 12년(551) 1월에 섭정을 거두고 친정(親政)을 허락하는 듯, 이해 정월에 개국(開國) 원년으로 개원한다. 법흥왕 22년(535)에 건원(建元) 원년으로 연호를 세운 지 16년 만의 일이었다.

    이해 3월에 진흥왕은 정복지역을 순수(巡狩; 제왕이 돌아다니며 국토를 살펴봄)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 악성(樂聖) 우륵(于勒)을 만나 가야금과 가야 음악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이를 수용해 들인다.

    이어서 9월에는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여 10군을 빼앗는다. 이때 고구려는 요동에서 돌궐의 침략을 받고 이를 물리치느라 남쪽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드디어 진흥왕은 14년(553) 2월에 월성의 동쪽(현재 절터를 보면 북쪽이라 해야 맞음)에 신궁을 크게 짓기 시작하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서 보이므로 왕은 왕궁터가 아니라고 생각해 이를 고쳐서 불사(佛寺)로 삼고 황룡사(皇龍寺)라 이름을 내린다. ‘삼국유사’ 권3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황룡사는 짓기 시작한 지 17년 만인 진흥왕 31년(570)에 완공한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으로부터 큰 배 한 척이 들어와 하곡현(河谷縣, 지금 울산) 사포(絲浦; 우리말 실개의 한자 표기이니 谷浦라고도 씀)에 정박하였다. 그 배는 사람이 타지 않은 황당선(荒唐船)으로 통첩문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서천축국 아육왕(阿育王)이 황철(黃鐵, 구리) 5만7000근과 황금 3만푼(分)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하였는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이렇게 축원한다. ‘원컨대 인연있는 국토에 닿아서 장륙(丈六; 한길 6자, 키가 큰 사람이 8자, 즉 2m인데 이의 두 배이니 4m에 해당함)의 존귀한 모습을 이루소서.’ 그리고 모본으로 삼을 1불 2보살상을 함께 싣는다.

    현의 관리가 이 사실을 장계로 아뢰니 칙명을 내려 그 현의 성 동쪽 시원한 땅에 동축사(東竺寺)를 지어 그 모본으로 삼을 삼존불을 맞이해 봉안하게 하고 그 금과 구리는 서울로 실어와 장륙삼존상을 주성(鑄成; 부어 만듦)하여 황룡사에 봉안하게 하니, 때는 진흥왕 35년(574) 갑오 3월이었다(절의 기록에는 계사년 573년 10월17일이라 돼 있다). 주존 석가 입상은 무게가 3만5007근이고 황금 들어간 것이 1만198푼이었으며 양대 보살상에 들어간 구리는 1만2000근, 황금은 1만136푼이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권4 진흥왕 35년 조에도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

    그러나 이 황룡사 장륙전 봉안의 은 고려 고종 25년(1238) 윤 4월에 몽고병이 황룡사를 불지를 때 함께 타 녹아버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동축사에 모셨던 본불도 황룡사 장륙존상이 이루어진 다음 황룡사에 모셔다 봉안했었다 하니 이 역시 황룡사가 불타 없어질 때 함께 녹아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인도불상의 출현을 살펴본 것처럼 불상 출현이 서력 기원 전후한 시기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서력 기원전 3세기경에 재위했던 아육왕(A쳒oka, 서기전 269∼232년)이 불상을 만들었을 리 만무하다. 또 그때부터 무인선이 구리와 금을 싣고 800년이 넘게 바다를 떠다녔을 리도 없다. 무인선의 정박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 해도 당시 불국토 이상이 구현되었다고 생각하던 중국 남북조의 어느 나라에서 떠나 보낸 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진흥왕 31년(570)이라면 남조는 진(陳) 선제(宣帝, 569∼582년) 태건(太建) 2년에 해당하고, 북조는 북제(北齊) 후주(后主, 565∼576년) 무평(武平) 원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배가 진흥왕의 신정복지인 서해의 강화만이나 동해의 원산만에서 흘러왔을 수도 있다. 진흥왕은 이미 이 지역을 정복하여 수중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정복과정을 ‘삼국사기’ 권4 진흥왕본기를 통해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14년(553)에 백제의 동북지역인 남한강 상류 충주 일대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금관가야 사람들을 옮긴 다음 금관가야 최후 왕인 구해왕의 막내왕자 김무력(金武力)을 그 군주로 임명한다. 15년(554)에는 백제 성왕의 3만 대군을 관산성(옥천)에서 대파하고 성왕 이하 백제군을 전멸시킴으로써 금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하고, 16년(555) 10월에는 한강 하류 지역까지 장악하여 북한산을 순행하고 이곳으로 국경을 정한다.

    한편 동쪽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쳐올라가서 17년(556) 7월에 벌써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둔다. 이어 18년(557)에는 강원도 영서의 국원(國原), 즉 원주를 소경(小京)으로 삼고 신주를 폐하며 북한산주를 둔다. 그리고 22년(561) 2월1일에는 5가야의 중심지역인 비사벌(比斯伐; 혹은 比自火, 우리말 브셔블, 즉 서울의 한자표기), 즉 지금의 창녕(昌寧)에 최초의 진흥왕 순수비(도판 4)를 세운다.

    드디어 25년(564)에는 강화만을 통해 북제에 직접 사신을 보낼 수 있게 되니 북제 무성제(武成帝)는 다음해(565년) 2월에 진흥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봉한다. 한강유역을 모두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옥저와 예맥(濊貊)의 옛 땅인 함경남도와 강원도 일대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실력을 인정하여 낙랑군공을 봉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왕은 요동군공, 백제왕은 대방군공으로 봉한 것과 비교해 보면 이 당시 삼국 중 신라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해 남조 진(陳) 문제(文帝)는 신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며 석씨경론(釋氏經論; 불교의 경전과 논장) 1700여권을 보내기도 한다.

    진흥왕 29년(568) 무자 정월에는 연호를 대창(大昌)으로 바꾸고 진흥왕은 그동안 확장한 영토를 순수하며 국경지역에 순수비를 세우니 함경남도 이원의 마운령비와 함흥의 황초령비(도판 5), 서울의 북한산비(도판 6)가 그것이다.

    따라서 황룡사 장륙삼존상의 모본으로 삼으라고 보낸 석가삼존불입상 양식은 동위에서 북제에 걸치는 시기의 (도판 7) 양식을 보였거나, 고구려 안원왕 9년(539) 계미에 만들어진 (도판 8) 내지 평원왕 5년(563) 계미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과 같은 양식 계열의 불입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연히 황룡사의 장륙석가삼존입상 양식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터이니, 옷주름이 단정하게 정리된 포복식 불의를 입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지었으며 왼손은 여원인을 짓되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꼬부려서 무엇을 집어주는 듯한 순간 동작을 나타냈을 것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할 가능성이 큰데 의 얼굴처럼 순박한 표정을 지었을 듯하다.

    연가(延嘉) 7년명불입상

    그러면 여기서 잠시 고구려 쪽으로 눈을 돌려 을 살펴보기로 하자.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서기전 334∼325년)과 한(漢) 무제(武帝)의 서역(西域)경영(서기전 121∼102년)은 인도인들에게 인도 이외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지금껏 믿어왔던 인도대륙 중심의 편협한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무수한 다른 세계의 존재를 상정(想定)하게 되고 그 세계들과의 공존을 당연한 우주 섭리(攝理)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에 불교에서도 교조(敎祖) 석가모니 부처님과 동등한 부처님이 다른 세계에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인도에서 나신 부처님의 말씀만이 진리가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다 진리라는 합리적인 사고 속에서 도처에 존재하는 모든 진리는 다 불설(佛說)이라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교리 체계를 확립해 나간다. 이것이 곧 대승(大乘)사상의 출현이다.

    따라서 대승사상의 발흥(發興)은 곧 공간개념에 있어서 무수한 타방세계 불보살의 출현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고, 뒤이어 시간개념에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에도 그에 알맞은 불보살의 설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위 삼겁삼천불설(三劫三千佛說)이다.

    유송(劉宋; 420∼478년)시대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하였다는 ‘삼겁삼천불연기(三劫三千佛緣起)’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무수억겁시 묘광불(妙光佛)의 말법(末法) 중에 나셔서 출가하여 불교를 배우실 때 53불의 명호(名號)를 듣고 마음에 환희심이 생겨 남들에게도 전해주니 모두 이구동음(異口同音; 서로 다른 입이 소리를 같이 냄)으로 여러 부처님의 이름과 호를 부르며 한 마음으로 공경 예배하였다.

    이 인연공덕의 힘으로 말미암아 무수억겁의 생사고(生死苦)를 벗어나서 처음 천인(千人)은 과거 장엄겁(莊嚴劫) 중에 성불하여 과거 천불이 되었고, 다음 천인은 현재 현겁(賢劫) 중에 차례로 성불하여 현재 천불이 돼가고 있으며, 다음 천인은 미래 성수겁(星宿劫) 중에 응당 성불하여 미래 천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번역자의 이름을 잃었지만 바로 이 ‘삼겁삼천불연기’에 뒤이어져야 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어 역시 강량야사의 번역이라고 보아야 할 듯한 ‘삼겁삼천불명경(三劫三千佛名經)’ 상·중·하 3권[각각 독립되어 과거 현재 미래 3종의 천불명경(千佛名經)으로 널리 유포되어 있음]은 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들이 이 삼세 삼겁 제불세존(諸佛世尊)의 명호를 듣고 환희심을 가지고 독송하며 비방하지 않고 혹은 베껴서 남을 위해 말해주며 혹은 능히 부처님 형상(形像)을 그리고 만들어 세우거나 혹은 능히 향과 꽃, 춤과 음악으로 공양하여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고 지심(至心)으로 예배하게 되면, 모두 삼세 삼겁 중의 부처님들에게 수기(受記; 장차 성불할 수 있다는 예언)를 받을 수 있고 항상 나는 곳마다 삼보(三寶)를 만나게 되며 늘 불찰토(佛刹土; 불국토)에 나되 불구가 되거나 팔난(八難)에 떨어지지 않고 부처님의 32상 80종호 및 지혜(智慧) 변재(辯才; 말솜씨)를 갖출 수 있어 아미타불과 같이 당당한 과보로 수명이 끝이 없게 된다.”

    이에 이 경전을 읽은 많은 선남자·선여인들이 이 삼천불상 조성에 열을 올리게 되었던 듯하니 이 도 그렇게 만들어진 삼겁삼천불상(三劫三千佛像) 중의 하나인 듯하다. 광배(光背) 뒷면에 다음과 같은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이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연가(延嘉) 7년 기미세(己未歲)에 고려국(高麗國) 낙랑(樂良) 동사(東寺)의 사주(寺主)로 (부처님을)공경하는 제자인 승연(僧演)이 사도(師徒) 40인과 함께 현겁 천불을 조성하여 유포(流布)한다. 제29 인현의불(因現義佛)이니 비구 법영(法穎)이 공양한 바이다(延嘉七年, 歲在己未, 高麗國樂良 東寺主 敬弟子僧演, 師徒人, 共造賢劫千佛, 流布. 第二九因現義佛, 比丘法穎所供養).’

    이 명문에 따르면 현겁(賢劫) 천불 중의 제29번째 인현의불에 해당하는 이 불입상(佛立像)은 연가 7년 기미세에 고려국 낙랑에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현겁경(賢劫經)’ 권6 천불명호품(千佛名號品)이나 ‘현재현겁천불명경’에서 분명히 제29번째가 인현의불이라 하였으니 이런 경전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고려라고 불린 나라가 고구려와 고려 두 나라가 있었고, 연가(延嘉)라는 연호(年號)는 중국과 우리나라 어느 쪽에서도 사용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얼핏 이 조상기(造像記)를 대하면 당혹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해 여러 가지 견해를 발표한 바 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곳에서 고려는 고구려이고 연가라는 연호는 고구려의 연호로 역사 기록에서 빠뜨려 잃어버린 일연호(逸年號)라 주장하면서 불상 양식으로 보아 6세기 내의 어느 기미년(己未年: 539년이나 599년)에 해당할 것이라는 쪽으로 의견을 좁혀 오고 있다(金元龍, 좥延嘉七年銘金銅如來像銘文,『考古美術』 제5권 제9호, 1964. 黃壽永, 「高句麗 金銅佛의 新例 二座」,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64. 尹武炳, 「延嘉七年銘金銅如來像의 銘文에 대하여」, 『考古美術』 제5권 제10호, 1964. 金煐泰, 좥賢劫千佛信仰좦. 『三國時代佛敎信仰硏究』, 1990).

    미술사에 대한 기초 소양 정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에 대해 이견(異見)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는 539년작인지 아니면 599년작인지가 문제다. 필자는 여기서 539년 설을 지지하면서 그 이유를 밝혀 나가기로 하겠다.

    우선 연호(年號) 문제다. 539년은 고구려 안원왕(安原王) 9년이고 599년은 고구려 영양왕(陽王) 10년이다. 그런데 안원왕은 3년 정월에 왕자(王子) 평성(平成)을 태자로 세워 ‘경사(慶事)를 연장한다’는 의미인 연가(延嘉)의 뜻에 합당한 연호로 개정할 계기를 맞고 있다.

    이에 반해 영양왕(590∼617년)은 수(隨)의 중원(中原) 통일(統一; 589년) 직후에 등극하여 거의 수나라에 대한 항쟁(抗爭)으로 재위 기간을 다 보내면서 수와 운명을 같이하는 동안 태자(太子)를 책봉할 여유가 없이 지내다 돌아감에 따라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군공(軍功)이 컸던 왕제(王弟) 건무(建武)가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연가의 의미에 해당하는 연호 사용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연가는 안원왕 때에 사용되던 연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이를 더욱 뒷받침해 주는 것은 명문(銘文)의 서체(書體)가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 500∼515년) 때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 ‘양대안위효문황제조상기(楊大眼爲孝文皇帝造像記)’의 정서체(正書體)와 방불하여, ‘려(麗)’자 같은 것은 거의 모든 특징이 한 솜씨인 듯 닮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불입상을 539년작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조상양식(造像樣式)이다. 우선 불상의 자태를 결정지어주는 의복 처리가 북위 효문제(孝文帝: 471∼499년) 초에 완성된 포복식 불의(袍服式佛衣)의 형태인데, 이 양식의 소형 금동불이 출현하는 것은 효문제 말년인 태화(太和) 17년(493)경 부터다. 그래서 다음 선무제 말년경부터는 이런 양식이 점차 주도권을 잡아 나가다가 효명제(孝明帝; 516∼528년) 중기인 정광(定光; 520∼524년) 연간에 이르러서야 그 발전이 절정에 다다른다.

    (도판 9)이 이런 양식적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차면 넘치는 문화전파 속성 때문에 이 어름에 고구려에도 이런 양식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연가7년명불입상〉이 그 가능성을 현실로 증명해 준 것이다.

    불의(佛衣)의 형태뿐만 아니라 갸름하고 윤곽이 분명하여 귀티나는 용모에 긴 목과 차분한 어깨로 청수(淸秀)한 기품과 총명 온후한 성정을 표출시키는 조형의장까지도 이 시기의 북위 금동불과 연계되는 느낌이어서 동시대양식(同時代樣式)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해준다. 여기에 단정하게 층층이 둘러 올라간 나발(螺髮)의 표현과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펴고 왼손을 허리 근처에 올려 펴되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구부려 펴지 않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특징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다만 표현방법에 있어서 단순(單純) 소박(素朴)이라는 우리 고유 미감을 고수함으로써 북위불에 비하여 천진무구성(天眞無垢性)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이 불입상은 양식적으로 6세기 전반기에 북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확산 현상을 일으켜 가던 국제양식에 속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니, 역시 539년 설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한반도 동남쪽 귀퉁이에서 일어난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켜 경상도 일원을 아우른 다음 차츰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분쟁에 끼어들어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강유역과 척추에 해당하는 강원도와 함경남도까지 차지하게 되자, 이 영토확장을 달성해낸 진흥왕은 천하를 통일하고 왕권을 절대화하려는 야욕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모후의 보호 아래 거칠 것 없이 성장하면서 시운(時運)을 잘 만나 고구려와 백제의 물불 가리지 않는 혈투 사이에서 힘들이지 않고 양대 강국의 땅을 잠식해 그 요지를 모두 차지하는 행운을 만났으니 어찌 그런 야욕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때맞춰 수용된 불교가 인과(因果)와 윤회(輪回)라는 충격적인 논리로 기존 사고의 틀을 파괴하기에 이르자 유교문화 충격을 거치지 않은 신라사회에서는 샤만의 신정일치(神政一致) 전통과 맞물리며 절대 순수혈통의 신족(神族) 관념이 되살아나 절대왕권의 출현을 합리화해갔을 터이니, 진흥왕의 이런 태도를 당시 신라사회가 당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듯하다.

    이에 본래 평등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웠던 불교의 인과와 윤회설은 신라사회에서 정반대로 전도되어 계급제도를 절대화하는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더구나 불교가 타파의 대상으로 여겨 불경 곳곳에서 언급한 인도의 4성제(四姓制)를, 신라사회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일상적인 사회제도로 수용해 들이려는 경향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 진흥왕은 자신이 참된 뼈대(眞骨)를 타고난 절대 유일의 군주로 이를 처음 일으킨 왕이란 의미에서 스스로 진흥왕이라 일컬었던 듯하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아들대에 가서는 천하를 통일하는 왕중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큰아들의 이름을 동륜(銅輪), 작은아들의 이름은 금륜(金輪)이라 지었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5, ‘중아함경(中阿含經)’ 권41,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 권 상 등에서는 만약 32상을 타고나서 재가(在家)하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出家)하면 불타가 된다고 하였다. 또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권30이나 ‘구사론(俱舍論)’ 권 12 등에서는 전륜성왕의 종류가 금, 은, 동, 철의 4종이 있는데 금륜성왕이 나오면 금륜보(金輪寶)가 따라 나오고 은륜성왕이 나오면 은륜보가 따라나오는 등 각기 그 이름에 따른 윤보가 따라나온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나 금륜성왕은 4주(洲)를 다스리고, 은륜성왕은 3주, 동륜성왕은 2주, 철륜성왕은 1주를 각각 다스린다 하였다. 진흥왕이 큰왕자 이름을 동륜이라 짓고 막내 왕자 이름을 금륜이라 지은 의도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태자로 있다가 진흥왕보다 앞서 돌아간 동륜태자의 아들들 이름에 이르면 진흥왕의 의도가 무엇인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큰왕손은 백정반(白淨飯), 둘째 왕손은 백반(伯飯), 셋째 왕손은 국반(國飯)이다.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왕 형제들 이름이다.

    그런데 동륜태자가 요절하니 막내 왕자 금륜이 왕위에 올라 진지왕(眞智王, 576∼578년)으로 진자(字) 왕호를 계승하고, 동륜태자의 장자인 백정반이 왕위에 나가서는 진평왕(眞平王, 579∼631년)이란 이름으로 진자 왕호를 다시 잇는다.

    그런데 진평왕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버지 이름을 가진 것이 아니다. 진평왕비마저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인 마야(摩耶)부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서는 당연히 석가모니불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석가불은 이미 1000여년 전에 인도 가비라성에서 태어났던 과거불이다. 그러니 신라에서는 당래불(當來佛; 미래에 마땅히 출현할 부처님)인 미륵불이 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중국문화권으로 들어오며 여체(女體)로 인식되기 시작한 미륵보살의 화신(化身)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출현하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종래에는 신라가 모계사회 전통이 강하여 여왕이 출현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는 일제 사학자들이 일본이 섬나라라는 특수성 때문에 모계사회 전통에 의해 여왕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우리 역사 연구에 적용해서 생긴 오류인데, 우리는 이를 이제까지 아무 생각없이 수용해 들이고 있다.

    모계사회는 아비를 알 수 없는 자식이 태어나는 사회환경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유목사회나 섬 지역에서 주로 형성된다. 즉 정착생활이 불가피한 농경사회에서는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삼국지(三國志)’ 권30 왜전(倭傳)에 보이는 여왕국 기사나 왜여왕(倭女王) 비미호(卑彌呼) 얘기가 이를 대변해 준다. 위(魏) 명제(明帝) 경초(景初) 2년(238) 6월에 왜여왕 비미호가 대부(大夫) 난승미(難升米)와 도시우리(都市牛利)를 대방군에 보내 천자에게 조공을 바치므로 12월에 조서를 내려 비미호여왕에게 친위왜왕(親魏倭王)의 인신(印信; 도장)을 내리고 난승미에게는 솔선중랑장(率先中郞將), 도시우리에게는 솔선교위(率先校尉)의 벼슬을 주며 조공에 답하는 응분의 하사품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일본은 국제사회에 그 존재가 알려질 때부터 여왕국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시조 이래 선덕여왕 때까지 여왕이 존재한 적이 없으며 왕태후의 섭정도 진흥왕 태후가 처음이니 북위 문명(文明)태후 풍씨(馮氏)나 영(靈)태후 호씨(胡氏)의 전례를 듣고 행한 개화(開化; 개방변화) 행위였을 듯하다.

    따라서 신라는 모계사회라고 단정지을 수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여왕이 출현하였다는 것도 당연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이 미륵의 화신으로 출현했을 가능성에 대해 근원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 먼저 미륵의 존재에 대해 구체적인 이해를 하고 나가야겠다.

    미륵보살은 누구인가

    미륵(彌勒)은 범어(梵語) 마이트레야(matreya)의 음역(音譯)으로 자씨(慈氏)라고 의역(意譯)하기도 한다. ‘현우경(賢愚經)’ 권12 바파리품(波婆梨品)에 의하면, 중인도 바라나국(波羅奈國, V?r?n?si)의 바라마달왕(波羅摩達王)에게 한 재상이 있어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삼십이상(三十二相)을 타고 났으며 그 어머니가 애를 가진 다음부터 마음이 자비롭게 변하였다.

    그래서 관상사(觀相士)의 뜻에 따라 미륵(자비의 의미)이라고 이름하였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기 때문에 당시 바리불다라국(波梨弗多羅國) 국사(國師)였던 외숙부(外叔父) 바파리(波婆梨)에게 나아가 경서(經書)를 배우게 된다. 오래지 않아 여러 경전을 꿰뚫어 알게 되자 바파리는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이름을 떨치는 석가모니불이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중(耆山中)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미륵 이하 총명한 제자 16인을 보내어 석가불을 시험하게 한다.

    여기서 바파리(波婆梨)의 16제자는 모두 석가불에게 감화되어 불제자가 된다. 그런데 미륵을 제외한 15인은 즉시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지만 미륵은 장차 석가모니불의 교화(敎化)가 끝난 다음 이 사바세계에 다시 출현하여 교화(敎化)할 부처님이 될 인연이 있으므로 일생보처불(一生補處佛; 중생을 모두 이끌고 대각을 이루기 위해 한 생만 더 후보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불타), 즉 보살로 남게 된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에게 입히려고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사파제(摩訶波波提)가 당신의 유성출가(踰城出家) 이후 긴 세월을 두고 금실로 정성들여 짜놓은 금루직성가사(金縷織成袈裟; 금실로 짜낸 가사)를 받아서 미륵에게 전해 주면서 장차 이 지구상(閻浮提)의 인간 수명이 8만4000세가 될 때, 즉 56억7000만 년 후에 미륵이 다시 지구상에 태어나서 성불(成佛)하고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삼회(三會)의 설법을 하여 널리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들은 ‘중아함경(中阿含經)’ 권13 설본경(說本經), ‘잡보장경(雜寶藏經)’ 권4 대애도시불금루직성의병천주사연(大愛道施佛金縷織成衣幷穿珠師緣) 등 원시경전에도 수록되어 있어 미륵보살은 실재했던 석가세존의 제자였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대승사상의 진전과 더불어 미륵보살은 당래불(當來佛; 미래에 마땅히 와야 할 불타)로의 중요성 때문에 대승보살(大乘菩薩)로도 각광을 받게 되어, ‘법화경(法華經)’ 권6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이나 ‘구화엄경(舊華嚴經)’ 권60 입법계품(入法界品) 등 대표적인 대승경전에서도 석가 회상의 상수보살로 등장하게 되며,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과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서는 경전의 주역으로 부상한다. ‘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 즉 ‘미륵상생경’은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상생(上生)하여 때를 기다리는 정황을 서술한 내용이고, ‘미륵하생경’은 미륵보살이 지구상에 하생(下生)하여 성불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가는 과정을 서술한 내용이다.

    그런데 미륵보살상의 상호(相好)를 규정짓는 경전은 ‘미륵상생경’이다. 경문(經文) 일부를 옮겨 보겠다.

    “그때에 도솔천 칠보대내(七寶臺內) 마니전상(摩尼殿上) 사자좌(獅子座)의 연꽃 위에 홀연히 화생(化生)하여 가부좌를 틀고 앉으시니 몸은 염부단금색(閻孚檀金色)과 같고 키가 16유순[由旬, 1유순은 성왕(聖王)의 하루 행정(行程)인 40리 혹은 80리]이며 32상 80종호를 모두 갖추시었다. 정수리 위에는 육계(肉)가 있고 머리칼은 검푸른 유리색이며 석가비릉가보주(釋迦毘楞伽寶珠)와 백천만억 견숙가보(甄叔迦寶)로 천관(天冠)을 장식하니 그 천관에서 백만억색이 나오고 하나하나의 색 중에는 한량없는 무수한 화불(化佛)이 나오는데 여러 보살들로 시자(侍者)를 삼았다.”

    이런 내용을 기본으로 하여 2세기 중기에 쿠샨제국의 간다라 지역에서 미륵보살상을 처음 만들어내고 있다. 입상(도판 10)과 두 다리를 교차시키고 앉아 있는 교각좌상(橋脚坐像)(도판 11), 한 발은 땅에 딛고 한 다리만 가부좌를 튼 반가좌상(半跏坐像)(도판 12) 등 3가지로 만들었다.

    위 경전에서는 이 보살상 자체가 부처님의 특상인 32상 80종호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특히 정수리 위에 육계(肉)가 있고 머리칼이 검푸른 빛이라 하여 높고 큰 상투 내지 그것을 틀 수 있는 훌륭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 석가비릉가(釋迦毘楞伽)라는 보주와 견숙가(甄叔迦)라는 보석들로 화려하게 꾸민 천관을 썼다고 한다.

    이것이 이미 만들어진 간다라 미륵보살의 머리 모양을 보고 서술한 것인지, 이 내용에 따라 간다라 미륵보살의 머리 모양이 만들어졌는지 그 선후관계는 명확지 않으나 경문 내용과 현존한 미륵보살의 머리 모양은 거의 일치한다. 도판으로 보여준 미륵보살상들의 머리 모양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위성(舍衛城)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이 경전을 설하면서 이 경전이 설해지고 난 12년 후에 미륵은 자신이 출생한 바라나국(波羅奈國) 겁바리촌(怯波利村)으로 돌아가 결가부좌하고 입멸(入滅)할 것이고 그 몸은 전신이 주금상(鑄金像; 금을 부어 만든 형상)과 같이 되며 그 사리상(舍利像; 전신이 그대로 사리가 되어 몸매를 원형대로 유지하고 있는 형상)을 위하여 제천(諸天)이 보탑(寶塔)을 세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의 애제자이던 미륵은 세존에 앞서 입멸하고 그 전신상(全身像)이 보존된 듯한 느낌이 든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44 십불선품(十不善品)과 ‘미륵하생경’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이 미륵에게 전해준 금루가사(金縷袈裟)는 석가모니불의 상수(上首)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이 열반에 들지 않고 마가다국 비제촌(毘提村) 계족산중(鷄足山中)의 굴 속에 보관하고 있다가 미륵보살이 도솔천의 천수(天壽)인 4000세를 채우고(도솔천의 1일은 인간의 400년에 해당하므로 5억7400만년이 된다. 56억7000만년은 잘못된 계산이다)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대각(大覺)을 이루고 난 다음 미륵에게 전수된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 소개하는 보살상의 옷차림은 상생한 도솔천주(兜率天主)의 차림새이거나 하생하여 성불(成佛)하기 전의 태자(太子)인 미륵보살의 차림새일 것이다. 그래서 당시 왕자(王者)들의 호사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는데 갖은 보배로 장식한 천관(天冠) 외에 귀고리와 이중의 목걸이, 이중의 팔찌, 오른쪽 어깨와 겨드랑이 사이를 둘러 왼쪽어깨로 넘긴 구슬걸이 및 향주머니, 소도구(小道具)가 든 주머니들을 잇대 달아맨 가슴걸이 등으로 요란한 치장을 하고 있다.

    왼손에는 정병(淨甁)을 식지(食指)와 중지(中指) 사이에 끼워 들고 있는데 이것은 제액구고(除厄救苦; 재앙을 없애고 고난에서 구해줌)를 상징하는 물병이거나 관정(灌頂; 정수리에 물을 뿌려주는 세례 의식)을 위한 향수병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무엇이건 미륵보살의 명호(名號)를 부르거나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들이 곧장 도솔천으로 상생하는 것에 대비하여 늘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이 3종의 미륵보살상이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다른 보살상과 마찬가지로 수염이 소멸하여, 거의 여체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화려한 보관장식과 몸치장에 동원된 각종 영락(瓔珞)장식 때문이다. 뒤로 늘어뜨린 머리카락도 한몫 거들었다. 더구나 중국의 전통적인 음양오행 사상이 삼존상일 경우 일양이음(一陽二陰; 양은 하나이고 음은 둘임)의 음양조화로 이해하여 좌우협시 보살을 여체로 표현하는 것을 당연시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미륵보살이 여자이리라는 생각은 북위에서 황제가 곧 지금 세상의 여래라고 생각하며 불교 발전이 극에 이르렀던 시기인 문성제(453∼465년) 이후에 문명태후와 영태후가 차례로 나와 여자이면서 섭정으로 대권을 잡고 천하를 호령하면서 더욱 일반화되기 시작했던 듯하다.

    그런데 최근 돈황 막고굴의 보수와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중국인 학자 단문걸(段文傑)은 미륵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돈황 제275굴을 조사 연구하면서 교각좌상은 상생미륵보살상이고 반가좌상은 하생미륵보살상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한다. 타당한 견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북위 후반기부터는 상생보살인 미륵교각상보다 하생보살인 미륵사유반가좌상이 더욱 많이 만들어진 듯하다.

    그 양식적 특색은 아직 유방이 생기지 않은 소녀상이나 여성적 용모를 갖춘 미소년상과 같이 가냘픈 몸매를 갖는 것인데, 청정무구한 법체(法體)를 연상시켜 극도의 추상적 세련미를 도출해 낸다(도판 13).

    이런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 양식이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 장차 신라에 전해지게 되고 미륵의 화신으로 실제 출현한 선덕여왕의 초상조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구려와 백제에서 먼저 만들어져 유행하였을 이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은 금동이나 활석 등 석조로 만들어진 유례가 상당히 남아 있지만 그것이 대개 소형의 독립상이라서 이동이 가능하므로 출토지만 가지고는 만든 곳을 확정짓는 데 충분조건이 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도판 14)에서 좌협시보살로 이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이 등장하고 있어 백제 미륵상의 표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로써 고구려와 신라의 미륵상까지 분류해 낼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었다. 이에 우선 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서산마애삼존불

    한반도의 정기(精氣)를 한데 모아 중국 대륙을 향해 불끈 힘주어 뽐내듯 서해로 돌출한 것이 태안반도다. 이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으로부터 동해변을 따라 남진해온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속리산에서 다시 남진으로 바뀌면서 그 역세(逆勢)를 몰아 일지맥(一支脈)을 나누어 북상시키니,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남정맥은 남한강 물을 몰고 북진하다가 경기도 죽산 칠현산을 지나 장항령에 이르러서는 한가닥을 서남쪽으로 틀어 금북정맥을 만들어나간다.

    금북정맥은 경기 충청 양도의 도계를 이루며 서진해 가다가 천안 성거산에 이르면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보령 오서산까지 오는데, 이곳에서 돌연히 일지맥을 서북쪽으로 뻗어올린다. 그래서 가야산(伽倻山) 연맥이 남북으로 길게 우뚝 솟아 바다를 제압하면서 무수한 낙맥(落脈)을 사방으로 뻗어내려 태안반도를 만들어내며 복잡한 만곡(彎曲)을 이루어 놓으니 아산만(牙山灣), 당진만(唐津灣), 가로림만(加露林灣), 천수만(淺水灣)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만곡들은 대체로 가야산 연봉(連峰)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이 합수(合水)되어 흘러 들어오는 큰 시내와 연결돼 있고, 이곳 서해는 조석간만 차가 크기 때문에 바닷물을 내륙 깊숙이 밀어넣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넓은 평야와 구릉지대로 이루어진 가야산 주변의 내포(內浦)평야 일대를 더욱 기름지게 하고 교통을 편리하게 하여 일찍부터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하였으니 신석기시대부터 그 문화유적을 곳곳에 남겨 놓고 있다.

    특히 해양세력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던 백제시대에는 이곳의 중요성이 더욱 고조되어 국제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던 듯한데, 백제가 한강 유역과 강화만 일대의 해상통치권을 상실하고 나서 금강 유역으로 밀려났던 문주왕(文周王, 475∼476년)대 이후로는 거의 백제 해상활동의 전진기지화하는 느낌이 짙다.

    그래서 한강 선단(船團)의 궤멸로 일시 제해권(制海權)을 고구려에 빼앗겼다가 이를 다시 찾아 해상활동을 재개함으로써 해양왕국(海洋王國)의 체면을 되살리던 무령왕(武寧王) 21년(521) 이후에 이곳의 번영과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으니, 그 결과 성왕(聖王, 523∼553년) 초년에는 큰물현(今勿縣) 안개(內浦) 깊숙한 가야산 기슭인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 (제7회 도판 7)이 조성되고 위덕왕(威德王, 554∼597년) 초년에 (제7회 도판 9)이 가로림만 깊숙한 물길 좋은 태안의 진산(鎭山) 백화산(白華山) 상에 조성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과 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이제는 태안반도 북쪽 당진만에서 역천(驛川)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서 그 물길의 발원처에 가까운 가야협(伽倻峽)에 한층 세련된 마애삼존불을 조성해 이 시대 이곳의 문화역량을 과시한다.

    이곳 마애삼존불이 조성된 가야협은 가야산 연봉이 남북으로 달리면서 북쪽으로 터놓은 계곡인데 일찍이 상왕국(象王國)의 도읍터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뒷날 신라 통일 이후에는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인 보원사(普願寺; 講堂寺)가 세워지는 곳이다. 화엄십찰은 신라가 통일을 성취한 뒤에 왕국 내의 오악(五岳) 사진(四鎭)에 해당하는 각 지방의 요충에 세운 절이다. 이는 통일왕조의 정치·군사·문화적 우위를 각처에 과시하여 민심을 진압하고자 하는 의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 십찰 중의 하나로 보원사가 건립되었다면 이곳이 통일 후에 정치·군사·문화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던가를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다. 이는 곧 그 이전 백제 때 이곳이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요지(要地)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백제 시기에 조성된 마애삼존불의 존재가 이를 증명해준다.

    뿐만 아니라 이 마애삼존불이 있는 곳에서 산봉우리 두어 개를 넘어 동쪽으로 가면 10여 리 남짓한 곳에 무령왕의 초상 조각으로 추정되는 예산(禮山) 화전리(花田里) 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50리쯤 동남쪽으로 가면 백제 최후의 항전이 있었던 임존성(任存城)이 존재하여 이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명해 준다.

    어떻든 이 은 백제가 제해권을 탈환하여 중흥의 기치를 높이 들던 성왕과 위덕왕 시대 어름에 조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보다는 훨씬 세련된 양식기법을 보이고 있어 적어도 30여년의 양식적 시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니 위덕왕 말년경이나 위덕왕이 돌아간 직후의 제작으로 보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가야협의 내수구(內水口)에 해당하는 암벽이 동서로 솟아 있는 중에 동편 암벽의 남면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이 마애삼존상은 근본적으로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이 보이던 양불협시(兩佛脇侍)라는 불합리성이 청산되어 1불2보살이 이루는 삼각구도의 정통 삼존불(三尊佛) 양식을 갖추게 되면서 조각 기법이 크게 진전되고 있다.

    주불(主佛)은 얼굴 윤곽이 살아나서 의 오목한 특성을 극복하였고, 이목구비를 모두 시원시원할 정도로 분명하게 표현하여 통 크고 명랑 쾌활하며 넉넉한 인품을 가진 대장부의 기상을 드러내게 하였다. 그러나 귓불은 오히려 축소되어 사실감(寫實感)을 더해주고 있다. 크게 뜬 눈, 넓은 눈두덩과 수려한 눈썹, 들창코에 가깝게 드러낸 콧구멍과 넓은 콧방울, 한껏 긴장시킨 아래위 입술과 양볼 근육, 이런 표현들이 정말 반가워 미소짓는 애정어린 표정을 짓게 하였다. 이것을 일러 백제의 천진한 미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포복(袍服)의 옷주름 표현도 가능한 한 억제하였다. 다만 대여섯 줄의 물결무늬를 음각 처리하였으되 오히려 포복불의(袍服佛衣)의 본질이 제대로 드러난 듯하고 신대(紳帶; 중국 문화권에서 상류층이 예복인 도포 위 가슴 부근에 매던 띠)의 매듭도 자연스럽다. 어깨가 매우 넓어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지만 의 양불(兩佛)보다는 날이 죽어서 경직감(硬直感)이 조금 해소되었고, 시무외(施無畏) 여원인(與願印)을 한 양 손의 높이도 오른쪽이 높고 왼쪽이 낮도록 차이를 두는 동시에 여원인을 한 왼쪽 손만 끝의 두 손가락을 구부리게 하는 변화를 주어 자세를 천연스럽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둥글고 부드러운 백제 특유의 연꽃잎을 가진 복련(覆蓮)의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맨발로 가지런히 서 있는 모습으로 발가락들이 너무 분명하여 큰 발을 연상케 하니 혹시 이는 불족적(佛足跡)을 의식하여 일부러 이런 표현을 시도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느낌이 든다.

    광배는 촛불꽃 모양으로 겉테 안에는 불꽃의 표현이 있고 그 속에 3구의 화불(化佛) 표시도 있으며 안테 속은 둥근 테 안에 활짝 핀 연꽃이 머리를 싸고도는 형태다. 두광(頭光; 머리에서 솟아나는 빛)의 의미를 충실하게 드러내면서도 단순화시킨 이상적인 표현이다. 좌우협시의 두광에 이르면 불꽃의 표현조차 생략되어 더욱 단조로워지지만, 이는 오히려 보살의 복잡한 보관(寶冠) 장식과 대비를 이루어 시각 효과를 높여 준다.

    보통 삼존불 양식과는 구성요소가 사뭇 달라 좌협시가 보살반가사유상(菩薩半跏思惟像)이고 우협시가 구슬을 받쳐든 봉주보살입상(捧珠菩薩立像)이다. 이런 삼존 구성은 아직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 의 삼존 구성과 함께 학계에 불가사의로 남아 있는데, 당시 가장 널리 신앙되던 관세음보살과 미륵보살로 추정하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주장이다.

    좌협시 미륵보살사유반가좌상을 살펴보면, 의자에 앉아서 왼발을 땅에 딛고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는 반가좌세를 취하며 오른쪽의 구부린 무릎을 약간 들어올린 듯하면서 오른쪽 팔굽을 그 위에 기대 세워 오른쪽 턱을 받쳐 생각에 잠긴 자세를 짓고 있다. 그러나 얼굴 표정은 환희에 가득 차서 웃음기로 활짝 펴 있으니 고뇌하는 사유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오히려 법열(法悅)에 가득 찬 열락(悅樂)의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상반신은 천의(天衣) 한 조각 걸치지 않은 알몸인데 목에는 불꽃 모양의 큼직하고 단순한 목걸이가 걸려 있고 허리에 느직하게 치마 허리가 매어져 있어 치마폭이 그 아래로 흘러 내려와 무릎 아래로 덮어 내려갔다. 그 흘러내린 옷자락 표현은 층단을 이루는 포복 형태다.

    마치 접시꽃같이 만개한 둥근 꽃장식을 산모양으로 휘어놓은 모자테의 아래위로 장식하여 복잡한 듯 단순하게 만든 화관을 쓰고 있는데, 그 뒤로는 연꽃잎이 둘러진 두원광(頭圓光)이 표현되고 그 둘레에는 마치 해무리처럼 둥근 불꽃무늬가 표현되며 촛불모양의 불꽃이 그 위로 다시 새겨져 이른바 촉염광(燭炎光; 촛불꽃 형태의 광배) 형태의 두광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은 태안반도 특유의 둥글고 넉넉하여 후덕한 모습이다. 화관의 끈이 좌우로 늘어져서 어깨 아래 가슴 부위까지 내려와 있다.

    오른쪽 협시인 관세음보살 입상도 거의 같은 모습인데 다만 두 손으로 보주(寶珠), 즉 구슬을 정면에서 가슴 근처까지 높이 받쳐들고 있으며 구슬을 받쳐든 두 손의 양팔뚝 위로 천의가 걸쳐져 내려온 것이 다를 뿐이다. 화관도 정면 중앙에 꽃술 형태가 높이 양각되고 그 주변으로 꽃잎이 덩굴 형태로 변형되어 둘러싸며 양쪽 아래로 활짝 핀 접시꽃 두 송이가 장식된 형태라서 미륵보살의 화관과는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 협시보살 모두가 너무 활짝 펴서 꽃잎이 아래로 뒤집혀진 듯 엎어진 연꽃(覆蓮)의 씨방 위에 올라서 있다.

    이 삼존불상은 1959년에 학계에 공식 보고되었으나 이미 선조(宣祖, 1568∼1608년) 때에 이루어진 서산구지(瑞山舊誌)인 ‘호산록(湖山錄)’의 상왕산(象王山) 조에 “강당(講堂) 불상이 두 번 땀 내고 문현봉(門懸峰)이 방포성(放砲聲)을 내 내포 일대의 병화(兵禍)를 막아주었다”고 기록하여 이 삼존불상이 인근 내포 일원의 주민에게 얼마만큼 존숭되었던가를 알려주고 있다.

    이 삼존불상의 정면에 솟아 있는 바위가 ‘인(印)바위’라 하는 것으로 상왕(象王)의 인보(印寶)가 감춰져 있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으니 이도 전통적인 큰 바위 숭배 신앙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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