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영어 찬미자들에게 엄중경고함 !

  • 정시호 경북대 교수·독어학

    입력2006-11-06 15:2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1.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지금은 영어를 하지 못하면 개인 차원에서나 국가 차원에서도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다. 한 가지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영어를 못해서 31년 동안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야 했던 한 중국인 이민자의 얘기다. 데이빗 톰이 1952년 미국에 건너왔을 때,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영어라고는 “Me no crazy. This nuthou- se(나는 미치지 않았어. 여긴 정신병원이야)”뿐이었다. 1979년에 어떤 사회봉사원이 정신병원에 있던 그를 데리고 중국식당에 갔을 때 데이빗은 중국인 요리사와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이때 비로소 그가 정상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서툰 영어 때문에 정신분열환자로 오진받았던 것이다. 4년간의 법정싸움 끝에 풀려난 그는 20만5000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것은 ‘타임’지가 보도한 대로 비극이었다.

    2년 전 문단의 중진인 복거일씨는 우리의 민족어인 한국어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열린 민족주의’에 입각해서 영어를 우리 공용어로 하자고 주장해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이어서 ‘신동아’ 2000년 3월호에 기고한 ‘소위 민족주의자들이여! 당신네 자식이 선택하게 하라’는 글에서 영어공용화론을 좀더 분명하게 주장했다.

    때마침 일본에서도 영어공용화론이 대두하면서 그의 주장은 힘을 얻고 있는 듯하다. 일본에서도 지금 영어공용화에 대한 찬·반 논의가 한창이다. 이번에 제기된 영어공용화론은 메이지유신 때 문부성 장관을 지냈던 모리 아리노리,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오자키 유키오 의원이 영어를 일본 국어로 채용하자고 주장한 이래 세 번째 나온 시도다. 당시 문단의 원로인 시가 나오야는 프랑스어를 일본 국어로 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번에 나온 영어공용화 논의는 1, 2차 때보다 강도가 약하다는 것이다. 이번 논의는 소위 ‘바이링구알(bilingual) 개조론’으로 영어를 제2 공용어로 하자는 것이며, 일본어를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국에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일본처럼 두 언어를 병용하자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복거일씨의 주장이다. 어쨌든 필자가 보기에 일본인과 한국인만큼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국민도 없을 것 같다. 단일 민족, 단일 언어 국가이면서 영어공용화론이 제기된 나라는 한국과 일본말고 현재 지구상에는 없다.

    그런데 모국어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야 할 작가가 이런 주장을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기야 지구화 시대인 오늘날, 헤르더가 말한 것처럼 “참다운 시인은 모국어로 시를 써야 한다”는 명제는 시대착오라고 할 수도 있다. 가령 체코 출신인 밀란 쿤데라, 불가리아 태생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보라. 그들은 각각 자기 모국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작가 활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조지프 콘래드, 블라드미르 나브코프도 영어로 작품을 써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쿤데라는 “문학이 바로 나의 조국”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문학을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복거일씨와 같은 작가가 모국어를 버린다고 해서 그를 비난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마지막 수업’을 쓴 알퐁스 도데는 프랑스어의 지배를 찬양하는 제국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배경이 된 시절의 알자스인에게 모국어는 프랑스어가 아니라 알자스어였고, 프랑스어는 그들에게 한갓 외국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프랑스 정부는 알자스어 교육을 엄금하고 있었다. 아멜 선생이 학생들에게 “프랑스 알자스”라고 써보인 것은 일제시대의 우리 나라 교실에서 일본어로 “일본 조선”이라고 썼을 것에 비유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멜 선생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지배적 언어였던 프랑스어 대신에 알자스 지역에서만 통하는 방언이었던 알자스어를 배워서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따라서 알자스인으로 추정되는 아멜 선생은 민족의 배신자가 아니라 참다운 제자 사랑을 실천한 교육자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필자의 짐작에 복거일씨의 주장은 아멜 선생처럼 현실론 위에 서 있다고 생각된다. 장래를 위해서, 후손을 위해서 영어를 아예 우리 모국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가 나오야가 말한 것처럼 모국어와 이별한다는 것은 지금 당장은 쓰라린 일이지만 ‘큰 마음 먹고’ 후손을 위해 한국어를 버리자는 것이다. 복씨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① 미국은 세계화의 주역이며 영어는 국제어다.

    ② 우리는 영어 구사력의 부족으로 큰 손해를 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어를 습득해야 한다.

    ③ 단 하나의 대책은 모국어인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우리말로 삼는 것이다. 이 길만이 영어를 완벽하게 습득할 수 있는 길이다.

    ④ 영어가 공용화하면 우리 문화를 알리고 발전시키는 데 더욱 유리할 것이다. 우리말이 ‘박물관 언어’가 되더라도 이 ‘죽은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을 터이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⑤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에게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리고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과 사람들의 언어구사 능력은 특정 언어에 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특정 언어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것은 어떤 명분과 이름으로 치장하더라도 비합리적이다.

    ⑥ 영어가 우리 모국어가 되면, 우리는 세계시민으로서 정체성을 갖게 된다.

    한마디로 그의 견해는 언어도구설, 탈민족·탈국가주의라는 이상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2.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모국어 포기론의 핵심 근거는, 언어라는 것은 우리가 못을 박을 때 쓰는 망치와 같은 도구에 불과한 것이니 경우에 따라서, 가령 큰 못을 박을 때는 큰 망치를 쓰는 것이 효율적인 것처럼 얼마든지 바꿔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의는 언어의 의미를 거세한 채 통사구조, 음운구조만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고자 했던 구조주의적 언어관에 입각한 것이다.

    이러한 언어관은 일견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복거일씨의 견해는 언어 기능의 일면만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헤르더, 훔볼트, 사피어-워프의 언어상대성 원리를 장황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70년대에 두 차례나 벌였던 논의의 결과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결정한다”는 이른바 ‘강한 가설’은 전폭적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지만 “언어와 우리의 정신구조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약한 가설’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영국의 언어학자 M.A.K. 핼리데이는 사회와 언어 간의 상관관계를 전제해서, 사회생활이 언어형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형식이 사회의 실제를 창조하거나 구성하며, 경우에 따라 언어가 우리의 세계관을 왜곡·굴절시키면서 우리의 생활 형식를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는 일종의 ‘음모설’을 제기하면서 그 예로 ‘성장주의’를 들고 있다. 성장주의는, 우리의 언어가 공기·석탄·석유와 같은 물질을 ‘비가산적(uncountable)’인 것으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무의식 속에 이런 자원은 무한한 것으로 각인·패턴화해 있고, 이것이 바로 자원남용, 환경파괴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훔볼트적 명제는 몇몇 철학자들에 의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보았으며,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바로 세계를 가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논고 5·6’에서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명제를 정립하고 있다. 푸코는 또 ‘말과 사물’에서 “언어라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매개수단이 아니라 경험을 교환하고 실제를 묘사하며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숨어 있는 주관적 힘으로서 (…) 우리가 한 마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지배해서 무력하게 만든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라캉 역시 “주체는 언어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언어를 통해 세계를 전유한다. 프로이트적 조망에 의하면 인간은 언어에 포박된, 그리고 언어로 고문당하는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 중독효과를 갖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말인 것이다. 말하는 주체는 언어에 의해서 독을 입는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언어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비계가 된다. 이것이 바로 하버마스, 뮐러 등의 언어지배 이론이다.

    이런 견해들은 모두 언어와 사고구조 사이의 밀접한 상관성을 전제하는 훔볼트적 명제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가 여러 학자들의 말을 예로 든 것은, 적어도 모국어라는 것은 간단히 갈아치울 수 있는 ‘도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모국어가 가진 힘이라는 것은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 언어공동체가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주위 환경이라는 세계는 원래 무의식적, 카오스 상태다. 이러한 세계는 언어의 힘에 의해서 어화(語化)해야 비로소 우리가 접근할 수 있다. 어화란 바로 범주화를 의미하며, 이로써 인간 사유가 가능하다. 이런 과정은 모국어마다 다르게 진행된다. 별을 보라. 북두칠성이니 오리온 성좌라는 언어에 의해 범주화됨으로써 우리의 의식구조에 들어오는 것이다.

    모국어에는 특정 언어공동체, 즉 그 민족의 정서와 혼이 배어 있고, 독자적인 세계관이 깃들여 있다. 그래서 흔히 모국어는 민족정신이요, 민족혼 또는 국민성의 구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민족어가 그 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체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며 모국어는 모국 혼(魂)”이라는 말을 남겼다. 체코어를 버린 밀란 쿤데라도 자신의 정신 속에 녹아 있는 모국어의 특성을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모국어를 쉽사리 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일제시대의 어떤 작가처럼 우리말을 버리고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할 수도 있으며, 조국을 떠나 이민을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한국어를 버려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거일씨는 그야말로 ‘합리적으로’ 모국어라는 우상을 버려야 하는 이유로 ▲ 정보전달 수단과 망(network) ▲ 영어가 국제어라는 사실 ▲ 앞으로 대부분의 민족어는 소멸된다는 확신 ▲ 언어학습과 대뇌생리적 기능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필자가 보기에 영어교육 강화의 명분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한국어를 포기하는 명분은 될 수 없다.

    복씨는 대부분 민족어는 ‘박물관 언어’가 될 것이므로 우리가 선수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현재 영어의 침투에 거국적으로 대항하고 있는 국가는 프랑스밖에 없으며 그나마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가 비즈니스 면에서 영어를 용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건 아전인수격인 과장일 뿐이다.

    프랑스는 현재 영어식 프랑스어인 ‘프랑글레’의 사용을 억제하는 데에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 게다가 프랑스는 최근 다시 ‘영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특히 인터넷에서 영어를 추방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프랑스의 경제·재무부는 지난해 7개의 위원회를 구성해 영어로 된 컴퓨터 용어를 프랑스어로 대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예컨대 컴퓨터는 ‘오디나튀르’ 전자메일은 ‘쿠리에 엘렉트로니크’ 등으로 부르고 있다. 또 ‘프랑스어 방어협회’도 조직돼 있다.

    앞으로 100년 후에는 영어, 스페인어 및 중국어만 살아 남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문자 그대로 예측에 불과하며, 학자에 따라서 견해가 다르다. 가령 데이빗 그랏돌의 저서 ‘영어의 미래?’에는 2050년경에 세계 언어계층의 최상층부는 대언어인 중국어, 힌디/우르두어, 영어, 스페인어, 아라비아어 등 5∼6개 언어로 구성되고, 그 다음 계층인 광역언어(주요 무역언어)에는 아라비아어, 마레어, 중국어, 영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그 다음 계층인 국가언어에는 220개 이상 민족국가의 약 90개 언어가 들어간다. 그리고 나머지 750여개 언어가 최하 계층인 지역언어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측은 무역·경제 영역에 국한된 것으로 언어가 가진 문화적 측면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지식·문화적 영역에서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및 일본어가 계속 우위를 지켜 나갈 것이다. 한편 뮌헨대학 교수 게르트 라아이텔은 “영어의 지배력은 당분간 계속되겠지만 지역언어 역시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는 홍콩의 스타 TV가 중국어, 힌디어 등 다른 아시아어로 방송을 하고 있으며, CNN 역시 남미에서 스페인어로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예로 들고 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언어전쟁을 볼 때, 민족어는 좀체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벨기에의 언어 갈등을 들 수 있다. 북서쪽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랑드르인과 남동쪽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론인 사이의 끈질긴 언어갈등은 벨기에에 ‘언어전쟁으로 날이 새고 지는 나라’라는 별칭을 안겨 주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대회에 참가한 벨기에 대표팀 선수 가운데 네덜란드어권 선수들과 프랑스어권 선수들은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벨기에의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와 동쪽 지역의 7만여명에 달하는 독일어 사용 주민을 위해서 독일어의 세 가지로 돼 있다. 그러나 이렇듯 끝없는 싸움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주장하고 나선 사람은 이제껏 없다.

    유고분쟁의 근저에도 언어 갈등이 깔려 있다. 모국어인 코소보·알바니아어를 지키려다가 50여명의 교사들이 코소보사태 와중에 처형된 일도 있었다. 구소련 붕괴 이후 벨로루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및 리투아니아 등 발틱 3국은 모두 러시아어를 버리고 자기네 모국어를 국가 공용어로 지정했다. 바스크어를 내세우며 끊임없이 분리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바스크인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모두 세계화시대의 시대착오적이고 비합리적인 민족주의자들일 뿐인가?

    한편 한국·일본과 더불어 영어를 기꺼이 받아들이던 독일에서도 역시 독일어를 지키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은 히틀러의 나치정권 이래로 심지어 독일 외교관들조차 조심스러워 하던 일이다. 그렇게 지나치게 침식당해온 독일어를 보호하기 위해 ‘독일어를 지키는 모임’이 결성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50년이 지난 1997년 11월이었다. 지나친 영어화를 막고 독일어를 지키자는 운동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1999년 7월에는 유럽공업장관회의에서 독일어 사용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핀란드에 대해서 독일의 슈뢰더 정권은 이례적으로 강경하게 맞섰다.

    필자가 이런 갖가지 예를 드는 이유는 복거일씨 주장처럼 민족어가 쉽사리 ‘박물관 언어’로 퇴화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더욱이 100년 후에 대한 불확실한 추산이 어찌 우리말을 포기하는 명분이 될 수 있겠는가? 이웃 일본만 해도 그렇다. 일본은 한편에서는 영어 공용화를 논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신자에서 발신자로’라는 슬로건하에 일본어를 확장시킨다는 세계전략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대만, 동남아, 호주 등에서 이 전략은 크게 성공하고 있다.

    4. 인터넷은 세계의 지역화에 기여한다

    민족어 소멸의 논거로 위성방송이나 인터넷이 주로 영어로만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금과옥조처럼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인터넷이나 위성방송은 오히려 다문화, 다언어주의에 활기를 불어넣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TV 위성방송이 영어를 기본으로 하는 오디오·비주얼 문화를 가져온다는 말은 기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CBS는 브라질 시청자들을 위해 포르투갈어 방송을 예정하고 있다. 홍콩의 스타 TV나 CNN 국제방송 등은 지역 시청자를 위해서 영어 이외의 방송을 시작하고 있다. CNN은 남미 지역을 향해서 24시간 스페인어 뉴스를 내보내고 있고, 힌디어 방송도 계획중이라고 한다.

    스타 TV 역시 표준 중국어와 힌디어로 방송하고 있다. 이런 일은 마치 ‘뉴스위크’지 한국어판이 나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영어 이외의 언어들은 그 세력 범위를 확대하게 되고, 주요 방송들은 방송 서비스를 지역화해 나간다.

    이러한 ‘지역화(localization)’는 세계 기업에 근무하는 마케팅 담당 매니저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마케팅에서 지역의 문화, 언어, 사회적 가치관 등에 적응하는 것은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한 그랏돌의 말을 인용해보자.

    “영어 이외의 언어에 의한 인터넷 소재는 앞으로 10년간 극적으로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영어는 당분간 탁월한 지위를 유지하겠지만, 결국은 수많은 언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영어가 인터넷 전용 언어라는 생각은 오해일 뿐이다. (…) 인터넷에 의한 지역적 커뮤니케이션 역시 크게 증가할 것이 예상된다. 여기에 사회나 가정에서 전자우편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앞으로는 사용 언어의 다양화가 진행될 것이다. 1990년대에는 컴퓨터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경우 영어가 80%를 점했다고 하지만 이 비율은 다음 10년 동안 40%까지 떨어질 것이다.”

    복거일씨는 민족어 포기의 명분으로 유대 민족의 역사적 경험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견강부회, 아전인수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유대인들은 기원전 70년경 로마인들의 침략을 받고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 전에 이미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버렸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의 모국어를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라 정착한 지역의 언어를 토대로 해서 그것을 유대풍으로 변형해서 그들 고유의 언어를 창조해냈다. 유대인은 원래 언어와 언어학에 천재성을 가진 민족이다. 일례로 현대 언어학의 별들인 로만 야콥슨, 앙드레 마르티네, 노엄 촘스키, 차멘호프 등이 모두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이 창조한 유대어의 특징은 ① 토대 언어의 고형(古形)을 보존하고 있다 ② 히브리어·아람어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③ 히브리어 문자를 쓴다는 등이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을 가진 유대어는 다시 페르시아어를 기초로 한 유대·페르시아어, 아라비아어를 기초로 한 유대·아라비아어, 스페인어를 기초로 한 유대·스페인어, 독일어를 기초로 한 이디시어 등 10개가 넘는 ‘유대 민족어’로 갈라졌다.

    이중 가장 중요한 유대 민족어는 중세 이후 유럽 전역에서 사용하던 이디시어다. 이디시어는 지금도 1100만명 정도가 사용하고 있으며, 197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이작 배시비스 싱어는 이디시어로 작품을 남겼다. 이렇게 볼 때 중세 이후 유대 민족과 유대 문화를 대표한 것은 이디시어였다.

    그런데 이디시어는 ‘어머니의 언어’다. 왜냐하면 이디시어는 유대인 어머니들에 의해서 유대인의 말이 되었고, 어머니들에게는 히브리어로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어디에서 살든지 그들의 성전(聖典)을 배우고, 이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끈처럼 연대를 이뤘다. 그들에게는 민족 형성의 한 가지 조건인 공동생활 지역, 즉 영토가 없었지만, 이 성전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성전과 일체가 되어 유대인을 결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전에 쓰인 언어인 히브리어를 성스럽게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일상생활에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일상생활에 히브리어를 사용하면 오염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는 이렇게 해서 학문과 성전의 언어로 수천년간 전승됐다.

    시오니스트들은 이 성스러운 히브리어를 ‘유대 민족의 유일한 민족어’로 내세움으로써 이디시어파(派)와 대립한다. 그러다가 1908년 8월30일∼9월4일까지 열린 체르노빌 회의에서 이디시어는 ‘유대 민족어 중 하나’로 인정받아 정치적·문화적 지위를 높였다. 중세 이후 이디시어가 유대인의 실제적인 민족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의 고유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성스러운 히브리어였다. 시오니스트들은 히브리어 부활운동을 전개해 이디시어파를 누르고 독립 후 이스라엘의 국가 공용어로 히브리어를 내세웠다. 이로써 시오니스트들은 “언어는 곧 민족이요, 민족은 곧 언어”라는 명제를 실현했고, 히브리어를 부활시킴으로써 유대인의 존재를 만방에 천명한 것이다. 이때 세계 각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끼리 의사소통이 불편했지만 그들은 ‘합리적으로’ 영어를 공용어로 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유대인들은 쉽사리 그들의 언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를 채택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히브리어를 중심으로 몇몇 유대 민족어를 수천년동안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5000년간 하나의 언어를 지키고 있는 우리와 비교해볼 때 그들이 뚜렷한 단일 민족어를 갖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어(文語)로만 전해지고 ‘현대어로선 적절하지 못한 언어’였던 히브리어를 공용어로 부활시켰다.

    이렇게 볼 때, 5000년간 모국어와 국토를 지켜온 우리에게 ‘모국어 포기론’의 근거로 유대인을 사례로 드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2000년 후 히브리어를 국가 공용어로 결정한 것은 민족주의 구현의 생생한 예가 될 수 있다.

    6. 성인도 영어를 정복할 수 있다

    영어공용화론자 내지 조기 교육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명제가 성인이 되면 외국어 학습이 불가능 내지 효과가 없다는 점이다. 이런 예는 우리 주위에서 숱하게 볼 수 있으며, 그러니까 아예 한국어를 버리고 한국이 미국이 돼야 미국인과 똑같이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10대 사춘기를 보내고 미국으로 이민온 헨리 키신저 박사는 일생 동안 자신의 영어에 독일식 악센트가 남아 있었지만, 사춘기 이전에 미국에 온 그의 동생은 완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한다. 또 랜덤사가 선정한 100대 영문작품에 상위로 선정된 콘라드나 나보코프는 발음이 나빠서 일생 동안 즉석 인터뷰를 사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기 외국어 교육, 두 언어교육 등에 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워싱턴 DC를 흐르는 포토맥 강 맞은편에 미 국무성 소속인 ‘외무연수원(Foreign Service Institute·FSI)이 있다. 여기서는 주로 미국의 외교관들을 위해 60개에 달하는 언어학습이 실시되고 있는데, 이른바 집중식 교수법에 의거해 가르친다. 기초 코스는 6주이며 언어에 능숙해지려면 24주가 최저 훈련기간이다. 외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레벨 0에서 현지인 수준인 레벨 5까지 설정돼 있다. 이 곳의 연수생은 외교관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수준인 레벨 3을 목표로 한다.

    이 기관에선 세계 60개 언어를 난이도에 따라서 네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미국 외교관들에게 가장 어려운 언어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아라비아어다. 반면에 그들에게 가장 쉬운 언어는 독일어·프랑스어 등이다.

    이 기관의 어학연수 결과를 조사한 1999년 잭슨·캐프란의 보고는 10가지 결론을 내놓고 있다.

    첫째 결론은 성인들도 집중학습에 의해서 네이티브 수준의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연수원의 일반적인 목표는 레벨 3인, 직업상 필요한 외국어 숙달이다. 이는 충분한 어휘로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특별한 영역에서 정확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학습한 외국어로 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연수생들의 평균 나이는 41세인데, 갖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대체로 3분의 2 정도의 학생이 이 목표를 달성하거나 능가하며, 거의 모든 학생들이 이 목표에 근접했다고 보고한다.

    단기적인 기억력은 학생의 나이에 반비례해서 떨어지지만, 이 연수원의 학생들은 이것을 그 전에 축적한 경험으로 보완했으며, 이것이 언어학습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어린이보다 성인이 오히려 더 빨리, 더 쉽게 외국어를 학습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인 참여자들은 악센트나 발음에서 본토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본토인 수준의 음운론적 완벽성은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 6세 이전, 형태론과 통사론에서의 완벽성은 15세 이전에나 기대할 수 있다고 언어학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이 연수원에서는 본토인 수준의 악센트를 레벨 3 달성의 실제적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많은 영어 교육자들은 ‘본토인 수준의 언어능력’ 획득이나 ‘모국어만을 말할 수 있는 본토인’처럼 완벽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외국어 학습의 목표로 삼는 것은 큰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외교관을 위한 이 연수원에서는 외국어를 ‘본토인처럼’ 하는 것보다 실용적인 차원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유명 인사들을 보라. 올림픽 위원장인 사마란치나 지금은 물러난 국제통화기금의 캉드쉬의 영어 악센트는 각각 스페인식, 프랑스식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어를 비웃는 사람은 없다. 국제통화기금에 근무하는 어느 인사에 따르면, 캉드쉬는 적재적소에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는 훌륭한 영어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려는 것은 이중언어 교육, 조기외국어 교육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얼마든지 영어를 정복할 수 있으며 반드시 본토인처럼 영어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복거일씨도 지적했듯이 앞으로 ‘콩글리시’를 비롯한 지역 영어도 인정하려는 추세도 있는데, 그렇다면 더더욱 영어전용 국가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통역·번역의 한계는 누구나 인정한다. 앞에 언급했듯이 각 언어에는 그 언어의 독자적 세계관이 담겨 있기 때문이고,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통역·번역은 영어를 배우는 것에 대해 충분한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재 유럽연합이 역내 11개 언어를 상호 통역해 가면서도 별무리 없이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럽연합 국가들은 상호이해를 증진하기 위해서 복수 외국어교육을 지향하고 있지만, 지금 별문제 없이 각종 국제회의를 처리하고 있다.

    지금은 물러났지만 18년간 장수하면서 독일 통일을 이끌었던 헬무트 콜 전 총리는 영어나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며, 현재 유럽집행회의 의장인 이탈리아인 브로디는 대부분 공식석상에서 이탈리아어를 사용한다.

    7. 영어공용화의 문제점

    복거일씨가 제시하는 영어공용화는 두 단계로 시행된다. 당분간은 두 언어 병용으로, 그 다음은 영어를 단 하나의 국가 언어로 삼자는 것이다. 복거일씨는 그 이점으로 첫째 “영어를 공용어로 삼으면 시민들은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환경에서 쉽고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게 될 것”이고, 둘째 “우리 전통과 문화가 해를 입으리라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것이 후손들에 의해 영어로 구체화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것이며 (…) 통합된 인류문명을 다듬어 나가는 데 정당한 우리 몫을 할 것이다. 한국어는 ‘박물관 언어’가 되어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견해는 지나친 낙관과 희망인 듯하다. 마치 프랑스어를 일본의 국어로 하자고 주장했던 시가 나오야가 “60년 전에 영어를 일본 국어로 했더라면 ‘만요슈(萬葉集)’나 ‘겐지모노가다리(源氏物語)’가 더 많이 읽혔을 텐데”라고 한 말을 떠오르게 하는 말이다.

    한국어가 ‘죽은 언어’가 된 뒤에(이때는 적어도 10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극소수의 언어학자 이외에 과연 몇 사람이나 우리 고전인 ‘춘향전’이나 ‘용비어천가’를 읽어보려고 할까? 복거일씨는 “한문으로 구체화된 우리 문화유산을 우리가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지금도 그런 문화유산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는 있지만 아무도 쉽게 읽지는 못한다. 하물며 100년 뒤에는 어떨 것인가.

    또 과도기적으로 한국어와 영어를 병용하는 기간을 생각해보자. 이때에는 모든 공문서, 재판기록, 선거벽보, 각종 교과서, 관광안내서 등에 두 가지 언어를 써야 한다. 예컨대 현재 무주구천동의 안내 간판은 전부 한자로, 토씨만 한글로 한자 밑에 조그맣게 붙어 있다. 자, 이 안내 간판의 어디에다 영어를 써넣어야 할까? 영어 안내 간판을 별도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스위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등 다언어 국가에서는 부득불 그렇게 하고 있다. 그 불편함과 비용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불편은 100년 후, 영어가 완전히 우리 모국어(?)가 되면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정체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있을까?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문화, 혼이 담겨 있는 그릇이라면, 한국어가 사라지면서 우리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한국문학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속문주의(屬文主義)’에 따라서 한국 영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어 공용어화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복거일씨가 말하는 바 ‘의무의 동심원들’인 500만 해외 동포와 북한 동포들이다. 우리만 영어를 공용어화해 놓고서 그들 보고 따라 오라고 하겠다는 말인가? 이른바 흡수통일을 할 터이니 북한 동포들도 그때에는 영어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북한에서도 영어교육을 하고 있지만 영어공용화는 아마 꿈도 꾸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영어 공용어화를 강행한다면, 이건 남북통일을 영영 포기하자는 말과 같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는, 영어를 잘 하는 지배계급과 영어를 못 하는 피지배계급의 갈등이다. 일제시대 지배계층은 일본어를 잘하는 집단이었다. 영어를 공용화해서 한 세대만 지나면 전부 영어를 잘하게 되어서 이런 갈등은 없어질 것이라는 복거일씨의 주장은 그야말로 몽환적인 ‘멋진 신세계’에 불과한 말이다.

    논평가 고종석씨의 말마따나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 삼국시대를 생각해 보라. 관창은 신라를 위해서, 계백은 백제를 위해 싸웠지만, 우리가 모두 한국인인 오늘날 그게 무슨 뜻이 있겠는가.

    그러나 복거일, 고종석씨 등의 견해는 지극히 이상주의적이다. 아무리 탈민족·탈국가 시대라고들 하지만 아직은 민족주의가 여전히 살아 있다. 단일 유럽을 이끌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의 자국 이익을 위한 갈등을 보라. 유럽연합 총재 자리를 놓고서 시라크와 콜은 무려 11시간 동안 싸웠다. 유럽연합에서 사용하는 근무어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영국과 프랑스였다. 필자가 미국 여행중 기억에 남는 것은 시골 마을마다 퇴역 군인의 집 앞에 게양돼 있던 성조기였다. 민족주의, 국가주의는 아직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고, 앞으로도 한참 동안 그럴 것이다.

    8. 다언어·다문화주의 또한 대세다

    이제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현재 ‘잉글리시 온리(English Only)’ 정책과 ‘잉글리시 플러스(English Plus)’ 정책이 소리없이, 그러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이 바로 유럽연합이다. 바꾸어 말하면 단언어주의와 다언어주의, 단문화주의와 다문화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유럽은 유로화 탄생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이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현재 유럽연합이 당면한 문제는 공식회의에서는 11개국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동시통역 및 번역비용이 막대하다는 점이다. 브뤼셀의 유럽위원회 산하 및 룩셈부르크 유럽의회 산하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동시통역, 번역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1988년 기준으로 10억 마르크로 유럽연합 총지출의 무려 3분의 1에 해당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유럽 공용어 제정을 구상하고 있지만, 여기에 많은 갈등을 빚고 있다. 어느 나라도 자기 모국어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럽의 언어학자들은 여러 가지 제안을 한다. 영어를 유럽연합의 ‘링구아 프랑카(공용어)’로 하자는 안도 있었지만 “유럽에서는 어떤 한 언어에 의해서 지배되는 계층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에 위배되므로 아예 논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라틴어 또는 에스페란토어로 하자는 안도 있었으나 현실성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에게는 독일어·프랑스어 등 2개 외국어 학습을 권고하고, 비영어권 사람들을 위해서는 다음 안이 논의되고 있다.

    ▲북유럽:모국어+영어+독일어/러시아어/프랑스어/폴란드어/기타(여기서 /는 ‘혹은’의 의미임)

    ▲남유럽:모국어+영어+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기타 이러한 언어문제를 교육차원에서 해소하기 위해서 1995년 3월31일 유럽연합 각료이사회는 ‘EU의 교육 시스템에서의 언어교육과 언어습득의 개선과 다양화 정책’을 채택했다.

    또한 1996년 유럽위원회는 다언어주의 교육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교육과 인재육성에 관한 백서’를 발표해서 “젊은 세대는 적어도 두 개의 외국어를 습득하도록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단계에서 적어도 하나의 외국어 교육을 시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유럽의 복수외국어 교육의 목적은 바로 유럽의 자산인 언어의 다양성, 문화의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다문화·다언어주의의 흐름은 EU 내에서 뿐만 아니라 전지구 차원에서도 볼 수 있다. 현재 세계화에 맞물려 세 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 흐름은 영어교육 강화다. 이 점에서는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도 한국에 자극을 받아 2002년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실시한다고 한다. 독일은 아직 초등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실시하지 않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본부를 둔 ‘외국어를 배우자’라는 학부모 단체에서 조기 영어교육을 외치고 있다.

    두 번째 흐름은 조기 다언어교육이다. 이것은 영어 지배로 인해 문화적 시야가 좁아지는 편식주의를 지양한다는 데에 취지를 두고 있다. 다른 언어에 접촉하기 어려웠던 문화쇄국 시대가 모국어적 세계관에 기초한 ‘점(點)의 시대’였다면, 모국어 + 한 가지 외국어에 의한 세계관 확장은 ‘선(線)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단계에서도 여전히 사시적 편견에 사로잡힐 우려가 있다. 그래서 복수의 외국어, 즉 두 가지 외국어와 모국어의 3점을 정점으로 해야만 비로소 상호 거리, 각의 관계 위치 등을 객관적으로 측정해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언어·문화 삼각측량’이며, 이로써 ‘면의 시대’가 열린다. 이 새로운 면의 시대는 유럽에서 특히 활발하게 실험되고 있다. 영어 절대주의가 파생하는 병리를 치유하는 길은 이것뿐이다.

    세 번째 흐름은 모국어를 지키자는 운동이다. 다수의 세계인이 영어가 세계어가 됐음을 인정하고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영어 지배가 강화될수록 그 반작용도 커지게 마련이다.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독일에서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일어를 지키려는 운동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UNESCO 역시 다문화·다언어주의 정책과 관련해서 일련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8년 3월30일부터 4월2일까지 개최됐던 스톡홀름 문화정책회의에서 페데리코 마요르 사무총장은 1982년 멕시코에서 채택한 문화정책의 원칙들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세계화가 문화적 단일성을 낳고 궁극적으로는 문화의 황폐화로 귀결될 수 있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문명화한 세계”라고 선언했다.

    9. 맺는 말

    이상 복거일씨의 주장에 대해서 필자가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여기서 필자는 복씨의 주장을 ‘고약한 농담’(진중권)이라거나 ‘패역(悖逆)스러운 논리’(박광민)라고 부르지는 않겠다. 그의 주장은 우리 심중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영어 콤플렉스를 사정없이 노출시킨 것이었다. 영어를 잘해야만 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고, 무한경쟁 시대에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어찌해볼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의 영어공용화 논의를 보면서 필자는 일제시대에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워야 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필자가 지금 일본어를 조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금 영어 콤플렉스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우리말을 내치고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하는가?

    영어 공용화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좀더 냉철하게 손익계산을 따져봐야 할 문제다.

    대안은 오직 하나 ‘열린 민족주의’다. 그리고 ‘열린 민족주의’의 중심에는 모국어가 살아 있어야 한다. 1998년 7월 필라델피아의 소수민족 모임에서 행한 연설에서 백악관의 안주인 힐러리 여사는 “잔인한 21세기의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영어뿐만 아니라 모국어도 능숙히 구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교육&학술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