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우리 문화 바로보기 ⑧

신라 선덕여왕은 미륵보살의 화신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신라 선덕여왕은 미륵보살의 화신

2/3
법흥왕이 돌아가자 법흥왕의 외손자이자 조카인 진흥왕(眞興王, 540∼575년)이 불과 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한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아우 입종(立宗)과 법흥왕녀 사이에서 난 왕손이었다. 왕이 어렸으므로 법흥왕녀인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게 되었는데, 진흥왕 5년(544) 갑자 2월에는 법흥왕 22년부터 짓기 시작한 대왕흥륜사를 완공하고 신라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니(僧尼; 비구승과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명실공히 불교의 공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신라승 각덕(覺德)이 최초로 양나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진흥왕 10년(549) 1월에 양무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각덕으로 하여금 불사리를 모시고 함께 돌아가도록 한다. 이것이 양무제가 보낸 최후의 사신이었다. 2월에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제를 유폐시켜 5월에 굶어 죽게 했기 때문이다.

어떻든 신라에서는 최초의 유학승이 불사리를 최초로 모시고 귀국하게 되자 진흥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까지 나가서 받들어 맞이해 들이도록 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진흥왕 11년(550) 3월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서로 침공하여 뺏고 뺏기는 틈을 타서 이찬(伊)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1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거드는 체하고 두 성을 모두 빼앗아 한강 유역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해 놓는다.

진흥왕이 불과 17세의 나이에 이와 같은 통치수완을 발휘하니 왕태후는 다음 해인 진흥왕 12년(551) 1월에 섭정을 거두고 친정(親政)을 허락하는 듯, 이해 정월에 개국(開國) 원년으로 개원한다. 법흥왕 22년(535)에 건원(建元) 원년으로 연호를 세운 지 16년 만의 일이었다.

이해 3월에 진흥왕은 정복지역을 순수(巡狩; 제왕이 돌아다니며 국토를 살펴봄)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 악성(樂聖) 우륵(于勒)을 만나 가야금과 가야 음악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이를 수용해 들인다.



이어서 9월에는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여 10군을 빼앗는다. 이때 고구려는 요동에서 돌궐의 침략을 받고 이를 물리치느라 남쪽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드디어 진흥왕은 14년(553) 2월에 월성의 동쪽(현재 절터를 보면 북쪽이라 해야 맞음)에 신궁을 크게 짓기 시작하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서 보이므로 왕은 왕궁터가 아니라고 생각해 이를 고쳐서 불사(佛寺)로 삼고 황룡사(皇龍寺)라 이름을 내린다. ‘삼국유사’ 권3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 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황룡사는 짓기 시작한 지 17년 만인 진흥왕 31년(570)에 완공한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으로부터 큰 배 한 척이 들어와 하곡현(河谷縣, 지금 울산) 사포(絲浦; 우리말 실개의 한자 표기이니 谷浦라고도 씀)에 정박하였다. 그 배는 사람이 타지 않은 황당선(荒唐船)으로 통첩문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서천축국 아육왕(阿育王)이 황철(黃鐵, 구리) 5만7000근과 황금 3만푼(分)을 모아 석가삼존상을 만들려 하였는데 이루어지지 않아서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이렇게 축원한다. ‘원컨대 인연있는 국토에 닿아서 장륙(丈六; 한길 6자, 키가 큰 사람이 8자, 즉 2m인데 이의 두 배이니 4m에 해당함)의 존귀한 모습을 이루소서.’ 그리고 모본으로 삼을 1불 2보살상을 함께 싣는다.

현의 관리가 이 사실을 장계로 아뢰니 칙명을 내려 그 현의 성 동쪽 시원한 땅에 동축사(東竺寺)를 지어 그 모본으로 삼을 삼존불을 맞이해 봉안하게 하고 그 금과 구리는 서울로 실어와 장륙삼존상을 주성(鑄成; 부어 만듦)하여 황룡사에 봉안하게 하니, 때는 진흥왕 35년(574) 갑오 3월이었다(절의 기록에는 계사년 573년 10월17일이라 돼 있다). 주존 석가 입상은 무게가 3만5007근이고 황금 들어간 것이 1만198푼이었으며 양대 보살상에 들어간 구리는 1만2000근, 황금은 1만136푼이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 권4 진흥왕 35년 조에도 간략하게 요약돼 있다.

그러나 이 황룡사 장륙전 봉안의 은 고려 고종 25년(1238) 윤 4월에 몽고병이 황룡사를 불지를 때 함께 타 녹아버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다. 동축사에 모셨던 본불도 황룡사 장륙존상이 이루어진 다음 황룡사에 모셔다 봉안했었다 하니 이 역시 황룡사가 불타 없어질 때 함께 녹아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인도불상의 출현을 살펴본 것처럼 불상 출현이 서력 기원 전후한 시기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서력 기원전 3세기경에 재위했던 아육왕(A쳒oka, 서기전 269∼232년)이 불상을 만들었을 리 만무하다. 또 그때부터 무인선이 구리와 금을 싣고 800년이 넘게 바다를 떠다녔을 리도 없다. 무인선의 정박 사실을 모두 인정한다 해도 당시 불국토 이상이 구현되었다고 생각하던 중국 남북조의 어느 나라에서 떠나 보낸 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진흥왕 31년(570)이라면 남조는 진(陳) 선제(宣帝, 569∼582년) 태건(太建) 2년에 해당하고, 북조는 북제(北齊) 후주(后主, 565∼576년) 무평(武平) 원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배가 진흥왕의 신정복지인 서해의 강화만이나 동해의 원산만에서 흘러왔을 수도 있다. 진흥왕은 이미 이 지역을 정복하여 수중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정복과정을 ‘삼국사기’ 권4 진흥왕본기를 통해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진흥왕 14년(553)에 백제의 동북지역인 남한강 상류 충주 일대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금관가야 사람들을 옮긴 다음 금관가야 최후 왕인 구해왕의 막내왕자 김무력(金武力)을 그 군주로 임명한다. 15년(554)에는 백제 성왕의 3만 대군을 관산성(옥천)에서 대파하고 성왕 이하 백제군을 전멸시킴으로써 금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하고, 16년(555) 10월에는 한강 하류 지역까지 장악하여 북한산을 순행하고 이곳으로 국경을 정한다.

한편 동쪽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쳐올라가서 17년(556) 7월에 벌써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둔다. 이어 18년(557)에는 강원도 영서의 국원(國原), 즉 원주를 소경(小京)으로 삼고 신주를 폐하며 북한산주를 둔다. 그리고 22년(561) 2월1일에는 5가야의 중심지역인 비사벌(比斯伐; 혹은 比自火, 우리말 브셔블, 즉 서울의 한자표기), 즉 지금의 창녕(昌寧)에 최초의 진흥왕 순수비(도판 4)를 세운다.

드디어 25년(564)에는 강화만을 통해 북제에 직접 사신을 보낼 수 있게 되니 북제 무성제(武成帝)는 다음해(565년) 2월에 진흥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봉한다. 한강유역을 모두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옥저와 예맥(濊貊)의 옛 땅인 함경남도와 강원도 일대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실력을 인정하여 낙랑군공을 봉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왕은 요동군공, 백제왕은 대방군공으로 봉한 것과 비교해 보면 이 당시 삼국 중 신라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해 남조 진(陳) 문제(文帝)는 신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며 석씨경론(釋氏經論; 불교의 경전과 논장) 1700여권을 보내기도 한다.

진흥왕 29년(568) 무자 정월에는 연호를 대창(大昌)으로 바꾸고 진흥왕은 그동안 확장한 영토를 순수하며 국경지역에 순수비를 세우니 함경남도 이원의 마운령비와 함흥의 황초령비(도판 5), 서울의 북한산비(도판 6)가 그것이다.

따라서 황룡사 장륙삼존상의 모본으로 삼으라고 보낸 석가삼존불입상 양식은 동위에서 북제에 걸치는 시기의 (도판 7) 양식을 보였거나, 고구려 안원왕 9년(539) 계미에 만들어진 (도판 8) 내지 평원왕 5년(563) 계미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과 같은 양식 계열의 불입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연히 황룡사의 장륙석가삼존입상 양식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터이니, 옷주름이 단정하게 정리된 포복식 불의를 입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지었으며 왼손은 여원인을 짓되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꼬부려서 무엇을 집어주는 듯한 순간 동작을 나타냈을 것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할 가능성이 큰데 의 얼굴처럼 순박한 표정을 지었을 듯하다.

연가(延嘉) 7년명불입상

그러면 여기서 잠시 고구려 쪽으로 눈을 돌려 을 살펴보기로 하자.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서기전 334∼325년)과 한(漢) 무제(武帝)의 서역(西域)경영(서기전 121∼102년)은 인도인들에게 인도 이외의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지금껏 믿어왔던 인도대륙 중심의 편협한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무수한 다른 세계의 존재를 상정(想定)하게 되고 그 세계들과의 공존을 당연한 우주 섭리(攝理)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에 불교에서도 교조(敎祖) 석가모니 부처님과 동등한 부처님이 다른 세계에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인도에서 나신 부처님의 말씀만이 진리가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다 진리라는 합리적인 사고 속에서 도처에 존재하는 모든 진리는 다 불설(佛說)이라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교리 체계를 확립해 나간다. 이것이 곧 대승(大乘)사상의 출현이다.

따라서 대승사상의 발흥(發興)은 곧 공간개념에 있어서 무수한 타방세계 불보살의 출현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고, 뒤이어 시간개념에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에도 그에 알맞은 불보살의 설정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위 삼겁삼천불설(三劫三千佛說)이다.

유송(劉宋; 420∼478년)시대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하였다는 ‘삼겁삼천불연기(三劫三千佛緣起)’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무수억겁시 묘광불(妙光佛)의 말법(末法) 중에 나셔서 출가하여 불교를 배우실 때 53불의 명호(名號)를 듣고 마음에 환희심이 생겨 남들에게도 전해주니 모두 이구동음(異口同音; 서로 다른 입이 소리를 같이 냄)으로 여러 부처님의 이름과 호를 부르며 한 마음으로 공경 예배하였다.

이 인연공덕의 힘으로 말미암아 무수억겁의 생사고(生死苦)를 벗어나서 처음 천인(千人)은 과거 장엄겁(莊嚴劫) 중에 성불하여 과거 천불이 되었고, 다음 천인은 현재 현겁(賢劫) 중에 차례로 성불하여 현재 천불이 돼가고 있으며, 다음 천인은 미래 성수겁(星宿劫) 중에 응당 성불하여 미래 천불이 될 것이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번역자의 이름을 잃었지만 바로 이 ‘삼겁삼천불연기’에 뒤이어져야 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어 역시 강량야사의 번역이라고 보아야 할 듯한 ‘삼겁삼천불명경(三劫三千佛名經)’ 상·중·하 3권[각각 독립되어 과거 현재 미래 3종의 천불명경(千佛名經)으로 널리 유포되어 있음]은 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들이 이 삼세 삼겁 제불세존(諸佛世尊)의 명호를 듣고 환희심을 가지고 독송하며 비방하지 않고 혹은 베껴서 남을 위해 말해주며 혹은 능히 부처님 형상(形像)을 그리고 만들어 세우거나 혹은 능히 향과 꽃, 춤과 음악으로 공양하여 부처님 공덕을 찬탄하고 지심(至心)으로 예배하게 되면, 모두 삼세 삼겁 중의 부처님들에게 수기(受記; 장차 성불할 수 있다는 예언)를 받을 수 있고 항상 나는 곳마다 삼보(三寶)를 만나게 되며 늘 불찰토(佛刹土; 불국토)에 나되 불구가 되거나 팔난(八難)에 떨어지지 않고 부처님의 32상 80종호 및 지혜(智慧) 변재(辯才; 말솜씨)를 갖출 수 있어 아미타불과 같이 당당한 과보로 수명이 끝이 없게 된다.”

이에 이 경전을 읽은 많은 선남자·선여인들이 이 삼천불상 조성에 열을 올리게 되었던 듯하니 이 도 그렇게 만들어진 삼겁삼천불상(三劫三千佛像) 중의 하나인 듯하다. 광배(光背) 뒷면에 다음과 같은 조성연기문(造成緣起文)이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연가(延嘉) 7년 기미세(己未歲)에 고려국(高麗國) 낙랑(樂良) 동사(東寺)의 사주(寺主)로 (부처님을)공경하는 제자인 승연(僧演)이 사도(師徒) 40인과 함께 현겁 천불을 조성하여 유포(流布)한다. 제29 인현의불(因現義佛)이니 비구 법영(法穎)이 공양한 바이다(延嘉七年, 歲在己未, 高麗國樂良 東寺主 敬弟子僧演, 師徒人, 共造賢劫千佛, 流布. 第二九因現義佛, 比丘法穎所供養).’

이 명문에 따르면 현겁(賢劫) 천불 중의 제29번째 인현의불에 해당하는 이 불입상(佛立像)은 연가 7년 기미세에 고려국 낙랑에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현겁경(賢劫經)’ 권6 천불명호품(千佛名號品)이나 ‘현재현겁천불명경’에서 분명히 제29번째가 인현의불이라 하였으니 이런 경전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는 고려라고 불린 나라가 고구려와 고려 두 나라가 있었고, 연가(延嘉)라는 연호(年號)는 중국과 우리나라 어느 쪽에서도 사용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얼핏 이 조상기(造像記)를 대하면 당혹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해 여러 가지 견해를 발표한 바 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곳에서 고려는 고구려이고 연가라는 연호는 고구려의 연호로 역사 기록에서 빠뜨려 잃어버린 일연호(逸年號)라 주장하면서 불상 양식으로 보아 6세기 내의 어느 기미년(己未年: 539년이나 599년)에 해당할 것이라는 쪽으로 의견을 좁혀 오고 있다(金元龍, 좥延嘉七年銘金銅如來像銘文,『考古美術』 제5권 제9호, 1964. 黃壽永, 「高句麗 金銅佛의 新例 二座」, 『李相佰博士回甲紀念論叢』, 1964. 尹武炳, 「延嘉七年銘金銅如來像의 銘文에 대하여」, 『考古美術』 제5권 제10호, 1964. 金煐泰, 좥賢劫千佛信仰좦. 『三國時代佛敎信仰硏究』, 1990).

미술사에 대한 기초 소양 정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에 대해 이견(異見)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는 539년작인지 아니면 599년작인지가 문제다. 필자는 여기서 539년 설을 지지하면서 그 이유를 밝혀 나가기로 하겠다.

우선 연호(年號) 문제다. 539년은 고구려 안원왕(安原王) 9년이고 599년은 고구려 영양왕(陽王) 10년이다. 그런데 안원왕은 3년 정월에 왕자(王子) 평성(平成)을 태자로 세워 ‘경사(慶事)를 연장한다’는 의미인 연가(延嘉)의 뜻에 합당한 연호로 개정할 계기를 맞고 있다.

이에 반해 영양왕(590∼617년)은 수(隨)의 중원(中原) 통일(統一; 589년) 직후에 등극하여 거의 수나라에 대한 항쟁(抗爭)으로 재위 기간을 다 보내면서 수와 운명을 같이하는 동안 태자(太子)를 책봉할 여유가 없이 지내다 돌아감에 따라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군공(軍功)이 컸던 왕제(王弟) 건무(建武)가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연가의 의미에 해당하는 연호 사용은 상상하기 어렵다.

따라서 연가는 안원왕 때에 사용되던 연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이를 더욱 뒷받침해 주는 것은 명문(銘文)의 서체(書體)가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 500∼515년) 때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 ‘양대안위효문황제조상기(楊大眼爲孝文皇帝造像記)’의 정서체(正書體)와 방불하여, ‘려(麗)’자 같은 것은 거의 모든 특징이 한 솜씨인 듯 닮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이 불입상을 539년작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조상양식(造像樣式)이다. 우선 불상의 자태를 결정지어주는 의복 처리가 북위 효문제(孝文帝: 471∼499년) 초에 완성된 포복식 불의(袍服式佛衣)의 형태인데, 이 양식의 소형 금동불이 출현하는 것은 효문제 말년인 태화(太和) 17년(493)경 부터다. 그래서 다음 선무제 말년경부터는 이런 양식이 점차 주도권을 잡아 나가다가 효명제(孝明帝; 516∼528년) 중기인 정광(定光; 520∼524년) 연간에 이르러서야 그 발전이 절정에 다다른다.

(도판 9)이 이런 양식적 특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차면 넘치는 문화전파 속성 때문에 이 어름에 고구려에도 이런 양식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연가7년명불입상〉이 그 가능성을 현실로 증명해 준 것이다.

불의(佛衣)의 형태뿐만 아니라 갸름하고 윤곽이 분명하여 귀티나는 용모에 긴 목과 차분한 어깨로 청수(淸秀)한 기품과 총명 온후한 성정을 표출시키는 조형의장까지도 이 시기의 북위 금동불과 연계되는 느낌이어서 동시대양식(同時代樣式)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해준다. 여기에 단정하게 층층이 둘러 올라간 나발(螺髮)의 표현과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펴고 왼손을 허리 근처에 올려 펴되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구부려 펴지 않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특징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다만 표현방법에 있어서 단순(單純) 소박(素朴)이라는 우리 고유 미감을 고수함으로써 북위불에 비하여 천진무구성(天眞無垢性)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이 불입상은 양식적으로 6세기 전반기에 북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확산 현상을 일으켜 가던 국제양식에 속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니, 역시 539년 설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2/3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목록 닫기

신라 선덕여왕은 미륵보살의 화신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