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프리첼 방명록에 오른 한 새색시의 사이버 신세 한탄이다. 벤처기업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남편은 지난해 10월 신혼살림을 차린 이후 집에 들어온 날이 손에 꼽을 정도다. 1월1일로 예정된 인터넷 서비스 개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밤샘작업을 밥 먹듯했기 때문이다.
벤처기업 직원들의 사정은 대개 그렇다. 평균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이들은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처리해야 할 만큼 노동강도가 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퇴근 자유제가 된 것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다 그대로 쓰러져 사무실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많은 벤처기업들이 지난해에 창업했기 때문에 지금 한창 인터넷 서비스를 개발 중이거나, 서비스를 개시했다고 해도 아직은 씨를 뿌리는 과정이라 하루를 한 달처럼 보내야 한다.
이들이 멀쩡한 대기업을 박차고 나가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탁!’하고 사표 던지고 나갔다가 어느 새 ‘억!’을 주물러대고 있는 ‘마이더스’들을 보면서 인생관이 송두리째 바뀌었기 때문이다. ‘골드 러시’로 비유되는 대기업 샐러리맨들의 벤처 행렬은 스톡옵션이라는 오아시스를 향하고 있다. 그들은 제2의 야후, 제2의 새롬을 꿈꾸며 오늘의 힘겨운 노고를 기꺼이 감수한다.
H건설 K대리(33)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요즘 벤처기업가들은 스스로를 베팅해 수백억원을 거머쥔 도박꾼들이다”며 “허구한 날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그들의 ‘성공신화’를 접하다 보니 회사 다니기가 싫어졌다”고 한다.
“과장, 부장들을 보면 5년, 10년 뒤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심란해요. 앞날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만한 규모의 대기업에서 개인의 꿈을 펼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만 주물러본 내가 벤처기업을 차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제서야 진로를 잘못 설정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막심하죠. 그나마 주식 투자를 낙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도 제대로 하려면 작정을 하고 매달려야 해요. 비전 안 보이는 회사일랑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사이버 주식투자나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S전자 P주임(34)은 “우리 회사는 IMF체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순이익을 냈다. 하루 100억원 넘게 이익을 내고 있는데도 직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오히려 과장급의 경우 연봉제 실시 이전보다 연수입이 400만원이나 줄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요즘 회사 전체로 봤을 때 하루 평균 2명 이상 사표를 낸다고 들었다. 회사에서 말로는 ‘벤처기업으로의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인센티브 제도를 활성화하겠다’고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일 뿐 실질적인 혜택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코스닥에 투자한 돈이 좀 불어나 당장 호구지책만 마련되면 미련없이 회사를 뜨겠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업이 신입사원 들어오면 적성 보고 배치합니까? 가라는 부서에 가서 그 부서 돌아가는 대로 나를 억지로 맞춘 것이지, 내 꿈에 날 맞춘 것이 아니잖아요. 벤처기업으로 옮긴 사람들 보면 돈도 돈이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솔직히 가장 부러워요.”
노는 것처럼 일한다
요즘 대기업 샐러리맨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가 ‘3S’라고 한다. ‘스톡(주식)’, ‘새롬’, 그리고 ‘스타크래프트’가 그것이다. ‘새롬’은 성공한 벤처기업의 대명사. 샐러리맨들은 사무실이나 PC방에서 주가 조회를 하거나 스타크래프트 대결을 펼치면서 “우리도 창업해서 새롬처럼 뜨자”고 호기롭게 외친다.
헤드 헌팅 업체 드림서치의 유현주씨는 “한 달에 평균 15명 정도의 대기업 사원이 구직 의뢰를 하는데, 이 가운데 10명은 다른 대기업이 아닌 벤처기업을 희망한다”고 귀띔한다. 그는 “승승장구하던 간부들이 하루 아침에 ‘팽’당하는 것을 지켜본 유능한 대기업 엘리트들이 더 이상 회사에 충성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벤처기업의 경우 자신의 아이디어를 회사 경영에 반영해 커리어에 대한 전문성을 높이면서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므로 벤처기업을 향한 이들의 대이동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대기업에서 벤처기업으로 옮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필요한 게 돈뿐이었다면 이런 모험을 하지 않았다. 대기업은 봉급도 많고 복리후생도 잘 되어 있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준다. 다만 더 나이 들기 전에 그간 잊고 지냈던 꿈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실패하고 깨지는 것은 나중 일이고 일단 덤벼들고 보기로 했다”고 한다.
재벌그룹 계열 정보통신 기업에서 인터넷 벤처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S씨(32)는 “이곳으로 직장을 옮긴 뒤부터 ‘회사 가기 싫다’는 고질적인 증세가 사라졌다”며 “무엇보다 나 자신이 회사의 종업원이 아니라 경영자의 파트너라는 의식을 갖게 된 게 가장 큰 변화였다”고 한다.
“대기업에 있을 때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은 일보다 ‘정치’나 ‘처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늘 회사 돌아가는 분위기를 살피면서 윗사람 눈치나 보고…. 같은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알력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더군요. 이런 상황에 창의성을 발휘하지도, 성취감을 얻지도 못하고 하루 하루를 때우게 될 내 미래가 한심스러웠습니다. 이에 비해 벤처기업의 조직문화는 달라요. 노는 기분으로 즐겁게 일할 수 있고, ‘기본’만 지키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고 자유롭지요.”
의사결정 과정에도 대기업에서라면 열흘은 족히 걸려야 끝날 결재가 단 하루에 처리되기 때문에 업무효율이 높다고 한다. 특히 인터넷 업계는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변해 있기 일쑤여서 결재라인을 한 다리 한 다리 올라가다 보면 뒷북 치기 십상이다.
따라서 중요한 사안을 결정할 때는 임원보다 실무자의 의견이 먼저 반영돼야 하고, 이런 분위기 때문에 대기업에 팽배한 권위주의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경영의 탄력성과 개인의 자율성이 자연스럽게 보장되는 것. 대기업의 장점은 흡수하되 벤처기업의 자율성을 제대로 발휘해야 ‘사이버 공간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다. 거대 조직의 한계 때문에 효율적인 인터넷 비즈니스를 전개하지 못하는 대기업들은 ‘가출’한 자사 출신 벤처기업가에게 수시로 자문을 구한다.
제 흥에 미쳐 날뛰는 게 벤처정신
대부분의 벤처기업엔 사장실이 따로 없다. 직원들의 옷차림도 제멋대로다. 청바지에 헐렁한 남방, 운동화 차림이 주조를 이룬다. 걸핏하면 팀별로 밥값 내기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벌어진다. 자유와 도전에서는 일하다가 슬그머니 사라진 사람들은 십중팔구 근처의 DDR(Dance Dance Revolution)실에서 신나게 발을 구르고 있다. 사무실에서든 춤판에서든 ‘제 흥에 겨워 미쳐 날뛰는’ 게 벤처정신이라는 것.
요즘 강남 유흥업소들의 최대 고객이 벤처기업 직원들이라고 한다. 벤처 주가가 수직상승하면서 ‘원님 덕에 나발 분’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긴데, 실제로 벤처기업들이 투자자와 고객을 대상으로 사업설명회 등을 자주 열면서 인근 호텔들의 매출도 크게 늘고 있다는 후문이다.
강남대로변에는 룸살롱과 단란주점, 호텔말고도 호황을 누리는 곳이 또 있다. 지하철 2호선 삼성역과 강남역 부근을 걷다 보면 미국에 본사를 둔 사무편의대행 전문점 킨코스코리아의 간판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의 단골고객 역시 벤처기업이다. 이 회사 영업팀 윤용찬씨(30)는 각 벤처기업의 동향을 누구보다 빨리 파악하고 있다. “벤처기업마다 각종 사업제안서나 바인더를 적게는 몇백 권에서 많게는 몇천 권씩 제작해 가는데, 복사된 사업설명서 한 장에도 기업의 이미지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편집이나 복사의 질에 꽤 신경을 쓰는 눈치”라고 한다.
벤처기업 직원들의 이직률은 거의 0%에 가깝다. 대기업에서 옮겨온 샐러리맨들이 주력군을 이루고 있지만, 성차별이 없는 능력 위주의 채용조건 때문에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율도 높고, 대학 졸업 후 병역의무를 대신하기 위해 특례요원으로 입사하는 경우도 있다. 대학 졸업 후 벤처기업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3년, 또는 대학원 졸업 후 5년간 병역특례요원으로 근무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병역 문제를 해결하려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것도 벤처기업 입사 경쟁률을 높이는 요인이다.
경력사원을 뽑을 때는 헤드 헌트사 등을 통해 인재를 영입하거나 학연 등의 인맥을 통한 특채 형식이 대부분. 신입사원을 모집할 때는 자사 인터넷 홈페이지에 광고를 내거나 각종 인터넷 취업 사이트에 올라 있는 사이버 이력서를 근거로 인원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채용한다.
채용기준도 파격적이다. 자유와 도전 전제완 사장은 “10분짜리 면접으로 어떻게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하고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단란주점에서 최소한 6시간 이상 ‘소폭’(소주와 위스키를 섞은 폭탄주)을 돌려보고 ‘괜찮다’는 판단이 서면 그 자리에서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통보한다.
벤처기업을 ‘자전거 갈아타기’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페달을 쉬지 않고 밟으며 달려가야 하는 것은 물론, 성장 단계마다 낡은 자전거를 버리고 새로운 자전거로 갈아타야 정보통신혁명시대에 생존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오늘 벤처기업의 핵을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출발단계에서 이미 대기업이라는 크고 편안한 자전거를 과감하게 내던지고 ‘세발자전거’로 갈아탔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이들이 대기업의 경영노하우와 벤처기업의 자율성을 효율적으로 조화시킨다면 사이버 공간의 글로벌 경영자로 군림할 날이 그리 먼 미래의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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